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떠오른 도끼

아빠와 함께 2026. 4. 30. 08:58

떠오른  도끼

2026년 4월 29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6:1-7

(6:1)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6: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6: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6: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6:5)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6:6)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6:7)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인간사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으로 짜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은 그저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질 뿐입니다. 숙소를 마련하려는 작업에서 선지 생도 중 한 사람은 그만 실수를 합니다. 도끼가 도끼 자리에서 빠져 요단강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물에 들어가서 찾는다 할지라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가진 한계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므로서 인간들사이에서 모든 일이 처리될 수 없다는 현실의 본질이 나타납니다. 뭔가가 일어나기는 일어나지만 그 ‘무슨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어떻게 진척이 되는지 인간은 그 본뜻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계 속에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사람의 한계 너머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을 소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사람들 속에 있더라도 그 속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알려집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와 연결되어 있고 엘리야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통 인간들은 그저 사람과 사람과 엮인 자라서 기껏 사람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비해 선지자는 이런 인간 무리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연구 바깥으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 바깥’의 세계는 하나님 일의 중심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엘리야의 경우, 그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그 지점이 요단강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왕하 2:11-13)

요단강을 통해 땅의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하늘에 있음이 알려지게 됩니다. 지금 그 요단강에 엘리사와 선지생도들이 모여 있습니다. 선지생도의 필요에 의해서 엘리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의 품고 있는 하늘의 속성을 보이기 위해 동원된 자가 선지생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생도는 일반인하고도 다른 가능을 이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선지생도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진 것은 다른 일반인들이 도끼질하다가 도끼가 물에 빠진 것과는 다른 사항입니다.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의 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바꾸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사람의 일이라면 단순히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 되돌려주면 그만일 겁니다. 하지만 선지생도가 참여해서 밝혀지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위해 여기서 요단강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시 봐야 합니다. 여호수아 3:16-16에 보면,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요단강에서는 인간이 주도적으로 관여 못합니다. 요단강의 물결은 인간을 건너가지 못하게 막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인 언약궤는 그것을 뚫어냅니다.

이 원칙이 엘리사 시대에서 그대로 적용 실시됩니다. 도끼 찾는 데만 불가능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끼가 빠지고 없어지는 것도 불가능성에 해당됩니다. 이 도끼는 선지생도 바깥에서 빌려온 겁니다. 이는 영적활동을 하는 그 영역 바깥에서 도입된 물건이다는 말입니다. 이 도끼가 선지생도의 손을 거쳐서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 도끼는 단순히 잃어버린 그 도끼이면 안됩니다. 도끼에 무슨 낯선 변화가 실려야 합니다. 사람이 빠진 지점에 들어가서 샅샅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끼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를 만들어져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이 개입해서는 아니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5: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즉 인간들이 구원되는 방법은 결코 알지 못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않는한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도끼가 스스로 떠오르기 위해 엘리사가 한 조치는 아무 것도 아닌 나무 가지에 그 빠진 물에 던져넣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머물러야 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신이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 활동에 의해서 인간은 늘 동일한 자신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모습을 인간을 띠도 한결같이 인간이 죽는 것을 계기로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내가 죽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 주님이 사시는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은 오로지 주목해야 될 ‘스스로 떠오르는 구원자’를 위해 모집된 자만이 구원되는 겁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구약을 대표하는 두 선지자가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 9:27-32)

모든 핵심은 예수님의 별세에 있기에 세상 모든 변화는 이 십자가에서 파생된 현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아는 감격이 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열왕기하 6장 1-7절(떠오른 도끼) 2604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6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6:1-7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엘리사 선지자가 선지 생도와 함께 있습니다. 선지 생도의 숙소가 좁아서 요단강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 집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한 선지 생도가 빌려온 도끼 가지고 나무를 베다가 그만 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찾을 길이 없었어요. 찾을 길이 없는데, 못 찾으면 그만인데 왜 그걸 엘리사한테 묻느냐?

엘리사가 무슨 해결사도 아니고 그냥 용역에 맡기면 안 되겠어요? 도끼가 물에 빠졌는데 사람이 들어가서 찾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도끼를 빠뜨린 그 선지 생도가 웃통 벗고 물에 들어가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면 자기 목숨도 잃고 도끼도 못 찾을 그런 입장, 처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선지 생도가 죽어도 찾지 못하는…, ‘도끼 하나 버린다 치자’ 이럴 것 같으면 되는데 이 도끼가 빌려온 것이에요. 이런 난감한 일에 대해서 그 선지 생도가 엘리사한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선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지금 주제가 ‘인간이 못하는 것 무조건 선지자가 해 주신다. 그런데 엘리사가 웃통 벗고 물에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나뭇가지 하나 취해서 물에 던졌더니만 나뭇가지는 보이지 않고 없어졌던 도끼가 물에 떠올랐다. 그래서 도끼를 잃어버린 그 사람이 다시 취했다’라는 그런 이야기인데 ‘엘리사가 아니면 도저히 다른 사람은 해내지 못하는 일’이라고 성경에 부각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요단강’이에요.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쫙쫙 지워버리고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요단강’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선지자’ 딱 두 요소가 남아요. 요단강과 선지자, 그리고 이 선지자 이름은 엘리사, 이 엘리사와 관련된 스승은 엘리야, 그 엘리야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지점이 요단강, 거기서 수직적으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시신이 없이 이 땅에서 홀연히 사라진 분이 엘리야, 그리고 엘리야가 가고 난 뒤에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불수레 타고 올라갔던 엘리야가 갖고 있던 사명의 갑절이나 되는 사명이 지상에 아직 남아 있는 엘리사에게 이어졌다면 이 엘리사와 요단강의 만남이 연관이 있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도 요단강에 들어가서 문둥병이 나았잖아요. 이번에도 또 요단강 근처에 있는 나무를 벌목하러 선지 생도가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의 그 기능이 엘리사에게 주어지면서, 엘리야가 요단강과 관련 되어있는 것처럼 엘리사도 요단강과 관련되어서 일이 진행됩니다.

그러면 요단강에 숨어 있는 그 본질, 그 내막을 위해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어요. 우선 선지 생도들이 있습니다. 숙소가 비좁을 정도로 많은 선지 생도들, 그리고 선지 생도 가운데 벌목하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졌던 그 선지 생도, 그리고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에 끼어든, 도끼 빌려준 어떤 사람,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

그런데 이 등장인물들이 지금 어떤 변화, 어떤 조짐, 흔들림에 주목하고 있느냐 하면, 오직 도끼, 하나의 도끼에 주목해서 그 주변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잠언서 16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적당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부여받은 그 기능을 연속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남기기 위해서 적절한 인물들을 모집한 거예요. 모집해서 뭘 보느냐 하면, ‘도끼 중심’으로 보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 도끼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도끼가 물에 빠졌으니까 그 도끼는 ‘있는 도끼’에서 무슨 도끼가 되었는가 하면, ‘없어진 도끼’가 됩니다.

없어진 도끼인데 물에 나뭇가지를 던지니까 없던 도끼가 물에서 떠올랐던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그 도끼가 그 도끼냐?’ 하는 거예요. 어떤 나무꾼이 나무하다가 도끼가 물에 빠졌을 때 울다가 산신령을 만나요. 내가 건져줄게, 해서 “이 금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다시 “이 은도끼가 네 도끼냐?” “아닙니다.” ‘일을 세 번이나 시키네. 귀찮게.’ 이번에는 쇠도끼를 보여주면서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예, 그게 제 도끼입니다.” “야, 네 마음 씀씀이가 참 겸손하구나. 이 금도끼와 은도끼, 쇠도끼 다 너 해라.”

요즘같이 금값 높은데 금도끼 한 10kg 정도 안 되겠어요? 안 되나? 하여튼 엄청나게 무거울 게 아니겠습니까? 도끼의 변화에 대해서, 없어졌던 도끼를 다시 찾았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전래동화에서는 ‘그 도끼가 그 도끼’였어요. 왜냐하면 그대로 다시 건졌으니까요. 어디서? 물에 들어가서.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사가 웃통 벗고 물에 안 들어가요. 엘리사가 웃통 벗고 물에 들어갈 것 같으면 애초에 빠뜨린 사람이 책임지고 들어가야죠.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그 요단강물에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서 요단강 물의 독특한 그 본질이 드러나는 거예요. 도끼 이야기 주변에 요단강물도 이제 포함돼서 그 이야기가 정리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을 그냥 마주쳐서 살아가는 것은 하늘나라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소용없다는 거예요. 엘리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엘리야의 능력,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의 능력을 부여받은 자예요. 요단강이 그냥 요단강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3장 13절-17절에 보면,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주님께서 요단강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될 수 없는 자들이 요단강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기능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은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냐?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의논하고 협의해서 만난 게 아니고 요단강과…, 그다음에 뭐냐? 제사장도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에요. 요단강과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누가 설계했어요? 하나님이 설계했죠. 요단강이라는 이 자연물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물에 하나님이 만드신 언약궤가 결합이 되면서 죽었던 자들이, 마치 물속에 잠겨서 죽어버려야 될 이들이, 홍수가 나서 건너는 자는 다 죽어버리는 그 요단강물에 도달한 그들이 그 요단강에서, 마치 없는 데서 떠오르듯이 그들은 새로운 백성으로 떠올라서 가는 거예요, 새로운 백성으로서.

거기에서 누가 희생되는가? 물에 누가 먼저 들어갔는가? 제사장이 먼저 갔죠. 제사장이 희생했어요. 제사장 먼저 안 들어갔으면 다른 사람들이 겁나서 들어갔겠습니까? 제사장이 죽었다 치고 먼저 들어가니까 물이 갑자기 끊어졌어요. 끊어지니까 그다음부터 쉽지요. 물이 끊어졌는데 누가 못 건너가요?

그때 건너가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설계했던 그 언약궤의 기능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 언약궤를 왜 만들어놨지? 그걸 왜 운반해서 요단강까지 오게 하셨지?’ 그런데 요단강이 홍수 났을 때 말고 물이 잔잔하게 흐를 때, 그때는 인간의 힘으로 그냥 인간의 능력으로 건너갈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홍수가 날 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했었습니다. 이것은 ‘건너가고자 하는 자는 다 죽는다’라는 뜻이에요. 죽는데 어떤 결과를 보게 되면, 어떤 결과를 보게 되면 그들은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왔잖아요. 분명히 홍수 나서 아무도 못 건넌다는 것이 명백한데,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으로 명백한데, 건널 수 없는데 그들은 건너온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 말이에요. ‘선지 생도가 숫자가 많다.’ 인간의 생각이죠. ‘숙소가 작아서 기거하기가 힘들다.’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집을 짓자.’ 인간의 생각이에요. ‘집을 짓기 위해서 나무가 필요하다.’ 인간의 생각입니다. ‘나무가 어디쯤 많은가? 요단강가에 많다.’ 그게 인간의 생각이죠. ‘나무를 베려면 도끼가 필요하다.’ 인간의 생각입니다. ‘도끼 빌려와서 나무를 베어서 집 짓자.’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도끼가 자루에서 빠졌다.’ 인간의 생각 아니죠.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 - 인간의 생각…’의 연쇄고리에서 뭔가 이탈한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도끼에요. 도끼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때부터 작업을 멈추고 사람들은 모두, 그 선지 생도들은 모두 도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업 진행 안 되죠. 산업 재해, 산업 재해까지는 아니어도 하여튼 간에 작업장이 진도가 안 나가죠. 도저히 도끼 없이는 작업이 안 된다. 그때 누가를 쳐다보는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엘리사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나보고 뭐 어쩌라고? 뭐!’ 엘리사만 쳐다보고 있어요.

이로 말미암아 여기서 도끼와, 엘리야의 능력을 전수받은 엘리사만이 남지요. 그러면 여기서 엘리사는 인간 같은 인간에 속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에게 근접해 주기 위해서, 접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엘리사의 그 존재 위상, 그 가치, 그 가치가 돋보이는 순간이 왔어요.

이것은 단순히 ‘엘리사가 존재한다, 인간이 존재한다, 선지자가 존재한다’가 아니라 존재가 손을 못 대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야 될 그 타이밍에 와 있는 겁니다. 그 타이밍에 와 있을 때 선지 생도 가운데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나뭇가지를 던지면 도끼가 떠오른다’라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창안한 자가 없어요. 그 아이디어를 제시한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로써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건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어요. 인간의 구원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유월절 사건이에요. 그 유월절 사건 때도 마찬가지예요. ‘양 잡아서 피 바르면 천사가 와서 죽음을 건너뛰게 해 준다. 안 죽게 해준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인간 쪽에서 제안했던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바보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사건에 인간은 바보예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인간의 일, 인간의 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그냥 추진할 뿐인데 그 추진이 언젠가는 막혀야 돼요. 스톱이 돼야 해요. 절망해야 합니다. ‘왜 내가 아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는 거부당하는가?’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아이디어는 어느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아이디어에요. 이러한 난관에 부딪힐 때 여러분들은 정말 감격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왜? 줄곧 ‘내가 알았던 나는 내가 알고 있었던 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하다.’ 이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오늘 ‘인간의 일’을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인간의 일이거든요. 그런데 이 인간의 일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내가 아는 내가 하나님의 일이랍시고 했던 그 일은 나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통째로 우리를 천국에서 거부합니다. 불합격이에요. 거부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알던 나, 내가 알던 나는 천국에 못 들어가요.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뭐냐? 줄곧 내가 알던 내가 아닌 나가 돼야 해요. 그러면 ‘내가 알던 나가 아닌 나’가 되려면, 이것은 내 쪽에서는 밀어붙일 수 없지요. 이것은 일단 스톱이 돼야 해요. 들어오지 말라고 차단돼야 하겠죠.

그 차단되는 것이 뭐냐?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 주의 일이 그 현장에 엘리사의 존재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엘리사의 존재 때문에 주의 일이 일어났고, 그 엘리사의 존재가 다른 선지 생도들과 차이 나는, 부각 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선지 생도가 나무하다가 쑥, 하고 도끼자루에서 도끼가 빠져버려야 해요.

빠져서 그냥 땅에 툭 떨어진다면 그거야 주우면 되죠. 그런데 빠져서 못 찾는 곳에 가 버려요. 도끼가 얕은 물에 빠졌다. 그거야 뭐 들어가서 건지면 되죠. 도끼가 빠져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죽어야 찾는 것도 아니에요, 죽어도, 죽어도 못 찾는 곳에 빠져요. 도끼 빠졌을 때 ‘내 한 몸 바쳐서 도끼 찾겠습니다.’ 그 짓하지 마세요. ‘내 몸 하나 자살해서라도 주님 증거하겠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너는 죽어도 주님 못 만나요. 인간은 죽어도 주님 못 만납니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아요. 하나님의 한결같은 진리, 원칙입니다. 나를 죽이고, 나를 한계에 부딪히게 하고 내 안에 잠복 돼 있던 주님의 의미를 살리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그 사건이 터질 때 우리는 만세를 부르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아! 이제 근원적으로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만 생각하면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무슨 오해를 했는가를 생각하면 돼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딘가?”(양수경, 1990) 어떤 노래인지 나중에 집에 가서 한번 들어보세요. 그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무슨 이유로 떠나야 했나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 떠나버렸다는 거예요. 그거 의미 있는 거예요. 인간은 끝까지 자기를 사랑해요. 그런데 자기의 끝, 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내가 어디서 스톱이 되느냐 하면,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신경 안 쓰게 됩니다. 왜냐? 그 사람이 나의 모든 것을 보호해 주고, 보디가드 해주고 책임져 주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떠나버렸어요. 그렇게 떠나버렸을 때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나 이걸로 끝인가?’ 뭐 이런 뜻이죠.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사시는 아주 확정적인 이 방식은 신약 성경에 나오지요. 신약 성경에 나오면서 신약 성경 나름대로의…, 구약도 마찬가지인데, 구약도 기적이 나오잖아요. 신약 성경에는 신약의 레벨에 맞는 기적이 있어요. 그 기적을 소개하면서 엘리야의 이 도끼 기적과 연관 시켜보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29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나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 제자들이나 전부 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어요. 왜? 광채가 안 나니까, 빛이 안 나니까요. 그냥 인간 자기가 지니고 있던 육신, 신체, 예수님도 그 신체가 차이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변화산에 올라가요.

누가복음 9장 27절에 보면, 변화산에서 일어날 일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것을 아까 해석한 것처럼 ‘너희가 죽기 전에 너의 한계를 알 수 있는 사건을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이에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열두 제자들아. 너희가 죽기 전에,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아, 나는 기껏 이것밖에 모르면서도 안다고 여겼구나.’ 또는 ‘알려고 애썼구나. 이게 내 한계구나’라는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그때가 올 것이다” 하고 변화산에 올라갔더니만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해같이 빛난 게 아니에요. 거기 그 현장에 없었던 분이 등장합니다. 누구냐 하면, 모세와 엘리야예요. 모세는 지난 주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용모가 변했죠. 엘리야는 오늘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죠. 모세와 엘리야가 인간입니까?

우리는 그 질문을 해야 돼요. ‘모세가 인간이냐? 엘리야가 인간이냐?’ 인간이죠. 인간인데 우리하고 왜 다르죠? 다른 그 이유를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우리 대신 설명을 해 줍니다. 누가복음 9장 30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그리고 말한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아, 모세와 엘리야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러운 광채를, 빛을 띠고 나타난 이유는, 그들이 아직 제자들이 몰랐던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예요. 12제자는 모르는데 모세와 엘리야는 알고 있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별세해야 우리에게 빛이 난다는 원칙이에요. 예수님이 별세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여러분께 물어볼 수 있죠. 여러분이 죽고 사는 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는 게 중요합니까? 요 질문이 여기에 합당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떼버리면, 말씀을 버려버리면 우리는 내가 먹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게 최종적인 목적이고요.

그런데 사람 대 사람만 만나지 말고 말씀을 만나자는 그 말이죠. 말씀의 사건, 말씀을 만나면 말씀은 사건을 몰고 와요. 말씀사건 안에서,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무지몽매한가?’를 말씀 사건을 통해서 일깨워 줄 때 우리는 “야호!”라고 외쳐야 되고, 이 말씀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해요. 찬양해야 합니다. “아, 내가 쪼다입니다. 그동안 내가 바보 등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기껏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도끼 있었네, 자루 빠졌네, 물에 빠졌네…’ 이러한 인간이 아는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자루에서 빠진 도끼, 그리고 도끼 빌려준 사람, 그리고 선지 생도, 그리고 엘리사, 요단강, 이 전부가 없다가 생겨나고, 가라앉았다가, 숨겼다가 떠오른 이것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기 위한 설명의 자료들, 적당하게 동원된 설명의 재료들로 우리가 쓰인다는 것’ 그것이 말씀을 아는 기쁨이고 보람 아니겠습니까?

선지 생도라고 하는 것은요, 일반인하고 달라요. 달라서 육과 영이 겹쳐진 그런 위상에 속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선지 생도만 있는 게 아니고 선지 생도들 가운데 엘리사가 있다는 거예요.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의 줄기, 그 흐름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없더라도 제2의 엘리야로서 엘리사가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엘리야가 함께 있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따라서 제2의 엘리야라 할 수 있는 엘리사가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말씀이 계속해서 활성화된다는, 즉 우리 가운데 그냥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함께 있어서 말씀이 품고 있는 사건들이 그 있는 인간들을 사용할 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가, 그걸 지금 이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시대의 하나의 표적이 되죠. 주일날 설교 시간에 제가 언급한 것 다시 언급하면, ‘물이 포도주 된다.’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물이 포도주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포도주만 보는 거예요. “맛있다. 이게 어디서 난 포도주냐?” 그들이 놓친 게 있어요. ‘포도주가 맛있다.’ 누구는 그런 말 못 하겠습니까?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만이 한 일’이라고 포도주 먹는 사람 아무도 몰랐어요. 그리고 물 항아리 들고 간 그 하인들도 그 당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는 건 알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게 되는 이유다.’ 그걸 아는 일꾼은 그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도끼 사건, 도끼 사건을 이제 풀이해 봅시다. 도끼 사건에서 선지 생도의 역할은…, 좀 어렵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기적이란, 표적이란 뭐냐?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전부를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표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보통 세상에서는 부분을 모아야, 부분을 다 끌어모아야 전체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건 표적이 아니고 ‘한 조각의 부분만으로도 전체를 다 보여주는 일’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지 생도가 있다’라는 것을 ‘선지 생도에게 아쉬운 점을 엘리사가 채운다.’ 이렇게 해석하면 잘못된 거예요. 엘리사가 품고 있는 본질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 옆에 붙어 있었다고 보면 돼요. 선지 생도가 일하는데 도끼가 없어져서, “아이고, 이거 참 어쩌나?” 할 때 엘리사께서 “빰빠라밤빰 빰~!” 해가지고 뽀빠이처럼 나타나서 “내가 도와줄까?” 이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이에요. “하나님이여, 사는 게 이렇게 힘듭니다. 좀 도와주세요.” “빰빠라밤빰 빰~ 도와줄까?” 이런 기적은요. 마귀들이 그런 기적을 만들어 놨어요, 마귀들이. 그게 아니고, ‘선지 생도’라고 하는 것은 ‘육과 영’의 위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그들 보기에 아쉬워서 “도끼, 아이고 도끼!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 뽀빠이, 도와주세요!” 하듯이 그렇게 나오는 면도 있지만, 그러나 결과를 보니까 엘리사가 갖고 있던 그 선지자의 기능을 위해서, 그들은 도끼로 일하다가 도끼자루가 빠져야 해요.

여러분, 선지 생도가 일 잘못했습니까? “좀 조심하지. 일하기 전에 도끼자루가 헐거운지 확인해 봤어야지.” 선지 생도가 일을 제대로 했어야한다는 것은요, 오늘 본문하고 전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선지 생도 자체도 의미 없고, 도끼를 물에 빠뜨린 그것도 의미가 없어요. 선지 생도는 엘리사를 위해서 모집된 사람들입니다. 선지 생도가 갖고 있는 도끼는 오늘 본문에 보면 ‘빌려서’ 온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이 도끼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돈 주고 산 도끼가 아니고 외부에서 빌려온 도끼예요. ‘외부에서 빌려온 도끼’라는 점에서 이제부터 이 의미가 신약의 십자가 의미로 연결이 돼요. 뭐냐 하면 이 도끼는 선지 생도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도끼에요. 그러니까 세상,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주어진 도끼예요. 세상에서 온 도끼입니다. 그래서 이 점 때문에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 도끼가 그 도끼가 아니다’ 이 말이죠.

이제, 이제 중요합니다. 그 도끼가 그 도끼 아니에요. 잃어버린 도끼를 되찾은 게 아닙니다. 그 도끼는 어떤 도끼냐 하면, 엘리사가 갖고 있는 중보자적인 기능이 포함된 새로운 도끼로 달라져야 해요. 죽은 예수님이 살아난 게 아니에요. 죽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주’가 되시는 분으로서의 부활이 되어야 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거, 그건 소생이죠. 그건 나사로도 그렇게 죽었다 살아났어요. 그거 아니에요.

도끼가 세상에서 빌려온 도끼인데 거기에 빠뜨린 거예요. 빠뜨렸을 때 그냥 ‘에고, 뭐 잃어버린 셈 치자.’ 이게 아니고, 세상은요 절대로 세상 자체를 포기를 못 해요. “내 도끼 어디 있어? 선지 생도, 책임져!”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선지 생도가, 이게 내 돈 같으면 잊어버리겠는데 빌려온 도끼라서 안달 난 거예요. ‘선지 생도’라는 그 성직자의 위상이 완전히 작살날 판이에요.

“그래, 너희 하나님이 그 도끼 하나도 단도리 안 해 주더냐?” 이런 비난을 들을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도끼가 빠지고 난 뒤에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꺾어요. 소금을 뿌린다든지 이런 게 아니고. 아마 여러분들이 그 엘리사의 기적, 전에 있었던 나아만 장군의 기적을 알았으면 여러분은 또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할 거예요. “도끼 빠졌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도끼 빠트린 네가 일곱 번 요단강 들어갔다 나와라.”

이게 인간의 한계, 미리 알았다는 게 문제예요. ‘알게 된 나와 새로운 사건 앞에 나’는 다른 나예요. 나가 연속이 안 돼, 불연속 돼야 해요, 떨어져야 해요. 자꾸 내가 ‘동일한 나’로 여기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고 존재, 역시 자기 존재에서 못 빠져나온 거예요. 나뭇가지를 꺾는데 그 나뭇가지가 ‘아무나’예요, ‘아무나’. 특별한 나뭇가지가 아니고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면서 도끼처럼 떠오르기 위해서는 이사야 45장 15절의 말씀을 이루어야 해요. 45장 15절의 말씀이 뭐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스스로, 그냥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고, 스스로 숨어 있다가 나타날 때 거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은 ‘아무나’.

그러니까 뭐냐, 죄인 ‘아무나’! 죄인이 포함되어서 주님의 고유 권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보낸다는, 영생을 얻는다는 그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 기능을 품고 도끼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도끼는 스스로 숨어 있다가 ‘스스로 구원자로서 나타나는’ 이사야 45장 15절의 기능을 이 도끼가 십자가 앞서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그 현장에서, 엘리야의 능력으로서!

자, 이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돼요? ‘아무나’가 돼요. ‘나, 이렇게 착했습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아무나’예요. 내가 한 행위가 나를 구원하지 못해요. 그것은 나의 개성인데 개성은 안 받아줍니다. 왜? 개성은 자꾸 나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때 착한 일을 한 게 지금의 나거든요.” “아니야, 그때의 너하고 지금의 너가 다 달라.” 매사에 주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집어넣기 때문에 동일한 나는 없고 진짜 주님의 동일한 것은 뭐냐? ‘아무나’ 때문에 떠올랐던 주님, 주님만이 인정받아요. 주님이 떠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주님의 도끼가 다시 떠오름으로써 말미암아 어떤 변화가 생기는데, 내가 ‘아무나’ 밖에 안 된다는, 정말 내세울 게 없는 ‘죄인 중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희열과 감격이 있어요. 아, 내가 ‘아무나’구나.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내 이름, 고유한 이름을 안 받는구나.’ 그것이 바로 ‘자기 이름을 가지고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기억할 것은 다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기억할 것은. 삼성전자에 주식 투자한 것도 잊어버려야 되고, 내 유산 받은 그 지분, 예천 땅도 다 잊어버려야 되고, 특히 포인트 주는 휴대폰 10점짜리가 이제 100점 됐다는 그것도 잊어버려야 해요. 내가 죽어야 주님이, 떠오른 주님이 나하고 함께 살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그거는 일반 교회에서 하는 거고요,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죠. 이게 그 유명한, 유명하지는 않지만 참 껄끄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고린도후서 4장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이게 도끼 이야기 아닙니까, 도끼 이야기! 이래서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잖아요. 십자가로서 완성이 되잖아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체 우리에게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무나’로 간주해 주신 그 손길, 그 손길이 귀하지요. 진짜 우리는 그 손길에 ‘아무나’로 걸려든 거예요, ‘아무나’로! ‘너는 어떤데 나는 어떠하다.’ 그것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고 우리는 말씀과 만나야죠. 같은 인간끼리 ‘아무나’끼리 만나서 뭐 할 건데요?

여러분들이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노래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도 대답 없이 고개 숙인 옥경이”(태진아, 1989). 왜? 과거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당신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봐도” 아무 소리 안 하듯이,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은 욥이 고백한 거예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걸려들어서 공짜로 영생을 얻게 된 천국 백성의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걸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가야 되고 사건 사건이 있어야 하는지, 그 모든 사건이 십자가에서 유출된 사건인 것을, 이제는 십자가만 감사하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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