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2 - 선택의 안정성
26,04,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인간은 선택할 수 없어 !!
오늘은 206페이지를 하겠는데, 여기에 보면 선택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자기가 물에 빠졌는데,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고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물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자기의 위치가 뒤집어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어디에 빠졌을 때는, 자기가 아닌 남이 자기의 손목이나 발목과 같은 특정 부위를 잡고 당겨서 꺼내어 주어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를 잡아당겨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 '선택론' 이라는 것은 인간의 구원에 해당되는데,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자기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은 곧 절망이라는 뜻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렇게 해서 '나' 라는 것을 구축했는데, 그런데 외부에서 선택을 해줘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은 자기의 선택권이 날아가 버리는데, 이것은 "너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더욱 더 절망적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선택을 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선택을 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백날 노력을 해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주님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명단을 조사시키는데, 그래서 "왜 왔어요? - 구원을 받으러 왔는데요. - 그렇다면 봅시다. 명단에 없네요. 지옥에나 가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의 그 절망감, 이러한 절망감을 미리 알았던 자가 누구냐 하면, 그게 가룟유다라는 말이죠.
*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했던 가룟유다 !!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면, 그 가룟유다가 곧 마귀라는 겁니다. 그가 마귀이기 때문에, 그 악마가 자기 활동을 가룟 유다 안에서 계속 해야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마귀고 끝까지 마귀이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마귀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래서 가룟유다는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하게 다 했다는 겁니다.
마귀, 즉 가룟유다가 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나에게는 예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나의 자리, 즉 나의 장소에는 예수가 없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어야 되니까 말이죠.
가룟유다가 마지막에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팔아먹었는데, 그러면 가룟유다는 자기 자리, 즉 자기 장소라는 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다는 겁니다.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거기서 추방시킨다는 겁니까?
* 나의 자리 !!
그렇게 예수님을 팔아먹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은 내 자리에 있을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내보낸다는 말이죠.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그러면서 예수님이 빠진 자기 자리를 계속해서 자기가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나의 선택' 이라는 말이죠.
가룟유다는 악마가 예수님에게 해야될 일을 충실하게 다 했는데, 그런데 이것은 비단 가룟유다뿐만 아니고 나머지 열한 제자도 무엇입니까? 각자 자기 자리가 다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자기 자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전제가 "내가 여기에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늘 그 안에서 동일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이 안에서 어제도 오늘도 나는 똑같이 동일하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동일한 나로 내가 밀어붙이겠다. 내일의 나와 지금의 나를 똑같은 나로 계속해서 밀어붙이겠다"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 라는 것은, "내가 똑같이 되도록 내가 시도를 하겠다" 라는 의미인데, 이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모든 인간이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나에 대한 나의 자리가 있다" 라고 나오고, 그것은 예수님의 열한 제자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그 다음에 이 열한 제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찾아오셨다는 말이죠.
* 예수님을 과연 거부할 수 있었는가?
그렇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즉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밀어붙일 때, 그러면 과연 열한 제자가 예수님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결코 거부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선택',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 이것은 자기 결정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의 선택은 주님의 선택보다 약하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힘이 예수님의 힘보다 약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인생을 선택하는 것,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주님의 선택에 밀리게 되었다.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보다 더 강하고 우세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주님의 선택이 강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열 한 제자가 그 다음부터는 그것을 이 세상에 나와서 전파를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 선택, 즉 자기 결정으로 살아가는데, 그보다도 더 우세한 분이 따로 계시고,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완전히 짓밟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가룟유다의 자살 !!
한 분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오시면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기 자리를 고수할 때, 사탄이 가룟유다에게 일을 시켜놓고, 그런데 가룟유다 자신은 이 세상을 어떻게 마감했느냐 하면, 그는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차피 다 죽는다는 말이죠. 자살을 해서 죽거나, 혹은 교통사고로 죽거나, 나이가 들어서 죽거나, 어차피 다 죽는다는 점에서 같다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죽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론 누구나 다 자살을 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사고로 죽던 늙어서 죽던 다 죽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살할 때는, 이 가룟유다가 왜 자살을 했는고 하니,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을 했을 때, 그 고백이 성경에 나온다는 말이죠.
그가 자살한 이유는 뭐냐 하면, "내가 스승을 팔아 넘겼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뭐냐 하면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제사장에게 받았던 돈이 몇 냥이었죠? 30냥인데, 그것을 어떻겠습니까? 주식에 투자를 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도로 돌려주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돌려주니까 그쪽에서 돈을 받지 않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는 겁니다. 여기서 가룟유다 돈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나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자책하고 후회를 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마 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마 27: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 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 27: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그러면 다시 정리합시다. 자살을 한 이유가 무엇이지요? 마음이 악하고 독해서 자살했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선하고 순수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처벌을 내린 겁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처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 선택을 자기가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사탄이 들어 있었는데, 사탄이 끝까지 사탄이 사탄답다는 말이죠. 그 사탄, 즉 악마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살했다는 것은, 그런데 가룟유다가 굳이 자살이 아니라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죽었든 관계없이 가룟유다의 마음은 계속해서 무엇이 남아있다는 겁니까?
"나는 마음이 선하고 순수해서, 나의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그리고 그 처벌은 내가 나에게 내린다. 그렇게 처벌을 내릴 권한과 결정과 선택은 나에게 있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 사탄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
그것이 사탄의 마음이라면, 그러면 모든 인간은 어떻습니까? 자살을 하지 않아도, 요양병원에서 늙어죽어도 그 마음속을 뜯어보면 어떻다는 겁니까? 그 안에 "나는 선하고 나는 순수하고 나는 착하다" 라는 것이 그대로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사탄이 있는 곳에 가서 합류를 한다는 말이죠. 즉 "네 속에 있는 마음은 사탄이 있는 마음이니, 네가 알아서 찾아가라. 사탄이 준 마음이니 사탄에게로 돌아가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가룟유다가 은 30냥 돌려주듯이,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있던 사탄의 마음은 다시 어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까? 컴백홈인데, 사탄이 기다리는 곳으로, 사탄이 있는 곳으로 합류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복음도 모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데, 그들이 왜 걱정을 하는지 알아요? "교회는 순수해야 돼. 기독교는 희망이야.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도 믿지 않고 교회도 나오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걱정을 왜 합니까? "나는 비록 교회에는 나가지 않아도, 교회에 다니는 만큼이나 내 마음은 순수하고 착하고 양심적이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신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마음이라고요? 그게 바로 사탄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 인간의 마음이 곧 악마의 마음 !!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과연 그 마음에서 벗어났느냐를 묻고 싶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벗어나지 못한 자들과 차이가 나야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악마가 있을 때는 그야말로 마음이 선하고 착하고 순수하고, 왜 이 세상에서 통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많이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렇지요?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가 법인데 무슨 법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악마의 마음이라면,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진짜 천국 백성들은 이 마음과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선하고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그런 마음을 집어 넣어준 분, 그분이 누구죠? 악마라는 말이죠.
그 악마가 있는 곳에 가서,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악마와 합류하기 위해서 가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지옥이라면, 그렇다면 천국에 가는 사람은 마음이 선하고 순수하고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이 아닌, 그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이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마음인데, 그게 어떤 마음이죠? "내가 죄를 짓는다. 따라서 내가 죄를 지은 그 벌로 나는 지옥에 간다" 라고 했을 때, 이게 무엇이 문제냐 하면, 자기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선택권이 누구한테 있다는 겁니까? 여전히 자기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인간을 사용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죄가 인간을 사용하는데, 수백 번을 들어도 또 다시 듣게 되면 새로운데, 그렇게 까먹는다는 겁니다. 그만큼 이 아담의 마음, 즉 악마의 마음은 지독하게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이미 죄가 결정한 운명 !!
복음을 들을 때는 "아, 그게 아니구나" 라고 하다가,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마귀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 벌로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죄가 자기로 하여금 죄를 나타내게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죄가 나타나게 되면,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이미 죄가 결정을 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설교 끝 부분에 잠깐 언급했는데, 노아홍수 때 이 지구에 무엇이 덮쳤다고 했습니까? 노아홍수 때 물이 덮쳤다는 말이죠. 그러면 물이 왜 덮쳤습니까? 그게 죄가 덮여있기 때문인데, 죄가 덮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태어났다는 겁니까? 그 죄에서 태어났다는 말이죠. 개인적으로 착하고 선하고 순수해도, 이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죄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겁니다.
* 나의 인생의 뛰어드신 주님 !!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 라는 것이 아니라, 이 '나' 라는 것에 주님께서 뛰어드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된다" 라는 것에서, "주님은 이런 나를 어떻게 다룬다" 라고 하게 되는데, 즉 그 이전에는 죄가 다루다가 이제부터는 주님이 다루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은 백날 선택을 해봐야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죄가 인간을 지옥에 보내기 때문에, 거기서 인간이 헤엄쳐서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관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의 신나는 시간들이 남아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죄를 아는 시간이라는 말이죠. 죄를 아는 시간, 즉 "나에게 이런 죄가 잠복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날마다 들추어지게 되는데, 우리는 그런 행복을,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에게 죄가 계속 나온다면, 그때부터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짐이라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무거운 짐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 있어서 그 모든 짐은, '나'와 '너'를 비교하는 것에서, 그게 인간의 짐이 된다는 말이죠.
* '나'와 '너'의 비교 !!
"저 집은 저렇게 잘 사는데 우리 집은 맨날 이게 뭐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비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입니까? 죄의 종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너'는 무엇인가요? 삼성그룹의 이재용 회장은 무엇입니까? 돈이 많은데, 그렇게 돈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는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입니까? 죄의 지배아래에 있는데, 그러니까 남, 즉 '너'와 비교해봐야, 그게 그야말로 시커먼 것들끼리 비교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신입교인과 목사를 비교한다고 하면, 서로 비교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둘 다 죄 아래에 있는데 무엇을 비교한다는 겁니까? 비교할 수 없는데, 비교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말이죠.
물론 이러한 비교는 복음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하지 않는데, 의식적으로는 잘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교회의 교인들이나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복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맞는 말인데, 여기서 무엇이 안 되느냐 하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과거의 '나'는,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죄를 쪼끔 아는 시절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그 죄를 풍부하게 아는 '나'일 뿐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은 이전보다 낫다" 라고 하든지, "내가 지금은 이전보다 못하다" 라고 하든지, 이런 '나'와 '나' 사이의 비교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죄의 일관성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 이제는 죄를 더 느낄 수 있도록 !!
이렇게 '나'와 '나' 사이에. 즉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나' 사이에도, 이게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여기서 마지막 남은 무거운 짐도 다 어떻게 될까요?
"열심히 해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희망은 있어야지" 라고 하는 게 뭐가 됩니까? 그게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겁니다.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가 덜 개발하고 덜 파낸 죄가 있다는 것인데, 이제는 더 느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서 교회를 언급할 때 "네가 처음 사랑을 잊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천부여, 이제는 손들고 나옵니다" 라고 하다가,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복음도 알고 해서 기뻐서, "내가 죄인이 되었으니, 교회에 나올 때는 정말로 마음을 낮추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죠.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렇게 해서 교회에 나오면 제일 먼저 무엇입니까?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배 시간은 30분 이전에 나오고, 또한 옷을 입더라도 양복을 입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먼저 다니던 토박이들이나 선배들은 어떤 옷차림으로 오는지, 그리고 그들은 과연 몇 시에 오는지를 살펴본다는 말이죠.
* 아예 휴대폰을 손에 들고 !!
그래서 보면 토박이들은 아예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긴장을 풀어도 괜찮구나. 그만큼 복음을 많이 알고 죄를 많이 아는 사람은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가도 되는구나. 그러면 나도 편하게 다녀야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참들은 '나'와 '너'를 비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남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러니 편하고 좋다는 말이죠. 또한 뭐냐 하면 과거의 '나'에서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니까 말끔한 옷차림으로 오다가, 이 과거보다 더 과거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참으로 복음 안에서 자유를 느끼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자기의 원래 더러운 성질로 다시 되돌아간 것인지, 그게 엄청 애매모호하다는 말이죠. 과연 어느 쪽이냐는 겁니다.
*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그러면 그 해결은 뭐냐 하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인데, 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요? 사도들의 경우에는, 모든 자기들의 선택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무산을 시키는데, 자기 인생을 개발하겠다는 것을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이 더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자기 선택이 아닌, 인간의 자기 선택은 가룟유다라는 말이죠. 그것은 마귀가 하는 것이고, 반면에 하나님의 진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의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성이 성경에 나오는 선택을 받은 자들의 모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차이가 나는지를 보자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9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눅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 유대인들의 선택사상 !!
여기에 '나의 아들' 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보면 '곧 택함을 받은 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게 뭐냐 하면, 유대인들의 선택사상인데, 이것이 그들의 신학이라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 선택했는데, 그리고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 사상을 유대인들은 갖고 있었고,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이 누구를 죽였지요? 예수님을 그만 살해했다는 말이죠.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선택할 때 유대인들은 어떤 선택사상을 가졌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을 살해했다고 하면,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의 선택론과 우리의 선택론이 얼마나 일치되고 있는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선택론은 누구를 위한 선택론입니까? 자기 구원을 위한 선택인데, 이게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던 있는 선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누구의 자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마귀의 선택론은 뭐냐 하면, 자기 구원을 위한 선택론을 유지할 때, 그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선택론이라는 것이죠.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런데 이러한 자기를 위한 구원, 그 선택론이 2,000년 동안 생생하게 아직 살아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비롯해서, 모든 한국의 신학교에서 다 이렇게 다 가르친다는 말이죠. 즉 "선택은 무슨 선택이다? 자기 구원을 위한 선택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의 분류에서 선택론은 어디에 포함이 되어있는고 하니, 구원론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지금 교재로 사용하는 책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선택론, 즉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던 그 악마적 선택론을 지금도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선택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배운 게 아니고 악마의 본성으로서, 즉 타고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신학이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이나 모조리 다 어떻다는 겁니까? 모두가 마귀가 군불을 열심히 떼어서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차이가 없는데, 한 통속이라는 겁니다.
* 칼 바르트 -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했다' !!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처음 등장했는데, 그가 '칼 바르트' 라는 신학자라는 말이죠.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아닌 것 같더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 바르트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아닌데, 그분의 신학에도 복음적이 아닌 게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그는 이 선택론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한 게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에서 벗어났는고 하니, "나를 위한 선택론은 성경에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선택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왜 2,000년 동안 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나왔느냐 하면, 이것이 성경에 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말이죠.
아까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9장 35절에 나왔는데, 선택 대상은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무엇이 탈락하게 됩니까? 우리의 구원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부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선택과 같은 것은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하면 이 칼 바르트가 주장한, 즉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선택했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그는 에베소서 1장 4절의 말씀을 근거로 했다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기는 그렇게 근거를 찾았는데, 그런데 정작 설명을 제대로 하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인데, 분명히 제대로 성경기준을 찾아냈는데, 그런데 정작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의 책에 보면 "기존의 신앙은 아니다" 라고 해놓고는, 그러면 정작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고 있다는 말이죠.
에베소서 4장 1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라고 하는데, 즉 예수 안에서 선택이라는 겁니다. "창세 전에 너희를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칼빈이나 루터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이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이 빠졌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우리 인간을 사랑한다" 라고 했는데, 그 중간에 뭉텅이로 빠졌다는 겁니다. 중간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수 안에서' 라는 것이 그만 빠졌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주장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를 선택했다" 라고 하는 것과 차이점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을 통해서 선택했다" 라고 했는데, 이것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해 놓고, 그 선택을 가능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다" 라고 하는 것이 똑같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보냈다는 것은 후천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기존 2,000년 동안의 신앙의 경우에는, "인간이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님을 보내서 지옥에 가야할 우리를 천국으로 보냈다" 라고 하는데, 그렇지요?
그러면 여전히 이게 누구 중심입니까? '나' 라는 말이죠. 즉 "나는 구원을 받아야 하겠어. 나는 기어이 천국에 가고야 말리라"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이 누구의 마음이라는 겁니까? 그것이 바로 악마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 주장을 합니까? "나는 귀하다" 라는 것인데, 누구보다도 더 귀하다는 겁니까? "나는 예수님보다 더 귀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바로 악마의 마음에 태어난, 저주 안에 태어난 우리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우리 본심이라는 말이죠.
* 장소이동 !!
그러니까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즉 뭔가 이동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장소이동'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내가 있던 나의 자리에서, 그 '나' 라는 게 없어지고 죽어버린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꾸만 '나' 라는 게 살아있으니까, 누구 걱정을 먼저 합니까? 자기 걱정을 먼저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를 믿고 해도 어떻다는 겁니까? 동영상에 최 모씨라는 분이 자꾸 답글을 다는데, 그게 바리새인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동원하든 무엇을 동원하든 간에, 그것은 누구를 위함이라는 겁니까? '나'를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다시 산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누구를 위해 산다고 합니까? "주를 위해서 산다" 라고 분명히 나와있다는 말이죠.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위한 '나'는 없어진 것인데, 성경은 없어졌다고 하고, 그리고 우리의 본심은 그대로 살아있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말로 단단히 사달이 났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제가 마음이 아픈데, 하지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찾아오기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제는 내가 전에 알던 나는 없어지고, 주를 위해서 사는 내가 새로 제조되고 만들어진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나'는, 이전처럼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겁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즉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자로 만들지게 되는데, 그런 자만이 어디를 간다는 겁니까? 천국에 간다는 말이죠.
* 예수 안의 선택 !!
왜냐하면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보다 더 강렬하고, 그 주님의 선택이 나의 선택을 죽여버렸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 안의 선택',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데, 즉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면 여기의 이 '예수 안' 이라는 말이 왜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나의 아들을 택했다" 라고 하는데, 그 '나의 아들'이 들어가는 그 사건이 있다는 겁니다.
(마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나오셔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때 하늘의 아버지께서 연락을 해주셨는데,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왔다는 말이죠.
여러분, 비둘기가 내려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바로 최종적인 상황이 예수님께 덮쳤다는 겁니다. 왜 노아홍수 때 보면 비둘기가 등장하는데, 그 비둘기가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으로 감람나무 잎을 입에 물고 방주 안으로 다시 날아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나'에게 없는 세계, 즉 자기에게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비둘기가 이동수단으로서 어떻게 나옵니까? 저쪽의 연락책으로서, 자기가 구경도 하지 못한 세계에 있던 감나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그쪽 세계의 사정을 이쪽 방주 안으로, 그렇게 그쪽 세계를 모르는 '나'에게 연락을 줄 때, 그게 바로 최종적인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불같이 온 게 아니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처럼 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든 일이 마감될 때, 우리는 어느새 그쪽 세계로 이동이 되어있다" 라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 사람들은 왜 세례요한에게 줄을 섰을까?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예수님께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그때 줄을 서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을까요? 자기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다고 하니까 거기에 줄을 섰느냐는 것이죠. 바쁜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에 세례요한이 왔다고 하면, 그러면 소문을 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벚꽃구경도 가지를 않고 우리교회에 우르르 몰려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기 우리교회에 가면 세례요한이 와서 세례를 준대. 그러면 나도 가서 그 세례를 받아야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방송국에서 나와서 인터뷰를 한다는 겁니다.
* 방송국 : 왜 여기에 줄을 섰습니까?
* 세례자 : 내가 죄가 많아요. 그래서 왔습니다.
* 방송국 : 죄가 많아도 그냥 살지, 여기에 왜 오십니까?
* 세례자 : 세례를 받으면 죄가 씻어진대요.
* 방송국 : 어떻게 말인가요?
* 세례자 :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러면 죄가 없어진대요.
인간은 자기 존재가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죄가 많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세례요한이 죄를 씻어주니, 그에게 나와서 죄 씻음을 받겠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죄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 그러면 예수님은 왜 줄을 섰습니까?
이제 문제가 나가겠는데, 여러분이 답변을 해보세요. 예수님은 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느냐는 것인데, 예수님은 왜 줄을 섰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답변을 하는데,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지금 제가 말한 것은 정답을 말하라는 게 아니고, 무엇이 모순이 되는지, 그 모순점을 지적하라고 질문을 했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죄가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겁니다. 목욕탕에는 누가 갑니까? 2시간 전에 목욕한 사람이 목욕탕이 갑니까?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래서 때를 씻으러 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때가 있어요? 없어요? 물론 때는 있었겠지만, 죄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회개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세례요한한테 왜 갑니까? 그렇게 간 이유가 모순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모순은 누가 발견합니까? 세례요한 당사자가 발견을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 여기 왜 오셨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이나 세례를 주는 사람이나, 즉 세례요한조차도 세례가 뭔지를 몰았다는 것이죠.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합류하는 것인데, 그러면 인간들끼리의 세례를 받는 현장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이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택하신 자라는 말이죠.
인간들끼리, 즉 아담의 마음을, 악마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자들끼리, 자기의 죄를 씻겠다고 하면서, 세례요한이 이벤트를 벌릴 때 거기에 참석했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고, 또한 예수님의 선택이라는 말이죠.
* 인간의 선택에 뛰어든 하나님의 선택 !!
그렇다면 그 선택이 어디에 뛰어든 겁니까? 인간들의 결정권과 선택권이 작동하는 거기에, 그런 세계에 하나님의 선택이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뛰어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현재 우리 인간들이 죄를 회개하고 죄를 씻는 방식으로는 구원이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는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나는 죄가 있다" 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겁니다. 즉 "내가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아까 제가 말씀을 해드렸는데, "내가 죄를 지었다" 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의 인생 자체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원래 저주 아래서 벌을 받기 위해서 죄라는 것이 인간을 다스리게 되어있다" 라는 것인데, 구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 내 죄는 내가 처리하겠다 !!
아까 가룟유다가 왜 자살을 했다고 했습니까? 그냥 곱게 늙도록 살지, 은 30냥을 가지고 어디에 투자해서 살지,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고 했습니까? 무엇을 포기하지 못한 겁니까? "나는 순수하다. 나는 착하다. 그런 내가 스승님을 팔아먹다니, 그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바로 나다" 라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룟유다은 도저히 자기가 그러한 죄책감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겠다고 여기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가 자기를 처벌함으로써, 즉 자기의 순수함은 순수함대로 살리면서, 자기의 죄는 자기 선에서 처리하면 된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가룟유다라는 겁니다.
그 가룟유다의 심성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기다리던 그 백성들도 동일하게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같은 아담의 자손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뒤집어버린다는 말이죠.
"네가 죄가 있다고? 이것이 어디서 시건방지게 나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지금 네가 고생을 한다고? 인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부로 말을 해? 네가 죄가 있다고, 그렇게 네가 하는 것은 네가 있는 자리 자체가 문제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리 자체를, 지금의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해야한다는 말이죠. 거기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한국이 싫다고 두바이로 이민을 간 사람이 있는데, 지금 혼나고 있다는 말이죠.
캐나다로 가고, 또 뉴질랜드로 가봤자 무엇입니까? 사탄의 마음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민을 가봤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물론 남극에 가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달나라로 갈까요?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세례인데, 즉 바꿔치기를 한다는 겁니다. 물이 있는데, 자기가 그 물 속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물 속에 진짜 제대로 하나님의 선택을 아는 선택된 하나님의 아들이 같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 공간이동, 준비 끝 !!
그러면 거기서 뭐가 발생되는고 하니, '나의 장소'가 드디어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해서, 마지막에 다 완성될 포지션으로 이동할 준비작업이 갖추어지게 된다는 말이죠. 준비작업인데, 물론 물 속에 갔다고 해서, 목욕탕 동기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물은 이제 시작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물을 강조하지 않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위에 것이 덮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데, 30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라고 하는데, 이것을 좀 심하게 어렵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시간과 기존의 공간과 상관없는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존의 시간과 기존의 공간을 제거해버린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위의 것이 아래 것으로 덮치게 되는데, 어제 오후설교 때 이게 나왔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너희는 땅에 속해서 기껏해야 땅의 생각밖에 모른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땅에 속한다" 라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그 시간의 공간이 공간밖에 모른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xy좌표'를 사용했는데, 어떤 지점의 존재를 표현할 때는 x축과 y축으로 요소를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마지막 때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시공간과 천국의 시공간이 중첩되어서, 역시 x와 y좌표로 형성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을 몰고 오신다는 말이죠. 기존의 시공간에서는 인간이 탈출을 하지 못하니, 그런 세계가 있는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때 이 세상에 있는 악마와 사람들이 반겼습니까? 추방을 시켰습니까? 죽여서 추방을 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점을 주님께서는 미리 아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제시한 시공간과 기존 인간들의 시공간과는 서로 섞일 수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대립을 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반대로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 점을 잠시 살펴보고 계속해서 이어나가도록 하겠는데, 여기서 요한복음 12장 35절을 보겠습니다.
(요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여러분, 인간 세계의 시공간에서의 빛은 뭐냐 하면, 태양이 뜰 때의 낮을 빛이라 하고, 태양이 사라지면 그것을 밤, 즉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어둠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시공간에서는 이것을 누구나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나와 함께 있으면 빛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빛에 해당하는 태양이 있을 때, 그때를 빛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존재가 있을 때를 빛이라고 하신다는 겁니까? 예수님 본인이 있을 때가 빛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이 말을 왜 알아듣지를 못할까요? 우리 인간이 이 시공간 안에서 자기는 엄연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한,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11장 9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여러분, 이게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가요?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무엇을 바꾸라는 겁니까? 중심을 바꾸라는 것이죠. 그 나라에 가려고 하면 그 나라를 미리 준비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자기가 알고 있는 시공간이 누구 중심이라는 겁니까? "내가 살아있는, 즉 '나' 중심으로 구축된 세상이다" 라고 한다면, 그 중심에서 누구는 빼라는 말인가요? '나'를 빼고 누구를 집어넣으라는 겁니까? 그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빠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가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살아있는 채로 착하고 순수하고 회개할 줄 아는데, 즉 죄를 아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무 착하니까 말이죠. 어때요? 자기가 너무 착하죠? 너무 순수하지 않습니까?
순수하지 않다고 하면 당장 죽여버려도 할 말이 없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나' 라는 그 중심을 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잘 났으니까 말이죠. 그 이유는 따지지 말라는 것인데, 악마의 마음은 따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악마는 무조건 우리가 '신' 이라고 했으니까, 이 신은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은 멸망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소중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죽을 사람은 없는데, 그렇게 죽을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 먼저 죽음의 자리에 뛰어드신 예수님 !!
그래서 주께서 먼저 시범을 보이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죽는 자리에 먼저 주님 자신이 뛰어드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세례' 라고 하는데, 물 세례가 시발점이라면, 그 완성은 십자가 세례라는 말이죠. 죄인들 속에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 버린다는 것이죠.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 버리면, 그 죽음은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죽음으로, 즉 "너희들은 새로운 동일성을, 새로운 자아의 일관성을 나의 십자가 죽음으로 획득하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게 될까요? 자기가 살고 있던 자리에서 자기가 죽는 자리가 아니고, 그게 예수님이 죽는 자리가 된다는 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데, 가룟유다처럼 자살을 해서 죽든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는 것은 뻔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사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죽는 자리로, 그렇게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 인간은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누가 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내가 죽었다. 그렇게 죽음으로써 악마의 자리였다" 라는 것을 밝히는 성령께서 꽂히게 되면, 그게 자기 백성에게 꽂히게 되면, 자기 백성은 '자기 자리'에서 '예수 안' 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로 이사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즉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전에 알던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택한 그 동일한 공간에 합류가 됨으로써, 비로소 창세 전의 선택이 우리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 서울의 달 !!
지금의 이 장소, 즉 현재 인간들이 사는 장소는 자기를 안정화시키는 장소라는 말이죠. 1969년도에 MBC에서 유명한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그게 '서울의 달' 이라는 겁니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의 화려함에 반해 가지고 "나도 서울 사람이 되어서 한번 출세해보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마 그 젊은 두 사람이 결국은 사랑에도 실패하고 이 터전에도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성공을 하려고 춤 선생을 하면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 라고 하는데, 하지만 결국은 사랑에도 실패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인공인 채시라도 다시 시골로 돌아가서 살게 되는데, 그런 내용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서울이라는 곳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상인가를 보여주는데, 왜 촌에 살지 않고 서울에 가야 합니까? 사람들이 왜 서울에 가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자기를 안정화시키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오늘 강의의 핵심 "공간의 안정화를 벗어나자"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공간의 안정화를 벗어나면, 이 빈칸이 어디로 이동하느냐 하면, 그것이 '천국의 안정화' 인데, 그것은 유대인들도 알고 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3절에 나오는데,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시면 매우 의외라고 느끼지 싶은데, "이런 안정감도 있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골로새서 1장 1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여기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라고 하는데, 벌써 그 뉘앙스가 다르다는 말이죠. 우리의 이 세상은 무슨 힘이 작동한다는 겁니까? 흑암의 권세가 지배한다는 것인데, 흑암의 권세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그의 사랑의' 라고 하는데, 사랑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자리는 어떤 장소가 아니고, 즉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은 사랑의 안정화인데, 사랑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 그 사랑 안으로 둔다는 것이죠.
* 천국은, 사랑의 안정화 !!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사랑에 미쳐서, 이 자기 사랑이 너무나 공고히 되어서, 그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 사랑을 뚫고 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 한국에 살다가 이탈리아에 살다가, 그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자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유치원 아이들도 그렇고 초등학생들도 그렇고, 나이가 들어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즉 자기 사랑 안에서 시공간을 가지고 안정화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게 깨어지면서, 그게 어디냐 하면, 사랑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아들의 나라' 라는 겁니다. 진짜 우리는 환장을 한다는 말이죠. 사랑인데, 그 나라가 뭐냐 하면, '나의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아들은 하나님의 유일하게 처음이고 끝으로 종결된 장소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창세기 전에 우리를 어디 안에서 택하셨다고 합니까? '예수 안'에서 택하셨는데, 그러면 그 예수님의 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그 공간이 사랑을 주어서, 현재 우리로 하여금 자기 중심의 공간의 안정성에서 벗어나서, 사랑의 안정성으로 가게 만든다는 겁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것을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 선발대로 예수님을 보냈다는 말이죠. 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뭐냐 하면, 비둘기처럼 성령이 오시고, 그리고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라서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에게 지도록, 즉 악마에게 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그렇게 포기를 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아버지가 아버지의 영을 보내서 건지십니까? 건진다는 말이죠.
미국의 비행사가 이란의 땅에 추락이 되었을 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특수부대를 보내서 그 조종사를 구출해냈다는 겁니다. 그때 조종사는 48시간 동안 산 속에 숨어서 얼마나 초조했겠느냐는 말이죠.
그냥 권총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벌벌 떨고 있는데, 점점 더 포위망이 좁혀온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제 이놈만 잡으면 전쟁은 드디어 종결이 된다. 우리가 이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병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그것이 소위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겁니다. 구하기, 그것이 구원이라는 말이죠. 구원, 즉 건져내는데, 자기 백성을 건져낸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교회의 교인이 3명이라고 하면, 그것을 걱정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3명이라도 하늘나라의 특수부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자기 백성이니 반드시 건진다는 것이죠.
* 덮쳐진 나라 !!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두 세 사람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이미 그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랑의 나라, 아들의 나라가 덮쳐졌다는 겁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밝혀냈는데, 보통 물질세계에서는 단번에 같은 장소에는 동일한 것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데, 예를 들어서, 손바닥이 여기에 있다가 동시에 저기 화분에 그 손바닥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데, 여기에 있으면 저기 없고, 저기에 있으면 여기에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동시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데 양자의 작은 입자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양자 얽힘' 이라는 게 있어서, 동일하게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서로 다른 세계가 '중첩'이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계속 발언하시는 내용을 보세요.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이 순간 이 장소에 있으면, 그 장소에는 자기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요? 그런 인간들에게 과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이해가 될까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물었는데, "지금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라고 말이죠.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아버지와 나는 함께 있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완전히 미쳤다고 보았다는 것이죠.
* 미쳤다, 미쳤어 !!
(요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을 가르치려도 드는데, "예수님아, 잘 들어라. 하늘에 보면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이 계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았는데, 출애굽기 4장 22절에 의해서 말이죠.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들은 말하기를, "아버지는 저기에 있고, 너는 여기에 있잖아. 그러니 어떻게 그 하나님 아버지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이야?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귀에 들려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선택과 결정이 항상 옳게 유지된다고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가 나쁜 짓을 할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자기가 나쁜 짓이라고 했을 때만 그게 나쁜 짓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게 처음부터 죄고 나쁜 짓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를 못했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과 똑같은데, 그러니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주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곳인지, 그것을 우리가 감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문화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여유가 있으면 가끔 나오고, 지금 노래교실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누구를 기쁘게 합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그러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말이죠. 즉 "나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문화센터에 가기로, 그렇게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자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동이 다 그런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여기서 마태복음 9장 보겠는데, 이 중첩에 대해서 여기도 한 예가 나온다는 말이죠.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너희 선생은 왜 그래?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또 시비를 거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숫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어울려도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리느냐? 우리는 모세의 율법으로 고상하고 착한 성품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자들과 만나지 않아. 그런데 너희 선생은 그게 뭐냐?"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러자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러면 병든 자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의원이, 즉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의사역할에 해당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누구라는 겁니까? 환자라는 말이죠.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환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인간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구절 하나라도 교회가 인정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목사들이 이 구절을 바탕으로 전혀 설교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돈을 내는 손님들이 다 떠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물론 요즘은 와도 돈도 내지도 않지만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고객이 왕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착한데, 세상이 이렇게 각박하니까, 정말로 사랑의 하나님이 내가 착한 만큼 보상을 해주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복을 좀 내리도록 목사님이 설교나 기도를 해주세요. 그렇게 축복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도대체 지금 교회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니까 당연히 잘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데, 오늘의 주제인 선택과 관련해서 말이죠. 그러면 14절부터 18절까지 보겠습니다.
(마 9: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지금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세례요한 편과 예수님 편이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자기들은 줄을 서서, 마치 목욕탕에서 떼를 씻듯이 가서 씻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세례요한의 권세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위로부터 온 선지자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바로 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서 참석했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자기는 누구라는 겁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는 것인데, 그들은 지금 이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무엇이 빠졌어요? 중첩이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여전히 누구를 위해서 살았어요? 누구를 위해 모든 활동을 합니까? 자기를 위해서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충실히 따르는 나, 그런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시킨 대로 하는 이 훌륭한 나, 남들은 하지 않는 그 착한 일을, 남들은 하나님 일에 관심도 없는데,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합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들은 "우리는 믿습니다. 세례요한이 하신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을 믿습니다" 라고 여겼는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과 세례요한이 하는 일이 결이 같아야 한다" 라고 하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은 금식을 하고 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때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그러니 금식과 정반대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죠.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그 모순과 그 내력에 대해서 몰랐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묻는 자들이 자기편이라고 간주하고, 그렇게 진지하게 묻고 있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뭐라고 답변을 해주겠습니까?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모른다고 치고 말이죠.
* 신랑의 등장 !!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신랑이 나오는데, 이 신랑이라는 말은 언제 유난히 사용이 되느냐 하면, 그 현장이 바로 혼인잔치 때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혼인잔치 때야말로 신랑이 돋보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혼인잔치가 어떤 날입니까? 슬픈 날이 아니고 기쁜 날이라는 겁니다. 기쁜 날인데, 그러면 기쁜 날에 금식을 합니까? 그러니 그들은 중첩을 모른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기쁜 날이 뭐냐 하면, 죄인을 죄인을 찾아내서 고쳐서 하늘나라로 이동시키는 날인데, 그렇게 이사하게 한 날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택인데, 창세 전부터 계획된, 예수 안에서 택한 백성들을 건지는 기쁜 날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기쁜 날에 누구만 기쁘다는 겁니까? 예수님만 기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왜 기뻐해야 하는지를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혼자 살면 뭐든지 슬프고, 주님이 오시면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게 된다" 라는 공식이 딱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혼자 살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염려가 되려하고 걱정스럽고 긴장이 되지만, 신랑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어떻다는 겁니까?
조금 전에 죄인의 경우는 남과 자기하고 견줄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라는 것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 사랑의 안정성 !!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이 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라는 것인데, 그게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배하는 상황, 그분 이미 그 환경을 무엇으로 지배합니까? 아까 했는데, 사랑으로 한다는 말이죠. 지배하는 공간의 안정성인데, 무엇이 안정되어 있다는 겁니까? 사랑의 안정성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에다가 안정성을 부여하려면, 사랑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사랑을 소유하게 되면 또 걱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어제까지는 사랑을 받았는데, 오늘 내가 지은 죄로 인해서 그 사랑을 놓치면 어떻게 하지?"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 이것은 안정성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 사랑은 100살까지도 그 마음이 같은데, 좀 더 늘릴까요? 그러면 110세까지라고 합시다. 요즘은 100살 넘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지고 110세까지 살더라도 무엇은 변함이 없다는 겁니까? 그것이 곧 사랑인데, 그러면 그 사랑이 왜 변함이 없을까요?
예수님이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이야 합니까? 환자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죽을병에 걸린, 바로 그런 자로 부각이 되고 드러날 때, 그것이 우리의 삶의 기쁨이 되고 범사에 감사가 된다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그 설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어떤 젊은 청년한테 단도 직입적으로 질문을 받았다는 겁니다.
* 목사님,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그 질문을 제가 여러분에게도 한번 던져보겠는데, "목사님,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러분, 그것이 어느 구절에 나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그것을 자기가 안다고 하지 않고, 단박에 떠올랐다고 하면서 답변을 하셨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이 떠올랐다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서 한번 분석을 해봅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청년은 자기를 사랑합니까? 미워합니까?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러면서 자기 장래를 생각해서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지옥 이야기를 하더란 말이죠.
그러자 청년은 여기서 화가 난 것인데, 왜냐하면 지옥에 가는 것은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한 사람만 간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는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할, 즉 죄를 지을 생각이 없는데, 그런데 지옥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나빴다는 말이죠.
그렇게 기분이 나쁘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목사에게 대들어야 하는데, 그래서 "목사님, 그게 성경 어디서 나옵니까?" 라고 공격했다는 겁니다. 그때 목사님이 "신학적으로 이렇습니다" 라고 우물주물하면 곤란하고, 성경구절을 들면서 단박에 잘라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5장을 언급하면서 정확한 답변을 해주었다는 겁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에 보면, 형제에게 라가라고, 즉 욕설을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이것도 역시 욕설인데, 그런 자는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살아가면서 어디 욕을 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요?
그러니 모든 인간은 욕을 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고, "원래 지옥에 가도록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안에 있지 않겠다는 그 이유 때문인데, 그래서 지옥에 가도록 되어있다는 것이죠.
* 거지 나사로 !!
이 이야기를 제가 오늘 강의 마지막 시간에 왜 하느냐 하면, 그것은 거지 나사로 이야기하기 위해서 했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여러분도 다 아시죠?
이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그 맞은편에는 누가 살고 있었죠? 부자가 살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사는, 그 공간의 차이를 보시라는 겁니다. 공간의 차이를 말이죠.
부자는 그 출신이 어디입니까? 부자라는 자리 출신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의 출신은 어디입니까? 거지가 자기 자리가 아니란 것이죠. 죽으면 어디에 갑니까? 원래의 자기 자리에 가는데, 그것을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언약의 품에 안긴다는 말이죠.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눅 16: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지금까지 속아왔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의 이 자리에서 사랑의 나라로 이동할 때, 그동안 여러분은 산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물론 지금도 고생을 하고 있고 말이죠. 여전히 하루 세 끼의 밥을 해주어야 하고, 자식들을 돌봐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말이죠. 즉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떠나라" 라는 것인데, 떠나는 자이기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소원처럼 하루빨리 이 땅을 떠나서 주와 거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이루어 달라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어리석은 마귀의 짓이고, 또한 무엇이 주의 뜻인지, 그 차이를 아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Let's go to the land of LOVE !!
2026,04,28 오후 3시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