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 4강-분쟁(고전1;10-13)140817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8. 17. 19:25

분쟁(고린도전서 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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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4-08-17 13:24 

분 쟁

2014년 8월 1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10-13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12)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이 인간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모조리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들로 둘러싸일 때만 심적으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낍니다. 돌발 사태가 유발될 가능성이 농후나 환경에 대해서 사람들은 상당히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왠 사람들이 나는 게바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나는 바울파라고 외치면서 자신들만의 차별화를 부각시킵니다. 이런 외침이 교회라는 곳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따지게 마련입니다. “어째서 저 교회 사람들은 세상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지 않는 바를 추구할까”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위대한 인물을 마음 속으로 여전히 추종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과 자신이 여전히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지하게 그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만이 맞다면, 이렇게 진지하게 교제가 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평생을 호사스럽게 살아도 헛사는게 될 공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반쪽만 살아놓고 제대로 살았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살아있는 자들만 산자들이고 이미 죽은 자들은 죽은들 끼리의 세계로 밀려났다는 이 구분성이 와해된다면 인생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만 알고 전부를 놓치면 결국 소용없는 인생으로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사람들의 친목모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닫혀지고 숨겨져 있습니다. 교회가 나타난 원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단순히 살았던 분이 죽음이 3일 후에 그 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서 살아있는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밝혀진 사항은 모든 인간은 실은 ‘죽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체적인 기준을 동원해서 늙고 병들어 죽은 자들은 ‘죽은 자’가 되고 아직 그렇지 않고 시체 아닌 채로 활동하며 돌아다니는 자를 ‘산 자’라고 분류해놓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인간기준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잘못된 판단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들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할 줄 몰랐기에 이런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로마서 6:6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옛 사람’이라는 표현은 곧 ‘새 사람’인 자들의 등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겁니다.

새 사람 된 자들만이 옛 사람을 언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짓는 그 구분점은 인간의 자체적은 능력으로서는 적절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로마서 6:6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안목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심 안에서만 발견되는 자아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본인의 존재를 집착하라고 구원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적용으로 인한 결과로서 본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하라고 등장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위상 변화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특이성으로 인한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죽었다가 살아났으면’ 죽기 전의 상태로서 죽기 전의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그 세계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로부터 죽으심을 삭제하지 않은채 도리어 그 죽임당하심을 내용으로 하여 ‘부활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이 인간 세계 안에 형성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부름을 받은 자만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언약에 의한 죽음’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이러한 특수한 죽음이 언약의 특별난 등장으로 인해 성사됨을 보입니다. 레위지파인 고라 자신들이 자신들도 아론 자손들과 같이 제사장직무를 행사해달라고 시위를 벌리게 됩니다. 즉 자기들 보기에 레위인 직무로서 제단을 섬기는 것과 보다 더 제단에 근접해서 일하는 제사장 직무나 더 나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이러합니다. 반발한 족장 250명에서 각자 향로불을 담은 향로를 들고 장막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들고 있는 향로에서 거룩한 맹렬한 불이 나와서 250명을 다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민수기 16:28-29에 이렇게 나옵니다.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케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일반이요 그들의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의 당하는 벌과 일반이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어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반항했던 레위인들은 그들이 언약 안에 저촉받는 특수한 위치에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일반인보다 더 가깝게 거룩한 하나님과 접촉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갖는 혹독한 저주의 맛을 곁에서 강하게 맛보고 특수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레위지파의 직무입니다.

이 일이 어찌 세속의 일과 견주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니 더 풍족하게 사는 것으로 보상받을 사고를 버려야했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거룩이 얼마나 대단한 거룩인지를 생생하는 보여주는 그 일이 참으로 귀하고 큰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자기 집착이나 자기 역사 고수가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권위로 나타내셨습니다. 권위란 그 앞에서 사적 자아들은 잘게 부셔져야 하고 가루가 되고 안개처럼 다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귄위가 없이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를 사수하는 권위자로서 행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을 질식되고 감추어져 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분쟁남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대조하면서 분쟁의 근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나도 십자가가 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세상을 최종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의 특별한 죽으심 뿐이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자신의 가치에 도취된 그 모양새가 곧 옛 사람의 모습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새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고전 1장 10-13(분쟁)1408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13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0-13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그 원인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원인은 찾을길이 없는데 이상한 이야기들, “나는 게바에게, 여기서 게바는 베드로를 말합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는 이야기들을 하는 일단의 집합체, 무리들이 고린도교회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참 기이한 일입니다. 카메라 기자가 와서 “나는 게바와 함께 있고 나는 바울과 함께 있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할 때 사진을 한 번 찍어봤으면 좋겠어요. 



과연 그들 속에 게바가 있는지 아니면 아볼로가 있는지 혹은 그리스도가 있는지. 사진 찍으면 거기에 제자들밖에 없어요. 그리스도가 사진에 찍히고 게바가 나타난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베드로에게 속하고 아볼로에게 속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바울에게 속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흔히 교회라고 이야기하는데 교회라는 것이 실존적으로 정립이 될 수가 없고 그 원인을 세상 속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현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예요. 이런 기이한 현상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단순히 친목모임인가, 두레마을 같은 것인가? 이런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그 전체를 설명하려면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그 토대나 근본을 찾아가 봐야 돼요. 그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확인되지 않는, 바울과 함께 있다는 이 자체가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잖아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영화를 열 댓 번 보더니만 이순신 장군이 우리 집에 나와 함께 산다고 하면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이 새벽 몇 시에 나타났느냐고 하면 한 두시에 나타나더라, 이런 식으로는 이순신장군과 함께 있다고는 말 못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꿈에 나타나는 정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했으니까 도대체 네가 무슨 정신으로,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들을 자기교회로 만들어서 이들을 교인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은 어디 있느냐는 말이지요. 이미 예수님은 죽은 것으로 확정이 난분인데, 예수님은 지금 죽은 분인데, 시신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신 분인데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신 분이고 현재 인류의 역사와 문명이라는 것은 산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일구어나가는 것, 인간의 정신력의 산물이 바로 인류역사 아닙니까? 인간의 정신력. 



따라서 인간의 정신력에다 죽은 예수를 집어넣으려면 그냥 모범이라고 하면 되지만 지금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할 경우에는 문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 있어버리면 이 땅에서 정신력으로 아무리 가정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어도 예수님이 살아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 인생은 다 쓰레기 같은 인생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 또 어떤 어르신이 살다 죽었다. 또 어떤 늙은 분이 살다 죽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질서의 안정감을 줘요. 사람은 살다가 죽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제사만 받고 모든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이렇게 되면 현재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안정성이 있는데 만약에 죽인다고 죽였는데 그 분이 안 죽고 되살아나서 지금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들과 함께 활동하더라. 이렇게 돼버리면 그분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자칫하면 내 인생이 헛방인생이 될 공산이 굉장히 큽니다. 



세상을 반쪽만 알았다고 해서 전부를 알았다고 할 수 없거든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끼리만 하자.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전부냐 그 말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고 산 사람끼리만 잘해보자는 이것은 잘못된 현실감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들끼리는 수납이 안 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그것을 지적한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대처가 뭐냐 하면, 그 살았다는 그 산 사람을 한번 불러와 보라는 거지요. 



우리교회 지묘동 이곳주소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여기 오셔서 예수님이 도포를 입든 두루마기를 입든 뭐든 입고 나타나면 산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산 사람과 같이 교제할 수 있도록, 현재 우리가 살아 있는 형태를 가지고 같이 등장시켜서 모임을 같이 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할 수가 없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이 못 자국을 봐라.” “아이고 사셨네요. 예수님 몰랐으면 내 인생 종칠 뻔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살아서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시니 예수님 당신도 우리 산사람 속에 끼워 넣어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다시 우리 삶이 안정되는 질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살았다는 소문만 무성하고 본 사람은 있다는데 그게 손에 잡히지를 않고 카메라에 포착이 안 되네요. 이것은 구라 아닙니까? 이것이 거짓말 아니에요? 원인이 밝혀져야 우리가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정돈이 될 수 있습니다. 쥐 소리는 나는데 쥐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것 참 미치는 거예요. 담배냄새가 어디서 나기는 하는데 3층으로 뛰어 올라가 봐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안 보여요. 1층에도 없고. 그러면 담배 연기는 어디서 나는 것일까, 이렇게 원인을 모를 때는 찝찝하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찝찝한 게 없어요. 왜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했는데, 부활했다고 했는데 그 부활은 우리가 살아 있는 이 방식으로 다시 살아남이 아닙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 죽음 자체가 덩어리를 만들어서 새로운 부활의 세계를 만드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은 자가 죽고 난 뒤에 죽기 전의 그 모습으로 유지될 때 그것을 부활이라고 개념을 그렇게 잡는 겁니다. 죽기 전의 그 모습을 유지할 때.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내가 현재 살아 있다는 그 방식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유다백성들이 나를 죽였잖아. 그 죽였다는 사실, 현실을 품은 채 그것을 삭제하지 않고 죽음세계를 그대로 담은 채 살아나는 형식으로 부활하신 거예요. 제가 말을 해 놓고도 이게 참 어려워요. 산자는 산자이고 죽은 자는 죽은 자이다. 이렇게 칼로 떼 내면 되는데. 그렇게 떼 내게 되면 죽은 자는 죽은 자들끼리 공동묘지에 있거나 아니면 동네 바깥 어느 장소이거나 교회 마당에서 처리하고 거리를 왕래하는 것은 산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되는데 예수님은 소위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그 일을 이미 죽었던 자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만든 채로 그것을 부활의 세계로 해서 우리와 함께 섞이면서 지금 실존해서 살아 계시는 겁니다.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요. 말로 표현이 안될 문제입니다. 죽으면 죽은 것이고 살았으면 사는 것인데 죽음을 포함한, 우리가 보기에 “죽은 것이 맞네.” 하는 것이 명확하게 담겨 있는 채 실제는 안 죽고 버젓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지금 살아 있다는 그 말입니다. 죽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이유는 “니들이 바로 죽은 세계”라는 거지요. 우리들 생각에는 우리는 산 세계이고 늙어죽은 사람은 죽은 세계, 이러한 구분 자체가 너희들의 머리에서 지어낸 일방적인 엉터리구분이라는 겁니다. 



그런 구분은 같은 죄인인 인간들끼리 모여서 만들어낸 엉터리개념이고 실제로 죽음과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 있으면서도 “내가 죽은 자 맞다.”를 깨닫는 새로운 영역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는데 그게 바로 성령의 세계, 부활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로마서는 다 했지만 한 즉시로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알려드립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입니까? 이 용어 자체가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못한 용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 옛사람이. 여기에 나오는 옛사람이라는 것이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한 옛사람일수가 없지요. 우리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그 몸뚱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우리라는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옛사람과 새사람을 나눈다는 것은 옛사람과 새사람을 나눌 수밖에 없는 사태나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결과로 말미암아 옛사람은 옛사람대로 새사람은 새 사람대로 분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사람과 새사람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 의해서 산사태 같은 사건에 휘말린 거예요. 뭔가 덮쳤어요. 죽은 자인 것처럼 살아 있는 주님,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어요. 가사도 참 외우기 힘든데. 죽은 자 같은데 산자로서 너도 나처럼 살아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를 지명할 때 그게 바로 새 사람이 되고 그 새사람이 되고 난 뒤에 뒤 돌아보니 소위 살았다고 우겼던 그것이 옛사람일 줄이야 과거엔 상상도 못했지요



제가 설교시간에 누누이 이야기를 했어요. 일부러 설교를 어렵게 하려고 지금 용을 쓰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 저 지금 살아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곧 죽는데 살아 있는 우리를 죽고 난 뒤에도 좋은 나라 가서 살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요구하는 그것은 이미 옛 사람들이 규정해놓은 잘못된 분류작업입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는데 죽고 나서는 영원히 산다. 이것은 죄인들의 착각에 의해서 종교적으로 잘못 구원을 한 거예요. 성령을 받게 되면 옛 사람은 죽고 지금 살아가는 것은 새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 하지 마세요.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우리한테는 낯설게 들리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말씀 듣는 시간보다도 스물네 시간 세상과 교제하는 시간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익숙해졌어요. 우리 몸도 따라서 맞춤인생, 맞춤세월도 우리를 집어던진 겁니다. 그게 자기 집착이에요. 오늘 설교제목도 분쟁이고 내용도 분쟁인데 분쟁의 원인은 자기집착에 있는 겁니다. 자기 집착이 어디서 생겼는가? 자기 집착이라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의식, 자기 역사와 자기 지속성, 어렵게 말해서 자기라는 것의 동질성의 연속 혹은 지속성이라 하는데요, 이게 이런 겁니다. 



사람이 자기 직업이 있잖아요. 사람의 자기전문 직업에 몰두하고 매진하다 보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절대화 하다보면 그 때부터 자연적으로 분쟁이 유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직업 무시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거든요. 예를 들게요.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의 기초가 되는 4가지의 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금형, 또는 열처리 문제, 거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산업현장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허드렛일이 되어서 60 이상 된 사람만 하든지 아니면 외국인노동자들 데려다가 하는 그런 류의 일들입니다. 



도색 작업 같은 것은 완전히 사람 몸이 망가져 버려요. 열처리 작업장 같은 경우에 실내온도가 50도가 넘어요. 하루 10시간씩 작업해 보세요. 어느 젊은 사람이 거기에 가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기계부품에는 그런 가장 기초적인 뿌리산업, 뿌리기술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게 지금 무너져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어릴 때부터 생활고에 몰려서 초등학교 나오자마자 현장에서 용접일 같은 힘든 일을 50년 이상씩 하다 보니 달인이 된 거예요. 얼마나 직업에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여기서 분쟁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직업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자아에 집착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일이 국가경쟁력이나 국가산업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직업이지요. 힘들지만 꼭 있어야 하는 직업이 되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존경해야 되고 그 사람들도 자부심을 가진다는데 대해서 동의해야 되지요. 그러면 이런 직업은 어떻습니까? 일제 강점기 때 농촌에서 농활이죠, 애들 계몽운동 하던 중에 이래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고 상하이에서 인쇄소도 하고 채소장사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 가서 김구 선생 만나게 되고 자식들한테 “너희들은 나중에 아버지가 없다고 해서 서러워하지 말라.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서 장렬히 죽는다.” 하고 상하이의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던 윤봉길 의사. 그 직업이 직업으로서 어떻습니까? 내 몸 하나 산화시켜서 조국을 살리겠다는 그 직업 어떻습니까? 대단한 자부심이거든요. 



그런 자부심이 분쟁을 낳는다니까요, 분쟁을. 제가 방금 두 가지 직업을 언급했지만 안중근 의사는 어떻습니까? 안중근 의사는 손가락 자르고 의혈단 만들어서 “이등 박문, 이 늙은 도둑놈은 내가 죽인다.” 해서 대동아평화를 위해서 싸우다 죽었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장한 직업입니까? 천주교 신자로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러면서 죽었잖아요. 제가 두 가지 직업을 언급했는데 그 두 가지 직업 말고 각자 여러분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직업도 여러분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직업이거든요. 옷가게 하는 그런 직업도요. 그거 해서 자식들 다 키웠으니까요. 또 주부라는 직업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 직업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과 자부심이 분쟁을 유발한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습니까? 받지를 못하지요. 옳지 못하지요.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에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분쟁에서 자유로울 사람,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다고 할 사람이 근본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역사와 자기 전통에 대해서 지독한 집착과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는 그 재미로 평생을 살아가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다. 우리 아버지를 무시하지 말라. 우리 아버지는 술도 좀 하셨고 도박도 하셨지만 국가에 봉사했다.”는 이런 것. “우리 아버지는 상이용사인데 625때 백마고지전투에서 인민군 456명 죽이고 자기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이런 것. 456명인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자기 아버지를 통해서 자기 가문에 영광을 돌리는 이런 것.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할 때 교회는 필히 분쟁이 유발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부심과 집착의 뿌리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뿌리하고 만남이 성사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언급하는 교회의 뿌리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내가 나름대로의 가치 있고 국가와 민족과 이웃에 대해서 보람 있는 봉사적인 일을 했다.”라고 자부심을 갖는 순간 무엇이 덮이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었다는 그 사실이 덮여버리면 이것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을 두 가지 종류의 죽음으로 나눴습니다. 

그 한 가지 죽음은 인간들이 그냥 죽는 죽음입니다. 늙어죽는 죽음, 교통사고로 죽는 죽음, 

이런 죽음을 인간의 죽음이라고 보고 또 하나의 특수한 죽음을 사도바울은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특수한 죽음으로 거론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교회라는 것은 인간들이 살다가 죽는 죽음에 기반 해서 되는 교회가 아니고 또는 인간들의 삶에 기반 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고 특수한 죽음에 기반 할 경우에만 그것이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생각은 뭐냐 하면, “그러면 나의 죽음에서 특수한 죽음으로 건너뛰면 될 것이 아닌가? 내 죽음은 신경 안 쓰고 주님의 죽음만 신경 쓰겠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들 하시는데 그렇게 건너 뛸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그런 능력이 왜 없을까요? “성경에 옛사람이 나오고 새 사람이 나온다. 그러면 지금의 나를 옛 사람으로 간주하고 예수 믿는 것을 새사람으로 간주해서 지금의 옛사람을 부정하고 새 사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면 새사람이 되겠네. 쉽네. 그렇게 건너뛰면 되잖아.”라고 하는데 그렇게 건너 뛸 수 있는 인간이나 그런 능력자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건너 뛴 그 원인자는 나에게 있어요. 건너뛴 그 나의 자부심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덮어버리는, 자신의 잘남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뚜껑으로 덮어서 안 들키고 그냥 숨 막히도록 틀어막는 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안되는데 그러면 어쩌라는 말인가? 거기에 대해서 제가 또 준비했습니다. 이런 난처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민수기 16장에 보면 어떤 문제가 나오는가? 권위문제가 나와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사도의 권위문제가 나오고 민수기 16장에는 모세의 권위문제가 나옵니다. 권위의 등장은 모든 인간을 잘게 부수는 힘의 발휘와 동반해서 등장합니다. 권위 앞에서 인간은 안개가 됩니다. 등장한 권위 앞에서 인간의 자기 권위는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권위자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자긍심과 자부심, 자기직업에 대한 애착과 거기에 동반해서 나오는 자기 살아온 인생의 경력과 역사와 그동안의 수고로움과 고생한 것을 마치 드라마처럼 혹은 소설처럼 귀하게 붙잡아두려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발적으로 권위가 등장하게 되면 그것은 완전히 잘게 부숴야 합니다. 아예 콩콩 찍어야 됩니다. 마늘 찧듯이 완전히 찢어져야 돼요. 우리가 살아온 직업의 자부심, 뿌리산업의 직업이라는 것, 40년 동안 남들이 하지 않는 열처리직업에 종사했다는 그런 것까지 전부 다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 앞에서는 다 찍어버려야 돼요. 나는 윤봉길 의사의 후손이다, 이순신장군의 후손이다, 이거 다 찍어버려야 돼요. 



민수기 16장에 보면 레위지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레위지파가 들고 일어났을 때에 그들의 명분이 있습니다. 명분이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권위를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그들의 근거가 뭐냐?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절에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게 명분입니다. 쉽게 말해서 “출애굽 할 때 동등한 입장에서 출애굽 해놓고 모세와 아론 너희들이 대장질을 하느냐? 그 대장질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왜 같은 레위지파인데, 이 고라자손들이 레위지파거든요, 이 레위지파에게는 레위지파 일만 시키고 제사장은 너희끼리 독점해서 해 먹느냐? 우리도 제사장일 좀 교대로 해 보자.”라는 제안을 이런 식으로 한 겁니다. 



얼마나 민주적입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듣고 250명에게 각자 향로를 하나씩 들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레위지파 선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 작은 일로, 시답지 않는 일로, 제사장보다 허접한 일로 생각하느냐?”라고 한 겁니다. 10절, 11절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리는도다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라고 하고는 향로에서 불이 일어나요. 



불이 피어오르면서 그 향로에서 올라온 불이 한 사람 한 사람 다 죽였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그래놓고는 하는 말, 여러분이 오늘 설교의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민수기 16장 28절에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케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줄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일반이요 그들의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의 당하는 벌과 일반이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어니와.”라고 한 거예요. 즉 같은 죽음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무슨 죽음인가?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관여, 하나님의 약속, 언약대로 죽었던 죽음, 곧 심판의 죽음, 저주의 죽음을 레위지파로서 마음껏 증거하고 보여줄 수 있는 자리에 그들은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살아야 큰 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너희들이 레위지파 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으라고 그 레위지파를 줬다는 그것이 너희들 보기에는 거부하고 싶은 일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했던 일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병 고칠 때 “야, 좋겠다.” 예수님이 기적 일으킬 때 “야, 예수님은 재주도 많아.”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 때 “야, 예수님은 참 인기도 좋아.” 그렇게 했겠지요. 정작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제대로 죽기 위해서, 일반 죽음과 다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었는데 그 죽음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고 정말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그 절대적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현재 우리가 살았다고 해도 산 것이 아니고 실은 죽은 존재인 것을 그 십자가에 근거해서만 우리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게 성도가 해야 될 일이라는 말이지요. 



예수 믿었는데 “예수 믿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사업 잘되어야 할 텐데 절에 나가는 사람은 사업이 잘되고 나는 사업이 못되고. 하나님이여, 예수 믿고 난 뒤에 뭐가 잘되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하나님이 “망하라고 예수 믿는 그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고 아무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권위가 나타날 때 그 권위를 소유하거나 내 능력으로 전환시키는 권위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죽은 자라면 진정 죽은 자 값을 하라제대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180도 뒤집어 놓는 그 권위가 진정한 권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는 왜 자아도취에 빠져있고 분쟁을 유발하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여러분, 교인끼리 서로 싸우지 마시고요 친하게 지냅시다. 성경에 보세요. 분쟁하지 말고 마음을 합하라고 하니 우리가 같은 말로 마음을 합합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형제들이……” 어깨동무 하고 찬송가 부르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자신이 어떤 특정교회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숨 막히게 만들어 버리는, 아주 질식하게 하는 작용으로 우리 옛사람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계기가 되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동안 덮였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 한 번 노출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이 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방금 한 민수기 이야기에서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죽음,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분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분이 너희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야기한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순신 장군과 어떻게 동행합니까? 영화 보면 되는 거예요? 베드로와 어떻게 동행해요? 바울과 어떻게 동행합니까? 그리스도와 어떻게 동행합니까? 모셔다가 사진한번 찍을까요? 



아닙니다. 날마다 잘게 쪼개지는 나의 자아, 사람이 잘게 쪼개지고 안개 되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스트레스요 트라우마 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근심 걱정은 그 안에 보게 되면 자아가 새로 짠 판이 있어요. 그 판을 자꾸 청소하니까 자기가 스스로 고민과 걱정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 거예요. 맨 날 하루 일과가 자기가 만든 상상의 판을 자기가 호호 불면서 광을 내다보니까 그거 흠집 날까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수모를 자청해요. 수모는 누가 만드는가? 수모를 본인이 만든다고요. 제가 수련회 마지막 날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가 성경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막달라 마리아가 행실 나쁜 여자로 소문이 났지만 예수님께 눈물로 향수 뿌릴 때 숨어서 한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했다는 거예요. “마음껏 수모해라. 나는 그것을 수모로 받지 않겠다. 나는 오히려 나의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게 어떻게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능력이겠어요? 주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놀라운 큰 일이 뭐냐? 놀리는 가운데 주님께 감사하는 일, 그거잖아요. 놀리는 가운데서. 이러한 자아집착, 막달라 마리아와는 정 반대되는 모습들, 그 옛사람의 모습들을 한 3일 동안 뉴스를 통해서 잘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교황의 옷차림과 그의 행동을 통해서 찾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말씀에 어떤 것이 있는지. 시편 109편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그 년 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바로 이게 말씀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빌어먹게 하옵소서.” 이런 저주가 교황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옵니다. 그러나 교황은 못 나와요. 



교황은 인기관리를 해야 되기에. “급사하게 하시고 그 집안에 찾아오는 것은 오직 죽음밖에 없게 하옵소서.”라는 이야기를 세월 호 유족 앞에서 하겠어요? 못하지요.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어려운 사람 돌보는 것은 면사무소 복지과 직원들이 더 잘한다고. 그 사람들은 해주면서도 욕 얻어먹잖아요. <도표로 보는 로마 카톨릭의 배교의 역사> 제가 이런 것 잘 하는 성격이 아닌데 이거 하나 적었어요. 왜냐하면 교황이 언제부터 교황인지를 질문하는 분이 계셔서. 590년 교황칭호, 800년에 마리아한테 기도, 850년 성수에 소금물을 공인, 1090년 묵주를 만들었고, 1183년 종교재판소 설치하고, 특히 얼마 전 대전에서 했던 성모승천기념, 성모는 보통 인간이 아니고 특수한 죽음, 다시 말해서 성모도 부활해서 하늘에 올라갔다는 성모승천설, 그게 바로 1185년 마리아 무류잉태설, 그 다음에 1917년 마리아가 은총의 주재, 마리아에게 빽을 쓰면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고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고 그 다음에 1950년에 마리아 부활 승천설, 1962년 마리아종신 처녀설. 



이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이런 설을 만드는 이유가 뭐냐? 교인확보에요. 왜 교인을 확보해야 되느냐? 교인을 확보해야 돈이 확보되니까.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다 마찬가지에요. 구원파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저주를 못해요.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 간다는 말을 못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오직 인간의 그 모든 것은 자아집착, 자아전통,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것만 쥐고 그 재미로 살기 때문에 그걸 행복으로 봅니다. 여기 도표에 보면 1546년에 유전을 성경과 같은 권위로 결정했다고 나오는데 유전이란 전통이거든요. 전통과 역사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결정했다는 것이 1546년입니다. 



이런 회의들을 하는 자체가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옛사람들이 모여서 생각하는 교회를 구체화해 나가겠다는, 거기에 등록하면 구원받고 거기에는 최고질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교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개신교 이야기 기독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고. 이 분쟁이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에요. 우발적으로 욱 하는 감정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정치화 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 패거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패거리가 뭐냐? 자아집착이에요. 내가 그동안 이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했는데, 얼마나 충성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틀어막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특수한 죽음만이 부활의 세계에요. 모든 인간의 죽음은 언약에 의하면 마땅한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없어요. 주님 앞에서 언약적으로 보면 다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무슨 미련이 남아서 자기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하고 정당화하고 나는 뿌리직업에 50년 종사했느니, 안중근이 어떻고 윤봉길이 어떻고, 왜 거기에 대해서 집착을 하느냐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오직 하나의 죽음만 생각하란 말이지요. 사느냐 죽느냐의 기준은 오직 하나의 죽음밖에 없어요.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내가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 못 박혀서 죽었습니까?” 설사 바울이 십자가 못 박혀 죽어도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하고 다른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특수한 십자가입니다. 특수한 죽음이에요. 모든 인간은 산자가 없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영원토록 보장해주고 확정해주는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왜 자꾸 목사님은 죽었다, 죽었다, 이야기는 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왜 안합니까?” 제가 나누거든요. 옛사람과 새사람을 나누어서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새사람이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왜 죽었다는 말만 합니까? 



새사람이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근거에 의해서만 새사람을 언급하는 거예요. 천주교에서는 말하기를 베드로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가 첫째 교황이라고 당겨서 천주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우기는데 반석위에 교회를 짓는다는 말은 육적인 베드로, 인간위에는 절대로 교회를 안 짓겠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그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혈육이 아니요, 혈육이 아니요, 눈에 보이는 가시체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 



그러면 내 아버지로부터 교회가 되지 나는 아니요, 나는 아니요, 라고 하는 사람만이 교회고 성도에요. 나의 옛사람은 아니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새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옛사람은 아니요, 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미 죽은 자요, 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아집착, 자기전통, 자기역사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분쟁이라는 것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십자가를 가지고 분쟁을 없애버리는 계시를 고린도교회에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18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그 다음에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런 거거든요. 이런 것을 하나하나 지킬 필요는 없어요.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나는 이미 죽은 자라서 내 것을 따로 가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이런 것은 필요 없어요. 내 것은 없어요. 오직 주님 안에서 새사람 되어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이미 산 사람으로서 우리는 옛사람은 이렇습니다, 하고 증거 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여러분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필히 거기서 옛사람의 성질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물건 안 살 거면 들어오지도 말지. 에이 씨.” 반드시 나의 전통, 나의 자부심, 나의 긍지를 긁어버려요. 이래서 성질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나올 때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분쟁을 억지로, 인간적인 친화력으로 없앨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은 죽은 분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늘 생각하면서 

이미 산사람이기에 마음껏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언급하여서 

더 이상 스트레스 받고 시험 받지 않는 성도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