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9강-약함과 강함(고전1;25)14092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26. 18:09

2014-09-21 12:39:22 조회 : 244         
   약함과 강함 140921 이름 : 이근호   

약함과 강함(고린도전서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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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9-21 13:28 

약함과 강함

2014년 9월 2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5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사람은 그 누가 자신을 안 건드리면 좋겠다 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난처한 일은 비켜가주기를 바랍니다. 누가 교통사고가 나고 태풍이 불어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나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런 경향은 그동안 인간들이 충분히 자기만을 위해 사는 생활이 합치되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응’입니다. 자연에 대한 적응입니다. 자연에 대한 적응에서 고려할 것은 자연과 그리고 자기 자신입니다. 보다 강하고 보다 지혜로우면 적응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을 찾아도 강자의 연장선을 이어 최종 강자로 이해하게 됩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강자이니 이 약자를 불쌍히 여겨 강자로 만들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것도 ‘적응’의 한 대목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 “신이시여 저를 지혜자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나를 지도자로 여기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도 세상 사는 ‘적응’의 일부입니다.

만약에 기존 교회에서 설교자가 설교하기를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혹시 힘을 원하고 지혜를 원하십니까? 간곡하고 간절히 하나님에게 매달리시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힘과 지혜를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 어떤 거부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도 사람 하나를 그저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시는구나”라고 납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설득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하십니다. 즉 “너희들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실은 하나님의 지혜요, 너희들 눈에 약하게 보이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강함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이해로 인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꼼수에 들어갑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힘을 포기해서 남들 보기에 비천하게 여겨지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내용으로 하여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는 새로운 강자나 지혜자로 등극하려는 꼼수 말입니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짓이 자기 절대화로 치닫는 꼼수가 되느냐 하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와 강함은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이미 완성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씀은 인간보다 ‘새삼 지키면 구원해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달성하신 내용을 펼쳐 주신 말씀입니다. “너 아니고 나에 관한 이야기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늘 생각하고 주목하는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변화를 인간을 상대로 해서 변혁시키려고 하시는 겁니다. ‘적응’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적응 대상을 제거하려고 하십니다. 인간은 자연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지고 또한 사라져야 할 상대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내부에 주목하십니다. 대자연을 새롭게 하시는데 코끼리나 토끼에게 다가서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가지시고 인간을 건드리십니다. 인간을 비켜 가시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살해당하신 방식으로 인간과 더불어 대자연을 교체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부를 살피시고 그 내용물을 밖으로 토해내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여기고, 또한 주변 세상에서도 그렇게 평가하기에 그들은 어서 정상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즉 세상에 합류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기대를 걸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랬더니 그 열 사람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 한 문둥병자, 곧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병 낫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도로 돌아왔습니다.

이 돌아옴에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돌아오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이 원했던 능력과 지혜자라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돌아온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돌아온 자는, 막상 병이 낫고 보니 예수님의 오심이 인간들이 기대한 능력과 지혜를 주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은 단지 각자 지니고 있던 그 내부적 요소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자와 돌아오지 않는 자를 구별하시는 이유는, 내부적인 요소를 밖으로 토해내는 그 능력을 위하여 자신이 오셨음을 미리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이 구하는 능력과 지혜는 내부의 썩어짐을 외부로 드러냄이 아니라 남들처럼 매끈한 외부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이 기대하는 그런 힘과 지혜가 아닙니다. 인간을 내부와 외부로 구분 짓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들은 단순한 문둥병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밖에 모르는 죄인이었던 것을 탄로나게됩니다.

십자가는 전에서부터 줄곧 약속되었던 것의 최종 성취입니다. 따라서 내부의 죄를 외부로 끄집어내는 작업은 옛 약속 속에서 감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건들도 십자가 사건과 연이 닿아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리고성 함락 작전입니다. 여호수아 6:1-5에 보면, 이스라엘의 공격 방식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방식을 사용함을 대하기 전에 먼저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여리고성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은 멀쩡하게 정상대로 살고 있는 우리 여리고성을 왜 건드리고 싶어하는가?“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남의 성을 공격케 하시는가?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따로 비켜가서 성을 따로 짓고 살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5장에 나옵니다. 공격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체 남자들에게 할례를 시행토록 했습니다. 할례란 바로 육과 영의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약속증표입니다.

여리고성 함락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와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올 십자가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와 의, 육과 영의 갈라져 있음 자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행하심을 증거하기 위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죄인과 의인 간의 간격 하나의 관계로 모아지면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즉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서 찬양하는 나라입니다. 기도하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능력으로 날마다 우리의 ‘나 위주의 삶’이 죄로 폭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9-23 16:39 

9강-고전 1장 25(약함과 강함)1409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입니다. 신약성경 26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오늘 본문에 사람이라는 용어가 나오지요? 하나님이 일을 할 때 사람하고 한다는 겁니다. 당연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 자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제발 나를 좀 비켜 가 주세요.” 우리 평소 마음가짐이 그래요. “날 제발 건드리지 마세요. 살던 대로 그냥 살게 좀 내버려 두세요.” 미국에 토네이도가 일어나잖아요. 토네이도가 일어나서 다 쳐버리면 당사자들은 생각합니다. “신이시여, 왜 그 많은 집들 가운데서 저만 치십니까? 좀 건드리지 마세요. 좀 저를 비켜가 주세요. 볼 것도 없는 나를 상대해서 얻을것이 뭐가 있다고 자꾸 저를 건드리십니까?”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겁니다. 왜냐하면 특히 동양의 조선이나 고려시대 때 제천의식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신에게 제사 드리는 의식은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대인 마한, 진한, 변한의 시대에 있었거든요. 제천의식에 보게 되면 평소에 신이 자기를 건드린다 생각 안하고 때 맞춰서 신을 달래는 식으로 제사를 드린 거지요. 다시 말해서 “안 건드려서 감사합니다. 신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때에 따라서, 장소 잡아서 마음 모아서 마음껏 흠향하도록 제물을 드릴 테니 평소에는 건드리지 마세요. 그냥 우리 뜻대로 놔두시다가 어려울 때 도와주세요.”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예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뭐냐? 대 자연 속에서, 생물학적 용어지만, 적응하면서 살게 되어 있어요. 적응하는 겁니다. 적응하는 당사자가 나름대로 적응하도록 “좀 가만 놔두라. 간섭 좀 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지요. 알러지로 기침을 하게 되면 시끄럽잖아요. 다른데 가서 기침을 하라고 하면 그 기침하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속으로도 그렇고 겉으로도 그렇고 “좀 건드리지 마라. 나도 괴롭다.” 하지요. 모든 인간은 그냥 사는 대로 살면 서로 서로 안 건드리기입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서로 서로 안 건드리기. 힘든 것은 비켜가기. 태풍도 비켜가고 소나기도 비켜가고 뭐든지 안 건드리고 비켜가기. 이게 우리가 익숙했던 겁니다.


그러면 비켜가고 안 건드리면 남는 것이 뭐냐? 강한 것이 남고 똑똑한 것이 남고 총기가 남게 되어 있어요. 강해야 되고 똑똑해야 되고 지혜로워야 된다는 것은 이 대자연속에서 그나마도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거든요. 이것까지 바퀴벌레 밟듯이 눌러버리면 우리는 숨을 못 쉽니다. 그나마도 숨통 트는 것은 그동안 모아둔 돈, 강함, 그리고 그동안 세상에서 경험하고 체험했던 누적된 노하우, 그거 하나 지혜라는 이름으로 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시여, 이것 건드리지 마시고 여유 좀 되시면 이것 키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굴 건드리는가?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론 하십니다. 사람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지나 소나 다 강해야 한다는 이것이 하나의 보편화된 삶의 철칙처럼 되어 있는 마당에 보다 강한 사람은 우대받고 약한 사람은 관심밖에 있지요.


우리 중에 누가누가 강한가, 누가누가 똑똑한가, 누가누가 지혜로운가, 그것의 대결장이 되고마는 그런 시대입니다. 토마스 홉스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은 만인과 만인의 투쟁의 현장이다.” 세상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투쟁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투쟁하는 그 자체가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투쟁해서 살아남자,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투쟁하지 않는 자야. 너는 네 몫의 세상도 없다.” 그런 이야기에요. 투쟁할 때만 비로소 세상이 온 몸으로 짜릿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자신의 사이트를 개설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경우, 조회 수 0, 이런 경우, 아무도 오지 않을 때 내가 죽은 자인가 산자인가, 감각이 없게 되어 있어요. 나를 뭘 로 보는가, 물로 보는가, 그런 기분 나쁨도 생기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세상이라면, 그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강한 자가 누구며 나보다 더 뛰어난 자가 누구인지를 찾고 그 투쟁을 통해서 얻어낼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바로 이것에 익숙해져 있고 길들여진 우리들이니까 “신이시여, 제발 건드리지 마시고 이런 식으로 그냥 살도록 가만 놔두세요. 이런 원리 말고 다른 원리는 비켜가게 하시고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건드리십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들끼리 모이다 보니까 누가누가 센가, 누가누가 강한가, 누가누가 돈이 많은가, 그것이 관심의 초점이 되다보니까 인간들의 의미에서 신이라는 것은 강한 것 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운 것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가 뭔가 계시는데 그 분이 신이다. 우리는 그 신보다 약하고 그 신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는데 나보다 먼저 신에 접근하는 사람이 부자 되었고 나는 그것보다 못해서 축복을 더 적게 받아서 지금 가난한 거거든요.


신의 선함을 나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나보다 아는 것이 많고 그 사람은 지도자급에 속하고 나는 신의 혜택을 적게 받아서 그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또는 시기하면서 뒤에 처져 있다는 이런 생각으로 자기 위치를 매일같이 점검하고 정리하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본적이 있느냐?” “신이라는 것을 만나기는 어떻게 만납니까? 만나면 너무 거룩하지요. 그냥 우리가 추상하고 상상할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이겁니다. 하나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오셨는데 그 방향이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과 정 반대방향의 성향을 가지고 오셔서 저쪽으로 보지 말고 이쪽으로 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모두가 지혜를 추구하고 있는 이 마당에 아무도 자진해서 미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자진해서 미련할 게, 라고 오신 그 분이 너희를 만든 창조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건드리고 시비를 걸었지요.


그리고 모두 다 강한 영웅을 찾고 있는 판국이고 힘을 가져야 영웅이 되거든요. 그런데 기대할 힘이 전혀 빠져버린, 바짝 마른 풍선처럼, 침이나 붙어 있고 구멍만 나 있는 풍선처럼 어떤 힘도 없이 바짝 마른 모습으로 하나님이 등장해놓고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나타난다는 거예요. 이런 말씀은 기존교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거론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힘이 없어서 여러분이 애 닳아 하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힘이 남아돕니다. 남아도는 힘 빼먹는 재미로 교회 오셔야지요.” 이것이 일반교회의 가르침이죠.



“여러분들이 바보라서 사기 당했습니까? 진짜 행복을 얻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다 가지고 계십니다. 신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니까. 따라서 그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신에게 배우면 여러분은 아주 총기 있다, 지혜롭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 나오셔서 그 지혜와 권능을 듬뿍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가 소비자에게 상품으로 제시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래. 나는 그것을 원했어.” 하고 구름떼같이 몰려올 것인데 정작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설교와 전도를 그렇게 해버리면 “에이, 씨.” 하고 화내면서 다 빠져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개념과 접촉이 되고 접속이 되어야 한 명이라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조차 완전히 철폐하는 식으로 반대로 가버리면 결국은 하나님 믿으려고 온 사람까지도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 하나님 말고 다른 하나님을 따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장려하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어 놓고 25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대목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과 반대로 나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가 소위 신자라서 부정할 수는 없다면 이 본문의 해석을 달리 보게 되면 새로운 것이 보일 것이다, 라고 또 생각하게 될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미련한 것이 지혜라면 미련하게 살자. 이것이 하나님이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복음이고 진리다. 그래. 미련하게 살자.”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무슨 통박이고 수작이냐 하면, 미련한 척 하는 그것을 통해서 미련을 모아서 지혜로 자기를 탈바꿈 하겠다는 지혜지향적인 자기욕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복음의 합치된다고 우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꼼수입니다. 꼼수에요!


그 다음에 뭐냐?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라고 하니까 “내가 사람한테 그냥 돈이나 권력이나 혹은 지식이나 어떤 에너지로 밑지니까 이왕 밑진 것 차라리 약하게 살면 사람들은 무시해도 하나님이 ‘강하다. 이렇게 강한 자가 다 있나.’라고 칭찬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나는 강자로서 승자가 된다.”는 통박을 또 굴립니다. 그래서 “나는 못난이. 나는 부족하다.” 이런 것은 수녀원이나 수도원. 남자하고 헤어져서 수녀원에 간다든지 머리 깎고 중이 된다든지, 그런 방식으로 해서 약한 척을 하면서 뭔가 강한 행세를 하려는 시도, 동양철학입니다.


신부들을 보세요. 결혼도 안했다, 자식도 없다, 모든 것을 포기했으니 이 세상에서 가장 미욱한 존재다? 무슨 미욱한 존재가 제주도까지 가서 강정마을 데모하고 있어요. 참 내! 내가 보기에는 권력 같은데요. 지금 강함을 자랑하고 있어요. 약함을 주워 모아서 그걸 역으로 강함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믿고 부자 되게 하옵소서, 이것도 아니다. 차라리 부자 될 가능성이 없거든 이참에 미리 포기해서 “그래. 약하게 살지만 주께서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니 나는 약한 재미로, 약하다는 이름의 실제로는 강한 재미로 한 번 살아봐야지” 이것도 하나의 꼼수.


이 둘 다가 아니라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하나 정리해야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도 닦으라고 주신 말씀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한 번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계속 죽을 때까지 건드려요. 방금 이야기한 두 가지의 그러한 하나님 말씀 이용하기는 평생에 걸쳐서 마치 사골처럼 우러나와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이 말은 십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너 말고 나, 그 이야기에요.


이 말씀 이용해서 “저 어때요?” 이거 자랑하라고 이 말씀 주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런 결단 내렸다고 “저 어때요?” 이런 수작 부리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너 말고 나에 관한 이야기,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이야기는 새삼스럽게 이렇게 살라는 요구가 아니고 이미 이 말씀대로 모든 세상은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난 이후라는 겁니다. 이 말씀에 해당되는 이 사항은 이미 이 땅에서 사건화 되어서 벌어졌어요. 벌어져버렸어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 대자연과 자기가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대자연과 나밖에 없어요. 교회 백날 수십 년 다녀도 보이는 것은 하늘이요 보이는 것은 거울 앞의 나밖에 없어요. 교회 가면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눈에 띄면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판국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본성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적응입니다, 적응. 기억나지요? 인간은 그냥 적응할 뿐이에요. 고개 숙일 때 고개 숙이고 큰소리칠 때 큰소리 치고 친절할 때 친절하고 싫어할 때는 싫어하고, 그냥 적응할 뿐이에요.


적응할 때의 그 목표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 좋으라고 적응하는 사람은 없어요. 나 밥 먹고 살기 좋으라고 적응하는 거예요. 나는 나의 일 외에는 관심 없어요. 내가 그런 식으로 평생을 살았다 칩시다. 세상 바뀝니까? 세상 바뀌어요?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해도 세상 안 바뀌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몰아냈지만 400년 후에 일본한테 합병 당했어요. 열 두 척 배도 다 날라 가고 없습니다. 안 바뀌었어요. 안 바뀌어요. “내가 이 세상에서 적응해서 내 식구들 밥 먹고 잘 살았습니다. 마이 웨이, 나의 길을 가련다.” 백날 해도 네 길을 가든 말든 세상은 안 바뀌었다니까요.


그러나 세상을 바뀌게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오늘 본문 1장 25절은 세상 자체를 바꾸기 위함이지 “이렇게 살면 너 편하게 산다.”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말씀은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큰 소리 치나 안치나 소용없는 것 알아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말씀은 “말씀대로 살 테니까 행복은 언제 옵니까?” 행복 안 와요. 말씀은 우리 행복을 위해서 준 게 아닙니다. 너 말고 나, 하나님 이야기에요.


그 십자가 사건이 있을 때 환경은 헬라인과 유대인이 환경을 지배했습니다. 헬라사상과 히브리사상이 세상을 주도했던 시대입니다. 거기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원했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적을 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건은 인간의 예상 밖으로 벗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예상 밖으로 벗어난 사건을 추적해서 그 사건을 모아서 하나님이 법칙을 발견하면 그 법칙을 아는 자가 하나님과 합류한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기적을 원했던 이유입니다. “너희들은 신의 기적의 법칙을 모르지? 우리는 아니까 우리는 구원받고 너희는 구원 받지 못한다.” 이게 유대인들의 주장이고 헬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헬라인의 사상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와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 겁을 내서 듣기 싫다는 표정들인데 후딱 지나가면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이 있고 신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이 먼저 있고 자연에서 신이 나온 거예요. 히브리인들은 신이 먼저 있고 신이 천지를 창조했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헬라인들은 자연이 먼저에요. 자연이 먼저 있고 자연에서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신들이 나와요. 하나의 신이 아니고 여러 신들이 나오는데 그 나온 신들이 하나같이 망나니입니다.


망나니라는 말은 뭐냐 하면, 신은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을 잘 달랠 필요가 있거든요. 자연 속에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신 하나하나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는 겁니다. 대리자로 만들어서 자기 속에 있는 그 더러운 본성을 신에게 다 입혀서 신이나 너나 똑같지, 그렇게 해서 신마저도 자연 속에 복종하는, 대자연속에 적응하는 인간의 이 적응 자체를 인간들이 스스로 정당화 하는 것이 세상의 지혜라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 신들이라는 것, 지나 개나 나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들어보니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일치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감사할 때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는 “신들이 뭐가 필요해? 신이나 인간이나 똑같지 뭐. 신도 성질이나 내고 나도 성질내고. 신도 성질내는데 나도 좀 성질내면 어떤데?” 그게 인간의 적응에서 오는 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신을 안 믿어요. 하지만 신을 인정해요. 신에게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연에 적응해야 될 인간이, 여기서 적응한다는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오묘한 지혜를 터득해서 인생의 노하우를 깨달아서 살아야 될 인간이 만약에 신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버리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냐 하면, IS같은 테러집단처럼 신에게 순교하는 집단이 돼요.


그게 부작용이에요. 모든 것은 신의 주권아래 있다. 신들이 알아서 하는데 내가 할 것이 뭐가 있나? 어서 신과 만나고 싶다. 만나는 방법은 죽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기독교와 싸워서 죽으면 돼요. 알라신을 위해서 죽는 것이 제일 빠른 자살방법인데 그 자살방법은 하늘의 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따라서 자기정체성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왕 인생 괴롭고 공부하기도 싫은데, 수학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데 인간 사는 것 한번 살지 두 번 사나, 해서 멋지게 죽는 방법은 자진해서 테러단체에 입소해서 장렬하게 죽는 것, 그게 신을 믿는 제일 극단의 모습이에요.


신을 위해서 장렬하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데요. 자기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뭐라고 비아냥대겠습니까? 머뭇거리는 자들, 두 마음을 가진 자들, 믿는다고 하지만 나처럼 용기는 없는 비겁한 자들, 배신자들, 세상 돈에 매이고 명예에 매인 배신자들, 그렇게 욕하는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는 겁니다. 그렇게 욕을 하면 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은 더욱더 증강이 되고,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이 되는 겁니다. “신을 믿어야지. 왜? 내가 강할 수 있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다.”


제가 테러집단을 예로 들었지만 이슬람 테러집단의 이야기만 될까요? 기독교 선교단체 이야기는 아닙니까? 마찬가지거든요. 수도원의 수녀들보고도 하는 이야기거든요. 신이 인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신에 대처하는 인간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 가지고 신을 조립해야 된다는 그 헬라적인 이방인들의 지혜, 거기에 비해서 히브리인들은 “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기적으로 나타난다. 그 기적을 모으면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을 수용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이 히브리적인 사고방식, 이 세상에는 이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그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뭐냐? 그게 지혜라는 거예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신도 대 자연 밑에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다만 믿는 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대 자연만 믿는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숨어 있으며 강함은 어떤 약함 속에 있는가? 그것은 제가 십자가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옛날에 반짝 하고 있다가 사라진 사건인데 그 십자가 사건에 어떻게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생깁니다. 십자가는 2천 년 전의 옛날이야기인데요. 그 십자가사건에 우리가 어떻게 뛰어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강함에 통합되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는다는 말이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하나님이 대 자연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인간을 비켜가지 않고 인간을 상대로 해서 대 자연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걸 코끼리로 하지 않고 토끼로 하지 않고 인간을 상대로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상대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간을 상대로 해서 인간의 내부의 어떤 문제로 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뭔가 게워내게 하는 거예요. 토해내게 하는 요소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점잖게 이야기해서 분비물이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토사물을 내게 하는 거예요.


아침부터 좀 그렇지만 보통 토한다는 말이 더 좋아요. 그냥 분비물보다 토한다는 말이 더 좋은데. 보통 금요일 밤에 환락가 어두운 골목에 보면 여기저기서 토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친구가 옆에서 뭐 합니까? 등 두드려주지요. 토한다는 것은 상당히 강제성이 있어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뭐냐? 이 세상, 하나님의 창조가 훼손되고 완전히 멸망되어야 될 것이 각자 인간 속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그 내부의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은 자꾸 누가 내 인생을 밀어내요. 내 속의 것을 자꾸 토하라고 등을 두드려요. 저는 번지점프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무서워서 안 한 것이 아니고 할 기회가 없어서 해 본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번지점프 하는 것을 보니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용감하더니만 그 점프대 끝에 서보니까 자꾸 뒤로 물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뒤에 있는 모자 쓴 조교 같은 사람이 자꾸 밀어내요. 어디로 밀어내는가? 나락이 보이는 곳, 절벽이 보이는 곳, 절대죽음이 보이는 곳으로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발에 끈이 묶여 있긴 하지만 쭈뼛쭈뼛 밀리는 거예요. 주님이 조교 같아요. 우리는 적응하는 솜씨밖에 없어요. 신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만 있으면 충분하고.


따라서 될 수 있으면 힘 있고 지혜롭고 남한테 속임 안당하고, 그런 쪽으로 우린 피신해서 내가 나 사는 궁리밖에 할 줄 모르거든요. 그런데 누가 와서 자꾸 등을 미는 거예요. 밀고 칠 때 자꾸 욱, 하고 토해내라는 겁니다. 뭘 토하는가? 사람의 강함과 사람의 지혜를 추구했던 그 본성을 성도에게는 토해내게 하시는 겁니다. “네가 이런 것 가지고 네 목숨 부지하려고 애썼잖아.” 그것을 욱, 욱, 하고 자꾸 드러내고 토해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비로소 나의 등을 두드릴 때에 우리는 뭐라고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여기서 약함과 강함이라는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약함과 강함과 비교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문둥병자 열 명이 있었습니다. 열 명 다 문둥병자에요. 남들한테 욕 얻어먹고 저주받고 산다는 것이 힘이 들지요. 사람들과 합세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희망이 있어요. 내가 몸만 건강하다면 그들과 같이 스포츠도 즐기고 웃기도 할 텐데 지금 내 몸이 문둥병자라서 합류하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 저주받은 자, 이렇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괴롭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소문이 들렸어요. 어떤 병도 못 고치는 병이 없다. 문둥병자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병도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그것을 강함으로 받아들여진 겁니다. 자기는 약하고 주님은 강하니까 부탁할 것, 마지막 기대할 것은 강한 그분에게 기댈 것 밖에는 없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열 명 다 병이 나았어요. 그러니까 혜택 본 겁니다. 소원성취 했어요. 예수님이 참 좋은 분이지요.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병이 나았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병이 나은 열 명 중에서 그 중에 한 명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왔어요. 자기가 본전 찾았으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았으면 되었지 왜 찾아오지요? 병이 나은 상태에서 찾아왔어요. 주님께서 비로소 이야기합니다. 열 명 가운데 나를 알아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들이 비록 나로부터 병 고치는 능력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전히 그 사람은 자기 안에 세상에 적응해야 된다는 그 자기 안에 그냥 있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러나 열 명 중에 돌아온 그 한 문둥병자인 사마리아사람은 자기 속의 것을 바깥으로 토해낸 겁니다. 주께서 오신 것은 내 문둥병을 낫게 함이 아니고 문둥병이라는 것을 계기로 해서 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는, 나를 망하게 하고 이 대자연을 망하게 했던 그 죄라는 것을 주께서 병을 낫는 과정을 통해서 내 속에 들어 있는, 내 힘으로는 끄집어낼 수 없는, 내 능력으로는 끄집어낼 수 없는 나의 본질을 바깥으로 끄집어내 줬습니다. “주께서는 내 죄 때문에 오셨지요. 내 병 낫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내 죄 때문에 오셨지요.”라고 고백하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고백을 유도하면서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십자가에 죽으러 왔다는 사실, 그 십자사건을 미리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 문둥병 열 명의 병을 낫게 한 겁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몰라요. 그냥 자연에 적응해서 나와 내 가족이 살기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 봐야 이 대자연이 달라지지 않고 그것은 천국도 아니고 영생도 아닙니다. 구원 못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거예요. 구원하러 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자체가 뭔지를 우리는 우리에게 질문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도 안 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하면 내 속의 것을 안 들킬까, 그것에 급급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나는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인간이야.”라고 짐작은 하지만 그 원인이 무엇에 있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끄집어내 봐야 아는 겁니다. 사르트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을 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만들기 나름이지,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기 나름이고 나의 본질은 내가 매일 만들기 나름이기에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결국 사르트르가 하는 말은 뭐냐?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냥 깊이 생각할 것 없이 하루하루 세상 적응하면서 사는 그것이 전부라는 겁니다. 그게 실존주의에요. 노벨문학상 까지 거부했던 그 사람이 내놓은 결론이 뭐냐? “사람? 그냥 하루하루 사는 거야.” 이게 결론이에요. 십자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없어요. 자기 자신을 파악하려 하다가 그것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실패했다면 나머지 사람도 다 실패하지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적응해야지, 적응해야 돼, 그것밖에 몰라요.


그래서 『구토』라는 소설에 보면 사르트르가 돌멩이를 보고 구토를 느낍니다. 즉자존재, 돌멩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고 메스꺼움을 느낀다는 거예요. 진리도 모르면서 또는 진리에 관심도 없으면서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어지럽다는 거예요. 차라리 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았으면 더 좋을 뻔 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육과 영의 간격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약속된 완성입니다.


그러면 구약에 그런 간격이 있다는 말인데 그 간격이 어디에 있느냐?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여리고성 함락작전이 나옵니다. 여리고성 함락작전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공격해서 무너뜨렸다는 그 생각만 하는데 여러분, 그렇게 보시면 안 되고요. 여리고성 사람들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세요. “왜, 저 여호와 신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이 여리고성을 건드립니까? 그냥 비켜가세요. 어이! 이스라엘! 그냥 너 가던 길로 가. 제발 우리 건드리지 말고. 건드리면 귀찮아.”


사람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자꾸 건드리기에 귀찮아서 성을 쌓는 거예요. 여리고성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왜 자기를 건드려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여리고성 공격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누구냐?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왜 자기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해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또 모르고 있어요. 이러나저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심도 없어요. 왜? 자기들은 적응하기 바쁘기 때문에, 자기 몸만 살면 그만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편하면 끝나는 거예요.


집집마다 가훈은 “바르게 살자.” “참되고 거룩하게.” 다 그것 헛소리입니다. 제일 좋은 가훈을 제가 알려 드려요? 알려 드리겠습니다. “편하게 살자.” 신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지 말자는 것.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김 혜자가 이야기했지만 제발 좀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어린애들, 추 사랑이든 누구든 다 뭐냐?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간섭하지 말라. 신이라는 권위도 나는 귀찮다 이거예요. 여리고성 쪽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성은 그대로 두고 이스라엘도 따로 성 지으면 되잖아요. 왜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공격해야 됩니까? 그 이유를 그들은 몰라요.


여호수아 5장에 보니까 여리고성 공격 이전에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할례가 뭐냐 하면, 육과 영을 분리시키는 간격을 만드는 겁니다. 간격. 인간은 결국에는 자기한테 귀소 되고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걸 잘라놓겠다는 거예요. 천지 창조와 인간창조가 결코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인간의 기능은 따로 있고, 인간의 목적은 따로 있고 하나님 존재목적은 따로 있음의 그 간격을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여리고성 공격을 못해요. 할례를 행한 뒤에 자기 육이 부정되고 난 뒤에 그 할례의 취지가 이 지상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그게 어떻게 단단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지혜가 되고 그 단단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함이 되는지 그 할례, 간격자체가 지혜가 되고 그 간격 자체가 강함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멀쩡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멀쩡한 여리고성을 공격해서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차이 남, 그게 지혜고 그게 십자가에요. 벌어짐. “하나님, 제가 목사님 설교를 듣고 복음을 알았습니다. 복음을 어디에 둘까요?” 복음은 우리한테 두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소지대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어떻게 갈라지게 하는가? 우리가 잊어버린다?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신이고 뭐고 내가 편하게 사는 것 이것 밖에 없습니다.”라는 것, 그런 인간의 자리에다가 고정 배치하는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보신 것들 중에 새 생명운동 같은 것이 있을 거예요.


지방교회, 위트니스리, 워치만 니, 사람들이 그런 사상에 많이 빠져 있어요. 한국교회가 너무나 돈만 밝히고 더럽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찾아서 자기만의 이상적 단체, 교회를 만든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겁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이 위치에 있지만 점점 제자단계를 높여가면 신과 여러분이 하나가 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받았으면 여러분이 신이고 곧 신이 곧 여러분이고 여러분이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동양철학과 관련되어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복음처럼 유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묻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입니까? 한 덩어리에요? 아니지요. 아들이 언제 아버지가 되었습니까? 아들은 아들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한 덩어리 아닙니다. 그런 주장에 속아 넘어가면 안돼요. 하나님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려고 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참된 인간이 뭐냐? 간격이 보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난 그 간격을 보고 있는 인간, 그 간격 앞에서 나는 죄인인데 주님께서, 아들께서 우리 죄를 대속해서 우리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는 그런 관계가 지속되고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한 우리는 우리 자랑하지 않으면서 모든 공로와 은혜를 받고 있음을 느끼면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공로만 높이는 거예요.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내가 하나님과 어떤 간격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한 덩어리 되는 이것이 하나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 있고 예수님은 예수님아들 자리에 있으면서 그 두 분이 하나가 되지요. 그 간격, 그 관계,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인 그 관계가 살아 있는 그 관계에 있음으로서 하나가 되듯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런 관계가 계속 유지될 때 그 하나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둘이 아닌, 오직 주님께서 다 이룬 최종적이고 확정된 관계, 그 관계를 지속하는 겁니다. 처음에 제가 설교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지혜, 이 강함을 내가 어떻게 가지게 되면 이 말씀대로, 오늘 본문 말씀대로 나도 강하게 되고 지혜롭게 될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다시 자기를 우상화시키는 작업이에요. “주여, 이 말씀대로 내가 살아서 이제부터는 남이 무시해도 주님 앞에 강한자로 보이고 남이 무시해도 주님 앞에서 지혜롭게 보이겠습니다.” 이것은 노림수가 있어요. 세상에서 실패한 것 하나님 빌미로 해서 기죽지 않으려는 하나의 인간들의 성공욕망의 화신에 불과한 거예요.


정작 십자가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간격을 만들어냅니다. “네가 어떤 지경에 있더라도 네 처지가 고마운 줄 알아라.” 여리고성이 무슨 힘으로 무너졌습니까? 할례가 주는 차이의 힘으로, 차이가 유지되면 어떤 것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어떤 지혜로? 그 차이, 주님 앞에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고 주님의 은혜로 삶을 알게 되면 여리고성이 무너짐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하고 네버랜드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 간격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차이를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날마다 얻어먹는 신세인데 어떻게 얻어먹는가? 맨날 우리는 편하게 살고 적응하는 것 밖에 모르니까 천국에 못가니까 우리 능력으로 안 된다는 이 사실을 되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의도적으로 간격을 유지한 그 차이, 주님과 나 사이의 그 차이, 내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께서 오심으로서 생긴 그 벌어짐이 우리를 영생 얻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매일 같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뭐밖에 없는가 하면, 구원받은 내가 자랑거리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굉장히 견고합니다. 내가 너희 죄를 대속했다는 그 관계는 굉장히 견고하고 그게 항상 우리를 살려내는 지혜입니다. 만약에 그럴 일이 없겠지만 누군가 갑자기 여러분 중에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 주위에서 “부러워라. 얼마나 기도를 오래 했으면 부자가 되었겠나.” 할 때 뭐라고 해야 됩니까? 내가 부자 되었다는 이 강함 보다도 부자 되든 뭐가되든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인이 맞다는 그것을 유지하는 그 견고함이 그게 강함인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똑같은 곡식에서 자라난 열매를 먹고 살아갑니다. 제가 한 말은 인간은 똑같다는 이야기에요. 가난하다고 돌멩이 먹고 부자라고 곡물 먹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먹는 것은 거의 대동소이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왕이나 신하나 백성이나 종이나 다 똑같아요, 전부다. 똑같습니다. 똑같기 때문에, 별 다른 게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만 쳐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라는 할례언약의 완성이 와서 우리를 갈라 치게 되면 우리는 분명히 내가 하나인줄 알았는데 내 속에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시고 늘 구원해 내시는 십자가지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그 갈라짐을 통해서 상대방 마주보면서 있을 때 이것은 여러분이 순교할 필요도 없고요, 일부러 애써 고난 받을 필요도 없고요,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서 죄인 됨을 인정하면서 그냥 우리가 기대치 않았던 편함으로 그냥 사세요. 갈라지게 하는 것은 주님의 몫이고 주님의 일이니까 우리는 그냥 사세요.


성공이 실패고 실패가 성공이고, 강함이든 지혜든 그런 것 의미 없어요. 강해도 주님이 강하고 지혜로운 것도 주님이 지혜롭지, 그 지혜로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따로 지혜롭고 따로 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가 날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더러운 것이 토해지게 해 주옵소서. 나는 솔직히 이것이 목적입니다, 라는 그것이 성도 아닌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지만 성도에게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늘 쓰레기처럼 내다버려진다는 이 사실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 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