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성도의 자리

아빠와 함께 2026. 3. 29. 18:10

성도의 자리

2026년 3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애가 5: 19-22

(5: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5: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계시와 현 이스라엘의 형편을 결합시켜 봅니다.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마땅한 공식이 이상스럽게 기쁨으로 와 닿지 아니하고 오히려 절망이 가득합니다. 아직 어떤 계시로 이 합치되지 않는 계시를 마처 채워 줄 현실이 찾아오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세례 요한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인간은 미래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유일한 인생길은 지나온 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영원한 곳에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하나님 백성에게만 꽂혀 계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백성을 건지신다는 사실을 의심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현 이스라엘에게 들이닥힌 상황은 극한적인 진노하심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이스라엘에게 전면적으로 들이닥친 진노 사이의 연결점이 없어 선지자는 안타까워하는 겁니다. 사랑과 진노 사이의 틈을 메워주게 되는 요소는 바로 이방민족인 바벨론입니다. 인정사정 없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후려쳤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정리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다 죽는다’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계시인 로마서 10:13의 말씀과 다른 내용처럼 느껴질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실은 둘 다 맞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안 죽는다 가 아니라 죽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새로운 계시로서 사용하신 분에 의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빠진 대목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 빠진 대목을 알기 위해서 다니엘이 받은 계시를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예레미야 못지 않은 철두철미하게 현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단 6:16)

다니엘은 사자굴로 들어가서 굶주린 사자들에 둘러싸였습니다. 마치 굶주린 이방민족에 들러싸인 이스라엘의 신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6:24에서는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니엘이 죽지 않은 것은 사자들이 입맛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단 6:24)

그렇다면 왜 굶주린 사자들이 다니엘을 뜯어먹지 않았던 겁니까?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2)

여기에 ’천사‘가 나옵니다. 다니엘의 계시에는 이처럼 실증적인 역사 국가들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비실증적이라고 알려진 천사장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단 10:13)

메데+바사 나라 정도가 아니라 헬라라는 실증적인 나라까지 거론됩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 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 군이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뿐이니라”(단 10:20-21)

참 신기하지요. 바사 혹은 헬라 나라는 인간들이 익히 아는 나라들인데 미가엘이 실제로 이 실제적인 나라와 관련성을 갖는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일반 역사책에 결코 미가엘이라는 천사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니엘의 존재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역사 속에 인물 정도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활동까지 중첩된 내용을 함께 공유된 존재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결코 천사의 활동은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이것은 천사의 찬양인데 이 찬양 안에 ’기뻐하심‘에 대해서 천사가 주지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창세 전의 성도의 자리는 천사의 관리 하에 지켜지고 있습니다. 꼭 합당한 자만 그 자리를 찾아가도록 차질없이 이끕니다. 그런데 이끄는 과정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경험과 고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구원받기로 확정된 자에 대해서 하나님께 율법의 진노를 가하시고 그 진노의 현장에서 레위지파가 행사하던 율법의 일이 어떤 식으로 성취를 보이는지를 지속시키시기에 진노에서 구원의 기쁨이 생산되게 하십니다. 민수기 3:39과 42-43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여기에서 273명이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에 대해서 5세겔이라는 성전세로 대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반 12지파와 레위 지파 사이에는 차이가 나오는데 일반적인 12지파가 지상의 삶에 몰두하는 자라면 레위지파는 일반인과 같이 세상에 나오는 양식은 먹지만 하는 일은 하늘의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즉 레위지파는 중첩된 기능을 보여주는 지파입니다. 이 지파 기능의 완성을 위해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서 이사야 52:14-15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진노에서 벗어난 기쁨을 발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4강-예레미야애가 5장 19~22절(성도의 자리)26032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5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1150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아멘.

계시가 주어질 때까지만 인간은 그 계시 안에서 고백하게 돼 있고, 하나님을 증거하게 돼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슬픈 이야기, 애가(哀歌), 슬프다는 뜻이죠, 예레미야의 애가로써 계시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 보면 기쁜 소식이라는, 예레미야애가는 슬프게 끝나잖아요, 그런데 신약의 마태, 마가, 누가는 기쁜 소식, 복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구약적 계시 안에 있던 자는 마지막에 절망으로 끝나고 좌절로 끝났는데, 어떻게 신약에 와서 성도는 시작부터가 기쁨으로 이렇게 시작이 되느냐. ‘그 안에 무슨 일이 있는가라?’라는 겁니다.

그 안에 있었던 일은, 안에 메시아가 없이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다고 할 때, 그 사이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절망,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그냥 옴팍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을 하나님 계시의 이름으로, 계시로 만든 현실의 이름으로,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전쟁영화도 그렇고, 전쟁을 보게 되면, 소총 가지고 빵빵 쏠 때는, 앞에 있는 나무나 풀이나 산이나 들이나 이런 게 환히 보이는데, 갑자기 대포가 날아와서 터져버리면 잠시동안 그 대포의 화기와 열기, 그것들의 엄청난 폭발로 인하여 대포가 떨어진 현장에는 포연(砲煙), 대포에 의한 연기가 자욱하게 있습니다.

연기가 그치고 난 뒤에는 다시 전에처럼 자연 풍경이 그대로 나타나고, 누가 맞아 죽었는지, 대포 파편에 죽었는지가 그제야 다시 정신 차리고 보게 되죠. 지금 예레미야는 소총을 맞은 게 아니고 대포를 맞은 거예요. 이거는 개인적으로 어떻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대포 맞은 겁니다. 대포를 맞으면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라는 겁니다.

이거는 신약에서 로마서 10장 13절에서 하는 이야기와 정반대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가 되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게 맞아요. 사도행전 2장 21절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그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이 먼저 선제해야 합니다.

감히 인간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의 율법이 주는 저주를, 이거는 소총 정도가 아니고 대포 맞듯이 맞아야 해요. 오늘 본문에서 대포가 스치게 맞은 게 아니고, 빗나가지 않고 제대로 맞은 거예요. 된통 맞은 겁니다.

예레미야는 포를 어긋나게 맞은 게 아니고 제대로 맞았어요. 맞아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영원히 하늘에 계시고 주는 영원히 우리를 잊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는 이 진노하심이 특심한 겁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까?”라는 이게 이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중보자의 역할이죠.

그래서 그 중간, 21절에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연기가 뿌옇게 끼어 있으니까, 어느 쪽이 주님 가는 길인지를 이제는 주께서 차단했기 때문에, 주께서 먼저 우리를 돌이킨다는 신호로써 그런 길을 주시면, 거기를 찾아서 이제 연기가 진노가 걷히게 되면, 거기를 따라서 가겠나이다.

이렇게 예레미야애가가 끝이 나요. 그런데 이 대포의 연기에 해당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주님께서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셨는데, 그걸 아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 6장에 보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요. 사자 굴에 들어가고 난 뒤, 6장 24절에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라고 나와 있어요.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서 사자 굴에 집어넣었는데, 그 사자들의 입맛 그리고 식욕 상태가 과연 배불러서 다니엘이 들어가도 ‘아, 귀찮아. 안 먹을란다’라고 이렇게 된 거냐, 아니면 정말 그 사자는 성격이 가장 포악한 수준의 굶은 사자를 다니엘에게 맞닥뜨리게 했느냐? 가장 포악해지는 사자, 그 사자를 다니엘에게 만나게 했는데, 다니엘 앞에서 사자의 입이 봉해져 버렸어요.

이렇게 봉해졌다는 것은 다니엘 6장 22절에 나옵니다. 그 사자들이 알아서 입을 봉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에 우리는 접어들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한 사람들을 천국에 넣어 놓을 때, 그 창세전에 선택된 자에게 자리가 있을 건데, 구원받은 성도가 그 자리에 오기 전까지는 그 자리가 비어 있는가, 아니면 어떻게 관리되는가 하는 문제죠. 장차 성도가 되어서 그 자리를 ‘내 자리다’라고 찾아갈 때까지 누가 관리하느냐. 천사가 관리해요.

그러니까 천사가 어떤 거냐 하면, 백화점 주차장에 차들이 복잡할 때, 남편이 차 몰고 오기 전에 아내가 먼저 내려서 뛰어가서 자리 맡아놓고, 차가 다시 돌아서 그 자리로 오면, 자기 자리라고 이렇게 주차하잖아요. 싸가지가 없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공공장소에서 내 주차장이 어디 있어요? 근데 여자는 딱 서서, 자기 남편이 한 바퀴 돌고 오기를 기다린단 말이죠.

그 싸가지 없는 부인 역할이 천사입니다. 이거는 택하지 않은 자는 절대로 이 천국에 못 오도록, 미리 자리를 잡고 있어요. 그 잡은 역할. 그걸 다른 민족은 몰라도 이스라엘은 그거를 알아야 했었습니다. 내 구원의 자리에 대해서 내가 괜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요. 천사가 와서 미리 자리 잡아놔요. D열 46번. 이런 게 딱 거기에 합당한 천사 자리가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8절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라고 돼 있거든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그 현상,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일어나는 그 현상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외에 다른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인종을 분정하실 때, 나누어 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요대로, 숫자대로 그 민족들의 경계를 정했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말고 이방 민족의 운명이나 그들의 숫자는 이스라엘의 숫자와 대조되어서 이스라엘의 수요가 정해져 있다, 특별하게 확정돼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수가 없게 돼 있다는 겁니다.

너는 선택되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선택되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중보자 기능이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의 숫자는 누가 정하는가. 그건 하나님의 율법이 정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이 정할 때 거기에 관여했던 존재는 누구냐? 창세기 32장에 보면 바로 하나님의 군대, 천사가 야곱의 머리 위에 오르락내리락해요.

하늘나라에 천사의 활동과 그들의 숫자와 그들이 해야 할 찬양은, 장차 그 천사와 대응이 되면서 모집돼야 할 택한 백성,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죠. 신약에서는 온 이스라엘, 그때는 이방 민족, 아브라함의 혈육, 그런 거 묻지 않습니다. 그냥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적으로 이스라엘 된 사람은 다 거기에 해당해요.

그 천사들의 활동과 그 숫자 기능은 택한 자를 택한 자로서 넉넉하게, 그러니까 신경 쓰실 필요 없이 안심 놓고 천국에 자기 자리로 모시는 시다바리 역할, 호텔 객실에 있는 종업원 역할을 천사들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는 천사들이 돌본다면, 방금 이야기한 이 주장의 증거가 이스라엘 내에 어떤 식으로 삽입돼 있는가를 살펴보면 증거는 이제 확실해집니다. 그게 민수기 3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3장 42~43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더라”

이스라엘 레위 지파 빼고 나머지 12지파에, 처음 난 자, 1개월 이상 처음 난 자의 신생아를 조사를 했더니, 2만 2천 273명이었어요. 근데 민수기 3장 41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여기 레위인을 처음 난 자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그 숫자에 대해서 민수기 3장 46~4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라고 나오는데, 이걸 통해서 이스라엘 레위 지파의 숫자가 2만 2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만 2천 명인데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와 레위 지파가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하면, 273명이 차이가 나요. 일대일 대응으로 쭉 해 보면. 레위 지파의 역할은 천사의 기능과 인간의 기능이 여기에 같이 섞여 있는, 겹쳐 있는 기능을 레위 지파가 보여줘요. 레위 지파는 땅에서 살면서도, 땅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들은 땅과 무관한 기능을 해요.

지상에 내려온 하늘의 기능, 제사 기능에 몰입해야 할 사람들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뭘 하느냐 하면, 레위 지파 말고 다른 지파는 땅에 속한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내부 구조에서 열세 지파를 만들고, 그중에서 12지파와 12지파를 대신하는 한 지파를 따로 빼놨는데, 그게 레위 지파예요. 1개월 이상의 처음 난, 레위 지파 외에 모든 태어난 사람이 2만 2천 273명이라면, 이쪽에 레위 지파는 2만 2천 273명이 돼야 하는데, 2만 2천 명이 돼요.

그러면 273명이 빠진 경우에, 빠져있는 그들을 위해서 성전 세를 내게 해요. 5 세겔의 성전 세를 내게 돼 있습니다. 3장 47절에. 복잡하죠. 이거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육신은 자기 육체를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더 나아가서 내가 나를 지킬 수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다. 내 행함이 나의 미래나 운명을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가 없다.

확정되지 않았다. 확정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 이게 노력해서 될 문제 아니고, 확정은 따로 확정돼 있어야 해요. 하늘 쪽에서 내어준 그 제도와 이스라엘 속에 있는 그 원칙에 의해서 확정돼야 해요.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확정된 그 내용과 땅에서 그저 농사짓고 있는 이 열두 지파 사람과의 만남은 어디서 만나는가. 성소에서 만납니다.

그럼 성소는 뭔데? 성소는 레위 지파가 일하는 곳이죠. 무슨 일을 하는데? 제사 일을 하죠. 제사가 뭔데? 제물을 잡는 겁니다. 그 제물이 뭔데? 이제부터 그 제물이 뭐냐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먼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예레미야가 애가에서 마지막으로 뭐라 했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정녕 죽는다’

하나님의 율법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율법의 포탄을 제대로 맞고, 그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로써 그대로 빗나가지 않고 온통 다 뒤집어썼어요. 여기서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 해결책이 없는데,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제대로 맞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율법의 저주가 뭔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방 민족,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바벨론이죠, 이방 민족을 굶어 죽기 직전인 사자같이 활용해 버렸어요.

다니엘에 보면 다니엘이 굶은 사자와 만나잖아요. 이거는 소총 정도가 아니고, 폭탄, 굶어 죽는 사자, 그 사자에 해당하는 그쪽, 그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힘들게 했고 난감하게 만들었고 절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거기 다니엘 계시에 보면 제대로 나와 있어요. 여러분께서, 좀 어려우니까, 조금만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다니엘 10장 13절에 보면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라고 나와요. 바사가 뭐냐면 지금의 이란이죠. 그런데 13절에,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여기서 신기한 게, 이방 민족에게 있어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짐승이죠. 다니엘에서 나오는 네 가지 짐승이 그들을 꽉 붙들고 왕질을 하고 있다면,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가 하느냐면, 미가엘이라 하는 전쟁하는 천사가 이스라엘 편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니엘 10장 20절에 보면,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군이 이를 것이라,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

미가엘 천사다 이 말이죠. 지금 뭐가 자꾸 제가 신기하다고 하느냐 하면, 헬라는 알렉산더 장군이 세운 제국이 헬라 제국입니다. 그래서 그거는 인간세계 역사책에 나와요. 그런데 헬라 제국이 설쳤던, 알렉산더가 설쳤던 그 시기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대장은 미가엘 천사라는 이야기는 어느 역사책에도 그게 안 나와요.

성경에는 나옵니다. 다니엘 12장 1절에, “그때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은 우리 보고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너, 영적과 육적이 중첩되어 있어?’라는 것을 묻는 거예요. 우리한테. ‘너는 역사책만 봤어, 아니면 성경도 봤어? 너는 어느 쪽을 믿어?’ 그걸 지금 우리한테 요구하는 거예요.

역사과학은요, 이렇게 고고학적으로 믿을 만한 것만 골라서, 믿어서 역사를 써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제가 오전에 이야기했지만, 예언자 역할을 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 나타난 거 말고, 보이는 것들을 수집해서 장차 어떻게 우리 인류가 할 것이냐를 예언하는 거기에 온 지혜를 다 모으는 것이 이 땅의 인간들이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속임수라는 이 말입니다.

성경은 놓치지 않고 인간의 그 속임수와 그리고 미가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다 써놨어요. 그렇다면 아직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진노 받아야 마땅한 거, 예레미야는 주님을 알잖아요. 하나님을 알잖아요.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 앞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주위의 나라를 그렇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절망케 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에 어떻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라는 예레미야의 마지막 던진 제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해결책은 뭐냐?

그 해결책은 이사야 52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52장 13~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저 사람 왜 저렇게 벌받았지? 왜 저렇게 망가졌지? 내가 보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가득하고 진노가 가득한데, 아이고 안 됐다’라고 하더라도, 15절에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거는 다니엘을 죽이기 위해서 사자 굴에 집어넣은 다리오 왕이, 다니엘이 사자와 멀쩡하게 있는 것을 보고 놀랐고요, 또 다니엘 하는 말을 듣고 놀랐어요. 사자들이 나를 먹으려고 했는데 천사가 와서 그 사자의 입을 봉했다는 말이죠. 이거는 다리오 입장에서는 소총이에요. 그때는 앞으로 대포를 쏴버려요. 대포를 쏘고 대포 연기가 거치고 난 뒤에 보니까, 거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복하게 그 현장에 나타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소총 정도죠, 어떤 분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어떤 분이 오셔서 사람들이 너무 망가져서 놀란 거예요.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망가질 이유가 있을까 놀랐는데, 이제는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래서 15절에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그래 놓고 이사야 53장에 여러분 잘 알다시피,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리고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바로 이 역할을 누가 했느냐. 레위 지파가 한 거예요. 레위 지파가 했던 그 기능에 대응해서, 그것과 연관될 경우에만 나머지 12지파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 원형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지금 예레미야 계시 안에서는 이걸 몰랐죠.

그러나 신약에 오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까지 합해서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기쁜 소식은 우리가 저주 아래에 있고 진노 아래에 있는 게 마땅한데, 하나님은 제대로 일을 하셨는데,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레위 지파가 12지파를 대신한 것처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친히 감당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불과 저주가 우리 쪽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예수님 공로의 흔적으로써 채택했다는 거.

채택해서 증인으로 삼고, 주께서는 창세전부터 하늘나라에 주의 증인의 자리를 이미 거기서 마련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저 어때요?’라고 묻지 말고, ‘주님, 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해요. 질문을 ‘제가 지금 예수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밖에 있습니까?’

나는 누구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도, 이 세상 앞에서도 아무 가치 없는 자기소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된 자리, 복음의 자리에 살고 있음을 내내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사가 다니엘을 보호했듯이,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또 주님이 보낸 천사가 우리를 지켜줌으로써,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자리가 무엇인가를 날마다 기쁨으로 그리고 고마움으로 다가오게 해주신 이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 돼지  (1) 2026.04.05
아비 없는 자식  (1) 2026.03.22
에돔의 존재  (1) 2026.03.15
피의 잔불  (0) 2026.03.08
예언의 위력  (0)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