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강-YouTube강의(어미 창세기 3:20)20260317-이 근호 목사
제513강, ‘어미’. 아까는 ‘아비’였죠. 어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난해한 중에서도 난해한 항목에 들어갑니다. 일단은 창세기 3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어미’라고 했을 때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 숨어있는 존재로 보셔야 돼요. 전면에 누가 나서는가? 어미가 나서는 게 아니고 아비가 나서요, 아비가. 전면에 나설 때 그것은 존재의 대표가 되거든요. 존재의 대표자가 아비가 되면 어미라는 존재가 따로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라 하는 것은 있어도 없는 존재로 있는 거예요. 이것을 여자들이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은 신비로움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전혀 신비롭지 않아요. 식상해요. 식상하고 한두 번 대단하다 하더라도 돌아서면 짜증나요. 그러나 은근히 뒤에 뭔가 숨어있는 것, 그 존재는 신비롭습니다.
예를 들면, 노을. 해는 졌는데 해의 잔적, 흔적은 다 지지 않았죠. 그냥 해 색깔로 방금 해가 사라졌던 지평선 전체를 가로로 쫙 장식하잖아요. 거기다가 외로운 전봇대 하나 서 있어 보세요. 감수성 폭발이죠. 시커먼 전봇대 있고 뒤에 노을이 배경으로 쫙 깔리고. 그 뉘앙스, 그 이미지가 성경에서 나오는 어미의 역할이고 기능입니다.
그러면 여자를 좀 여자 대우해주면 되지 않느냐? 성경에는 여자가 그걸 싫어해요, 여자가. 왜냐하면 여자가 왜 단독적으로 ‘나는 여자다. 너는 남자, 나는 여자.’ 이렇게 나설 수 없느냐 하면 이게 저주받아서 그래요. 저주받는다는 것은 저주의 원류에 종속된다는 겁니다. 저주의 원류가 누구냐? 마귀에요.
뱀과 결탁되면서 뱀과 서열관계가 형성되어서 저주의 총화, 저주의 총체는 마귀가 받아요. 마귀가 받고, 그다음에 마귀가 받은 저주에서 흘러나온 저주가 그다음 차례가 되는 여자에게 임하고 그 여자에게 임한 저주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임하느냐? 남자, 아담에게 임하게 됩니다.
된통으로 저주를 받은, 변경이 안 되는 저주를 받은 악마는 눈에 안 보여요. 그러나 아담은? 이 세상은 남자의 시계잖아요. 남자는 눈에 보여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세계 중간에 모호한 중립, 겹쳐진 부분, 그게 바로 여자입니다.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것 같이 살아야 돼요.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여자라 하는 것은 있음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남자 뒤에서 훌쩍훌쩍 눈물로 지새워야 될 여자의 숙명, 그걸로 고착시키는 것이 남자 중심의 사회에요.
처음 교회 나왔다. 목사님들이 성경 읽으라고 하는 데는 주로 창세기부터가 아니에요. 마태복음부터 읽으라 해요. 신약성경 분량이 짧으니까. 마태복음 1장에 딱 들어서면 여기서부터 여자들이 화딱지가 확 올라오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까지는 족보다 이해가 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남자는 10개월 동안 임신하면서 애가 들어있는 그 고통을 알아?’하면서 마태복음 1장 2절에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화가 나가지고. ‘고통도 모르는 게. 고통을 아는 여자가 주인공이지.’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느냐 이 말이죠. 여자가 있는데 여자는 왜 쏙 빠지냐 이 말이죠.
그것은 여자가 현대의 교육 물을 먹어서 그렇지, 여자의 본심은 이렇습니다. 저주를 받았는데 여자의 저주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대목이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인데요. 자식을 낳는 고통이 남편에게는 일체 전달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롯이 누가 홀로 덤태기로 담당한다? 여자만 담당하는 거예요, 여자만.
그러면 여자가 자식 낳을 때 고통을 당했으면 여자에게 나중에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되지 않습니까? 뭐 보험료를 더 올려준다든지 상속분할에서 딸이 더 많이 가져가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에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사모한다는 말은 뭐냐? 이것은 강요에 의한 그리움이 아니고 자발적 그리움이에요. 자발적 그리움. 언제 말입니까? 집에 형광등 갈 때라든지 밤에 비올 때 누가 똑똑 두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누가 필요하다? 든든한 남편이 안전망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차 빵꾸 났을 때, 길에 가다 덩치 큰 남자가 위협할 때 그때 같이 있던 개가 지켜줍니까? ‘나도 내 남편 있다!’ 이래야 일의 수습이 되잖아요.
보호자를 자발적으로 요청함으로써 여자에게는 결핍이라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존재의 많은 부분이 결핍되어 있어요. 이 자리를 든든한 남자에게 양도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날 때부터 여자가 아니라 저주받은 여자에요.
남자는 선악과 따먹고 쿨하게 남자 본인 위주로 돌아섰는데 여자는 남자만큼 쿨하지 못하고 늘 이렇게 빈자리가 있어요. 이게 남편이 있어도 마찬가지에요. 이상적인 남성형은 없어요, 이 땅에. 없으니까 늘 빈자리로 남겨두고 이 빈자리를 온전히 채워서 나의 사모함이라는 욕망을 영원히 영생토록 충족시킬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여성의 존재 자리입니다.
남자는 뭐 한 방이에요. 안되면 뭐 나만 죽으면 되지. 가룟 유다가 남자 아닙니까. 여자는 계속 기다려요. 죽더라도 기다려요. 내 곁을 비워놨으니까. 나는 나를 사모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거예요. 나는 나를 사모하는 게 아니라 내 대신 사모할 분을 항상 모집하고 고대하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베드로전서 3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3장 1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되어 있고 그 예가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다음 나온 말이 더 놀라워요.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는 말이 뭐냐? 그의 딸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딸’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가정에서 자리가 변경되지 않고 그 족보가 확정되었다는 안도감을 허락하죠. 확정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구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 관련 있는 선택된 언약 사람이죠, 지상에서.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남자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대표자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어요. ‘사라에게 복 주는 자는 복을 받고 사라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약이 주어져서 복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이 주셨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준 복의 주인공은 기존의 모든 저주, 아담에게 준 저주, 여자에게 준 저주를 충분히 복으로 전환시키는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언약을 통해서 이 세상에 방문한 거예요. 마치 심판 때 노아 방주와 같은 기능이에요.
따라서 사라는 남편 하나 잘 문 거예요. 세파트도 그런 세파트가 없어요. 꽉 물었어요. 딸이라도 좋고 당신의 개라도 좋으니까 소속으로 언약 안에 방주 안에 소속으로 확정되었으면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내가 뭐라도 되도 내가 고마워하겠다는 그런 태도. 이게 ‘순복’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남편에게 순복하는 게 아니에요. 순복이라는 말은 언약과 관련지어서 그 언약 안에 드는 세계의 자리에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입장에서 한 자리 꿰찼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자가 어떤 자의 어미다? 앞으로 그런 사라 같은 마음자세를 가진 자를 하나님 보기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로 규정하고 그 산 자의 최종 선배가 누굽니까? 하와라는 뜻이에요. 하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에요. 언약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언약 속에 들어가려면 나는 남자, 나는 여자라는 그 관계, 육적인 성별은 이미 죽고 난 뒤에 언약적으로 주어진 관계죠. 그러면 이것은 장차 올 남편 되신 예수님 앞에서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모두가 영원한 여자가 되는 그 관계로 영원한 자리가 확보된다는 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