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8 우리교회 오전설교 엡 2장8절(예수님의 구원)-오 용익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람이 납득하고 또 이해해서 소지하고 관리하고 그런 구원은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해놓고,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이렇게 붙어 있어요. 붙어서 나온 선물이에요. 레떼르처럼 붙어 있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에게서 난 것만 이해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 아니면 이해 못 하는 겁니다. 그 밖에 것은 납득도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면 소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럼 이게 무슨 말씀이겠어요. 그럼 구원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서두로 꺼내는 이유는, 이건 에베소서 2장 8절은 교회 가면 ‘구원의 확신’ 이래가지고 제자훈련이든, 새신자 반이든, 가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막 주입시키는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이게 시작인 것처럼. 이걸 외우고 막 하게 하는 거죠.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 이러면서. “믿으셔야 합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런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구원 안 생긴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안 생깁니다.
제가 이렇게 사람들 만나 보면, 이런 사람 만나봤어요. 솔직해요. “목사님. 저 믿음 없어요. 저 믿음 없거든요.” 그래요. 그 사람이. 그래서 제가 그랬죠. “믿음이 없는데, 왜 교회를 나가십니까? 믿음 없으면 교회를 나가지 말지.” 그러면 그 뒤에 대개 다 이 말을 해요. “목사님. 그래도 애는 써봐야죠.” 대개 뒤에 그렇게 따라 나옵니다. 그렇게 애써도, 달음박질해도, 달려가도, 구원 안 생깁니다.
여러분,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구원이 건재합니다. 구원이 맹렬하게 활동합니다. 구원이 활동하는 거예요. 천국이 건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천국이 이 지상에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두드려서 가는 그런 구원 없습니다. 사람이 납득하고 이해하고 소지하고 “저 믿습니다.” 이런 식의 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바알 선지자들 같은 거죠. 그들이 그렇게 두드리는 거예요. 막 찾고 구하고 나중에 안 되니까 몸을 자해해가면서. 구원이 안 생깁니다. 구원이 안 생겨요.
교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예요. 우리의 기도는 바알의 기도 아닙니다.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바알의 기도가 아니고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엘리야는 찾고 두드리고 하는 그런 기도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1장에 남은 자 이야기 하면서, 칠천 명 남겨놨다는 그 이야기 하면서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증거 한 것은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한 겁니다.
그러면 기도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막 물을 이렇게, 요즘 사람들 하는 것처럼 물을 뒤집어 부으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되죠. 엘리야처럼. 엘리야는 그걸 증거 한 거예요.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증거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은 약속대로만 된다는, 약속대로만 된다는 겁니다. 약속대로. 자기가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가 기도해서 된 게 아니고, 엘리야가 열심내서 된 게 아니고. 약속대로, 약속의 능력만으로 됐다는 것을 엘리야가 증거 했던 겁니다.
오늘 여기 보면, 하나님의 선물인데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인데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결국 구원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없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게 왜 기쁜 소식이에요? 사람이 되지도 않을 것을, 안 될 것을 가지고 계속 헛된 소망을 품고 거기에 머리 쳐박는 것처럼 또 하고 또 하는, 이것을 멈추게 한다는 것, 이게 얼마나 좋은 거예요.
제가 갑자기 설교 당번을 맡아 가지고, 안 하던 설교 준비를 한다고, 여러분, 제가 군대로 치면 취사병입니다. 취사병.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취사병한테 낙하산 매준다고 갑자기 공수부대 되는 것 아닙니다. 보세요. 이거 하는 것도 다 틀리고. 저, 너무 어색해요. 벌벌 떨고 있는데 선풍기까지 틀어놔서 완전히 얼려버리는 거예요. 지금. 인간이 이래요. 여러분, 주보 만든 거 보세요. 이근호 목사님 오늘 출석해야 합니다. 오늘 결석이에요. 주보 사회에 이근호 목사님 이름이 있어요. 김집사님 지난 주 기도했는데 여기다 이름 적어놓고.
무슨 구원을 소지해요?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어디 있어요? 이런 인간이. 인간이 이런데요. 제가 진즉부터 얼어가지고 잘 보지도 않는 성경을 본다고, 취사병은 뭐 총 들고 그런 거 아니잖아요? 밥하고 다다다다 도마질하는 이거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낙하산 매주니까 제가 꼼짝없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친구한테서. “친구야! 잘 있나?” “그래. 친구야! 잘 있다.” “너도 잘 있나?” “난 잘 못 있다.” “너는 왜 잘 못 있는데?” “가게가 문 닫을 것 같다.” 그 다음의 말은 뭔지 상상이 가시죠? 그 친구가 제가 목사인줄 알거든요. 그 친구가 꽤나 하는 그런 목사를 많이 봤는 모양이에요. 좋은 차타고 다니고. 막 이렇게 부한 것처럼. 제가 그렇게 부해 보이지 않지요? 제가 그렇게 찌질한 건 또 아니에요.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건 아니어도 제가 이렇게 기름기 흐르고 그러지는 않지요?
근데, 그 친구가 저한테 딱 그래요. “돈 좀 도” 돈 좀 달라는 거예요. 칠백만원. 으엥!!! 제가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나한테 칠백을 달라고 하나. 칠백 있지도 않거니와 제가 그랬죠. “돈 없다. 미안하다. 친구야. 끝.”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려면요, 이게 ‘구원 없다’ 에요. 이게. 저쪽에서 하나님 쪽을 향해서 “돈 도!” “구원 도!” 구원 주세요. 구원 달라구요. 이게 맞아요. 문 열고 있다가 저쪽에 하나님한테 구원 달라고 하니까 돈 없다. 전화 탁 끊고. 문을 탁 닫는 거예요. 돈 없다. 문 탁.
이거예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가 우리에게서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그게 아니고. 네 동의합니다. 동의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제가 구원받은 거 맞죠? 그 말이 아니고, “저 구원 받은 거 맞죠? 맞죠?” “구원 없다. 탁(문을 닫는 소리)” 이런 뜻이란 말이죠. 너희에게서 난 게 아니오가. “돈 도!” “돈 없다. 탁(전화 끊는 소리)” 죄송합니다. 서울 말씨 써드려야 하는데. “구원 도!” ‘구원 없다“ 탁. 이게 ‘너희에게서 난 게 아니오’입니다.
전화 끊고 살짝 제가 미안했지만, 제가 오히려 저를 위로했어요. 아! 내가 내 친구한테 큰 선물을 줬다. 뭐냐 하면, 저한테 더 이상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안정감. 그럼 제가 돈 꿔 줄 수 있다는 일말의 그걸 주면 얼마나 또 초조하겠어요. 돈을 진짜 줄까? 돈을 주면 얼마까지 줄 수 있을까? 진짜 줄까? 안 줄까? 계속 할 거 아닙니까? 계속 그럴 거 아니에요. 근데 제가 확실하게 문을 탁 닫아주니까 쟤한테서는 돈 못 얻겠다 할 거 아니에요. 제가 여기 와서 지금 기쁜 소식 하나 드렸습니다. “탁!! 구원 없습니다.” 제가 멀리서 와서 드릴 것은 없고.
그러면 구원 없으면 이제 성경 닫을까요? 이제 여기서 설교 끝낼까요? 그러면 이제 궁금한 건 이겁니다. 과연, 하나님의 구원이 이 지상에서 활동한다는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차이를 내면서 정말 이건 하나님의 구원활동이다. 이건 정말 하나님의 구원이야! 하는 그 독특함. 그 특이함. 그 차이. 어떤 차이를 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 지상에서 활동하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성경에서 그걸 확인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숙제입니다. 오늘 그거 확인하는 겁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가 그게 어떻게 활동하느냐 하는 거예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가 어떤 식으로 이 지상에서 활동해서,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자꾸 어렵게 설명하는 것 같은데요, 도대체 개나 소나 다 선물 받았대요. 하나님의 은혜 받았대요. 하나님의 구원 받았대요. 생기지도 않는 구원을 그리고 다 하는 말이 나는 구원 받았대요. 나는 구원 받았대요. 몇 날 몇 시에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그런 구원 성경에 없거든요.
그럼 도대체 정말 예수 믿는 거, 예수 믿는 게, 정말 성령 받아서 예수 믿는 게, 이 지상에서 어떤 식으로 바로 차이를 내면서, 어떤 식으로 가짜와 진짜를 확실하게 구분되게 하면서, 살아계신 주님이 활동하느냐 하는 것을, 그걸 확인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숙제라는 겁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차이를 내면서 갈라지게 하느냐 하면은요, ‘자아’와 ‘자리’의 차이로 갈라지게 하십니다. ‘자아’와 ‘자리’의 차이.
자아가 뭔지, 자리가 뭔지 지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아가 뭐냐면요, 제가 아까 말했습니다. “돈 도!” 이게 자아입니다. 내 자리 줘. 나를 빛낼 자리를 다오. 이게 자아입니다. 반면에 자리는 뭐냐면요, 누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자리로 깔아주는 식으로 생겨나는 나.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어요. “누가 깔아주셨지요?” “이 자리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거죠?” “주님, 도대체 이 자리를 깔아주셨다면 여기에 무엇을 담기 위해서 이 자리를 깔아주신 거죠?”그렇게 질문하는 겁니다.
앞에 건 뭐라구요? “내 자리를 다오.” 쉽게 제가 언젠가 들었던 예화를 다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다 잊어버렸을 겁니다. 제가 이 설교를 집에서 늘 듣거든요. 그럼 계속 반복되는 소리가 뭐냐 하면, “다 잊으셨죠?” 그럽니다. 목사님이 어디 같이 갔는데요, 극장 같은데, 그 극장에서 자리를 잡는다고 권사님 한 분이 가방을 의자에다 던졌다는 거예요. 가방을 먼저 던져놓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 그게 자아입니다. 우리 인생살이가 그거 아닙니까? 가방 던져놓고 달려가고. 가보니까 또 다른 자리 보여요. 거기다가 또 가방 던져놓고 달려가고. 계속 그러다 마는 거예요. 그게 인생이에요.
성경을 가지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다가 무덤에서 두 사내를 만나가지고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근데, 귀신하고 예수님하고 나눈 대화가 있어요. 귀신이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냐면, “주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 이게 자아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교회 나가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놔두라는 거예요.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괴롭게 말라는 거예요. 교회 가서 기도하는 내용이에요. 이게 자아에요. “주여, 제가 큰 거 안 바랩니다. 그저 우리 애들 아파도 살짝살짝 감기 정도 아프고. 암 같은 것, 소아암 같은 이런 거 걸리지 말게 해주시고. 우리 남편 직장에서 승진 같은 거 안 바라고 그냥 떨궈내지만 말게 해주시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그 귀신이 예수님한테 하는 소리에요. “주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 오셨나이까”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괴롭히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놔두라는 거예요. 그냥 이 정도 살게 놔두라는 겁니다. 그게 귀신의 이야기입니다. 그게 자아입니다. 그 뒤에 또 이야기합니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나왔거든요. 나와서 하는 대화거든요. 부탁하는 거예요. 이 귀신이 예수님한테. 자기들을, 자리, 내 자리, 내가 들어갈 자리,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자리 마련해달라는 거예요. 왜 자리가 필요한 거죠? 여러분, 자아에게 왜 자리가 필요한 거죠? 자리가 없으면 자기 존재가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리 없는 자아는 없는 거예요. 늘 자리를 통해서 자아가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사장 자리, 목사 자리, 장로 자리, “나는 장로다.” 그 자리를 가지고 나는 장로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게 자아입니다. 그게 자아에요. 자기를 빛내는 자리. 그 자리는 뭘로 가득 차 있느냐 하면, 내가 고생한 거. 내가 수고한 거. 내 잘남. 내 똑똑함. 그동안 내가 얼마나 수고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 세상 팍팍하지만, 내가 힘들게 살지만, 내가 더러운 짓거리 안 하려고 착하게 살려고 여기까지 내 품위와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달려왔는데. 여러분, 그게 자아입니다. 그게 자아에요.
그러면 자리는 뭡니까? 아까 자리가 뭐라고 했죠? 아까는 뭐예요? 내 자리죠. 내 자리. 지금은 뭐예요? 누군가 자리로 깔아주니까 그 자리로써의 내가 생겨나는 거예요. 여러분, 구원은 생겨나는 겁니다. 생겨나는 거예요. 니 속에서 솟아나는, 배에서 생수가 솟아나리라. "솟아나리라" 생겨나는 거예요. 소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리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 잊어버렸어... 봐야 되겠어... 제 아내가 잊어버리면 물마시라고 알려 주었어요. 물 마셔도 생각이 안 나고...진짜 봐야 되겠습니다. 큰 일 났네요. 사실은 성경에 수두룩하게 자리가 있는데.
자리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준비한 거 말고 딴 걸로 설명해야 되겠어요. 십자가 옆에 있는 두 강도가 처음에는 똑같이 다 예수님을 욕했어요. 다 똑같이 욕했거든요. 그게 자아에요. 한쪽은 뭐라고 욕했냐면 똑같아요. 욕하는 게. “니가 진짜 메시야면 우리를 구원하라.” 한 거예요. 제가 계속 같은 이야기 합니다. 이게 자아잖아요. 내 자리를 천국에 만들어 줄 수 있어야 메시야라는, 이게 그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 천국은 없다고 제가 계속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 그 천국은 지 천국이에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천국이고 자기 자랑하는 천국이에요. 근데,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면류관을 벗어서 던지는 천국이잖습니까? 이게 갈라지는 겁니다. 앞에 두 사람이 한 통속이 돼가지고 예수님을 욕하다가 쫙 갈라져 가지고 나중에 이쪽 강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뭐가 지금 생겨났어요. 그 이상한 자리가 지금 생겨난 거예요. 생겨났어요. 생겨나가지고는 한다는 소리가 예수님한테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예수님. 나는 내가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거니와”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내 자아를 내놓을.....,그런 말씀 많이 들었을 거예요. 성도는 두께가 얇아야 한다고. 두께가.
지금 자기한테 관심 갖고, 나를 구원해 달라, 내 자리가 있어야 된다, 그런 것이 지금 바짝 얇아져서 자기를 찾을 수 없도록 된 거예요. 지금 자기한테 관심 없는 나예요. 이 세상에서 생겨날 수 없는 ‘나’입니다. 이런 사람은 없어요. 갑자기 그런 ‘나’가 발생한 거예요. 거기서 생겨난 거예요. 예수님 양쪽에 있는 거기 그 자리에서. 갈라졌죠? 지금 차이가 나버렸죠? 그러면서 고백하는 말이 “예수님은 옳지 않은 행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해요. 그게 자리입니다. 무슨 자리? 예수님이 깔아놓고 그 예수님의 행하심이 옳지 않음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행함을 담는 자리. 그래서 비로소 생겨나는 자리. 그게 자아와 자리의 차이. 주님께서 그걸 갈라지게 하시면서 주님이 이 땅에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으로 활동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데요. 여러분, 또 이러면 안 돼요. “나는 그냥 주님의 자리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게 똑같이 자아가 되는 거예요. 지금 뭐냐면요,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했잖아요. 그 앉은뱅이 자아입니다. 무엇을 얻을까 하고. 나를 더 얻어가지고 좋은 자리로 가볼까. 똑같아요. 강도나 아까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 한 것이나. 지금 자아거든요. 또 그렇게 똑같았던 사람이 베드로예요. 뭐냐 하면, 베드로가 “주여, 제가 죽기까지, 주님 계신 천국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냐면. 그렇게 해서 가면 자기 자리를 가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자아죠.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놓고 하는 소리가 있어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이랬거든요. “와우!!!어떻게 저렇게 기적을 일으켰지?” “저게 무슨 일이지?” “야! 저 사람 대단하다!” 할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아시잖아요? 왜,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되어 진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뇨. 도대체 그럼 어디를 주목하란 말입니까? 자아라는 것은요, 어디를 주목해도 사실은 다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걸 보고 투사라고 하죠. 베드로가 왜, 우리를 주목하느뇨. 할 때 어디를 주목하라고 한 거예요. 그 주목하는 자리를 지금 강도가, 새로 생겨난 자리로써의 강도가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를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는 거죠. 예수님을.
자리냐, 자아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아와 자리로 갈라지는 그 틈바구니 있잖아요. 그 사이. 그 사이에 그렇게 일하시는 주님이 보이는 자리라 이 말입니다. 주님의 행하심이 보이도록 그렇게 주님이 일하신다 그 말입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놀라지도 별로 안 하시네요. 저는 지난 주 설교가 저한테는 굉장히 놀랍게 다가왔거든요. 만날 들었던 이야긴데 사실은 이거였어!! 여러분, 이쪽 강도 보세요. 예수님을 멀건히 쳐다보고 있어요. 하지만 진짜 예수님은 봅니까? 못 봅니까? 왜? 갈라짐이 없으니까. 갈라짐이. 근데, 쫙 갈라지면서, 갈라지니까 비로소 그 갈라지는 두 사이로 누가 보인다 말이에요. 예수님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 세상에! 어떤 신학도 공부해서 이게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당신의 나라, 예수의 나라라는 거예요. 천국이 예수의 나라라는 거예요.
그 예수의 나라를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이 가운데 서 계셔가지고, 가운데 심판주로 서 계셔가지고 자기 피만 가지고, 자기 피로 한쪽은 지옥 보내고 한쪽은 천국 보내는 그 일을, 그렇게 해서 세상 전체를 통일하신다는, 주님 중심으로 통일하신다는 그 비밀. 하나님과 예수님만 알았던 그 비밀. 쫙 갈라지니까 그 중심에 계셨던 그 예수님이 보여요. 그 십자가가 보여요. 그게 구원입니다. 자아에서 자리로 무슨 수로 넘어갈 건데요? 무슨 수로. 이쪽 강도에서 이쪽 강도에서 무슨 수로 넘어갑니까? 이게 그냥 인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인 거예요. 실제상황. 이게 뭘 공부해서 그래, 그렇게는 안 돼지.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예수님을 누가 보는데요?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안 보이는 게 당연하죠. 지금 33살 먹은 청년이 피 뚝뚝 흘리면서 사형 받아 죽어가고 있는데, 그 청년을 쳐다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
이제 이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절에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에는 다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하잖아요.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같이 했으니까 이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건가요? 제 질문은 이겁니다. 여러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니까 같다는 거예요? 다르다는 거예요? 다시 여쭙겠습니다. 같다는 거예요? 다르다는 거예요? 둘 다 아니에요. 주님이 차이를 내신다는 거예요. 주님이 이렇게 일하신다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같은데 다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같은데 다르다니.
여기 지금 갇혀 있다는 말을 하는 거거든요. 같은데 다르다, 이 말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다른 게 나왔다는 말은 외부에서 누가 손댔다는 이야깁니다. 외부에서 누가 건드렸다는 이야기에요. 외부에서 누가 손대지 않으면, 바깥에서 누가 건드려놓지 않으면, 갈라짐, 차이남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봐보세요. 여기까지는 같은데 진노이었더니. 이건 아니라는 이야기잖아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 아니잖아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 아시겠지요. 그게 이 말이라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교회에서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들어가기로 하고요. 먼저 아닌 해석, 잘못된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백이면 백이 다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뭐냐 하면, 여기 ‘전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그리고 ‘전에는’ 이렇게 나오거든요.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맞는데, 그다음에 이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예수 믿었고, 성령 받았고, 이제 다음은 뭐예요? 다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성경말씀대로 실천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된다. 백이면 백 다 그렇게 해석합니다. 여기 이 본문 나오면. 여러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해석을 거의 못 보셨을 거예요. 다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런 해석이 아까 뭐라고요? 자아입니다. 그 해석이 자아에요. 그게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게 강도가 예수님한테 우리를 구원하라!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메시야면 우리를 구원해 봐. 우리를 구원하면 증명해주겠어. 그거예요. 데모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우리를 구원하라! 우리를 구원하라! 그게 그렇게 데모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면 바로 아까 말씀드린 자리로써 해석, 자리로써 생겨나는, 갈라지게 하는, 같은데 달라? 누가 차이 나게 하셨구나! 누구지? 누가? 제가 이제야 고백합니다. 제가 새벽에 온 게 아니라 어제 왔어요. 여기, 저는 이런 게 처음 있는 줄 알았어요. 예배당 뒤에 하천도 있고 코스모스도 확 피어있고...다 깜짝깜짝 놀란 것뿐이에요. 갑자가 자아가 발동했어요. 이사 와볼까? 너무 좋은 거예요. 모르시나 봐요? 이쪽에 개울가 흐르고 한옥 마을 있고. 다 깜짝 놀래면서 바람도 살살 불고 다 좋더라구요. 그것처럼 생겨난다는 것은요, 놀라는 거예요. 교리가 아닙니다. 지식이 아니고. 이런 ‘나’가?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나를 이렇게 만드신 취지가 뭐지? 주여! 누가 나를 이렇게 지으셨나요? 취지가 뭐죠? 라고 이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그게 자리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로써의 해석은 뭐냐 이거예요. 그게 오늘 숙제입니다. 오늘 숙제예요. 오늘 숙제 아직 다 안 끝났습니다. 오늘 설교의 숙제를 다 해야 되죠. 그건 이렇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이야기 할 것 알레고리 아닙니다. 주님이 방물장수인데요, 등짐, 이거 알레고리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알레고리 아니죠. 주님이 방물장수예요. 시장 통에 자리를 쫙 깔고 안에서 물건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자리에다 뒤에 등짐에서 물건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 꺼내는 겁니다. 진열해놓는 거예요. 자리에다가. 그 놓이는 자리가 우리에요.
세상에 진열하듯이, 세상에 보이듯이 그렇게 놓여지는 거예요. 기분 별로 안 좋습니까?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자꾸 꺼내는 거예요.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꺼내는 거예요.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갈라지는 겁니다. 쫙쫙 나오는 거예요. 이건요, 사람이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한테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진노의 자녀라니요? 여러분, 이런 자녀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사도 바울이요, 사람들의 아버지를 다 바꿔놨어요. 일괄 진노의 아버지. 전부 아버지가 진노예요. 자식들을 전부 진노의 자식들로 만들어 놨어요. 전부 진노의 자녀.
여러분, 인간을 이렇게 분류해 놓은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을 이렇게, 어디 생물학에서, 어디 경제학에서 인간을 이렇게 분류하던가요? 세상 풍속을 좇고, 이런 건 있어요. 욕심이 많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런 건 있잖아요. 그런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게 쉽게 이야기 하면 마귀 들렸다 이 말 아닙니까? 사람은 전부 자리가 마귀 깔고 앉았다 그 말입니다. 전부 깔고 앉은 자리가 마귀라는 그 말 아닙니까? 세상에!! 햑교에다 그렇게 써내나요? 학교에 처음 써내는 것, 아버지 이름: 진노. 주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거기가 우리 처소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어머니 애가 이상합니다.” 어머니는 “그 말이 맞습니다.” “아, 어머니도 이상합니다.” 이거 정신병자 아니에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행함이 아니에요. 안 돼요. 이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어디서 꺼낸다고요? 자기 등짐에서. 그 꺼내는 자리가 어디냐면요, 2장 4절에 나와요. 그게 꺼내는 장소에요. 뭐냐 하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그 큰 등짐. 그 큰 사랑, 다 이루셨다. 내 대신 짊어지신 그 큰 사랑. 대속하신 큰 사랑. 대신 죽은 그 사랑에서 꺼내는 겁니다. 꺼내서 놓는 거예요. 제가 이걸 어떻게 실감나게 표현할까 했는데 저는 뭐 시장 통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못하겠더라고요. 골라, 골라 뭐 이런 거 하는 거 있잖아요. 우리 주님이 거기다 깔아놓고 이걸 막 진열해놓고 동네방네 아줌마 아저씨들 “이거 좀 보세요. 이 물건 잘 나왔죠?” “야, 이거 세상 풍속을 좇고 이거 좀 한 번 보시겠습니까?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그 옆에 깔고 있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이거 좀 한 번 보실래요? 아이구, 욕심꾸러기 이거 한 번 보실래요?”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 구경하는 구경꾼 중에, 큰 교회 당회장 목사님이 계셨으니, 예수님한테 따지기 시작합니다. “왜, 당신은 죄만 이야기 합니까? 예수 믿었으면 좋은 것도 나와야지. 만날 세상 풍속을 좇고, 만날 칼질만 해, 만날 난도질 해. 왜? 왜? 죄! 죄! 그럽니까?”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답을 해요.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게 사랑이라구요. 그게. 그게 안 꺼내지면, 그게 진열이 안 되면, 밑에 깔려 있는 자리가, 성도가 주님이 자리에 올려놓을 때, 이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게 매일 매일의 성도의 삶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금 그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평생의 삶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인생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매일 매일 진열시킨, 진열할 내용물을 자리 깔고 또 펴고 내일되면 또 하고....,그게 70년, 80년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그걸 같이 보는 거예요. 갈라짐이잖아요. 너는 세상 사람들하고 같지 않다는 거예요. 그 꺼내는 작업이 뭐냐 하면, 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었다는 거예요. 지금은요? 아니라는 거죠. 지금은. 너는 본질상 자녀 이었었는데, 내가 너가 받을 진노를 대신 다 받아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그 진노의 자녀에서 이리로 땡겨서 하나님의 자녀 삼았다. 하나님의 성령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았다. 그래, 그 사랑 좀 볼래?
예수님이 무슨 짐을 졌는지 알아야 사랑을 알 거 아닙니까? 아, 주님 저는 몰랐는데, 주님이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깜짝 놀라면서, 주님, 제 속에 이런 것도 있었습니까? 동시에, 주께서 이런 것도 용서하셨군요. 여러분, 거기에 무슨 행함이 들어 갈 자리가 있습니까?
자리를 깔아 주신 분도 누굽니까? 주님이죠. 거기에 그 진열하신 분도 누구에요? 여러분, 구원받은 강도가 마지막에 이걸 알았어요. 그때 그 순간에 뭐 알았다 그 말이 아니고, 자기 평생이 그렇게 주님이 깔아놓은 자리로써 인생이란 것을 알았던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뭐 억울하고 했던 것들이 다 날아간 거예요.
제 친구 이야기 또 해야 되겠습니다. 아까 전화했던 그 이야기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뒤에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제 친구가 전화를 하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저는 그 말이 마음에 많이 아렸어요. 뭐, 돈 꿔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없으면 못 꿔 줄 수도 있고. 그런 거거든요. 하지만 그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뭐라고 말하냐면, 아,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거예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그 말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자기가 방금 앞에 뭐라고 했냐면, 그게 자아거든요. 자기가 지금 자기 친구들한테 전화를 다 돌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한테 알리지 말래. 자기가 소문을 다 냈으면서 남들한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지금 마지막에 여러분한테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저하고 그 친구가 뭐가 다른 거죠?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죠? 주님이 어떻게 한다는 것을 다 알았어요. 아, 우리를 자리로 깔아놓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뭐 이렇게 됐다 이게 아니고, 주님의 자랑과 자기 솜씨를 내보이고 자기 자랑을 내보이고 하는 그것이 바로 성도의 일생이고 성도의 인생이구나! 그게 자리라는 말이구나! 바로 그렇게 할 때, 또 갈라지죠. 밖에서 갈라지는 거예요. 아까처럼 만날 죄만 이야기한다. 죄뿐이다. 제가 사람들 만나서 복음 전하는 필살기가 있어요. 필살기, 여러분에게도 알려드리겠습니다. 복음 전할 때, 이 필살기를 쓰세요. 한 방에 다 갑니다. 오늘 제가 공개하겠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자기 속에 복음이 없다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는지 모릅니다. 한 번도 주님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주님 만나 척, 만날 열심인 척, 만날 기도하는 척, 한 번도 갈라짐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 여러분, 갈라진다는 것이 우리 외부에서만 갈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갈라지게 하실 때는 우리 내부에서 갈라지게 하십니다. 그게 강도라니까요. 주님과 자기가 갈라져버렸어요. 주님이 안 보인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너무 붙어 버렸어요. 주님이 저리가! 해줘야 돼요. 주님이 밀어줘야 돼요. 주님, 저 잘났죠? 이만하면 신앙 괜찮죠? 십자가가 안 보이는 때에요. 그게. 주께서 확 밀어서 넘어뜨려야 돼요. 저리 안 가! 그래서 간격이 생겨야 비로소 그때 주님이 보이는 거예요. 뭐가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렇게 밀어주는 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지. 확 밀어서 자빠트려 버려야 해요. 어디서 씨, 담뱃재 떨면서 저리 안 가! 저리 안 가! 주여, 저도 이 정도 행함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저리 안 가! 저리 안 가! 해서 죄인의 자리로. 내가 행한 것은 마땅히 십자가 형벌을 받아도 마땅한데 그 자리로 밀려가라 이 말입니다.
그 십자가, 예수님 지신 십자가가 니가 마땅히 져야 할 그 십자가, 니가 마땅히....,씨! 마귀 깔고 있었던 주제에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예요. 그 자리로 가야 비로소 주님 보인다 이 말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것도 보이고. 그것이 내부에서도 계속 갈라지는 거예요. 바깥에서도 갈라지고. 주님이 그렇게 방물장수로 진열할 때, 바깥에서도 갈라져요. 복음 꽤나 안다고 뭐....., 제가 필살기 이야기 안 했지요? 시간 다 되어 가는데 필살기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눈 반짝반짝 합니다. 이근호 목사님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이게 제 필살기입니다. 여러분, 좋아하시네요. 그럼 대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 사람은 너무 죄만 이야기 한다고. 여러분, 저는 이렇게 들려요. 너무 사랑만 이야기 하시네.
오늘 말씀에 이게 왜, “그때는” 이죠? 이게 “전에는” 이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이게 누구 행함이에요? 일방적인 예수님 행함 아니에요? 그 행함에서 꺼내서 진열하는데 그 진열하는 건, 그거 누구 행함이에요. 예수님의 행함 아니에요? 거기다 깔아놓은 자리는 누구 행함이에요? 예수님의 행함 아니에요? 그 행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갈라져요. 쭉쭉 갈라져요. 그 쭉쭉 갈라지는 건, 누구 행함이에요? 예수님의 행함 아니에요? ‘너희에게’ 관한 것이 어딨어요? 어디서 행함을 이야기 합니까?
모든 것이 주께로 시작되었고, 주님을 통하여 주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 갈라지는데,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다들 그렇게 하는데, 죄만 이야기 한다, 뭐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차이가 생겨나는 사람이 있어요. 갈라지는 사람 있어요. 그 강도처럼. 세상에! 그 복음을 듣고 갈라지는 사람이 있더란 말입니다. 이런 사람, 그게 자리 이야기인 거예요. 강도처럼. 주님이 보여요. 십자가가 보여요. 갈라짐입니다. 그 갈라짐에서 나온 그 자리, 그 자리에서 행함이 나온다고요? 행해서 뭘 한다고요? 기도해서 뭘 한다고요? 헌금해서 뭘 한다고요? 찬양해서 뭘 한다고요? 내가 주님한테 잘해서 주님한테 이쁨을 받는다고요? 그 사람의 속에서 그게 나올까요? 그게. 이게 가르쳐서 될 일입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건 우리가 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한 겁니다.” 에이 씨, 박수치고 한다고 해서 지랄한다. 귀신을 속여야지.
친구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그 자아. 여러분, 제가 이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요, 다릅니까? 우리가 달라요? 우리가 다른 사람이에요? 제 친구하고? 우리도 돈 없으면 못 살잖아요? 돈 꾸러 가야잖아요? 돈 달라고 할 거죠? 저한테는 돈 달라고 하지 마세요. 돈 없어요. 우리도 돈 달라고 할 거예요. 아쉬우면 아무나 붙잡고. 왜? 내 존재감 상실되면 안 되니까. 우리도 죽으면 벌벌 떠는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런데 차이! “그래, 친구야, 나도 너처럼 그랬었었었었다.” 라고 하는 그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그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다른 이들과 같이? 근데 아닌데?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가 아니고 그랬었었었었는데 라는 그런 갈라짐. 제가 이 말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그냥 사세요. 그냥. 제가 이 말 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저도 한 번 해봅시다.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다음이 중요해요.
바로 이 세상을 중심에 피 흘리셔서, 그 언약을 완성하신 그 주님이 약속대로, 그 중심에 서셔서 천국 갈사람 천국 보내고, 지옥 갈사람 지옥 보내는, 그 주님의 솜씨. 주님의 행함만으로 갈라지게 하시고, 차이 나게 하셔서 오직 주님의 갈라지게 하시는 솜씨만 바라보게 하심을 믿음으로 막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잘남으로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주님의 행함밖에 없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주여, 우리를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추셔서 오직 주님의 자리만, 주님의 일하심만 보이는 은혜를 쉬지 말고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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