주일설교

한윤범 목사님-예수로 말미암아(벧전4;7-11)141005

아빠와 함께 2014. 10. 8. 07:45

20141005 오전, 벧전 4장7-11절(예수로 말미암아)-한 윤범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4장 7-11절입니다. 신약성경 381페이지입니다.



베드로전서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백성들을 나그네로 만드셔서 그 나그네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바라보는 자들이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는 과정 속에서 바로 예수님만이, 자신의 고난과 관계없이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베드로전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시지요? 그 때 “세례요한입니다.” 혹은 “엘리야입니다.” 혹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거론하면서 “선지자중 한 사람이라 하더이다.”라고 예수님께 알려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그렇다면” 이라는 말은 없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베드로의 답변이 나오지요.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마가복음 8장 29절에는 아주 간결하게 나와 있어요.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마태복음(16:16)에는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길게 표현하지만 어쨌든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것이에요. 누가? 예수가.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정말로 멋진 고백을 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을 하셨어요. “그 고백은 네가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하게 하신 것이다.”라는 언질을 줬지요. 베드로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하지만 그 고백을 한 이후에 이상한 행동을 하지요. 그 사건 이후에 어떤 말들이 이어지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죽는다.”라는 선언을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계속 제자들을 끌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셨는데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질문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 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 이후에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내가 죽겠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지요.


그 때 또 베드로가 나서지요. 붙들고 말립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사탄이라는 언사, 심한 언사를 동원하시면서 책망을 하시지요. 책망을 하실 때 베드로가 ‘주님이 왜 이런 책망을 하실까?’라고 생각하고 그 연유를 따져서 묻고 그렇게 살아갔으면 되었을 텐데 베드로는 계속해서 엎어집니다.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 속에서 너무나 황홀하고 좋은 나머지 “여기서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막 9:5)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지막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붙잡혔을 때에 세 번 예수를 부인합니다. 망발과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지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과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부인의 그 칼끝은 항상 베드로에게만 향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향해 있는 거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책망하면서 칼 끝을 향했듯이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통해서 그 칼끝이 예수님의 심장을 노렸듯이 그 칼끝은 항상 우리를 노리고 있고 우리가 또 우리의 삶의 칼끝은 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서로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게임이지요. 끝이 나지 않는, 끝이 없는, 끝을 봐야 끝이 나는 게임이지만 끝을 볼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은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것이지요. 다른 것이라는 것이 복음서에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결국 그것이 한 사랑으로 합해지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랑이었던 것을,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을, 동고동락을 하고 있으면서도 길이 다르다는 것을 계속해서 베드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이죠. 이렇게 우리를 나그네로 만들어놓고 살게 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까?”라는 아우성이 나올 때까지 계속 끌고 가십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발견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를 않는 거예요. 설교 준비, 여러분,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했는지 아십니까? 주일 날 제 집에서 설교할 때 그냥 대충합니다. 한 10년, 20년 지나면 놀던 가락이 있어서 대충 합니다. 대충 해도 다 먹히고 또 다 아는 식구니까. 그리고 성경을 제가 훨씬 더 많이 보니까.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보다는. 제가 거짓말을 해도 거기 듣는 사람은 확인할 길이 없는 거예요.



동영상 촬영도 안하고 만 천하에 공개도 안 되니까 제 맘대로 막 하지요. 그런데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지금이요. 얼마나 신경이 쓰였겠어요? 지난주에 오 용익 목사님 보면서 ‘야, 다음 주엔 난데…….’ 지금 오 목사님은 편하게 계실 거예요. 부러워죽겠습니다. 주님 사랑하고 제 사랑하고 다른 거예요. 설교 준비 많이 하고 ‘아, 이 정도면 되겠지.’ 했다가도 몇 번씩 뒤집어엎습니다. 이걸 인쇄를 했더니 12포인트로 하니까 15매가 나왔어요. 너무 길다 싶어 잘랐어요. 11페이지, 12페이지쯤 되는데 지금 순서 기억 하나도 안 납니다.



생 쇼를 하면서 설교 준비를 했는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준비는 많이 했지만 결국은 뭐가 중요하냐면, 설교준비를 많이 하고 설교를 매끄럽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지요. 저도 베드로와 똑같은 거예요.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은 하는데 주를 사랑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 설교를 어떻게 하면 매끄럽게, 한 주 동안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교회 오신 분들에게 헛걸음질 한 것은 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는 부담감으로 이렇게 섰는데.



저는 누가 걷어차지 않으면 꼼짝도 안하는 그런 쪽의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제 고집대로 그냥 삽니다. 걷어차고 끌고 가면 마지못해 일어서서 호응하고 움직이고 그런 거예요. 그런 저를 끌어내서 이렇게 세운 거예요. 이랬을 때에 제가 확인한 것이 바로 그러한 모습이에요. 그동안 십년 넘게 수련회도 다니고 교제도 하고 했지요. 사람들 오랜 만에 만나게 되면 서로 잔뜩 계산들 하고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눈치싸움이 장난이 아닙니다. 오랜 만에 보거나 새로운 사람 있으면 신원조회 다 하고 신상 다 털립니다. 아니다 싶으면 그냥 까고 면박을 주고 무안을 주고 그래요.



그런 곳을 제가 10년 넘게 다 통과한 거예요.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 저 사람은 그래도 복음을 좀 아나보다.’라는 생각들을 주변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설교하라고 이렇게 서게 되면 ‘적어도 복음이 아닌 것은 전하지 말아야 지.’라는 생각을 갖고 서는 거지요, 그렇죠? 헛발질은 하지 않고……, 저는 아무런 욕심이 없어요. 저는 설교 잘하려는 생각으로 선 것이 아니고 적어도 그저 복음이 아닌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 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섰지만 이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아까 장로님도 그런 기도를 하셨지만 포장하는 기술밖에 느는 것이 없어요. 십년 넘게 십자가마을 들락거리면서 포장을 잘 한 거예요. ‘저 사람은 복음을 좀 아나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전에 목사님이 했던 그 설교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에 그런 설교를 한 기억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무조건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좋게 봐주려고 하는 거예요. ‘복음 안에서 한 성령, 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예쁘게 봐주는 거지요.



그렇지만 포장기술이 너무 좋으니까 그곳을 들키지 않고 지금까지 왔던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거 모르시겠습니까? 그것까지 아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은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제가 하는 일이, 제가 하는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그 난감함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바쯜라프 니진스키가 쓴 『영혼의 절규』라는 책의 한 구절이에요.



정말로 저는 울고 싶은 거예요. 할 수 없고, 그래서 “에이, 하지 말아야지.”라고 포기하고 제쳐두고 외면하면서 모른 척 하는데 그냥 등 떠미는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고 똑바로 답변할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들춰보고 강의를 듣고 설교를 들은 그걸 가지고 몇 마디 이야기는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조금 지나면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바탕, 그 밑천, 금방 다 드러나 버리고 말아요.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이 소용없는 순간이 시시각각 저를 덮쳐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 길래 저를 이렇게 괴롭힙니까?”라고 저는 마지못해 묻지요. 코너에 몰리다 보면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확실한 답을 들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게 직접적인 답은 안하지만 어마어마한 말씀들을 다 쏟아놓은 거예요. 다 쏟아놓고 내게 들려주셨던 거예요. 더 이상 뭘 바랍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답변이 없다고 아우성을 칠 이유를 찾을 길이 없는 거예요.



“내가 다 줬는데, 내가 다 했는데 뭘 더 바라고 있는데?”라는 뒤미침이 내게 밀려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지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달려가고 있었지요. 사도행전 9장의 사건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때 사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이지요. 이 질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물음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바울로 바뀌는 아주 결정적인 물음이에요.



사울이 그렇게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주님이 자기를 찾는 거기에 답하는 형식으로 물은 그것이 그 당시에는 ‘주’라고 불렀던 그 예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열 두 서너 개가 되는 바울서신을 쓰면서 바울을 부른, 바울보고 자기를 핍박한다고 부른 그 예수가, 자기가 무심결에 불렀던 그 주가,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던 그 주가 진짜 주였던 것을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서 다 낱낱이 기록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둔 거예요. 그 주는 그냥 주가 아닙니다. 사건을 주관하는 주고 이 말씀을 이루시는 주에요.



그래서 예수는 ‘주’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고 메시아입니다. 장로교의 가장 토대가 되는 교리가 그거예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거예요. 이게 장로교의 뼈대고 토대입니다.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그 토대를 세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지나 하면,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신앙생활 초기, 처음 신앙생활 할 때나 묻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교회 처음 등록을 하게 되면 학습이라든지 세례를 받기 위한 성경공부, 입교자나 세례자에 대한 공부나 절차가 있습니다.



대개 보면 성경공부도 하지만 교리공부를 할 때 나오는 그 내용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는 누구십니까?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이게 그들이 말하는 삼위일체잖아요. 그 다음에는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런 것들을 죽 공부들 하는 거예요. 예수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은 그 때 끝나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처럼 신앙생활 5년, 10년, 20년, 30년씩 되고 신앙의 경륜이 쌓이면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은 아주 하수의 질문이 되는 거예요.



작년인가, 제가 어떤 목사하고 대화를 하는 중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거예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이 생각하는 신앙초보자의 질문과 내용들을 그대로 이야기한 거예요. 저는 내 나름대로 복음을 전한답시고 그렇게 한 거지요.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더니 그분의 반응이 뭐냐 하면, “아, 그거는 초신자들이 하는 이야기고.” 그거에요. 그러니까 목사쯤 되는 우리들은, 우리쯤 되면 성경 가지고 토론할 때는 좀 격을 높여야 되지 않느냐, 수준을 좀 높여야 되지 않느냐,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것밖에 할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여전히 저는 주는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왜? 그 주를 저는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나는 분명히 사랑한다, 라고 했는데 내가 하는 생각과 내 하는 짓거리는 사랑하는 짓이 아니고 사랑하는 생각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사랑한다는 고백은 했는데 사랑이 나오지 않는 나로 하여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복잡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여전히 주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질문을 주가 누구시냐고 묻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묻습니까? 어떻게 물어요? 그 목사가 이야기하는 수준 있는 질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걸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교회 청년들이나 좀 비판의식이 있는 쪽에서는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주 뭐 이렇게. “사실입니까?”라고 멋진 것 같은 질문 한다고 해서 그게 수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가 누구십니까?”라는 그 질문대신에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그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어떻게 답변해야 돼요? 목사들이 어떻게 답변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는데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서 기도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성경적으로 답변했으니까 성경적이고 복음적이죠?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거잖아요. ‘아, 우리 목사가 그래도 성경을 알아서 성경적으로 답변해 주시는구나. 성경에도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니까 이것은 ‘어떻게’에 대한 답변이 왔으니까 나는 이 말씀을 지켜야 되겠구나.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은사를 받은 대로 은사를 행하라. 지혜를 받았으면 지혜롭게 해라.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병을 고쳐라.’ 이겁니다. 그렇지요?



교회에서 이렇게 ‘어떻게’에 대한 답변을 다 해주니까 성도들은 아무런 부담이 없는 거지요. 어떻게, 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서 답변을 받은 대로 살아가면 그만인 거지요. 사실, “그게 사실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을 해야 됩니까? 사실입니까, 라는 질문은 조금 다른 측면에 있어요. 근대 이후에 사람들이 깨우치기 시작하잖아요. 소위 말하는 그 주체의식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거의 천년이 넘는 암흑시대라고 하는 그 중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게 사실입니까? 신부님이 저에게 이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하십시오.’라는 그 성경말씀이, 계시의 말씀이 그게 맞습니까? 홍해가, 바다가 갈라졌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로 지나갔다고 하는데 그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맞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 전에는 그런 것을 물을 수 없었어요. 근대 이후에야 그것을 묻기 시작했어요. 소위 계몽주의 시대지요. 지식인이라는 것은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쳐주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였고. 당시에 지식인이라고 하면 주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그러한 역할도 동시에 감당을 하는 거예요. 갈수록 목사와 신부들은 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는 거지요. ‘어떻게’에 대한 질문도 답변을 해 주고 사실이냐고 묻는 자들에게도 답변을 두루두루 다 해줘야 되고. 거기서 바로 현대신학이 나온 거예요.



“사실입니까?” 하는데 서부터. 그래서 예수도 “역사적 예수” 이런 식으로 캐 들어가기 시작을 하고. 그러다보니까 성경을 사실적으로 증명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이 사실로 증명이 되고 확인이 되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땅을 파고 고고학적 발굴을 하고 자로 재고 줄로 재고 테두리를 하고. 어느 날 갑자기 헝겊쪼가리가 발견이 되었는데 혈흔 같은 것이 묻어 있다는 거예요. 무슨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을 써보니까 이게 2천년이 더 된 것 같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면 혹시 이것이 예수님의 수의의 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토리노성당에서 한 때 그렇게 난리가 났었잖아요. “이것이 예수님이 입었던 수의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과학자까지 동원을 해서. 그런 식으로 성경을 증명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렇게 증명이 되면 성경이 더 확실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믿으면 우리의 믿음이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과연 성경에 ‘어떻게’라는 그 질문과 ‘사실이냐’라는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냐고 저는 여러분에게 반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이 말씀에 합당한 질문이에요? 성경은 바로 십자가지신 그 분이 바로 ‘주’라는 것을 ‘그리스도’라는 것을 계속해서 아주 집요하게, 철저하게, 아주 끈질기게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학습을 통해서 혹은 세례를 통해서 한 번 지나가고 끝날 말씀이 아닌 거예요.



오늘 말씀 보면 과연 우리가 묻는 질문이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리가 정말 주체의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질문이냐 하는 것을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11절 말씀까지 읽었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사십시오.”라는 식의 답변형식으로, 증거 하는 형식으로 목사라든지 누가 인용해서 해줬다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면서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지키고 살아가면 바로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그 주체는 바로 주를 믿는 자가 되는 겁니까?



성경이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 기록을 남겨 주신 거예요? 여기 보면 “만일 누가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고.” 은사를 받은 대로, 뭐가 받은 게 있으면 그냥 받은 대로 내놓으면 된다는 거예요.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십자가마을에서 논란이 있었고. 받은 게 있는데 왜 못 나오나, 하는 거지요. 그런 도식이 뭐냐 하면, 받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나와야 된다는 거지요. 그랬을 때에 주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받은 게 있으면 그 나오는 주체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한 것입니까?”라고 따지면 그때는 움칠 하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냐 하면, “내가 한 것은 아니고…….”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뭐라고 덧붙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게 능력 주셔서 제가 한 것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누가 했다고요?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하나님이 했다고요?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내가 했다고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내가 했다는 말을 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둘러치나 메치나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킨다.”는 그 고백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방편을 갖다 붙인다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한 게 된 거예요.



아주 겸손하게, 아주 고상하게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 받아서 제가 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좀 낫습니까? 좀 나은 거예요? 그러면 “너 좀 수고했네. 좀 낫네.”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이런 이론도 나왔어요. 하나님 반절 하고 내가 반절하고. “아 그건 아니다. 반반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화끈하게 “하나님 백 프로 나 백 프로, 하나님 할 일 백 프로 따로 있고 내가 할 일 백 프로 따로 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야, 진짜. 주의 말씀이 엄청 고생입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가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위의 주체로 나서는 것이 좀 미안하니까 겸손을 가장하기 위해서, 포장하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들이는데 결국은 행한 것은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사십시오.”라는 것의 근거본문도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불신자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인용을 이런 식으로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늘 본문 말씀은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 수 있는 방편으로 삼을 수 없는 본문이라고 이 연사는 강력히 주장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로 말미암아.”에요. 11절에 보면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이 말을 더 꼬아서 어떻게 할 것도 없습니다. 해석할 어떤 여지조차 없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결국 뭐예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끼어들지 마세요. 낄 자리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하는 내 주체가 있고 좀 겸손을 가장하면 내가 행하도록, 말씀을 지키도록 능력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체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제 삼의 주체가 등장한 거예요.



이 사건이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아십니까, 여러분! 아주 무지무지 골치 아픈 일이에요. 나는 여기 있어요. 그런데 내게 능력 주시는 자는 어디 있지요? 능력 주시는 하나님은 거기 있는 거예요. 안 보이잖아요. 하늘이라고는 하지만 우린 어디 있는지는 모르잖아요.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딱 좋은 거예요.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기왕에 안 보이는 것이니 거기 계셔야 돼요.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여기 오시면 발견할 수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 보신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육안으로, 육신의 눈으로 그 분을 목격하신 적이 있어요?



예수님이 그 당시 제자들하고 함께 다녔는데 그 당시 말고 지금. 그래서 유명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잖아요.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그 말. 왜 그런 말씀을 하셨겠어요?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봐도 못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안 보이니까 거기 마땅히 그냥 계셔야 돼요. 우린 여기 있어야 되고. 그러면 정말로 우리에게는 너무 좋습니다. 딱 구도가 잡힌 거예요. 그분은 거기 계시고 난 여기 있고. 이제부터 뭘 할까요? 이 구도 속에서 종교가 발생하는 거예요. 거기 계신 하나님, 나는 여기 있는 나. 거기 있는 신, 여기 있는 나.



내가 할 일은 그 분을 위해서 그 분을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분을 섬기면 되는 거지요. 그분에게 제물을 드리고 내 인생을 바치고 내 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다 바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결과를 얻을까요? 지성이면 감천인거예요. 정성을 다 드리면 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신앙이 아주 깊다는 사람들 보면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했는데도 되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 때 정말 신앙이 깊다는 사람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냐 하면 “내가 아직도 정성이 부족하구나. 지성을 더 드려야지.” 이렇게 나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이 까부는 거예요. 『만들어진 신』같은 책을 막 던지면서. “니들이 믿는 신이 어디 있는데? 니들이 정성을 바치는 신이 어디 있는데? 없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믿는 자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왜 신이 없어? 내가 믿는 신은 저기에 계시는 거야.” “저기 어디 있는데?”라고 반문하지요. “내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신이 주신 말씀을 믿고 이렇게 말씀을 지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이 있다는 증거야.”라고 하면 그 사람은 콧방귀 뀝니다. “웃기지마. 네가 만든 거잖아. 네가 만들어놓고 정성을 들이면서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잖아.”라고 비아냥거리고 조소를 던지고 희롱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몇 번 더 대화를 주고받지만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는 기독교가 개독이라는 말로 욕을 먹고 있잖아요.



어쨌든 우리는 잘 할 수 있었는데 제 삼의 주체가 등장했어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또 그 능력을 받아 행하는 나도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등장하신 거예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모든 일이 그냥 끝나버리는 것으로 예수님이 와 버리신 것이지요. 이거 어마어마한 일이 등장해 버린 거예요. 언제, 마지막 때, 마지막 때 오신 거예요. 마지막 때 예수가 오셨다는 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그냥 심판으로 마감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만물이, 모든 인간이 심판을 당하고 있는데 “저는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린 너무 머리가 나쁜 거 같아요, 그렇죠? 미련한 것 같아요. 성경에서 왜 예수가 등장하는지, 아까 제가 말 한대로 저처럼 그저 걷어차야지만 움직이는, 그냥 빈들거리고 빈둥거리기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예수가 등장해 버리면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닌 거예요.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거기 계시고 여기 있으면 딱 좋은 그림인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그냥 거기 계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거면 되는데 지금 그것이 완전히 깨져버린 거예요. 그 구도를, 거기 계시고 여기 계신다는 이 구도를 깨버린 사건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사건이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거기 계신 분이 여기에 와 버린 다음에는 우리는 꼼짝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간단하게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길은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아, 저는 이 근호 목사님처럼 기억을 잘 못해요. 저는 보고 읽어야 돼요.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죠? 이 말씀을 뭘 더 이상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예수밖에 없다는 거잖아요.



또 하나,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어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불의한 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여기에 필요한 조치가 대신 죽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 몫이 아니잖아요. 이것도 예수님 몫이잖아요. 이런 말씀을 비롯해서 성경말씀은 예수를 앞장세우고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그 분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냐 하면, 그냥 바보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그냥 거꾸러지는 것이 아니라 “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그것이 사실입니까?” 이런 식으로 묻고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경말씀이 틀어지기 시작해요. 성경말씀이 주님이 이루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이루는 말씀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하게 우리의 구도를 깨버리고 오시는 그분은 우리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과 같이 놀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분은 그냥 주가 아니라고 좀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사건을 주관하시고 성경을 이루시는 그 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불편해 하고 “왜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낯설게 오셨습니까?” 그 찾아오심이 별로 즐겁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놓으셨나요?” 송창식의 사랑이야, 라는 노래에요. 송 창식이 교도소에 있는데 아내가 면회 왔을 때 쓴 노랫말이랍니다. 이 가사 속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 거기에 찾아오셨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 예상에는 그 분은 어디에 있어야 되는 거예요? 거기 있어야 되는 거지요. 거기서 아주 안 보이는 채로 있어야 돼요. 굳이 얼굴을 보일 필요가 없어요.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고, 큰일 났네. 녹음을 하라고 했었는데……. 우리가 거기 있다고 생각했던 그 분이 여기 와 버린 거예요. 내 마음 거기에 와 버린 거예요. 여러분은 거기에 지금 와 계십니까, 그 분이? 베드로후서 1장 29절에 보면 그것이 등불이고 새벽에 빛나는 샛별입니다. 샛별 하나 반짝 하니까, 등불 하나 켜지니까 그 분이, 거기 계신 분이 내 눈앞에, 내 안에 와 계신 것을 발견해 버린 거예요. 어느 순간에.



구약에 보면 바로 이런 본문들이 많이 나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더라.” 이스라엘이 이것을 원했을까요? 이스라엘이 별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내서 광야를 지나게 했을 때에 이스라엘은 아주 큰 건으로만 열 번이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계속해서 시도를 합니다. 그랬을 때 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고 너무너무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시도를 하지 않습니까?



거기 계시는 줄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그게 아니고 여기 있다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한 거예요. 찾아오신 그 분이 반갑지 않은 거예요.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지장이 엄청 많습니다. 제가 설교 시작한지가 몇 분이나 됐습니까? 지금이 11시 50분인데……. 여러분이 이 근호 목사님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 보면 어렵다는 표현들을 많이 하잖아요. 목사님 자신도 “어려우니 쉽게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설명해주는 그것이 더 어렵지만, 하여간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조금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낯설다는 표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낯설다. 낯설다고 생각을 해 버리면……, 일부러 낯설게 합니다. 왜? 성경 자체가 낯설기에 낯설게 하시는 것이지만 낯설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낯설게 함으로 관심을 집중 시키는 거예요. 복음을 더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뭐냐 하면, 낯선 것이 우리에게 왔을 때 일단 우리는 거부합니다. 거부는 여러분이 가만히 있어도 거부합니다.



이 전두엽이 어떤 새로운 것이 와서 내게 변화를 요구하면 일단은 거부합니다. 그 거부반응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잠 30분에서 1시간 줄이는데 빠른 사람은 3개월에서 6개월, 길게 가는 사람은 1년씩 걸려요. 계속해서 내 몸이 거부하는 거예요. 이 뇌가 거부반응의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몸 자체가 거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낯설게 하게 되면 우리는 거부하면서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기 때문에 반응도 시원치 않지요. 신발을 신을 때, 양말을 신을 때 신발이나 양말 속에 모래알갱이가 하나 들어온 것 같아요. 껄끄럽잖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왜 굳이 그렇게 사랑하시는지 몰라요. 너무 요란스럽게. 그냥 조용히 깨끗하고 깔끔하게 하면 안돼요? 그래서 설교나 강의가 어렵다기 보다는 낯선 것이구나. 원래 낯설어요. 낯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이 낯선 복음을 전하다가 듣는 그들의 반응이 워낙 거부가 심하니까 돌에 맞아 죽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다 죽습니다. 복음 전하다 죽어요.



우리가 들을 때는 동의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특히 한국에는 장로교출신들이 많으니까 장로교 출신들과 말씀을 나누면 상당히 동의하는 분이 많아요. 그러나 3분의 2지점, 끝으로 갈수록 점점 거리가 벌어지지요. 그러면 얼굴 붉히면서 헤어지는 거예요.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동의하고 맞다, 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싸가지 없게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근호 목사님도 욕을 많이 먹잖아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 다 그런 식으로 설교합니다. 교회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대 사회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어떻게 신앙 있는, 믿음 있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이 설교를 대부분의 목사들이 합니다. 봉사를 하려거든 은혜를 받은 청지기처럼 하고, 이런 식이죠.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겸손하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그러면서 예화로 보통 드는 것이 신앙생활 잘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거예요.



지난여름에 교황이 한국에 왔다 갔잖아요. 손 봉호교수라는 분이 있는데 한국기독교윤리쪽에서 유명한 사람이에요.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이 교황처럼 살아야 된다. 교황처럼만 살라.” 이런 식으로 코멘트를 했어요. 그 말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동조를 하면서 맞다, 라고 했어요. 이번에 방문했던 프란체스코 교황은 전임교황과는 약간 행보가 다르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간다든지, 올 내내 강력한 이슈로 등장한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고 편지도 주고받고, 어떻게 보면 파격적인 행보를 했어요.



그래서 그 교황을 본받고 그 교황처럼 살아야 된다고 우리에게 권면을 해 준 거예요. 한국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아주 오래된 기독교단체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아는 자들이 그냥 아는 것으로, 지식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켜 행하고 실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본보기로서 “교황?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본받자.” 이렇게 나온 거지요. 오늘 읽은 본문 베드로전서 4장 7-11절, 이 본문을 가지고 거의 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고 이런 식으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듣는 사람들이. ‘아, 마지막 때에 심판이 왔으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애써 사랑하고 수고하고. 나대지 말고 받은 것 있으면 받은 대로 내놓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목적이 그거예요? 여러분이 피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으니까.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기록한 이 성경말씀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겁니까? 이 말씀을 지키면 복 받고 구원받는다는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그 결론이면 아주 족한 거예요?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는 측면에서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 흘리심, 대신 죽으심이 없으면 구원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로 바뀔 수가 없는 거예요. 사울이 바울로 바뀔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 장치들이 하나라도 누락이 되어버리면 그걸 위해서 굳이,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는 것이 우리는 좋지만 그 구도를 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가 곤란하든지, 우리가 피곤하든지, 우리가 고난을 받든지, 우리가 어려움을 겪든지, 그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없어도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삽니다. 교황처럼 삽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를 믿어야, 말씀을 지켜야 교황처럼 살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들 지갑 열어서 몇 푼 나눠줄 수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 말씀 몰라도 살잖아요. 그래서 국제적인 단체들, 유네스코, 기아대책기구, 적십자사, 이런 단체들이 다 있잖아요. 지구상에 국제적으로 지역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가난이 있고 질병이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도 사랑으로 한 뜻으로 모인 겁니다. 공공의 선을 위해서 모인 거예요.



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여러 방편들을 마련하잖아요. 비싼 커피 한 잔 덜 마시면 아프리카의 젖 못 먹는 아이에게 일주일치 분유 값을 댈 수 있다, 하면서 후원을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거예요. 5천 원씩 만원씩. 여러분, 이 일을 하는데 예수 믿어야 되는 거예요? 이 일을 위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셔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의 값어치가 그 정도밖에 안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죽이셨을 때는 적어도 그런 정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가 하나님 말씀 중에 어느 것이 지킨 것처럼 나올 때가 있어요. 우린 항상 못 지키지만 혹시 어느 순간에 하나라도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더듬어 가면 창세전 언약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말씀의 위력과 말씀의 깊이가 이런 정도인 거예요. 내가 하나님 말씀 중에 어느 것 하나 지켰다고 했을 때 오늘 내가 지킨 그 말씀은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창세전 언약이 작동했고 그 언약의 작동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거예요. 그 결과로 내가 이 말씀 중에 어느 것 하나 지킨 것이 그냥 드러났을 뿐이에요. 나를 통해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말씀 복잡하게 했지만 결국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거예요. 이렇게 쉬운 말로 정리가 되는데 제가 복잡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님 말씀 어느 한 대목 어느 한 구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가 거기에 담겨져 있고 주의 십자가가 거기에 담겨져 일한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마지막 때에 어떻게 살라? 정신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면서 살라. ‘아, 내가 정신 차려야지. 기도해야지. 사랑해야지. 봉사해야지.’ 그것을 한 것으로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닌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드린 설명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충분히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말씀의 흐름, 말씀은 그렇게 진행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느 한 말씀 지켜보십시오. 그것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주의 피가 거기에 관여한 결과인 것이지요. 제가 설교를 너무 길게 하면 안 되거든요. 지금 한 45분쯤 한 것 같은데? 교회가 이렇게 세상에 쓸모 있다 해도 세상은 살만 하다, 라는 것에 교회가 어떤 보탬이 될까, 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한 것이 아닌 증명을 할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난 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기꺼이 세상에 편입하려고 하고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접근하게 되면 세상과 한 편이 되고자 하는 것밖에 안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과 벗하면 어떻게 돼요?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에요.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이잖아요. 그게 하나님과 원수에요.



예수는 세상을 깬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는데 우리는 세상 친화적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거 조금 구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원이냐, 세상에서 구원이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실 때는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구원은 뭐냐?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에요. 세상에서 구원은 “난 여기가 좋사오니 난 여기서 살겠습니다, 하나님! 구원해주세요.”라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이 절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기도합니다.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어려운 저를 좀 건져주십시오.” 세상에서 구원이에요.



이것은 세상에서 떠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그냥 이 세상에서 붙박이장으로 있으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해 주면서 여기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그 비법만 계속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그건 교회 아닙니다. 그건 교회 일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을 시킨 이상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시킨 이상은 더 이상 애굽과 그 세상과 우리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한 증거에요.



그런 하나님의 그 깊은 의미도 뜻도 모른 채 우리는 계속 이 세상에 남아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남은자라고 오해하고 있다면 진짜 하나님의 남은자, 진짜 하나님의 천국백성은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세상에서 다 사는 것들이잖아요. ‘고생스러우니 편하게 살아야지. 돈 없으니 돈이 좀 있어야겠구나.’ 우리 아들이 지금 고3이라 막바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열심히 했으니 좋은 대학 가야지.’ 그런 응답, 그게 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잖아요.



그런 식의 우리 원함과 그런 식의 응답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탈출한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대접받는 신앙은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서 발버둥 쳐도 세상에서 대접을 받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신앙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요. “여러분이 말씀을 잘 지켜 살면 세상으로부터 복 받고 세상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습니다. 힘 있는, 능력 있는 크리스찬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교회에서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해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밀물처럼 홍수처럼 밀려올 때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켜진 어떤 상태를 말해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빠져야 되는 거예요. 빠지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굉장히 축복의 말씀이에요. 우리는 빠져야 된다는 것이. 우리는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는 거잖아요.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거예요. 뭔가 주체적으로 행한 어떤 존재가 책임을 지는 거잖아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은 그 분이, 그 사람이 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질 이유가 없고 그 책임을 묻지도 않으니까 그게 복 받은 거지요. 그게 자유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좀 전에 읽어드린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세상에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도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그렇게 했다고 무슨 배틀 뜨자는 것인지, 배짱인지 오기를 부리는 것 같지만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버리신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버리시면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모든 규제와 모든 압제를 다 당하면서 살잖아요. 그걸 피해서 살려고 하잖아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계속 몰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책임을 질수 없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옮겨놓으셨다면 굳이 그 자리로 찾아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는 제쳐두고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다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것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경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건져낸다고 하셨어요. 자, 그분이 건져내실 때 그 건져내시는 이유는 뭐예요? 건져내시는 근거. 지금까지 죽 말씀 드린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시면 내게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죠?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되어서 건져내실 때에는 분명히 근거와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아니에요. 결론은 예수님이 그 근거고 이유인데 건져내실 때 건져내시면서 우리에게 이유를 하나 붙입니다. “내가 너 건져줄게. 너 참 예쁘구나.” 이렇게 하나님이 이유를 붙이는 거예요. 그것이 그 유명한 쌍둥이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태어나서 무슨 짓을 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를 건지실 때는 사랑한다, 라는 그 이유를 붙여서 건지는 거예요. 버리실 때는 미워한다, 는 그 이유를 붙여서 버리는 거예요.



제가 넥타이를 오랜 만에 맸는데 넥타이는 보통 안에 있는 셔츠 색깔에 맞춘대요. 그런데 이 색깔과 제가 입고 있는 파란 빛이 도는 셔츠와 이 붉은 계통의 넥타이가 안 맞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안보이시겠지만 이 넥타이에 파란 점이 있습니다. 파란 점과 와이셔츠의 푸른빛이 매치가 되는 거예요. 적절한 예가 아닌 것 같지만 하여간 이 이유, “내가 너 사랑해.” 라고 해서 건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이유를 붙이는 거예요. 제가 설교 서두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저는 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지만 “그래도 넌 나를 사랑해.”라는 이유를 붙이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구경만 하시고. 마지막 한 말씀만 드려야 되는데 딴 짓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우리가 할 것은 뭐예요? 베드로에게 했던 질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항상 마지막이 중요해요. 마지막에 어떤 질문을 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이제 예전처럼 “예,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나서지 못하잖아요. 이제 다 겪은 거예요. 주님이 겪게 하신 거예요. 고난이면 고난, 죽음 앞에서 오금이 저리면 저림, 두려움이면 두려움, 다 겪게 한 거예요.



그동안에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무시해버리고 덮어버렸던 그 사랑을 가지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베드로는 더 이상 “사랑합니다.”라고 입 밖에 내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답변합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야, 이거 신의 한 수입니다. 묘수에요. 우리 다 같이 베드로 사도를 따라서 “제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십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결론과 목적은 주께서 담당하시고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 말씀 붙들고 장난하고 까불지 않고 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는 그 이루심을 날마다 목격하고 그 말씀의 이루심에 기뻐하면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