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3강-견고함(고전1;7-9)이근호140810

아빠와 함께 2014. 8. 12. 07:57

견고함(고린도전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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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4-08-10 13:24 
견고함 

2014년 8월 1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7-9 

(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른 말씀과 더불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하등 도움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활의 견고함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매사가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기에게 말은 건넬 경우에는 일상에 보탬이 되는 말씀을 한 경우에만 받아들여집니다. 

오늘 말씀과 같은 경우는 전혀 인간들의 경제 활동에 유익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로부터 역시 외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누구의 뜻이냐는 겁니다. 그분은 바로 인간들에게 배척받은 그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난 뒤, 빌라도는 대중들로 하여금, 바나바와 예수님 중에서 보다 믿음직 한 자를 선택케 했습니다. 당연히 대중들은 바나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보편적 심정에서 정리되는 ‘믿음직 함’에는 하나님을 뜻을 거부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음이 감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담겨 있는 ‘견고하다’는 이 제안에 대해 사람들이 거부할 경향이 농후합니다. 쉽게 말해서 “못 믿겠다”는 투로 나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나 신앙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고자 해도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못 믿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직스러움이 따로 생각한 바가 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 속에서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배척 기운이 살아있습니다. 바로 이 배척의 성질을 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이나 고린도전서 말씀을 배척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견고함 속에 ‘종말의식’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종말 의식이 빠진 상태에서 나름대로 견고함을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날의 견고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새로운 날이 ‘주의 날’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한 때 이 지구상에 물로서 멸망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는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서 불로서 심판받는 날이 도래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물의 과다와 불의 과다는 신경 쓰이고 짜증나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인은 정작 ‘불의 날’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신다’는 그 ‘주의 날’를 고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온통 각자 ‘자기 날’들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집안 어른이 출타해서 맛있는 음식을 사가지고 오게 되면 대체로 남자들은 그 맛나는 음식을 갖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자기 홀로 먹는 재미에 탐닉합니다. 하지만 가족의 여자분들은 바구니 채로,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수다 떨면서 그 맛난 음식을 사다주신 어른분에 감사하는 말을 내놓게 됩니다. 그 현장은 자기 자랑하는 현장이 잠시 소멸됩니다. 

모든 날들이 각자 인간들이 ‘자기 아지트’, ‘자기 토치카’를 쌓고 그 안에서 독자적인 자기 견고함을 유지하려는 모양새의 지탱하려는 것은 나름대로의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8이 말씀을 ‘내 구원 견고함’으로 채택하고서는 곧장 자기 아지트로 가져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있음을 보이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으로 적용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어느 것도 다 ‘불신앙 세계’가 됩니다. 불신앙이란, 모든 의미가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등이 가려워서 등을 긁는 것도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가는 것도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그 행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견고하고 충분한 정당한 의미가 성립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의 전모와 모든 세상 일이 관련되었음을 아는 인식을 말합니다. 즉 나를 위해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19-20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서 나름대로의 견고함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자기네들 끼리의 모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그 닫힌 문을 인정치 하고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게 아니라 “어디가 계셨기에 이렇게 나타나신 겁니까?”라고 물어야 할 대상입니다. 

인간들만의 세계는 견고함으로 버티는 세계입니다. 제자들은 출입구 문들을 좌다 다 잠갔습니다. 이 세계에 구멍이 뚫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의 죽으심의 전모가 담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제자들은 특이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기존의 세계와 대조에 나서도록 하나님께서는 조치하셨습니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 안에서 인간들의 시간론으로 잡아낼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담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차 사고 날 뻔하고 난 뒤, 그 차를 바라볼 때마다  ‘이미 차 사고나서 폐차된 차’로 계속 봐야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 14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죽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특이한 죽음 사건을 가지고 다시 부활하셔서 이 세상에서 성령 안으로 찾아드십니다. 이 사건을 근거로 구원 사건이 진행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확정된 십자가 죽음 사건만이 사람이 찾을 수 있는 숨어 있는 세계의 견고함, 곧 구원의 견고함입니다. 

사람은 안개로서 살면서 더덕더덕 붙여놓은 작위적이고 인위적은 모든 요소는 한껍질 두껍질 벗겨져 날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존재다발이 아니라 사건다발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은 확정 난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이 연관성이 곧 구원이라는 이름의 관계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나만의 세계의 견고함을 의심해서 사건의 다발로 들추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4-08-10 20:17 
3강-고전 1장 7-9(견고함)1408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7절에서 9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7-9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우리 일상의 생활에서 우리가 좋아하고 필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내 생활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돼요. 만약 사람이 자기 생활에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를 자꾸 듣는 것은 내 생활의 효율성, 내가 추진하고 있는 내 일에 혹시 방해나 장애가 될 공산이 있습니다. 남들 성경 안보고 영어 회화 공부 한 자 더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거 보고 있게 될 경우에 그만큼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이야기가 우리 일상에 보탬이 안 된다고 정리해 봅시다. 우리 생활에 전혀 보탬이 안 됩니다. 



도움이 안 되는데 이 이야기를 누가 했느냐 하면 사람들한테 배척받은 분이 이야기했어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분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배척을 받아서 당신은 필요 없다고, 소용없다고 밀어냈는데 그 밀어내신 분이 밀어내서 가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부활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또 이러한 지적을 하면서 나타난 거예요. 귀신도 이런 귀신이 없어요. 와가지고 “네가 주의 나타나는 날에 견고케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죽 할 때 그동안 뭔가 우리가 배척했다는 사실, 실수하고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잘못된 선택을 했지 않았나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와서 우리가 지적을 받을 수가 있어요. 



뭔가 세상을 보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을 빠트리고 세상을 그냥 종합해서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놓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았느니 못살았느니, 이 세상에서 자기들끼리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너는 잘 살았다, 나는 못 살았다, 이런 부질없는 경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작 중요한 요소는 빼놓고, 주님을 제외시키고 우리들끼리 누가 잘 먹고 잘 살았느냐의 시합이 인생을 후회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가, 우리한테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것이거든요. 예수님이 배척당할 때,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를 했다면 절대로 배척 안 당합니다. “우리 손잡고 해 봅시다.” 라고 나올 거예요. 



그런데 그런 요소가 없고 그럴 기미도 없으니까 필요 없는 존재라고 갖다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6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하시고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라고 하셨다 그 말이지요. 누가요?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그 분이 배척당해놓고 저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생각하는 네 생활이 견고한 게 아니고 내가 배척한, 쫓겨난 주님의 세계가 도리어 더 견고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견고하지도 않은, 강하지도 않은 것으로 강하다고 버티고 있으니까 그것은 나중에 주의 날에 다 와장창 부서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들으면 협박이나 공갈처럼 들리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배척해도, 예수라는 존재는 없고 현재 있는 우리들끼리만 해도 견딜 수 있고 생각한 겁니다. 주보 뒤에 설교요약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난 뒤, 빌라도는 대중들로 하여금, 바나바와 예수님 중에서 보다 믿음직 한 자를 선택케 했습니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 뒤에 “당연히 대중들은 바나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만큼 예수님이 오게 되면 불안스럽고 바나바는 현재 견고한 인간 질서를 문란 시킬 존재는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냥 자기들 선에서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나쁜 자는 교도소에 집어넣으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자기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고 본 겁니다. 



우리가 당한 우리 일에 대해서 흔들어낼 만한 것 같으면 우리는 무조건 배척해 내는 거예요. 믿음직하지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말하는 그 믿음직하다는 것, 신앙이라는 것, 견고하다는 그것, 그것은 예수님 빼고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예수님 그런 분 없어도 우리는 우리끼리 단단하게 살 수 있습니다, 라는 마음이 이미 있었던 거예요. 만약에 오늘 본문도 “우리 일상에 도움이 안 되는 본문이니까 넘어갑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우리 자신 속에 뭐가 들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 요소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견고라는 이름으로 턱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배척을 해 대면서 나름대로의 견고함을 우리가 따로 챙기고 유지하려고, 버티고 지켜내려고 지금 애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일상에 보탬도 안 되는 이 고린도 전서를 들고서 하는 말이 “그래서 너희들은 불신앙”이라는 거예요.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믿을 수는 없어요. 예수님보다 더 좋은 것,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한테 나타나야 되고 그 예수님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서 우리는 거기에 푹 빠져야 되고 그 푹 빠져있음으로서 그것이 신앙이 아니고 견고함이 아니고 불신앙인 것을 지적받아야 되는 절차를 우리가 겪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만 비로소 신앙의 대상이 된다, 제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 말은 뭐냐 하면, 불신앙하세요. 간단한 문제에요. 제발 불신앙으로 사세요. 이것은 부탁 안 해도 될 문제입니다. 이미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일부러 그거 걱정 안합니다. 매사가 불신앙이니까. 이제는 불신앙이 뭐냐 하는 것을 이야기할 차례인데, 불신앙 곧 믿음이 아닌 것이 뭐냐 하면, 몸이 가렵다고 긁는 것이 불신앙이에요. 몸이 가렵잖아요. 목욕 다녀 온지 두 시간도 안 지났는데 가려워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려우니까 긁는 것,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긁지 말까요? 이 목사님이 긁는 것이 불신앙이라고 하는데 안 긁으면 신앙 되는 겁니까? ‘왜 이렇게 가렵지?’ 긁는 거예요. 불신앙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음으로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 그게 불신앙이에요. 남의 몸이 가려운 것이 아니고 내 몸이 가렵잖아요. 그러니까 긁는다는 말이지요. 긁을 때는 목적과 이유가 있어서 긁잖아요. 장터에 가보세요. 효자손이라고 해서 등 긁는 것 몇 천원 주면 살 수 있습니다. 그거 사서 긁을 때 그 긁는 행위는 정당한 행위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가려우니까. 내가 이빨이 아파서 치과에 간다. 그것마저 불신앙이라고 닦달내면 이것은 정말……. 이빨이 아파서 치과에 가는데 그러면 치과 안 하고 문턱에 실 걸어서 뺄까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신앙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그 모든 의미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사고체제, 그게 불신앙입니다. 그 경건한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은 전혀 필요치 않은 분이었어요. 예수님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의미 있는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구성하더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 구성하다 보니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다 기타소리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도움도 안 되고 경제활동 하는데 이익도 안 되고 이상한 소리만 자꾸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이 불신앙 쪽에서 성경말씀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배척하면 되지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하지요. 고린도전서가 왜 있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처럼 이제는 온 인류고 유대인이고 다 누구를 배척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숨어 있는 질서를 배척하는 본질을 드러낸다는 취지로 이 성경을 준 겁니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이밀면서 “소용없지? 소용없지?”하고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우리에게 소용없다는 것은 이 고린도전서 없어도 나름대로의 견고함이 우리에게 유지된다고 자부하면서 살아가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나름대로 받아들였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한국교회전체도 그렇고. 뭐냐 하면, “성경 고린도전서 1장 8절을 봐라. ‘주께서는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러니까 믿어라.” “믿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았으니 되었네.” 고린도전서 1장 8절이 사실은 우리한테 하등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너무 소용없다고 이야기해버리면 교회 자체가 유지가 안 되니까 “1장 8절은 여러분들에게는 소용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지막 날에 여러분은 구원받습니다.” “그런 구절이 있어요?” “예,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8절에 있습니다. 눈 달렸어요?” “눈 있습니다.” “보세요. 보시고 믿으면 여러분은 견고합니다.”라고 해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는데 유대인들은 배척했습니다. 결국 우리도 나한테 이익 된다고 이 말씀 따로 챙긴다고 해 봤자 언젠가는 주님을, 애초부터 그렇지만 언젠가는 주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속성에 의해서 작업이 이미 시작된 거예요. “나는 견고합니다. 나는 견고합니다. 나는 확실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지요. “뭔가 불안해요? 구원자체에 대해서 뭔가 불안하십니까?”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내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있는데 그게 내 구원은 아니에요. 그런데 평소에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질서는 뭐냐 하면, 나한테 의미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요? 그게 무슨 세계? 그게 불신앙의 세계입니다. 



불신앙의 세계에는 나에게 유익이 있어 줘야 돼요. 성경에 있는 하나님, 예수, 그게 부처가 되었든 누구든 관계없어요. 나를 견고하게 유지해주다가 천국 가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면 나는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 고린도전서 1장 8절을 집어넣어버리면 이것은 잘못된 만남이에요.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 취지와는 달리 또 자기 이익을 챙기는 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견고하다면 개판같이 살아도 되겠네요. 견고한데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는데. 교회도 나오지 말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어떻게 살아도 괜찮겠네요. 고린도전서 1장 8절이 있으니까요. 그런 교회 가면 또 성화하라고 닦달을 내네요. 성화하라고. 견고하다면서요? 방금 견고하다고 해놓고 무슨 착한 일을 또 해야 되고. 그러니까 그쪽에서 하는 수법이 뭐냐 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복 받는 것은 여러분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받습니다.” 해서 슬슬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네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제가 어릴 때의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야 되겠는데요.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께서 좀 멋쟁이가 되어서 그날 장사가 좀 된다 싶으면 서문시장에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만두집에서 만두를 사오셨어요. 60년 전의 그 만두집은 정말 만두를 맛있게 잘했어요. 우리 식구가 그 당시 13식구였는데 그 만두를 잔뜩 사왔어요. 그 만두는 너무나 맛있는 만두에요. 일 년에 몇 번 먹지도 못하는 그 만두를 사오게 되면 고모들, 그러니까 딸들이죠, 고모들과 며느리들, 여자들은 만두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 자리에서 먹는데 남자들은 만두를 들고 다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려요. 



일종의 아지트, 혹은 토치카? 이 고급스런 만두를 사왔으니까 나 혼자 즐기겠다고 자기 방에 처박혀서 혼자 먹는 재미를 보려고 해요. 저뿐만이 아니고 남들도 다 그래요. 그런데 여자들은 할머니부터 우리 어머니까지 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먹는 거예요. 누가 많이 먹겠습니까? 바구니채로 먹는 여자 분들이 많이 먹지요. 남자들의 특징, 그게 왜 지금 생각나느냐 하면, 남자들은 자기 것만 있으면 돼요. 내 것,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일단 내 것을 만들어 놓고 자기 토치카, 자기 아지트 속에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여자 분들은 주신 은혜에 감사해요. 그 만두 먹는 시간만큼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해서 마음껏 찬양하면서 소고와 퉁소로 찬양하면서 만두를 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돈 벌어서 만두 사왔으니 아버지를 자랑한다고 더 이상 자기주장, 자기 자랑, 자기 아지트를 내 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만두바구니를 가운데 놓고 먹는데 아들이라는 인간들은 아버지고 뭐고 그냥 이용만 할 뿐이에요. 좋은 것 주면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 방으로 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자기 견고함, 내 아지트, 내 방, 내 토치카, 좋은 것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것은 다치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신이시여, 내 영역은 손대지 마소서. 내 영역은 나의 신앙의 유일한 대상, 그 마지막 대상은 내 영역입니다.” 이게 지독한 불신앙입니다. 



복음? 좋지요. 복음 들고 어디로 가는가? 자기 방에 가요. 거기서 뭐냐 하면, “나도 복음 안다.” 하고 명찰을 붙여 놓았어요. 토치카로 숨어버려요. 뭐가 견고한가? 내 구원이 견고해요. 내 구원이! 그 안에 들여다보면 내 구원, 자기영생이 견고하지요. 주님께서는 그 견고한 곳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요소가 각 아지트마다 각 토치카마다 들어 있다는 이 표현을 오늘 본문에 1장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리스도의 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풀어보면 이 시대는 비 종말적 현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종말이 빠져 있는 모양새로 사람들은 살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전체 역사에 보게 되면 예수님 오시고부터 이미 종말인데 사람들은 종말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요. 각자 자기 토치카, 자기 아지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아들들이, 조카들, 남자들이 만두 들고서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닫아 거는 것과 똑같아요. 바깥은 종말이라도 나는 종말 아니라고 버티고 싶은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게 되면 옛날에는 물의 심판이 있었지만 장차 불의 심판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마지막 날이 불의 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불의 날이 아니에요. 무슨 날이냐 하면,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에 유황불이 내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의 날에는 관심이 없고 유황불, 그 불의 뜨거움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점이에요. 노아때 물이 온 것은 맞아요. 물이 왔지만 노아때 물 홍수 배경은 뭐냐 하면, 주의 약속 그대로 실시되는 날이 노아의 홍수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심한 물이 온 그것이 자꾸 신경 거슬리는 거예요. 평소에 주님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고 내 아지트가 물이 안 새고 내 아지트가 화재 안 나는 그것만 잔뜩 신경 쓰는 그것이 습관화 된 겁니다. “불이 온대. 아이고, 뜨거워라.” 불이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주님이 오시는 날이 중요하다니까요. 그러면 주님의 날 빼놓고는 무슨 날이냐? 나의 날이지요. 모조리 나의 날이에요. 나의 날, 나의 날이 연속되는 거예요. 나의 날이었다가 졸지에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꾸 물만, 그리고 불만 신경 썼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취지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인간들에게 배척을 당했잖아요. 배척당한 분이 계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주여, 누구십니까?” 이 말은 다른 말로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하는 말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주님이 어디 계셨다가 이제 나타나셨습니까? 주님이 가신 곳이 어디지요?” “네가 갈 수 없는 곳.” “우리가 생각한 이곳 말고 다른 곳이 또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모든 날이 나의 날이고 불신앙이기에 모든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을 해도 나의 구원이 우선순위입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돼요. 내가 놓인 이 공간도 같이 구원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한테 배척을 당했다 이 말이지요. 배척을 당해서 어디로 가버렸는데 도대체 그 가버린 곳에 간 인간이 없어요. 주님이 가신 곳에 간 사람이 없다니까요. 갈수도 없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고 난 뒤에……, 요한복음 20장 19절 그 대목을 읽어봐야 돼요.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문들이 한 두 개가 아니고 여러 문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여러 개의 문을 제자들이 꽁꽁 닫고 자물쇠 채워서 제자들끼리 문안에 있었던 거예요.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주님이 쳐들어온 겁니다. 주의 날이 바로 이런 날이에요. 솔직하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실, 그게 현실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누가 잘사니 못사니.” 그것만 생각하는 이 장소에 주님께서 갑자기 들이닥친 거예요. 물론 물들고 온 것도 아니고 불 들고 온 것도 아니에요. 그냥 주님이 왔어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들은 불신앙이었어요. 자기들이 불신앙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불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면 무조건 불신앙 속에 갇혀 있는 거예요. 내가 갇혀 있다는 생각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신분이 새롭게 인식될 때 비로소 내가 나만의 세계만 고수하고 있었구나, 하고 밝혀질 때 그게 바로 불신앙가운데 일어나는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견고해요. 그것은 사건의 견고함이라고 표현하는데 내 존재의 견고함이 아니고 사건의 견고함이에요. 이 말 어렵지요? 어려워서 신경 쓰이는데 예를 들겠습니다. 



제 차가 연기가 나서 바꾸게 되었어요. 남이 쓰던 차지만 얼마 쓰지도 않은 차여서 고마운 마음으로 새 차처럼 타고 가는데 바꾼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일이 생겼어요. 전의 차는 익숙해서 전후좌우가 잘 보여요. 몸에 배인 운전습관에 의해서 그냥 잘 보이는 거지요. 그런데 운전석이 약간이라도 달라지니까 전의 운전습관대로 하고 보게 되면 그게 아닌 거예요.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고 주행을 하다가 새 차 몰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박아서 폐차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상대방 차 다 물어주고 내 차는 폐차가 될 뻔한 일이 있었거든요. 사실은 폐차 안 됐습니다. 옆에서 고함질러서 폐차 될 뻔했지만 안됐는데. 



생각해 보세요. 제가 큰 걸 느꼈습니다. 뭐냐 하면, 실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인데, 그래서 아침에 차를 볼 때 마다 저에게 이미 그 차는 폐차가 된 차에요. 이게 뭐냐 하면, 완고하고 나름대로 견고한 이 존재에서 주께서 던진 그 신앙적 사건이라 하는 것은 네가 지금 너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애 쓰는데 내가 보기에는 폐차라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너는 같이 폐차된 겁니다. 이미 죽은 거예요. 고린도전서 5장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 보면서 “아이고, 이 폐차야. 너는 폐차인데 왜 멀쩡하지.” 그게 감사에요. 그게 땡 큐! 그게 땡 큐, 아닙니까? 주의 날이 미래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 이미 십자가 달린 그 사건 속에서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뭉쳐서 우리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나름대로의 견고함을 유지했던 우리 존재에 빵꾸가 납니다. 그걸 존재의 공백이라고 하는데 그 공백에 낯선 사건이 메워집니다. 그 사건이 뭐냐? 예수님의 죽음과 연루된 모든 사건기록이 구멍 뚫린 내 안에 소복이 담기게 되는 거예요. 



“네가 무슨 짓들을 해도 그것은 불신앙이었어. 네가 예배참석하고 기도하고 백날 무슨 짓을 해도, 강의하고 설교해도 그것은 불신앙이었어. 너는 강의해서 폐차되어야 해. 너는 설교해서 폐차되어야 하고 등허리 가려워 긁다가 너는 폐차 되어야 해. 이빨 아프면 치과 다니면서 너는 폐차되어야 해.” 우리가 몸이 가려울 때 그 가려운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질서와 구조를 우리가 품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등허리 가려워서 긁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아니지요?”라고 우기는 그 우김의 본색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말이지요. 그 안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속성이 담겨 있고 눈에 보이는 이것만이 나의 세계라고 이걸 나름대로의 견고함으로 유지할 때, 심지어 십자가마저 나를 구원하는 내 구원 챙기기 위해서 “주여, 이렇게 고린도전서 1장 8절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믿겠습니다.” 하면서 그것을 집어넣고 기어이 나만 살면 된다는 그 나의 견고함, 그것이 폐차되어야 해요. 



어제 어디를 다녀오니까 십자가마을이 요란스러워요. 김성수 목사 자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서 댓글이 마구 달리고. 딱 이거예요. 자살할 때 주께서 시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이 시켰는데, 자기는 안하고 싶은데 주께서 시켜서 자살하게 되면 그것은 죄 아닙니다. 그런 경우가 있겠습니까? 자기 세계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도피입니다. 도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성경은 도피를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자유는 “주여, 누구십니까?”가 아닙니다. “주여, 어디에 계셨다가 나타났습니까?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그래야 되는 거예요. 



“현재 나를 불신앙 존재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낯선 자리, 그곳이 어디입니까?” 이 말은, 내 자리는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주님을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으로 내 일상에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도움 안 된다고 장담하는 그 자리인데 그 자리에 구멍을 뚫어서 우리로 하여금 낯설고 특이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작업,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장 8절 말씀입니다. 주의 날이요? 나중에 온다고요? 이미 와 버렸어요. 내 안에 이미 구멍이 파여서 주의 날이 맨 날 나의 날을, 나의 질서, 나의 자존심과 품위와 위신을 날마다 지적하는 그 자기 자리로 우리에게 터 잡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이 사건의 견고함이에요. 



바다에서 파도가 치지요. 파도가 치는데 바다라는 것이 파도의 집합이냐, 아니면 물방울의 집합이 바다냐, 두 가지의 견해로 볼 수 있어요. 바다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물로 되어 있고 그 물방울 분자 하나하나가 바다라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그렇게 보느냐 하면, “내 몸은 60조의 세포가 모여서 내가 된 거야.” 이렇게 자기 자신을 존재로 보기에 바다도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바다가 파도치고 울렁이는 하나의 사건의 다발로, 사건의 집합으로 본다면 나는 하나하나가 사건의 연속이고 사건의 다발이에요. 어제 제가 그걸 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출타하면서 어머니를 모실 데가 없어서 동생한테 부탁을 했어요. 동생이 이틀 동안 자기 아파트에 모셨지요. 식겁했지요. 오늘 아침에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니까 “기억 안 나는데.” 우리라 하는 이것이, 기억 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않는 이런 성품 자체가 지금 일어난 주께서 유발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나한테 유리한 것, 나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것, 나를 칭찬 질 해주는 것, 이런 것만 따로 사건의 다발로 모아놓고 이것이 나의 원래부터의 내 존재인 것처럼 우기는 것, 그런 겁니다. 



바닷가에 가 보세요. 바닷가에 가면 파도가 쉴 새 없이 칩니다. 사건이 계속 쳐 와요. 그것도 아주 부서지라고, 아주 죽어라고 칩니다. 누가 감당합니까? 감당 못해요. 감당 못하는데 기껏 하는 방법이, “사건이 쳐도 나라는 자존심은 이만큼 정도는 버티고 있었다.” 하는 자기 버팀인데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얻어 맞아놓고는 나는 늘 용서한다는 사람하고 똑같은 거예요. 힘없어서 얻어맞아 놓고는 “나는 널 용서하노라.” 이런 식으로 궁색한 변명을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은 변합니다. 인간은 쉴 새 없이 달라지고 변합니다. 슈미트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정치판에서 어제의 원수는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는 내일의 원수가 된다고 했어요. 정치판에서. 



그걸 이용해서 히틀러라는 사람이 “그러니까 돛대 같은 인간이 나타나야 나라꼴이 된다.” 이렇게 주장한 겁니다. 정치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나름대로의 정치를 하거든요. 늘 상 나한테 필요한 것, 나한테 이익 되는 것, 나한테 손해나는 것, 이런 것을 따지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고, 이것 자체가 사건이잖아요. 이게 사건이면서도 이것을 우리는 사건이라고 기어이 이야기하지 않고 “이것이 나의 동질성입니다. 나의 변함없는 지속된 나의 나 됨입니다.”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아니야, 그것은 전부 다 내가 만들어준 사건덩어리”라는 겁니다. “어떤 취지였습니까?”라고 물으면 “너는 불신앙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겁니다. 



이 불신앙의 세계는 인간 나름대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자들의 집합인 겁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 말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개인은 껍데기처럼 토치카나 아지트라 했지요……, 빵이 겹겹이 겹치는 식으로 만들어진 패스츄리(페이스트리)가 있거든요. 그 빵은 잘 부서지잖아요. 인생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있던 품위 같은 것들이 점점 날라 가요. 그걸 떼어내면 우리의 존재는 그 빵처럼 다 부서지지요. 그 부서지게 하는 그 작업이 바로 견고한 구원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견고한 관계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소유하려고 하는데 구원이란 “주님과 너 사이는 한시도 너를 놓치지 않고 계속 껍질을 벗겨 낼 것이다. 계속해서 그 비늘을 내가 제거해서 네가 걸치고 있는 모든 위선된 것들을 끌어내고 잘라내는 그 작업”이 주의 말씀을 통해서 계속 되어지는 겁니다. 그 자체의 견고함이에요. 



그러면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는가? 9절을 봅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는 참 듣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주께서 하시네요. 주와 함께 교제하겠다는 겁니다. 주와 함께 교제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사람 손에서 죽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종말을 만드신 분이에요. 종말을 쥐고 계신 분과 교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다른 내용이 없어요. 이 땅은 이미 종말에 접어들었다는 그 소식을 우리에게 계속 주입시키면서 우리하고 사귀는 겁니다. 



이 교제, 이 불신앙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이 그걸 동의하느냐는 말이지요. 동의 안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설교 끝부분에 왔으니 정리합시다. 견고함이란 나의 견고함을 부수는 것이다. 그 부수는 작업의 견고함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남녀가 결혼했습니다. 남녀가 결혼했을 때 제대로 결혼생활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에요. “여보, 우린 결혼했으니 통장도 각자 갖지 말고 하나로 모으고 당신의 모든 과거 비밀 다 나한테 털어놓고 나도 내 비밀 당신한테 다 털어놓을 테니 우리가 한 몸 됨을 보이자.” 이것은 옳은 결혼 생활이 아닙니다. 



갑자기 복음으로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옳은 복음이 아니고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에요. 매일같이 “우리가 이렇게 붙어 살 이유가 있나?” 이걸 계속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의적이니까. 결혼생활에서 언제든지 우리가 내 욕망과 내 소망과 내 뜻이 여기 묻어나올 수가 있단 말이지요. 그 묻어나는 패스츄리, 그 빵 알지요? 자꾸 떨어지는 빵 껍질, 그 껍질을 벗기려면 나의 의지, 나의 의도, 이 껍질을 벗겨내야 돼요. 자꾸 벗겨내면서 “나도, 나도 이제는 살 이유가 없는데 왜 살지?” 그것은 주님의 견고성 때문에 사는 거예요. 주님의 견고성은 내가 나름대로의 견고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도하고 노력하고 애쓴 것들이 자꾸 우리의 질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물으면서 뜯겨져 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여보, 우리가 같이 살 필요 없잖아. 헤어져도 괜찮지?” “그렇지.” “그런데 왜 살지? 아, 주께서 붙여주셨구나.” 이럴 때 “주께서……” 주님이 주체가 되는 문장이 나와요. “주께서 붙여주셨구나.” 결혼은 너의 일도 아니고 나의 일도 아니고 우리의 의도도 아니고 우리의 작위, 인위적인 계획도 아니고 주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또 눈여겨보고 또 나오는 겁니다. 살 필요 없는데 우리가 같이 사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주여, 내가 살 필요 있습니까?” 이걸 자꾸 묻는 거예요. “제가 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살게 하셨다? 주께서 살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매사가 감사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이러면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하겠어서 정말 세상을 하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살게 해주지요?” 아, 주께서 주님의 자기 계획을 관철하기 위해서 우리를 살게 하셨구나. 그 자기계획이 뭐냐? 주께서 자기백성을 주의 날까지 견고하게, 오직 주님의 십자가죽음사건이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의 구심점이고 핵심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기 싫어도 살아야만 하는, 정말 자살하고 싶어도 자살해서는 안 되는 그런 삶으로 살게 하신 거예요. 



인간이 죄를 따지는 그것은 죄를 따지는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따져서 뭐할 건데요? 잘나면 어떻고 못나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뜯겨져 나갈 대상인데. 주께서 교제하게 하신다는 말은 네 결혼생활이나 네 인생은 처음부터 네가 만든 네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사건이 애초부터 어떻게 너에게, 이 세상에 덮쳐졌는가를 증거물로서 네 인생을 내가 만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나름대로 내가 이만큼 살았습니다, 하는 그 자존심이 뜯겨져 나가면서 견고한, 주님의 말씀자체의 견고함, 아까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우리는 안개요, 우리는 헛된 것이지만 헛된 것이라도 괜찮아요. 헛된 것이라도 사세요. 그리고 안개라도 해 뜰 때 까지는 버티세요. 



“안개였습니다.”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런 말을 하게 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사건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증거 하는 것, 그게 성령이 와서 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에 계시다가 우리에게 찾아와 주셔서 우리가 아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세계에서 십자가에 배척당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우리가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살려주는 인생인고로 소고치고 찬양하면서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