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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6강-십자가의 도(고전1;17-18)14083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9. 2. 18:42

2014-08-31 12:35:33 조회 : 284         
   십자가의 도140831 이름 : 이근호   

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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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8-31 13:22 
십자가의 도


2014년 8월 3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17-18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는 인간으로서는 이해 못할 것을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들고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설명을 원하는 것은 자기 의지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목욕탕 주인이 차번호 대면서 차주를 찾기 위해 방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소지할 수 없는 능력이, 처음부터 정해놓은 자기 사람을 찾아내는 방식에 이 십자가 소식이 전달됩니다. “혹시 믿는 자 계십니까? 십자가 능력으로만 늘 구원되는지를 말입니다”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는 십자가에 대해서 납득되도록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십자가 복음으로의 구원에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인간이 관여 못함’이란 곧 인간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일 성취하는 데는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치보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십자가 지심과 관련 있는 일이지 결코 그동안 인간이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약 전도서 9:7-9에 보면,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하게 산다고 해서 일이 뜻대로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 자리와 바탕이 있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그 바탕으로 인하여 자꾸만 존재 결핍감이 발생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다오, 다오”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손에 모든 타인이 다 살해당기를 요청하는 요구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은 형 가인으로부터 죽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 빼놓고 남들이 살아있다 는 그 존재 자체가 개인들의 분노와 화를 자극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는 나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겁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가족을 포함해서 모든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인 심보는,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입니다. 실제에서 이것이 불가능하니 속으로 저주도 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불행하기를 기원하게 됩니다. 이런 살인의 충동은 자기 바탕의 건재함을 위한 세상이기를 일방적 자기 삶의 원리를 외부에다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애굽 때의 사례처럼 참된 외부 죽음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만이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가정은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그 표가 있는 집만 건너 뛰어서 그 집안의 장자를 살려두었습니다. 이 일은 곧 인간의 멸망과 심판에서 인간은 빠져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어린양과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을 계속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홍해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 자체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죄를 남은 이스라엘 역사에다 적십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죄를 전달하는 전달체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지적을 받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은 율법에 갇혀 있는 형국입니다. 이 율법에 갇혀 있음은 곧 죄와 진노와 죽음과 악마에 갇혀 있는 것이 인간의 본질임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쏟아내는 죄를 어떤 식으로 용서가 됩니까? 즉 어린양의 희생이 어떤 능력으로 작용하느냐 겁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레위기 11:1-8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되새김’이라는 요건과 ‘굽이 갈라짐’이라는 요건을 둘 다 만족해야 이스라엘의 음식물이 된다고 하십니다.

음식물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기초 재료입니다. 그 음식물에 구원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태어남’과 ‘분리됨’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바탕을 쪼개십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들어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쪼개진 절개면을 통해 새로운 바탕이 나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유일하게 갇혀 있지 않는 것이 그 쪼개진 곳을 통해서 펼쳐집니다. 죽음에도 갇히지 않는 능력, 바로 이 능력이 십자가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 뿐이다 고 했습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고기 배 속에 갇혀 있게 된 기적입니다.

사흘 동안 죽음 속에 있다가 사흘 뒤에 다시 물고기 배 속에서 빠져나가게 된 기적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시고, 제자 11명은 방 안에 숨어 있을 때, 예수님이 그 가운데 들이닥쳐서 자신의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다의 신 용왕은 이런 창자국과 못자국이 없습니다.

즉 십자가의 능력이 없는 신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란 우리로 하여금 자체적인 바탕을 따로 갖고 살기에 계속 죽음과 죄 아래 갇혀 있는 꼴을 준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능력을 소지하지 말고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바탕 없이 은혜로 공중제비 넘는 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의 자리를 찢어면서 십자가 능력에 솟구쳐 오르는 이 현실을 맏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고전 1장 17-18(십자가의 도)1408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18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7-1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도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덤비고 있습니다.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왜 이것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기 때문에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지요. 세례 준다는 것은 눈에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임의로 반복이 되고 반복이 되는 그 순간 십자가는 헛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뭐가 구원하기에 이렇게 요란스럽고 별나냐 하는 말이지요.

 

세례 받았으니 구원 받았네요, 이러면 얼마나 수월하고 간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이 되겠어요. 세례 받는다고 다 구원받을 것 같으면 지금보다 숫자가 더 늘어나서 천국은 꽉꽉 채워질 겁니다. 하나님은 그게 바로 가짜라는 거예요. 할 수 없었는데 천국 와야되지 천국 가도록 노력했는데 천국 왔다는 그것이 뭔가 마귀가 장난질 쳤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을 빼버리고 마귀가 다른 것을 집어넣었다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집어넣으면 그냥 추가, 보충만 되는 것이 아니고 앞에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다 닳아져야 되고 떨어져 나가야 되고 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설명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설득을 한다는 것이거든요. 설득이란 꾀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험회사 영업사원들이나 하는 일이지요. 지금 사도바울은 보험회사 직원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서 직접 하나님과 그 사람을 매치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남탕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목욕 분위기 깨는 멘트가 있지요. “대구 다 2876 차주 계시면 나오시기 바랍니다.” 목욕 분위기 다 깹니다. 주차된 차 빼달라고 목욕탕 직원이 외치는 소리거든요. 목욕탕 주인이 일부러 목욕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차주만 불러내려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설명할 없는 것을 가지고 사도로 이렇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을 사람은 있는데 사도바울도 그게 누군지는 몰라요. 사도바울은 차주가 아니고 자기 차번호는 따로 있어요. 그래서 누군지는 모르는데 차주를 불러내야 돼요.

 

“혹시 이 중에 십자가 능력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빨리 천국 오랍니다.” 사도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목욕탕 때밀이 직원 하나 뽑자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 차 빼라는 거예요. 당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이 주님 방식으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그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이 설득될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인간은 이렇게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가? 인간은 보는 것을 믿고자 하기에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신학교 졸업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우리 눈에 혹은 나의 눈에 등장하지를 않는가 하는 겁니다.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는데 왜 안 나타는 식으로만 구원한다고 이야기하는가? 안 나타나니까 억지로 자기 최면을 걸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믿는 척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나타나셔서 우리가 보이는 식으로 구원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알고부터 그 의문이 풀렸어요. 주님께서는 바탕이 없이 활동하신다는 거예요. 이번에 중국 문등이라는 곳에서 레위기 강의를 했어요. 레위기 11장 강의를 하면서 그것 때문에 바탕이 없고 보이지 않는 채로 오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레 11:2-4)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굽이 갈라지고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춘 동물만 고기로서 먹을 수 있다고 한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 두 가지 요건이 있는데 되새김질이라 하는 것은 반복을 나타내고 굽이 갈라진다는 것은 분리를 의미하거든요. 


지금까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리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는 것,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인생을 두 번 살게 하는 조치에 해당되는 사람은 구원받은 이스라엘이고 나머지는 아니다.

 

보통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게 아니고 갈라짐 그 자체, 반복되는 그 자체 속에서 

이스라엘이냐 애굽이냐 둘 다 자기가 설 수 있는 바탕 자체가 날라 가버리고 

그 게 하나의 틈이 되고 균열이 된다는 겁니다. 

그 없었던 차이, 없었던 균열, 틈 속에서 주님의 복음이 거기서 솟아나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 교회 와서 천당 간다는 나의 목적자체를 없애버리고 우리는 과정 그 자체에서 복음이 나오는데 그 복음은 바탕이 없이 나와서 소위 바탕이 있다고, 바탕이 내 자리에 걸치고 있다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고 무효화시키고 박탈하는 방식으로 주께서 일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면 본다는 나는 여기 턱하니 있고 내 눈으로 보이니 꿈이든 환상이든 예수님이 보인다고 되어버려요. 그게 보이면 보이는 분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보인 분만 현재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걸 나도 봤다고 하는 나도 건재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나는 예수님을 봤기에 구원받았다,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바탕이 계속 유지가 되기에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되새김, 갈라짐이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이 아닌 셈이고 성도가 아닌 셈이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내 자체가 갈라져야 그 속에서 과정이 나오는데 내 자체가 분리되지 않으면 나 자체가 나의 존재의 목적이 되고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무슨 짓도 다해요. 하나님을 부르든 부처를 부르든 나만 잘되면 뭐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천주교에서 하는 성만찬, 세례,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끌어 모아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안정이 되는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늦게 오신 분들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해도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 여러분이 몰랐습니까?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은 칭찬하지 않고 나쁜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닦달내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상관없어요. 하나님 일하고 인간하고 상관없습니다. 나쁜 짓 하면 벌 받지 싶지요. 벌 안 받습니다. 십일조 안하면 재산이 날라 갈 줄 압니까? 십일조 해서 날라 간 사람이 더 많아요.

 

전혀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상관없어요. 따로 놀아요. 교회 온다고 칭찬해 주지 않아요. 축복해 주지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호들갑을 떨었어요. 괜히 주눅 들었습니다. 괜히 마음 졸였지요. 십자가의 도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멸망하는 지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착한 일 한다고 지구가 지금 든든하고 우리가 나쁜 일 한다고 지구가 주저앉거나 폭발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구가 멸망해서 지구에 함께 사는 모든 인류가 멸망하는 이유는 십자가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해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운명, 지구의 운명과 함께 결정될 우리의 운명도 내 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팔자와 내 장래는 나 하기 나름이 아니에요. 나 하기 나름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전도서에 보세요. 착한 일 하건 나쁜 일 하건 결과는 똑 같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먹고 즐겨라. 이것이 전도서의 이야기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개판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 혼자 해내는 것이 구원 작업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엮어 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예배 참석했습니다. 전도 했습니다. 헌금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좀 이런 것을 엮어서 구원 할 수 없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네 성질대로 할 짓이 없어서 온 것이다. 바빠 봐라. 못 오지.” 쓸데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자기 구원, 자기 팔자 고치려고 얄팍한 수를 쓰는데 주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예 바탕 자체를 없애버려요. 그냥 이 땅에 있으면 어떤 것도 바탕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정말 다 멸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땅이 갈라지면서 새로운 땅이 솟아 올라는데 그 새로운 땅이라는 것은 기존의 땅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설명하고 해명하고 해석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설명하고 설명되지 않는 그 틈 사이에서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인간이 뭘 설명한다는 것은 설명하는 본인은 기존의 것으로 정당하다고 우기면서 나의 바탕은 누가 뭐래도 옳은 바탕이라고 우기면서 설명해 나가기에 그 설명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갈라져야 돼요. 각질처럼. 

매일처럼 틈이 갈라지고 차이가 발생되어야 합니다. 발생되어야 

없던 나의 진정한 나 있음의 바탕은 

갈라짐 속에서 비로소 쏙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생이 산다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평생을 안 살 수 없을 정도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마귀, 적그리스도, 전부 다 그리스도 본질에 포함된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이 땅에 나타나야 하고 살아야 하고 그리고 죽어가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설명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동안 십자가를 설명한 모든 것이 십자가를 가리고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짓거리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예수님 방식인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다 밀쳐내는 방식으로 해요. 

“세례 받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없다.” 

“성만찬 했어?” “구원과 관계없다.” 

“십자가를 믿었나?” “믿었습니다.” “구원하고 관계없어.” 

“저는 십자가라는 지혜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없어요.

 

십자가라는 지혜는 바탕을 갖고 있는 인간이 소지하고 유지하면서 지혜 되는 것이 아니고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바꾸려는 자를 멸망하는 자 자체라는 것을 도리어 정하고 고발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소지용이 아니고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날마다 소지당할 뿐이지 우리가 그 능력을 소유할 수는 없는 거예요.

 

사람이 바람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인간을 흔들어 버리고 넘어뜨리고 바람이 사람의 옷을 벗기기도 하고 입히기도 하지요.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옷을 벗고 찬바람이 불면 인간이 옷을 입듯이 바람이 불면 거기에 따라서 인간은 그냥 반응만 나타낼 뿐이지 인간이 그 바람을 소지하고 달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처럼 십자가능력은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어요. 날마다 우리 자신을 근사한 인간으로 바꾸는 우리를 십자가를 모독하고 훼손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지요.

 

아까 윤 집사님과 대화 중에 복음과 유사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술 마시면서 기도합니다.” 그 말대 그대로 술 먹으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기도에요. 정답은 “술 먹는 가운데서도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는데 윤 집사님은 그걸 알았다고 하는데 제가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도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기도 안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무시로 술 먹는 가운데서도 기도하게 하실 때 우리는 늘 기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왜, 십자가의 능력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

 

주체가 가미되면 멈춰버리는 능력, 하지만 주체가 포기되면 비로소 느껴지고 알려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뭔가 시도하려고 하고 행위하려고 할 때 갑자기 내가 나의 바탕을 갖춰버린, 바탕이 있고 내 터전이 있고 내 자리는 따로 있다고 우기는, 내것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순간 십자가의 능력은 그 현장에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나를 단단히 사수하고 지키고 뭔가 이만하면 내가 완벽한 인간이겠지, 하고 자기 자랑질을 하는 그것을 포기하고 그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 어느새 내가 만든 바탕이 아니고 주님의 바탕위에 우리가 실려져 있는 거예요.

 

미국 풋볼 응원단 보면 남자 응원단이 팀을 짜서 여자 응원단을 위로 올리지요. 여자를 공중에 올려서 볼 다루듯이 다루지요. 그렇게 다뤄지는 그 여자는 바탕이 없어요. 밑에서 띄워주니까 공중에서 뱅뱅 도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붕붕 띄워주고 있어요. 붕붕 띄워주고 있으니 우리는 그 능력으로 사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행했기에 그 대가를 얻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그저 죄만 짓고 그저 경건치 않고 우리 욕심만 채웠을 뿐인데 그 모든 죄를 사하심,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붕붕 떠다니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 차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의해서, 내가 쪼개지고 그 쪼개진 틈 사이에서 나오는 냉기, 바람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의성 얼음골이라는데 가면 냉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거기에 간 사람들은 신기해요. 돌멩이 밖에 없는데서 냉기나 나오지, 하는 겁니다. 그게 복음의 능력이라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살만해서, 그만한 착한 일을 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동굴 틈 사이에서 바람이 나와요. 우리는 너무 생존에 급급하다 보니 그걸 발견을 못했어요. 그래서 생존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우리는 생존의 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는 알려주기 위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다 무의미한 것으로 막아버리죠. 입을 탁 틀어막아버리지요. 네가 잘해서 네가 살아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한테 계속 명심 시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는 아니요, ~는 아니요, 나는 그것 안한다, 나는 저것 안한다, 고상해 보이지만 안 한다,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안한다, 거룩해 보여도 안한다, 헤쳐 나가라는 식으로 하지요. 대구 2678번 차주 누구십니까, 라고 부르는 것처럼. 목욕을 한다고 해서 다 차주가 아니잖아요. 수풀 헤치고 십자가 능력에 골인되는, 십자가 능력이 있는 그 사람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것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목표에 의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살려내고 있는 그 과정 속에서 보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지금부터 우리가 고백하면서 영원토록 천국 가서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이고 그 다섯 번째도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사귀는 것, 남들 보기에는 들키기 싫은 부끄러운 과거였겠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과정마저 하나님, 예수님이 바탕이 되셔서 일으킨 사건들이에요. 그러니 그 여인은 남자가 좋아서 다섯이나 여섯 명을 사귀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좋아지게 하신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힌 자가 되는 겁니다. 이상하게 갑자기 좋은 복음처럼 들립니다.

 

남자 여섯 명 사귀고 또 사귀고 또 사귀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일곱 번 결혼해도 그 자체가 믿기만 하면 소급해서 십자가 은혜로 받아지게 되는 겁니다. 술 먹는 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십자가의 능력입니까? 묻고 싶었어요? 소주 먹을 때 그랬는가, 맥주 먹을 때 그랬는가, 묻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뜻을 제가 아니까.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지구의 멸망은 십자가의 도에 의해서 결정난 일이기에 인간이 바르게 산다고 해서 지구가 더 오래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참새가 떨어지는 것이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배에 빠져 죽은 애가 부모가 나쁜 짓을 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예수님 당시의 그 사건이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것은 너와 상관없는 다른 관계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것이 무화과나무가 나쁜 일을 해서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무화과나무와 예수님만이 아는 자기관계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의 능력으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왜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하는가가 중요한데요.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의 차이점이 뭐냐? 제가 중국 가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울산에 있는 어떤 애가 용왕한데 물질을 잘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 인간극장인가에 나왔어요. 용왕의 특징은 창자국과 못 자국이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용왕은 옆구리가 말짱해요. 용왕이 특징은 그냥 전능하신 신이지 십자가사건이 없는 신이에요.

 

오늘날 교회가 뭐냐? 중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을 말끔히 청소해서 사우나 한 예수님이에요. 창자국과 못 자국이 사라진 용왕 같은 예수를 만들어서 교인들한테 강요하게 믿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빡세게 열심내면 복 주십니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갇혀 있을 때 들어왔다는 말이지요. 들어와서 비로소 제자들은 십자가 못 자국 창 자국을 봤습니다. 도마도 뒤늦게 와서 봤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주님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주님은 왜 그냥 용왕님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야 되느냐 하면, 인간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갇혀 있어요. 좀 어려워졌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을 어떻게 살아 있게 하느냐, 그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죽었잖아요. 죽어 있는 그것을 어떻게 계속해서 살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이스라엘에게 했어요. 어린양을 잡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집 어린양을 잡고 문설주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쓰레기 수거해 가듯이 문 밖에 와서 쓰레기차가 와서 수거해 가는데 거기에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발리지 않았으면 그 집의 아들을 죽였고 어린양의 피가 발린 그 히브리인의 집은 장자를 죽이지 않고 건너뛰었다고 해서 유월절, 그냥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입니다.

 

이 말은 제가 지금까지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쏙 빼놓고 합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어요. 어린양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이제 문제는 뭐냐? 그걸 어떻게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져 나가는가의 그 문제가 궁금한 거예요. 옛날 유월절에 어린양 잡았잖아요. 죽음의 사자가 왔잖아요. 그래서 그냥 건너뛰었으니까 백성이 살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또 어린양 잡고 문에다 바르고 또 죽음의 사자가 와서 건너뛰고, 그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한 번 죽었으면 사라져야 될 것인데 그 사라진 죽음을 어떻게 계속 제대로 살아 있는 채로 이끌고 가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제가 강의할 때 이렇게 했거든요. 어제 충남 바닷가에서 무슨 축제를 하는데 보니까 하얀 도포를 입고 들기도 버거운 붓을 들고 먹을 듬뿍 찍어서 마음 가는 데로 글씨를 써요. 이게 축제의 일환이지요. 그래서 붓을 들고 쓰면서 이것은 용이 지나가는 것이고 이것은 달마를 닮았고, 이렇게 온갖 호작질을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린양에 이스라엘 백성의 그것을 듬뿍 찍어서 계속 먹을 찍은 붓처럼 질질 끌고 와요. 끌고 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애굽의 죄를 끌고 옵니다. 죽음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계속해서 인간의 죄를 끌고 오면서 그 죄에 대해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나름대로의 바탕을 만들고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밀치고 배척하는 식으로 죄를 짓는가를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죄를 찍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을 유지시키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어요. 죄를 지으세요. 죄를 지어야 돼요. 죄를 지어야 은혜가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죄를 지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그 방법이에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가 뭐냐 하면, “목사님,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그 죄 짓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죄를 짓느냐 하면, 이것이 아벨을 죽였던 가인의 죄인데 사람의 몸 자체가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죄를 짓느냐 하면, 누구를 만날 때 저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면 나한테 만족이 없어요. 인간의 모든 만남은 상대방을 서로 쳐 죽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만나게 되어 있어요. 부부관계가 가족관계나 어떤 관계도. 모든 관계가 너 죽고 나 살자, 의 관계에요. 어떤 의미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먹혀야 될 관계, 삼켜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만나고 나서 헤어질 때 좀 찝찝한 것은 그 인간을 마저 잡아먹지 않는데서 오는 찝찝함이에요. 인간은 뭔가 상대방을 죽여야 되는데 죽이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게 되면 그 미흡함이 생기고 그 미흡함을 집에 와서 마저 메우기 위해서 스포츠나 부부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윤 집사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술을 먹게 되면 그 마지막은 꼭 싸움으로 끝난다는 겁니다. 싸운다는 것은 뭐냐 하면, 서로 상대를 잡아먹겠다는 겁니다.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내가 상대를 잡아먹는데 그걸 감추기 위한 정당한 방법이 결혼이에요.

 

결혼 안 한 사람은 아직 잡아먹힐 사람을 못 만난 것이고 이미 결혼한 사람은 잡아먹고 또 잡아먹으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사람이 누굴 만났을 때 내 손에 잡혀 죽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불만족스러워요. 우리는 잡아먹을 때에야 만족하지 그렇지 않을 경유는 찝찝해요. 이렇게 살면 세상이 개판되니까 그걸 감추는 방법으로 “오늘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는 식으로 점잖게 헤어지는 겁니다. 특히 상견례 할 때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그 때 먹은 음식도 소화가 안돼요. ‘저걸 확 꺾어야 되는데 마저 꺾지 못해서 앞으로 내 딸 시집살이가 힘들겠다. 저 시집을 확 꺾어야 하는데.’

 

상대방도 마찬가지에요. ‘저쪽 집 확 꺾어야 되는데.’ 이렇게 인간은 다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자기만 살아남고 눈에 띄는 것은 다 죽여야 만족하는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죄 아래,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죄 아래 있고 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나의 표적을 준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뭐냐? 요나가 물고기속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다. 물고기 속에 갇힌 채로 인간이 있으면 인간이 아무리 활동을 해 봐야, 물고기 안에서 이리 들이받고 저리 들이받으면서 그 안이 폐쇄된 공간이기에 그 안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 봐야 튕겨져 나오는 인생 살다가 죽고 말지요.

 

인간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11명이 문 안에 갇혀 있을 때 예수님이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줬습니다. 이 말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용왕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끄집어내는 용왕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갇혀 있는 채로 용서해서 갇혀 있는 그 것을 그대로 가져감으로써 예수님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바탕이 유지된 채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갇힘도 없이 활개 치면서 본인이 마음껏 신처럼 누리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 은혜로, 예수님의 보살핌으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으로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고정화 되는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죄에 갇힌 우리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용서와 영생과 의에 갇힌 꼴로 만들어서 사람을 데려가는 겁니다. 사람은 아무리 사람 열 명 죽여도 열한 번째 희생물이 없는 한 만족이 안돼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떻게 하면 결핍을 채울까 해서 나오는 행동들이 그 행동들입니다. 인간은 항상 미흡함과 목마름에 노출되어 있어요. 그것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 대체 무엇으로 채울지 모르면서 날마다 살아가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도박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스포츠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골프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에 빠지고. 아무리 채워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바탕을 찢어버리지요. 찢어버리면 그것이 되새김이고 그것이 굽이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져서 어떤 쪽에 내 쪽인가, 그거 하지 마세요. 갈라짐 자체 속에서 원래부터 내 기초와 내 자리는 없었던 겁니다. 내 바탕 자체가 없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십자가의 공로로 살아오고 있었고 앞으로 그렇게 살 것이고 그 용서의 그 의로움을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겁니다. 따라서 따로 나의 바탕 내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어요. 내 바탕 내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채워도, 채워도,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안 채워도 괜찮아요.

 

지난 주 설교한 것처럼 얇은 막처럼 살면 되는 겁니다. 이미 속이 꽉 채워져 있어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라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설명하려면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설명이 안 되는 존재에요. 뭔가 설명하려고 하니 새로운 요소가 들어와 버리니 그 요소 고려해서 다시 나를 설명하고 “그것이 접니다.”라고 하니까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또 들어와 버리니 나라는 것을 또 변명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내가 햄버거를 좋아 한다 칩시다. “나는 햄버거를 좋아합니다. 피자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어느 날 피자를 먹어 보니 피자가 햄버거보다 더 맛있거든요. “수정, 다시 고칩니다. 나는 햄버거보다 피자를 더 좋아합니다. 이걸로 끝!”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다른 요소가 들어오니 “피자보다 더 좋은 게 있었다.” 본인도 본인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살아가 봐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주님의 바탕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붓에 묻어 있는 먹물처럼 이 땅에서 질퍽하게 죄만 저지르면서 가는 거예요. 죄만 저지르는데 그 죄가 뭐냐 하면, 나 밖에 모르고 나는 무조건 내 만족을 위해서 채워야 할 하나의 보충물로 간주해서 상대를 대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안 들면 차마 죽이지를 못하니까 그 대신 욕하고, 십년도 못가서 발병 나라고 저주해 버리고, 거기 대해서 주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따라 오면서 율법으로 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고, 죽음에 갇혀 있고, 이것이 무슨 기적인가? 요나의 기적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전체가 요나의 기적이다. 요나의 기적에서는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 자국,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빠져나온 사람은 이미 나의 바탕, 내가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내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나의 바탕자체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철거당하고 회수당한 입장에서는 우리한테는 없어요. 나의 바탕이라는 것이 없어요.

 

미국의 풋볼 응원단의 모습처럼 우리는 공중제비를 하면서 붕붕 떠서 있는 거예요. 지상에서 붕붕 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밑에서 십자가의 능력이 옵니다. 용서의 능력이 옵니다. 계속해서 와요. 그것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에요. 나라는 바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강의에서 이런 설명을 했거든요. “여러분이 주기도문을 외워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지요?”라고 설명했어요.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했거든요. 주기도문에 분명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 외우면서도 뭐라고 이해합니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나라는 바탕을 주기도문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지요. 그걸 빼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만의 바탕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뭐냐 하면, 우리교회라고 할지라도 내가 다니니까 우리교회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항상 나의 바탕을 집어넣어서 내가 거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교회는 저주받아도 괜찮고 우리 교회는 잘 돼야 되고, 라는 의식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그것이 나라는 바탕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죽을 때까지 흘러나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나라는 바탕이 있는 질질 끌고 평생을 살게 하면서 죄를 죄라고 느끼게 하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뭐냐?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나의 결핍과 불만족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죄를 쪼개면서 나오는 그 십자가 때문에 계속해서 그 죄가 용서로 바뀌는 가운데 있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도바울은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왜 설명되지 않는가? 십자가는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불행을 면할 수 있습니까?”에 대해서 행복, 불행이 하나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만을 위한, 자기불만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행복과 불행입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논할 입장도 아니고 그런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 계신 것도 아니고 나의 불행을 위해서 마귀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자신을 이 세상 모든 되어가는 일에서 뺍시다. 빼시고 일단 내가 나 된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겁니다. 공중제비 하듯이 항상 붕붕 떠서 다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십자가를, 주님의 못 자국, 창 자국을 놓치게 돼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게 되면 우리가 갇혀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갇혀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면 내 행복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게 되어 있고 내 능력이 모자라서 행복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 분을 욕설과 비난을 하면서 대충 임시적으로 채우려는 우리의 악한 본질을 또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결국 인간은 욕설의 연속으로 사는 것이 되고 남이 못되는 즐거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되고 그것이 다 쌓이면 그 성질이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화학에서 해스의 법칙이 있어요. 해스의 법칙이란 제공하는 원인물과 생성물이 동일하다면 그것이 어떤 경로를 밟든지 에너지는 총합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에요. 이 말은 뭐냐? 시작을 주님이 쥐고 있다면 인생에서 우리가 어떤 경로를 밟았든 주님께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인데 그걸 관여해서 바르게 한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잖아요.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애초부터 우리를 없는 존재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날마다 없는 존재로 간주하되 있게 된 이유는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한 겁니다. 어떤 기적?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에 갇혀 있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의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자기 자랑하고 싶어서 오늘날 성도를 이런 식으로 성령을 줘서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할 수 없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어지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대구 다 2648번 차주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목욕탕에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들립니다. “차주 있으면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처럼 “오직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시는 분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호소를 지금 사도바울은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상관도 없고 하나님과 관계도 없는데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 자기 잘 되려고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고, 그런 식으로 교회 나왔습니다. 이제는 바탕 없애게 하여 주옵소서. 붕붕 뜨면서 살게 해 주옵소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살게 한다는 그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는 훼손하지 않고 항상 언제나 기도하게 하시는 주님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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