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4 12:42:21 | 조회 : 21 | |
세례와 십자가 140824 | 이름 : 이근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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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4-08-24 13: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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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서 17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3-17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뒤에 세례라는 것이 유명해졌어요.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지요. 영세 줬습니다. 영세 받을 때 사람들은 ‘저거 받으면 천국 간다. 구원받는다.’ 그런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저걸 받아야 돼.’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고 신부가 주는,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주는 세례를 받기만 하면 2천년 역사의 전통이 보장해주는 대로 오늘밤에 죽어도 천국에 가 있게 된다는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성경에 보게 되면 비록 그 당시 종교적 문화 때문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기는 했지만 그 세례 받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례 받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세례 준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져버리지요.
무의미해지니 세례를 없앨까요? 특히 유아세례 같은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 성경에서 세례 주고받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단정하는 그 이유가 있어요. 세례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또는 교회는 세례를 줘야 된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그 의식체계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들, 물품들은 다 인간에게 필요하기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발명하고 발견하는 것. 교회에 오게 되면 파리가 날아다닐 때 제일 아쉬운 것이 뭐냐 하면, 파리채였습니다. 파리채가 필요해요. 동네 다닐 때는 자전거가 필요하죠. 못 뺄 때 못 빼기 망치가 필요하고. 세상 모든 물품들이 필요 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필요하지요. 옷 걸 때 옷걸이가 필요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눈에 띄는 모든 것은 우리한테 필요하기에 있다는 생각을 철석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에 나오는 세례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 그런 것도 우리한테 필요하기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파리채나 망치나 그릇이나 이런 것이 우리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세례나 십자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할례나 제사나 예배 같은 것도 우리한테 꼭 필요해서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되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구원에 필요하다면 그렇다면 무의미한 거예요.
성당이나 교회에서 신부나 목사가 세례식을 줄 때 ‘야, 저 세례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세례와 영생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그게 왜 의미가 없느냐 하면, 세상 물품들은 내가 가지면 나한테 유용하지만 성경에 있는 종교의식, 세례나 할례나 구약에 있던 것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을 표현해주는 표현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소유될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진행된 일을 표현해 주는 것이 세례요 십자가요 할례요 예배고 제사고 성경에 나오는 것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뭐가 표현되느냐 하면 본인 자체가 하나님의 사건에 휘말렸다는 그 본인 자체가 하나님의 사건의 표현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한테 종속된다는 표현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좋은 것들을 모조리 가지고 와서 내 것, 내 소유화시키려고 할 때 그렇게 된다면 그 하나님의 모든 사건들은 인간의 소유가 안 되지요. 그것은 인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어느 교회에 가서 세례 받았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하나님의 세례라 하는 것은 “지금 네가 세례 받은 적이 있다.” 하는 식으로 너의 세계에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런 소리하기 전에 이미 사건이 터져버렸다는 말이지요. 세례라는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네가 합류되어 있다는 뜻에서 세례식을 해주는 겁니다. 사건이 터져버린 겁니다. 그 세례사건이 뭐냐? 세례라는 것이 신약의 교회에 활발하게 나옵니다만 신약 고린도전서 10장 2절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이 세례라는 것이 구약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니까 주님의 말씀이지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옛날 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올 때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된다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왔을 때 집단적으로 세례 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0장 1절 말씀부터 보게 되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되어 있거든요. 세례 받았다는 것은 사건 속에 휘말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건 속에 휘말린 것을 나만의 사건으로 개인화시키지 마세요. 그런 것은 의미 없습니다. 나 세례 받았다, 가 안돼요. 나 세례 받았다, 가 안 되고 나라는 자체가 세례사건이 나를 향하여 벌어졌다고 해야 돼요. 문장 같으면 나는 목적어에 해당되지 주어의 자리에 우리가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건이 터졌는데, 폭풍이 터졌는데, 태풍이 불었는데 주님이 일으킨 태풍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더라. 일종의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주체의 붕괴입니다. 모든 것이 나 좋으라고 살아가는데 그 주체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거예요.
주체의 붕괴가 일어나면서 ‘이게 뭐지?’ 하고 돌아보니 그게 세례사건이라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세례에 처음 참여한 분이 계세요. 세례요한이라는 분입니다. 우리가 알기는 세례 요한이 세례 준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지요. 본인 자체가 하나님의 세례에 처음으로 참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물세례에. 그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으면서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 보면 그 세례의 의미란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겁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걸 줄여서 말씀드리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더 줄이면 사람은 개뿔도 아니다, 그렇게 줄일 수 있어요. 사람은 누군가 와서 깨워줄 때, 누군가 와서 손대서 탁 칠 때, 봉선화연정의 가사처럼 탁 칠 때 우리는 깨어나서 주님의 일으킨 세례사건에 휘말려 가는 겁니다. 톡 치면서 물속에 이미 잠긴 존재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걸 소급해서 말하기를 “나 세례 받았어요.” 하는데 그것은 “나 세례한테 당했어요.”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세례에 당해버렸어요.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주님의 세례에 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당해놓고 하는 말이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인간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주시니까 그 사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망치나 드라이버나 마이크나 자전가나 파리채처럼 우리가 필요해서 발명한 그런 물품이 아닌 거예요. 세례라는 것이. 이것 주면 받아라, 주고받고 그걸 거래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네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마지막 28장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더라도 그 세례는 인간이 조작할 수 있다거나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낼 완전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세례가 여전하다면 주님은 부활해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이지요. 왜?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그것을 가지고 성령세례라고 했고 그 성령세례는 놀랍게도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지 않고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 쥐고 구원 받고자 하는 유대인들은, 요새 말로 법 지켜서, 성경 말씀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은 사실상 배제되어 버리지요. 구약에서 홍해 자체가 세례라면 세례란 무엇인가? 사람들로 구원받지 못하게 배척하는 장치, 이게 세례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 쪽에서 애쓴다고 구원받게 하는 그 모든 것을 훌쳐내는 “저리가!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 하고 내쫓는 장치가 바로 세례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고자 시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세례가 와서 덮쳐버리면 그것은 본의 아니게 구원받은 게 되고 더 놀라운 사실은 받은 세례를 우리 인간 쪽에서 무효화시킬 수가 없는 일입니다. 기분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 오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고 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로마의 신에 야누스라는 신이 있어요. 이 야누스 신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이 야누스 신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하나는 어떤 집단에 들어올 때 출입구에 서서 검문하는 기능, 그 사람을 단체에서 추방할 때 작별 인사하는 기능, 두 가지 기능을 한 신이 다 이야기해버려요.
그래서 야누스 신은 뭐냐 하면, 양면성을 가진 신이라고 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1월을 표현할 때 야누스의 달이라고 했어요. 영어로는 1월을 January라고 해요. 겨울과 봄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 달이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저주해서 배척하고 심판해서 추방하는 그 당사자가 추방하는 작업과 동시에 건질 자를 건져내는 작업도 같이 하는 겁니다. 성경 전체를 어떻게 보면 됩니까, 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야누스적 입장에서 보시면 정답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고, 두 가지 기능이 한 분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고 현재 추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빠요. 무척 바쁘다고요.
쫓아내기 바쁘고 자기 천국에 들여놓기 바쁘고. 환영하기 바쁘고 추방해서 작별인사하기 바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기능하기 때문에 그런 기능이 신약뿐만 아니고 구약에도 있습니다. 홍해 바다 건넌 것을 세례라고 사도바울이 구약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 중심의 두 가지 속성 가지고 해석을 하고 설명을 했다면 구약의 다른 대목도 마찬가지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광야에 만나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양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거든요.
만나라는 음식물을 하늘에서 내려줄 때 그 백성들이 만나를 보고 첫 인상이 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말로 그걸 ‘무엇’이라는 뜻의 ‘만나’라고 이름 지었거든요. “무엇이지?” 뭐지 이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익히 그들이 아는 음식, 탕수육이나 팔보채나 짬뽕이나 자장면 그런 것들을 준 것이 아니고 전혀 맛보지 못한 음식을 가지고 먹이신 것은 그들 입장에서 만나를 보고 “이게 무엇이지?”라고 묻는 그들 본인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내가 뭐지?”라고 질문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너 자신은 이렇다는 그것을 잊으라는 거지요. 나는 이렇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아는 것은 애굽에서 형성된 자아정체성, 자기본질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려야 돼요. 그들이 애굽을 떠났을 때 ‘나는 이렇다.’ 하는 것도 같이 떠나야 되고 그걸 버려야 됩니다. 결국 인간은 애매한 존재고 모호한 존재에요. 내가 누구지? 뭐지? 그걸 되물어야 돼요. 우리가 알고 있던 나라는 것은 폐기처분해야 될 입장에 와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두께 없는 인생이라 하는데. 어린 시절에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특식을 만들어주셨어요. 홍두깨를 가져오지요. 그러면 집안 식구들이 다 좋아하지요. 특식 준비한다는 것을 아니까. 밀가루 반죽을 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밀어요. 밀면 밀수록 그게 얇은 판막이 돼요. 그 다음에 종지기 가져와서 떠 낼 때마다 그게 얇은 만두피가 돼요. 만두 피 만들어놓고 속을 만들지요. 신 김치에 두부 넣고 돼지고기 갈은 거 넣어서 만두를 만듭니다. 옛날에 저의 어머니가 달인수준입니다. 만두피가 얇을수록 만두 속이 투명하게 비치면서 맛있게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세례라는 것, 뒤이어 나오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소위 구원받은 사람을, 이 땅에서 애굽의 두께 있는, 자기 잘난 체 하는 인간을 홍두깨를 가지고 밀듯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밀어버려요. 밀면 그 인간은 하나의 얇은 판막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보자기처럼 되어서 인생의 무엇이 담기든 그 속을 아주 미련 없이 옴팍 담을 수 있는 얇은 피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요. 우리가 사건을 쥐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우리 속에 담기도록, 그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얇은 피막이 되도록 성령께서는 왔다 갔다 하면서 밀고 당기고 밀고 당겨서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는 인생 되게 해요. 실패하는 인생.
우리가 실패하는 인생 안 되고자 하는 시도는 뭐냐? 내 나름대로의 두께를 가지려고 하거든요. 난 이만큼 잘났다, 난 이만큼 두껍다, 내 스펙이 어떻고 난 이만큼 잘났고 직장에서 어쩌고, 하면서 두께를 가지려고 하는데 그걸 두께 없는 인생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십자가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교회에서 세례 받았다, 성령 받았다, 또는 십자가 안다는 이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스펙처럼 작용해 버려요. 나는 복음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은요, 가면 갈수록 자기가 모호하고 애매한 존재가 되어서 만약에 내 안에서 어떤 사건이 담기지 아니하면 여기서도 흥, 저기서도 흥……, 그래서 복음을 십 년 안다, 이십 년 안다, 삼십년 안다, 복음 도사다, 목사인데 언약을 공부했다고 하면서 결국 그 결과가 뭐냐 하면, “날 무시하면 나는 너하고 상종을 안 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결국 날 무시하지 말라는 것. 아, 참 너무나 많은 경험들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지요. 복음, 복음, 주님 증거 한다고 핑계는 그렇게 대면서 결국 자기의 두께를 증거 하는, 자기의 두께를 자랑질 하는 사람들.
그것은 소유화시키는 거예요. 성경지식과 성령마저도, 예수님마저도, 하나님마저도 내 것 만들어서 내 것 가지고 천국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 십자가는 내 것 같은 내 것 아닌 그런 종류가 아니에요. 홍두깨에요. 패고 밀고 아주 두께를 없애버리고 얇은 판막이 되는 거예요. 레코드판이 두꺼워서 소리가 나는 겁니까? 얇기 때문에 거기에 정보가 담기고 거기에 바늘 얹으면 계속 반복해서 노래가 나오잖아요. 그러다가 미끄러지면 삑 삑 소리도 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레코드판으로 만드는 겁니다. 사건이 집약된 집약체.
한 순간 한 고비마다 십자가 사건으로 점철된 우리의 인생, 그것이 하나의 앨범, 독집 앨범으로 만들어놓았어요. 그래서 열일곱 살 때, 서른네 살 때, 45살 때, 어디를 꽂아도 십자가만 나오도록,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가 나오도록 소급해서 조치를 하는 겁니다. 어디서 두께를 자랑해요? 이런 이야기를 전에도 했는데 꼭 나오는 소리가 “이 목사님은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더라.” 소통이 안돼요, 소통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세례사건은 인간의 소유용이 아닙니다. 유아세례? 그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당해야 될 사실이거든요.
만나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광야에서 만나를 줬습니다. 만나가 어디서 끝이 나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매일 같이 주어지던 만나, 일주일에 다섯 번 쏟아지던 만나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그 날부터 더 이상 내리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만나라는 하나님의 사건의 증거물은 이제는 사건의 그 본질과 실체의 상황에 들어왔을 때는 그냥 예고편으로 보여주던 것은 은퇴를 해야 될 입장이거든요. 만나라는 것은 안내견처럼 안내하고 소개할 뿐이에요. 세례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교회라는 것도 그래요. 천국가면 교회가 없어져요. 그런 모임도 필요 없지요.
그때까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떤 증거를 주느냐 하면, 하늘에서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음을, 그런 사건이 우리에게 터졌음을 보여주고 증거 하는 얇은 판, 레코드 판 같은 사람들의 집합, 그것이 바로 교회라 이 말이지요. 그런 사람은 성령의 세례로 한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자기 자랑 하는 사람 없는 단체, 그게 교회에요. 그런 교회가 자기자랑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교회를 자랑 질 하는 그것도 교회가 아니에요. 자기 포기가 안 된 사람은 자기 포기가 안 됨을 감추기 위해서 반드시 교회 자랑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 복음, 복음, 나는 죄인이라고 말 하면서도 마지막 내세우는 것은 우리 교회 괜찮으니 와 보세요, 라는 자기가 속한 교회를 선전하는 선전의 일원으로 작용할 수가 있어요. 구원파 소리 들어보면 다 옳은 소리같이 느껴지지요. 사실은 아니지만. 하지만 막상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구원파 자체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살아 있는 예수님이 아니에요. 복음 안다는 그것이 어느새 두께를 만든 겁니다. 자기 자랑 질 하는 두께가 되어버렸어요. 그것은 실제로 성령이 와서 그들을 앞뒤로 매일같이 밀어내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주위에 복음 안다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십자가 마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복음 전부 다 안다는 식이에요.
만나가 약속의 땅에서 멈춤으로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모형이고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모형과 그림자가 주어질 때 모형과 그림자가 의미가 있으려면 모형과 그림자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장차 올 본질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돼요. 연결되어 있으면서 세례도 아무것도 아니요, 라는 말을 함으로써 세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례받은 이 자체가 장차 오실 본질과 연결되어 있기에 주께서 일으킨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라는 고백을 우리는 할 수밖에 없지요.
만나가 사라졌다 해도 약속의 땅에서 사람들은 만나가 있었던 그 때의 심정과 사정을 그대로 유지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만나 없이는 애초부터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만나나 먹고 살다가 이제는 약속의 땅에서 농사짓고 사니까 이제는 만나보다 우리가 즐겨먹던 밀이나 보리와 곡식이 맘에 드니 이것이나 먹으면 되겠다, 갑자기 만나 받아야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놓쳐버렸어요. 출애굽 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익히 아는 양식 먹고 살다가 광야에 와서는 그 양식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다고 낙담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배급해 줬거든요. 만나를 배급해 주니까 그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뭐지? 무엇이지?” 맨 날 “그 무엇이지?”를 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지?”를 먹어야 될 이유가 네가 생각한 ‘애굽 때의 나는 이렇다.’는 그것을 버리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살려주지 아니하면 살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너 자체적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내가 알아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자체를 포기해야만 약속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를 규명할 자격이나 권한이 우리에게 없어요. 주께서 살려주는 대로, 주님의 본질을 증거 하라고 우리가 놓여 있지 주님과 끊어버리고 “내가 누구지?” 이것은 그냥 취미생활이고 의미 없는 겁니다. 그거 알아서 뭐할 건데요? 날마다 변하는데.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례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배척하는 장치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도 세례의 완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만나가 있다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약속의 땅이 뭐냐? 만나가 없더라도 만나의 완성체로 약속의 땅이 진행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만나가 없더라도 있는 것으로 해서 살라는 말이지요. 주님이 살려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사건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십자가 몰라도 세례 몰라도 잘만 살아요. 잘들 살아요. 프랭크 라는 2차 대전 때의 정신과 의사는 유대인이에요.
이 사람은 3년 동안 여섯 곳의 포로수용소에 다니면서 혹독한 인생체험을 했어요. 그 사람이 쓴 책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인데. 그 사람이 자기 체험담을 책에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니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더라.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깨진 유리조각으로 말끔하게 면도하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수용소에 있으면서. 흩어진 종잇조각을 주워서 논문을 썼어요. “주어진 상황은 어떤 상황이든 내가 상황 때문에 자포자기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나의 자유의지만큼은 빼앗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서 그 글을 썼다는 겁니다.
참 대단한 의지의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본인은, 나는 자유의지가 있는 한 그게 나라고 정립이 돼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광야에서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가 누군지 그걸 아는 것 자체도 허용 받지 않았다는 거지요. 네가 너를 아무리 연구해도 너는 모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모호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만나가 끊어지는 그 땅에 갔을 때 “아하, 나는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이 현재 일으킨 그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뽑혀 나온 사람”이라는 그 관계로서 우리는 모든 것이 종결된 겁니다. 모든 의문점이 다 사라진 거예요.
자기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참 대단한 영웅처럼 비치지요. 제가 프랭크라는 정신과 의사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오늘날 이 시대 모든 것이 아주 영웅적이고 착하고 대단한 것 같아도 따지고 보면 그게 전부 다 신앙과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애굽의 연장이고 확장이고. tv 프로그램 가운데 <100°C 강연>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걸 볼 때마다 저게 세상이라는 거예요. 어려워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냈더니 기어이 좋은 날 보더라. 제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본 어떤 할머니는 교수 집에서 일하는데요. 그 할머니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진학을 못하고 남의 집 밭일 하면서 살다가 열일곱에 중매로 어떤 남자를 만났답니다.
그래서 이제 형편이 좀 필까, 했는데 결혼해서 시댁에 가보니 시어머니가 이미 빚을 잔뜩 져 놓고 도망을 갔어요. 그래서 시어머니 빚을 다 갚고 시동생들 다 거둬서 키웠어요. 그래 놓으니까 빚 다 갚았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쳤던 시어머니가 들어왔네. 들어오자마자 아파서 드러누우니까 대소변 다 받아내 가면서 7년 동안 수발들면서 시어머니 잘 보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남편이 군에 갔다 오더니 사업 한다고 집을 팔더니 사업을 다 들어먹었어요. 그러더니 날마다 술 먹고 들어와서 개 패듯이 패네요. 할 수 없어서 이혼을 했네요. 아들 둘 딸 하나 거둬서 방직 공장도 다니고 온갖 허드렛일 하면서 다 키웠어요. 다 키워놓고 나니 이혼한 남편이 병들었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저놈의 인간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나.’ 해서 병든 남편 수발한다고 몇 년 흘렀어요. 수발하는 중에도 구박받고 매 맞고 했는데 그걸 참아내면서 기어이 참회를 받아냈답니다. “미안하다.” 그 순간 그 여자는 40년 동안의 아픔을 다 해결했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아버지가 옛날 상이용사인데 보상금 2천만 원 받은 것 가운데서 먼 친척이 아프다는 소리 듣고 500만원 떼 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할머니가 있었다는 거예요.
인간극장에 나오는 테마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가운데서 “나는 죽어도 죄인입니다.” 하는 표현이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 일종의 스펙이기 때문에. 고난도 역경도 점점 나의 두께를 점점 증강시키는 멋진 일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홍두깨가 없어요. 십자가는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완전히 그걸 밀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을 할때는 홍해라는 세례, 그리고 십자가도 세례거든요. 십자가도 세례라는 것은 골로새서 2장에 보면 할례, 혹은 십자가를 세례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세계 안에서 인생을 담아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그물에 담아서 세상을 설명합니다. 그렇게 단정 짓고 그렇게 세상을 이끄시거든요.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우리가 왜 저주받아야 해? 우리가 왜 심판 받아야 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출발점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그런 거예요.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가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 보실 때에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여기에 뭘 집어넣는가 하면, 바로 십자가를 집어넣습니다. 너를 대신 하신 분이 이런 저주를 받았다는 거예요. 너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어떻게 인간이 그 소식을 자진해서 듣고자 합니까?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지혜고, 십자가도 그렇고 세례도 그렇고 안 믿는 사람을 밀어버리는 하나님의 사건의 반복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과학이나 동양철학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해요. 인간이 산다는 것은 호흡해서 산다. 들이마시면 내 뱉어야 하고 먹으면 배설해야 된다는 것이 호흡한다는 거예요. 내 뱉는 것도 없고 배설이 없으면 이미 죽은 존재다. 동양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내 뱉는 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 따라서 자꾸 비워라.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과학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이 호흡을 함으로써 산소가 들어오고 산소가 들어와서 유기물이 분해되고 유기물이 분해되면 에너지가 들어오고 그 에너지에 의해서 세포가 유지될 수 있다는 이것이 과학입니다. 이게 팩트, 사실이라고 하거든요. 산소가 폐에 들어와 3억 개의 세포 망을 통과하면서 세포내에 있는 압력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헤모글로빈이라는 산소연합체가 세포까지 연결되어서 살아 있다는 겁니다. 과학이나 철학의 기본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묻지요. “네가 뭔데 살고자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나는 나니까 살지요. 그리고 살고 싶지요.” 그런데 나는 나라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틀려먹은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나는 내가 왜 있는지 왜 사는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모르겠다,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자체가 하나의 표현이에요. 표현. 우리는 어떤 표현?
하나님께서 창조사건을 일으킨 하나의 표현덩어리가 우리라는 거예요.
그 표현을 유발시킨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이제부터 성도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일으킨 기능, 예수님의 속성,
사랑할 자는 사랑하시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신다는 그 야누스 같은 두 가지의 속성
을 표현해주고 증거 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겁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옴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있던, 나는 나라고 우기게 만들었던 그 세상 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은 홍두깨, 십자가의 성령의 능력으로 당겼다가 밀었다가 하면서 얇은 비닐 같은 판막으로 만들어버려요. 그 얇은 막을 보자기로 사용해서 세상의 어떤 경험이나 상황도 그 보자기에 담아서 오직 주님에 대한 감사로 표출되기를 그 사건이 주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 그 매개체, 그 장소가 바로 성전이고 성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7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이 성전이라고. 거룩한 사건이 지금도 너희 속에 멈추지 않고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난데 내가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은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저한테 묻고 싶은 것이 있을 거예요.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한 가지 예를 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어린애가 어떤 연주회에 가서 피아노를 너무 잘 치기에 감동받았어요. 그 어린애가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저 피아노만 치고 살 거야.” 하고 열심히 연습했더니 주변에서 피아노 잘 친다고 소문났어요.
그러다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그 선생님을 만났어요. 만나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부터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그랬더니 그 선생이 하는 말이 “소질도 없어 보이는데? 피아노 한 번 쳐봐. 그 정도야? 안 돼. 다른 일 해.” 혹평을 하더니 구박하면서 내쫓아 버렸어요. 그 때부터 그 애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정말 다른 직업을 구해서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났어요. “선생님 그 때 왜 저를 그렇게 구박했습니까?”라고 하니까 그 선생님이 하는 말이 “네가 나한테 그런 혹평 듣고 삐져서 피아니스트 되지 않을 인간 같으면 앞으로 너는 내가 추천해서 피아니스트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하는 그 욕보다 더 심한 욕을 평생 듣게 될 텐데 네가 그걸 감당하겠나? 차라리 그때 일찍 포기한 것이 나았다.”는 거예요. “네가 내 혹평을 감당 못하면 수십 배 수백 배의 혹평을 계속 한 평생 받을 것인데 뒤 늦게 낙심하면 그 때 네 상처가 얼마나 크겠는가? 일찌감치 잘 때려치웠다.”할 때 비로소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았다는 거예요.
우리 주님은 초장부터 혹평해요. “네가 인간이야? 죄인 중에 괴수야.” 그런데 그걸 우리는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본인이 잘났거든요. 스펙 쌓고 나름대로 두께를 가졌다 그 말이지요. 복음도 알고 뭣도 알고 뭘 안다는 게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러니까 주께서는 매일같이 우리를 혹평을 해 버려요. “차라리 죽어라.” 이 말이지요. 사도바울의 소원처럼 죽는 게 낫다고. “죽는 게 낫다. 살아봐야 남한테 비위만 상한다.” 이걸 매일같이 받게 하십니다. 그게 홍두깨에요. 그게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의 영으로써 매일같이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혹독한 지옥의 맛을 봄으로써 지옥 속에서 천국을 사모하게 만드는 그 작전을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펼치는 겁니다.
우리 교회 좋은 점이 있다면 아무도 누굴 칭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쳇! 9월 19일 날 이 종분 집사님 자녀들 연주회가 대전에서 있습니다. 그걸 듣는 순간, 흥! 그것 감당해야 돼요. 그것 감당 못하면 두께 또 쌓입니다. 두께 없애는 방법, 밑에 있는 것 뽑아서 버리고 새로운 것 얹고 밑의 것 빼서 버리고 또 새로운 것 얹고, 그래서 얇은 그 두께를 유지하도록 해 주십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나는 이렇다.” 하는 그 자기 소유가 없고 얇은 판막이의 사건으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갑자기 한 50억 짜리 부자가 되거든 누가 이야기하세요. “어떻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주께서 이 모양 이 꼴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양 이 꼴로!” 제발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모양 이 꼴로.” 누가 박사학위를 받거든 “참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나 봅니다.” “주께서 날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얇은 판으로. 만두피가 너무 얇아서 십자가가 오면 터져서 십자가가 쏟아져 나오고 내가 그 만두피냐 아니냐 하는 것도 구분 안 되는. 인간 자체를 주께서 얇게 저미는 그 일을 주께서는 지금도 벌이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오면 두께 자랑으로 나오는 지옥 같은 세상. 그게 지옥이에요. 두께 자랑 자체가 스스로 자기 눈을 찢는 짓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스트레스고 힘든 것이거든요. 차라리 얇게 삽시다. 얇게 살아서 주님이 어떤 사건을 줘도 그것 천국 바라보라는 만나 같은 것들을 주신다는 것, 천국 가면 잊어야 될 사건들, 밑에서 빼버려야 될, 지나가면 없어져야 될 사건에 마음 매이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사건화 되어서 십자가를 원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일으킨 그 결과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가 만만치 않아서 으스대고 즐거워하는 그 생의 즐거움과 보람과 기쁨이 생의 동기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를 홍두깨로 밀어서 얇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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