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고전 1장 17-21(미련한 복음)1409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21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7-2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전도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 멸망하는 자가 누구며 미련한 자가 누구냐 하는 그 내용이 함유된 채 전도되어야 합니다. 전도할 때 미련한 자 멸망하는 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19절에 보면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라는 것도 겸하여서 진행되기에 전도는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총명과 악수하거나 협상하거나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설득해서, 인간을 납득시켜서 전도하는 방식은 일체 용납될 수가 없어요. 인간의 지혜에 호소해서, 인간의 능력 총명에 호소해서 그저 사람 하나 건져서 천국 보내겠다는 것은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와 총명에 의지하지 않고, 그것과 접선하지 않고 도를 전하게 되면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지혜와 총명으로 무장되어 있는데 그 것과 접속을 피해서 이야기를 해 버리면 결국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게 전도에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게 만드는 그것이 전도라는 말이지요. 어쨌든간에 믿게해서 천국 보내려 하는 것은 전도와 정 반대되는 나쁜 전도, 전도가 아니게 되는 전도가 되는 겁니다.
이걸 알았더니 내가 구원받고 천국가게 되었다는 이런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전개되어야 되겠지요. 배가 바다를 지나갈 때 바닷물위에서 곱게 지나가는 경우는 없어요. 배가 지나가면 반드시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전도가 진행되면 인간의 지혜와 총명은 구원받는데 하등 전혀 보탬이 되지 않고 훼방만 된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총 집대성 한 것이 뭐냐? 사람들이 흔히 그걸 철학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철학이 결국 어디로 모이는가? 신학으로 모입니다. 결국 신학이 전도를 방해한다, 그렇게 보면 되는 겁니다.
신학이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심성이 총 집결된 것이고 그 집결된 심성, 하나님에 대한 염원, 종교성, 이런 것들을 문자화 시키고 논리화 시키고 체계화 시킨 것이 신학이거든요. 그래서 신학은 오히려 전도를 방해하고 있는 거지요. 신학의 최고 집대성 된 것, 신학의 알맹이로 뭉쳐진 것이 뭐냐? 삼위일체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전도를 방해하는 겁니다.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천국을 안가겠다는 의도밖에 안돼요. 신학자들, 또는 목사들은 성경을 통해서 일반 아마추어들이 모르는 것을 배웠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들은 목사가 갖고 있는 동일한 인식을 갖게 되면서 천국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게 돼요.
그런데 목사의 그러한 자세 자체가 천국 가고자 하는 자도 막는다는 사실을 목사 본인이 수긍을 못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의 지혜와 구원이 관계없다고 분명히 하시고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십자가의 도가 전해지면 이런 자는 멸망합니다, 이런 자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라는 것이 부수적으로 드러나야 돼요.
드러나면서 그 멸망 받는 자, 미련한 자가 누구냐 하면, 인간의 지혜와 총명에 의지해서 자기 자신을 천국에 집어넣으려 하는 그 모든 자가 멸망해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멸망하는 자들을 드러내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가 지금 일하고 있는 증거가 되지요. 십자가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그것을 모아서 능력으로 전환하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도 사도바울의 의견과 전혀 다른 의견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국을 만들었으면 그 자리가 가득 차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자리를 만들면 그 빈자리가 가득 찰 때 만드신 분의 자존심과 체면이 선다고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우리네 상식이 그러하니 하나님도 천국을 만들었으면 가득가득 차야 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을 거라고 여기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으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이유가 뭐냐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지금 컴퓨터가 꽉 막혔는데 지금 천국도 꽉 막혀 있어요. 구원으로 가는 길이 꽉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터주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터주는 방식이 “너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누가 멸망하는 자며 누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자인지를 고발하는 쪽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20절에 보면,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방침을 확정지었다는 그 사실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을 받은 사람만이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쪽으로 일을 하시는지 지금부터 그 내막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 우리를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뀌어야 돼요.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뀌어야 됩니다. 하나님에서 예수로 바뀌려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조작된 것이고 상상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그것을 인정해 줘야 돼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그거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만드신 분을 모른다고 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도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경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이 창세기에 나오니까 그걸 그대로 자기한테 인용해서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이 나라는 주체에 그대로 아무 변동 없이 쑥 하고 들어오는 줄로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왜곡이 일어나고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 중심체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성경에 문자로 적혀 있으니까 그 문자가 나에게 그대로 살아 있다고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이 전에 구약성경에 정통했다는 사람들이 다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거예요. “우리는 구약 성경을 보면서 신학의 토대를 잡았고 그 잡힌 토대대로 메시아를 기다렸다. 하지만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다.”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 메시아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틀어진 거예요. 성경을 문자로 해독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능력으로 나는 이런 문제가 있음을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일을 저질러야 돼요. 일을 저질러서 뭔가 그 저지른 대상,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혀주고 그 상처 입힌 하나님이 내게 다가와 줘야 ‘아, 내가 이런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겁니다. 30년, 40년, 목사 장로 된 들 뭐합니까? 교회에서 바리새인 다 만들어놓았는데. “성경 몇 독 했습니까?” “백독 했습니다.” “구원 받겠네요.”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성경 내용 달달 다 외웁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했고 유대인들이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공부하라. 교회에서 양육 받으면 구원받습니다.”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육 받는 방법이 뭐냐? 제자훈련 받는 방법이 뭐냐? 지혜와 총명에 호소하는 겁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도덕적 착함과 양심과 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추겨서 착한 사람을 더욱더 착한 사람이라고 부추겨 주면,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성화되었다고 해주면, 마치 천국 가는 선한 백성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오히려 천국을 가로막는 방법이에요. 그것을 비켜갈 줄 알아야 돼요.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제자훈련 같은 것들. 제자훈련은 자기자존심의 증강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내가 이만큼 많이 안다는 것, 내가 똑똑하고 이만큼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 누적된 지식의 힘으로 천국의 힘을 노크해 보겠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교회에서 수용해 주는 겁니다.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이것은 확정된 사실입니다.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확정되었습니다. 반드시 알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알지 못하는 것을 지혜로 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한테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의 모든 지혜를 부정해 버리고 이것을 삭제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나의 지혜나 나의 총기 없이 천국 가는 방법 그것만 남아요. 나의 지혜와 나의 총기 나의 똑똑함의 시도 없이, 내가 천국 가려고 부지런히 설치는 것 없이 죽어서 눈 떠보니 천국이더라,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운인가? 교회라는 것이 아무 의미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소용없다면 차라리 안 가는 것이 돈 버는데 편하지 않을까? 이런 통박이 작용되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원에 가는 길이 막혔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길이 있어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는 겁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인간이 십자가의 능력을 소지하거나 장악하거나 관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 말고, ‘나를 만드신 분은 누구지? 하나님, 그래,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지.’ 그렇게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과 상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십자가 능력 앞에서 너를 다시 세우라는 말이지요.
자꾸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 찾지 말고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넘어오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넘어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려는 의도가 강렬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호와를 잘 섬겼는데 이왕 섬기는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잘 섬기겠다고 한 짓이 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고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자신하고 확신했습니다. 왜냐?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여호와만 유일신이고 다른 신을 섬기는 그것은 우상숭배에 해당되기에 그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우리하고 같은 아담에 속한 사람이라서 하나님 외에 어떤 신을 섬겨도 안 된다는 분명함이 있었어요. 그 분명함이 끝이 뭐였는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자체를 이단으로 만드는 겁니다. 사울이 잘못했다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런 대우를 받기 위해서 이 땅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사울이나 우리나 같은 족속이에요. 같은 아담의 족속이니까. 하지만 사울이 그런 일을 했다는 말은 사울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제대로 봤을 때 예수는 이단이에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는 이단이에요. 그게 정답이에요. 예수는 우리 눈에 이단으로 보이는 분으로 오신 거예요. 우리에게 이단으로 보이는 그 면면을 우리 쪽에서 삭제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에요. 그 미쳤다는 것을 빼내고 내가 생각했던 자비로운 하나님을 결부시켜서 예수님은 착한 분이라고 엮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인간의 지혜고 인간의 총명입니다. “내가 잘난 것처럼 주님도 잘났을 것이다. 못난 인간은 예수 믿지 말라. 잘난 나는 예수 믿겠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이단적 요소, 미친 요소를 삭제하지 않고 남겨둬 버리면 예수 믿는 놈들이 미친놈이에요. 그리고 그 예수 믿는 자체가 내가 이 땅에서 미친 사람이라는 대우를 받지 않는 이상은 그것은 정상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에요. 구약성경에 보게 되면 이사야 6장에 천사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그 모습을 봤어요. 진짜 천국을 봤어요. 천사들의 날개가 여섯 개가 있는데 그 여섯 개가 왜 필요하냐 하면, 4개의 날개를 가지고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자기 얼굴을 가려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얼굴을 가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얼굴을 서로 대고 마주보거든요. 이것은 너한테는 네 얼굴이 있고 나한테는 내 얼굴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얼굴을 가진 이상은 모든 수치는 얼굴에 올라와요. 고속버스 탔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검은 봉지를 준비해놓았다가 얼굴에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고 아무데나 누면 돼요. 왜냐하면 얼굴은 안 보이니까. 수치가 얼굴에 나타나지요.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얼굴로 구원을 해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 있는 그 천사, 출애굽기 25장 20절에 보면 천사의 두 얼굴이 어디를 향하느냐 하면,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속죄소, 죄를 용서하는 자리를 얼굴을 향하여 쳐다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 말고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피해갑니다.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아닌 분이 이 땅에 제대로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그 유일한 장소는 은밀한 곳, 일반인들은 출입하지 못하고 피 묻은 옷을 입고 기름 부은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갈 수 있는, 7월 10일 한차례만 들어갈 수 있는 그 깊숙한 그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는데 나타내는 것도 그냥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속죄소를 통해서 나타내요.
속죄소가 뭐냐 하면, 죄를 용서하는 유일하는 장소가 속죄소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죄를 갖고 있으니까 엉터리 하나님, 엉터리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총 집합해서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서 자기들끼리 연대감을 가지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네가 아는 지혜와 내가 아는 지혜를 공통적으로 정리한 그런 신학을 만들어서 그 신학가운데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심어 놓은 거예요. 거기에는 뭐가 묻어 있는가? 피가 묻어 있는 겁니다.
그 피가 묻어 있고 죽었다는 것은……, 일반세상에서 죽었다는 이것은 수치를 의미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소식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에요. 그만큼 수치스러워요. 하나님은 안 계시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나오는 이야기고 화이트헤드철학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유대교 신비주의, 이슬람 신비주의, 천주교신비주의에서 다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왜 만들지 말라고 했는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에. 보이는 것 가지고 보이지 않는 분에 접속할 수 없다. 그래서 이슬람의 모든 성전에서는 일체의 형상을 만들지 않고 대신 글자를 가지고 모든 것을 모자이크로 한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보이는 것을 기피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는 이 자체가 스스로 보기에도 고상해 보입니까? 여러분이 힌두교의 유적들을 보세요. 캄보디아에 힌두교 유적들이 많거든요. 그들이 보이는 신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총기와 지혜가 추구하는 방향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읍시다. 보이는 것은 우상입니다.” 이 정도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다른 종교도 다 인정하는 겁니다. 이걸 넘어서는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다른 세계를 상징적으로 믿는다고 되는 거예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임제선사라는 유명한 도사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스님을 만나면 스님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야, 이렇게 성스러운 사람을 다 봤는가?’ 그런 성스러운 사람 소주 한 세병 먹고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다 나오는 거예요. 구약성경에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접속하는 유일한 장소는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속죄소고 그 속죄소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사장만 들어가는데 그 제사장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돼요.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야 될 죄인이라는 그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한 몸 죽어서 다시 태어나면 주님 만나겠지, 라는 이것도 다른 종교에 다 있는 거예요. 기독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다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점치는 데서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이 처음에는 속죄소에서 피와 만나는데 그 추상적 얼굴이 지상에 구체화된 얼굴로 나타날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수치스러운 얼굴로 나타나는 겁니다. 부끄러운 얼굴로.
시편 44편 3절에 보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다. 사람이 수치스럽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에요. 수치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도 관심이 없을뿐더러 보다 더 관심 없는 것은 꼴보기 싫은 것에도 우리는 얼굴을 돌리고 외면해 버립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에요. 메시아가 안 온 것이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저 넘어 세계에 메시아가 계시다? 그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인간의 지혜와 총기, 도를 닦고 또 닦으면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환상이고 보이지 않는 공(空)의 세계가 있다는 이것은 불교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식불교라는 것이 있어요. 초기불교에서 복잡하게 나와요. 거기서 나오는 주장이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이야기해요. 완전히 신의 주권사상 같아요. 그게 아니고 지금 구약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왔습니다. 왔는데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보여요. 가시성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나라의 비가시성은 그 가시성 속에 있다, 눈에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거예요. 3년 동안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도 못 봤어요. 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정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자기가 생각한 자기 세계 속에 들어왔다고 여기는, “예수님이여, 내 세계 속에 들어와서 내가 아쉬운 것, 어려운 것, 구원 되는 것을 도우소서.”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세계에 모시고 난 뒤에 예수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쳐놓은 그 경계 안에는 없었어요. 있는데 없었어요. 있어요, 없어요. 나중에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할 수밖에 없어요. 있지만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있지만 그동안 예수님 따라다닌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예수님을 기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어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이사야 53장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귀히 여기지 않았다. 이 말의 핵심은 뭐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식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의 총기와 지혜, 자기 실력으로, 자기 능력으로 눈치 채거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총기와 지혜를 의도적으로 피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안 오신 게 아니에요. 막연하게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일관된 계획이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옵니다. 10장 21절에,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네가 나를 보고 있지만 너는 나를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나를 보고 있지? 하지만 내가 누군지는 너희는 몰라.”라고 하면서 사신 거예요. 그것은 결국 뭐냐, 인간이라는 이 몸 자체가 인간 본인이 ‘내 문제가 뭐지?’ 해서 자기 문제를 본인이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예요. 다만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기에 여기 있는 나를 계속 꾸역꾸역 살려내게 되면 그것이 내가 나에게 책임을 다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오늘도 내 최선을 다 했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정도 이야기했으면 여러분 생각은 이렇게 나와야 돼요. “목사님의 주장이 맞다면 그렇다면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 땅에서 어떤 수치를 당해도 그것은 오히려 수치를 당하는 자체가 주께서 저를 구원하는 하나의 작용이군요. 그것 수용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가치를 자폭하듯이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자기만큼은 깨끗하게 유지되고 마지막까지 설사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자기 가치는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18세기 나다나엘 호손이 지은 유명한 소설 『주홍글씨』라는 것이 있어요. 주홍글씨라는 소설의 내용을 잠간 언급하겠습니다. 어떤 여인이 미국 동부에 이민을 왔어요. 남편이 뒤 따라간다고 하고 여자를 먼저 보냈다 이 말이지요. 혼자 먼저 왔는데 남편이 뒤따라온다 해놓고는 소식이 없는 거예요.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남편은 죽었지 이제 그 여자는 처녀나 마찬가지지요. 영국에서 결혼했지 미국에서는 결혼한 것도 아니니까. 그걸 광고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어떤 목사하고 사랑에 빠졌지요. 거기서 펄(진주)이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목사는 그게 처녀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이 본국에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 소설 내용의 환경이 17세기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이 간음죄는 돌로 쳐 죽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겠다고 법을 지키던 그 시대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처녀가 애를 낳았으니 마리아도 아니면서 분명히 간음을 했지요. 애 아빠 이름 대라고 하니까 이름 절대 안 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간음(Adultery)을 했다는 표시인 A라는 글자를 여자의 옷에 새깁니다.
그러나 여인은 남들이 뭐라고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괜찮아요. 주변의 어떤 멸시와 천대가 온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사랑했기에 떳떳한 거예요. 주홍글씨라는 수치, 동네방네 간음한 여인이라고, 애들부터 어른까지 온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받을수록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증거의 혹독한 대가라고 여기고 입을 다물고 애 아빠가 누군지를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는 누구보다 올바른 진리를 전하고 이 땅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의 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설교도 하고 주례도 하고 심지어 교수대에 올라서 여자에게 심판도 했던 그 목사가 그 애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목사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쪼그라들고 있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은 본국에서 건너와서 자기 아내와 바람피운 남자를 정신적으로 구박을 하고, 결국 그 목사는 교수대에서 죄를 고백하고 죽지요. 여자는 환희에 차고. 여자가 자신을 질타하는 군중들 속에 자기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수치를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견디겠다. 군중들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수치도 감수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세상의 지혜와 총명과는 완벽하게 대치가 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산다는 자체가 아닌 것 같지만 남을 피해 입힌 대가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남에게 이미 피해와 수모를 주고 있습니다. 왜? 마지막에 나만 살아야 되기 때문에.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내 새끼, 내가 가족만 살아남아야 되기에. 그래놓고 우리는 뻔뻔스럽게도 우리는, 자기가 산다는 그 자체를 성공했다고 자기가 자기에게 책임을 다한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수치스런 얼굴을 외면해버리고 똑같은 낯짝들 자기밖에 모르는 낯짝들만 거리에서 대했기에 “네가 그렇게 살아? 나도 너 못지않아. 누구 얼굴이 더 빛나는지 한 번 해 봐?”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신학? 누가 더 똑똑한지 대결해 볼까? 삼위일체 누가 더 잘 설명하는지 대결해 볼까? 십자가에 대해서 누가 잘 설명하는지 대결해 볼까? 성경 누가 몇 독 했는지 대결해 볼까? 이것은 속죄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런 입장이에요. 잘나고 똑똑하고 말씀대로 살고 십일조 하고 예배참석 다 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짓 한 겁니다. 주님께서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악담을 하신 대상이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에요. 말씀의 전공자들. 주홍글씨라는 그 소설은 그 당시 소위 남에게 스승노릇 하고 있던 목사들을 향하여 질책하듯이 쓴 소설이에요.
요한복음 8장에서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을 때 고소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만약에 그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바리새인편에 들었을 거예요. 그들 보기에 예수님이 똑똑한 분인 줄 알았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모든 수치를 다 가지고 가신 분이라고 생각 못하고, “너희들이 기피하는 수치를 내가 다 가져간다.” 이렇게 우리가 당하는 수치를 다 가져가시는 분인 줄 모르고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제대로 말씀 지키면서 사는 훌륭한 스승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간음한 여인을 즉석에서 죽이지 않고 끌고 예수 앞에 와서 “당신이 그만큼 똑똑한 스승이라면서? 그렇다면 이 문제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세요.”라고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내동댕이쳐진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중에서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이 중에서 수치를 품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은 돌로 쳐라.” 그렇게 된 거예요.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그 말 듣고 회개했으면 되는데 다 들었던 돌을 땅에 던지고 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자기 낯짝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 문제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설교단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도망치기 바쁘고 숨기 바빠요. 자기의 가치를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왜 태어났는지, 전혀 우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덩어리, 이 덩어리 어떻게 해볼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집에 어머니를 찾아 왔습니다. 요양사와 대화하는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추석 명절인데 왜 우리 집에 음식이 없노?” 요양사가 하는 말이, “며느리가 많이 하고 있습니다.”하고 거짓말을 했어요. 요양사가 거짓말을 하니까 어머니가 확인을 하려고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들렸어요. “얘야, 명절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고 “명절인데, 명절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
왜 명절이라는 말을 앞에 붙였을까? 명절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이것을 반어법이라 하는 겁니다. 반대로 말을 해서 오히려 의사를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더라도 너는 내 말을 듣지 말고 많이 해 줄 때 반어법을 쓴 내 자존심도 산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명절인데 명절 값을 하려면 음식을 많이 해야 돼. 하지만 시어머니인 내가 옛날처럼 그렇게 압박을 주지 않고 너희들이 최선을 다 한다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너그러운 어른이다.”라는 티를 내신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 합니다.” 했어요. 어머니 얼굴에 실망한 빛이 분명하게 나타난 채로 돌아갔습니다. ‘아, 참, 세월 흐르니 이제 명절 음식도 안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돌아가신 거예요. 우리 주님 이야기하십니다.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수치를 교묘하게 가리는 종교적인, 교회 나와서 성도들이 해야 된다는 자기 책임을 자기에게 지우는 바리새인같은 비전도고 반 복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 가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인간 말종이 교회 와서 인간되려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열심히 찬송 부르는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존심이나 세우려고 자기 수치에서 벗어나서 괜찮은 존재, 고상하고 근사한 존재로 만들려는 자기조치에 불과하거든요. 이런 위선, 교만이 인간 망칩니다. 목사가 그걸 유도해요. 그들은 돈만 빼내면 되니까. 구원 받는 것,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십자가의 능력은 아무것도 요구한 적 없습니다. “다만 인간인 너희들이 당하는 수치, 나는 너희보다 더 큰 수치 당했다. 그래서 아무도, 심지어 베드로도 나를 부인했다. 그런 내가 너희들의 상상적 하나님이 아니고 구체적 하나님, 구체적 하나님이다.” 이 땅에 다녀가셔서 정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구체적 하나님이 이 땅에 분명히 다녀갔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다녀가시고 난 뒤에 그 수치를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내가 당한 모든 수모는 너 때문이다. 네 교만과 위선과 네가 네 가치를 스스로 포기 못하는 너의 자만심 때문에 내가 죽었다.”
주님은 죄를 지적하는데 지적하는 자리가 뭐냐? 속죄소에요. 그 속죄소에는 하나님의 얼굴만 있을 뿐 거기서 우리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의 얼굴 필요 없어요. 주님이 얼굴만 있으면 돼요. 주님의 수치당한 얼굴, 이 땅에서 수모당한 얼굴, 그 수모당한 얼굴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우리가 든든하게 믿는 이 세상은 유황불로 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종말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신학으로 따져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수치스럽게 살면서도 마치 아닌 것처럼, 남들 다 그렇게 사니 나도 비슷하게 사니 누가 나보고 손가락질을 하고 주홍글씨를 달겠는가? 더러운 여인, 더러운 남자라고 지목을 할 것인가? 근사하게 자기를 꾸미고 교회까지 등록했는데, 거기다가 목사까지 되었는데. 얼마나 거룩한 직업입니까?
남한테 안 들키고 늘 착한 짓만 한 것 같지요. 장로도 마찬가지고 집사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정작 주홍글씨가 된,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그 분은 진짜 메시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인물을 인간으로부터 죽는 사건을 만들어서 그 십자가사건을 들이댐으로써 모든 인간의 인물을 주님의 하나의 사건에 연루되도록 조치를 한 겁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지금도 나를 살리고 영생을 주는가? 그 사건이 중요하지 나라고 하는 인물이 얼마나 나를 근사하게 하고 체면 차리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그것은 반 복음이고 전도를 훼방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총기를 마음껏 사용하세요. 이게 반전인데 마음껏 사용하시고 명절이나 추석 때 음식준비 많이 하세요. 그게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기에. 총기와 지혜 동원해서 신학도 많이 하세요. 삼위일체 공부하시고 신학도 하시고 여러분의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세요.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그 분야에서 더욱 더 전문가가 되세요. 그리고 생각하세요. 이게 바로 나의 수치를 가리는, 주께서 십자가를 지게 된 교만인 것을. 따라서 나는 교만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자신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수치스러웠기에 우리는 신경 안 썼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몸만 챙기는데 온통 24시간 몰두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죄인을 십자가의 속죄의 피로 용서해주시니 오직 그 능력만 자랑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