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없는 자식
2026년 3월 2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5:3-7
(5:3)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5: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5:5)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5: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5:7)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공동체의 풍습과 관습을 외면하기란 인간으로서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혈육이란 삶의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지주 역할을 하게 마련입니다. 생계에 필요한 금전 조달은 주로 근력이 강한 아버지로부터 제공됩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존재의 근간이 끊어지는 겁니다.
‘살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가치가 모두 무너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형편이 이 정도 되면 종교나 율법이나 하나님이니 따지지 않고 일단 살고 보자 하는 식으로 나가게 마련입니다. 이 와중에서 예레미야는 현 유다 나라의 형편을 절망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옛날처럼 하나님만 섬기면서 풍부한 삶을 지낼 수 없다고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비가 없음’을 탓합니다. 선조들이 자신들에게 물러준 것은 죄악 뿐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현실을 규정하는 것은 곧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에 해당됩니다. 육적으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육의 한계에 갇히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이스라엘은 과연 아비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호세아 11:1에 보면, “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되는 조건은 필히 ‘애굽’에 거해야 합니다. 즉 이 세상 전체가 애굽입니다. 모조리 아비의 죄를 전수받은 형편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아비의 아들이요 육에서 연결된 육입니다. 이 호세아 11:1의 완성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현됩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2:14-15)
즉 진정한 ‘아들’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에게는 아예 ‘아비’가 없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6-
18)
예수님의 출생은 다른 모든 인간들의 출생과 차별화됩니다. 예수님의 출생에 일체 그 어떤 남자도 관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스스로 나신 것입니다. 도리어 여성 마리아는 예수님의 출생을 돋보이는 게 하기 위해 등장한 여자입니다.
이처럼 유일한 하나님 아들의 탄생에 대해서 주목하는 쪽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입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1-4)
따라서 인간들이 자신들이 아비 없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분이 먼저 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동일한 조건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 동일한 조건이란 ‘아비 없음’을 기정사실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육으 아비는 없는 언약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서 그 없음의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가 성사되는 율법의 원칙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알려집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간절히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심판을 주어지지 말기를 원해서 하나님께서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들이밉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은 악인과 더불어 심판받을 수 없는’ 원칙입니다. 죄없는 자가 죄 있는 자와 더불어 함께 벌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로나는 애초의 계획대로 불심판이 감행됩니다. 과연 롯은 의인일까요? 그리고 롯의 아내를 제외한 롯의 두 딸은 구원받고 난 뒤에 의로운 행위를 보였을까요?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자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창 19:31-
33)
즉 두 딸은 자신들에게 자식이 있는 것이 옳고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식이 세운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압과 암몬입니다.(창 19:37-38) 이방민족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져내신 것은 롯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 19:29)
아브라함은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었고 롯은 아브라함의 조차로서 아브라함의 기도가 혜택을 입었던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우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아들이 되는 조건’에 모자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 아드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롯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6-18)
즉 육으로 된 자녀가 아니라 영으로 된 자녀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힘이나 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음을 명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강-예레미야애가 5장 3~7절(아비 없는 자식)260322-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5장 3~7절입니다. 구약성경 1150페이지입니다.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여기에 “아비가 없다. 아비가 없어졌다”라는 말은 그동안 아비로부터 오는 전통을 우리가 유지해야 살 수 있다는 철저한 육적인 자식 개념은 구원의 하나님 나라에 오게 되면 이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먹혀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아비가 와서, 우리를 아들로 삼아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아비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아비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철저하게 죄의 굴레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했으니까, 아버지라는 육, 그 아버지에게서 난 자식도 육의 한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아비로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역량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존에 철저히 아버지 위주로 살았던 그 아버지 자리가 비워지고, 다른 아버지가 그 자리를 채웠을 때, 우리는 그 아버지로부터 죄를 물려받는 게 아니고, 아버지로부터 의를 물려받는 그런 체제, 그런 구원의 방식이 예레미야애가 끝나고 난 뒤 신약시대에 드디어 하늘나라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약에 들어가기 전에, 구약의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아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비는 우리에게 죄를 물려줘서 우리는 그 아비에 그 자식으로서 상당히 외롭습니다. 우리 어미는 과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땔감(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조차도 제대로 구할 수 없고, 그리고 이상하게 우리를 쫓는 자, 별것도 없는데 우리를 노리고 쳐들어오는 자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애굽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를 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는데, 이 자체가 또한 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아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저래도, 대체 아비를 구할 길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그 탄원, 그 탄식을 예레미야애가 거의 마지막 대목에서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라는 것은 슬픈 노래라는 겁니다. 슬픈 노래라면 그 내용에 슬픈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야 되겠죠.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이 사람들이 슬픈 이유는 우리를 책임질 분, 책임질 아버지가 우리에게 더 이상 없다는 거, 아비가 있어도 우리에게 죄만 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육의 아비에게 의지할 게 없다는 거, 상당히 절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했다” 열조는 늙어 없어졌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열조가 전수해 준 죄만 우리가 물려받았습니다.
그 뒤에 뭘 한다면, ‘이제 어찌할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탄식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탄식의 노선을 비켜 가지 말고, 이 탄식 노선을 우리가 한번 접어들어 봅시다. 접어들었을 때, 절대적인 절망, 전수 받은 게 죄밖에 없기 때문에, 내놓을 게 죄밖에 없기 때문에, 이 죄가 나오는 이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게 됐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이게 구약이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신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전체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걸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넘쳤느니라” 이렇게 사도바울은 너무 친절하지 않게, 간단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끝” 그러니까 구원은 없다는 말이에요.
구원에 대한 기대는 하지 말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걸 오늘 본문은 아비가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걸 현실 문제에 적용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서울대학교 첼로를 전공한 기악과 출신으로, 여자분인데 나이가 거의 30 가까이 됐어요. 유학은 안 갔다 오고, 국내에서 열심히 하게 되면 국내 오케스트라에 취업이 되지 않을까 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몇 년 동안 해본 사람이에요.
서울대학 같으면 우리나라 최고죠. 그런데 마침 우리나라 최고의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거기에 원서를 내고 오디션 보면서 준비를 단단히 했지요. 거기에 서울대학 출신 자기 선배도 오고 한예종(한국 예술 종합학교) 출신들도 오고, 또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하는 도사들도 거기 참여했어요.
거기서 추려내고 추려내는데, 마지막 네 명 남았을 때, 자기가 거기 끼어들었다는 거예요. 드디어 이제 막 쳐놓고 오디션을 봤어요. 4명 정도인데, 자기 선배도 있고 또 예종 출신도 있는데, 자기는 뭐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까 결과를 기다려보자고 했지요. 그런데 합격 통지가 와야 되는데 통지가 안 왔어요.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어서, 연락을 해 봤어요.
‘어떻게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라고 물으니까, ‘예, 우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할 수 없어서 참 죄송합니다. 할 게 없어서 미안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합격자는 누굽니까?’ 그때 그 오케스트라 담당자가 하는 말이 중요해요. ‘아무도 뽑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뽑지 않았습니다. 오디션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오케스트라가 원하는 레벨, 수준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참여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꼭 이스라엘 같아요. 율법을 받아봐야, ‘아~~~, 내가 천국에 갈 수준이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그들이 알았던 거예요. 기존에 아버지가 가르쳤던 율법, 아버지가 가르쳤던 그 이스라엘 전통, 그깟 것은 어림도 없어요. 그거 가지고는 안 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게 현실로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했어요. 아무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이 성경을 펼치고 천국 가겠다는 그런 오디션 보는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요. 심지어 지금 이란과 미국의 전쟁에 대해서 성경 말씀을 총동원해서, 이것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에스겔 38장, 예레미야 49장 38절, 예레미야 49장 35절, 시편 83편, 이런 것들을 동원해서 설명하는데, 예를 들어 시편 83편 4절~7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이스라엘은 누구냐 하면 현재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여기 주변 나라를 엘람이라고 하는데, 엘람이 뭐냐 하면은 이란 그리고 가자 지역(블레셋), 요르단, 하여튼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 모든 나라들이 시편 83편 4절~8절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시비하고 조롱하고, 헤즈볼라, 후티 반군부터 해서 이렇게 군사적인 발동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성경 보면 다 나온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49장 35절에 보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엘람의 힘의 으뜸되는 활을 꺾을 것이요” 여기 엘람의 위치가 현재 이란 위치예요. 이 “엘람의 힘의 으뜸되는 활”이니까, 이거는 지대공 미사일을 뜻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2천 킬로를 날아가고, 우주선을 올리는 그 미사일.
어떤 데는 활 중에서도 그런 지대공 미사일, 우주선처럼 날아가는 그 미사일이 최고의 으뜸 되는 활이고,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사방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리니”(36절) 그러니까 엘람 중심으로, 이란 중심의 연대를 이루어서 사방에서 누구를 표적으로 삼느냐? 현재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삼고 공격한다. 그때 이스라엘은 뭐 하고 있느냐? 제3 성전을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37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엘람으로 그 원수의 앞,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앞에서 놀라게 할 것이며” 이렇게 해놓고 마지막에 뭘 찾느냐 하면, 39절에 그 엘람, 이란 중에서도 오늘날, 현재 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기독교 신자가 최고로 증가하는 나라 1위가 이란이라는 겁니다. 이란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39절에 보면, “그러나 끝 날에 이르러는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 쳐다보면서 맨날 연구하는 것이, 시사 문제와 연관시켜서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여기에다가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에스겔 38장과 39장, 여기 38장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것도 역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데 여기서 로스가 누구냐 하면 로스, 러시아. 이 둘이 발음이 비슷하죠. 러시아하고 이란하고 연대해서 이스라엘을 친다는 거예요. 러시아는 이란에게 미국의 기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참여하고 있다는 거예요. “메덱과 두 발 왕에게 얼굴을 향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온 군대가 이스라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며 공격하는 그때가 되면, 이제는 세상에 종말이 오고, 메시아는 감람산에 두 발 딛고 서게 되면, 그때 주께서는 재림할 사람 모집해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아침에 했었죠. 인간은 자기 욕심도 해석 못 하면서, 성경 자체를 해석하려고 이런 식으로 자기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러한 시사 문제, 전쟁 문제, 이란 전쟁, 이런 것은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호세아 11장 1절에,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라고 나와요.
하나님은 애초부터 자기 아들을 애굽에 심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애굽이라는 개념이 전 세계로 확장이 돼 버리면, 특정 이스라엘, 특정 미국, 특정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모든 세상이 전부 다 애굽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발원지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낸 거예요.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이어져야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의 아들 되는지를 그들은 몰랐습니다.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아셔야 돼요. 어떤 분이 아들인 줄 알아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칠 수 있는 분이 아들이에요. 유일한 아들은 예수님이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이 잔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것처럼,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은 그런 기도를 해야 아들이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아들이었음이 창세전부터 확정돼 있어요.
따라서 진정으로 아들은, 신약에서 이 땅에 아들로서 스스로 발견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고백을 해야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확정 날짜는 이미 창세전에 정해놨다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한 사람들이에요. 아들 됨을. 그러면 우리가 이제 궁금한 것은 사도바울의 편지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건 로마서 8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간단해요. 8장 14~15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 받고 난 뒤에 아바 아버지로 부르지만, 고백은 그렇게 하지만, 그 원천은 고백한 시점이 아니고 창세전으로 그렇게 돌아가 있어요.
창세전부터 아들이었구나. 에서는 창세전부터 미움받게 돼 있고, 야곱은 창세전부터 뭘 행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가 야곱이고, 그 야곱이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이 되시는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가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뭐 할 게 없어요. 엘람 같은 거 연구 안 해도 돼요. ‘이스라엘 이겨라. 이란 저라’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둘 다 똑같은 자들의 전쟁인 겁니다. 이 전쟁이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 전쟁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이렇게 돼 있어요. 12장에서 이야기하는데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땅에 내가 원하는 아비는 성도한테는 없습니다. 그게 바로 마리아예요. 마리아를 보여 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2절에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그다음에 4~5절을 보면, 이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마리아의 특징은 남편이 없는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어요.
남편이 없는 가운데서. 다른 말로 하면 남자가 없어요. 아비는 남자잖아요. 이 땅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의 기능과 예수님과의 만남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남자 이어서는 안 되고, 뭐냐 하면 여성이어야 돼요. 아버지 되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본인부터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마리아, 여성이 돼야 해요.
이게 왜 어려운지 잘 모르겠죠. 그러면 오늘 이왕 어려운 거 어렵게 가봅시다. 오늘 우리 김재희 집사님이 기도한 대목을 한번 봅시다. 대목에 보면 창세기 18장 끝에 아브라함이 기도한 대목 나오죠.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기도하는데, 아브라함이 내린 결론은 뭐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였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취지는 10명 있으면 악인과 의인을 동일하게 심판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모순됩니다. 그러니까 10명이 있으면 악인을 때리려고 하다가 의인 때리는, 스스로 하나님은 의로우면서도 의인 때리는 그런 모순은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의인이 있다면 심판을 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그래야 하나님의 일관성에 부합된다는 게 아브라함의 기도 내용인데, 창세기 19장에 보면 심판을 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의인 열 명은 고사하고, 단 한 명도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없습니다.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롯의 가정은 의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있어요. 이런 게 성경에서도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성경의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심판을 때림으로써 롯의 가정은 의인이라고 끄집어내었다.
그러면 롯의 가정에서 나왔던 사람이 몇 명이냐 하면, 4명 나왔다가 하나는 탈락했죠. 롯의 처는 뒤돌아봐서 소금기둥이 됐잖아요. 탈락하고 그러면 의인이 몇 명 나왔느냐 하면은 3명이 나온 거예요. 지금 저는 세 명 다 의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 하고요. 분명히 심판을 의인과 함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의하면, 심판받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3명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세 명은 결론적으로 의인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잖아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3명도 의인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그 이유가 창세기 19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이 아니라서 주민등록이 거기에 없어요.
심판하고 관계없는데, 심판은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심판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할 만한 의는 아브라함에게만 있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의는 살아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롯의 의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의가 살아 있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조카 관계가 되는 롯의 가정 중에 3명을 건져낸 거예요.
그럼 3명을 건져냈을 때, 롯과 그의 두 딸은 굉장히 의로운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우리는 예상하는데, 실제로 롯과 그 두 딸은 의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반대로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그 풍습과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딸 둘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해서 거기서 자식을 낳는 이것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어떤 관계도 필요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아버지가 있어야 우리가 있다는 그 원칙, 아비가 없으면 안 된다는 그 원칙, 어쨌든 간에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 그 원칙을 소돔과 고모라라는 그 심판받은 도성에서부터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살았던, 자기가 살았던 그 인식에서 자신들을 분리한다는 게, 얼마나 이게 불가능한지요. 이란과 미국 전쟁에서 성경 들춘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자신들의 생존, 생존하지 못할까 봐 무섭다는 표현이에요.
그게 무서워서 성경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뜻을 알게 하옵소서. 이 전쟁의 끝에 혹시 휘말리면 우리는 죽잖아요. 폼나게 재림 맞이해야지, 이렇게 재림해야 되겠습니까?’ 남은 몰라도 우리는 알고, 대비해서 지하에 벙커를 만들든지 하지요. 이렇게 벙커 만드는 것은 어느 종교에서 하느냐 하면, 바로 어머니 하나님교회, 그쪽에서 돈 걷고 헌금 걷어서, 벙커 만들고, 제3차 대전이 일어나면, 우리끼리라도 비상식량으로 건빵이나 라면, 생수 같은 거 사놓고, 한 3년간 버틸 수 있도록 그 작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종교단체 자체가, 대순진리교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예요. 어머니 하나님교회도 마찬가지고,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다들 무서워서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무서워서 지켜달라고. 이게 얼마나 가짜가 많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거. 우리는 의가 없어서 구원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롯을 건져낸 거예요.
건져냄을 당한 자의 의가 자기를 건져내는데,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와 똑같은 원리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오병이어를 여러분 잘 아시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 거기서 주님께서 주의하는 것은 바로, 거기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이고, 그들은 배불리 먹으면 그걸로 자기의 하나님의 복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주님은 그걸 보는 게 아니고, 먹고 남은 것을 건졌더니만 몇 광주리? 12 광주리.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뭔가 운반하는 겁니다. 구원받을 길도 없고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가 덜렁 구원이 되어버렸다는 증거를, 늘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것으로 그 존재의 바탕을 깔고 있는 자가 제대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마리아가 마태복음 1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그리고 18절에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인간의 족보와 족보를 쭉 나열해요. 아비가 있고 자식이 있고, 아비 있고 자식이 있고, 이렇게 해서 아비 없으면 자식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구원의 능력을 지닌 예수그리스도는 그런 아비의 족보와 관계없이 알아서 나시니라. 알아서 나시니라.
누가 태어나게 해 준 게 없어요. 이 땅에서는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었지, 누가 와서 인간이 돌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냥 마리아라는 그 기계, 몸이라는 육체의 기계를 사용해서 그냥 순풍 태어나신 거예요. 그런데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령을 받았다는 게 뭡니까? 내가 구원받는데 주님의 성령 이외에, 십자가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왜 우리 구원에 들어가서 안 되는가?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원리, 소돔과 고모라의 원리에 술 취해서 만취돼 있어요. 술 만땅으로 먹고 거기에 취해서 살아가요. 이 세상에 모든 뉴스와 모든 언론과 전부 다 만땅 술 취해 있고, 이 세상 이야기, 이란과 이스라엘 이야기에 만땅 취해 있어요.
주님 이야기는 입에서 안 나옵니다. 언약, 십자가 이야기 안 나와요. 그냥 세상 이야기예요. 이제는 술 좀 깹시다. 이제는 술 좀 깨면, 깼다고 치면, 무슨 고백이 나오는가. 그게 마지막으로 로마서 8장 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 중에 있어요. 맞아요. 사는 게 힘들어요. 하지만 장차 올 영광과는 우리 비교하지 말자.
어디서 그걸 거기에 견주어. 견줄 거리도 안 된다는 거. 온통 가까운 일가친척에게서 겪는 모든 수모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유롭게, 넉넉하게 받아주시고, 그걸 여유롭게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차피 헤어질 사람인데, 앙금 갖지 말고, 미련 두지 말고, 주께서 하시는 대로, 이끄는 대로, 시키는 대로, 주의 아들 됨을 증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