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고전 1장 22-24(표적과 지혜)1409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24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본문에서 사람은 헬라인 아니면 유대인, 세상에 많은 종족들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유대인 아니면 헬라인, 헬라인 아니면 유대인, 이렇게 둘 중 하나로 구분을 지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단군의 자손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헬라인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리는 헬라인이 아니고 한민족인데 왜 헬라인에 속한다고 하는가? 유대인이라 하는 것은 본래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유대나라입니다. 유대나라, 다른 지파는 다 날라 가고 연속성이 유지된 지파가 유다지파밖에 없어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에서 유대나라로 바뀌어서 유대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말이지요.
그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그 조치가 뭐냐?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특별히 그 민족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제가 말을 이렇게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어떤 민족이 새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정답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일단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약속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의 유무를 가지고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게 된 겁니다.
약속이 어디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약속이 있는 민족은 유대인이고 약속이 없는 민족은 이방인으로 규정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도 약속이 없는 민족이기에 유대인 아닌 쪽, 유대인 반대쪽, 곧 이방인의 대표인 헬라에 속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류를 이렇게 둘로 나눌 때 그 기준이 하나님의 약속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구원이 되겠지, 라고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들어졌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 속에 있어도 바로 곁에 있는, 바로 그들과 함께 있는 약속을 못 알아보았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해서 전혀 눈치 챌,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우리를 대표해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거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데도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찾았고 불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를 믿었는데 그 여호와가 여호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에요. 지난 주일날 갑자기 동영상이 안 되어서 허겁지겁 설교 초반을 그냥 넘어가서 지금도 좀 후회가 되는데요.
지난주 본문을 보게 되면 십자가의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인데 그 전도가 어떤 것이 전도이냐 하면, 멸망하는 자와 미련한 것을 까발려주는 요소가 동반되어야 그것이 전도라고 서둘러서 이야기한 기억이 나요. 이것을 설명을 해 드려야 될 텐데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 미련한 자, 이런 자가 멸망하는 자고 바로 이런 자가 미련한 자임을 보여주시면서 십자가의 능력과 십자가의 도가 전달이 되는 겁니다.
전달될 때 우리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도 중요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멸망하는가, 누가 미련한자냐, 하는 그것도 갑자기 우리에게 관심사가 되어버렸어요. 거기에 대해서 지금 허겁지겁 또 이야기를 해야 돼요. 누가 미련하고 누가 멸망하는 자인가,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총명가지고 신과 접촉에 나서는 모든 자들이 미련한자요 멸망되는 자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할 때 또 머리가 막 돌아가요. 그러면 나의 지혜와 총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안 하면 되지, 라고 되거든요.
그런데 안 할 위인이 없어요. 전부 다 총기와 지혜로 하는 겁니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뭉쳐지면 철학이 되고 신학이 되고 그 중에 하나로 나온 것이 삼위일체라고 했어요. 목사들이 뽐내지요. 자기들은 신학교 나왔으니 프로고 나머지는 아마추어로 생각을 하지요. 그것은 지혜와 총명에 불과하고 그것은 멸망하는 자와 미련한 자가 주장하는 바에 불과하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런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러면 전도한다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모든 사람이 미련하고 멸망한다면 구원받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라고 이야기하지요.
예, 없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지금 천국에서 룰루랄라 하는 사람들은 뭐냐? 그 사람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닌데 24절에 그 사람들이 나와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나와요. 헬라인, 약속이 없는 자들도 해당이 안 되고 약속이 있다고 자부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천국 가는 겁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피동적이거든요. 수동적이라는 말이지요. 스스로 손들고 “저 천국 갈게요.” 이것은 안돼요. 이것은 스스로 요청하는 것이니 해당이 안 되고 부르심을 입은 자여야 하니까 누가 불러줘야 된다는 말이지요.
죽은 이순신 장군 귀신이 불러줄까요, 강감찬 장군이 불러줄까요? 그것은 귀신들이고. 누가 불러주느냐 그 말입니다. 박수무당들이 부르심을 많이 입은 사람들이에요. 신 내림 받은 사람들. 누가 불려주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불러주느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고……, 그리스도는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안 죽어서 불러주고 그 그리스도께서 불러줄 때 그 불러주는 방식이 뭐냐 하면, 앞장세우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불러줄 때 목소리 떨어가면서 “근호야! 근호야!” 이렇게 불러줘 가지고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이 불렀나?” “아니!” 또 들려오는 소리 “근호야! 근호야!” “당신이 불렀어?” “아니야.” 세 번 부르는 그런 식의 것들 모방할 필요는 없고요.
교회에서 이런 간증 같은 것이 있을 때 주의해야 돼요. 불러주는 방식에 대해서 “아무개야” 하고 불렀다는 거기에 혹하고 넘어지면 안돼요. 벌벌 떨면서 불렀다, 그런 것도 필요 없어요. 불러줄 때는 두 가지가 제거돼요. 지혜가 없이 불러주고 기적 없이 불러줍니다. 기적 가지고 불러줬다는 말은 전부 다 귀신이 불러준 거예요.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헬라인이 지혜를 찾고 유대인이 기적, 표적을 원했다는 말은 평소부터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될 거라는 장치를 본인이 이미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서울 가서 강의하는 가운데 한 이야기가 있어요. 절대로 의존교회 여러분은 기대하지 마시고 짐작하지 마시고 예상하지마세요. 그렇게 되면 이것이 연습이 돼요. 구원 받는 연습이 되면 이런 연습은 육적인 연습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랑밖에 나오지를 않고 백날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 일 미터도 자전거는 앞으로 안 나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실컷 방언을 했는데 1센티도 구원이 안 되는 경우에요. 손 흔들어서 병은 나았는데 일 밀리도 천국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짐작해서 그래요. 나는 이런 식으로 되면 구원 받은 사람이 맞다고 미리 짐작했으니까 그 짐작에 자기가 갇혀 있는 꼴이 돼버려요.
지혜같으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엎어버리고 기적을 원하면 기적을 엎어버려야 돼요.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할 때 그 주체가 누구냐 하면 주님이고 부르신 자가 강감찬이냐 을지문덕이냐 죽은 이 순신 장군이냐, 그것은 박수무당이 그렇게 하고 단군이 불러줬다고도 하는데 정작 불러주신 분은 불러주는 방식이 고정되어 있어요.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 확정되었습니다. 그 확정된 것이 뭐냐?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하는 것처럼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십자가가 느껴져요.
그 십자가는 나타날 때 졸지에 그 분은 우리로 인한 피해자의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것을 지난시간에 수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너 보니 내가 참 부끄럽다.” 피해자의 모습, 상처 입은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지요. 왜 십자가로 등장하느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은 십자가 말고 다른 것 쥐면 그것은 다 헛발질이고 신앙생활 백날 해도, 40년 하고 50년 해도, 집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되어도 그것은 다 헛수고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죽음 이야기는 명절이나 일상에서도 말해서는 안 되는, 터부시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발 분위기 살벌하게 만들지 말라, 누가 죽는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 분위기 다운되니까.” 죽음은 늙어 죽을 때나 하는 이야기지 젊을 때는 죽음 이야기를 제켜 놔야 되는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제켜놓은 이야기를 주님께서 우리 인생 한 복판에 놓아버리는 겁니다. 이 죽음 외에는 영생 없다는 겁니다. 세상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죽음이 씨앗을 뿌려놓은 것을 주님이 죽음의 씨앗을 거두어서 그걸 영생으로 열매 거두는 작업이 바로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죽음이 찾아와서 유발된 모든 사태들 가운데서, 그 쓰레기만도 못한, 폐품처리도 안 되는 그 죽음들을 거두어서 영생으로 생명으로 다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나타난 사람들이 뭐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거예요.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없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 세상에는 두 종류 밖에 없는데, 이 세상에 약속 받은 자와 약속 없는 자 두 종류밖에 없는데 그들은 끝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없다는 거예요.
있는지도 없는지조차도 안 되는 거예요. 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이 말이 참 어려운 말이기에 이제부터 쉬운 말로 설명하겠습니다. 설교 처음 시작할 때는 안조시거든요. 이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안 조시 실 때 중요한 것 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나를 볼 때 발견하듯이 나를 보는 사람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쉽게 한다고 해놓고 더 어렵게 되어버렸지요? 인간은 항상 눈만 뜨면 내가 이렇게 될 거야, 라고 되고 싶은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아침에 눈을 뜨게 되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자리 잡을 거야.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내가 원하는 모습 나왔지?” 이런 식으로. 그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거든요. 내가 되고 싶은 나인데 주께서 부르심을 입은 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뭐 이런 게 다 나왔어?”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예상하거나 짐작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야말로 나라는 것을 그냥 광야의 만나줍듯이, 길에서 공짜로 줍듯이, ‘백 원이 있네.’ 하고 줍듯이, 돈이나 물건을 주워서 기뻐하듯이, 어린양을 찾아서 기뻐하듯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서 기뻐하듯이 매일 같이 우리는 내가 예상치 않은 나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나는 발견자요 나 자신은 발견되는 대상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포기를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5년 뒤에 이렇게 될 거야.” 혹은 “3년 뒤에 아파트 넓은 데로 이사 가서 인테리어 근사하게 할 거야.” 남자들은 “3년만 지나면 돈 모아서 차 바꿀 거야.” 차타고 다니면서 남들 보기에 근사하게 선글라스 쓰고 다니는 그 모습을 그리워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원래부터 내 안에 장착되지 않은 내가 예상 못한 낯선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나 똑똑하다, 나 잘났다, 이 잘남의 연속성을 유지해나가면 지금보다 한결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그것이 발전이고 진보거든요. 발전과 진보에 대한 꿈이 없이 인간이 어떻게 삽니까? 못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항상 내가 기대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나, 그래서 그것이 나의 삶의 동력이 되어서 그 쪽을 향하여 어떤 수모와 고생을 하더라도 목표점에 도달한 나 자신을 움켜쥐고 혼자서 웃고 즐거워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지고 싶은데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따로 마련해 주셔서 나에게 발견되는 조치가 일어났을 때 이것은 내가 원한 나가 아닌데,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무슨 이런 이상한, 썸씽 같은 그 무엇인데, 그게 나에게 낯선 존재로 다가올 때 우리는 나의 지혜와 총기를 그 순간 버리게 될 수밖에 없어요. 내 목표도 같이 날라 가버릴 때의 즐거움,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꿈을 버려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버리는 방법은 불교처럼 도 닦고 머리 깎고 꿈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낯선 누구에 의해서 따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주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 순간 내가 생각하는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로 하여금 주님께서 죽은 자를 영생으로 만드는 그 작업에 가해자 또는 훼방자로 그동안 악착같이 살아왔는가를 후회하게 만들지요.
안양강의 장소에 가려면 광명역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가거든요. 버스 타고 10분쯤 가면 박달종이라는 곳이 나와요. 거기에 노루표 페인트 회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가스유출사고가 방송에 나왔지요. 거기 지나서 박달동에 가게 되면 옛날 동네가 되어서 촘촘히 개척교회들이 많아요. 개척교회 이름을 보니 상당히 토속적이에요. 교회 이름이 “더 있는 교회.” 커피 맘대로 더 준다는 그런 식의 뜻이지요. 그 옆에 있는 교회는 거기에 질세라 “다 꿈 교회” 꿈은 이루어진다는 뜻의 다 꿈 회. 아주 경쟁적이에요.
그것은 점점 더 자기에게 집착하게 만들어서 파멸시키는 교회가 되지요. 교회 이름을 “꿈 포기 교회” 혹은 “꿈 접은 교회.”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꿈 접은 우리교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십만 원 내면 이름 지어드립니다. 어떤 교회는 죽자 교회, 이것은 좀 농담 같고 너무 심하고요.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가운데서 순전하게 예수님의 작품으로서만 제 삼의 종족이 등장해요. 오스 구니스의 『제 삼의 종족』 이란 게 있거든요. 그 제 삼의 종족처럼 지금의 인류가 아니고 다른 인류로서 주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그 종족의 특징이 뭐냐? 항상 수동적이에요.
그런 사람을 만들어낼 때 그 사람을 어디서 만들어내느냐 그 말이지요. 천사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천사들도 그렇게 만들었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그것이 오히려 자기의 구원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죽은 자, 그 죽은 자를 거두어서 거기에 뭔가 가미하니 그것이 천국에 가뿐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예요.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이 백 프로 다 담기는 새로운 증표, 증거로서 등장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오직 주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부르심을 입은 그 존재자체가 지혜요 기적인 겁니다. 성경에서 지혜, 기적이 그렇게 어려운데 간단해요. 내가 바로 낯설고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주여?” 내가 스스로 의지력이 강한데 이 의지력 강한 내가 얼마나 여자처럼 나약했으면 어릴 때 빵이나 얻어먹으려고 갔을 때 들었던 그 주여, 가 입에서 툭 튀어나올 때 이것은 내가 예상하거나 짐작하거나 꿈꾼 것이 아니에요. 나는 주님을 부르는 사람 되는 것이 소망이 아니고 이 땅에서 보란 듯이 성공한 사람, 남에게 부러움을 받는 사람, 박수받는 사람, 그것이 지금도 꿈이고 어렸을 때의 꿈이고 여전히 못 다이룬 꿈이에요. 남들이 박수를 쳐주는 사람 되고 싶은 것.
그런데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 틈을 째면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나온다면 내가 놀라지요? “미쳤어. 내가 왜 이래. 정신 차려. 의지를 가져, 의지를. 그렇게 나약하면 안 돼. 종교는 아편이야. 네가 언제 하나님 일에 신경을 썼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걸 들여다봐.” 이 입을 테이프로 발라서 그런 소리 안 나오게 하든지. ‘이게 왜 나오지?’ 발견되어지는 것, 내 자신이 날마다 새롭게 발견되어지는 겁니다.
똑같은 맥락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에는 무심코 했던 일들이 나중에 죄 자체로소 또 발견되어질 때 내가 죄 짓는 주체자인 것이 수동적으로 발견되어 질 때 우리는 다시 한b 번 부르심을 입은 사람인 것이 발견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철야 기도하는 것, 새벽기도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 십일조 하는 것, 감사헌금 하는 것, 우리교회는 관계없습니다만, 그리고 남에게 전도하는 것, 이것이 성령에 의한……, 여기 중요해서 밑줄 죽 그어야 해요, 이것이 성령에 해서 하는 헌금이고 성령이 하는 전도고, 특히 선교하는 이것이 성령에 의해서 선교하는 줄 알았는데 그 자체로 그것마저 죄라고 느껴질 때 이것은 내가 몰랐던 거지요. 설교하는 것도 죄고 강의하는 것도 죄고……, 마이크를 지금 바꿔야 한답니다.
(마이크 바꾸는 이 일이) 나도 예상 못한 일이에요. 그런 것이 죄로 느껴질 때, 우리는 내가 내세울 내 행함이 전혀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발견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내가 죽자고 방언까지 하면서 죽자고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는 그 자체가 세상에! 그게 죄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거지요. 예수 믿는 것이 죄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예수 믿는 것이 죄라는 것을! 부르심을 입어야 하는데, 수동적이고 늘 피동적인데 어떻게 내속에서 자동성이나 능동성이 아직도 꿈틀거리면서 튀어나오느냐는 말이지요.
“옛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았기에 옛날 사람들이 말씀을 못 지켰다면 성령을 주신다면 성령 받고나서는 새 사람 되었으니 알아서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그 발상자체가 피동성에서 이미 자동성으로 자립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죄악 된 증거가 되고 말지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 벌써 날라 가버렸어요. 언제 불러줘요. 한 때 불러줬지요. 구원파가 그러잖아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맨 날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 때가지는 그랬고 지금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구원받기 전에는 몰랐던, 새롭게 발굴된 죄입니다. 완전히 우리는 고고학자에요.
날마다 새로운 죄가 발굴되고 그것을 증거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생방송이 끊겨버렸는데) 지금부터 천천히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혼돈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질서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내용은 간단해요. 혼돈에서 하나님의 창조력이 발휘되니까 질서가 잡혔다면 그것이 다시 인간이 죄를 범해서 혼돈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그야말로 죽음의 씨앗을 모아서 영생을 거두는 작업은 간단해요. 모든 인간들이 질서라고 여기는 작업을 혼돈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혼돈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수작업, 그 수작업의 연결성이 뭐냐 하면, 새 창조가 뒤에 꽉 끼워져 있어요.
파괴의 즐거움이에요. 하나님께서는 파괴하는 가운데서 파괴하시는 그 작업이 새 창조의 작업이 되는 겁니다. 파괴할 때 그 이유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헌금하는 것도 죄고 설교하는 것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사람이 태어나서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그 보여주는 그 작업이 새 창조에 포함되어 있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남자들이 결혼 전에 신혼의 단꿈을 생각하지요. 그럴 때 짐작하고 기대하고 그런 거예요. 행복을 꿈꾸고. 결혼하자마자 요강에 오줌 누고, 트레이닝 입고 돌아다니고, 코 파고, 방구 막 뀌고……, 아, 이건 아닌데!
연애할 때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끅~ 하고 트림도 하고 애 낳아놓고는 애를 패고 폭력성을 보이고. 결혼했다 그거지요. 너는 이제 끝났다 그 말이거든요. 예선은 끝났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남편은 혼돈을 느끼는 거지요. 혼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질서를 무질서로 바꿉니다. 무질서의 두 종류가 뭐냐 하면, 의미적 무질서와 형태적 무질서의 둘로 나눠요. (방송 연결되어서) 다시 해 봅시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피동적이지요. 여러분이 다시 들으세요. 피동적일 때 부르심에서 누가 불러주는가? 예수님이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이 불러주실 때 무엇으로 불러주시는가 하면, 우리가 잘났다는 그것에 의해서 피해보는 모습으로 불러주시는 거지요. 불러주실 때 그것을 약속으로 불러주시거든요. 약속 안에 능력이 있는데 “약속!”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고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로 불러준다고 했지요. 십자가! 그게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생존의 바닥에 죽음을 깔아 넣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니까 새롭지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것을 이제 알았어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가운데서 죽음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지요. 살고자 하는 우리 가운데 뭐가 있는가? 꿈도 있고 비전도 있고 기대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그렇게 될 때만 내 모습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 겁니다. 생방송 끊긴 것 메운다고 빨리 지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기대를 하는데 정작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 오! 내가 기대했던 내가 아니에요. 살려 주옵소서, 또는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또는 나는 죄인 맞습니다, 심지어 내가 교회에서 어떤 행동을 했어도 그것은 내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죄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할 때 그 ‘주여’는 죄를 용서하는 주님으로서 주를 찾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용서와 유일하게 연관된 사건은 오직 한 사건 그게 십자가라는 겁니다. 피 흘리면서 용서 받았다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도구로서 내 입에서 고백되고 내뱉어진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내가 옆에서 보고서 내가 화들짝 놀라면서 발견할 때 우리는 말씀을 발견한 겁니다. 어떤 말씀, 고린도전서 1장 4절을 발견한 거예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 부르심을 입은 자구나.” 이것은 절대로 내가 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내가 지켜야 되는 대상인줄 알았는데 그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오히려 덮친다는 겁니다.
제가 주중에 안양에 가서 강의를 하는데 보신각 이야기를 했어요. 보신각종이 크잖아요. 행사 때 보신각종을 치면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귀가 찢어지겠지요. 음파가 쟁쟁거리면서 왔다갔다하면 귀가 찢어질 거예요. 우리는 부르심을 입어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버리면 용서, 용서, 용서, 용서,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우리 몸이 산산조각 다 찢어지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용서와 사랑과 속죄가 이동한다는 말은 내 몸은 한 조각 한 조각이 죄를 뿜어내는 죄 조각이라는 것을 그 안에 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발견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무심코 이야기한 것이 없어요. 네가 부부가 되거든 주 안에서 공경하고 주 안에서 사랑하라는 그 말이에요. 대전 권사님은 딸 결혼하는데 누군 청첩장 주고 누군 안주고 하니 아예 아무도 안 줄 요량이에요. 그래서 11월 8일 1시 20분에 한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거예요. 우리는 결혼을 무심코 해요. 무심코 하면서도 어떤 질서를 원합니다. 질서는 의미적질서와 형태적질서가 있어요. 네가 결혼해서 내 남편이 7시에서 8시 사이에 퇴근하면 그렇게 질서가 잡히면 우리는 저절로 의미적 행복이 찾아진다는 겁니다. 어떤 제도와 형식 같은 것이 갖춰져야 우리가 진짜 마음에 원했던 어떤 마음의 평정과 행복이 주어진다. 어떤 체계 질서가 있어야 그 안에서 그 질서대로 규칙을 지킬 때 비로소 우리에게는 행복이 주어진다.
그래서 형태적질서가 우선이고 그 안에서 법을 지킬 때 의미적질서, 안정감을 챙긴다는 이것이 인간들의 지혜와 인간들이 하나님께 원하는 기적의 노림수거든요. 여러분, 라면도 법대로 끓여야 라면도 되는 겁니다. 질서라 하는 것은 근대시민들이 지켜야 될 것이에요. 여러분이 아는 상식이야기 하겠습니다. 이것은 인류사 사상의 흐름인데요. 중세 때는 하나님중심이었습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르네상스라 해서 인간의 아픔과 고뇌중심으로 예술과 문학과 사상이 바뀝니다. 인간주체중심으로.
그 뒤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신이 떠나버리고 신을 믿지 않는 자리에 옛날 로마 그리스 문화로 채우겠다는 것을 신고전주의라고 해요. 그 신고전주의의 바탕에 자본주의가 있었습니다. 있는 자는 잘 살고 없는 자는 못 사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이 돈에 의해 차별화되니까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인간을 압박하는구나, 해서 나온 것이 허무주의가 나온 거예요. 낭만주의라고 해서 허무주의가 나오는 겁니다. 그게 나중에 실존주의가 되고. 이런 것들은 그냥 들어놓으시고 다 알 필요는 없어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실존주의가 나오면서 인간들이 허무한 세상을 넘어서 그 다음에 뭘 추구했느냐 하는 그걸 이야기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뭘 추구했는가? 현실참여가 나온 겁니다. 노동운동, 데모도 하고, 현실참여가 일어나요. 이것을 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어쨌든 간에 인간은 질서를 잡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굴 위한 질서? 나를 위한 질서지요. “나는 질서가 있어야 해. 나는 정돈 돼야 돼.”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다 잊었지요?
하나님의 뜻은 처음에 혼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가 있어서 창조되었는데 그 창조된 것에 죄가 들어갔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죄라고 규정한 것을 인정치 아니하고 있는 질서나마 어쨌든 간에 허무주의든 사실주의든 낭만주의든 표현주의든 그런 것을 동원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실존주의든 현실참여든 억지로라도 내가 편하기 위한 질서만큼은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계속 법이 강화되고 그 법은 가진 자에 의해서 왜곡되고 없는 사람은 법이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은 하나로 말해서 질서잡기, 질서세우기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잡기, 질서세우기에서 자꾸 누락되고 빠져나가는 개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죽음입니다. 그게 죽음이에요. 그렇게 소진당하다가 결국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앞당겨보자는 겁니다. 십자가를 미리 앞당겨보게 되면 우리한테 이렇게 해요. 네가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자꾸 안정된 교회, 성당, 절에 가서 ‘나는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그 창조의 원리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광야 이스라엘도 그들 속에 죽음이 있었지요. 욥 같은 경우도 그들 속에 죽음이 있었지요. 에스더도 그 가운데 죽으면 죽으리라 해서 죽음이 있었지요. 특히 제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안 왔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생명, 영생을 주고자 하는 그 바탕이 되는 죽음, 바탕이 되는 죽음은 꼭 집어넣어줘야 거기서 생명이 나오거든요. 그 죽음이 언약적 죽음, 약속된 죽음, 그 언약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
그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다는 사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것을 까발려주는 그 사건을 우리 마음에 쏙 심어놓는 그 작업이 우리가 질서 잡고자 하는 그 질서를 혼돈으로 바꾸면서 혼 돈속에 내가 낯설게 보이는, 내가 미처 몰랐던 거기서 영생이 피어나는 하나님의 고유작업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에요. 우리는 내 몸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복음은 간단한 거예요. 내가 지금 교회 앉아 있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른 친구들이 다 술 먹고 있는데 내 나이 60이 넘어가지고 교회 와서 이게 무슨 짓인가 말이지요. 이미 죽었던 예수나 찾고 있고. 예수는 이미 죽은 4대성인중의 한 사람인데 그걸 내가 왜 찾아? 차리라 절에 가서 부처나 찾지.’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말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 이 고린도전서를 왜 봅니까? 옛날 경전 아닙니까? 이런 것은 나도 쓰겠다, 얼마든지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얼마든지 그런 자존심이 있을 수 있거든요. 나도 성경 한 번 써 볼까, 나도 종교 한 번 만들어볼까, 이런 되도 않는 자존심은 누구나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내가 예상 못한 나가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언젠가 내가 죽는다는 그 죽음 말고, 그 죽음이야 다 죽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대신 죽은 분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나?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살아났으니까 믿지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교회 와서 뭘 얻고자 하는 거요, 교회 와서 기도해서 뭘 얻고자 한다는 이 자체가 의미가 없어져요. 얻어 봐야 그것은 혼돈에 불과하거든요.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질서가 발견되지요.
그 동안 우리는 생존차원에서 지금까지 마음에 정리된 것은,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참 살기 힘들다, 이것이 정리된 것인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세상은 말씀대로 살기 힘들다.”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버렸어요.
“여러분, 성령 받았으니 말씀대로 사세요.”가 아니고 “여러분, 말씀대로 사세요.”라고 한다면 성도는 말합니다. “목사님, 당신은 아직도 복음을 몰라요.” 비로소 성령을 받아보면 말씀대로 못살게 만드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고 세상이 날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느 성경구절도 말씀대로 못삽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이삭도 그러했고 다 그랬어요. 시간관계상 제가 다 이야기 못합니다. 엘리야도 그랬고 “이제 나만 남았다.” “아직 7천명이 남았다.” 도저히 몰라요. 우리는 이 땅에서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 더 안타까워지는 새로운 낯선 존재로 우리가 발견되어야 됩니다. 전에는 “돈 한 푼 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그것 때문에 교회 왔어요. 교회 올 때는 “주여, 말씀대로 살면 제가 원하는 내 생존 보장해 줄거지요?” 이런 흥정가지고 왔는데 나중에 막상 복음을 듣고 보니 이것은 생존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고 말씀대로 사는 이것도 내 손에서 떠난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어떤 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쳐주지 않는 세상, 이 세상은 바로 죽음이 활동하는 세상, 악마의 주둔지였습니다. 죄의 주둔지였고. 우리는 출애굽할지도 몰랐고 그냥 출애굽 이야기나 들었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빠져나갈 생각도 못하고 가봐야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야는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사르밧 과부에게 갔습니다. 그 때 그 과부는 빈 병 수집한다고 애 먹었습니다. 가져온 병마다 참기름으로 다 가득 찼습니다. 생존차원에서 살려줬을 때에 과부는 만족했어요.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선지자가 안 왔으면 우리 모자는 죽을 뻔 했습니다.”라고 한 그 순간 애가 죽었습니다.
생존의 죽음에서 말씀 못 지켜서 죽는다는 사실까지 더 깊숙하게 약속의 내막까지 들어가게 해주는 절차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펼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처음에 인간은 누구나 생존밖에 모르고 말씀은 관심도 없고 내가 우선 살고보자는 거예요. 생존의 바닥 위에서 말씀 지키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인간의 죄악 된 질서체계거든요. 우선 내 몸부터 살아야 그 다음부터 말씀 잘 지키겠습니다, 했는데 주님께서는 생존 보장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죽었을 때 선지자 보고 “왜 저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예 이참에 우리가 못 살아서 죽는 것을 포함해서 말씀 못 지켜서 저주받는 그 심판까지 몽땅 미리 경험된 그런 자를 발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말씀 못 지키는 거예요.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지금 밥 한 끼 먹고 안 먹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하나님의 확정된 계획이에요. 확정된 계획입니다. 이 말은 구원 문제가 내 구원이 아니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피동적으로 제공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닌 거예요. 지금껏 교회 와서 내 구원, 내 구원,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몇 날 몇 시에 구원 받습니까, 맨 날 구원해 달라고 하는데 이것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이것이 내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시편 2편에 보면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편이 옛날부터 나왔어요. 성경전체가 바로 예수님 이야기였습니다. 그 예수님이 한 작업 중에 하나가 우리를 십자가 복음으로 일찌감치 우리에게 생존의 죄나 생명에 관계없게 된 죄, 말씀 못 지키는 그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일찌감치 우리 속에 집어넣어서 행복 된 질서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혼돈을 줘버려서 그 혼돈 가운데서 주께서 새롭게 생명이라는 것을 줘서 더 이상 우리가 우리한테 무거운 짐이 되지 않도록 주님의 선물인 그 자체로 날마다 발견되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겼는데 따지고 보니 그 이용하려는 마음까지라도 죄인 줄로 이제 밝혀졌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주님 이용하지 말고 이미 주께 이용당하고 있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다시금 재발견케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