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3a 울산강의-역대기하(23강) 26장 16절 : 목숨이냐 말씀이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26장
, 하겠습니다. “유다 온 백성이 웃시야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그렇게 돼 있지요. 현재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런 대목이 우리 마음에 와 닿질 않아요. 크게 쓰면 이렇습니다. ‘왕, 니가 뭔데?’ 왜 성경에서 왕이 등장하냐 이 말이죠. 이 왕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래요.
1. 하나님께서 왕을 도와주어야 우리가 산다. 이 의식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냔 말이죠.
2.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어야 내가 산다. 현대인들에겐 뭐가 빠졌어요? 왕이 빠졌지요.
왕이 빠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때 나는 산다, 이 사고방식을 가지고 역대하 26장을 보잔 말이죠. “유다 온 백성이 웃시야로 그 부친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을 삼으니” 이렇게 돼 있으니까 그 당시 유다나라 백성들이 왕 족쇄에 정신적으로 매여 사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냥 복 주면 되는데 여기에 왕이 왜 거론되는지, 왕이 왜 중간에 거기서 나와요?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내가 잘해주면 복을 주는 이게 정상이지. ‘웃시야 너는 빠져라. 아마샤 너도 빠지고.’ 이게 우리 의식이란 말이죠. 이 의식으로 역대하 26장 1절을 보니까 이건 성경이 아니고 옛날 한 때 역사가 그랬구나.
그러니까 지나갔고 지금은 상관없는. 그때 왕이 도와줘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순박한 생각에 모든 정서가 발달하지 못한 그 당시에 스스로 왕의 존재에 족쇄로 살아가는 가련한 민중들로 그렇게 생각되지요. 여러분, 1번이 맞습니까, 2번이 맞습니까? 아니면 둘 다 틀렸습니까?
3. 1번, 2번 다 틀렸다.
몇 번이 정답이에요? 어느 게 정답입니까? 좀 용감하세요. 정답입니다. 왜 3번이 정답이냐, 둘 다 틀린 이유가 뭐냐? 이것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우릴 살리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줘야 우리가 좋다. 나 좋다, 나를 살린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따라서 옛날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는 방식을 사용하신 거예요.
우리의 선입관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보세요. 그 당시는 왕이 잘되면 우리가 살고, 왕 못하니까 안 되는구나. 그러면 뭘 해야 돼요? 왕을 갈아치워야 되겠다. 왕을 왜 갈아치워야 돼요? 왕 갈아치우면 누가 좋다? 그 왕 밑에 예속돼 있는 우리가 좋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하나님은 구약을 통해서 모조리 다 벗겨냅니다.
1번과 2번은 인간들의 희망사항이에요. 꿈이죠. 그냥 기대하는 것, 꿈. 희망사항, 기대치 그걸 벗겨내면 긁어내면 바닥에 뭐가 남을까요?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갖는다, 꿈이 있다 그 바닥을 긁어내면 뭐가 나오느냐? 희망사항, 꿈을 벗겨내면 거기서 진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진리를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왕이 인물이 아니고 왕을 통해서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진리,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추방된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도 마땅히 살아야 될 권한을 요구할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께선 용납하지 않겠다.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줌으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몰락하고 망하고 있는지를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준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구나, 지나갔다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의 역사인데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해서 망했다. 왕이 없으면 왕이 없는 데로 망했고, 왕이 있으면 왕이 있는 데로 망했다는 겁니다.
역대하 26장에 웃시야 나오는데 그 웃시야의 말로를 봅시다. 21절,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그다음에 뭐가 됐습니까? 문둥병자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성경에서 한 장만 넘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26장 1절에 웃시야가 왕이 될 때 나이가 16세였어요. 열여섯 살이에요. sixteen, 16세 때에 왕위에 앉으면서 나 문둥병 걸려 죽을래, 라는 것은 자기의 꿈과 희망사항, 기대사항으로 했을까요? 안 했지요.
이렇게 왕으로 참 좋은 정치를 해서 나도 복을 받고 온 나라가 복을 받으면 백성들은 나를 칭송할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왕왕왕왕, 백성들이 ‘임금님 아까워요. 임금님 더 살아야 돼요’ 칭찬하고 찬양하는 걸 들어가면서 조용하게 눈을 감는다, 이런 시나리오를 지가 했을 거잖아요.
근데 이런 희망사항을 다 긁어내야 돼요. 긁어내니까 왕이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 계시의 중심 자리에 있는 왕이 계시를 보여주는 데 그 계시가 뭐냐? 나 이래서 저주받아 죽는다, 라는 것을 철저하게 쓰임 받으면서 백성들에게 계시의 용도를 다하면서 그 존재가 계시 존재로 보여줬습니다.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웃시야 왕이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고 다음 차기 왕 요담은 다시는 선배 왕, 아버지 안 닮고 제대로 하기를 백성들은 원하겠지요.
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살기 위해서 하는 거죠. 백성들은 정신 못 차렸어요. 하나님의 직접 계시에 엮여져 있는 왕이 계시 위반해서 죽는다는 말은 백성들도 만만치 않다는 거예요. 지금껏 역대상, 역대하 보면서 왕이 잘못했을 때에 왕만 힘들었습니까, 백성들도 힘들었어요? 백성들도 힘들었지요. 왕이 우상을 섬겼잖아요. 그때 백성들 뭐하고 있었어요? 사울 왕이 다윗 잡아 죽이려고 할 때 백성들 뭐했습니까? 심각하게 현상금 걸 때 백성들 뭐했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그들은 자기 일 했지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저 왕만 잘되면 우리 잘된다. 똑똑하게 제대로 된 왕, 왕 하나 좀 잘해서 공짜로 선진조국 잘 먹고 잘 살자. 제대로 해라. SK하이닉스야, 삼성전자야. 반도체 공장 제대로 해서 너희 덕에 잘 먹고 잘 살자. 참 전부 다 어떻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그것만 생각해요. 마치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진리를 제대로 안다면 이 문장을,
1. 하나님이 도와주면 우리가 산다.
2.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도와주면 산다.
이 문장을 바꿉시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이 3번을 뭐로 바꾸면 되겠어요? ‘하나님이 왕을 도와줘서 우리가 죽는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면 우리는 죽는다.’ 이 죽는다는 말은 내 꿈과 내 이상과 내 기대와 내 희망사항을 하나님 쪽에서 거둬주신다. 거둬주시면 나는 내가 품고 있는 진리가 노출되겠지요.
지금껏 하나님께서 진리를 줬는데 먼지가 너무 쌓였어요. 악착같이 살아보자는 먼지가 쌓여서 말씀을 보는 시간에 말씀은 관심 없고 더욱더 다른데 살기 위해서 애를 씀으로서 점점 더 이거는 2번, 하나님이 나를 도와줘야 나는 삽니다. 하나님 잘 알아들었지요?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하나님이 똑바로 하면 나는 삽니다. 그때는 하나님께 고맙다고 찬양과 영광과 봉사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거래, 장사하듯이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왕이 뭐냐는 거예요. 왕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거예요. 왕이란 작자, 또는 왕의 자리 어디서부터 왕이 나왔느냐 하는 것. 왕의 시작은 창세기 4장 15절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이 하나 있어요. 누구냐 하면 가인입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낳은 자식이었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자식을 낳은 적이 없습니다. 첫 번째 아들을 어디서 낳았는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서 축복의 자리에서 저주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자식이 태어났어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할 때 그냥 추방했습니까, 저주를 퍼붓고 추방했습니까? 저주를 퍼붓지요.
저주를 받은 3인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담, 두 번째는 하와. 세 번째는 누굽니까? 뱀이죠. 저주받은 3인조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 땅에 보냈어요. 땅 자체에서 저주가 올라와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그 저주의 환경을 코로 마셔가면서 그들은 살아가야 돼요. 그게 인간의 운명입니다. 뭐 더 다른 욕심을 낼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인간은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럼 복의 대상은? 복의 대상은 인간 말고 약속된 분이 뒤따라와요. 여자의 후손. 분류해볼게요. 남자, 그다음에 여자, 뱀. 이 3인조가 한 팀을 이뤄서 한 짓이 뭐냐 하면 ‘따먹지 말라’를 위반했잖아요. 이걸 위반하게 되면 뒤에 뭡니까? 정녕, 그다음에 뭡니까? ‘죽으리라’죠.
아까 1번, 2번에서 뭐가 잘못됐어요? 지금 하나님의 진리 차원에서는 “정녕 죽으리라”인데 인간이 이 땅에 오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날 도와주면 삽니다. 어떻게? 왕을 도와주면 삽니다, 라고 돼 있어요. 나는 이래저래 해서 삽니다. 뒤에 ‘나’하고 ‘산다’를 연결시켜놨어요. 이거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에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 이렇게 하면 삽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했기 때문에 인간이 산다는 것은 없습니다. 뒤따라오는 게 뭐냐? 약속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따라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을 칠 것이다.’ 약속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은 죽이고 뭘 살리느냐하면 약속을 살립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생명나무에서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은 나무에서 약속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했거든요(35, 48절). 생명나무의 이미지를 갖고 주님께서 오셨다 이 말이죠.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쫓아낼 때 취지가 뭐예요? 생명나무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 나가! 그러면 생명나무의 취지를 살리려면 생명나무에 올 수 없는, 선악과 따먹은 족속 있잖아요. 아담과 하와. 아담과 하와가 항상 대비돼야 돼요.
인간은 천국을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천국 갈 수 없는 것과 대비되는 그 없음의 자리에 천국이 발생돼요. 그래야 대비가 되니까. 천국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가 있어요.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돼 있어요. 의도적으로 못 따먹게 돼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뭘 못 따먹는다? 생명나무 과실은 못 따먹는다는 불변의 원칙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과 인간이 요구하는 것이 안 맞아서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은 살려요.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말씀을 살리죠. 약속을 살려요. Do you understand? 이해하시겠어요?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의 그 약속을 살리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의 희망? 인간의 희망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희망이에요.
이 점을 여러분들이 알았는지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어떤 바다에 사람이 빠졌어요. 막 몸부림칩니다. 여기 바로 육지가 있어요.
1. 구명튜브 던진다.
2. 그물 던진다.
어느 걸 던져야 이 사람이 살 수 있습니까? 둘 다 실패하지요. 그런데 세 번째, 강력한 진공청소기를 이 사람 쪽으로 돌린다. 1번, 2번, 3번 가운데 어느 게 살리겠습니까? 1번, 2번이 안 되는 이유가 잡아야 살잖아요. 그런데 3번은 청소기로 흡입하니까 이게 강력한 청소기가 빨판 세 개로 이 사람을 덮쳐버리면 일방적으로 잡아당기겠지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구원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자, 말씀은 구명정 던지는 것 아니고, 그물 던지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구명정 던지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물 던지는 게 아니에요. 왜? 이거는 십자가를 던져봐야 안 잡으면 소용없기 때문에. 그런데 십자가가 진공청소기라면 어떻게 될까요? 진공청소기가 되면 이걸 약간 어려운 말로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그다음에 인식하는 걸 사후효과, 일이 끝나고 난 뒤의 효과라 해요.
십자가를 백날 믿어도 그거는 구원이 안 돼요. 그런데 나중에 십자가의 흡입기에 의해서 강제로 진공청소기의 공기 안에 들어오고 휩싸이고 보니까 이게 뭐였다? 이게 바로 무슨 능력이다? ‘십자가의 능력이다.’ 오랜만에 좋은 정답이 나와서 기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십자가를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았지요. 어떤 경우에 알아요? 십자가의 능력이 끌려가면서 아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능력을 사도 바울은 부활의 능력이라 하는 거예요. 왜? 십자가 질 때는 예수님 홀로 달려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부활의 영, 성령이 오니까 어떻게 돼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던 사울에게 어떤 고백이 나왔습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승리한다는 그런 고백이 나왔잖아요.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울에게 그런 고백이 왜 나오지요? 뭐가 임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회개해서 십자가를 붙들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십자가가 먼저 당도했지요. 십자가가 먼저 당도해서 강제로 끌어당긴 거예요. 강제조치로.
누가 이사야 49장 24절을 읽어보세요.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아멘, 아멘.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을까? 지금 주님께서 악마와 전쟁해서 악마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하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실패로 끝났지요.
왜냐하면 이미 구원받아야 될 인간 자체가 어떻게 하든 살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살려고 하는 그것은 마귀의 고백이에요. 지가 선악과 따먹은 건 생각 안 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건 생각 안 하고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Help me!’ 이런 식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과 상대 안 하고 인간을 잡고 있는 악마와 싸워서 승리했고, 그 승리의 전리품 효과로 인하여 주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자기 백성을 진공청소기처럼 강제로 끌어당깁니다.
Do you know? 아십니까? 할 정도가 아니고 진짜로 이거는 받아들입니까, 요구할래요. 하루하루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어떤 삶을 살든지 관계없이 그거는 전부 다 주께서 빨아 당기는 진공청소기가 유발한 사건들이에요. 나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사람은 멀쩡하게 간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암 걸려 간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 있어요. 어떤 사람은 주식 꼴아 박은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주식해서 보너스 탄 사람도 있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십자가의 능력이 온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걸 의아해 여기는 거예요. 나는 저쪽인데? 지옥이 딱인데 왜 내가 천국으로 가지? 아 이게 십자가,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신 대신 심판 받으신 효과구나, 고백하면서 가는 거예요. 그런 구원받고 있으면서 자식이 내 말 안 듣는다고 나 그만 자살해버릴까, 이런 우울증 같은 소리를 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하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죽을까 살까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나한테 아예 없지요. 살아도 죽는데 살아도 악마한테 끌려가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강력한 마귀의 힘이 있는데 여기서 내가 무슨 하고 자시고 간에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10장 보겠습니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이렇게 돼 있지요.
26절 말씀이 참 무서워요(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말이에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인간 입장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에요. “너는 내 양이 아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왜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습니까? 살려고 하니까.
살고 안 살고는 나는 사는 대상이 아니에요. 살리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껍데기 나 안에서 나를 보쌈해서 내 안에 주의 약속을 집어넣고 그 주의 약속을 살리다보니까 우리가 덩달아 사는 거예요. 천국 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박혔으니까 박힌 영을 잡아당기다보니까 거기에 껍데기 된 우리가 같이 딸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29절에 보면,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까 이사야 49장 24절 말씀 기억하시지요. 없다 이 말이에요.
다윗 때 므비보셋이란 사람이 있어요.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므비보셋이 어떤 사람인지 나옵니다. 요나단의 아들인가 그럴 거예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안 거둬도 돼요. 다윗이. 왜냐하면 노선이 이미 다윗 족보기 때문에 왕위는 사울 족보와는 관계가 끊어졌어요. 안 해도 돼요.
다윗이 죽은 요나단과 형제의 맹세를 했어요. 그래서 죽은 요나단을 생각해서 아들 므비보셋을 건사하는데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 유모가 안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절게 되었어요. 근데 이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왜 성경에서 하느냐 하면 사무엘하 19장 29절에 보면,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뭐 시바란 종이 나를 속이고 접대하고, 이렇게 므비보셋이 매니저가 주인의 재산을 빼앗아 갔다는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했다 이 말이죠.
다윗은 제 삼자지요. 누가 옳고 그른지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그래서 공평하게 나눠라. 누가 맞는지 내가 판정을 못하니까 반반 나눠라. 나누라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일을 나한테 말하지 말라. 왜? 다윗은 뭘 생각합니까? “너라는 인생은 내가 처음부터 불쌍히 여겨서 거저 봐준 거야. 네가 네 권리를 네 말로 나한테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지 마.” 그냥 살려주는 걸로 고맙게 여겨라, 이 말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 이 말이에요. 지옥 가는 것을 천국으로 뽑아줬는데 뭘 종알종알 이건 좀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것 있잖아요. 중요한데 써볼게요. 므비보셋에게 ‘그 입 다물라!’ 말은 사람에게나 하라. 하나님께 찬송가에 있잖아요. 기도하는 시간이 참 즐겁다는 말 있잖아요.
왜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우냐 하면 기도하는 순간 모든 일은 주께서 홀로 지금 be동사+ing, 잘 진행되고 있음을 염치 부구하고 그걸 받아 누리고 감사하니까 그 기도하는 시간이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 되는 거예요. ‘내 기도 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찬송가 482장) 사람하고는 자기 위신 같은 것, 체면을 고려하기 때문에 피곤해요. 근데 사람과 만나면 피곤한데 우리의 왕 되시고 어른 되시는 모든 것을 그냥 다 공짜로 다 주시는 주님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냥 고맙고 감사할 뿐이에요. 수요일도 이 본문 했는데 다시 봅시다.
시편 22편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인간 집단에 거한다?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뭐 중에 거한다? 찬송, 감사 중에 고맙다고 하는 고백 가운데 누가 거해요? 하나님이 거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내가 준 걸 다 아네? 아이고 기특해라. 내가 공짜로 준 선물을 네가 다 알고 있네. 그래 되는 겁니다.
비슷한 예로 사무엘상 30장 24절 봅시다.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전쟁에서 군인들이 전리품 얻어왔거든요. 전쟁에서 고생을 누가 했어요? 군인들이 고생은 자기가 하고 저 집구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안 했으니까 우리가 얻은 전리품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걸 듣고 다윗이 꾸짖은 거예요. “골고루 나눠줘.” 왜 그러냐 하면 이번 전쟁의 승리자는 누굽니까? 군인이 아니에요. 창창창창 칼싸움하고 한 이 모든 과정을 경유해서 궁극적으로 적들의 패배하고 그들이 남긴 전리품, 그걸 누가 줬느냐? 내 노동의 대가로 적들이 남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동의 대가가 전쟁에 참여하나, 참여 안 하나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혜택이 돌아가게 돼 있어요.
이걸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 선물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그냥 심심해서 주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것을 뒤따라가면 예수님 혼자 고생했다는 게 나와요. 예수님 고생했다가 아니라 그냥 하셨다. 우리는 해도 한 것이 아니에요. 제대로 된 거룩한 말씀을 완성한 것은 예수님에게만 국한되고 나머지에게는 아무리 애써도 그건 거룩이 안 됩니다. 주님만이 이렇게 거룩한 일을 하셔서 그 혜택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고맙습니다, 라는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교회라 하는 것은 올 때마다 주께서 지난날에 이렇게 혜택을 주셨고 앞으로도 혜택을 주신다는 걸 알고 감사의 모임이 바로 교회의 예배고, 또는 그 모임 자체입니다. 그래서 교인들 만날 때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에요.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은 사람의 모임, 주께서 모임을 주선했다. 주선하신 거예요. 그래서 설교하는 자나 예배 인도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면 돼요? 주님께서 이렇게 하셔서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전하지요.
그래서 교회가 만나면 고맙고 서로 감사하고 즐거운 이유가 교회 특징이 뭐냐? 나대는 사람이 없어 좋아. 지가 봉사 좀 했다, 헌금 했다, 지가 기도 덕분에 부활했다 이런 나대는 사람이 없을 때 교회가 즐거워요. 교회가 언제 힘듭니까? 나대는 자들이 있을 때. 아아, 꼴 보기 싫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역대하를 하면서 꼴 보기 싫은 짓을 누가 했겠습니까? 한 자로 이스라엘에서 누가 했겠습니까? 왕이 한 거예요.
그 왕의 인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가인부터입니다. 가인의 칠대손이 왕이에요. 라멕이에요. 창세기 4장 23절,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가인의 칠대 후손 라멕이 왕질을 하는 거예요. 왕질을 하면서 라이벌을 최초의 왕이 되신 가인보다 내가 더 세다.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지가 왕의 권력을 자랑질을 하는 겁니다.
그럼 가인이 왕 노릇 안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여기서 창세기 3장 15절이 중요해요. 가인이 하는 말이, 내가 남의 땅에 가서 텃세하는데 내가 뭔 소리했다가는 그 사람이 나를 치외법, 그러니까 법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왔을 때는 인간은 자기 노예로 삼기 위해서 그들에게 보호법이 적용되지 않도록 조치해버려요.
아랍 에미리트, 특히 중동에 잘 사는 나라 있잖아요. 쿠웨이트나 이런 나라. 수십 년 동안 그 나라를 위해서 일해도 시민권 없습니다. 전 국민에 시민권 가진 사람이 20%밖에 안 돼요. 너희들은 노예니까 노동이나 하고 그 혜택은 누가 본다? 시민권 가진 자 우리가 본다. 로마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시민권 있다니까 깜짝 놀라잖아요.
시민권이 뭐냐 하면 국가 이름으로 개인을 보호하는 게 시민권이에요. 그 시민이 뭔가 당한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국가가 나서서 그 사람의 시민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은 하나의 국가라는 집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들에겐 투표권을 주고요. 그런데 15절에 보면, ‘내가 시민권 없어 죽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그러니까 가인으로 하여금 텃세하는 그 인간들에게 그 텃세보다 더 센 힘이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주도해서 그들의 텃세도 먹히지 않는 힘을 누구한테 몰아주겠다? 가인에게 몰아주겠다. 가인이 동생 죽인 벌이 이런 벌입니까? 이게 벌 받은 거예요? 가인이 아벨 죽이고 난 뒤에 받은 벌이 이 벌이에요.
자, 벌이 뭡니까? 이 지상에 생명나무도 없는 이 지상에 인간들 위에 왕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신이 바로 이게 죄가 아니고, 죄 지은 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의 벌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출세에요. 출세는 뭐다? 벌입니다.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면서 지옥의 조건을 스스로 조건을 만들어가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갈 때 지옥 조건이 뭐냐 하면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는 산다’ 그 조건을 끌어 모아서 그걸 거북이 등짝처럼 짊어지고 2.5톤 포터트럭에 실린 그 이삿짐에 내가 살기에 적합한 상황을 본인이 스스로 이걸 짐처럼 산처럼 자꾸 모으는 거예요. 그 모아진 그대로 어디 가느냐 하면 지옥으로 고고. 지옥을 갑니다.
그러니까 지옥 가기 전부터 무슨 생각해요? 지옥에 적합한 생활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지옥에 적합한 삶을. 그래서 나사로 앞에 있던 부자가 지옥 가서도 자기 행세를 못 버리지요. 거지 나사로 보내서 내가 지금 목마르다.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잠시나마 서슬하게 해달라고. 왜? 하나님이 왜 그래야 되는 데요? 하나님 때문이 아니죠. 누구 때문에? 지옥 가는 그 품성 자체가 속성 자체가 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맨이에요.
그러니까 어딜 가기 전에 자기가 들어갈 세계를 미리 답습하고 열심히 훈련한 거예요. 오로지 나만을 위하여. only me 오직 나를 위해서. 죽으면 벌 받지. 아니에요. 죽으면 벌 받는 게 아니고 살아 있으면서 지금 벌 받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은 뭐냐? 천국 간 사람도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똑같은데 ‘나를 위해서’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강제로 펜치, 드라이버 모든 걸 동원해서 그 두꺼운 ‘나를 위해서’란 굳은살 같은 걸 뜯어내요. 평생토록 자기밖에 모르는 시집간 두 딸이 친정아버지가 치매 걸리니까 이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했지요.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이제는 혼나는 거예요.
아프면 지나 아프지 지금 나까지 곤란을 당하나. 인생 육십 넘어서. 나도 육십 넘었는데 늘그막에 무슨 이런 고통이냐. 제대로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축복입니다. 평생토록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잖아요. 죽기 전까지 이 굳은살을 뜯어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 되어가는 일이 나를 위해서 되어가는 일은 없었다는 것. 왜? 나는 뭐만 고집하기 때문에? 내가 살겠다는 이것으론 천국의 천사들(문지기)이 안 받아줍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누굴 위해서? 주의 복음을 전하려 주의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걸 누굴 위해서 했는데? 네가 복음을 전하고 강의하고 목회하고 책 쓰고. 그것 누굴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결국 너 살겠다는 지극정성 아니야? 나는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왜 오늘 복음 전하게 하십니까, 하는 이런 마음가짐. 죽음이 기본이고 산다는 것은 선물이라는 사실, 이건 진공청소기란 사실.
바로 왕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름을 준 것은 가인을 중심으로 가인의 사고방식, 사고방식이 뭐겠어요? 하나님의 빽으로 동생은 하나님의 제사를 받지요. 찬송 중에 거하시는 누구? 여호와잖아요. 동생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음으로서 아벨과 하나님은 한 통속이 되었지요. 그것이 가인이 가만있는데 악마가 가인을 건드렸잖아요. 건드리니까 성질나서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가인으로 하여금 뱀의 후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두 아들 사이에 기준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한 쪽은 천국, 한 쪽은 지옥. 그런데 천국 간 사람이 남긴 것은 피,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와 예수님의 피 한 노선이거든요. 나머지는 뭐냐? 피가 아니고 힘. 왕다움의 왕, 난 더 센 왕, 더 센 왕. 이 세상은 출세와 자기 힘 모으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 가기 전에 이 세상의 뭐다? 이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지옥이니까 여러분 실컷 후회 없이 지옥 구경하세요. 10분 쉬겠습니다.
20260703b 울산강의-역대기하(23강) 26장 16절 : 목숨이냐 말씀이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오늘 역대하 26장합니다. 26장 16절을 봅시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그다음 단어가 뭐죠? “교만하여” 이 대목 보면서 사람들은 막 무릎을 치면서 가슴을 때리면서 좀 강할 때 하나님 믿지, 겸손하지 이러잖아요. 그러면 성경은 뭐냐 하면 ‘너나 잘하세요. 너도 마찬가지 너도 못지않아.’
지금 웃시야가 잘 나갔습니다. 웃시야가 군데군데마다 도성을 쌓고 요새를 쌓고 망대를 건축하고 군사도 막강하고. 특히 10절에 보면 웃시야 왕이 농사짓는 걸 좋아해요. 농민들 이해한단 말이죠.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더라”
그리고 5절에 보면 초반에 그가 겸손해서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형통케 하셨다는 이 말은 웃시야가 아는 게 아니고, 이거는 나중에 종합, 교사가 학생들 인성 같은 것 적잖아요. 생활기록부 적는 거예요. 생활기록부 그 적는 것을 왕 본인이 적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적지요.
이렇게 했는데 아까 16절에 마음이 교만해서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했다. 코스가 이게 웃시야가 특별히 나쁜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품성을 왕이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가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국가를 이루고 대표자를 만들었어요. 왜? 하나님이 친히 가인 건들지 말라 했으니까. 어느 누구도 가인을 대적할 사람 없으니까 자연적으로 이 땅에서 악마의 마음을 가진 가인이 도시를 이루었고 최초의 왕이 된 거예요.
‘악마는 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백성은? 백성이란 말은 국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백성이란 뭐가 전제돼 있다? 왕이 있으니까 왕에 예속된 거죠. 국가라는 것은 어떤 집합인데 뭐냐? 왕에게 누가? 백성이 예속된 그런 형태({백성∈왕}). 이거는(∈) belong to~, 소속돼 있다. 쉽게 말해서 노예다, 이 말입니다.
왕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선 사무엘상 8장에 잘 나옵니다. 하나님의 왕 됨을 거절하고 대신 인간의 왕을 세울 때에 사무엘이 장로들에게 당부했어요. “너희들이 인간 왕 세울 때 너희들의 가장 좋은 자녀, 너희들 딸까지 왕이 전부 다 가져간다. 그래도 좋으냐?” “좋습니다.” “그럼 왕 세워줄게.” 그래서 사울 왕이 생긴 거예요.
여러분 잘 알아야 돼요. 사울 왕이 왕의 권세를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왕의 권세가 사울 왕을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왜? 악마는 왕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왕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때 백성은 뭐하느냐? 백성은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에요? 백성은 하나님께 예속된 게 아니고 어디에 예속돼요? 왕에게 예속되고 왕은 무슨 모습이다? 왕은 악마의 모습이고.
악마의 모습이 됐다는 말은, 왕은 선악체계의 구현, 선과 악을 따지는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 그게 왕이에요. 그래서 왕에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왕은 명령하는 자에요. 그다음에 이 명령이 뭐가 되느냐? 법이잖아요. 법을 만드는 자가 왕이에요. 그런데 법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상 받고, 이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 라는 기준을 세운 쪽이 왕 자신이에요.
왕은 법에 해당되겠어요, 해당되지 않겠습니까? 법을 만드는 왕은 선악체계에 해당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왜?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으니까. 선악과로 자기를 잠식시켰으니까. 그럼 법을 초월한 걸 뭐라 하느냐? 그걸 신이라 합니다. 인간의 형식으로 보이는 신, 이게 악마는 왕의 모습으로 현실 속에서 세워지는 겁니다.
따라서 이미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 예속됐기 때문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끊임없이 누가 오기를 기다리겠어요? 멋진 영웅, 영웅다운 영웅 그게 자기의 뭐 된다? 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 이게 현실입니다. 이게 현실세계에요. 왕은 보이는 신이에요. 신은 안 보이잖아요. 신은 보이지 않아요. 전체는 이렇게 분열돼 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는 세계 전체는 인간으로 인하여 이게 전체를 모르게 돼 있어요. 인간은 전체를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이 셈하고 카운트하고 헤아리는 것은 인간의 언어의 한계로 인하여 카운트하는 당사자가 누구에요? 자기죠.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아는 전체는 그 전체에 내가 포함될까요, 포함되지 않을까요? 않지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전부를 알고 있다 할 때 그 전부에 내가 포함될까요, 안 될까요? 포함되지 않습니다. 전부를 아는 나는 그 전부보다 더 위대하니까.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한테 질문해보세요. 그 하나님 누가 만들었는지. 과학자들이 과학을 할 때 그 태도가 바로 그런 겁니다. 과학자들은 일종에 강박증세를 갖고 있어요. 전부의 전부가 뭐냐? 쪼개자.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쪼개는데 쪼개면서 생각했어요. 자꾸 쪼개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더 쪼개질 게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사람을 환장케 하는 거예요.
분자 쪼개고 원자, 원자 쪼개니까 핵과 전자, 핵을 쪼개면 중성자, 양성자, 중간자 나오지요. 중간자 쪼개보니까 쿼크 나왔어요. 쿼크는 어디서 나왔는가? 그다음부터 쿼크란 입자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문제는 입자라는 말 자체가 과학자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듭니다. 왜? 입자라 하는 것은 곧 무엇을 요청합니까? 쪼개봐, 쪼개봐 이걸 자꾸 요청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플랑크 상수(Planck Constant, 기호:h)라 하는 것은 쪼개도 더 이상 쪼개지 못한 마지막 단위에요. 플랑크 상수 값이 6.62607015×10⁻³⁴ J⋅s해서 그것은 너무 작기 때문에 모른다는. 과학자들은 이처럼 평생을 연구해도 결국 무엇을 모르느냐에 대해서 내가 무엇까지 모르고 있느냐를 연구하는 자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약간 바보 같은 것이 뭐냐? 그렇게 뭘 모르느냐? 자꾸 객관적인 대상을 모른다 하는데 정작 그들이 모르는 게 누굴 몰라요? 본인을 몰라요, 본인을. 다른 말로 하면 나타난 것에 대해서 본인도 나중에 본인을 알기 위해서 뭐로 만드느냐 하면 하나의 질적으로 만들어서 과학의 대상으로 집어넣었어요.
인간의 두뇌를 방앗간으로 생각해서 방앗간에 뭐가 있기에 거기서 사랑과 눈물과 한숨과 여러 가지 나오는지 생각해보니까 그 두뇌 안에는 그런 한숨도 없고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뭐가 있느냐 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전자적 기능밖에 없는 거예요. 뇌 세포까리 전자적 기능밖에 없어요. 거기서 사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두뇌 자체를 확대해보니까 그 안에 내가 작은 로봇이 되어 들어가 보니까 없어. 너를 미워한다 그것도 없고 사랑한다도 없어요. ‘주여 믿습니다’도 없어, 그 안에는. 그냥 세포와 세포의 전기적인 교환과 연결밖에 없어요. 괜히 봤어, 괜히 봤어. 괜히 연구했어.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세상에. 나를 알기 위해서 두뇌를 안다? 결국 두뇌를 모르니까 누굴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근데 성경에서는 나라는 것을 이미 못 박았어요. 나는 뭐냐?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걸 어떻게 아느냐? 바로 거룩과 대비해서 아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늘 뭘 생각해야 돼요. 거룩한 분과 동행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그 틈바구니에서 죄인으로 쓰여진다는 것을 알지요. 나는 누구다? 죄인이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구원받은 자가 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게 문장이잖아요. 그 문장을 성경에서는 말씀이라고 계시라 하고 그 계시를 살리겠다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활용되어지는 거예요. 성령으로. 우리가 우리를 제거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주시는 선물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방금 이야기한 게 다 신약 아닙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물론 구약을 인용했지만 신약에서 다 밝혀졌다면, 구약에서 가인, 힘 세계, 국가라는 악마라는 왕이 돼 있는, 그리고 그걸 백성들은 싫어하지 않아요. 오히려 요청한다고요. 방탄소년단 그걸 좋아하는 전 세계 소녀들은 방탄소년단 노래를 좋아할까요, 그 존재를 좋아할까요? 처음에는 노래죠. 나중엔 뭡니까? 존재를 좋아하지요.
그러면 김호중. 김호중 노래를 좋아할까요. 김호중 존재를 좋아할까요? 김호중 가수를 좋아해요. 음주운전을 하든지 관심도 없어. 빨리 나와서 내가 원하기 때문에 당신은 본의 아니게 우리의 보라색 입은 팬들의 영웅이 되어다오. 너한테 표 찍어줄게. 부정투표를 해서라도 표 찍어줄게. 우리만 믿어. 김호중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듣고 보니까 마태복음 12장에서 하신 주의 말씀을 여러분 이해할 거예요. 인간을 단독으로 보지 않고 힘 안에 인간을 집어넣고 현재 인간은 악마의 나라에 사로 잡혀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이 악마의 나라에서 자진해서 몸부림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왜? 본인이 좋아하니까. 나를 위해서 있다는 게 악마가 심어준 사고방식인데 이 사고방식이 좋아요. 뭐든지 나를 위해서 있다는 이 의식 자체가 좋아요.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아예 안 빠지려고 하지요. 악마한테 가스라이팅 당했으니까.
따라서 주께서는 피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심지어 인간에게 밀침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와 맺은 약속,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는데 나는 주저 없이 성령을 통해서 끼어들겠다. 성령을 가지고.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도둑이 넘어와서 그 집의 세간을 가져갈 때는 그냥 가져가는 게 아니고 주인을 꼼짝 못하게 묶어놔야 돼. 그동안 주인이 자기 것이라 하니까.
주인을 묶어놓고 주인이 어찌 하지 못할 때 담 넘어온 도둑이 마음 놓고 그동안 주인한테 매여 있었던 그 세간을 가져가는 것처럼 내 백성 내가 가져가는 데 있어 전제는 뭐냐? 악마는 이제 나한테 굴복 당했다는 걸 전제로 해서 그 힘찬 능력이 우리를 건져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왔다면 구약에 그런 일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있어요.
역대하 오늘 본문에 26장 17절, 18절. 웃시야 왕이 자기가 강성하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으니까 마지막 남은 자기 접수 영역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었습니다. 슬슬 성전마저 접수하고 싶어요.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절)
여러분, 향단에는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제사장만 들어가게 돼 있어요. 아론의 후손만 들어가게 돼 있지 일반인들은 못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있는데 인간들, 아론의 후손들, 하나님의 법 우습지요. 사람들이 나를 밀어주는데 보이지도 않는 율법 쪼가리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요.
용감하게 들어가서 거기에 용감하게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때 그것보다 더 세게 용감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죠. 제사장 아사랴가 혼자 들어가면 되는데 칠십 명을 대동해서, 팔십 명이죠. 팔십 명을 데리고 어디 갑니까? 웃시야 왕을 어떻게 했습니까? 가로막았어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국가에는 예속된 자가 있어요. 집합용어로 이렇게 합니다. ∈ 또는 귀속, belong to. 그런데 뭐도 있느냐 하면 잠입된 자, 집합으로 이렇게 해요. ∁ 이걸 포함이라고 합니다. 수학의 집합론에서 귀속이라 하는 것은 원소 a가 있다면 {a} 하나의 요소, 또는 원소가 돼요. unit가 돼요. 원소가 된다고요.
그런데 {a}을 갖고 어떤 집합을 하면 [{a}] 이거는 뭐냐? 포함이 된다고요. 잠입 이거는 딴 살림, 수학에선 포함이 된다는. 이 잠입한 요소는 소속이 자기를 덮치신 이 소속이 아니에요. 왕의 소속이 아니고 국가, 이들은 다른 나라에 소속이 있어요. 다른 나라가 어느 나라 게요? 언약의 나라, 하나님께 속한 나라에 있어요. 그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자에요.
자, 그러면 쉬운 예로 이건 쉬운 질문이니까 답변할 수 있어요.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속했습니까, 속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에 있어서 두 이스라엘이 중첩돼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A, 이스라엘B 같이 중첩돼 있지요. 이스라엘에게 소속돼 있으면서도 딴 살림을 차린 거예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엘리 제사장이죠.
그런데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아, 사무엘아 불렀어요. 그 목소리가 누구 목소리냐 하면 엘리 제사장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불렀어요. 그러니까 어린 사무엘이 이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엘리 제사장 목소리라고 가서, “저 불렀지요?” 세 번씩이나 불렀다고 했지요. “내가 안 불렀는데.” 그럼 누가 불렀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에게 찾아갔지요.
소속이 달라요. 사무엘은 왕에게 예속돼 있는 게 아니고 뭡니까? 거기에 포함돼 있지요. 제 표현으론 뭡니까? 잠입한 거예요. 언더커버Undercover, 잠입돼 있어요. 언더커버 알지요. 요리 잘하면서도 중국집의 웍을 잘 다뤄요. 중국 사람들이 요리의 달인인 줄 모르고, ‘야 이건 나보다 더 잘하네’ 위장잠입한 성도입니다.
성도에겐 왕이 있어요. 성도의 왕은 누굽니까?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 왕이에요. 왕인데 현재 지옥 같은 이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도가 왜 있느냐? 왜 잠입하느냐?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잠입돼 있는 겁니다. 성도가 근무지가 있어요. 근무지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18절 보겠습니다. “웃시야 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그다음에 어디에서 나가소서. 그게 어딥니까? “성소에서 나가소서” 성소 바깥으로 나가소서. 성소는 왕이라 할지라도 장악할 수 있는 영토나 공간이 아닙니다. 용맹한 자 팔십 명이 있으니까 일단 나갔지요.
그다음 이야기가 그래서 왕은, “에이 그래 모든 걸 장악하고 있으니까 두고 보자. 너 죽었어. 일단 나가자” 하고 일이 마무리되었습니까, 아니면 웃시야 왕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웃시야 왕 본인에게 일이 벌어졌지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저주받았어요. 문둥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성경은 들어가지 않아야 될 자가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저주의 표시를 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면 성소 바깥의 세계는 어떤 세계다? 저주의 세계지요. 그런데 왕이 성소 들어갔다 나왔을 때 문둥병 걸렸지 평소에는 문둥병 걸렸어요, 안 걸렸어요? 안 걸렸지요. 그럼 평소에 웃시야 왕이 문둥병 안 걸린 것은 누구 덕입니까? 아직까지 성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성소를 유지할 그러한 취지의 혜택을 누가 입었어요? 왕과 백성들은 혜택을 입고 있었어요. 어느 게 소중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소중합니까, 아니면 보너스 타는 게 소중해요? 어느 게 소중합니까?
20절에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이 문둥병이 고질병이 아니고 DNA에 의해서 변형이 생긴 게 아니라 딱 몇 시간 만에 생긴 문둥병이에요. 오후 예배 때 한 이야기인데 민수기 17장을 보겠습니다.
8절에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이것 몇 시간 동안 이렇게 된 거예요? 죽은 나무에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절차는 절차대로 따박따박 다 했어요. 열매를 맺고. 그것 몇 달 만에 됐어요? 몇 달이 아니지요. 스물네 시간 만에. 시간은 지상의 시간과 하나님 일의 시간이 다르지요.
문둥병 걸렸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그런 DNA를 받았다? 아니지요. 문둥병 걸릴 때 뭡니까? 그거는 스물네 시간, 하루도 아니에요. 그 현장에서 갑자기 문둥병을 빨리, 테이프를 빨리 감아버린 거예요. 문둥병 걸려라, 걸려라가 아니라 걸렸네, 걸렸네. 빨리 돌아가요. 그것도 자리가 차이 남, 공간의 차이 남, 소속의 차이 남 그걸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역대하 26장 이 점을 아시고 6절을 봅시다.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고 가드성과 야브네성과 아스돗성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건축하매” 현재 가자 지역에 있는 땅이에요. 전부 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하나님이 도우사 블레셋 사람과 구르바알에 거한 아라비아 사람과 마온 사람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7, 8절)
이건 그림을 그려봅시다. 지중해, 갈릴리바다에서 사해 100Km, 동편에 위에서부터 암몬, 모압, 에돔, 아라비아, 그 밑에 홍해 있거든요. 서편에 예루살렘이 있고요. 이렇게 돼 있는데 왕이 이런 일을 많이 벌였어요. 그때 내가 저주받았다는 인식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내가 백성들에게 존경받기 위해서 나는 할 도리를 다했다, 이래 되지요.
그럼 여기서 자기의 행함에 대한 기대를 누가 품고 있어요? 자기가 품고 있지요. 이게 바로 악마가 왕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을 안에 선악체제를 무장해서 왔다는 거예요. 내가 바르게 하게 되면 그 복은 누가 받는다? 내가 받는다, 이래 되는 거예요. 자기가 문둥병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같은 예로 애굽의 바로 왕, 그리고 여기에 꿈 따라 왔던 요셉, 창세기 41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바로 왕 본인이 정상으로 생각하지요. 그런데 바로 왕을 완전히 정상이 아니고 미치도록 만든 게 뭐냐 하면 꿈이었어요. 꿈은 내가 요청한 꿈이 아니고 그냥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꿈이 신나는 꿈이 아니에요. 본인이 보기에도 굉장히 불길해요. 분명히 좋았는데 좋은 것 다 날아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주식하면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자기가 찍었던 주식이 만이천 원 되었어요. 기분 좋아서 막 깨려고 했는데 깨기 직전에 주식이 오천 원 됐어요. 식은땀이 막 나는 거예요. 그런 꿈을 꿀 때 사람들은 뭐냐? 꿈이라서 어떻다? 네 자? 꿈이라서 다행이다. 그런데 깨어보니까 이게 현실이라면? 그러면 이 꿈은 내가 평소에 꾸던 꿈이 아니죠. 평소의 꿈은 꿈도 내가 꾸잖아요. 그럼 꿈의 지배자가 누구에요? 나잖아요. 내가 나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현실이 될 때에는 내가 꾼 꿈은 누구의 개입이죠. 한국이 월드컵 갈 때 축구관계자나 축구팬들이 꿈을 꿨는데 32강 탈락했어. 깨어보니 아직까지 첫 게임도 안 했어. 식은땀이 나면서 뭡니까? 다행이라 생각했잖아요. 만약에 스포츠신문이라든지 어떤 방송에서 이런 일을 한다. 벌써 월드컵대표 팀이 멕시코 가서 몸 풀고 첫 게임하려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거예요.
대서특필로 홍명보 감독의 국가대표는 32강 조기탈락, 그걸 대문짝만하게 걸었다면 인간세계에서 그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거는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성령이 그런 겁니다. 성경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어요. 성경은 모든 인간을 끝장내는 거예요. 끝장내는 것을 감사하면 성도고, 왜? 세상은 원래 끝나는 거기 때문에. 아직도 32강에 미련 있다면 그거는 불신자라는 거예요.
월드컵 한창 첫 게임하고 할 때 육십 대 중반 되는 아주머니 세 명이 버스 기다리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내가 지금 월드컵 보다가 답답해서 나왔다.” 나는 육십 대 아주머니들이 월드컵 보는 줄 몰랐어요. 제가 그걸 보고 있었어요. 자, 그렇다면 월드컵 16강이 국민의 염원인데 그것 실패했다면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돼요? 뭐가 투입되겠어요?
홍명보 감독에게 뭐가 투입되겠습니까? 사법당국에서 조사 들어왔지요. 8년 만에 감독돼야 되는 것이 자격인데 홍명보는 8년도 안 됐는데 감독됐다고 조사하라 그러지요. 이게 뭡니까? 선악체계지요. 이게 뭐라 했어요? 국가는 뭘 갖고 있다? 힘을 갖고 있어요. 그 힘에 대해서 모든 국민들은 자진해서 뭘 할 준비가 돼 있다? 복종할 준비가 돼 있다. 왜? 국가는 우리의 염원이고 상징이기 때문에.
요셉은 알았어요. 탈락하는 것. 요셉은 32강 탈락 정도가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이다. 죽게 되면 지가 살려고 애쓴 게 모든 것이 무효가 되지요. 죽을 때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저주받아 망해서 죽는다. 이게 주님의 뜻이다. 땅땅땅, 판결 내렸어요. 이걸 누가 알았어요? 언약 속에 있던 요셉, 야곱의 꿈이 알았잖아요.
여호사밧과 북쪽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과 전쟁할 때(역대하 18장)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이 죽는다는 것을 누가 먼저 알았습니까? 미가야 선지자가 알았지요. 그 미가야 선지자가 어떻게 알았느냐? 내가 하늘나라 가보니까 사백 명의 거짓 선지자 입마다 전부 다 사탄이 거짓말하는 영을 준 거예요. 하나 씩 할당시켜준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지 마음 지가 컨트롤할 수 없어요. 그냥 마귀가 컨트롤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선악체계라니까요.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악하게 살면 벌 받는다. 이 체계를 악마가 인간 속에 앞앞에 제각기 집어넣어준 거예요.
광주강의 때 끝부분에 이런 설교했지요. 자기한테 진지할 때 그것은 바로 말씀을 외면할 때에요.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데 그 진지한 시간이 너무 길어요. 스물세 시간 오십육 분, 주님은 생각은 4분밖에 안 해요. 그 4분이 어딥니까? 4분은 원위치하는 거예요.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지옥훈련을 내가 왜 해.’
천국은 탕감하는 겁니다. 탕감, 거저 용서하는 거예요. 그런데 뭐냐? 지옥은 자기한테 철저히 하는 거예요. 완벽하게 하는 게 지옥훈련입니다. 천국은 뭐냐? 탕감해줌에 대해서 감사히 여기는 거예요. 찬양 가운데 주께서 계시니까.
또 예를 들겠습니다. 느부갓네살과 다니엘 세 친구. 이건 상당히 어려워요. 어렵지만 원리는 똑같아요.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왕. 왕 자리입니다. 왕은 무엇의 귀환이다? 악마의 귀환이죠. 왕 자리에 느부갓네살이 있어요. ‘느부갓네살 왕 + 다니엘 + 다니엘의 세 친구’ 이 사람은 예속이 아니고 귀속이 아니고 어딥니까? 하나님 나라에 딴 살림을 차린 거예요. 집합 {다니엘 + 다니엘의 세 친구}, 집합 안에 들어있는 집합, 이걸 수학에선 부분집합(subset)이라 해요.
부분집합들을 모은 것을 멱집합(Power Set)이라 하고, 이 멱집합은 인간이 아는 그 전체를 능가한다. 이게 바로 수학이란 언어로도 전체를 다 표현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수학이라는 정밀한 인간의 언어, 최고의 언어 수학도 인간이 전체를 아는 것은 항상 실패한다는 모른다는.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출애굽기 3장 1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나라고 이야기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증명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증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 8장 17절에 보면,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를 증거하는 데는 누가 필요 없다? 너 같은 인간들이 필요치 않다. 왜? 나는 나니까. 그런데 율법에서는 증명하는 데 두 사람이 있어야 된다. 두 사람 맞잖아요. 나는 나고, 또 아버지가 나를 너는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율법대로 두 분이 증거한 것 맞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전체를 알고 전체를 아는 나가 되고 싶은 그 선악체제의 전부가 어디에 접근이 안 된다? 진짜 전체, 하나님께 하늘나라에 접근하지 못하지요. 접근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뭘까요? 어떤 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에 접근하지 못하면 어떤 대상이 된다 말입니까? 진짜 전체한테 뭐가 돼요? 굴복당해야 될 대상이 되는 거예요.
누가 시편 22편 27절을 읽어보세요.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인간 쪽에선 접근이 안 되지요. 접근 안 되는데 결과는 뭐냐? 많은 민족들 가운데 주님을 알고 주께 경배할 자가 따로 생겨나는 거예요. 이거는 예속일까요, 포함일까요? 포함이죠. 선지자처럼 하나님께서 속하는 무리들이 따로 있지요. 그런 무리들이 지옥 같은 세상에 어떻게 됩니까? 잠입하는 방식으로 산다 이 말이죠.
빌립보서 2장 10절, 이건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이게 바로 승리입니다. 이 승리를 아는 사람만이 주의 백성이고, 주님의 승리를 모르는 자는 문둥병 걸린 저주받은 그 영토에 분류될 대상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자식에게 유산을 남긴다? 부모의 유산이란 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러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현실을 이야기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지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받아주고 이건 아니에요. 진실을 외쳐야 되고 정말 성도라면 주께서 그들이 갖고 있던 꿈이 하나의 그냥 개꿈이라는 것을 알 때가 올 거예요. 그거는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야 가능하죠.
내가 의도한 것이 다 누굴 위해서? 내 잘남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가인의 후예로서 스스로 내가 신이고 왕이고 내 선악체제로 나는 그 안에서 의로운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지옥맨, 전형적인 지옥 갈 사람의 멤버다. 이걸 알 때가 오겠지요. 그거는 우리가 자식을 창조한 게 아니니까 누구 소관이겠어요? 주님 소관이지만 그들에게 외치는 것은 우리 소관이죠. 성도의 소관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잠입하는데…. 잠입하면 뒤의 단어가 뭐예요? 잠입, 그다음에 수사. 무슨 수사?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흔적을 찾는 수사를 벌이는 거예요. 수사관. 성경에 근거해서.
그러니까 오늘 본문 역대하 다시 돌아가 봅시다. 결국은 뭐냐 하면 왕은 누굴 못 이겼다? 성소의 거룩함을 이기지 못했다. 어디 성소에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 이거거든요. 함부로 하는 이것을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면 역대하 25장 14절에 가면,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에돔 사람을 이겼으니까 하나님은 누구 편이다? 내 편이다. 내 편으로 생각해서 너무 잘 나갔어. 오버했어.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세일이 맨 에돔이에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15절) 아마샤가 선지자의 말을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안 들었지요. 그래서 19절에 보면,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듣지 아니한 것은 누구 때문에?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20절)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했느냐? 22절에,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약속 있잖아요, 계시. 하나님께서 그 계시를 알리기 위해서 원래 죽어야 마땅한 인간을 밀당하는 거예요. 말 듣다가 못 듣다가 밀당하는 거예요. 왕은 안에 뭐가 들었다 했어요? 선악체계가 있잖아요. “나 잘 했으니까 이제부터 농땡이 부려도 괜찮겠어. 이 정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날 알아주니까 내가 성전에 가서 좀 하면 어때. 장난삼아 우상 섬기면 어때.”
이럴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에요? 말씀 중심이 아니고 말씀을 살리고자 하는데 인간은 갑자기 누굴 살리려한다? 내 자신을 살리려할 때 이게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제적인 지옥의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끝으로 이건 꼭 해야 돼.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절, 코미디 같은 이야기입니다. 18장에 엘리야 나오지요.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엘리야가 셉니까, 아합 왕이 셉니까? 엘리야가 세지요. 우리 편이니까 엘리야가 세잖아요.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근데 아합한테는 이세벨이 붙어있어요. 나라의 총 권력을 이세벨이 갖고 있어요. 그러면 엘리야는 그들에게 기죽지 않습니다. 사실은 기죽은 적도 있었어요.
문제는 그 권력 밑에 오바댜라는 궁내대신이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해서 백 명을 오십 명, 오십 명 나눠서 여호와 선지자를 몰래 숨겨줬어요. 이렇게 보면 그 사람이 굉장히 용감해 보이지요. 근데 그 사람이 우연히 엘리야를 만난 거예요. 아이고, 궁내대신 믿음 좋은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려고 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 궁내대신 쉬잇쉬잇 내 믿음 좋은 것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왜, 왜 그래요?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뭐냐? 이것 걸리면 어떻게 된다? 은퇴가 아니고 사퇴하는 것 아니에요. 사퇴하는 게 아니고 목이 달아나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백 명을 섬기되 무엇은 지키고 싶다? 내 목숨은 내가 건사하고 싶다. 이게 인간의 한계잖아요. 바로 말씀이 살아야 되는데 내가 살려고 하는 것, 구약에 이 이야기가 왜 있습니까?
바로 우리 모습이 이 모습인데 이것은 이미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부활의 영을 통해서 죽어도 산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느긋한 상태에서 감사한 상태에서 찬송하는 가운데 주께 함께 있으면서 이 본문을 옛날 일기장을 과거 보듯이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보실 때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누구 공로가 나오고 누구에게 감사하겠어요?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렇게 봤던 그 말씀이 그 안에 진리가 들어있고 생명이 들어있고 길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린 왜 자꾸 잊어버리는지 좀 안다고 하는 그것이 어쩌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지식이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권고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