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07

10/5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껌뻑 죽었다는 이런 자세로 보면 안 되고요. 시비 거는 쪽으로 성경을 보세요.왜? 우리의 자율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있으니까. 그냥 겸손한 척, 순종하는 척하지만 우리가 겸손한 척하는 그 아래층에는 뭐가 있느냐? 헤즈볼라 사령부가 있어요. 주께서는 그걸 겨냥한다고요. ‘네가 뭔데’에요.  모세는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이에요. 특이한 죽음 속에서 나온 사람이고 특이한 불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뭘 경험했느냐 하면 인간의 극단적인 죽음의 형편을 먼저 체험한 사람이에요. 목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그 죽음 안에서 인간은 완벽하게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죽는 게 아니고. 인간은 못 죽어요. 그냥 우리 옛날에 할머니 하는 말처럼 “아이고, ..

만나 2024.10.06

10/6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 이미 목숨보다 자기 의를 더 챙기고 최후까지 사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성경 지식을 전해도 먹히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의에 도달되는 복음의 능력은 결국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의 영생이 이런 폭력을 통해서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성을 품고 있는 영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게 되면 성도의 일평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며는, 영생은 ‘빈 형식’에 가득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형식은 이미 자기 잘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을 토하게 하고 게워내는 작업은 영생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다듬이 돌 위에 육신 얹어놓고 ..

만나 2024.10.06

10/4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불어 함께 계셔요. 사람들은 율법으로 헌금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헌금을 하거든요. 헌금할 때 하나님은 보이는 이 사람을 경유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거에요. 이 사람을. 이들을 통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고아와 과부의 생산 또는 출현은 바로 뭐냐 하면은 출애굽 정신의 유효성을 말하거든요. 출애굽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뜻에서 그 시대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일가친척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고아고 내가 과부고 내가 나그네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쪽으로 이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거기에 대해서 정당..

만나 2024.10.04

10/3

신명기 11장 29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약속의 땅에 인간이 들어가느냐, 아니면 말씀이 들어가느냐? 또는 인간이 들어가느냐, 언약이 들어가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 미리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는 언약이 들어가는 땅이지, 너희들이 가는 땅이 아니다. 말씀이 말씀의 완성되기 위해서 말씀이 움직이는 세계, 그게 약속의 땅이에요.

만나 2024.10.03

10/2

인간이 기어이 죽는 이유는 인간이 죄 덩어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그걸 늘 새롭게 새롭게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게 주님의 노림수거든요. 우리한테 말씀을 줄 때. 시간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영원성에서 나와서 영원성으로 돌아가는 이 순환, 이 서클을 되풀이하기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의 육신은 시간의 저촉을 받으니까요. 늙어가고 죽어가니까.그럼 이 서클 안에 있으면 우리가 늙어가는 것도 다 죄 때문에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도 죄 때문에 죽어가고. 늙어가는 것도 그냥 곱게 늙어가면 안되죠. 뭘 생산하고? 죄를 드러내면서 영원 속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죄 사함 받은 자만 이걸 느끼게 되는 거예요. 죄 사함 받은 자만.그러면 시간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시작합니까? 십자가..

만나 2024.10.02

10/1

신명기 11장 29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 나는가 약속의 땅에 인간이 들어가느냐, 아니면 말씀이 들어가느냐? 또는 인간이 들어가느냐, 언약이 들어가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 미리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는 언약이 들어가는 땅이지, 너희들이 가는 땅이 아니다. 말씀이 말씀의 완성되기 위해서 말씀이 움직이는 세계, 그게 약속의 땅이에요.

만나 2024.10.01

9/28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율성은 모순되지 않고 둘 다 허용이 되는 개념입니다.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실제 적용하는데 있어 인간의 자율성을 사용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 쉽게 해결되는 겁니다.인간에게 자율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절대주권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무슨 말인고 하니하나님은 인간과 관계짓기 위해서 인간 속에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심어넣게 되는데 그 속성이 곧 하나님의 고유 속성의 일부가 투입되는 겁니다. 그 속성이 바로 자유성이요 자율성입니다.이렇게 자율성과 자유성이 인간에게 소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름으로 심어지는 되면 비로소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가미되면서인간은 신이 자기에게 넘겨준 신의 속성(자율적과 자유성)을 제대로 발휘해서 그 말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

만나 2024.09.28

9/27

09-09-17 11:20 이근호 목사의 댓글(심재성 목사의 댓글에 대한)입니다. 들을 청중이 예수님 빼놓고서는 없다는 겁니다. 청중은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님들이 글을 쓸 때에 고정된 청중들은 청중들이 아니라고 여기세요. 청중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뿐이라면 얼마든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허상이요, 하나님 나라 빼놓고서는 다 허구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허구적인 십자가 마을을 실상이라고 보시고, 자꾸 허상적인 집회를 마치 의미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양 여기니까 "왜 당신 혼자 강의하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저는 심목사님께서 눈치 코치 안보고 솔직하고 속에 있는 심정을 털어내는 것이 대해서 이종호 목사님과 더불어 심목사님의 용기..

만나 2024.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