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3a 울산강의-역대기하(20강) 23장 15절 : 대체 현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23장, 보면 두 중심 되는 인물이 나오는 데요.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세력을 내어”(1절)라고 돼 있지요. 이 여호야다 이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아달랴는 왕은 아닙니다. 왕의 엄마지요. 아하시야라는 왕의 모친인데 이 아달랴가 누구의 딸이냐 하면, 지금 남쪽 이야기에요. 전에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있었는데 아합 왕은 바알을 섬기는 왕이에요. 이스라엘 둘로 쪼개졌지요. 북쪽 이스라엘 아합 왕인데 바알을 섬기는 겁니다.
북쪽은 바알을 섬기고 남쪽은 바알을 안 섬겨야 되는데, 남쪽은 바알을 왜 안 섬겨야 되느냐 하면 남쪽에는 성전이 있어요. 성전이 두 개가 아니거든요. 북쪽 하나, 남쪽 하나 따로따로가 아니고 성전이 있는 곳은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습니다. 북쪽에는 성전이 없어요. 성전 대신 바알신당을 만든 거예요. 벧엘과 단 쪽에 두 군데에 바알신당을 만든 겁니다. 황소를 섬기는.
그런데 아합 왕이 여호람이라는 남쪽 왕에게 자기 딸을 시집을 보냈어요. 시집가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하시야에요. 아달랴가 아하시야의 모친입니다. 근데 아달랴가 자기 아들 아하시야 왕을 얼마나 걱정이, 지키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하시야가 북쪽의 권력자 예후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왕인데 죽게 돼요. 죽고 난 뒤에 거의 미쳐버리죠.
어떻게 미치느냐 하면 자기 아들이 왕인데 왕이 죽고 난 뒤에 유다나라의 왕 권력 자리를 다툴 수 있는 다른 형제들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아달랴는 아합 왕의 딸이에요. 바알종교를 지독하게 숭상하는 그 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니, 예루살렘의 의미니 유다나라라는 다윗의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자기 아버지가 북쪽의 권력을 쥔 것처럼 자기가 시집 왔으니까 이제 남쪽도 북쪽처럼 바알을 섬기는 자에 의해서 권력이 장악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여호람 자식들을 다 죽여 버렸어요. 그러면 왕자들은 하나도 없지요. 아주 어린 왕자, 한 살 된 요시야라는 어린아이가 있어요. 이 어린아이를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한 게 아니고 사실은 여호세바라는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세바와 아달랴의 관계는 일종의 계모고 자기 엄마는 아니고. 그 딸이, (목사님, 요시야가 아니고 ‘요아스’입니다.) 죄송합니다. 요아스. 다 죽일 때 여호세바는 역시 여호람의 딸이에요. 계모가 미쳐서 다 죽일 때 여호세바가 어린 요아스를 보호하는데 어디서 보호하느냐 하면, 점점 어려워져요. 성전에서 보호해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성전에서 요아스를 보호합니다. 여호세바는 아까 여호야다의 아내고 여호람의 딸이에요.
그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요. 역대하 22장 10절,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그러니까 자기 아들을 다 죽인 게 아니고, 그러니까 아내가 많지 않았겠습니까? 계모니까. 여자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여호람의. 다른 엄마 계통에 나왔던 그 왕자들을 다 죽여 버린 거예요.
요아스는 왕자들의 죽음에서 끄집어내서 “왕의 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게 한고로 아달랴가 저를 죽이지 못하였더라”라고 여기는 여호사브앗이라 돼 있는데 다른 데는 여호세바라 돼 있어요. 여호세바나 여호사브앗이나 같은 사람입니다. “여호사브앗은 여호람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더라” 11절에 나와 있지요.
성경에 이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아달랴가 6년 동안 통치를 합니다. 6년 동안 통치할 때 백성들은 꼼짝도 못했지요. 뭐 왕자들을 다 죽일 정도로 권력을 갖고 있는데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이 아달랴는 북쪽의 아합 왕의 딸이에요. 권력이 외세 권력도 있고 그렇게 마음대로 설쳐도 꼼짝도 못했지요.
그 이야기가 역대하 22장, 23장으로 넘어가는 데 23장에는 요아스 왕을 여호야다가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옛날에 이스라엘 왕가에서 바알을 섬기는 왕후가 자기 아들 죽은 것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배다른 아들들 다 죽이고 자기가 권력을 쥐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오늘날 울산의 경제상황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구약성경에 왕가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할 때에 그래서 성경에 있잖아. 있는데 나와 무슨 상관있어? 내가 뭔데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되느냐 이 말이죠. 조선시대에 단종이 귀양 간 그런 이야기도 짜증나서 안 듣는데 남의 나라 궁중의 이야기와 오늘날 21세기 우리와 무슨 관계있느냐?
이란과 미국의 전쟁은 약간은 관계있어요. 왜? 기름 값이 오르니까. 호르무즈 해협과 관계있어요. 기름 값 오르니까.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과 우리와 무슨 관계있어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면 그다음 나오는 태도는 뭡니까? ‘알았어. 그냥 넘어갑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렇게 넘어가면 다 넘어가야 돼요.
궁정사, 궁중에서 있었던 남유다, 남쪽이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유다나라의 궁정사가 오늘날 21세기 2026년도에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려면 여기서 뭘 하나 거쳐 와야 돼요. 뭘 거치느냐 하면 이렇게 궁중에서 사람이 죽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또 다음의 어린 왕, 요아스 왕을 제사장 여호야다가 다시 옹립을 했다.
그럴 때 그 당시의 민중들, 백성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를 한번 거쳐보자. 성경에서 이 백성들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거든요. 그 당시의 백성들은 어떤 생각으로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바라봤을까? 그 백성들의 생각은 뭐였습니까? 객관식으로. ①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이지 나는 모르겠다. 난 알바 없다. ②나라가 안정이 되어야 우리의 생활이 장사가 잘되고 농사가 잘되고 편해진다.
몇 번입니까? ②번이겠지요. 지금 정치인들이 어떤 권력투쟁을 하던 간에 내 삶에 지장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권력층에 일을 하시든 간에 나는 그냥 남은 인생을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 당시의 민중들이나 백성들이 그런 생각을 갖겠지요.
궁중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어서 역대하 22장, 23장, 24장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모세가 자기에게 대대로 전해줬던 율법, 그 율법을 지킬 것인가, 안 지킬 것인가 신경 쓰겠지요. 그런데 그 백성들이 뭘 지금 놓치고 있느냐 하면 그 율법이 주어졌을 때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있다, 십계명 있다, 나 여기 있다. 그러면 십계명 잘 지키면 나는 복을 받는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십계명이란 율법이, 그리고 다른 율법 전체가 율법이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치사를 형성시키고 하나님이 일하셔서 율법에 준해서 이스라엘의 권력층을 조성해 간다고 한다면 내가 율법 지키는 것이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현재 정치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내가 이해하는 게 율법 지키는 거예요? 어느 쪽이겠어요? 정치든 뭐든 나는 모르겠고 십계명만 지키면 돼, 이러면 율법 지키는 거예요?
말을 좀 더 쉽게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 너무 쉬울 거예요. 뭐냐 하면, ‘율법은 자체적으로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게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내가 여기 있다. 여기 십계명 돌 판 있다. 내가 지키면 난 지킨 자로서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할 때 여기는 뭐냐 하면 ‘나’가 있고 율법 있지 여기에 둘러싸인 환경은 그냥 그대로의 환경이라고 보이잖아요. 성경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가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그런 것 묻지도 않고 율법이 스스로 어떤 환경을 만들어내요.
이건 뭐 뻔한 질문이지만 여러분들이 입을 다물지 말고 답변할 차례가 온 것 같아요. 질문을 할게요. 기차 승객은 기차를 모는 겁니까, 타는 겁니까? 자기가 기관차도 아닌 게 자격증도 없는 게 기관차에 올라가는 게 아니지요. 그냥 객석에 자기 좌석에 앉아야지 기관차에 앉는 게 아니지요. 승객은 그냥 달리는 기차에 타면 돼요. 신앙생활 참 쉽지요. 정말 쉽지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만들어낸 기차를 타고 있으면 되지, 객석에 타고 있으면 되는데 내가 말씀대로 지켜서 기관차를 내가 몰고 가려고 하니까 이거는 뭐 온갖 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전쟁이 언제 끝나느냐 등등.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하마스와 전쟁할 때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름 값 오르니까 갑자기 생각이 되는 거예요.
기차는 우리가 타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타고 있으면 된다는 말은 나의 일대기, 나의 운명, 나의 일생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닙니다. 이걸 믿는 게 신앙이에요. 내가 뭘 해야 되는 게 신앙이 아니고, 말씀이 알아서 내가 속해 있는 환경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대로 그걸 기차를 몰듯이 마차를 몰듯이 차를 운전하듯이 그냥 인간에게 우리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몰고 가버립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여러분 하루 종일 무슨 걱정합니까? 어떤 걱정해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뭐다? 일상생활 생각해보세요. 신앙이란 믿는 거다. 뭘 믿는데? 어떤 걸 믿는 데요?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를 믿는 그건 신앙이 아니에요. 뭘 믿느냐 하면 내게 일어난 어떤 일, 내가 경험한 어떤 일도 이거는 하나님이 개입해서 조성한 일들, 또는 사건들, 또는 사태들을 내가 늘 좋든 싫든 마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보이스 피싱이 나한테 전화 올 때까지 하나님은 열심히 활동한 거예요. ‘여기 검찰인 데요’ 이런 말 한 마디도 하나님이 하게 하셨어요. 옷가게 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옷 둘러보고 두 시간 반 동안 입었다, 벗었다 해놓고, ‘다른 집 가보고 다음에 올게요.’ 하고 나가는 것도 누가 하셨어요? 그 진상 고객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음을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진상고객 오는 것을 내가 사전에 어떻게 기대하거나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원한 삶의 현상, 환경 따로 있습니다. 이걸 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누가 훼방자입니까? 누가 지독한 훼방자에요? 우리 자신이 지독한 훼방자입니다. 율법이 만들어낸 환경에 대해서 우리는 뭐로 발각되는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근히 기대하는 내가 바로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달랴, 그리고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문제성을 우리가 함께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계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역대하 23장에 여호야다가 6년 동안 아달랴의 매서운 통치, 그냥 여호와 믿는 사람들 다 처단하는 6년 통치를 뚫고 그 권력의 망, 아달랴는 여성이 통치하고 있던 지배하고 있던 그 권력망을 뚫고 나오는 것, 이게 일반백성이라든지 해당됩니까? 안 되지요. 일반백성들은 해당 안 돼요. 이 권력을 뚫고 다시 다윗 혈통의 요아스를 왕위에 앉히는 그 일에 대해서 일반백성들은 아무런 기여도가 없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가 악마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뚫고, 안 뚫리면 천국 못 가요. 뚫고 천국을 가는 것에 우리가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왜? 우리는 세상의 권력을 뚫어낼 수 있는 그러한 자질과 능력, 없습니다. 그러한 실력이 되질 않아요. 이게 또 하나의 신앙이에요.
내가 천국 가는데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이걸 믿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믿는 거고 자신의 무의미를 믿는 거예요. 무능력자, 그리고 더 힘든 것은 무의지자. 나는 무능력과 무의미니까 하나님의 일을 훼방할 뿐이지요. 무능력하고 무의미란 것을 받아들이는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무능력자 아니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의미가 있다고 자부하게 되면 반드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계획을 세워요. 계획이란 게 뭡니까? 미래에 대해서 나의 욕망을 거기에 담아서 스케줄 짜는 게 계획 아닙니까. 이렇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의지가 담겨 있는 거예요, 계획이. 자기의 의지와 욕망이 담겨있을 때에 사람들은 그걸 죄라고 보겠어요, 안 보겠어요? 죄라고 안 보겠지요.
다시 한 번 중요한 대목이니까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권력에서 기존의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권력이에요. 아달랴는 그냥 권력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도 권력에서 나와서 권력으로 마감되고 끝이에요. 이 권력에서 뚫고 하나님의 계시, 말씀의 세계로 돌파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인간이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그런 계획을 가지질 못해요. 왜? 인간은 자기가 능력자고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고 천하없어도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나는 능력자고 의미가 있다 할 때는 이거는 필연적으로 누구한테 사로잡히느냐 하면 이 어두운, 여호와가 없는 언약이 없는 약속이 없는 계시가 없는 이 어두운 권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도리어 반대로 이 권력을 요청하게 돼 있습니다. 원하게 돼 있어요. 이란이고 미국이고 전쟁 빨리 끝나서 기름 값이나 내려달라. 이건 뭡니까? 계획이죠.
그러면 왜 기름 값, 에너지 값이 서민들 사는데 낮아져야 되는가? 그래야 내가 살거든. 그러면 묻지요. ‘어디에서 사는데?’ 도로 성경은 그걸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너 어디 살고 싶은데?’ 라는 것을 묻습니다. 네가 태어난 이 세상에서 살고 싶냐, 아니면 이 세상을 뚫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에 살고 싶으냐를 묻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은 아니지만 진짜 오랜만에 따라 해봅시다. 대체 현실, 대체 현실. 투자업체 아닙니다. 지금 하면 된다, 이런 것 아닙니다. 기존의 세계에 없는 것, 기존의 세계에서 감히 상상, 생각하지도 못하는 세계, 대체 현실. 이게 뭐냐 하면 권력의 바깥에 있는 그러한 세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알던 세계와 다른 세계. 이왕 한 것 마지막 이것만 같이 해봅시다.
시작, ‘내가 알던 세계와 다른 세계’ 이걸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나가 기다리고 있는 세계, 이것은 바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 대체 현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 내가 알던 나가 아닌 다른 나가 되기 위해서는 출발점이 대체 현실 쪽에서 기존의 현실, 권력이 작동하는 이 현실 속에 뭘 전달하느냐?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으로 찾아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 말씀 혜택이라는 것은, 말씀에서 날아온 끈을 이렇게 붙잡고 가다보면 어느새 동굴 밖으로 나가요. 동굴 밖에 나가야 이 세상이 동굴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냥 이 세상에서 성경공부 해버리면 계속해서 뭐냐 하면 내가 상상한 세계, 내가 알던 나가 구성한 그냥 만든 허상, 실제로 대체 현실이 아니고 나의 세계가 부풀어진 것 밖에 안 돼요.
특히 연세 많은 사람 비만 조심하세요. 아랫배. 비만이 뭡니까? 내 몸 아니고 다른 몸이 뚱뚱한 게 비만 아니잖아요. 내가 알던 나가 아랫배 나오면서 터질 듯이 나오는 비만. 비만에는 카무트가 좋다 하던가 뭐. 하여튼 종편에 보면, 종편과 홈쇼핑이 짰는지 카무트 좋다 하면 여기서 팔고 있고.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기대하는 나는 아무리 그렇게 그게 성경으로 말씀으로 아름답게 치장을 한다 할지라도 그거는 권력 안쪽이에요. 아달랴가 지배하는 곳이에요. 지금 백성들은 아달랴가 권력을 갖고 있든 여호람이 권력을 갖든 요아스가 갖고 있든 그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냥 백성들 잘 먹고 잘 살면 권력을 누가 잡든 나는 아무나 표 찍어준다, 이런 생각이에요.
그래서 역대하 23장에 보면 아달랴에서 여호야다로 권력이 바뀌는 것에 일반백성들은 아무런 보태준 게 없어요. 이 점에 대해서 좀 섭섭하게 생각합니까, 안 그러면 당연한 걸로 생각하십니까? 천국을 만드는 데 예수님만 기여했어요. 열두 제자도 아니에요. 예수님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아들이 계획을 완수해서 천국이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뭐 예수님의 제자나 그 당시의 일반백성들이 관여한 게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 되는 거예요.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것은 예상했던 기쁨이 아니고 예상 밖의 기쁜 소식이에요. 권력 밖에 있던 이미 마련된 대체 현실이 그런 세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권력 안에서부터 소식을 듣게 되니까 이것이 바로 GOOD NEWS, 기쁜 소식인 거예요. 기쁜 소식이 이렇게 연결이 되고 접촉이 되면 그야말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전에 내가 기대했던 것, 권력을 누가 잡든 나 편안케 해주고 내 소원만 들어다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 하는 그것과 어떻게 돼요?
그러한 나와 아주 흔쾌히 기꺼이 굿 굿바이, 나 떠난다. 나 이 세상과 헤어질 테니까, 그것도 우아하게 헤어질 테니까 너는 실컷 나한테 욕해라. 바이, 바이, 바이. 실컷 욕해도 좋아. 나는 기쁜 소식을 접해서 떠날 거야. 어떻게? 기쁘게. 환한 웃음을 띠면서 ‘잘 있거라, 이 세상아’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돼요.
특히 자식이 있는 엄마는 어떻게 됩니까? “아들아 미안하다. 나 혼자 떠나서 미안하다. 나 기쁜 소식 받았거든.” 박옥수 이야기 아닙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떻게 되든 나 알 바 아니고 나는 떠난다. 너무 매정한 엄마라고 욕해도 되는데 나는 우아하게 떠날 거야.”
이것이 권력층, 이게 구약이잖아요. 역대하 23장, 이게 유다의 궁정사화잖아요. 권력층에서는 이게 여호야다와 거기에 소속된 사람은 기쁜 소식인데 이게 아래쪽까지는 전달이 안 돼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구사일생 살아났던 요아스 왕까지도 이 기쁜 소식이 전달이 안 됩니다. 왜? 구약이기 때문에. 아직 계시가 무르익지 않았어요.
우린 지금 신약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에 살고 있으면서 구약에 있었던 그 기쁜 소식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발생되며, 그런데 그것의 한계, 그것으로 온전히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해결되었음이 왜 그러한 선언을 할 수 없었는가? 왜 여호야다 같은 그런 훌륭한 제사장이 있었고, 그리고 또 요시야 왕 같은 그런 훌륭한 왕이 있었고 히스기야 같은 그런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여호야다, 요시야, 그리고 히스기야는 메시아의 그러한 위상이 되질 못하는가?
인간은 왜 메시아가 되지 못하는가? 그걸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아셔야 돼요. 그래야 성경을 봐야 돼요. “나, 예수 믿어요.” “예수가 뭐하는 사람인데?”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 그러면 구약 빼버리고 신약 마태복음 1장에서 4장까지만 하면 성경이 얇고 보기도 좋은데 왜 이렇게 두꺼워요? 두꺼운 이유가 뭡니까? 메시아를 만나서 내가 용서받고 천국 가겠다는 것이 그 속에 그것이 내가 알던 세계의 연속이란 말이죠. 연장이란 말이죠.
예수님을 살해했던 유대인 있잖아요. 유대인들의 신학,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의 신학을 보세요. 그들은 한결같은 오직 메시아의 그 날이 오기를 고대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가 언젠가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버텨야 된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걸 외쳤단 자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서기관들이었고, 그중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사울도 그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죽이고, 스데반 죽는 데도 찬성했고 그랬어요.
내가 알던 세계가 메시아의 도움으로 획기적으로 변해서 우리는 그동안 내가 알았다는 이 앎이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 옳은 진리였고 지식이었다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그걸 확인받고 싶은 거예요. 그건 왜 그러냐? 그게 뭐냐? 나는 뭐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고 뭔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자체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하는 의미라고 스스로 그 의미를 소유하고 싶은 겁니다. 나 이 정도야,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능력껏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게 되면 바리새인처럼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살인도 안 하고 간음도 안 하고, 이렇게 바르게 살면 이거는 나한테 구원이 되는 의미 있는 축적된 의미라고 자기는 간직하고 그걸 간수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다 엉터리라는 거예요. 이게 엉터리인지 아까 한 물음을 다시 하면 되겠지요. 또 제가 묻습니다. 믿음은 뭐냐? 믿음은 일체 자기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자기가 보태거나 기여한 적이 있다, 없다? 없다. 자기가 관여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애초부터 우리는 의미가 없으니까.
인간은 본인이 자기 인생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환경이 결정해요. 왕이 바뀐 것, 백성 한 개인, 개인의 결정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육신 있잖아요. 이 껍데기 육신은 아담의 DNA 유전자를 물려받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껍데기는 인간인 것으로 받았는데 내용은 뭐냐? 마귀의 마음을 마음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귀의 마음이 뭐냐 하면 우리 존재의 의미를 주는 것, 중요하다 이 말이죠. 의미 있다는 건 중요하다. 나는 중요하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이 세계 말고 바깥에 다른 세계 있다는 지식을 아무리 받아들여봤자 그거는 환상이죠.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중요한 것을 계속 유지하고 그걸 간직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온갖 지식을 다 채용하고 가져와서 내 것으로 그 정보를 나한테 유리한 지식으로 붙들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기대하고 있는 이쯤 했으면 구원이 되지 않겠느냐? 내가 알던 나에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그 이유가 어두움의 힘이 나를 누르고 있고 나는 그 힘을 뚫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생각도 우리에게 주신 우리에게 제공된 환경을 우리는 뚫어낼 수가 없다는 것,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의 환경은 우리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경이에요. 이것을 논리적으로 아까 수학적 논리로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이나 어떤 존재를 나타낼 때는 반드시 교차되는 두 지점의 위치가 만남으로 되는 거예요. 여기 A라는 지점이 있다면 이게 7, 5라면, ‘너 어디 있어?’ 하면, x축이고 y축이거든요. 그럼 이건 뭐냐? A(7, 5)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우리 어느 카페에서 만날까, 하면 그 카페 어디인데? 내비게이션 켜면 나오지요. 내비게이션 중에 (7, 5)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어디다 하나 더 보탰어요. x축을 공간으로 보고, y축을 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너 어디서 만날 거야?” (7, 5, 오후 2시) 시간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이 두 축으로 돼 있다면, 공간은 아까 (7, 5)로 보잖아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너 커서 뭐 될래?” “나 커서 의사될 거야.” “언제쯤?” “나이 한 스물다섯 살 때에 의대 졸업하고 군에 갔다 와서 한 서른쯤에 전문의 딸 거야.” 이렇게 한다고요. “그러면 너 병원 어디 차릴 건데?” “나 서울서 차릴 거야.” 서울, 그다음에 나이는 몇 살이요? 서른 살.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결혼은 서른두 살 때. 아가씨는? 서울 아가씨.
지금 두 사람이 만날 때 대화를 하잖아요. 대화를 할 때 그 대화 속에서 연결되는 단어가 단어를 조성하는 환경은 지금 기존에 있는 세계에서 활용되고 있던 요소들로 구성된 대화가 돼요. 여기서 이걸 뚫고 나간다고요? 미쳤어요. 이게 세상인데. 이게 전부 아닙니까. 이게 전분데 이걸 왜 뚫고 나가지요? 어떻게 뚫고 나갑니까, 물으면 답변하는 사람이 이렇게 되물을 거예요. “목사님, 그걸 왜 뚫고 나가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이걸 왜 뚫고 나가는 데요?”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는, 비-성도는 자기에게 의미 있는 거예요. 이 의미는 어디서 나왔는가? 시공간 세계에서 의미가 채워지는 거예요. 근데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의미가 아니고 차이에요. 그러면 차이를 가지고 그래프를 또 그려보겠습니다. 역시 x, y. 이게 뭐냐? 시공간으로 돼 있는 이 세상, 근데 이게 x축이라면 y축은 뭐냐 하면 저 세상, 천국 또는 복음의 세계, 또는 말씀이 세계에서 x, y의 좌표를 가지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여기서 천국에 속할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나는 누구냐’ 하는 이것이 그냥 쫙, 쫙 이게 제거가 돼요. ‘나는 누구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이냐’로 이게 채워지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뭡니까? ‘나는 누구냐, 나는 이런 사람이다’가 의미잖아요. 그런데 시공간에서 나는 이렇게 하고 있고, 나는 누구와 결혼했고, 나이는 얼마고, 장래 희망이 어떻고, 이게 전부 다 시공간에서의 바깥세상이 아니고 이 세계 안에서의 의미고 가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이 공간에서 구멍을 뚫고 빠져나갔다 이 말이에요. 누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빈 무덤 남기고 부활하셔서 다른 세계에 가버린 거예요. 그럼 다른 세계 갔으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든 말든 나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했든 나랑 무슨 상관있냐? 그게 바로 사울이고 일반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부활했던 분이 말씀과 더불어 성령을 통해서 와버리니까 하늘에서 바깥세상의 대체 현실에서 끈이 날아온 거예요, 말씀의 끈이. 그게 무슨 소식이라 했어요? 기쁜 소식이 도달해버린 거예요. 접촉이 되었어요. 낚싯대 고리에 걸렸다 이 말이죠. 전에 여러 번 했는데 그게 락lock이 걸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자물쇠 걸린 것처럼.
딱 걸어버리니까 여기서 성도는 뭘 느끼느냐 하면 나는 이제 천국 백성이다가 아니라 나는 이 세상과 전에 속한 공간과 상황과 주님의 공간이 차이가 있다는 걸 차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다고 까불지 말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차이의 중간에 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가 있겠지요.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쟁해서 기름 값이 오른다. 그러면 이 시공간에서는 뭐냐?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왜? 자꾸 살기가 동일한 수입인데 수입의 가치가 하락하니까 제 값을 못 받으니까 살기가 그만큼 물가가 오를 것이고, 부동산 값은 팔려고 해도 떨어지고 대책이 없으니까 이 세상에 못 살겠다. 이게 뭐냐? 나란 존재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성도는 뭐라 합니까? 전쟁이 일어났으면 그 전쟁은 성경대로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이참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가 바깥세상을 모르고 태어난 자기 세계만 알고 있다는 걸 좀 알았으면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날 때 그게 뭡니까? 그게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성도만이 그러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 하나 적고 10분 쉽시다. ‘바깥세계 또는 대체 현실에서 오는 복음은 인간들이 설치한 모든 개념과 의미를 뚫고 지나간다.’ 뚫고 지나가면 부셔진다는 말입니까, 구멍이 생긴다는 말입니까? 구멍이 생기죠. 그러면 성도란 뭐냐?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고 있는 재산과 부동산과 자기가 공부한 이런 것은 안에 뭐가 뚫렸어요? 십자가 복음이 와서 구멍이 뚫린, 뚫려있는 그 바깥에 있는 자국과 흔적으로서 우리는 자기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귀한 존재지요. 주께서 가장 소중한 나를 그냥 짓밟고 뚫고 지나갔다는 그것이 우리는 기쁜 소식의 증인으로써 그만큼 소중한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60403b 울산강의-역대기하(20강) 23장 15절 : 대체 현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현재 이란의 국민들 70%가 이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근데 47년 동안 성직자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폭정에 의해서 국민들을 이슬람식으로 통치를 해왔어요.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잘못된 거죠? 권력층이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백성들은 권력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등 따습고 배부르면 끝나는 거예요. 이걸 해주겠다는 거예요. 누가? 권력 잡은 자들이.
그래서 역대하 23장에서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기존의 권력은 아달랴 권력입니다. 바알 권력이에요. 바알 권력에 대해서 여호야다가 반정, 정부에 반대하는 겁니다. 국가에 반대하는 것과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같은가요, 다른가요? 국가에 반대하면 반국가주의자가 돼요. 그런데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권력 교체를 요구하는 거예요. 국가를 반대하는 게 아니고, 너 국가운영 잘못하고 있어, 그걸 반대하는 게 현 정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나라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민중들, 또는 백성들, 국민들 하나하나 의견을 들어봐서 바른 나라 된다는 것은 이거는 있을 수 없어요. 성립이 안 돼요. 개개인은 개개인에게 있는 권력을 저한테 주시면,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을 저한테 주시면, 이 ‘저’가 누구냐? 국회의원이거든요. 국회의원에게 주시면 국회가 대통령을 잘 보위하고 나라를 잘 다스려서 그 혜택을 국민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 각 개인에게는 뭐가 없기 때문에? 각 개인은 권력 자체가 없어요. 개인의 권력을 우리는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게 드렸습니다, 하고 내놓을 수 있는 권력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자기가 자기를 지배하거든요. 왜? 자기가 소중하니까. 모든 결정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하잖아요. 내가 결정하는 데 문제는 나 자체가 없어요. 나라는 게 없다고요.
나라고 이야기한 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나라고 안겨줬지 나라는 건 몸뚱이는 있는데 부모로부터 태어난 육신은 있지만 나는 없는데 마귀가 육신에다가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죽으나 사나 너는 너만 챙겨야 되지 다른 사람 챙기지 말라고 이미 마귀 마음에 우리 각 사람 속에 들어와 버린 겁니다. 여러분, 국화빵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밀가루반죽에 앙꼬 골고루 넣잖아요. 악마의 마음이 골고루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오실 때에 중풍병자가 중풍병 고치러 왔다 하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네 죄를 사한다 했지요. 지금 중풍병자가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나라는 인간이 중풍병 걸린 나가 중풍병에서 나은 멀쩡한 나가 되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한 것은 뭡니까? 네가 잘된다가 아니라 네 죄를 사한다. 죄가 있었단 말입니까, 없었단 말입니까? 모든 인간에게 죄가 있잖아요. 국화빵에 앙꼬 있어요, 없어요? 국화빵에 앙꼬 없거든 반납하면 돼요.
인간 속에 죄가 있고, 그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죄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본인 챙기는 게 죄에요. 자기가 자기 챙기는 게 죄라고요. 그럼 목사님, 죄 아닌 게 뭡니까? 죄 아닌 게 뭐냐 하면 이 몸뚱이로부터 해서 이 몸에게 접촉되는 모든 환경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는 게 죄 아닌 거죠. 이 몸부터 해서 머리카락 하나까지 머리카락도 세신다 하잖아요.
관절이 좋으면 어떻습니까? 두 다리로 걷지요. 주께서 뭐하신다? 발걸음을 세시잖아요.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중간에 인터셉트 마귀가 들어와서 ‘네 몸은 네 거야’ 해버렸단 말이죠. 그때부터 인간은, ‘그래 내 몸은 내 거야’ 무슨 근거 있습니까? 아무 근거 없어요.
근데 내 몸은 내 거라고 하느냐? 그러면 내 거 아니면 당신 거야? 아니잖아. 당신 것 아니니까 내 거잖아요. 성경은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 거잖아. 너라고 하는 건 하나님 거야.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는데, 이래 되는 거예요. 마지막엔. 하나님이 없는데 내 거라고 해야지 뭐.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 거라고 할게. 여러분, 하나님 계시면 하나님 거라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인간의 권력은 악마의 소리만 듣도록 돼 있는, 어느 낮 설교에 했어요. 악마가 말하는 그 말씀을 곶이 곶대로 따르는 그것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따르는 악마의 말씀의 수용체가 우리 안에 장치돼 있어요. 드라마 같은 데 보면 차 밑에 붙이는 위치 추적기 나오죠. 휴대폰도 추적기 있잖아요.
마귀는 우리가 어디 가든지 우리 마음속 안에 그 추적기로 우리가 어떤 때 고민하고 어떤 때 염려하고 어떤 때 무서워하고 어떤 때 두려워하고 어떤 때 화내고 어떤 때 격분하는지를 다 마귀가 체크를 해서 계속해서 그런 것을 유발시켜서 마귀가 자기 사람 되도록 그러한 환경의 지배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의 권세에요. 권력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이제 진도 나가기 위해서는 뭘 알아야 되는가? 이러한 권세에 반대되는 권세가 무엇일까요? 이것만 알면 되지요. 아까 차이니까.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분명히 하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차이 나게 하는 것이죠. 그 차이가 바로 여기 레위 지파의 반란, 역대하 23장에서.
지금 왕이 없잖아요. 왕이 없어요. 앞으로 왕이 될 사람도 없어요. 다 죽였으니까. 요아스 왕은 한 살인데. 여호세바에 의해서 보호받지 아니하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어요. 위태위태해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여호세바의 남편이 여호야다고. 여자는 그냥 요아스를 숨기고 있을 뿐이에요. 현재 바깥의 권력은 누굽니까? 바알의 권력이 있잖아요.
바알의 권력이라 하지 말고 그냥 정치적 권력이라 봅시다. 종교를 집어넣어서 의미 주지 말고 종교를 빼버리면 그냥 권력자에요. 아달랴가 권력자니까 여호야다가 거기에 대항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반정부운동이죠. 반국가운동이 아니고 반정부운동이에요. 국가는 그대로 있어요. 영토도 있고 백성도 그대로 있는데 지금 안에 있는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이 누구한테 있느냐, 그 문제잖아요. 현재 권력은 바알에게 이미 넘어가버렸어요. 아합의 딸에게 넘어갔다 이 말이죠.
거기에 백성들에게 데모하라 하면 일어납니까? 안 일어나지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친다고 이란의 일반국민들이 일어나서 정부 뒤집겠습니까? 아니지요. 47년 동안 지배를 받았단 말이죠. 김정은이 문제 있다고 북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겠습니까? 아니지요. 이미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백두혈통을 교육받고 있는 거예요. 이걸 김정은이나 이슬람에 적용시키지 말고 4대째 기독교 집안에다 적용시켜보잔 말이죠.
어릴 때부터 기독교 집안의 그 사람들이 4대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자동적으로 기독교 신자인데 뭘 또 받아들여요. 다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자아가 차이 나는 자아가 돼야 되지 자아는 나는 그대로 있으면서 여기 무슨 종교를 입히느냐, 어떤 장로교냐, 침례교냐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문제라니까 내가. 마귀가 집중해서 나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지금 이런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마귀가. ‘네가 어때서? 그만하면 인생 선방한 건데? 누가 너보고 욕해? 욕할 사람 아무도 없어. 너는 훌륭해.’ 자꾸 마귀는 바로 아까 좌표 가운데서 시공간 좌표 속에서 다른 사람과 타인과 얼마나 우열을 나누어서 잘되면 성공한 것이고, 못하면 약간 인생에 하락한 것이다. 그런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죄라는 개념, 구원 개념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까 xy 틀에서 보는 죄와 구원의 개념과 이미 오신 천국과 그리고 지옥이 된 이 세상에서의 죄와 구원 개념이 차이가 나요. 그냥 다르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다음에 기존에 있던 시공간 버리고 이것 채택하겠습니다, 이래 나오잖아요. 그게 아니고 기존의 시공간 나는 버리고 새로운 시공간 얻었습니다, 이게 아니라 뭘 얻고 자시고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기존에 있는 나가 조각나야 두 조각나서 대조되는 두 개의 세계에 대해서 둘 다를 알고 있는 거예요. 한쪽에 발을 걸치고, 이게 안 된다니까요. 왜? 육신 때문에 이게 안 돼요.
이 레위 지파한테는 민수기에 보면 어떤 특별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민수기 3장 5절에서 10절을 보게 되면, 10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레위 지파 아닌 사람이 언약궤 근처만 와도 그 사람은 뭐 된다?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안에 다른 민족과 특이점이 뭐냐? 다른 민족은 나이 늙으면 죽어요. 인간은 일평생 살아도 늙어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자기가 누군지도 몰라요.
평생 살아도 누군지 모르는데, 왜? 율법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그들 한 가운데 멀쩡하게 살아 있는 뭐가 놓여있어요? 죽음이 놓여있어요. 그 죽음은 우리들의 죽음이 아니고 어린양의 죽음,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대체 현실 속에 계신 분의 죽음이 이스라엘 안에 언약궤란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언약궤 안에 있는 내용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너희는 진노 받아야 마땅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언약궤 상자가 있고요. 진노해서 마땅히 다 죽어야 될 멸절해야 전멸돼야 되는데 왜 살아 있느냐? 7월 10일 그 언약궤에 바로 염소의 피나 소의 피가 제사장에 의해서 전달되어서 피가 발려집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고 죄도 몰랐던 그들의 죄가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넘어가는 거예요.
참 정말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생각할수록 신기한 민족 아닙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실감나게 하려면 여러분이 사는 옆집에 언약궤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너희 집에 언약궤 있다며 구경 좀 해보자, 하면 안 됩니다. 왜? 접근하면 죽습니다, 할 때 그 죽음의 의미가 뭐겠어요? 늙어죽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만지거나 가까이 오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궤 바깥에 특수한 아우라, 이 세상에 없는 영역이 공간이 발생되겠지요. field 공간, 장이 형성되겠지요. 그 장에는 누구만 활동할 수 있다? 레위인만 활동할 수 있다. 그 안에 레위인 중에서 제사장이 뽑히니까. 제사장이 활동할 수 있지요. 그러면 여호야다 제사장이 활동한다는 말은 개인적으로 활동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아우라, 그 공간이, 그 죽음이 드디어 실효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어떤 공간에? 바알이 지배하는 그 권력의 장에 하나님의 여호와의 레위언약의 진노의 위력이 작동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아달랴 죽을 때 성전에서 죽일 겁니까, 성전에서 추방시키고 난 뒤에 죽일 겁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느 쪽입니까? 성전 있는 데서 추방시켜서 죽게 하겠지요. 그게 바로 역대하 23장 21절에 나옵니다.
여기 14절부터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을 불러내어 명하여 가로되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무릇 저를 따르는 자는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이에 무리가 길을 열어 주고 저가 왕궁 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거기서 죽였더라”
성전 바깥에 왕궁 바깥에서 죽여 버렸어요. 21절에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칼로 죽였었더라” 퀴즈입니다. 그럼 여호야다가 죽을 때는 제사장 묘지에 묻히겠어요, 왕 묘지에 묻히겠습니까? (왕 묘지에) 그걸 어떻게 알았지요? (성경에 나와 있데요.) 바로 역대하 24장 16절, (여호야다가 나이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일백삼십세라) “무리가 다윗성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 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여호야다가 선을 행하였다는 이 말은 무엇을 했냐 하면 왕을 뽑을 때 계약에 의해서 뽑았어요. 언약에 의해서. 그러니까 요아스 왕이 있다고 해서 그냥 왕 덜렁 해주는 게 아니에요. 어떤 아우라가 있어야 돼요. 자아라고 하는 인간은 여전히 악마의 권세 아래에 있지요. 악마의 권세의 지배를 무효화시키고 무능케 하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그 악마의 권세를 또 지배하는 다른 권세가 그 주위를 둘러쳐야 되고 덮쳐져야 되지요.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게 율법의 위력이에요. 율법이 만든 현실입니다.
신명기 17장 보겠습니다. 14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라고 돼 있잖아요.
여기서 또 18절에,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했는데 그 율법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제사장언약이라 돼 있어요. 민수기 3장 같은 경우에 제사장언약이죠.
제사장언약이 뭐냐 하면 ‘대체성’인데 흔히 신약성경에선 뭐로 보느냐? 이걸 ‘대신하심’ 율법 안에. 왕이 있으면 율법에 뭐가 있다? 대체성, 또는 대신하심이 있지요. 그러면 왕이 세워지면 하나님은 백성하고 상대합니까, 왕하고 상대합니까? 왕과 상대하는 거예요. 왜? 왕 안에 뭐가 집약돼 있고 응축돼 있느냐 하면 대신하심과 대체성이 포함이 돼 있거든요.
그 왕을 뭐라고 하느냐? 그리스도라고 해요. 신약의 헬라 말로. 또는 구약에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기름을 부었다 하는 것은 이 단독성으로 하나님과 이 사람의 계약에 의해서 나머지 사람은 이 계약 안에 들어옴으로써 효과, 혜택을 입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그들 가운데서 한 왕을 세워요. 백성들 가운데서 한 왕을 세운다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야 돼요. 어떤 혈통?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 한 혈통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돼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을 통해서 태어나야 했어요. 그 구색을 갖추어야 된다고요. 그렇게 대체성이 확립되게 되면 율법에 의해서, 율법, 율법 많은데 지금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내 장자, 장자가 뭡니까? 둘째 아들이에요, 셋째 아들이에요? 맏이지요. 맏아들이에요. 또는 첫 열매가 돼요. 율법의 첫 열매가 되고 나머지 둘째, 셋째, 넷째는 맏이가 하나님 아버지와 있었던 확립된 그것을 둘째, 셋째에 그냥 혜택으로 주는 거예요. 신약성경으로 하면 뭐냐? 은사가 와요. 믿음, 소망, 사랑 이거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렇게 돼 있어요. 그게 은사에요. 선물이에요. 선물 주는 거예요. 선물 어디서 나왔습니까? 맏이가 하신 아버지에게 만족하게 했기 때문에 선물 주는 거예요.
그러면 봄에 벚꽃 폈잖아요. 태화강에 벚꽃 폈지요. 벚꽃 보면 아름답지요. 그게 왜 아름답고 기분 좋지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뭡니까? 선물,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다 이루신 혜택의 여파가 개나리, 벚꽃으로 나타난 거예요. 진해 가서 사진 찍고 뭐 축제한다고 하는 가운데 있으면 벚꽃의 뿌리는 십자가의 피에 담겨서 그 열매 맺는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중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응용문제로 나이 육십이 되면 남자나 여자나 슬슬 머리가 하얘지지요. 그 하얘지는 게 뭐예요? 일종에 인생에 피는 벚꽃이라. 어느 것 하나 주님이 거저주신 선물, 그냥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이제는 구체적으로 누굽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린 그 혜택이 아닌 것이 성도한테는 하나도 없어요. 그 선물 줬다는 말은 주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 주님의 지배는 무슨 지배를 이깁니까? 나는 나다, 이러한 마귀 생각을 억눌러버리지요. 예를 들면 ‘어찌합니까’ 하는 노래 있지요. 임재범의 <고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할 때 지금 임재범은 감사합니까, 짜증내고 있어요? 짜증내고 있지요. 하나님과 따질 수는 없고 분통 나는데. 왜 짜증을 내지요? 그 여자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가사 내용이 그렇잖아요. ‘제발 그 여자만 허락해 달라 그럼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하나님과 계약 상대자로 간주하지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대체성 빠졌지요. 뭐가 빠졌어요? 대신하심이 없지요. 그래서 저는 감히 설교시간에 여러 번 했습니다만 대화할 때 중보자가 안 나오면 대화가 아니라고 했어요. 또 중보자, 중보자 해서 녹음기 틀어놓고 중보자 되는 게 아니고, 중보자라 하는 것은 뭐냐? 대체성과 대신하심이 현재 나의 존재를 통해서 터져 나온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은사가 내 몸을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발산되는 그러한 기능으로 작용한다 이 말입니다. 이 율법이 갖고 있던 이 현실은 어떠한 악마의 권세와 지배를 능가하는 거예요.
역대상 24장에 보면, 다윗 때입니다. “아론 자손의 반차가 이러하니라”(1절) 방금 설명 드렸기 때문에 여러분 이해하시지요. 레위 지파가 뭐냐? 율법은 뭐가 있다? 레위 지파로 하여금 다른 모든 열두 지파의 백성들을 일 대 일 대응으로 대신하지요. 그 레위 지파가 품고 있는 건 뭐냐? 다른 사람은 땅을 부동산을 소유하지만 레위 지파가 소유하고 있는 건 뭐예요? 언약궤죠. 언약궤는 미리 와 있는 죽음이죠. 죽어도 모르는 그 죽음을 레위 지파는 또는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 있으면서 진짜 죽음을 발견하는 거죠.
그것 무슨 죽음이다? 피. 인간의 피가 아니고 희생제물의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죽는다는 그 죽음이 우리를 살려내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 기쁜 소식 아니에요. 물 위를 걸었다? 기쁜 소식 아닙니다. 기쁜 소식은 ‘다 이루었다’가 되는 그 사건이 기쁜 소식이에요. 어디서 그런 말합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 기쁜 소식이 십자가로 국한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환경 자체가 악마가 지배하는 것, 분명합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것을 또 지배하는 것. 아이들 말타기 할 때 노래 부르면서 벽에 서있고 줄줄이 머리 박고 뒤에서 올라타고 하는데, 이미 올라갔는데 제일 뒤의 아이가 어떻게 합니까? 올라간 데다 더 덮치듯이 올라가버리죠.
십자가 바로 밑에 깔린 게 누구에요?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마귀. 마귀는 인간에게 네가 성공해야 돼, 네가 출세해야 돼, 종교적으로 네가 신앙생활 잘해야 돼. 그러면 세상의 복, 세상 영광이 너한테 돌아올 거야. 이걸 누가 압살해요? 십자가가 이걸 눌러버리는 거예요. 삼성 4강 올라간다 해놓고 초반에 두 번 다 지고, 할 때 누가 이걸 밟아버립니까? 복음이 눌러버려요.
아프리카 팀한테 4:0으로 홍명보, 이래서 월드컵 우승하겠나? 이게 국가대표가. 국가대표가 이 정도밖에 안 되냐. 앞으로 6월까지 염려와 걱정할 수밖에 없어요. 오스트리아한테 1:0으로 지고, 코트디부아르한테 4:0으로 지고. 이런 수치가. 세계축구협회 22위 팀이 이런 수치를 당하다니. 이런 염려를 누가 눌러버립니까?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그래서 그게 뭐 어떤데?’ 눌러버리지요. 도대체 네 소망이 월드컵 16강이야, 천국에 들어가는 거야? 어느 쪽이야? 묻는 거죠.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란 드론이 와서 아람코 탱크에 불이 났어요. 걱정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자칫하면 잘릴 수가 있겠다. 이란의 드론을 움직이는 분이 누굽니까? (주님) 주님 하지 마세요. 차이를 두세요. 마귀죠. 마귀를 누른 게 누구에요? 주님이죠. 마귀와 주님 사이에 뭐가 발생됐어요? 차이. 그 차이가 기쁜 소식이에요. 그게 바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감사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지켜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남편과 헤어져서 아들과 같이 사는데 이혼이 아닌 별거상태로 모호하게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못 살겠다고 나갔던 그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주민등록 도용해서 대출을 받아서 20억을 나한테 덤터기를 씌웠을 때 여러분들이 그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지금 나는 나쁜 짓했습니까? 내가 뭐 게을렀어요? 자식을 안 돌봤어요? 갑자기 뭐가 왔어요? 덤터기 썼지요.
그때 여러분 어떻게 처신하면 좋겠어요? 성경공부 해도 소용없다니까. 막상 응용문제 들어가면 소용없다니까요. 첫째, 그 일을 누가 일으켰어요? 마귀가 일으켰지요. 주님으로 뛰지 마세요. 차이. 마귀가 일으켰잖아요. 마귀가 일으킨 걸 어떻게 아는가? 내가 그런 20억이란 부채를 졌을 때에 내가 놀라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이유가 뭡니까? 갑자기 나의 존재, 가치, 존재 의미가 박살났잖아요. 내가 나쁜 짓해서 이렇게 박살나면 내가 납득을 해요.
내가 장모를 패서 죽였다든지 가방에 집어넣어서 대구 신천 잠수교 아래에서 발견되게 했다면, 그건 내가 잘못됐다고 하겠는데 나는 그런 나쁜 짓은 안 했는데 갑자기 갚을 길도 없는 20억 부채가 날아왔을 때 그것도 내가 일부러 도용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감당할 거예요? 감당합니까, 감당 못합니까? 못하지요. 이제 망했지요. 그게 바로 주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이에요. 너만 그렇게 떠났나, 나도 그렇게 떠났다.
대구 신천동, 칠성시장 잘 알거든요. 몇 년이나 살았다고. 다 아는데 가방이 떴어요. 캐리어가 떴는데 거기에 사위가 장모를 때려서 죽였단 말이죠. 그런데 그 장모는 왜 맞으면서 그 가정에 사느냐? 딸을 보호하러 갔다가 자기가 맞아 죽은 거예요. 그러면 왜 딸은 안 말렸는가? 딸이 자기 남편한테 맞아 죽을까봐 안 말린 거예요.
여기서 나쁜 사람은 누가 됩니까? 장모 때려죽인 사위가 나쁜 사람이 되지요. 그게 뭐냐? 시공간에서의 좌표에선 그 사람이 나빠요. 그러나 이 세상과 천국의 좌표에서는 거기서 누가 나쁩니까? 셋 다 싹 다 나빠요. 그전부터 작년 5월인가부터 때렸는데 참았어요. 왜 참았느냐? 내가 안 맞으면 딸이 맞을까 싶어서, 엄마가 그런 생각했어요.
그럼 엄마에게 존재 의미는 뭡니까? 내가 지켜줄 딸이 자기 존재 의미죠. 어쨌든 간에 딸이든 엄마든 존재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있었지요. 있는 게 문제잖아요. 존재 의미가. 자기 딸을 하나님 딸이라고 봅니까, 안 봅니까? 안 보지요. 내 딸이지요. 자아라는 게 이렇게 지독한 거예요. 지난 수요일 날 인간은 독을 마신 거예요. 못 고쳐요. 독은 마셨더라도 독 마신 나를 끝까지 사랑하리라, 이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는 좋다고 권력으로 압제하는 거예요. 그 권력을 자기 의미를 지닌 채 세상 권력을 뚫어낼 수가 없어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장로, 목사든 소용없어요. 내가 내 의미를 포기 못하는 한. 그런데 내가 내 의미를 포기하면 되잖아. 무슨 수로 포기합니까? 내가 소중한데 소중한 나를 포기하겠다는 그 생각도 누구 좋으라고 한 짓이에요? 나 좋으라고 한 짓이니까 포기 안 되잖아요.
‘나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고 하는 그 의도가 뭔데? 부족한 나를 괜찮은 나를 제조하기 위해서, 나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그런 낮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돼요.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나를 빼고 일을 벌인 것이 믿음이에요. 다만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20억 덤터기를 쓰든지 장모가 죽든지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주의 일을 훼방하는 내가 바로 훼방자라는 것을 발견케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의 주님이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요. 나는 나 말고 딴 분이 있다. 누구? 나를 대신하신 분이 계시다는.
역대상 24장에 보면 제사장들이 스물네 차례로 일주일간 바꿔서 교대근무해요. 스물네 구역으로 나눠서, 스물네 집단으로 나눠서. 안식일 아침에 출근하고 그다음 날 아침에 퇴근해요. 일이 엄청 힘들어요. 그렇다면 이걸 알지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제사장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뭘 지키는 거예요? 언약궤를 지킨다 했지요.
은혜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원칙입니다, 공식. 은혜를 반드시 죽음에서 나와요. 어떤 죽음? 특이한 죽음, 또는 특이한 분의 죽음에서 은혜가 나와요. 따라서 이 죽음을 지켜내지 아니 하면 뭐가 막힙니까? 은혜가 막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누가 지배한다? 마귀가 지배하지요. 그걸 구약 이스라엘의 특징상 마귀가 지배한다가 아니라 바알이 지배해요.
바알은 뭐냐 하면 언약이 없어요. 이방종교는 언약이 없고 대신 힘이 있어요. 아까 이란의 성직자가 47년간 국민들을 지배했다 했지요. 찍소리도 못하고 히잡이고 뭐고 뒤집어써야 돼요. 안 쓰면 사형이에요.
참 이란이 이렇게 무서운 나라냐, 하는데 대한민국은 안 무섭습니까? 대한민국은 누가 누구를 지배합니까?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헌법에 어디서 나와요? 국민에서 나오지요. 이게 사기잖아요.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요. 없어요. 추상적으로 만들어낸 거예요. 조악하게 조잡하게 만들어낸 거예요. 자기가 권력이 있음을 도리어 국민들에게 그걸 알려줌으로써 법으로 국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잘 살게 해줄게. 한 사람당 육십만 원 줄게. 전쟁기금이다.
전에 이재명 정부에서 이십오만 원 준 것 있지요. 여러분 받았지요. 우리교회에 어떤 집사님은 더러워서 안 받는다고 해서 안 받았어요. 그 왜 하나님이 주신 건데 왜 안 받아요? 그렇게 싸울 것 같으면 국회 나가서 싸우라고요. 국민들은 권력이란 거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일종의 권력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권력게임하려면 집안 일 다 치우고 국회에 나가든지 안 그러면 시의원하든지 정당에 가입하든지 해야 돼요. 그것 하는 자체가 취미생활이잖아요. 할 일 없는 사람이 있는 척하는 게 정당 활동 아닙니까.
자꾸 국민들은 결과만 얻으려고 해요. 근데 정치인들은 그걸 알잖아요. 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없는 권력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 거예요. 완전히 마귀 짓이죠. 이 세상 자체가 마귀 짓이에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쳤어요. ‘나는 그런 식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세상의 주권자들은, 마태복음 20장인가 나오지요. 세상의 주권자들은 임의로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고 있지, 라고 했어요.
20장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권세라 하는 것은 위에 있는 자가 아래쪽으로 하는 거예요. 이미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가 따로 있고요, 지배받는 자가 따로 있어요.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소설이에요, 소설. 이 땅에 민주주의는 없어요. 권력자가 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러면 성도한테는? 성도는 왕이 있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왕족이고 왕 제도 속에 있어요. 그리스도가 왕입니다. 우리의 왕이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에요. 사랑하는 백성이라 했잖아요. 제도가 있는데 왜 ‘하나님이여, 민주주의를 지켜주옵소서’ 이런 소리하고 있어요. 민주주의가 뭔데? 그런 건 허위인데.
민주주의라 하는 것은 한 사람당 표 한 장씩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각자 각자가 신이니까. 똑같은 신이니까 한 표씩 투표권을 준 거예요. 두 번 투표하지 말기, 이런 것.
아까 여호야다가 죽어서 어디 간다 했습니까? 왕의 묘실에 들어가죠. 왕이 바로 레위언약에 의해서 레위언약을 집대성해서 구성화시켜버리면 레위 지파가 안 되고 레위 지파를 관리하고 있는 제사장을 포함한 왕직, 이거 참 어려운데 이것 아셔야 돼요. 다윗 왕은 기존의 왕과 달라요. 다윗 왕은 계통이 어디냐? 멜기세덱의 계통입니다.
멜기세덱은 뭐라 했습니까? 멜기세덱은 ‘왕+제사장’ 이 계통에서 유다를 통해서 다윗 왕이 온 거예요. 그럼 레위 지파는 그냥 레위 지판만 속했지 왕 제도가 없어요. 레위 지파의 시기는 끝나고 유다 지파의 시기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에게 “내가 너에게 언약을 세우리니 너의 가정/가문은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사무엘하 7장 14절.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복잡하게 알았지만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대체성, 그다음에 뭡니까? 대신하심. 그걸 믿는 것이 믿음, 중보자니까. 우리의 왕이니까. 거기서 대신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빠지면서 차이, 우리의 중간에 차이가 등장하면서 왜 이 세상과 그리고 대체 현실 속에서 또는 천국 속에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그 틈새에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지식으로 말 못해. 성경지식 말고 그 왕 제도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시사, 경제, 정치, 전쟁, 외교, 그리고 에너지문제, 경제문제를 하나님께서 다루셔서 그걸 들쑤셔서 다시 다 뒤집어서 그 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주께선 보십니다. 그러면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뭐부터 시작합니까? 놀라는 것부터 시작하죠. 우짜노.
경상도 말로 ‘떨잖뿌다’ 이거는 경상도 사람 아니면 차이 나는, 표준말로 떨어뜨리는 것. 우리는 조금이라도 떨어질까 봐, 우리의 가치와 의미가. 벌벌 떨지요. 그런데 그것과 대신하심과 결합이 된다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이 사태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아까 던진 문제, 응용문제 하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자, 20억 날아왔어요. 뭐 보증을 잘못 섰든지 내 이름으로 됐다면 여러분 어떻게 해결하면 됩니까? (배 째라) 배 째라? ‘없다’하면 끝나는 거예요. ‘없다’라고 할 때 밝게 웃으면서 해야 돼요. 그 돈에 대해서 내가 없다. 그럼 법원은 어떻고, 경매 같은 것 나오겠지요.
경매가 들어오든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이미 이 죽음과 합류했기 때문에 이미 죽었다가 찌끄러기, 우리의 몸체가 아직도 이게 이 세상의 중력에 이끌려서 좌표가 이 세상 좌표에 우리의 자국이 남아있기 때문에 거기서 만약에 끊어내 준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소원처럼 이 땅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 주께서 하시는 그 목표에 우리는 쑥 빠져나갈 수가 있겠지요.
정답은 나왔는데 아아 어렵다, 어려워 정말. 그때 자식이, “엄마, 죽으면 안 돼. 난 어떻게 하고” 할 때 여러분들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눈물, 서사구조가 됩니다. 그 자식의 마음이나 주변의 어떤 환경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차이만 발설하며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우리가 아는 세상, 그것이 전부라 여기면서 무심코 하루하루를 세월을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고
㉯얼마나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지를 발각되게 해주시고
㉰그 가운데서 그렇게 조치하신 그것이 예수님의 죄 사함과 대신하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또한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