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거리
2014년 10월 12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5-31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기존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예수님의 말씀 속으로 접속이 가능치 않습니다. 인간들의 세계는 따로 다른 세상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다면 필히 인간은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서 성공할 수 없는 말씀에 의해서 사람이 규정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분명 25절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과 내용을 사람이 접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지혜있고 강한 분으로 등장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는, 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할지라도 라고 여전히 미련한 자가 되어야 되는지와 연관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먼저 있고 그 안에 인간이 놓여 있기에 인간들은 세상의 흘러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외적인 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숨겨놓은 진짜 세계는 그 분안에 있습니다. 그분 속에 있는 세상이 등장하게 되면 기존의 세계는 폐하고 제거되고 심판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다른 인간들이 상상치도 못할 일이 특별하게 그분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기존 인간들이 그분을 이해한다든지 포섭할 대상이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서서 성취하실 내용입니다. 반면에 인간은 여자의 몸으로 수태되어 태어난 몸들을 갖고 있습니다. 몸은 대자연을 알아보고 대자연과 교류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결론내리기를, ‘세상이란 인간과 대자연이 전부’다 할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대자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들이 군대를 가게 되면 나에게 함부로 명령하고 제지하는 교관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관이 나에게 함부로 명령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그 명령을 벌벌 떨면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즉 군대를 가면서 세상의 낯선 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세상이란 내 몸과 대자연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그 가운데 권세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 알 수 없는 권력의 위세에 눌려 힘있고, 배웠고, 가진 자를 중심적으로 여기게 되고 거기에 쏠리게 됩니다.
미국 가서 영어를 못하는데 마트에서 어떤 여직원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말을 걸어올 때에 저는 얼른 영어 구사력이 있는 분을 찾아 기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 영어구사력이 있는 그분은 나의 권세자가 되고 저는 그분의 종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문벌 있는 자의 이 세상의 위치요 부자와 권세자와 지혜자들의 입장입니다.
즉 세상이란 알 수 없는 권력체가 그물망으로 실제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이 사실을 증명됩니다.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다니엘 세 친구에게, 황금 신상에 절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이 하달됩니다. 만약에 절을 하지 아니하면 뜨거운 불 속으로 밀어넣어 죽이겠다는 벌칙까지 전달됩니다.
이처럼 세상이란 내가 눈에 보는 대로 자기 몸뚱이와 그리고 무심코 움직이는 대자연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수상한 먹구름같은 세력들이 이미 통째로 인간의 마음에 지시와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인간들은 군말이 따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이미 자신의 주인을 따로 갖고 있었으며 그 명령에 준수하는 형식으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켜서 더 이상 어두운 세력에 놀아나지도, 또한 굴복당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 싶어했지만 다 부질없이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내부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남으로부터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이 자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세력들이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강한 것, 문벌, 세력, 지혜로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소유’라는 형식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을 ‘소유’형식으로 유지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즉 “내가, 또는 내 의지로 무엇을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이해해서는 아니됩니다.
차라리 수동적이고 수용적입니다. 즉 인간은 필름 같습니다. 그 어떤 정보가 얼룩으로 우리 몸에게 부여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성도는 별종입니다. 악한 쪽과 선한 쪽 한쪽 정보만 아는 자들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는 그 내용이 어떤 하나님의 조치로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 설계도면 같은 존재입니다. 특히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성도나 세상사람이나 한결같이 부유한 것과 권세과 똑똑함을 소유해서 그것 자랑하는 재미로 살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예수님 믿는 자아를 늘 자아가 소지하며 살려고 합니다. 단독적으로 내가 잘 되는 데에 그 어떤 양보도 모릅니다. 자기 자랑이 궁극적으로 t하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다른 무엇이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권세로부터 철저하게 모멸당하고 모독당하시는 그분의 체험도 함께 성도 안에서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두 이질적인 양쪽의 정신을 보이고 어떤 식으로 투쟁하는지를 내다 보이는 스크린과 같은 것입니다.
즉 본인이 뭐가 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무엇에 의지해서 산 이 피조물을 통해서 오로지 예수님만 자랑하는 존재로 전환시킨 그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내는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단독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하나로 규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이란 마치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계속 내어오는 서기관의 작업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51-52) 따라서 이 현실은 예수님의 자기 영광을 양보 못하는 것과 관련된 작업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심한 모욕을 받는 것조차 주님이 의도한 일임을 통해서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강-고전 1장 25-31(자랑거리)1410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25-31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5-31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우리 인간적인 의미에서 딱 한 마디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자랑할 것이 있거든 문벌 좋은 것, 그리고 가진 것, 부한 것, 강한 것, 많이 있는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그런 내용이지요. 이거 안 됩니다. 설교 초반부터 초치고 들어갈게요. 이거 되지도 않을 이야기에요. 사람이 이렇게 살 리가 없지요. 살수가 없습니다. 오늘본문 주신 것은 “너희들이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셨다.”는 그 점을 자랑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내 자랑이 쏙 빠질게 아니겠어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얼마나 우리가 으스대고 자랑하겠습니까? 나 성경대로, 말씀대로 살았다고 얼마나 뽐내고 자기과시에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성경말씀은 이런 말씀을 주신 것 자체가 “이것은 너희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해냄으로서 주님은 과연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너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짓밟으면서 네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주님이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살아 있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무슨 내용이냐?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덮고 그냥 세상에서 보게 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로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여기 있고 대자연은 그걸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이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대 자연의 혜택을 입으며 산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인간 대 대 자연의 관계가 아니고 세상은 인간 대 어떤 다른 인간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현재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어떤 특정인간이 나타났는데 그 특정인간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겁니다. 왜 부활해요? 왜 부활하시지요? 우리는 아무도 부활하지 않는데 그 분만은 부활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와 대자연의 관계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우리에게 “네가 부활되나, 안되나?” 부활 안 되지요. 안되니까 “네가 아는 세상은 사실은 질타당할 세상이고 가짜 세상이”라는 겁니다. 진짜 세상은 부활하신 분, 그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세상이 진짜 세상이에요.
복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이 있고 내가 있고 둘이 합해서 있다, 이게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세상이 진짜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보통 세상 이 있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는 것이 우리 상식인데 어떤 특정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안에 별난 세상이 따로 있어서 나중에 그 별난 세상이 폭발하면서 기존에 있는 세상은 오늘 말씀처럼 다 폐하여 버리는 것, 다 멸망하는 그 교체지점에서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 때 이 땅에 등장한 겁니다.
화산의 마그마가 터져 나와서 아일랜드의 풀밭을 마그마로 다 덮는 것처럼 남들이 알지 못하고 들키지 않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숨어 있는 세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분화구로 삼아서 그 안에 내장된 마그마가, 새롭게 준비된 세상이 폭발하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을 다 덮어버리는 것, 덮어버릴 때 과연 거기에 살아남을 위인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덮어버릴 때 죽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강한 것, 똑똑한 것, 가진 것, 부한 것, 문벌 좋은 것, 그것 자랑하다가 주님 속에 있는 그 마그마에 의해서 다 폐하여 버리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문벌 좋지 않은 것, 미련한 것, 약한 것, 없는 것, 천한 것,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올 새로운 세계에 살아남을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이 작업은 우리가 할 작업이 아니고 누가 할 작업이냐 하면, 이것은 예수님이 하실 작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2000전에 사라졌잖아요. 그런데 성경말씀은 뭐냐? “사라졌다고 생각하나? 그게 아니거든요!”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이 말씀을 설계로, 기획안으로 잡어서 살아 계셔서, 부활해 계셔서 이 작업대로 실행에 옮기는 그 작업들이 등장하는데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성도들의 출현, 성도들의 등장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 볼 때 제 나름대로 보기는 이 모든 세상은 여인의 수태라고 봅니다. 임신이죠. 사람이 아기를 낳는다. 어른들은 아기 낳는 것을 보고 있고 그 태어난 아기는 점차점차 세상을 알아갑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40이 되고 50이 되어서 “나는 50이다. 나는 60이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60년 동안 알고 있던 세상 그것이 본인이 알고 있는 전부지요. 여인의 몸에서 아기가 임신해서 태어났다. 그 때부터 또 하나의 새끼 치는 세상이 시작되었는데 그 세상에서 태어난 아기는 문벌 좋은 것, 가진 것, 학식 많은 것, 부자 되는 것, 권력 있는 것, 그런 것만 자랑하는 아이로서 커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 몇 년 살았다, 몇 살이 되었다, 해도 이 성경속의 세계 곧 주님의 세계를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씀 들으면서 생각해 보면 “우리 입장에서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예?” 스타벅스란 커피점에서 커피 주문을 받아서 커피를 가져다가 테이블에 놓으니까 손님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보고 손님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아가씨가 뭐라고 합니까? 어쩌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커피를 확 부어버릴까? 어쩌라고!
내가 커피를 주문한대로 가져다주는 것은 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얻게 되면 내 어머니가 나를 수태한 그 몸, 그 몸을 계속해서 20대, 30대 죽 이어보려는 노력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해서 돈을 벌면 그것이 자랑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똑똑하면 그 똑똑한 것이 자랑이 되고, 그렇게 해서 내가 권력을 잡으면 그것이 자랑이 되는데 주께서 하는 말씀이 “뭡니까?” “커피 가져왔잖아요.” “커피입니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면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보고 뭘 어쩌라고? 커피 도로 가져갈까요? 뭘 어쩌라고! 나 같으면 “마실 거요, 안 마실 거요?” 딱 그 소리.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마실 거요, 안 마실 거요?”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부활했느니라.” “아침부터 씨, 이상한 사람이 와가지고…….” 이 성경말씀, 제가 분명히 다짐을 하고 들어갑니다. 이 성경말씀 우리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것 하고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커피 아르바이트생처럼 커피만 열심히 배달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이 땅에 수태된 이 몸 가지고 70, 80 치매 걸릴 때까지 계속 버티면서 살다가 버티고 버티다가 못 버티면 죽으면 그만이고 그것뿐이에요. 성경하고 우리하고, 우리 쪽에서 성경을 연결할 수 있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지키지 마세요. 내가 이야기해도 속이 편하네요. 성경말씀 지키지 마세요. 제발 부탁할게요. 이 말씀 지키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은 부활한 분이에요. 다만 우리가 놀랄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분명히 내가 못 지키고 지킨 것도 없는데 주께서 이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인간으로? 지혜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미련한 것을 자랑하는 인간으로 만들어냅니까? 개코라 하세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80될 때까지 교회 아무리 다니고 성령을 받아도 절대로 죽을 때까지 미련한 것을 자랑하고 “주여, 미련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인간은 없어요. “미련한 인간을 알게 했으니 그게 똑똑한 것이 맞지요?” 이렇게 나오지 미련 자체를 감사하고…… 26절에 보면,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이것은 무능한 자만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여러분, 다 무능한 자입니다.” 제가 이 소리하면 기분 좋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오늘 말씀 전체가 뭐냐? “꼬라지하고는!” 그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거든요. 오늘 말씀이 어려우니까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제시합니다. 결론이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과정을 보여줘요. 과정. 무엇이 미련한 것이며 무엇이 우리들이며 무엇이 주님 주신 것인가를 양쪽을 다 보여주는, 그 양쪽을 보여주며 건너가는 그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별종의 탄생, 별종의 발생,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을 만드는 게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달라졌다는 그 달라짐의 과정, 그 사정과 내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펼쳐지는 과정 자체를 발산하는 그런 존재를 주께서는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결과만 따먹기를 원하는데, 사과만 따먹고는 “저 사과는 나야, 바나나는 나야.” 이렇게 따먹기를 원하는데 그게 아니고 처음에 사과도 아닌 것이 돌멩이가 어떻게 열매가 되었는가의 그 절차를 보여주는, 그 펼쳐진 절차 과정 자체가 바로 우리 성도인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어머니 같으면 명태를 가져와서 도마 위에 놓고 방망이로 칩니다. 치면 다른 사람들은 “고추장 발라서 구우면 참 맛있겠다.” 하는데 당하는 명태는 박자 맞춰가면서 막 두두두두, 다다다다, 막 때리면 온 천지에 명태는 구멍이 나고 상처가 나는 거예요.
“구멍 난 가슴에 추억이 흘러넘쳐.” 백지영이 노래에 나옵니다. “구멍 난 가슴에 추억이 흘러넘쳐.” 우리에게서 추억을 쥐어짜는 거예요. 어떤 추억? 잘난 체 하면서 자랑했던, 돈 많은 것을 인생의 목표로 했던, 내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권력을 잡았던 그 추억을 삐어져 나오도록 두두두두, 다다다다, 계속 쳐 나가는, ‘그래서 나는 이만큼 잘되었다’가 아니라 그 찢어진 구멍 난 가슴속에서 추억이 흘러넘치듯이 계속 그것이 흘러나오는 지저분한 그 모습, 거기서 주님께서 “아, 작품 진짜 잘되었네. 괜찮게 나왔네.” 왜?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이렇게 말씀대로 잘 된 작품이 나다.”라는 자랑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얻어맞았기에 나는 성도 맞다.”라는 그 자랑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자꾸 이렇게 때리시면 너무 아픕니다.” 하는 그것만 보여주면서 남들 보기에 나는 이렇다, 가 아니라 남이고 뭐고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오늘도 이렇게 때리기에요?”라고 주님하고만 교제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거자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을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논리인데 어려운 논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감을 때 눈을 감고 눈을 뜰 때는 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죄에서 수태된 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해요. “나는 눈을 감음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 가지고 있다, 영어로 have인데. 미국 갔다 왔다고 또 영어를……. 나는 눈 감음을 감고 있다.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눈 뜸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하는데 사람은 의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 분에게 납득이 안 되어서 내가 쪽지에 일부러 적어줬어요. 인간은 뭔가 가짐으로써 나의 나됨을 자랑 질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자체가 눈이 감기고 눈이 떠지는 것이 눈 감김을 갖는다든지 눈뜸을 갖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여성됨을 갖는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여자로 사는 거예요. 그냥 여자로 사는 것이지 그냥 여성됨을 갖춘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여성됨을 갖추기 위해서 수술을 한다, 뭘 한다, 하면서 “얼굴 못생긴 것들은 게으른 거야.” 해서 자기관리 안하다고 하는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따로 뭔가 설정해놓고 내가 그걸 따로 가지는 게 아니에요.
그걸 만약에 사람이 가지게 되면 아무리 예수, 예수, 해도 결국 자기자랑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이 자기자랑이 되게 되면 공포가 찾아와요. 미국은 거대한 공포덩어리였습니다. 공포덩어리. 넓으니까 더욱 더 갇힌 느낌이 드는 나라. 그래서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킬 수 없는 긴장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알 수 없는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를 견뎌보려고 그들은 많이 가져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가져야 하고, 권세가 있어야 되고 문벌이 좋아야 되고, 절대로 미련하면 안 되고 똑똑해야 되고, 그나마 숨 쉬고 살아가려면 똑똑하고, 돈 많고 있는 사람하고 관계를 가져야 하고, 그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공포라 하는 것은 인간이 빠져나올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 공포가 교회 왔다가 사라질 것 같으면 말을 안 합니다. 교회와도 무서움이 거기에 엄습하고 있고 세상에 나가서 살아도 공포가 엄습하고. 이 알 수 없는 공포,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처지 불가한 이야기에요. 얼마나 공포스러우면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를 자랑해야 됩니까? “나 총 있다. 가까이 오지 마. 나는 권총이 있는 거야. 난 문벌이 좋은 거야. 가까이 오지 마. 난 똑똑한 거야. 난 똑똑하기에 너를 물리칠 수 있어.” 하고 허공을 향하여 잠꼬대 하듯이 늘 외쳐야 될 현대인들. 그런다고 공포가 물러갑니까? 싱긋이 웃지요. 다가서지요. 해결책은 없습니다.
해결책이 없지만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은 또 해결책 준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세상으로부터 심한 모멸과 모독을 받으시면 공포로부터 벗어납니다. 그 점, 성경에 나오니까,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아예 심하게 공포를 당해서 나중에 저쪽에서 “까불고 있어.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이.” 하고 손 털고 물러갈 때 더 이상 공포는 우리하고 상관없지요. 씩 웃으면서 “휴, 이제 숨 좀 쉬겠다.” 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할 수 있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공포와 수모를 우리 예수님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처럼 공포를 당할 대로 다 당해버려라. 그러면 너의 짐은 굉장히 쉽고 가벼움이라.” 제가 마음대로 마태복음 11장을 지어낸 것 같은데 사실은 지어낸 것이 아니고 거기 있어요. “내게 배우라. 내가 이 땅을 처치하는 방식을 배워라. 나는 세상이 갖고 있는, 세상이 공포를 주는 그 원천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 원천적인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아예 터놓고 다 받겠다. 마음껏 멸시하고 모독하고 침 뱉고 뺨 때려라. 내가 다 받아줄게. 다 했나? 더 하지 왜? 그것뿐이야? 다 했어? 그렇다면 이제 너희들 차례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어떤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 공포를 이기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고 그 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미련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약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이 자랑하는 그 자랑에 한패 되지 아니하고 그로부터 마주보는 반대위치에 있는 겁니다. 성경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실제 예가 나와 있으니까 그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가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다니엘 세 친구는 각자 자기 어머니가 수태하고 임신해서 나은 사람, 존재지요. 존재기 때문에 그들이 나는 세상이란 뭐냐? 세상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에는 내가 있고 나를 둘러싼 대 자연이 환경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전부에요. 다니엘 세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고 주변 환경이 있다. 그런데 주변 환경이 점점 이상한 질로 바뀝니다. 갑자기 대 자연에 꽃이 피고 해가 뜨고, 그런 것만 있으면 좋겠는데 거기에 웬 인간, 느부갓네살이라는 인간 하나가 등장했어요.
등장했는데 ‘좋은 아버지 만나서 영웅 됐구나. 그래 영웅 돼라.’ 하고 그냥 지내는 줄 알았는데 무슨 법을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풀무불속에 집어넣는다는 힘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 수태한 몸, 여인에게서 수태한 몸으로 살아왔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여기서 뭘 느끼는가 하면, 공포를 느낍니다. 제 말 맞지요? 세상이라는 것이 그냥 ‘해 있고 달이 있고 나는 여기 있다.’가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하나는 공포를 주는 관계이고 하나는 공포를 받는 관계에요.
해와 달이 공포를 주는 것이 아니고 해와 달, 그것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그 속에 뭔가 수상한 어둠의 먹구름이 끼면서 어느새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옵니다. 여자들은 그것을 잘 못 느껴요. 남자들은 그것을 군대 가서 느낍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똑바로 해!” 교관이 눈도 안보이게 모자 푹 눌러 쓰고서 “똑바로 안하나! 너희는 짐승이다!” 할 때 놀라운 사실은 “교관, 네가 뭔데?”가 아니라 그 말대로 움직이는 내가 대체 무슨 짓이고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아저씨, 나 이거 안합니다. 집에 갈래요.” 왜 그런 말을 못해요? 왜 그런 말도 못하는 겁니까? “난 논산에서 살기 싫어요. 집에 가서 드라마 봐야 해요.” 왜 그런 소리 못하는 거예요?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어서 “똑바로 안하지? ‘다나까’로 합니다!” “……했어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뭐지? 대체 무슨 이런 상황이 다 있습니까? 혼자 살 때 잘난 척을 하다가 회사 들어가서 상사가 시키고 나무랄 때 눈물 뚝뚝 흘리지요. 특히 아가씨들 회사 입사해서 집에서는 귀한 집 공주로 자랐는데 회사에서 일 막 시키니까 ‘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짓을 하나? 복사만 하고 커피 심부름이나 하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나약하고 보잘 것이 없는, 하나의 기계처럼 돌아가는 여기에서 내가 뭣 때문에 사는 거냐?’ 그동안 내가 알던 나는 아니고 낯선 나를 발견하지요.
LA에서 누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은 “아는 형님이 돌아가고부터 나는 죽음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해요. 제가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지 마세요. 죽음이 없습니다.” 하니까 그쪽에서 무슨 소린지?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여러분이 공포스럽습니까? 아니면 아예 죽음이 없는 것이 공포스럽습니까? 갑자기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죽음이 없는 것이 공포스러워요. 왜? 못 듣던 이야기니까. 낯선 세계, 낯선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은 엄마에게 수태해서 사람으로 태어날 때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고 해와 달이 있고 친구가 있으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 낯선 기운이 있고 무서운 먹구름이 끼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뭔가 지배하는 권세 같은 것을 느끼는 그거요, 그것은 성경이 아니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다니엘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권세, 그걸 가지고 다니엘에서는 짐승의 권세, 질적으로 짐승이라고 표현한 그 짐승의 권세가 이 세상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그 세계라는 거예요. 이야기하다 보니 어렵게 되었는데 아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달이 있고 해가 있고 토끼 있고 산에 개미가 놀고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끝. 그게 아니고 이 세상에 뭐가 있다? 예수님을 살해한 그 악마의 권세가 있는 세상에 우리는 멋도 모르고 엄마에게 수태해서 그 몸으로 살아온 거예요.
이 말씀은 우리보고 참고로 들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이 현실이에요. 우리는 현실을 까마득하고 모르면서 그저 돈만 벌어서 내 몸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거기에 뭐가 끼어드는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저벅저벅 계속 우리에게 다가오더라는 말이지요. 돈이 있는데 공포가 없다고요? 돈 있어도 공포 있어요. 미국 가서 돈 많은 사람들 많이 만나봤습니다. 공포 있습니다. 공포가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이 오니까 어떤 중심을 향하여 자연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뿐만 아니고 저도 그랬어요. 한 마트에 가니까 마트 점원이 나에게 뭐라고 마구 영어로 해댔어요. 물건 사려고 마트에 갔는데 한 30대로 보이는 여 종업원이 와서 뭐라고 하는데 “도와드릴까요?” 그런 내용 같아요. 갑자기 겁이 나서 얼른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옆에 숨었어요. 중심을 향하여. 영어를 모르는 세계에서 공포를 느끼고 영어 아는 사람에게서 안심을 느끼면서 그 영어 아는 사람이 나의 지배자가 되고 나는 꼼짝 마라, 하듯이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밖에 나가봐야 영어를 못하니까.
그런데 제 아내는 얼마나 용감한지. 입국심사 하는데 아주 편했어요. 웨이트, 하니 다 끝나버리고 나 씽, 하니까 끝나버리고 모든 입국심사가 그냥 다 됐어요. 뭐지? 너무 신기해요. 단어 하나로 다 끝나버려요. “이곳은 늦으니까……” 하니 아내가 하는 말이 “웨이트? 오케이.” “혹시 달러 가진 것 있습니까?” “나 씽!” 그걸로 끝나버렸어요. 이제부터 영어 강사를 해야겠다. 단어 하나로 미국생활 하기, 이런 거요. 나는 무서워서 그 중심을 향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본의 아니게 내가 중심을 원해서가 아니라 중심 없는 인간은 없도록 악마가 자리배정을 그렇게 해 줬어요.
“너는 백날 까불어도 권세 밑에 꼼짝 마라, 고 권세 밑에 꼼짝 마라, 고 너는 똑똑함 밑에 꼼짝 마라, 하는 신세에 불과해. 그런 세상에 너는 애초부터 갇힌 채로 태어났었어.”라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니엘 세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경우를 느꼈습니다. 그냥 밥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네가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는데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불에 태워서 극도의 아픔과 고통을 주면서 너를 죽일 것이라는 법이 왔을 때 다니엘 세 친구는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겁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어떻게 했을까요? 아주 여기서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니엘 3장 17절에 보면,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이 말을 하는 것은 다니엘 세 친구가 세상을 둘로 쪼개서 보고 있습니다. 쪼개서 보면서 양쪽, 저쪽의 악마가 지배하는 쪽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지배하는 쪽을 나누어서 양쪽 둘 다를 보면서 나오는 고백을 다니엘 세 친구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고린도전서 본문을 가지고 결론조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묻지 마시고 세상은 어떤 세상이며 주님은 어떤 주님인지를 양쪽을 다 보여주는, 양쪽 면을 다 보여주는 하나의 기능자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자가 성도입니다. 우리의 몸은 여인의 몸에서 수태한 몸이에요. 그런데 수태한 몸에다가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면, 이 수태한 몸이 당하는 고통도 여기에 집어넣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려움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늘 두려워합니다.
하면서 교회가, 성도된 자의 좋은 점이 뭐냐? 이쪽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 다른 편, 세상이 찾지도 못할 다른 편도 아울러 양쪽 둘 다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 다, 둘 다가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 공포 자체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능력을, 부활의 능력을 증거 하라고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공포가 찾아오게 한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제가 의도적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미 해답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성도는 해답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더욱더 공포스럽고 그 공포가 우리에게 모멸감과 모욕감과 우리에게 무시를 가하는 그 작업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오직 나를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과정이고 그 작업에 이미 우리가 속해져 있다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을 하시면 됩니다.
사는 게 무섭고 두렵고, 그리고 세상권력이 무섭고 두렵고, 집에 가만있어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찾아오고.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지요. 왜 그런 공포가 찾아오게 하시는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살았다, 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다스리고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공포와 두려움이 늘 상 찾아오도록 조치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고백을 내놓는 사람은 오직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 그렇게 가능해요.
좀 더 다니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그 소리 듣고는 느부갓네살이 “그래, 감동받았다. 내가 꺼내줄게.” 이럴 줄 알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요? 여기 훌륭한 신앙인 나셨네. 여봐라! (그 소리 듣고 약이 더 올랐는지) 더욱 더 용광로의 온도를 높여라.” 해서 산소 막 불어 넣어서 더욱 더 온도를 높였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가 우리라고 하면 어땠겠습니까? “아이 씨, 괜히 쓸데없는 소리해서. 난 신앙고백 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줄 줄 알았는데 상대방은 꿈쩍도 안하고.”
여러분, 우리가 신앙고백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감동 받을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이 짐승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 속에 짐승이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 마귀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뜻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악마에 의해서 다루어지기에 절대로 내 말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동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감동받아서 “그렇다면 풀어주마.” 그렇게 호락호락 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쓸데없는 상상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풀리면 자기 자랑하려고? 절대로 주님께서는 안 풀리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경우라도 내 자랑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방식을 주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거지 나사로는 철저하게 모독 받고 개한테마저 모욕 받았잖아요.
설교 처음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이 있고 내가 있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안에 세상 따로 있다고요. 이쯤 되면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상기시켜 드립니다. 예수만의 세계 따로 있습니다.
예수만의 세계가 따로 있고 그것이 마그마처럼 터져 나오게 되면
기존에 있는 악마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쫓기고 있는 사람에게 마그마가 덮쳐버리면
그 사람의 공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포는 공포대로 있되
그것이 뭔가 덮쳐지는데 그 덮쳐지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 받고 모욕 받고 부활하셨다는 그 분,
그 분이 그 때 생각이 나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힘을 가져야 살 수 있는 것이 분명한데 저쪽 세계, 주님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누가 나와 함께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받았는가,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는 겁니다. 제가 미국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예수님 비유에 대해서 강의를 한 시간 반 정도 했습니다. 십자가마을 <기타 강의란>에 이 한례집사님이 수고해서 다 올려놓았습니다. 거기서는 제가 설명을 다 못해드렸어요.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마태복음 13장 51절에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과정이라는 겁니다. 어떤 작업이라는 거지요. 어떤 작업입니까?
새것과 옛것, 그러니까 악마에 속한 양상과 주님에 속한 양상을 양쪽 다 날마다 가져오는 겁니다.
성도는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하고 열매를 따먹어서 그 열매와 나를 일치시키는 자가 성도가 아니라
도저히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는데 되게 하셨다는, 주님이 하신 일과 마귀가 하는 일을 양쪽 다 겹쳐서
모든 배치를 다 보여주는 그림 같은, 설계도안 같은 그것을 그대로 보여줄 때 그것이 성도입니다.
새것과 옛것을 다 가져와서 고정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부들부들 떨면서 출렁이고 뿜어내는 거지요.
이것이 옛것이고 이것이 새것이고, 그 새것 다음에는 이것이 옛것이고 새것이고,
새것이라고 여겼는데 또 다시 옛것, 은혜 받았는데 또 두렵고 두려운데 또 은혜가 내리고 은혜 받았는데 또 두렵고,
이것이 날마다 평생 동안 난타 물결치듯이, 북치듯이 계속 주께서 두드려주면서
어느 한시도 우리는 이것이 내거야, 저것이 내거야, 고정해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세요.”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겁니다.
부모가 나를 낳는 것도 내 맘, 내 뜻대로 안 되듯이 성도 되는 것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 그 자체가 판박이처럼, 고린도전서 1장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담아내는 하나의 영화 필름처럼 사용하는 겁니다. 그걸 저는 미국에서 수용이라는 말을 했는데 필름이지요. 찢고 그걸 필름에 담는데 우리는 어떤 필름이냐, 소위 문벌 좋은 자, 강한 자, 똑똑한 자를 물리치시고 미련한 자, 약한 자, 멸시 받는 것들을 택하셨다, 라는 사실을 양쪽 다 보여주고 담아내는 필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을 자랑하는 내가 되고 싶어요. 그쪽이 나지요?”라고 나를 정해버렸어요.
주님 편에 서려고. 그래서 구원 받은 티를 내려고. “나는 약한 것만 자랑하고, 나는 미련한 것만 자랑하고, 나는 멸시받는 그런 것을 자랑하니까 주님 제가 성도 맞지요?” 이걸 고정화시키려 한다 이 말이지요.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인공이 우리가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양쪽 다 보이게 하는 성경, 말씀 판, 말씀의 지평, 그것이 바로 우리거든요. 오늘 같은 이런 내용, 대치되는 양쪽 지평이 우리 인생 속에서 다 담겨 있을 때, 필름이 될 때 그 필름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절대로 이 말씀 지키지 말라고요. 주께서 이 말씀대로 하게 하시는데 왜 우리가 지킵니까? “나는 이제부터 약한 것을 자랑하고 강한 것을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개똥이라고 하세요. 인간은 아무리 교회 오고 성령 받고 목사 되어도 자기 강한 것만 은근히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이 뭐냐? 성도의 특징은 최종적으로 공포가 없다는 거예요. 공포를 맞이하세요. 맞이하면서 내가 버티던 나의 자존심과 나의 오기 같은 것이 허물어지세요.
아무리 잘난 체 해도 무서움한테는 못 이깁니다. 그렇게 실컷 공포로부터 모멸감과 무시를 당하고 난 뒤에 다시 이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네가 당했냐?” “당했습니다.” “나도 당했어. 이 세상에서 당했냐?” “이 세상에서 당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처럼 당했습니다. 이 세상은 악마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기지 못했습니다, 주님이여.” “나도 못 이겼다. 나도 죽었다. 끝까지 모멸 당했다. 하지만 나 부활했잖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약하다, 미련하다, 하는 그것은 바로 말씀에 의해서 약하고 미련하고 문벌 좋지 않고, 그런 겁니다.
예수님의 일이 여기에 포착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미련한 것처럼 미련하고 주님이 약한 것처럼 약해진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 필름으로, 하나의 얼룩으로서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노릇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결론부분 기대하지 마세요. 여러분, 당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은 부자 되세요. 그리고 똑똑하세요. 그것을 가지시고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찾아오는 공포와 두려움, 이 세상 악마와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되는지를 한 번 측정해 보세요. “나는 교인이 몇 천 명이다.” 혹은 “나는 재산이 수백억이다.” 그것 가지고 여러분에게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공포 한 번 이겨보세요. 이겨지는지. 못 이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걸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길도 없는 곳에서 우리에게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 길은 내가 가는 길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사다리로 내 쪽을 향하여 설치해놓은 겁니다. 주님 쪽에서 설치해서 주님 쪽에서 계속 작업을 해 대는, 콘크리트를 가져다 붓는, 하늘나라의 그것을 가져다 붓는, 옛것과 새것을 계속 가져오는, 멸망될 것과 구원될 것을 계속해서 우리한테 그려놓는 그 도화지 같은 역할, 따라서 우리는 주님만 자랑합니다.
“이런 작업을 오늘도 실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버려도 괜찮고 무시해도 되는데 왜 저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오늘도 이 말씀, 주님은 이 땅에서 모멸 당했지만 기어이 부활하셔서 새 세계 마련했다는 그 소식이 왜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져서, 나는 이제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 되게 하시니 그 주님이 어떻게 나를 향하여 이렇게 작업을 거시는지, 여러분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계시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체 해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내가 으스대도 세상은 더 으스대는 사람이 있고 내가 가졌다 해도 더 가진 사람이 많아서 부끄럽고 세상 그런 식으로 자기 지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웬 은혜인지 바로 그런 세계 속에서 내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도록 주님이 정말 딴 세계 장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시니 이 사실을 저희들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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