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23 - 시간의 고랑
26,05,04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창세 전 선택 !!
오늘은 교재 209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로마서 9장 11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though they were not yet born and had done nothing either good or bad—in order that God's purpose of election might continue, not because of works but because of him who calls—
이 문장 하나에 여러 가지 요소가 칵테일처럼 섞여서 들어가 있는데, "창세 전에 너희를 택했다" 라고 하면 아주 간단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렇게 간단한데, 그런데 마구 섞여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세 전 영원한 때에 있던 선택, 그 선택이 우리 인간들이 설치는 이 세상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되고 표출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않고', '않고' 라는 것이 연발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에서 선택을 이야기하는데, 창세 전에는 뭐냐 하면,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그런데 선택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이라는 것,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약이 성립되었다는 것이죠. 아버지 아들 사이에 말이죠.
초반부터 중요한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인간도 없을 때 생겼던 이 선택 개념, 그렇다면 인간도 있고 시간도 있고 공간이 있는 이 바닥에 선택 개념이 섞여 들어왔을 때는, 과연 어떤 식으로 선택이 되느냐는 겁니다. 즉 선택 개념이 어떻게 본질을 드러내겠느냐는 것이죠.
"하늘에서 선택했다" 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러면 이 인간 세계에서 선택을 여러분이 어디 구경을 해봤습니까? 어떻게 찾아봤습니까? 발견이라도 했습니까? 그 현상을 말이죠. 참으로 난감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는, 아까 읽었던 로마서 9장 11절에 의하면, "무엇 무엇을 않고" 라고 하면서, 그 '않고' 라는 것이 연발해서 나온다는 말이죠. 이것은 뺀다는 것인데, 무엇을 뺍니까? 하나님의 선택 작용은 무엇을 빼게 하는고 하니, 인간의 행함을 제거하고 빼게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을 말이죠.
* 인간의 행함을 빼는 선택 !!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선택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행함을 뺀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사람의 존재를 뺀다는 뜻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이 있으면 행하기 때문에, 그런 인간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인간을 새로 만든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내가 없어지고 내가 새로 만들어진다" 라고 말이죠. 이게 시간과 공간 안에 선택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없어지고 내가 새로 만들어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없어지고" 라는 것 앞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거울을 보면 나타난다는 말이죠. 거울을 누가 나타나요? 귀신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나타난다" 라고 하는데, 사실은 귀신인데 말이죠.
그렇게 귀신의 자식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내가 거기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거기에 있고 그 '나'는 무엇을 합니까? 열심히 행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행함을 누가 기억합니까? 자기가 기억을 하는데, 그래서 "나는 행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선택을 믿었다" 라고 하면, 그 "선택을 믿었다" 라는 것이 어떻게 됩니까? 제거가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엄연히, 혹은 분명히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인데, 즉 "내가 엄연히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내가 새로 만들어진다 !!
그렇게 "내가 있다" 라고 하면, 그 다음의 순서가 무엇입니까? "내가 없다" 라는 것이 되고, 그렇게 "내가 없다" 라고 해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있다" 라고 해서 "내가 없다" 라는 것이 되고, 그렇게 "내가 없다" 라고 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내가 새로 만들어진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새로운 만들어질 때,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왜 이삭의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이전에 먼저 무엇이 먼저 있었죠?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결정을 지었다는 겁니다.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굉장히 쉬운데, 그렇다면 그 선택을 받아들일 때, 그 받아들이는 '나' 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이것은 살짝 어려운데,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선택을 받아서 기분이 참 좋아. 하지만 너는 모가지야" 라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 우리, 만날래?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한쪽은 성도고 다른 쪽은 사람은 믿지 않는 불신자라는 겁니다. 서로 친구사이라고 합시다. 불신자가 말하기를 "우리, 만날래?"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보통 "그래, 친구 사이니까 만나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선택을 여기다가 집어넣어 봅시다. 불신자가 "너, 만날래?" 라고 하면, 성도는 "너는 지금 누구를 보고 이야기했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불신자는 "나는 너를 보고 이야기했잖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러자 성도가 "나를 보고 했다고? 나는 지금 없는 중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없는 중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그 없음이 길어진다는,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그렇게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피노키오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지요? 피노키오의 코가 점점 더 길어지는데, 그렇게 자기가 없어진 기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는 말이죠. 싹뚝 잘라서 없어지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길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네가 나를 보고 만나자고 하는데, 하지만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있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어. 주님이 나를 장악하고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주님이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가 계속해서 하는 말이, "그래서 내가 당신과 만나려면 누구의 지시가 떨어져야 하는고 하니, '너는 저 사람과 만나라' 라고 하는 주님의 지시가 떨어질 때만 만날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야 성도는 불신자와 만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는 없고 누가 있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 그것이 거울에 비추어지는 성도의 존재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나' 라는 육신의 껍데기를 주님이 이용해 가지고,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주님의 대역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대역으로 말이죠.
* 주님의 대역 !!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렇게 성도를 복잡하게 다룰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가 해야될 것이, 그것은 지금 자기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주님에게 밀리고 있다는 그 움직임을 가지고, "주님이 여기 계신다" 라는 것을 증명해야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당신을 지금 내가 만날지 말지 생각해 볼게"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권리나 자격이 '나'로부터 이미 박탈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다만 주께서 만나게 할 때만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금 이 성도가 불신자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도가 불신자를 만났다고 하면, 그것은 누구의 뜻으로 만나는 겁니까? 주님에게 밀려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죠? 그러니 성도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너는 이제 그만 만나고 천국에 오너라" 라고 하면, 우리는 신나게 가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이 '나 없음'의 연장이니까 말이죠.
누군가가 "너는 아직도 그 남편하고 사나?" 라고 하면, "아직 이혼서류가 준비가 안되었어. 그래서 지금 이혼한 상태가 자꾸만 길어지고 있어"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말이죠(ㅋㅋ).
피노키오의 코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길어진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것은 "이것은 내 뜻이다", "내 뜻이 아니다" 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입니까? 자기 뜻이 아닌 상태가 계속해서 길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뜻이 아닌 상태, 이것을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 전에 있었던 선택이 지상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것을 우리가 교재를 보면서 해봅시다. 교재 209페이지를 쭉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게 때에 택하심을 따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 선택이란 무엇과 상관이 없다는 겁니까? 선택이 악이나 선을 행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것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도록 심어놨다는 하는 것이 딱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생명나무를 따먹으라고 했지만, 인간 방식으로 따먹지 못하고, 그 인간을 죽이는 방식으로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는 그 다음 조치가 살아있는 생명나무의 활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따먹지 못했는데, 결국 성도에게는 생명나무를 따먹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인간 방식으로는 접근을 하지 못하는데 결국은 성도에게는 생명나무가 주렁주렁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세계에 살게 하신다는 것이죠.
(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이미 끝난 상황 !!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이 나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선택이라는 겁니다. 이미 끝난 상황이란 것인데, 그것을 아까 '종말' 이라고 했는데, 이미 끝났다는 것, 그게 선택이라는 말이죠.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예를 들면, 어제 강의를 끝내고 숙소에 들어가는데, 라디오에서 축구 중계방송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벽 2시에 자기가 혼자 골대에 공을 넣으면 게임의 결과가 바뀔까요? 혼자서 아무도 없는데, 관중들이 모두 갔는데 골을 넣으면 결과가 바뀝니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죠.
선택은 창조 전에, 즉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된 것이기에, 그것은 무슨 이야기라는 겁니까? 이미 끝났다는 겁니다. 다 끝나고 나니 혼자서 골대에다가 100골을 넣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달라고 하지 마세요. 창세 전에 게임은 끝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축구 경기는 누구에서 결정이 났습니까? 여기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라고 되어있는데, 끝났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뜻이 부르시는 이로서 말미암아서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신약에서는 정답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구약을 통해서 왜 이런 정답이 도출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데, 구약이 바탕이 된다는 말이죠.
* '2'가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이 '1' !!
2가 먼저 등장하고 그 다음에 1이 되는데, 여기에 무엇이 관여하느냐 하면, 창세 전의 선택이 관여를 한다는 겁니다. 선택이라는 것이 지상에, 즉 여기에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2가 등장해서 1이 된다는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운동회 때 보면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요즘은 학부모들도 초대하지 않고, 릴레이도 자기들끼리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청군과 백군이 있는데, 결과가 어떻습니까? 두 패가 어떻게 됩니까? 승자가 결정이 되는데, 즉 둘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죠.
* 야곱과 에서 !!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아기를 낳지 못하는 리브가가 아기를 낳는데, 자기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를 낳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렇게 처음에 먼저 하나를 낳아야 맏이가 나온다는 말이죠.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다음에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낳더라도, 첫 번째는 아들이든 딸이든 나와야 하는데, 물론 아들이 나오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축복권이 아들로 전달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게 하나를 원했는데, 그런데 몇 명이 나왔지요? 두 명이 나왔다는 것이죠.
그렇게 둘이 나왔으면, 그 둘이 공평하게 서로가 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둘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싸우고 있더라는 겁니다. 나와서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아서 싸우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부터 싸우고 있습니까? 태중에서부터 싸운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태중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서로 투쟁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2가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죠. 서로 투쟁하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2가 나와도 야곱은 결국 이기고 큰아들인 에서는 질 것이다"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주님의 이 선택 개념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버린다는 말이죠. 그만 엉뚱한 해석이 되어버리는데, "야곱이 이기고 결국 에서가 졌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안 되고, '2' 라는 것은 우리 내부가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내부가 갈등을 일으키게 되면, 즉 그렇게 갈등을 일으키는 '나' 라는 것은 2입니까? 1입니까?
여기에서 '나'는 1인데, 그 1이 갈등을 일으키니까, 그러면 그 1은 무엇으로 나누어집니까? "분명히 나는 1을 유지시킬 수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2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야곱은 이것을 자기의 일로 생각했는데, 처음에 2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쌍둥이인 형이 있어서, 즉 "나 하나, 형 하나",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가 축복권을 줄 때, 원래 이 축복권은 맏이에게만 준다는 겁니다. 둘째부터는 그 맏이 밑에서 얻어먹고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어쨌든 간에 야곱은 맏이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러니 야곱은 2로 본 것이 아니고 1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싸워야 될 대상을 누구로 여겼다는 겁니까? 그 대상을 형으로 보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내가 하나고 저쪽이 하나고 둘이 합치면 쌍둥이, 즉 둘이다. 그렇게 2에서 1로, 나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싸운다" 라고 했을 때, 여기서 승자의 주인공은 1이 되는 '나'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 형의 장자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곱 !!
그렇게 자기가 승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으로 마무리가, 즉 '끝 게임' 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누가 말인가요? 야곱이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장자권을 빼내겠다고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형이 평소에 사냥하고 난 뒤에는 기력이 쇠하니까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먹고자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야곱이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형이 팥죽을 좋아했는데, 그것을 이용했다는 겁니다.
형 이름이 에서인데, 그 의미가 '붉다' 라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말이죠. 하나는 피부가 붉다는 것이고, 그리고 붉은 팥죽을 좋아해서 붉다고 하는, 그런 의미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허겁지겁 왔을 때, 벌써 냄새부터 피운다는 말이죠. 그러자 형이 환장을 해서 팥죽에 끌려간다는 겁니다. 야곱이 만든 팥죽에 유인이 되어서 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형이 먼저 "팥죽을 다오" 라고 나왔다는 겁니다.
이때 중요한 게 있는데, 미리 말씀을 해드리면, 야곱은 이것을 자기의 일로 본다는 말이죠. 그러면 1인데, 그리고 2에 해당되는 것은 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형의 장자직분을 빼앗는 것이, 태어날 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부합된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 승자독식 !!
이렇게 야곱이 형이 가지고 있는 일을 빼앗아서 영구적으로 1이 되는 방식에 있어서, 여기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공짜는 없다"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100% 승자가 다 가져간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창세기 27장 38절에 보면, 그만 야곱에게 복이 다 돌아가고 마는데, 그때 에서가 한 말이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겁니다. 에서가 아버지에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입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 천국이 아니면 지옥 !!
여기에서 하나가 등장하는데, "혹시 콩고물이라도 좀 없습니까?"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승자독식인데, 승리한 자가 모두 다 가져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복을 다 가져가면, 거기에 그 빈자리가 0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저주가 되겠습니까? 저주가 된다는 겁니다.
이 땅이 비어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는 말이죠. 복으로 채우든지 아니면 저주로 채우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천국으로 채우든지, 그러면 나머지는 무엇으로 채운다는 겁니까? 지옥으로 채운다는 것이죠.
* 피조물은 배치될 뿐 !!
이게 피조물의 운명인데, 피조물은 구상을 할 권한과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다만 주께서 설계한대로 배당을 받고 배치될 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이 갈 곳은 둘 중에 하나라는 말이죠.
가정주부가 빨래를 하고 난 뒤에 그냥 방치합니까?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양발을 그냥 방에 놔두는 법이 없다는 말이죠. 양발은 양말대로, 속옷은 속옷대로 서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들과 구분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정리정돈을 매우 잘하시는데,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는 말이죠. 빈 곳, 즉 진공은 주께서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그냥 놔두는 것은 없는데, 그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집어넣어서 채우고야 만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서 출세했다든지, 부동산 값이 올라서 부자가 되었다든지,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지옥이라는 서랍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누가 가르치는고 하니, 우리는 야곱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겁니다.
* 공짜는 없다 !!
그 다음에는 "공짜는 없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에서사 팥죽을 자기게 달라고 했을 때, 야곱은 공짜는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너의 무엇을 가지고 와라" 라는 것인데, 즉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제공해주면 이 팥죽을 너에게 줄 용의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공짜가 없으니까, 일종의 거래가 된다는 말이죠. 이 공짜가 없다는 것을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떤 임금이 회계를 할 때, 탕감을 받은 자가 나오는데, 그때 이 '공짜 없음'의 원리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마 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어떤 사람이 큰 빚을 모두 탕감을 받아 놓고는, 그 사람이 자기에게 적은 돈을 빚 진 사람에게는 시비를 건다고 하면, 그 다음에는 공짜가 없으니까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너의 모든 것이 다 나가리가 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죄사함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인데, 주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는 동시에, 우리는 '나의 일', 즉 '나' 라는 것을 주께서 다 가져 가신다는 말이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바로 이게 복인데, 즉 "더 이상 내 인생을 내가 가지고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서 '나' 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에게 너무나 짐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까 신자와 불신자의 대화에서, "나도 당신과 만나고 싶은데, 주께서 허락하시면 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까, "지금 나는 나 혼자 있지 않다" 라는 것을, 다른 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벌써 끝내도 되는데, 자꾸만 이어지고 길어진다는 말이죠.
* 천사들을 만나는 야곱 !!
그래서 이제 야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드디어 장자권을 얻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장자권과 그 축복을 받았으니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들어오면, 그렇게 신이 났던 야곱이 인간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천사를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야곱이라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 놀랍게도 누구를 만난다는 겁니까? 육신이 없는 영적 존재인 천사들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죠. 천사 집단, 즉 천사 군대를 만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야곱이 원했던 것입니까? 야곱이 "나는 천사를 보고 싶어" 라고 했습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천사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영적 세계 쪽에서 야곱을 찾아온다는 것은, 이게 누구의 소원이라는 겁니까?
이 만남을 누가 시도했는고 하니, 야곱은 시도하지 않았는데, 영적 세계에서 했다는 말이죠. 영적 세계에서 언약과 동반해서 시도했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이지 싶은데, 쓰레기와 빗자루를 혼동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죠. 쓰레기가 알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빗자루 질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쓰레기인데, 영적세계에서 우리를 후린다고 할까요? 우리를 이끈다고 할까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확정이 되었는데, 창세 전에 이미 끝났다는 말이죠. 월드컵 게임이 끝나고, 이미 우승팀이 결정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합격이야. 너는 이미 승리했어" 라고 하는 그 능력, 즉 언약이라는 에너지를 가지고서 천사들이 이 세상을 방문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야곱이 드디어 천사들을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야곱이 부럽습니까? 부럽지 않습니까? 당연히 부럽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전부 다 과학과 철학과 예술, 이런 것이 전부 다 무엇입니까? 인간들끼리 생성한 육적인 것인데,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 언약 안에는 세상의 종말이 !!
그런데 야곱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왔으니까, 자기의 세상관, 그 범주가 어떻게 됩니까? 확장이 된다는 겁니다. 어디까지 말인가요? 영적 세계까지인데, 영적 세계가 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세상에 끝까지 한꺼번에 다 알아버렸다는 겁니다.
무엇을 알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까? 그것이 언약인데, 그래서 언약 안에는 세상 종말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주께서 만든 영적 세계, 그렇게 끝까지 아는 방법은 바로 언약만 알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 그 언약을 알면 다 알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야곱의 소원이 아니고 쳐들어왔다는 겁니다. 야곱은 무엇만 생각했는고 하니까, 이 언약이 오든 말든 야곱은 "이제 나는 승리자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챙겼던 축복, 즉 많은 재산을 챙겼는데, 그런데 밤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야곱에게 들이닥쳤다는 겁니다.
그러자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지키기 위해서, 즉 나의 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그 미지의 존재와 싸웠다는 말이죠. 물론 나중에 그게 천사임을 알았는데, 아무튼 싸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장자권과 거짓말 !!
그런데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뺐는데 있어서, 왜 거짓말이 동원되어야 했을까요?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마음 속으로 해본 경험이 있지 싶은데 말이죠. 하나님은 선한 분인데, 그러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은 그 선한 하나님에게도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권을 인간이 받는데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곱게 하지를 않고 무엇인가를 드러내게 했다는 말이죠. 즉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염소 가죽을 만들어야 했고, 음성을 변조해야 했고, 고기도 사냥한 고기가 아닌 다른 고기를 동원해야 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야곱이 거짓말을 했느냐는 겁니다. 야곱이 가진 생각, 즉 "나는 나다", 혹은 "나는 최종적인 1이다" 라고 하는, 여기서부터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거짓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야곱이 거짓말을 하는데, 이 거짓말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겁니까? 자기가 형을 이기고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 방식으로, 즉 자기가 그 언약에 따내기 위해서, 즉 자기를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누구와 상대를 했습니까? 에서와 상대를 했는데, 그 야곱에게 천사가 와서, 야곱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그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여기서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존재가 바뀐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존재에 무엇인가가 있어야 이름을 붙이는데, 그러니 그 존재에 대한 이름이 바뀐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이름으로 존재가 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주어진 이름에 맞추어서 존재가 그 새로운 이름과 일치된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
그 이름이 무엇으로 바뀌었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기존의 야곱은 어디에 가있습니까? 기존의 야곱은, 자기가 거짓말을 해서 형을 이기면 이긴다고 생각하는 그 '나', 즉 자기가 궁극적인 1이라고 여겼던 그 야곱 야곱은 어디에 갔느냐는 겁니다.
기존의 야곱이 있는데, 야곱은 '야곱' 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손인데, 그렇게 손으로 덮어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지의 몸에서 뻗어 나온 손인데, 미지의 몸에서, 즉 거짓말쟁이 야곱을, 육적인 야곱을, 자기밖에 모르는 야곱을 덮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새로운 이름은 무슨 이름입니까? 이 이름은 바로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인데, 시편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나를 덮어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의 이름 위에 주의 이름을 덮어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시 91: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시 109:21)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 주님이 덮어준 이불 !!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밤에 추워지면 이불을 어떻게 합니까? 이불을 바닥에 깝니까? 이불을 덮습니까? 너무 쉬운데, 이불을 덮는데, 이불의 보호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불을 덮으면 여러분은 죽습니까? 멀쩡합니까? 멀쩡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게 바로 육적인 것인데, 하지만 주님이 덮어준 이불은 우리를 죽인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죽음으로 덮여진다는 것이죠. 우리의 죽음으로 말이죠. 여기에서 누가 창세기 32장 30절을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 죽음으로서 영에 합류하게 된다 !!
여기에 "생명이 보전되었다" 라고 하는데, 야곱은 여기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영이 찾아오게 되면 육은 필히 없어진다" 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영에 합류하게 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즉 "이불을 덮는데, 그 이불이 나를 출석시켜서 더 이상 내 이름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이름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면, 아까 로마서 9장 11절 말씀, 즉 "그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전혀 고려치 않는다" 라고 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 죽은 자가 무엇을 해도 그것은 어디에 해당이 됩니까? 주님의 덮어줌의 대상일 뿐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착하든지 악하든지, 즉 거짓말을 하든지 바른 소리를 해서 형에게 팥죽을 주든지 상관없이, 그런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대상이 되지 않게 되면, 나중에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천국에 갈 때, 거기에 야곱의 행함이 거기에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지 않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 하나님에 의해서 실현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 몸이 '나'와 '너'의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나'와 '너'의 싸움이 아니고, '나'를 1로 규정해서, "나는 계속 나이고 싶다" 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너 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라는 것인데, 즉 "너는 내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너의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나의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아까 코가 길어진다고 했는데, 피노키오가 코가 무엇을 하면 길어집니까? 거짓말을 하면 길어지는데, 그러면 우리가 주님과 만날 때, 우리는 이미 죽었는데 자꾸 우리의 코가 길어진다는 겁니다. 우리의 육신이 뿜어내는 죄가 점점 길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길어짐과 동시에 무엇이 같이 넘칩니까?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넘치는고 하니, 하나님의 공로가, 그 대가가 넘친다는 말이죠. 즉 우리의 죄가 넘칠수록 주님의 죄 용서도 더 넘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말이죠.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 플랑 드 콩시스턴스(plan de consistance) !!
그러면 여기서 진도를 더 나가봅시다. 프랑스말로 '플랑 드 콩시스턴스(plan de consistance)' 라는 것이 있는데, 번역을 하면 "공속(共續), 즉 공통적으로 유지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공속면'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여기서 이 'plan' 이라는 것은 계획이라는 뜻도 되지만, 면이라는 겁니다. 즉 공통적으로 똑같이 지속되는 면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는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도록, 그렇게 주께서 우리를 덮쳤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공(共)', 즉 '같이 한다' 라는 말은 섞인다는 겁니까? 섞이지 않는다는 겁니까? 섞이지 않으면서도 공통된 영적인 면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우리를 죄인으로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프랑스 콩시스턴스(공속면)' 라는 것은, "같이 섞여있으면서 새로운 영적인 면이 성도를 통해서 이 지상에 펼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TV광고를 보면 10초만에 펴지는 텐트가 있는데, 잔디밭밖에 없는 곳에, 텐트는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조그마한 뭉치를 하나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어부가 투망을 하듯이 쫙 뿌리니까, 여기서 자기들끼리 힘이 여기 저기 걸려 가지고 하나의 작은 텐트를 만든다는 것이죠. 없는 데서 무엇이 생기죠?
공속면, 즉 영적인 세계가 홀연히 그 현장에 드러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그 현장에서 드러난 텐트의 구성요소는 과연 1일까요? 아니면 2일까요? 새로 등장한 텐트, 즉 프랑스말로 '콩시스탄스' 라는 것인데, 이것이 1일까요? 2일까요? 그것은 '2' 라는 말이죠.
* 나의 구원이 아닌, 예수님의 구원 !!
무슨 말인고 하니, 성도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나의 구원'은 없는데,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구원' 밖에 없다는 말이죠. 2가 되어서 1이 나오는 것, 이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의 행함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행함 끝!" 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행함은 오직 주님 안에서 죄라는 모습으로, 거기에 재료로 들어갈 뿐이라는 말이죠. 그 행함이 결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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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성의 구도(plan de consistance)
일관성이란,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서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을 할 때에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 흔히 준거(reference)는 어떤 표준을 상정하지만 일관성은 표준을 상정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 딴 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 환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정한 상호인식의 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관성은 단일한 기호(taste)를 생산할 수 있도록 처방에서 요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흐름들, 영토들, 기계들, 욕망의 세계들, 그것들의 성질의 차이가 무엇이든 그것들은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혹은 내재성의 평면)에 이르게 된다.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횡단적 통일체를 구성하는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연접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떠한 고정된 질서나 구조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된 순수한 강렬도들의 응집성을 말한다. (철학사전, 2009., 임석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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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이 이 세상에서는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인데, 아까 이야기한, 즉 "부르시는 자의 창세 전에 있었던 그 선택, 그것이 지상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라는 것인데, 그 선택은 누구에게서만 나옵니까?
그것은 부르시는 이인데, 영적 세계에서 누구를 부른다는 겁니까? 육적 인간을 불러준다는 말이죠. 그 부르시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게 구약에 나오는 야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여기서 사도행전 19장 15절을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 고소하는 자, 악마 !!
마귀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또한 바울도 안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마귀가 잘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보고 "벌써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왜 우리 일에 상관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들어가는고 하니, 바울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설교를 했는지 싶은데, 마귀가 성도에게는 있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마귀가 시력이 약해서 그런가요?
이것은 잘못 들으면 "마귀가 성도에 대해서 모른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니라 "성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 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에게 있어서 성도는 자기가 터치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귀는 예수 안에 있는지 있지 않는지,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마귀는 바로 고소를 한다는 말이죠. 마귀가 '고소자' 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고소를 하면서 율법을 들이댄다는 겁니다. "네가 이것을 지켰어?" 라고 하면서 계속 쑤시는데, 왜냐하면 마귀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심어놓았다는 말이죠.
전에 악마는 인간을 다루는 수용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악마가 인간을 다룰 수 있도록 뒤에 하나 장치를 심어놓았다는 겁니다. 일종의 도청장치, 혹은 추적기를 달아놨다고 할까요? 그래서 인간은 어디를 가도 이 악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선과 악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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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를 '인간을 다루는 수용체(Receptor)'로 해석하는 것은, 악마의 전통적인 영적, 종교적 의미를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 악마는 외부의 절대적인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본성이나 유혹에 반응하는 지점(수용체)으로 묘사됩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악마는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한 타락한 천사로 묘사되지만, 현대적인 해석에서는 인간을 파멸이나 악으로 이끄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나 감정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악마는 인간의 연약하고 그릇된 마음의 수용체에 작용하여 인간의 행동을 악으로 이끄는 힘"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구글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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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악마는 인간을 괴롭히는데,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에 적응하게 만들고 충실하게 만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발짝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수준에서 같이 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발작을 일으킵니까? 그들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전서 6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5절입니다.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 서울법대 출신 & 이화여대 가정과 출신 !!
지금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재판관에게 성도들이 판단을 받겠다고 하면서, 송사할 것을 가지고 갈 필요가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재판관들이 어느 대학 출신이 많습니까? 서울대 법대 출신이 많다는 말이죠.
그러면 서울 법대에 그냥 들어갑니까? 학교에서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요즘은 의대로 많이들 빠지지만, 과거에는 의대다는 법대 쪽으로 많이 갔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여자들이 공부를 잘하면 이화여대 가정과를 갔는데, 왜냐하면 최고의 신부감은 이화여대 가정과를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 법대 출신의 판사와 결혼을 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커플인데, 그런 것이 TV드라마로 방영이 되곤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엘리트들이 재판을 할 때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법리를 검토하고 논리를 따져서, 인간이 내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지적 향연을 벌리면서, 엘리트의 그 빛을 발산하면서 재판을 한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그랬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성도의 지혜는 어떻습니까? 그것보다도 떨어져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겁니다. 비록 그들보다도 아이큐는 낮고 수능점수는 낮더라도,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초월하는 계기, 그렇게 넘어설 때는 과연 어떤 내용을 집어넣어야 그들을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무엇을 집어넣어야,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라고 해도 그 똑똑한 재판관들이 따라오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 왜 시시한 세상 재판관 앞에 서는가?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6장의 이야기인데, 이 세상 재판관들이 무엇을 안다고 그 앞에서 재판을 받느냐는 것이죠. 그들이 아는 게 있어야, 그들 앞에서 재판을 받던지 말던지 해야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성도에게는 천사들도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왜 시시한 재판관 앞에 서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흉내도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 지혜의 면에서 어떤 고랑이 있고 어떤 틈이 있고 간격이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성도는 이 고랑을 건너오면서 그들에게 무슨 내용을 전달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즉 어떤 내용이 이 고랑에 흐르고 있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너희가 하나님에게 죽어봤나?" 라는 것인데, 하나님에 의한 덮침을 당해봤느냐는 겁니다. 싸우다가 "아이고, 나는 죽었구나" 라고 하는 야곱의 경험을 해봤냐는 말이죠. 즉 "너희가 언약의 매운 맛을 본 적이 있는가? 죄 용서에서는 엄청난 대가가 있다고 하는 경험을 해봤나?" 라는 겁니다.
그냥 탕감해주는 게 아닌데, 하나님이 자기 피로, 즉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탕감해 주셨다는 말이죠. "이 불신자 판사야, 너는 너를 무엇으로 보느냐? 1로 보잖아. 그런데 성도는 1에서 2가 되었어" 라는 겁니다.
* 다시 하면 !!
다시 해봅시다. "나는 있다" 라고 하면, "나는 있다" 라고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도의 경우에는 "나는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으로 바뀌죠? "나는 없다" 라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자기 똑똑함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나는 있다 → 나는 없다" 라는 것에서, "새로운 나가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나'는 무엇입니까? '플랑 드 콩시스턴스(plan de consistance)', 이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 라는 것인데, 즉 '임마누엘' 이라는 말이죠.
경상도 말로는 "창세 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한데이" 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가 미처 몰랐던 자기의 마지막 모습이 무엇인고 하니,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서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로 갑니까? 그들은 지옥이라는 서랍으로 향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는 겁니다. 줘도 밉고 주지 않아도 밉고 그냥 밉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그냥 미워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어디로 갑니까? 성령이 찾아가지 않은 자들인데, 이것을 누가 알지요?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마귀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가 그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사람이잖아. 나와 같이 저주를 받을 입장이잖아. 그런데 네가 어디서 흉내를 내? 영원히 저주를 받을 자인데, 왜 그래?"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 시간의 고랑 !!
그렇게 1에서 2가 되는데, 여기에는 고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시간의 고랑'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오늘의 강의제목을 이것으로 정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시간의 고랑, 그렇다면 이것이 세상적으로 며칠이냐 되겠느냐는 겁니다. 주님이 이 시간의 고랑을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께서는 모든 시간을 한 곳에다가 집중하셨는데, 그 시간이 간격이 얼마인가요? 삼일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누가복음 13장 32절과 33절을 보겠습니다.
(눅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 길, 즉 3일 길을 모든 사람은 가지 못하고, 누구만 통과한다는 겁니까? 주님의 갈 길이라는 겁니다. 그게 "나의 갈 길" 인데, 창세기 전에 언약의 대상자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인간이 아니고 인자라는 말이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는데, 어제 설교시간에 '가나안'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공간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구약에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듯이, 예수님은 새로운 시간을 만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분으로서, 가난의 새로운 의미, 즉 그냥 가난이 아니고,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이 아니고, 어떤 가난이라는 겁니까?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천국과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 새로운 시간, '3일' !!
이 새로운 시간, 즉 '3일' 이라는 갭이 있는데, 그 갭을 건널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이 '3일' 이라는 시간의 고랑, 이 고랑에서 예수님 이전에 많은 하나님의 부르신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들도 역시 '3일' 이라는 고랑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이것을 경험한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모세 및 이스라엘이라는 말이죠. 그들이 이 시간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19장 15절과 1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출 19: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출 19:16)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 3일을 기다려라 !!
모세가 백성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3일을 기다려라" 라고 하는데, 즉 침묵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대기상태라는 것이죠. 인간이 "나는 나다" 라고 여겼던 것이 해체되는데, 즉 주님의 언약이 해체되면서 이제 영적인 존재가 그들을 덮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덮침으로써 '나'를 납치해 가는, 그 기간이 곧 '3일'의 기간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납치해서 데려가면서 '나'의 행함, '나'의 선악이라는 지식, 즉 서울법대를 나오고 하는 그 모든 엘리트적인 똑똑함,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3일을 기다리는데, 이 3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 보낼 때부터 언급했다는 말이죠. 출애굽기 3장 18절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 백성을 이끄는데 사흘 길 동안 하겠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출 3:18)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사흘 길, 즉 새로운 시간인데, 그러면 그 사흘 다음에 어떤 예배 장소가 특정이 되어있습니까? 시내산까지 사흘만에 갈 수 없고, 3개월만에 도착하게 된다는 겁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월 15일에 라암셋을 출발해서 3월 15일에 시내산에 도착한 것으로 여겨짐)
* 3일, 공간에 대한 '시간적 우위' !!
그런데 이것을 사흘길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데, 애굽의 라암셋에서 출발해서 3일 동안 가는 거리라면 별로 멀지 않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실제로 출애굽을 하고 난 뒤에는 시내산 밑에서, 즉 신이 사는 영적세계 밑에서 모든 인간의 영역, 즉 애굽이고 이스라엘이고 간에 모든 것은 이 '3일' 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육적인 인간이 알고 있는, 즉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간이 사는 땅과,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생명나무가 있는 곳까지, '3일' 이라는 시간적인 고랑을 만들어 버린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 시간적 고랑을, 공간에 대한 '시간적 우위' 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로 갈 때까지, 구약에서부터 점점 더 세밀해지고, 그 내용이 뚜렷해진다는 말이죠. 그것이 호세아서 6장 1절에서 2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을 잠이 놀라도록 누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간음한 여인과 결혼한 호세아 !!
호세아 선지자가 자기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너희들은 간음한 이스라엘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간음한 여인과 혼인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어떻다는 겁니까? 저주받은, 음란한 자식들이 나왔다는 것이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 그 언약의 작용을 발현시키기 위해서, "일단 너희들의 본질부터 알자. 너희들은 이 세상과 짝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간음한 여인의 자식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육에서 나왔으니 육이다" 라고 하는데, 즉 "그것으로 너희는 끝났어" 라는 겁니다. 그렇게 끝났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데 언약이 덮쳐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3일 동안 그 시간 고랑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뒤떨어진다는 말이죠.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다시 말해서, '3일' 이라는 고랑이 부각되면서 찢어졌는데, 즉 간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졌는데, 여기에 고랑에 속한 분이 이 세상에 이스라엘 속의 언약을 가지고 합류함으로써, 찢어진 그들을, 간음한 그들을 사흘만에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싸매 주시고 죽은 데서 살리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어떤 남자의 아들이 귀신으로 인한 간질에 걸려서 고생을 했다는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제자들을 보고 고쳐달라고 했지만 고치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책망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 22절과 23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이 며칠만에 살아납니까? 3일만에 살아나신다는 겁니다.
(마 17:14)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마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마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마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마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1) (없음)
(마 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시간의 고랑을 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 !!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자기 탓으로, 또는 자기가 행해야 될 일의 재료거리로 다 끌어당기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데, "인간의 운명은 시간이 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성도에 해당되는 것인데, 이 고랑이 뒤에서 끊어진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고랑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악마와 한통속 되어서, 즉 선악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선악을 알고 지상에 내려와서는, 즉 시간과 공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서울 법대 출신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인간의 세계에서 이미 다 아는 것인데,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모른다는 겁니까?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죠. 이 고랑은 악마가 건너 오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고랑인데, 이 고랑을 악마가 건너지 못한다면,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있는 인간도 역시 이 고랑을 넘을 수 없다는 겁니다.
* 요셉의 꿈 해석 !!
이 고랑이 창세기에 보면 요셉의 꿈에 지혜로, 징후적으로, 혹은 증상적으로 애굽 나라에 드러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요셉도 이 꿈을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사람들도 모르는데, 이 시간의 고랑에 대해서 말이죠.
창세기 40장 12절에 보면,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라고 하면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는데, 하지만 요셉도 자기가 왜 지하 교도소에 갇혀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다만 아는 것은 꿈이 그런 코스를 하니까 자기는 갈 뿐이라는 것이죠.
(창 40:12)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창 40: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여러분, 요셉이 누구의 아들이죠? 야곱의 아들인데, 그러면 이 야곱은 현재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공속면, 즉 '플랑 드 콩시스턴스' 라는 것인데, 지금 자기 운명이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죠.
그런 야곱의 아들이 누구냐 하면, 그가 요셉이고, 이 요셉에게 난데없이 무엇이 덮칩니까? 꿈이 덮쳤다는 겁니다. 왜 아까 덮치는 손가락을 그렸잖아요? 씻는데 무엇인가가 덮친다는 말이죠. 그렇게 덮치면서 동일한 새로운 영적인 면, 그것이 인간과 죄인과 의인이 되신 주님과 함께 그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요셉에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 바로 왕의 신하 둘이 같이 등장한다는 말이죠.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 그렇게 신하가 두 사람인데, 그들의 운명이 꿈 해석을 요구한 이후에 며칠만에 되느냐 하면, 사흘 후에 각각의 운명이 확정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운명의 갈 길이 어떻습니까? 방향이 서로 반대였다는 말이죠. 술을 바치는 신하는 사흘 뒤에 다시 원대 복귀가 되고, 그런데 떡 굽는 관원장의 경우에는, 사흘 뒤에 모가지가 날아간다는 겁니다.
(창 40:18) 요셉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창 40: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이 대목을 보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술은 마시지 말라고 하지만 빵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술을 바치는 사람은 살고 빵을 바치는 사람은 죽느냐는 겁니다. 그래도 빵이 술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이죠.
여러분, 느헤미야의 직업이 무엇이죠? 술 관원장인데, 포도주를 감별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왕에게 술을 바치면, 먼저 느헤미아는 술을 맛을 본다는 말이죠.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떻게 감별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마셔봐야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인간의 행함을 여기에다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데, 결국 그 사람의 운명은 "술을 바쳤느냐? 빵을 바쳤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은 누구의 마음대로인고 하면, 어디까지나 왕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바로 왕의 마음도 누구의 손에 있습니까? 왕의 마음도 결국은, 물론 주님에게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만, 일단은 요셉의 꿈 해석에 달렸고, 그 요셉의 꿈 해석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주님의 운명에 달렸다는 말이죠.
* 악마는 건지지 못하는 시간의 고랑 !!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지상의 시간, 우리는 시간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주께서 찾아오니까 시간이 끊어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을 끝냄으로서, 악마가 이것을 건너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악마가 건너올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악마는 자기 손에서 벗어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너무 잘 아는데,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에서 마귀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이미 저쪽으로 건너간 사람, 악마가 건너갈 수 없는 곳에 건너가 버린 사람, 그렇게 이미 천국에 도달하는 사람은 누구라는 겁니까? 일단 예수님이고, 그 다음이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이라는 겁니다.
* 성도는, 이미 고랑을 건넌 자들 !!
그렇게 건너간 사람들의 명단에 여러분도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아무튼 마귀가 "나는 탈취하지 못한다. 이것은 내 소속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흔히들 "물 건너갔다" 라고 하는데, 즉 고랑을 이미 건너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자기가 더 터치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이미 건너왔는데,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이 그만 건너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느냐는 말이죠. 물론 공부를 잘해서 대기업에 다니고 하는 것은 좋은데, 건너오지 않았다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그것은 이 세상 전부가 악마의 활동으로 보이신다면, 이미 그 사람은 시간의 고랑을 건너서, 천국에 온 사람이라는 말이죠.
* 늘어지는 종말 !!
"시간의 고랑을 건너왔다" 라는 말을 제가 편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더 힘들게 이야기를 하면, "주님과 함께 고랑에 빠졌다" 라고 여기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죠. 시간은 영원하니까, 그 시간이 중간에 끊어졌다는 생각을 우리 인간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도는 주님과 함께 시간 끝 속에, 그 고랑 속에 빠졌다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말이죠. 그래서 구원이 된 것인데, 이것을 아까 종말이 계속해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종말 자체가 이어지고 늘어진다고 했다는 말이죠.
* 성도끼리의 재판 !!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마귀의 활동에 의해서 된 것임을 안다고 하면, 아까 이야기한 고린도전서 6장에서, 성도들끼리 사소한 것을 가지고 재판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이 교인들끼리가 아니고 성도들끼리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교인이라는 것은 죽지 않았기에 재판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교인들끼리가 아니고, 성도들끼리는 어떻다는 겁니까? 재판장 앞에 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집사님에게 돈을 10만원 빌렸는데, 그만 잊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집사님은 제가 안다고 생각하고 "이 목사님에게 재판을 걸어야 되겠다" 라고 했을 때, 제가 "아이고, 그만 잊어버렸어요. 바로 갚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그 재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빌린 기억이 없습니다" 라고 나오면 집사님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 거야" 라고 나오면 안 되고, 그때는 "내가 그냥 주었어요"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이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가요?
왜냐하면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게 아니고 주의 돈이라는 겁니다. 자기 돈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돈이 아닌데, 그리고 그것을 기억지 나지 않도록 잊어버린 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세상 재판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이 세상 재판은 스스로 자기가 1이라고 여길 경우에만 나가는데, 즉 "너만 1이냐? 나도 1이다" 라는 것인데, 이게 야곱과 에서의 경우라는 말이죠. "내가 너에게 질 줄 아느냐?" 라는 것인데, 이때는 세상 재판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둘 다 "이번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할 경우에, 그때는 세상 재판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 교통사고가 나도 !!
예를 들어서, 장로님이 운전을 하다가 그만 제가 모는 차를 박았다고 하더라도, 제가 모는 차가 장로님 차를 박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ㅋㅋ). 그런데 그것은 저를 죽이기 위해서 박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어디 죽이는 방법이 그것 외에 달리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운전을 그만 잘못해서 박아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가 박은 것도, 내 의지와 내 행함과 내 생각이 끼어들지 않도록 주께서 박게 하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몰던 차는 왜 박혔습니까? 하필이면 왜 거기로 갔느냐는 겁니다. 운전할 때 기도를 좀 하던지 하지, 기도도 하지 않고 바로 출발해서 가다가 그만 박혔는데, 그러면 그것은 누구의 뜻입니까?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재판을 받을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이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일은 무엇이 개입되어 있다는 겁니까? 악마가 설치는 세상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세상이라는 것을 성도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선택된 자로서, 아직 죽이지 않고 계속해서 종말이 늘어지고 있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이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십자가만 자랑해야 될 이유가, 주께서 틈을 만들어서 어느 누구도, 인간의 행함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악마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 세계에 들어가게 해주신 줄로 압니다. 그러니 이 땅에 살면서 저희들의 뜻대로 살지 말고, 오직 주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Let's live as the puppet of the Lord !!
2026,05,07 오후 3시에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