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말씀의 현수막

아빠와 함께 2026. 6. 7. 10:03

20260605a 울산강의-역대기하(22강) 25장 16절 : 말씀의 현수막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목소리를 살살하겠습니다. 나중에 높아가거든 높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역대하 25장 1절, “아마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렇게 돼 있지요. 지금 여기 아마샤에게 숫자로 된 연도가 그에게 주어져있습니다. 몇 년 동안 했다. 그러면 이 뜻은 이런 뜻이거든요. ‘있다는 것은 없음 앞에서 규정받는다.’ 규정받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정해진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지칭된다. 같은 말이죠. 규정된다. 정해진다. 지칭이 된다.

몇 년 살다가 몇 년에 죽는다, 이 말은 없음이 전제가 돼 있습니까, 있음이 전제가 돼 있는 거예요? 어느 쪽이 우선이고 어느 쪽이 우위입니까? 없는 쪽이에요, 있는 쪽이에요? 아마샤는 이십오 세에 왕이 되어서 이십구 년 동안 통치했다. 이것은 어떤 걸 전제로 하느냐 25년 전에도 아마샤는 없었고, 29년 이후에도 아마샤는 드디어 왕으로서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다는 큰 백지에 아마샤는 작은 그림을 하나, 그림보다도 점처럼 점 하나 찍듯이 탁 찍어졌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있다는 것을 없음 앞에서 뭐 한다? 규정받는다, 지칭된다. 너 기껏, ‘기껏’이란 부사가 들어가야 돼. 너는 요것밖에 안 되잖아, 라고 규정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에요. 괜한 질문 아닙니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나의 죽음이 현실입니까, 죽음이 현실입니까?’ 나만 죽어요? 아니지요. 다 죽지요. 그러면 죽음은 보편성을 갖게 됩니다. 죽음은 보편성, 두루두루 보편성을 갖는다. 이게 무슨 특징이냐 하면 진리의 특징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은 이야기해요. 진리가 아닌 건 뭐에요? 진리가 아닌 것은 누구만 바라볼 때? 자기만 생각할 때 이거는 백 프로 진리가 아니에요. 나만 생각할 때.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28장 7절, 누가 나오느냐 하면 사울 왕이 나와요. 사울 왕이 3절에서,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이렇게 돼 있지요.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쫓아냈습니다. 자기는 쫓아냈으니까 박수무당이란 어떤 특정 개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박수무당, 하여튼 신접한 자, 점치는 자, 무당이란 것에 대해서 주님의 신명기 말씀에 의해서 다 추방되었을 때에 사울 왕은 어떤 특정 개인이 미워서 추방한 게 아니고 뭐가 됐어요?

여호와 섬기는 땅에서 무당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무엇의 특징? 진리의 특징. 진리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보편성을 갖는 거죠. 나 네가 미워. 특별히 미워, 이거 없어요. 그건 보편성 아닙니다. 사적이죠. 사울 왕은 지금 진리를 행사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은 진리 편에서 통치해야 된다는 그 정도 상식은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28장 7절에,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자기는 보편적으로 진리를 행해서 이 땅에서 모든 신접한 여인을 몰아내라고 명령해놓고 막상 누구를 위해서? 자 괄호, 누구를 위하여 나와요. ( ) 여기에 뭐가 들어갔습니까? 사울, 나를 위해서 뭐를 찾으라?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렇게 되죠.

그러면 자기가 왕의 입장에서 신접한 여인은 여호와 땅에서는 율법에 의해서 용납되지 않는다고 다 없애놓고 갑자기 여기서 불쑥 누가 나왔습니까? ‘나’가 나왔지요.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래 된 거예요. 그러면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은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 아니지요. 뭐가 빠졌어요? 보편성 빠졌지요.

나의 동전 하나를 고요한 호수 안에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호수가 난리가 납니까, 아니면 고요합니까? 고요하지요. 그러면 나의 손수건을 잃어버렸어요. 호수가 유난떱니까? 고요하지요. 그러면 그 호수에 내 목숨 빠지면 유난떱니까, 고요합니까? 고요하지요. 호수가 진리입니까, 내가 진리입니까? 어느 게 진리에요? 호수가 진리지요. 대자연이 진리지요. 그럼 그 땅에서 뭐가 없어야 돼요? 나라는 걸 특정해서 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당이 필요해요, 안 해요? 안 하지요.

그러면 무당이란 것, 박수무당, 신접한 여인이 왜 자꾸 출몰합니까? 뭐를 노립니까? 바로 진리로 보편성 있는 현실을 찢어버리기 위해서. 누굴 위해서? 나 하나 병 낫기 위해서 찢어버리기 위해서 누굴 찾지요? 진리 찾다가 갑자기 지 몸 아프면 누굴 찾아요? 무당 찾지요. 무당 찾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크게 쓰겠어요. 이게 ‘오류’ 영어로 하면 error, 에러난 거예요.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은 진리로 알아요. 왜냐하면 성경은 뭘 갖고 있다? 보편적 진리다. 성경에 있는 것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 진리다. 그런데 인간이 이 성경을 봐요. 성경을 보는 취지는 보편적 진리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여기서 성경을 보면서 뭘 보느냐 하면 성경을 진리를 알아서 다시 어디로 갑니까? 진리를 알아서 이게 나에게 돌아오게 되면 뭐냐 하면 내가 호수에 동전 빠트려놓고 호수고 뭐고 간에 지가 난리쳐서 뛰어들어서 자기 동전 하나 건지면서 ‘나는 살았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이 해체되고 깨어집니까? 진리의 보편성이 학대받고 모욕 받지요. 무시당하지요. 십자가는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진리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생명을 보편적 진리성을 갖고 있고, 그 진리성이 바로 누구다? 나는, 여기 나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진리요, 길이고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다가가려면 다시 길과 진리, 생명이 나의 소유,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이게 차단돼야 되겠지요. 다시 돌아오면 안 돼요. 사울 왕처럼 나를 위해서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이건 질문 자체가 오류가 난 거예요, 오류가.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인간이든 성경을 볼 때 반드시 성경이 이 인간의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오류로 만들어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좀 참으세요. 오류된 존재로 드러나게 합니다. 왜? 진리는 오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진리는 진리를 위해서 존재하지 진리가 아닌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아요. 자칫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 왕 같은 그런 작자가 될 수 있으니까.

오류를 드러나게 해서 진리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뭐냐 하면, 이게 진짜 오늘 강의에 나오는 첫 번째 어려운 겁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다가갈 수가 없고 자꾸 나의 오류만 크게 드러난다. 마치 빛의 속도를 따라잡겠다고 빛의 속도를 막 따라가는 어떤 물체, 또는 인간, 우주선이 있다고 합시다. 가면 갈수록 빛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왜? 따라가면 갈수록 그만큼 질량이 무한대로 커지기 때문에.

여러분, 꿈속에서 그런 걸 많이 느꼈지요. 오랜만에 자기 청소년 시절에 봤던 첫사랑을 꿈속에서 우연히 봤을 때 ‘너, 걔 맞지’ 하고 따라잡는데 잡히질 않아요. 깨보면 식은땀을 흘리면서 조금만 했으면 따라잡았을 텐데…. 어떤 경우라도 주님도 살고 나도 살고 하는 그런 십자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십자가입니다. 그건 마귀가 지어낸 십자가에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란 말은 나는 다시 소환될 내가 없어져야 돼요. 없어져야 될 이유가 뭐냐? 나는 애초부터 오류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잘못 태어난 거예요. 태어나기를. 에헴, 하고 아닌 척하고 그동안 오래 살아왔어요. 특히 불신자들, 교회 안 가는 사람들 허세 떠는 걸 보세요. 자신의 근원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낌새를 못 채고 있어요. 성령을 받아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도하는 것,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 모든 것이 진리의 보편성이 아니고 독자적, 오직 나만을 챙기기 위해서 이런 행동이 자연적으로 그게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십계명이란 게 있어요. 그 십계명 조항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첫 번째 계명이 뭐냐? “너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말라.” 이게 뭔 뜻이겠어요? 너를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은 그걸 말을 바꿔보면 진짜 하나님은 너를 죽인다. 너의 죽음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보편성 속에 퐁당 너를 빠뜨릴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란 보편성, 진리 앞에서 빠지기 전에는 내가 죽는다고 겁내지만 빠지고 난 뒤에는 도로 건질 나가 없게 만들어요.

그 이야기를 왜 알아야 되느냐? 아마샤 본문이 아마샤가 왕의 자리에 앉을 때 나이 25세였고, 예루살렘에서 29년을 통치했다. 그런데 그 사람 어디 있느냐? 없지요. 그 사람 없어요. 잠깐 25+29=54, 이 세상에서 54년이란 짧은 기간 살다가 없어요.

죽을 때도 어떻게 죽느냐 하면 여기 25장 끝에 보니까 27, 28절. “아마샤가 돌이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저를 모반한고로 저가 라기스로 도망하였더니 모반한 무리가 사람을 라기스로 따라 보내어 저를 거기서 죽이게 하고 그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 열조와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더라” 갑자기 끊어져요, 목숨이. 이건 자기 아버지와 똑같아요.

역대하 24장 25절에, “요아스가 크게 상하매 적군이 버리고 간 후에 그 신복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인하여 모반하여 그 침상에서 쳐 죽인지라” 아버지도 갑자기 살해당했고, 아들된 아마샤도 갑자기 살해당했어요.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이게 성경에 나와야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성경은 전체가 진리라는 보편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호수에 빠진 아마샤, 호수에 빠진 요아스에서 죽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마샤는 왜 죽었지, 요아스는 왜 죽었지? ‘왜 죽었지’가 중요해요. 본인이 죽는 것은 문제 되질 않아요.

“목사님, 인간은 왜 태어났습니까?” 안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죽는 것은 기본이고 죽는 이유를 다양한 이유를 펼쳐놓기 위해서. 죽는다는 최종 결론, 죽는다는 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기 전에 각자 인간들이 나라는 것을 상정해서 아까 뭐라 했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설쳐댔던 그 모든 결과들이 모아져서 무엇이 풍덩풍덩 빠진다? 낙화암에 빠진 삼천궁녀들처럼. 백제의 무슨 왕입니까? 의자 왕 때 아닙니까.

그러면 백제의 의자 왕 할 때 방송국에서 인터뷰한다 합시다. “아가씨, 어떻게 궁녀 됐습니까?” “우리 동네에서 얼굴 예쁘다고 왕궁으로 스카우트되어 궁녀 됐습니다.” 지금 그 말을 할 때 어떤 궁녀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붙인다면, “내가 궁녀가 된들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 이야기를 아가씨가 하겠어요? 스물두 살 먹은 아가씨가 하겠습니까?

“나는 이제 여기서 월급 받아서 촌에서 농사짓는 우리 집 호강시켜야지” 이런 것 있잖아요. “나도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서 비록 왕의 후처지만 나중에 정권 잡아서 진짜 다시 태어난 신세계 되어 사약을 치워라!” 이런 식으로 해서, 장희빈 이야기입니다. 그런 출세욕, 권력욕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죽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마샤가 있고, 그 아버지 요아스가 있는 거고.

그다음에 누구 차례에요? 그다음에 우리 차례지요. 소환될 나가 없어야 되는데 자꾸 우리는 본성이 성경 보면서 그래서 나는 이런 의미입니까, 라는 이런 일방적 주장을 하는데 이거는 성경에 닿질 않았어요. 인간은 성경에 들어갈 없어요. 왜? 자기라는 것이 갈수록 점점 더 비중이 커져서 그래요, 나라는 게. 이십 년 믿고 예수님 믿고 나한테 돌아온 이익은 뭐냐? 그래도 기도하면 병 정도는 나아줘야 하나님 섬긴 보람이 있을 게 아니냐. 끝까지 성경은 진리가 아닌 것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질문을 이렇게 하게 되면 질문이 좀 더 명확하겠지요. 질문을 이걸로 바꿔보겠습니다. 쉬운 질문이에요. ①천국이 전체입니까, ②지옥이 전체입니까, ③나가 전체입니까?’ 일단은 나가 전체는 아니지요. 내가 울산 살면서 국민의 힘을 찍었는데 시장은 누가 됐어요? 민주당 사람이 됐잖아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전체가 아닌데 개뿔도 전체도 아닌 게 전체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이미 시건방지지요. 뭘 몰라요? 현실은 내가 외친다고 현실이 바뀌는 것이 이다, 아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현실에 비해서 너무 작아요. 너무나 작아요.

나는 솔로라는 프로, 그 후속으로 사랑은 계속된다는 프로가 있어요. 선보는 그 프로에서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전번에 26기 옥순이 이런 것 나오잖아요. 전에는 내가 잘 모르고 처음 출연해서 솔직한 내 모습을 다 못 보여줬는데 이번에 사랑은 계속된다는 나는 솔로에 나오면 나는 제대로 보여주면 내 남자 찾을 수 있다, 이래 나온 거예요. 네가 뭔데?

여러분, 결혼이라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 결정하는 거예요. 현실 자체가 결정하는 거예요. 현실이 결정해서 좋은 남자 만나는 것, 이런 일은 생긴 적이 없어요. 현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현실이 어떻게 해서 어떤 남자와 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한테 참 좋은 남편이었다, 이런 일은 있지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계속 현실은 뭘 포기 못해요? 자기 보편성, 진리를 포기 안 하지요. 우리는 고집이 세도 현실은 꿋꿋하게 현실대로 갑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꿋꿋하게 가요. 뭐라고?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의미 없다고. 그걸 계속해서 지적하는 거예요. 호수에 빠진 동전처럼 아무 의미 없어요. 어차피 세상은 죽게 돼 있으니까.

일단은 3번은 탈락이죠. 나는 전체가 아니지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여기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그다음에 가룟 유다 같은 성질이 나와요. 칵 죽어버릴까? 가룟 유다는 뭘 놓쳤어요? 내가 전체인 줄 알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아니하냐.

이렇게 되면 이건 뭐냐? 죽음이 되는 게 아니고 뭐가 돼요? 죽을 때까지 무슨 죽음에 매여 있어요? 나의 죽음에 매여 있는 거예요. 사느냐, 죽느냐 여기에 매여 있어요.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데, 앞에 ‘나’가 들어가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끝까지 오류가 뭐냐 하면 나한테 의미 없으면 의미 없는 거다. 나한테 이익이 없으면 이익이 없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①천국이 전체입니까, ②지옥이 전체입니까, ③내가 전체입니까? 할 때 내가 전체, 이건 아니지요. 그럼 남는 게 전체가 뭐예요? 천국은 전체입니까? 맞지요. 보편성이니까. 아까 했잖아요. 진리가 뭐예요? 보편성 가지면 무조건 이거는 옳은 이야기에요. 진리입니다. 천국은 전체지요. 지옥은 전체지요.

그럼 우리 할 일은 간단하네요. 나에 대해서는 진리가 아니니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있던 그 생각 자리에 뭘 집어넣으면 돼요? 천국이 무엇입니까, 지옥이 무엇입니까? 이것 알면 되잖아요. 참 쉽지요. 그러면 요아스가 죽었다. 죽을 만해서 죽지. 아마샤가 죽었다. 그것도 제 명 못 죽고 사람에 쳐 맞아 죽었다.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왜 아무것도 아닌 개인적 죽음을 성경책에다 기록했는가? 도대체 성경이란 전체, 그 펄럭이는 천 있잖아요. 이번에 선거할 때 현수막 많이 봤지요. 그 현수막 중에 하얀 백지로 된 현수막 보신 적 있어요? 없지요. 백지로 현수막 쓰면 안 돼요. 물론 좋아하는 사인엔 백지로 보낸 편지도 있어요.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는 게 있는데 현수막 할 때는 노골적이어야 하지 백지 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살리는 것은 1번입니다.’ 여러분 1번을 찍으세요. 그래야 나라를 살린다고 했다 이 말이죠. MBC에서 그걸 광고를 했어요. 현수막 같은 데는 2번을 찍으세요, 라고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 현수막을 봅시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정도 어려운 것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펄럭이는 현수막입니다. 이거는 천입니다. 천에 1번을 찍어야 나라가 산다, 라고 할 때 이 파란 잉크가 어디에 찍힌 거예요? 이 천에 찍힌 거죠. 그러면 바람이 불면 ‘1’ 글자, ‘번’ 글자, ‘을’ 글자도 같이 어떻게 됩니까? 같이 요동치겠지요. 이게 현실이에요.

나 이십 대에 누굴 만나서 이십 년 전에 혼인했다. 어떤 중년 여인이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뭐? 그게 뭔데? 그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인생은 주님의 현실에 펄럭였다.’ 이렇게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한다 합시다. 그 말은 맞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여인은 말하기를, ‘그 남자 만나서 내 인생 조졌다’ 이거는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건 아니지요. 그건 현실 아닙니다. ‘너 같은 여자 만나서 난 망했다’ 이건 현실입니까, 현실 아닙니까? 그건 오류지요. 왜? 여기 있는 글자 하나하나도 전체 천막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게 돼 있어요.

여기에 있는 하나의 질점, 또는 질량을 가진 사물로 봅시다. 질량, 무게를 가졌다 이 말이죠. 질점이다 할 때 이 펄럭이는 걸 물리학에선 뭐냐 하면 시공간이다. 시공간은 흔들려요. 시공간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시공간 위에서 같이 노니는 겁니다. 말씀의 바람에 펄럭이는 거예요. 털면 먼지가 막 일어나요. 먼지 하나가 요아스, 먼지 하나가 뭐냐? 아마샤.

결국 아마샤, 요아스 이야기를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언약이라는 천막,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천 위에 그들은 어떻게 놀았는가? 그들이 죽는 것, 모든 인간이 죽는 건 맞는데 왜 죽었는지, 죽는 이유의 다양성을 위해서 알리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역대하 성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입장이 마찬가지고요.

난타 공연할 때 그 북 위에 물을 뿌린다 해요. 그럼 북을 치면 물방울이 튀는 그걸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진리 위에서 사적으로 자기만 평생 생각하면서 내 인생 조졌다, 행복했다, 승진했다, 나름대로 착했다, 난 게을렀다, 부지런했다, 애 넷 키우느라 애먹었다 하는 이 모든 것이 물방울이 되어서 그 천 위와 떨어져있는 개별적 안목에서만 그게 무슨 의미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의 요동에 의해서 그 사람은 애 네 명을 다 키운 거예요. 지가 애써서 키운 게 아니고.

나는 어디에 취직했다. 나는 의대 가는 것 치우고 SK 갔고, 삼성 반도체 들어갔더니만 무려 8억을 얻었다. 보너스로. 나도 의사 진즉에 치우고 SK 취직할 걸, 하이닉스에 취직할 걸. 보통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지가 하고 싶어 했습니까? 자기 가정환경을 본인이 정했어요?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 동생이 애를 먹인다. 동생 내가 낳았습니까? 생겼잖아요. 엄마 동생 낳아줘, 이랬습니까?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뭐냐? 네가 이 땅에 잠깐 보이다가 죽음 안에서 네가 함몰돼야 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변에 동생도 있고 형님도 있고 오빠도 있고 하는 거예요. 결혼도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취직된 사람도 있고 안 한 사람도 있고 하는 거예요. 전부 다,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의 난타 공연입니다. 타다다다다~ 한쪽을 치니까 천국 올라가고, 한쪽을 치니까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누가 지옥 가고 있는 증거에요. 왜? 나는, 아까 뭐가 전체라 했어요? 뭐가 전체라 했습니까? 지옥. 천국, 지옥을 천국, 지옥 되게 하는 언약, 말씀만이 전체가 된다면 우리는 전체에 부분으로 붙어 있다가 어디로 간다? 천국 간다. 어떤 사람은 전체에 붙어 있다가 어디를 간다? 지옥 간다. 천국과 지옥 이야기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나를 축복한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저주한 자는 뭘 받는다? 저주받는다. 이 아브라함의 자손되신 예수님을 겨냥해서 그 아브라함과 예수님 사이에 지금 역대하는 달리고 있는 거예요. 기차가. 달리면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십자가 진리에 접근이 불가하지만 역사라는 기차에 실려서 십자에 들어오는 데 그 역사가 무슨 역사냐?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왜?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가 없는 데서 나왔고 따라서 그 이스라엘 역사는 인간이 꾸미는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없음 위에 난타 공연처럼 튀어나오는 인간이 왜 죽어야 마땅한지를 그 이유들로 계속 채워지면서 이어지는 역사, 그 역사의 끝에 누가 있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대인들의 의식이 있고 그들이 누굴 죽이는가? 하나님을 죽임으로써 인간 역사는 꽝이다. 전부 다 오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겁니다.

어떻게 인생 상담할 것 없지요. 나만 빠지니까 나만 오류가 있다고 인정하니까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할 일이 있을 수가 없지요. 여기서 누가 마태복음 6장 34절을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는 말은, 너는 하루치 목숨만 받았기 때문에 주제넘게 내일까지 산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일 살려주면 할 일이 뭐냐? 내일 걱정하면 되는 거예요. 걱정하라고 살려주니까. 오늘까지만 하란 말이에요.

그러면 하루는 뭐냐? 33절,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게 천국이 전체가 되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천국이 전체로 파악이 되는 사람, 다른 말로 지옥이 전체로 파악이 되는 사람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늘 깨닫고 고마워하는 사람이에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천국을 위해서 우리는 태어났고 지옥을 위해서 태어났지 절대로 나를 위해서는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천국도 알고 지옥도 아는 거예요. 천국, 지옥을 둘 다 아는 사람은 예수님님 십자가 달릴 때 똑같은 강도짓을 했는데 서로 갈라져서 십자가 달린 두 강도가 있지요. 그들의 갈 길을 달랐단 말이죠. 그 두 강도가 평생 동안 강도짓 한 것은 사적으로 옳았다, 나쁘다가 아니라 두 강도는 이쪽으로 가면 천국이에요, 또는 이쪽으로 가면 지옥입니다. 그 방향을 보여주는 화살표 역할 하라고 그 두 사람은 살아왔던 거예요.

그게 우리의 모델이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노노. 그 말하지 마세요. 지금 나의 존재는 저쪽 전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고, 저 사람은 저쪽 전체(지옥 전체), 이것이 지옥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에 아주 충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투표까지 해가면서, 목쉬도록 선거운동 해가면서 어느 쪽으로 간다?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 전체성, 보편성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여러분의 관심사가 뭐냐? ‘나는 어떻게 됩니까’가 아니라, 나를 끄집어내면 안 돼요. 이미 풍덩 빠진 나를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주여 천국이 무엇입니까, 지옥이 무엇입니까? 그게 주관심사가 되면 되지요.

어머니가 병들어서 요양병원에 갔는데 목사님 마지막 가는 길에 어떻게 하면 효도를 다 하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해선 안 되지요. 그게 행함이니까. 그런 행함을 생각하면 안 되지요. 펄럭이는 시공간에서 어머니가 해야 될 것은, 난타 공연에서 튀어야 될 것은 이렇게 이렇게 살다가 치며 걸려 죽는다. 이 역할을 하기 위해서 평소에 어머니가, 주여 치매 걸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

여기 오늘 본문에 역대하 25장 아마샤가 처음 왕 될 때 내가 왕 자리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맞아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왕이 됐습니까? 아니잖아요. 아니지요. 전체가 누굴 이겼다? 내 생각을 이긴 거예요. 전체가 누구 생각보다 더 셌다? 전체가 이겼고 나는 내 생각은 전체에 비해서 패배자지요. 개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살아온 거예요.

일부를 알면서 전체를 아는 것처럼 살았던 그거, 나는 천국 방향이냐, 지옥 방향이냐? 이것 하라고 태어났는데 우리는 방향을 내 쪽으로 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이 가정을 얼마나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그게 바로 역대상, 하에 나오는 왕들이 했던 행세를 똑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오류다, 라고 성경책에서 역대하에서 지적했는데 왜 지적을 하는가? 그 후에 나오는 우리도 역대하에 나오는 요아스나 아마샤 못지않게 이런 오류를 똑같이 범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25장 아마샤의 오류가 뭐냐? 이제는 편하게 볼 수가 있지요. 왜? 나는 내 생각 안 하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은 우상이니까 내 생각 안 하기. 다시 소환될 내가 없어지니까. 전체에 편입되기 때문에 따로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주께서 그런 것을 인정한 적이 없어요. 그럼 아마샤는 뭐했는가?

5절에, “아마샤가 유다 사람을 모으고 그 여러 족속을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되 유다와 베냐민을 함께 그리하고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여 창과 방패를 잡고 능히 전장에 나갈만한 자”가 얼마입니까? 삼십만 명. “또 은 일백 달란트로” 삼십만도 모자란다 싶어서 용병, 요새로는 북한군 십만을 은 일백 달란트, 은 삼천사백 킬로그램을 주고 용병 십만을 고용했습니다.

뭐하려고 하느냐, 왜 이런 짓을 하느냐? 인간이 하는 짓은 이런 짓이 돼요. 치매 걸린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남의 엄마 아니고 내 엄마니까. 자기 엄마는 특별하게 하나님이 봐줘야 된다는 그 고집. 그건 일종에 하나님에 대한 뭐예요? 반항이죠. 하나님이 하는 일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이 말이죠.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면 돼요? 가룟 유다처럼 죽여 버려야지. ‘하나님, 네가 뭔데 내 뜻대로 안 해줘.’ 이런 것. 그럼 하나님이 네가 뭔데, 하면 나의 의, 나 잘났거든요.

그쪽 그 모습 자체는 어느 방향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없는 곳으로 가죠. 예수님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요? 지옥이죠. 그래서 적어볼게요. ‘현대인들은 기를 쓰고 예수님 있는 곳에 안 가려고 한다.’ 기를 써요. 아주 발작을 합니다. 여러분 포장마차 술집에 가 보세요. 한 잔 받아라, 할 때 한 잔 받지 마시고 예수님 가신 곳에 갈 마음 있습니까, 하면 술병 날아오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나 있는 곳에 가고 싶지 예수님 있는 곳에 가기 싫어요. 아주 황소고집이에요. 마귀 고집이에요. 예수님 없는 곳에 우리끼리의 이바구, 우리끼리의 대화가 그렇게 재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대화에 예수님 끼어보세요. 대화가 갑자기 잠잠해버리죠. 예수님 좀 가 주세요. 우리 인간들에 끼지 마시고요. 자꾸 밀어내지요.

그러면 여기서 또 중요한 질문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저한테. 목사님,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국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천국이 궁금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천국 하다가 실패했다는 것은 그 정도는 상식으로 알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실패한 천국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집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또는 우리 교회가,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태도를 취하면 우리 교회가 천국이 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천국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순종하면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지요.

그런데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미 로마서 14장 17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그걸 기본으로 삼으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말씀이 굉장히 무서워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이다’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무엇이 아니요’라고 먼저 나오지요.

그 ‘아니요’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먹는 것도 아니고 마시는 것도 아니니까 먹는 것, 마시는 것 누가 합니까? 개미가 합니까, 코끼리가 해요, 누가 해요? 사람이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행동에 대해선 인정을 하지 않는 나라가 무슨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요.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고 열심히 했느냐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한 행동을 기억하고 그 행동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했는데 하느냐, 그런 것으로 운집한, 그런 것으로 조직화된 단체를 뭐라고 하지요? 크게 이야기해보세요. 그게 뭐죠? 안 들려요. 내가 한 행동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 집단을 뭐라 합니까? 교회지요. 그럼 하나님의 나라를 누가 방해하고 있어요? 교회잖아요.

주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다 했지요. 주인공이 누구에요? 주위에 누가 등장해야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주님이 등장해야지요. 그래서 주님이 등장하면 주님이 있잖아요. 주님의 있음. 우리의 있음은 우리가 오류로 있잖아요.

우리의 있음은 주님의 없음 앞에서 이름을 부여받아요. 무슨 이름을 묻느냐? 내가 있었던 이름 말고 없어진 그분의 이름, 없는 주의 이름을 부여받을 때 그것이 뭐냐? 그게 바로 천국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있는 자가 아니고 뭐다? 없는 자. 없는 자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도 뭡니까? 소멸돼야 돼요. 소멸된 그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주께서 하셔서 공짜로 주신 것 그게 뭐냐? 평강이고 의고 기쁨이죠. 감사지요.

왜 기쁨과 감사, 희락이 있느냐 하면 내가 의미 없어지니까 내 걱정, 내 행동에 남이 하나님이 어떻게 알아주느냐,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자동적으로 뭐예요? 평화고 기쁨이고 감사가 되는 거예요. 그게 감사입니다. 감사 아시겠지요. 내가 있는 척 안 하면 그게 감사에요. 내가 있는 척을 안 하니까 내 행동도 어떻게 나쁜 짓했느냐, 좋은 짓했느냐 자체도 의미 없어요. 인간에 나오는 행동은 없어져야 된다, 라는 그러한 사례를 바로 역대하 25장에서는 아마샤 왕을 통해서 그 예시를 해주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20260605b 울산강의-역대기하(22강) 25장 16절 : 말씀의 현수막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은 사물이 돼요. 사물이란 말은 뭐냐 하면 그냥 땅이라는 전체의 일부에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옛날 너한테 준 아담으로 끝났다. 다른 이름은 부여받은 적이 없다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아담이 자식을 낳고 낳는다 할지라도 자식을 낳는 족족 흙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니까 도리어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 자기 고유의 영역, 고유의 현실을 따로 챙길 그러한 권리는 애초부터 인간에겐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다윗 같은 경우에, 모세 같은 경우에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물에 죽었는데 물에서 건져냄을 당했지요. 이거는 전체 이스라엘도 모세의 전철을 밟아서 물을 건너온 게 아니고요 물에 수장되어 온 자들이 이스라엘이에요. 홍해가 어디 얇은 갈대바다 아닙니다. 완전히 벽이 되었어요. 벽이 됐다는 말은 하나님이 강하게 어필한 거예요. 너희 올 수 없지? 어떤 인간도 이 깊은 물속을 건널 수 없는 게 분명하지, 라고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홍해 건너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현실의 전체는 뭡니까? 우리들은 이미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현실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았다는 뭐냐? 이거는 다시 우리가 욕심낼 수 있는 현실은 아니고 다른 목표 때문에 하나님의 다른 의미 때문에 죽었던 자를 도로 살려줘서 그 목표에 맞추도록 활용시키기 위해서 건져낸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 그중에 하나가 여기 아마샤 왕이거든요. 그래서 충실하게 착실하게 내가 죽었던 자였다는 것을 일평생 제대로 보여줘야 돼요. 그게 역대하 17장 14~18절 보게 되면 여호사밧 이야기 나와요. 그때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군대를 얼마나 했느냐 하면, 14절에 “큰 용사 삼십만을 거느렸고” 그다음에 “이십팔만을 거느렸고”(15절), 그다음에 “이십만을 거느렸고”(16절), 토탈 전체가 얼마냐 하면 백십육만 명, 어느 시대에? 여호사밧 시대에.

그러니까 후배 되는 아마샤 왕이 오십에서 육십 년 전 이야기거든요. 우리 선왕 중에 여호사밧이 있는데 군사가 몇 명? 백십육만 명이 있지요. 그러면 아마샤 머리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백십육만 명이나 되니까 주변의 어떤 나라든 감히 유다나라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아마샤 시대에 군사가 얼마였습니까? 사분의 일도 안 돼요. 기껏 삼십만. 그러니까 이걸 뭐로 보충하느냐? 은 일천 달란트로 해서 쪽수가 모자라는 것을 십만 보충해서 사십만을 만들어놓고 그것으로 옛날 여호사밧, 우리의 선왕들이 놀라운 업적과 공적으로 해서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얻어서, 한 마디로 권력이 그만큼 강화됐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투표하잖아요. 투표에 의해서 권력 인수인계가 제대로 한 곳에 집중했다, 그걸로 정치가들은 이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 자리가 굳건하다? 나의 왕 자리는 굳건하게 된다.

여호사밧이 백십육만 된 것은 쪽수가 많아서 전쟁에 승리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특히 역대하 18장 1절에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하니까 그게 탐이 나겠지요. 예를 들면 우리의 선왕이 군사가 삼만 명이요, 맨날 주변에 치이고 눌리고 포로 잡혀가고 조공 바치고 세금 바친다고 했는데 만약에 아마샤가 군사가 삼십만 돼 보세요. 그럼 백성들에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날 왕으로 인정해줬기 때문에 보호해줬기 때문에 우리 선배는 삼만인데 난 삼십만 되니까 백성들이여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인 줄 알고 끽소리하지 말고 내 권력에 복종하세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겠지요.

대구에 김부겸 이기고, 부산 북구에 하정우 이기고, 경상북도, 경상남도 다 이겨보세요. 이재명 대통령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나라에서 날 싫어하는 사람 그렇게 많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제는 확실히 나를 밀어주는구나, 이렇게 생각 안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자리에 앉아보세요. 그래 생각 안하겠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왕의 자리가 뭐냐 하면 왜 왕은 그 죄로 죽어야만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죽는 건 맞아요. 전쟁 중에 죽는 건 맞는데 그렇게 죽는 것 말고 왕이 죽는다는 의미는 뭐냐? 이스라엘 자체가 왜 하늘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가 아닌가를 왕의 자리에서 보여주기 위해서 뽑힌 자들의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그래서 놀려고 군사 모집합니까? 뭐해야 됩니까?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왕이라고. 그러려면 어디 나가요? 전쟁하죠. 아마샤는 누구와 전쟁하느냐 하면 에돔과 전쟁해요. 에돔 이 장소가 세일이에요. 세일 산에 거하는 에돔과 전쟁을 했어요. 이겼을까요, 졌을까요? 이겼습니다.

이겼으니까 문제가 큰 거예요. 점점 문제가 극단을 향하여 망하는 쪽으로 점점 가는 거예요. 전쟁에서 왕의 자리로 이겼으니까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앞으론 너 팍팍 도와줄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는 증거로 충족된다고 생각해버렸어요. 충족되니까 누구의 말을 안 듣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나오는 그 잔소리, 그 지시를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나아가 가로되 저 백성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하며” 이게 세일 산에 에돔이 있는 거기에서 우상을 갖고 왔어요. 14절에 “아마샤가 에돔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우상들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여기서 성경을 보는 모든 이들은 깊은 의문을 합니다. 왜 정복된 나라의 신을 없애지 않고 섬기는가? 여러분 이게 의문점입니까, 안 그러면 당연한 겁니까? 정복한 나라의 신을 섬기는 게 당연한 거예요, 안 그러면 이상한 겁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당연하지요.

여러분들 청소년 때 17:1로 싸울 때 이겼잖아요. 만약에 그때 싸운 사람을 나중에 만났을 때 어떻습니까? 반갑지요. “너 나한테 당했잖아.” 한 번 일진은 영원한 일진이거든요. “너 쪼다였잖아. 나한테 많이 맞았잖아. 이건 뭐 코찔찔이가 많이 어른 됐데이.” 그 우월감, 한 번 게임에서 끝났으니까 그 우월감은 지속되지요. 계속 가는 거예요. 나한테 패배한 나라의 신을 내가 간직함으로써 나는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의 유일하게 존재할 가치를 지닌 합당한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부부가 둘이 살다가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졌습니다. 헤어질 때에 다시 우리는 보지 말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안 보면 잊어집니까? 아니면 더 신경 쓰여요? 더 신경 쓰여요. 네가 날 버리고 잘 사나 보자, 이래 나오지요. 그러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헤어진 자기 여자가 어떻게 망하는지를 그걸 찾아보기를 원하지요. 만약에 헤어졌는데 그 여자가 망했다. 헤어지고 다른 남자 만났는데 그 사람이 노름꾼이어서 완전 폭삭 망했을 때 상대적으로 뭘 느낍니까? 나는 안 망했으니까 어떻게 돼요? 우쭐댈 수밖에, 의로운 거죠.

그 망한 여자가 이제 와서 후회해서 문 두드리면서 다시 합치자고 나올 때 나온 노래가 문밖의 여자에요. 앞에 기타 소리 쭉 나오지요. 거기서 나온 유명한 가사가, 한 번 떠난 사랑은 이제는 내 마음에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새벽 기도해봐야 우리 인간의 마음은 마귀의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 위주에요. 주께선 우리가 접근하는 성경해석, 우리가 접근하는 구원 안 받습니다.

이스라엘에 훌륭한 왕이 있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상하게 의도적으로 꼭 끝이 안 좋게 끝나요. 히스기야가 그랬지요. 요시아 왕이 얼마나 훌륭했습니까. 나중에 나오는 요시아 왕. 그런데 요시아 왕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 말을 안 들어요. 항상 뭔가 저 사람 같으면 진짜 영원한 다윗의 나라, 하나님 나라답다, 이스라엘 나라답다 하다가 쭈르르 다 왔는데 미끄러져요. 역대하 구약이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애초부터 칭찬받던 사람도 있어요. 욥 같은 경우에. 중간에 어떻게 됩니까? 욥이라고 칭찬했는데 실망스런 행동을 보여주지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뽑았는데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떻게 됩니까? 어떤 갭만 남겼어요. 떠나고 난 뒤에 건널 수 없는 계곡만 남긴다고요.

이게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의 굴곡이에요. 말씀이 자아내는 시공간의 굴곡, 곡률. 인간은 올라갔다/내려갔다, 내려갔다/올라갔다 이것이 이 굴곡이 완전한 완성, 그것도 정육면체로 완성하는 이 구조는 계시록 21장 22장에 나옵니다. 계시록 21, 22장의 천국의 구조가 뭐냐 하면 정육면체에요. 가로 세로 12라는 치수로 구성된 정육면체에요. 천국의 시공간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에요. 곽이 꽉 짜였어요.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숫자 12로 어린양의 이름이 있는 자만 다 들어가요. 그게 12x12, 완전한 1000, 144.000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의 천국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행함으로 접근이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성령이 주는 일방적으로 그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거기에 대한 고마움과 기쁨과 희락과 즐거움이죠. 평온함과. 평온함이란 안정성,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는 거예요. 내가 뭘 행했다가 아니라 누구 곽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어떤 상자 안에 들어있다는 안정성, 예수 안이라는 안정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신약이 있기 때문에 구약은 곽이 삼차적이 아니고 일차적인 시간이 흐르는 기차 철로 같은 역사가 구약 역사입니다.

그래서 세일 산에 가서 이겼어요. 그때가 좋았지요. 이길 때에 나름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면 25장 7절에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로 왕과 함께 가게 마옵소서” 이스라엘 군대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그때 금송아지 우상 섬겼어요. 역대하 13장에 보면 나와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자가 성전이 있는 유다나라의 전쟁에 같이 합류해서 전쟁을 해선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왕이 이미 돈 줬는데 어떻게 하냐? 포기하세요. 돈 포기하시고 그들 다 돌려보내세요, 라고 했다 이 말이죠. 이게 9절입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선지자 말대로 순종해서 십만 명 빼니까 삼십만으로 했던 거예요.

처음부터 삼십만이 아니고 십만 명 더 보탰다가 뺐다는 말은 지금 이 아마샤 왕이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전쟁을 어떻게 하면 승리할까에 관심이 있지요. 내가 어떤 오류가 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나를 위해서 전쟁한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나의 세계를 내 위주의 정체성을 내가 만들고자 하는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본인이 몰라요.

어쨌든 갔는데 그 나간 십만 명이 곱게 갔습니까? 안 싸워도 되네. 고맙습니다. 그러면 돈은 챙기고 끝나는 게 아니고 가면서 뭐했느냐 하면, 13절에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유다 성읍을” 남쪽 나라죠. “엄습하고 사람 삼천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더라” 참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어떤 계획을 하고 실행할 때 오류가 있다 했잖아요.

그런데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기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그러지 말라 해서 선지자 말 듣고 그걸 취소시키니까 취소로 끝나는 게 아니고 함께 했던 그 용병들이 유대나라 사람들을 무려 삼천 명을 죽였을 때에 아마샤는 뭘 알아야 돼요? 내가 처음에 계획했던 것, 30만+10만, 40만으로 했던 자체가 이러한 오류를 이런 재앙을 받아도 마땅한 짓을 했구나, 라는 걸 자기가 뒤늦게라도 알아야 되지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처음에 용병 구할 때 선지자가 나서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왜 선지자를 그때 안 보냅니까? 안 보내는 이유가 뭡니까? 25장 15절과 16절, 특히 16절 끝에,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인간으로서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시킨다. 골을 갭을 만들어요.

결국은 아마샤가 용병 구하고 으스대는 것이 아마샤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그런 성질을 부리도록 배후에 누가 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시켰지요. 그 하나님이 전체에요. 잘못하기 전에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잘못을 하게 만들어놓고 그 뒤에 찾아와서 너 왜 그랬느냐고 따짐으로서 인간은 결코 전체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선악과 따먹기 전에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지만 그거는 인간이 죽음이란 걸 경험해본 적도 없어요. 인간이 경험한 적도 없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이거는 조건 거나 마나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이 못 따먹게 할 거면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할 게 아니고 아예 먹기 싫은 나무가 돼야 돼요.

엄마가 갓난애 젖 뗄 때 네가 커서 엄마 젖이 안 나오니까 먹지 마라. 그러면 엄마가 아프다. 이렇게 아이한테 이야기해도 아이는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아이가 말을 알아듣는 건 자아가 형성될 때 알아듣는 겁니다. 애는 충동 덩어리기 때문에 그 충동을 조정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 나를 대신하는 어른을 만들어놓고 그 어른을 통해서 내 충동을 어른한테 지시에 지배받는 식으로 충동을 커버하는 것이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거예요. 좀 복잡하지요.

충동대로 해버리면 정신질환자 돼요. 정신병자 된다고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하고 돌아다니는 이런 거죠. 내가 대통령이다, 돌아다니는 정신병자죠. 그런데 그러니까 어른이 와서 네가 그런 짓하면 너는 현실과 안 맞아, 라고 나무라면 나무라는 그 사람이 어른이 돼요. 또 어른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그때부터는 뭐냐? 나는 나폴레옹이다, 하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모든 게 사물과 일치된다는 뜻이에요.

세월호 애들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살아난 학생들이 있었지요. 그 학생이 정신질환을 갖고 있었어요. 자기가 세월호 어떤 행사에 봉사하겠다는 거예요. 가선 안 되죠. 왜? 걔는 현실을 볼 때 모든 것을 자신이 그 현실과 일치되기 때문에. 만약에 세월호 항구에 가면 지가 자기 친구 구하겠다고 이미 세월이 지났는데 거기 들어가서 내 친구 어디 있는지, 물에 빠져 죽을 거예요. 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사물과 자기를 분간을 못해요.

그때 누가 가지 말라고 할 때 걔는 그 말을 듣고 진짜 사물 됨으로 해서 지가 거기서 중간에 누가 낍니까? 어른이 끼어서 커버할 수 있지요. 그 어른이 뭐냐? 그 어른이 바로 환상입니다. 인간은 환상이 없으면 전부 다 충동 그 자체가 돼요. 그 환상을 집어넣는 걸 뭐냐? 그걸 교육이라 합니다. 양육. “이게 짐승도 아니고 뭐야. 사람답게 걸어야지.” 이게 뭡니까? 누구의 지시와 명령이에요.

성경적으로 누가 지시하고 명령할까요? 누가 어른이 될까요? 마귀지요. 네가 그렇게 해야 착한 사람 된다. 자기 의가 있으니까. 근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너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정녕 죽으리라. 너는 이미 죽음이란 전체를 위해서 태어났다. 이제는 네가 살아야 될 이유는 뭐냐? 안 죽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도대체 어떤 짓거리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평생에 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정답은 뭐냐? 모든 것이 하나님이든 뭐든 간에 누구를 위해서 산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다. 그게 바로 마귀, 가룟 유다잖아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넘긴 이유가 예수님한테 실망해서 그래요. 실망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전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뜻이죠.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 손해가 된다? 이익이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최종적으로 모든 의미가 소환돼요? 나한테 소환되지요. 그런데 기대했던 예수님이 맥없이 잡혔으니까 아무 힘이 없으니까 그 실망을 복수로 예수님께 되갚아준 거죠. 이걸 누가 알고 있어요? 이미 예수님이 그걸 알고 있어요. 왜? 개인은 전체가 아니고 누가 전체에요?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니까. 예수님이 전체요, 전체요 전체니까.

선악과 따먹을 때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럽기까지 했어요. 이거는 못 견뎌요. 먹고 싶어서. 그런데 뒤에 뭐가 붙습니까? 먹고 싶지 탐나지 그런데 뭐하라? 먹지 마라. 이거는 인간 보고 위반하라는 소리와 똑같아요. 그런데 그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 있지 그걸 따먹는 날에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이야기는 그거는 따먹고 난 뒤에 숨겨놓은 또 다른 미리 알려준 게 아니고 그전에 몰랐던 주님만 알고 있던 새로운 조항이 등장한 게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뭘 못 따먹는다?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

따라서 거기서 나온 결론은 정녕 죽음이란 뭐냐? 목숨 끊어지는 것? 아니지요. 그럼 뭐냐? 생명이 없는 것을 죽음이라는 규정이 나오는 거예요. 전체가 나를 뭐한다? 규정하는 거예요. 말씀이 나를 규정하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다윗의 왕들을 규정하는 겁니다. 이미 아마샤를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을 해놓으시고 그다음에 아마샤로 하여금 세일 산을 엄습해서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게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까 그 이유에 대해서 아마샤에게 우상은 자기의 전리품이고 훈장 같은 거예요. 우상에 대해서 없애고 기억지도 말아야 되는데, 왜? 하나님 쪽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과 우상이 전쟁한 게 아니고 내가 우상과 전쟁해서 우상을 이겼으니까 자기의 전리품으로 자기가 간직하는 거예요. 승리하지 않았다면 우상 섬길 기회도 없었지요.

그래서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사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꼭 뒤늦게 보내요. “나아가 가로되 저 백성의 신들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 이 말 듣고 왕이 뭐라고 하겠어요? “이겼잖아. 이겼으면 됐잖아.” 이런 거예요.

그러면 선지가가 하나님 쪽에서 뭐라 하냐면, “뭘 이겼는데?” “내가 세일 산에 거주민들 이겼잖아요.” 하나님이 뭐라 하느냐? “전쟁 하나 더 남아있는데….” “그건 몰랐지요.” 그러니까 아마샤는 전체가 아닌 거예요.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 순간 어디서 다른 일이 터져버린 거예요.

옛날에 국민학교에서 중학교 들어갈 때 시험 쳐서 들어가는 일류 중학교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보다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옛날입니다. 전화기 들여놓는 거예요. 전화번호 따는 것. 그때는 전화설비가 제한됐기 때문에 돈을 줘도 전화기를 구할 수 없었어요. 번호가 있어야 되는데 당첨돼야 되거든요. 전화기가 있어야 장사가 잘 되는데 전화기가 없다. 근데 전화기 당첨이 되었어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온 집안이 잔치에요. 이건 뭐 몇 천 대 일이니까. 아파트 당첨보다 더 세니까. 그런데 아들은 중학교 떨어졌어요.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잘 될 때도 좀 자중을 해요. 자중하면 나쁜 일 안 터집니까? 그 자중한 게 이게 방향이 어디로 가는 거다? 지옥 가는 거예요. 자중하면 안 돼요. 왜? 자중하는 것도 누구 중심입니까? 내 중심이니까,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선거하기 한 달 전에 보니까 전체가 파랗게 될 것 같아요. 그때 소속 국회의원들과 당원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우리가 이럴수록 자중해야 된다고. 뭐 서울시장이고 뭐고 다 퍼렇게 된다니까 이럴수록 자중해야 됩니다, 라고.

충주시장 선거에서 개표가 99% 다 끝났어요. 그때 민주당 후보가 꽃다발 받고 목에 걸고 해서 당선된 것은 여러분 덕분입니다, 라고 했는데 1% 나머지 개표하니까 124표 차로 국민의 힘이 충주시장 되고 말았어요. 좀 자중을 하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자중한다고 그 사람이 당선됐습니까, 안 됐습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주께서 떨어뜨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뒤의 말은 내기 지어낸 이야기인데 떨어지고 난 뒤에 충주시장이 절에 다니다가 이제부터 주님의 성령을 받아서 그걸 알았다. 그럼 어때요? 그래 되면 뭐예요? 로마서 8장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뭘 이룬다?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했는데 그래서 교회 다녔는데 그러다 교회 일이 있어서 나 예수 안 믿는다 하면 그럼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이 현수막이 펄럭이는 이유는 펄럭일 때마다 위로 펄럭이면 천국이라면, 펄럭일 때마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지옥이라면 주께선 철저하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털어내는 그 작업을 말씀의 시공간으로 굴곡으로 지금도 하고 있어요. 괜한 걱정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 걱정한다는 말은 내가 살아 있다는 뜻인데 그건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은 천 달란트 손해 보지 않았는가? 역대하 27장 5절에 보면 손해 안 봤어요. 그다음 후배 왕이 돌려받았어요.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그것도 그야말로 매년 얻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야말로 춤을 춰요. 다윗언약 위에서. 다윗언약이 언약되기 위해서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로 다 드러나요. 십자가로 드러나면서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본인이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이 주어진다, 끝.

신약의 성경을 위해서 그전에 이런 진리를 위해서 그동안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오해와 숱한 오류와 에러들을 역사 속에서 벌여왔는가를 죽 제시하는 거예요. 그들의 오류도 가지각색이에요. 가지각색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많아요. 요아스도 등장해야 되고 요시아도 히스기야도 등장해야 되고 다 왔다고 했는데 기도해서 십오 년 더 살았던 히스기야는 십오 년 살아서 뭐했습니까? 나라 곳간 다 날렸고 나라 재산 다 날아갔어요.

인간들의 발상이 전체에 미치지 못한 우둔한 발상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가 믿습니다, 하는 의미가 아니고 나는 믿어서는 안 되는군요. 그걸 흔쾌히 기쁘게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 어떤 일이 되게 되면 그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경우가 발생된 거예요. 우리는 그 위에 물결 위에 춤추고 있고요.

망대가 넘어져 18명이 죽었다. 보통 경우에 뭡니까? 이게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죠. 보통 재수 없다 하잖아요. 재수 없는 게 아니고 살아 있는 네가 쟤보다 더 재수 없어. 걔들 죽는 것은 자기가 한 오류를 다하고 제대한 거예요. 너는 자기 잘못이 덜 나와서 계속 군대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서 힘든 고통 많은 세상에서 아직 군대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취사병으로 햄버거 만들어낸다고 할머니 솜씨, 그런 드라마가 또 있어요.

<취사병 전설이 되다> 그 드라마 보면서 취사병으로서 칭찬 받을래요, 제대할래요? 남자들 이야기해보세요. 제대할랍니까, 취사병으로 칭찬 받을래요? 제대해야지요. 이 사람들 지금 복역 중에 인간에서 끄집어내는 모든 죄 같은 것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가가 그런 이야기하거든요. 선지자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선지자를 항상 후발주자로 보내줘요. 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은, 그 말씀을 인간이 지킨다, 안 지킨다? 결국은 안 지킵니다. 왜? 죽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안 지켜요. 인간은 말씀에 접근 가능하다? 가능 안 해요. 말씀 쪽에서 십자가가 그걸 우리한테 알려주는 겁니다.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너는 구원되지 못했어. 근거요? 근거는 바로 널 대신하신 분이 죽었잖아. 너 대신 저주받았잖아. 그래서 너는 저주가 없는 거야. 너는 지금 곧장 죽으면 천국 가는 이유가, 주님께서 대신 죽었어. 이게 너무나 전체적인 이야기죠. 간편하고 전체적인 이야기에요.

여기 아마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개입합니까? 선지자가 개입하지요. 선지자가 개입하니까 아마샤 왕이, “아이고 하늘에서 오셨습니까? 하나님 말씀 전하십니까? 존경합니다.”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멸시했어요? 경고를 안 들었지요. 여러분들이 아는 친척이나 아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여러분 마음가짐을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으로 전하세요.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이 뭐냐? 내가 말을 해봐야 너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을 이제 내가 할게. 네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할 건데 너 안 믿을 거야. 네가 안 믿을 줄 알고 내가 전한다, 하면서 복음을 전해보세요. 여러분들의 심적인 상처 좀 덜할 겁니다. 안 들을 줄 알고 전하니까. 괜히 엉뚱한 기대 때문에 낙담하지 마세요. 그럼 시험 듭니다.

그러면 점심 사주고 잘해주고 뭐 했는데 막상 복음은 안 듣더라. 그러면 나만 손해가 아니냐.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이 복음 알고 돌아가셔야 돼요. 평생 믿은 것 다 사기입니다. 엉터리입니다, 라고 할 때 기대했어요. 기대 안 했어요? 은근히 회개하고 돌아올 줄 놀라운 사태 기대했지요. 그 기대한 게 잘못이지요.

그러면 전도는 어떻게 하느냐? 전도는 우리가 어떤 기대 때문에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 타이밍을 줘요. 그래서 내 말 하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성령께서 말하는 대로 하면 우리는 털어내면 돼요. 주께서 이야기하는 대로 털어내면 되지 우리가 애가 타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결과는 뭐 맨날 전화해서 내 말 들으니 어떠냐 하면 누가 힘드냐 하면 우리가 시험 든다니까. 나, 이제 전도 안 할래. 전도하고 안 하고 간에 전도하는 그 타이밍은 주님이 정하는 거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하게 하셨구나.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하는 말이 그 때에 거기 들어가요.

그다음에 어떤 일을 했는가? 세일 왕을 쳤잖아요. 삼십만으로. 으스댈 만 하죠. 그런데 북쪽에서 기가 안 죽는 거예요. 여기 18절에 보면,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레바논 가시나무, 그러니까 쓸모도 없는 것이 감히 쓸모 있는 백향목을 네가 건드려?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네 궁에나 편히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19절)

20절 보세요.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그다음에 다 같이 시작,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어느 순간도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은 순간은 없습니다. 내가 전도한다?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내 말을 듣는다? 아닙니다. 주께서 듣게 하셨어요. 그러면 왜 전도케 합니까? 우리가 죽기 전에 얼마나 우쭐대고 교만한지 아마샤 못지않은 제2의 아마샤라는 것을 우리로 느끼게 하는 거예요. 말씀의 아마샤가 실제로 살아서 지금 울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아마샤로 이게 변신되게 만드는 거예요.

이게 말씀의 위력이고 능력입니다. 내가 아마샤가 될 때 우리에게는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지요. 내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 안 받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천국 안에 넣었다는 것을 새삼 또 느끼고, 또 깨닫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린 일 다 한 겁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다음에 웃시야 나옵니다. 그러니까 25절에서는 우리가 뭐 됐다?

(동영상 중단)

계속해봅시다. 한 5분 남았으니까 5분 동안 해봅시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 이 모든 것은 누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20절 보세요.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저희가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붙이려 하심이더라” 결국 하나님의 전체적인 법칙은 딱 하나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전체는 어떤 경우라도 인간에게 양보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양보한 적이 없지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섬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필히 백 프로 뭡니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벌어져야 마땅하지요.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야 마땅하고,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섬기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마땅하지요. 당연하고 마땅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여기서 결국은 나의 죽음이 아니고 전체 죽음에 이들은 퐁당퐁당 모든 인간들은 아담에 속한 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호수에 들어가야 되지요. 그다음에 그들의 구원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의 예정되고 선택된 자에게 이 말씀에 등장했던 인간들이 어떻게 죽음에서 빠져나온 것을 통해서 이 나오는 내용이 어디에 다 흡수되느냐?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십자가에 성경 전체가 구약 전체가 흡수 통합되겠지요.

통합되니까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는 말은 역대하 25장에 나오는 아마샤가 죽는 것은, ‘지극히 하나님의 원칙에 합당합니다’를 믿는 거란 말과 동일한 말이 되는 거예요. 그러한 안목, 그러한 식으로 성경을 봤다는 것은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목으로 이 구약 역대하 25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그러한 시선을 갖게 된 겁니다.

또 감사와 고마워할 수밖에 없어요. 이거는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고 그런 불가능한 인간을 사용하시는 주님의 위대함이 우리에게 계속 나온다는 것, 나는 죄인이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깔끔하게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을 탄복하면서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대하는 우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이제는 성경을 듣고 어디에 나갑니까? 세상에 나가지요.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무슨 시선으로 봐요? 너 아마샤지, 너 요아스지, 너 히스기야지, 나 다윗이지, 너는 사울이지, 너는 욥이지, 너는 사도 바울이지, 라고 볼 수 있는 말씀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나라인 거예요.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가 공들여 애써서 계획 잡고 마음 단단히 잡고 일으킨 일인 줄 알았는데 어느 것 하나 주의 일이 아닌 게 하나도 없고 그 과정 속에서 또다시 우리가 강도인 것을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들춰내시는 이 안목을 허락해주시니 이것조차 성령 안에 주님이 주시는 복이요 사랑이고 감사거리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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