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 돼지
2026년 4월 5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3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전형적인 구약의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자기 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졸지는 자신은 그 들어오신 분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종’은 본인이 본인에게 닦달 낼 권한이 없습니다.
동시에 그는 더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결정은 그의 안에 들어오신 분에 의해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본인의 계시 해석을 펼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연구한 바를 발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본인의 자리가 주님에 의해서 박탈당한 자입니다.
본인 안에 들어오신 분은 사도 요한의 입장에 의하면 외부인입니다. 외부인 정도가 아니라 외계인입니다. 즉 사도 요한이 알고 있는 것, 경험한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 안에 들어오신 분은 누구일까요? 요한계시록은 요한복음과 연계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연속’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한복음의 주인공 되시는 분은 사도 요한의 남은 인생 속에서 일하시면서 또한 요한계시록을 읽게 되는 모든 자들에까지 이 상황이 퍼지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신 바가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3:31-32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이 말씀의 흐름은 이러합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못알아 듣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땅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이 마태복음 7:6에서도 나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여기에서 ‘개’와 ‘돼지’가 나옵니다. 즉 결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보시는 예수님의 안목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이 안에 계신 성도라도 이러한 인간에 대한 견해를 공유해야 합니다.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 ‘진주’가 인간보다 더 우선적이고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사람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냥 모든 인간은 개와 돼지와 같다는 겁니다. 바른 인간이 있어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인간’인 것으로 간주해주지 않겠느냐는 발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시작부터가 개·돼지입니다.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은 애초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은 인간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개·돼지라는 명칭이 합당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나타나는 특이성은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복된 자의 특징은 마태복음 7:6에 나오는 그 개·돼지가 본인임을 충분히 인정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평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이 없는 자는 그 어떤 말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가 구약의 광야 생활에서도 발생되었습니다.
민수기 22장-24장에 걸쳐 ‘발람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결코 관여하거나 개입되지 않는 선지자입니다. 그는 모압 지방의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모압 왕인 발락이 이 발람 선지자에게 막대한 재물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면적인 저주를 퍼부어라고 독촉합니다.
그런데 발람 선지자에게 특이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본인이 무슨 예언을 날릴지는 본인도 관여하지 못한다는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발람 선지자에게 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민 22:18-19)
하나님께서 발람 선지자를 주도하시기 위해서 그가 타던 나귀에게까지 입을 열어서 천사가 전달하는 경고 사항으로 선지자를 지배해서 선지자의 개인적 견해를 발설하지 못하게 합니다.(민 22:24-34) 그리고 민수기 23:11-12에서는,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온전히 축복하였도다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예언에는 그 어떤 인간의 견해 결코 삽입되어 들어가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아 주님과 함께 사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발설에 대해서 본인들의 책임지거나 본인이 추궁하거나 압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로서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언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자는 사전에 따로 정해져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과 전혀 무관하게 모압의 왕과 선지자 사이에서 티격태격한 결과물이 예언으로 쏟아져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같은 처지나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고난’, 혹은 ‘환란’이 됩니다.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판단해서 결국에서 예수님을 이 땅에서 제거한 것처럼 동일한 성질의 공격이 성도에게 날아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계 12:13) 여기에 대해서 성도가 대적할 하등의 무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성도 본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저 나침반의 바늘과 같은 입장입니다.
“이쪽은 천국쪽이요 이쪽은 지옥쪽입니다.”라는 방향표시만을 하면 그만입니다. 누구 앞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못 알아듣는 개·돼지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나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요한계시록 1장 1~3절(개돼지)2604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400페이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아멘.
선지자와 사도, 구약에는 선지자, 신약에는 사도가 나오죠. 이 사도 요한 또는 구약의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들 안에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계신 특징이 있어요. 사도 요한은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자신에게 나온 모든 말과 행동이, ‘내가 주인이다. 나를 건들지 말라’라고 이렇게 나오지요.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자기는 그냥 오늘 본문 그대로, “그 종 요한에게”라고 1절에 나오죠. 요한은 종이에요. 종에게 따지고, 묻고, 닦달 내고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종을 종으로 나누시는 예수님에게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에게 닦달 내지 마세요. 자꾸 재촉하지 마세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렇게 하라는 거고, 닦달 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꼭 자기가 자기를 힘들게 만들어요. ‘제대로 해라. 똑바로 해라. 남한테 욕 얻어먹는 짓 하지 말라’ 그럼, 그리스도가 뭐 하시는 분입니까? 그리스도가 없으니까, 본인이라고 본인 붙들고 조치한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밖에 더 돼요? 그래서 사도 요한 안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이 편지는 누구한테만 가야 되느냐 하면, 사도 요한처럼 성령을 받아서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에게만 이 편지가 전달되도록, 우리 주님 자체가 그렇게 조치하고 편지 자체가 말씀 자체가 그렇게 해요. 그래서 이것을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불신자한테는 말씀 자체의 접근이 불가하고 허용되지 않습니다. 말씀 자체가 그래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전달해도 코웃음 치면서 집어던집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 보면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여기 이 말씀에서 인간은 빠지고 인간 대신 개가 등장하고 돼지가 등장합니다. 지금 주님은 이런 안목을 가지고 인간을 봅니다. 성도 안에 주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다면, 성도가 동일한 관점으로 세상을 봐야 해요.
방탄소년단이 공연하는데 한 만 명 왔습니까? 22만 명 온다고 하더니 만 명쯤 왔는데, 하여튼 만 명 오든 22만 명 오든, 22만 마리의 개가 모이고 돼지 모인 거죠. 집안 식구가 다섯 식구라면, 만약에 성도가 그중에 섞여 있다면, 성도 하나에 개 4마리, 돼지 4마리, 연세 많은 부모가 뭐라고 짖으면 그거는 개가 짖는 거고 돼지가 ‘꿀꿀’ 대는 거예요.
아주 고집 센 돼지고 개고. 개에서 개가 나오고 돼지 DNA에서 돼지가 나오잖아요. 누굴 비난하는 말이 아니고 본인에게 놀라워야 한다는 겁니다. 개이어야 하고 돼지 이어야 하는데, 왜 나는 내가 개고 돼지인 것을 발견하는 성령을 주셨느냐는 겁니다. 이 말이 ‘나 인간입니다’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고, 개고 돼지인데 개이고 돼지인 걸 아는 거예요.
왜? 안목이 예수님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성도라 할지라도 개돼지로 다루는데, 이게 행복한 개돼지죠. 그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라는 거. “너는 개, 돼지 아니야? 그러면 추가할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내일? 내일 염려하지 말고, 그냥 사료 줬으면 사료를 준 그날로만 하죠. 그날로만 해야 해요.
길거리 고양이에게 사료 주는 그 주인은 내일 치를 안 줘요. 꼭 그날 치만 줘요. 길거리 고양이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 주는데, 그걸 야무지게 아침마다 새벽에 나가서 쓰레받기에 담아 치워서 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부지런해요. 제가 그렇게 했거든요. 아침에 하는 일과가 뭐냐. 개 고양이 사료 주는 거를 먼저 찾아서 치우고 물도 함께 다 갖다 버립니다.
왜냐하면 개를 키우고 고양이를 키우면 자기는 개 아니고 고양이 아닌 줄 알고 있어요. 돼지 아닌 줄 알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면 자기가 돼지 아니고 인간이라고 한다면, 이 마태복음 7장 6절과 정면으로 대치가 되는 거예요. 개돼지 같으면 개돼지답게 살고, 먹는 것과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하면 돼요. 이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운 겁니다. 만나라는 사료를 주잖아요.
그럼 만나만 만족해야 하지, 뭐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 내가 사람으로 살았을 때, 그때는 부추도 있었고’라는 말, 나는 성경에서 부추가 정력에 좋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민수기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정력에 좋은 부추, 부추가 정력에 좋은가? 그건 한의사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데. 수박, 파, 그런 게 그립다는 거예요. 그러면 애굽에 있을 때는 왜 그런 게 있었느냐.
사람도 아닌 게 사람인 척했으니까 좋았고, 광야에 있을 때는 사람에서 본래의 모습 개돼지로 바뀌어서, 개돼지에게 약속이 입혀지면 이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거거든요. 그게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갖춰야 할 조건, 마지막 아담이 갖춰야 할 조건, 그 조건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질 때만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개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오늘 본문 그대로, 사도 요한의 이 편지는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뭐가 있느냐 하면, 복이 있다는 겁니다. 저주받은 자에게는 복이 아니고 저주만 임해요. 저주만 임해야 하는데, 저주만 임한 자에게 예수님이 행했던 모든 것이 복이 되어서 임하면 그들에게 복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계시고 우리에게 복만 주는 것이 아니고, 복 주시는 예수님 자신의 영, 자신의 마음 자체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복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되고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껍데기는 개돼지인데, 안에는 복이 살아 있는 형식이에요. 이게 바로 구약에는 선지자이고 신약에는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벌써 이미 결론 지어졌어요. 이미 정리되었죠. 우리 안에 들어오는 예수님이 이 개돼지 같은 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복된 천국 백성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할 때, 요한계시록을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해요.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 아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뭐냐, 시간에 대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가 그걸 궁금해야 할 자격과 권리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될 일에 대한 정보와 지식만 확보하면 나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 구원받아서 천국에 합류한다’라는 지금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요한계시록을 대해요. 개돼지의 입장에서 하는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나는 개돼지가 되어야 마땅한데, 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는지, 그걸 봐야 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미 그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이라든지 7장을 보게 되면, 바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도가 돼요.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하늘에 천사가 묻습니다. 신입사원들 면접 보듯이 묻죠. “너희가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와, 네가 뭔데 이곳을 와, 이곳에 왜 오는데, 왜 기웃거리는데? 너는 이 자리 아니잖아”라고 이렇게 묻지요.
너는 거기가 어딘데 거기서 나오느냐?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서 나왔습니다” 면접의 질문과 답변이 이미 확정된 것이 즐겁습니다. 끝났어요. 확정되었어요. 다시 말해서 너희가 여기 있을 곳이 아닌데, 천사들만 있고 예수님만 있는 곳이죠, 있을 곳이 아닌데, 왜 이곳을 향하여 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걸 방금 설교하는 걸 들으면, ‘나는 모르겠는데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이쪽 방향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일방적으로 이끄시네요. 나는 뭣도 모르고 그냥 이끌리는 데로, 예수님의 피에 이끌려서 가다 보니까 여기에 도달했네요’라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나침판, 나침판 속에 있는 화살 같은 바늘과 같은 거예요. 방향을 지칭하는 바늘, 이게 성도예요. ‘나 구원받았다’가 성도가 아니고, ‘이쪽입니다’라고 하는 거죠. 명절날 그 큰 집에서 누구를 만나든, 집안 어른을 만나든, 우리가 성도라면 어떤 장소나 어떤 공간에서도, 만약에 청와대에 가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도라면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예, 이쪽입니다’ 어느 쪽? ‘이야기해도 모를 건데요. 이 세상에는 없는 쪽입니다’ 외계인인가? ‘그렇습니다. That’s right! 바로 그겁니다. 외계인입니다’ 이 땅에 외계인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요. 그분은 올라갈 때, 외계인답게 올라갔죠. 왜? 구름 타고 사라졌으니까. 구름 타고 사라졌잖아요.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 하겠어요? ‘아니, 그걸 믿나? 체중이 70이 나가는 사람이 구름 타면 아래로 빠지지, 구름을 어떻게 타? 구름 밑에 숨겨놓은 어떤 철판 같은 게 있어? 엘리베이터라도 있어?’
없고, 구름 타면 빠지게 돼 있어요. 이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거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확고한 진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진리를 아는 인간들에게 린치(lynch), 얻어맞고 사형당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지적하는 식으로 말씀을 주니까, 요한의 말에 대해서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의 편지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과 같이 호응해서 설명해야 하느냐. 요한복음과 호응해야 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요한복음과 교류하면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3장 31절부터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외계인이죠,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갇혀있죠. 갇혀있어요. 인간의 모든 언어와 지식은 갇혀있습니다. 그 안에서 뺑뺑이 돌고 있어요. 해와 달에 대한 천문학 하는 사람, 물리학 하는 사람은 ‘해와 달과 별, 해와 달 별....’ 인류의 역사, 문명 역사가 2천 년이 넘는데, 2천 년 동안 계속 뺑뺑이 도는 게 뭡니까? 해와 달과 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땅, 거기서 뺑뺑이 돌아요.
거기서 DNA를 말하고 양자 역학을 말하고 상대성 원리를 말하고, 백날 해봐야 그 대상은 해와 달과 별과 땅에 관한 모든 것, 그건 무너질 건데요. 전부 다,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나 이 모든 사람이 고고학자 같아요. 이미 지나간, 이 없어질 것들을 붙들고, 거기에서 진리를 찾겠다고 하는 거죠.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그 대표적인 확답이 되는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대한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한 착시 현상.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인간은 아는 것이 없고 인간은 요한복음 9장에 의하면 소경이라는 것을 제대로 밝혀주는 게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소경 주제에 더듬어서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 그게 앞뒤가 안 맞는 생각이죠. 제가 아침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저주 안에 태어났다고 했죠.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저주받을 짓거리만 하고, 저주받을 생각만 갖고 있어요. 저주받아야 합당한 것이 더듬거리면서 십자가를 서성거리면서, ‘야, 이게 십자가다. 이 십자가 피로 구원받겠다’라는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가당한 일입니까? 안 되지요. 신학은 ‘삐~~~’예요. 신학은 자체가 엉터리예요. 신학 자체는 자기가 저주받고 개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계속 감추는 식으로 신학을 전개합니다.
철학도 마찬가지고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그 안에 인간은 갇혀있으니까요. 그래서 뭐냐?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 3장 31~32절에,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뭐냐 하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을 지금부터 할게”라는 이게 요한복음이에요.
마태복음도 마찬가지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마태복음 13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건 이사야 6장에 나왔던 말씀이고요. 그러니까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이나, 설교 시간에 기본적으로 쫙, 먼저 전제를 외치고 들어가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뭐 하니, 너희들?”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 지금 뭐 하고 살지?” 벚꽃, 꽃 구경요? 꽃구경에서 그 십자가 보입니까?
안에 예수님이 계신 사람은 벚꽃 구경을 가도 십자가를 말해요. 한우 등심 먹으면서 십자가를 이야기한다고요. 낚시해서 잡은 문어를 먹으면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벚꽃에서 벚꽃만 이야기해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니까.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시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십자가를 이야기하느냐? 아니죠.
우리 육신 자체가 개돼지이기 때문에, 일단 개돼지를 거쳐서 십자가가 나와요. 요한계시록이 바로 그 과정을 설명해 주는 책이에요. 일단 매 맞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일단 환란 맞자! 근데 환란의 이유가 다 네 욕심이고 세상에 대한 집착에 있는 걸 너는 알지? 네가 남을 이용하려 하다가 마귀한테 오히려 뒤집기 당하는 거, 그런 것을 이 땅에 살면서 경험케 하는 겁니다.
사기 치려고 하다가 사기당하는 경험, 그러면서도 계속 사기 쳐야 밥 먹고 사는 세상, 뒤집기 당하는 그러한 수모를 당할 때, 반드시 그런 환란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비난과 원망이 터져 나오게 돼 있습니다. 선지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야욕을 채우겠다? 이미 구약의 민수기 22장~24장에 벌써 나와요. 모압왕 발락이 자기 땅에 있는 발람 선지자를 이용해서 자기 땅을 통과하고 있는 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저주를 좀 퍼부어 달라고 막대한 뇌물을 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기에 이스라엘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자기들끼리 돈 주고, 자기들끼리 선지자 모집해서, 자기들끼리 그 선지자에게 돈을 주고 저주해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도라면, 민수기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의 짓거리, 개돼지 같은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민수기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여러분이 발견해야 해요.
나는 관여 안 했는데, 우리 안에 예수님의 피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기에, 남들은 약을 먹여서라도, 어떤 애를 써서라도, 성도를 저주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이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잖아요. 예수님이 성령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악마가 가만두지 않고 온갖 권세, 권력자를 다 동원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기어이 이 땅에서 제거하고 없애버리는 일을 한 것과 같은 그러한 활동이 이제는 예수님의 남은 백성에게 똑같이 그것을 해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6~17절을 보게 되면,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라고 돼 있죠. 거기에 대해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거는 뭐냐? 안 해야 하죠.
성도는 그냥 살아요. 뭐 마귀 붙들고 멱살 잡고 누가 잘났냐는 그거 할 필요 없어요. 왜? 민수기 때 그랬으니까. 이스라엘은 그냥 통과하는데, 저쪽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저쪽 나라에서는 자기들끼리 난리예요. 자기들끼리. 자기들 나라 안에서 왕과 선지자가 싸우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럴 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결국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작용하고 일하시는가? 민수기 22장 11~13절에 보면 모압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에게 압력을 가해요.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이렇게 돼 있거든요.
민수기 23장에 보면, 이거는 더 많은 재물을 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 23장 5절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어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다가 말씀을 줘요. 이방인의 선지자인데 여호와께서 관여해서 말씀을 줍니다. 그리고 행여 발람이 여호와의 존재보다도 자기 이방 민족의 왕인 발락의 말을 듣고 자기가 돈 값한다고 할까 봐, 여호와께서 나귀를 보내서, 타고 가는 나귀가 말하게 해버려요.
그러니까 발람 선지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발람이 말한다는 그 이전에, 먼저 발람에게 말한 분이 계세요. 그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 오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하고, 말을 해줄 때만 우리는 개돼지 같은 우리 존재가 입을 벌려서 여호와께서 넣어주는 말씀이 이 입에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 나오는 게 무슨 내용이냐. ‘나는 쪼다고 아무것도 아닌데, 그거는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따라서 내가 성도가 되어 천국 가는 것은,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내가 한 것은 없다. 그냥 주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활용할 뿐이다. 끝!!!’ 지금 그 말씀이 뭐냐고 물으면, 그건 주께서 이 땅에서 고난받고 피를 흘렸다는 그 이야기, 값없는 피 이야기, 그 이야기로 끝!!!
그게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쓸 때의 취지나 요한계시록 쓸 때의 취지나 바로 그 취지가 이 취지예요.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은 누가 듣느냐. 오직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 예수님이 계신 사람에게만 이 말씀이 전달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주께서 허락하는 한 계속하면서 진도 나가 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제부터 먼저 파악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요령을 부리면서 말씀을 공부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게 해주시고, 애초부터 우리가 구원될 대상도 아닌 것을 오히려 기뻐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