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2026년 3월 25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4:8-12
(4: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4:9)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4:10)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4:11)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4:12)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엘리사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엘리야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비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일관된 취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엘리사를 통해서 일어난 기적은 과부에게 생계가 절망적일 때, 기름이 계속 넉넉하게 제공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에게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생계가 어려운 절망적인 지경에서 밀가루 통해 계속 채워지기에 삶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의 기적은 밀가루통이 채워지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멀쩡했던 아들이 졸지에 죽어버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왕상 17:16-17) 복과 저주라는 상반되게 보이는 상황이 동일한 이 가정에 덩달아 일어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넴 여인의 가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식이 없어 적적해 보이는 이 가정에 선지자의 통보에 의해서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런데 몇 년 그 아들이 죽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상반되는 기적에 대해서 수넴 여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자진해서 선지자를 극진히 섬겼던 이 가정에 굳이 이런 비극을 선지자로 인하여 유발될 필요가 있었는가요?
이점에 대해서 수넴 여인은 정리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멀쩡했던 아들이 선지자의 내왕으로 난데없이 죽어버린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두 경우 모두 선지자에 대해서 아들의 어미는 마음의 괴로움을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정리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같은 인간들이라면 이 두 어미의 괴로운 마음을 동감할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의식 한계에 갇혀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일부로 그들 마음을 수셔놓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사르밧 과부집을 찾아갔지만 엘리사의 경우에는 수넴 여인쪽으로 자진해서 강권해서 선지자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은 하나같이 자신도 모르는 의식의 테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즉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악착같이 더 사는 식으로 이 삶을 이어가야 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의식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점을 본인들은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기 의식 바깥에 새로운 영역을 따로 만드십니다.
그것은 인간들 보기에는 ‘이미 죽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곧 소위 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세계 너머의 세계입니다. 죽은 자는 수(數)에 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산 자와 죽은 자가 있다면 숫자로는 오직 산 사람에게만 해당되어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4:33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들이 아직 안 죽었다’가 아닙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결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되어 그 방에서 나왔습니다. 즉 중간에 한 몸체가 되는 과정이 있었던 겁니다.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 4:34) 살아 있다는 엘리사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죽은 아이의 입과 눈과 손을 일치시킵니다.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약의 갈라디아서 2:20과 관련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분명 나는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나로서는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오로지 중보자되시는 분과 결합된 두 사람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촉매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체에도 촉매작용을 하나 효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촉매란 자신은 변화가 없으면서 결합되는 단백질이나 물질을 다른 위치나 형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유전물질 DNA를 가지고 아미노산을 거쳐 새로운 단백질을 생산하는데 있어 중간에 촉매로서 m-RNA나 t-RNA가 개입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식물의 광합성 명반응 작용에서 빛 에너지를 식물 세포내에서 ATP라는 에너지체를 만들 때, PO₄³ 인산이 촉매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유로는 콘크리트와 철근 콘크리트의 차이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넴 여인은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인정해서 정성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없다고 새로 생기고 그 있던 아이가 죽게 될 때에 수넴 여인인 자신과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저 콘크리트로 충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신이 죄성이 철근으로 들어간 콘크리트이어야 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2-4) 성도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같이 계시는, 즉 두 사람으로 계시는 중보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새로운 인간의 정의definition에 부합됩니다. 즉 중보자의 징표로서 살아가는 존재가 곧 성도에 이들만 천국에서 받아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홀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배짱은 천국에 방해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열왕기하 4장 8-12절(두 사람) 26032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4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4:8-12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엘리사가,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 남편 없는 그 상실된 여인, 기름 한 병 외에 아무것도 없어서 아들 둘을 빼앗길 처지에 있는 그 여인의 마지막을 다시 풍성하게 해서 기름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온 기적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에 관한 이야기죠.
수넴에 나이 많은 남편과 사는 여인이 있었어요. 그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자식 없는 그 집에 자식이 있도록 만들었어요.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왕하 4:16-17).
수넴 여인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습니다. 그 남편이 늙었으니까요. 그게 열왕기하 4장 14절에 나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남편이 늙었으니까 아기 낳는다는 어떤 기미조차 없었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일방적으로 ‘자식이 1년 뒤에 생길 것이다’라고 했고 과연 아들이 생긴 겁니다. 늙은 남편과 아내 두 식구밖에 없는 가정에 아들이 하나 생겨서 세 식구가 되었습니다. 18절부터 보면 몇 년이 흘러 아이가 자라납니다. 그렇다고 군대 갈 정도는 아니고요.
어느 날 잘 자라던 그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그만 죽어버렸어요.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왕하 4:18-20).
“내 머리야 내 머리야” 그 대목에서 먼저 봤던 그 “대머리야 대머리야”가 생각나지요. 애들이 선지자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아이들 42명을 찢어 죽였잖아요. 한 마리당 21명씩 할당받아서 죽였어요.
하여튼 그 애가 엄마의 무릎에 앉은 채로 죽었어요. 무릎에 앉았다는 것을 보면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겠지요. 그 때 수넴 여인은 늙은 남편한테 청합니다.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왕하 4:22).
남편이 묻죠. “갑자기 어딜 가려고?” 왜 갑자기 먼길 갈 채비를 하느냐 하는 거죠. “오늘 초하루도 아닌데, 안식일도 아닌데 선지자를 만나러 가겠다 하느냐?”(왕하 4:23)라고 했습니다.수넴 여인이니까 그 장소가 당연히 수넴이죠. 그런데 엘리사가 있는 곳은 갈멜(왕하 4:25)입니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왕하 4:9-10).
그 수넴 여인이 엘리사가 이 지역을 지나갈 때 묵을 수 있도록 2층을 새로 만들었어요. 2층 건물에 대한 건축 허가가 제대로 나왔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아마 구청에서 건축 허가는 받았겠지요. 불법으로 건축하면 안 되니까요. 어쨌든 선지자를 잘 대접하기 위해서 2층에 방을 만들어 준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게하시와 함께 그곳에 들러서 식사도 대접받고 묵기도 한 겁니다.
수넴에서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까지 거리가 40킬로미터입니다. 꽤 멀지요. 경주마도 아니고 나귀 타고 가는 거니까 속도가 나지는 않겠지요. 죽은 아이는 선지자가 머물던 2층 방에 두고(왕하 4:21) 선지자를 만나러 간 겁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물아도!” 표준말로 뭡니까? “물러 주세요!”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 만나서 하는 소리가 그거였습니다. “여인이 가로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왕하 4:28).
‘내가 언제 자식을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 부부 두 식구로 그냥 여생을 마치려고 했는데 당신이 은혜 베푼다는 식으로 자식 있을 것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자식 주지 않았습니까?’ 한 거예요. 그 당시에 여인이 자식 없으면 주위에서 얼마나 흉봤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자식 없으면 저주받았다고 주위에서 수군거린다는 말이죠.
사무엘 엄마인 한나도 그런 수모를 겪었잖아요(삼상 1:6). ‘신앙 좋은데 왜 하나님이 자식을 안 주지? 당신 신앙이 건성이라는 거고, 사실 당신 저주받은 거야.’ 그러한 평판에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그걸 아는 엘리사가 자식 없던 가정에 자식을 하나 있게 했고, 그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서 20세 되어 군대도 가고 그랬으면 참 좋았겠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엄마 무릎에 앉을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자식 없을 때는 ‘자식 없어도 그냥 우리끼리 살지 뭐’라고 했다가, 자식 생기니 기뻤다가, 기쁨을 주던 그 자식이 갑자기 죽었을 때 수넴 여인의 상처가 너무나도 깊은 거예요.
열왕기하 4장 27절에 보면 엘리사가 그 여인을 보고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수넴 여인이 갈멜산으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을 때 사환인 게하시가 말렸어요. 보디가드가 말린 거예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엘리사가 “가만둬라. 나한테 오는 것을 방해하지 마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
열왕기하 4장에 8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했다’라는 말은 그 여인 쪽에서 먼저 선지자를 대접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4장 27절에서도, 마음에 괴로움을 갖고 있는 수넴여인이 갈멜산에 이르는 40킬로미터를 달려서 먼저 엘리사에게 나아와서 당도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선지자가 사전에 알았는가 하는 거예요. 사전에 알았는가? 27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나는 몰라. 그 여인에게 괴로움이 있는 줄은 아는데 그게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 엘리사가 미리 안 게 아니고 뭔가 괴로움을 담고 여인 쪽에서 먼저 와 버렸다 이 말이죠. 쑥 들어온 거예요. 이런 경우를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열왕기하 4장 초반에 선지 생도가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지요. 그때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고 해서 기름을 가득 채워준 그 기적,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기적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아들이 없는 가정에 아들을 줬지요. 수넴 여인의 가정이 선지자를 잘 대접했어요.
그러면 그 가정에 탈이 없는 정도는 해줘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주어진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그러니 이건 비극적인 거죠. 선지자가 제공한 그 아들로 말미암아 불행이 그 집안에 들이닥친 겁니다. 선지자는 어떻게 했는가? 사환조차 물리치고 선지자가 그 아들을 살립니다. 어떻게 살리는가?
살리는 방법이 열왕기하 4장 33-34절에 나옵니다.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들어가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되 아이의 위에 올라가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온몸을 엎드리니 그 아이의 살이 차츰 따뜻했더라.”
그리고 35절에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자, 엘리사가 뿌리를 두고 있는 선지자가 있어요. 그게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능력의 확장에 의해서 엘리사가 활동하고 있는 중이에요. 엘리야는 엘리야의 하나님과 결탁 돼 있고요,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언약적 원칙을 제공했고, 그 제공된 언약적 원칙이 흘러 흘러서 엘리사에게 지금 현실화돼 있는 거예요.
열왕기상 17장 8절부터 나오는 그것은 사르밧 과부 이야기입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남편은 당연히 없고 아들만 하나 있었던 거예요. 그 과부의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서 마지막 조금 남은 음식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기름과 가루가 마르지 않아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풍족하게 살았다는 그 기적 이야기가 있어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 17:14-16).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 차고 넘치게 한 그 양식이 그들에게 목숨 연장책 또는 생명이 되었다는 기적이거든요.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행한 기적은 뭐냐?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고, 양식 떨어져서 죽을 뻔했는데 선지자가 와서 양식 줘서 살려줬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선지자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날 줄 알았는데 멀쩡했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습니다. 열왕기상 17장 21절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어떻게 그 죽은 애를 살리는가?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엘리야 선지자의 기적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다. 양식이 떨어져서 죽을 뻔했다. 선지자가 개입해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했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 선지자가 개입해서 살아났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4장의 엘리사에 오면 그 기적이 둘로 나누어져요. ‘선지 생도인 남편이 죽고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었다. 기름이 빈 그릇에 가득 찼다’(왕하 4:1-7). 그것은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가루 통이 비었을 때 엘리야가 개입해서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줬다는 그 이야기와 너무나 비슷하죠.
그런데 열왕기하 오늘 본문에서는,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아들이 생겼다.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그 죽은 아들을 살리는 방법이 엘리야가 전에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방법과 유사해서 거의 똑같다’(왕하 4:8-37).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접합할 수 있느냐? 열왕기상 17장에서 사르밧 과부한테는 하나님이 먼저 엘리야에게 지시했어요. 누가복음 4장 25-2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그러니까 이 사르밧(사렙다) 과부의 경우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먼저 보내어서 과부에게 기적들을 일으킨 거예요. 결핍된 것을 채우고, 멀쩡히 살아 있던 아들을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다시 살리고. 그냥 처음부터 안 죽이면 안 됩니까? 죽여놓고 다시 살려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엘리사의 기적도 마찬가지에요. 누가 아들 달라고 했어요? 선지자가 굳이 네 집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 줘서 두 식구였던 가정이 세 식구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속으로 얼마나 선지자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2부 순서가 남아 있다. 아직 안 끝났어.’ 그렇게 기쁨이 되는 아들을 죽여버렸어요.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삭 줘놓고 이삭을 잡아 죽이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로마서 4장 17절에 나오는 대목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통이 비어 있어요. 통에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채우고, 아들이 죽었는데 죽은 데서 살리고. 이 언약의 하나님이 엘리야의 하나님이고, 그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기적을 일으켰고,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뒤에 그 엘리야의 기능이 엘리사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먼저 사르밧 과부에게 갔고요, 엘리사 경우에는, 엘리야가 먼저 찾아가는 그 기능을 과부 쪽에서 선지자 엘리사에게 찾아가는 식으로 했어요. 열왕기하 4장 27절에서 여인이 선지자를 찾아오는데 왜 오는지를 몰라요. 그 여인에게 괴로움이 있다는 건 아는데 하나님이 그 내용은 내게 숨겼다는 거예요.
선지자가 도사처럼 ‘내가 다 알고 있지롱!’ 뭐 이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숨긴 거예요. ‘오기만 하면 내가 엘리야처럼 해야지.’ 지금 이런 게 없어요. 애가 죽었다는 그 자체를 몰라요. 수넴 여인은 사르밧 과부의 연장책으로 엘리야의 하나님이 작용해서 엘리야 기능을 품고, 담고서 선지자에게 먼저 찾아온 거예요.
엘리야 선지자는 사르밧 과부에게 먼저 갔지만, 이번에는 엘리야의 기능을 담은 그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는 겁니다. 뒤에서 엘리야가 수넴 여인을 막 갖다 미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는데 자기가 선지자 섬기겠다고 했고, 건축 허가가 나왔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게 무허가 건물일 수도 있는데, 선지자 쉬어가라고 마련했거든요.
무슨 사정인지 엘리사는 모르지요. 수종 드는 종 게하시가 말리는데 수넴 여인은 게하시한테는 말 안 합니다. ‘나 너하고 상대 안 해. 나 너하고 상대 안 한다니까! 나 직접 선지자 만날 거야.’ 그래서 선지자를 만났어요.
열왕기하 4장 29절에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그 여인이 선지자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죠.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갈멜에서 수넴으로 갔어요. 자기가 갈 때마다 묵던 2층에 올라가서 죽은 아이를 봤어요. 아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 죽은 아이에게 누구를 호출했는가?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를 호출해서 죽은 아이와 만나게 하는데 단 게하시는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러면 여기에 몇 명이 있느냐? 열왕기하 4장 32-33절에,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뿐이라.” 여기서 ‘두 사람뿐’이라 했어요. 이게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뿐이어야 돼요. 누구냐? 엘리사만 들어갔어요.
두 사람 같으면 게하시와 엘리사 이렇게 두 명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게하시는 못 들어갑니다. 나중에 다시 부르는 것을 보면 게하시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은 엘리사밖에 없어요. 엘리사밖에 없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그때 두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스승 격인 엘리야 선지자가 했던 일을 엘리사가 다시 재현할 때 일단 문을 닫습니다. 문 닫고 다 나가게 해요. 누구도 죽은 애를 못 살리니까요. 이것은, 인간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세계, 수넴 여인도 그렇고 모든 살아있는 자들을 다 막아버리고, 그 살아 있다고 여기던 세계에 세계가 넘볼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 죽은 자만 있는 그 두 사람을 따로 남기는 겁니다.
기존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낄 수 없는 것, 넘볼 수 없는 세계…, 이것은 엄마 수넴여인도 안 돼요. 아버지도 안 됩니다. 여기는 죽은 아이, 죽은 자의 죽은 자의 세계, 죽은 아이의 세계, 그 죽은 자 속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선지자는 합세합니다.
열왕기하 4장 34절,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다른 말로 하면 ‘죽은 자의 위에 올라가서’, 그리고 선지자 자기 입을 죽은 그 입에, 자기 눈을 이미 죽어버린 그 눈에, 자기 손을 이미 죽어버린 그 손에 대고 그 죽은 몸에 엎드려요.
그러니까 이 아기를 예수님으로 봅시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죽어버린 예수님의 입에 입을, 손에 손을, 눈에 눈을, 이렇게 합체해버리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남들 보기에는 그 다락방에 올라간 사람은 분명히 한 사람인데, 그 안에서는 지금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두 사람이 되어서 움직이고 있어요.
죽은 사람과 죽은 사람과 합체된 그 두 사람, 분명히 인간 쪽에서 보면 한 몸체인데 그 안에서는 ‘두 사람뿐’이라, 두 몸체로 등장하는 신기한 현장입니다. 이 현장이 뭐냐? 이게 중보적 현장입니다. 생화학적으로 하면 ‘촉매 현상’이지요. 우리의 세포 중에서 단백질을 결합하고 분해하는데 그 효소가 촉매예요.
촉매라 하는 것은, 본인이 나서서 어떤 단백질을 결합해서 제자리에 옮겨 놓고 자기는 거기서 다시 빠져버립니다. 결합 된 대상을 본인이 갈 수 없는 자리에 가게 만드는 그 작업이 촉매 작용입니다. DNA라는 유전자가 우리 세포 내에서 단백질을 만들 때 단백질의 그 전 단계가 아미노산이거든요. 여기서 DNA 복사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유전물질 DNA를 가지고 아미노산을 거쳐 새로운 단백질을 생산하는데 있어 중간에 촉매로서 m-RNA나 t-RNA가 개입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식물의 광합성 명반응 작용에서 빛 에너지를 식물 세포내에서 ATP라는 에너지체를 만들 때, PO₄³ 인산이 촉매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빛 에너지를 엽록소에서 당으로 만들 때도 효소가 촉매로 개입하고요, 우리 뇌 속에서 치매 예방하는 것과 연관된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그걸 합성하는데 작용하는 효소도 있어요.
지금 문제가요. 인간은 마귀하고 결탁이 돼 있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힘으로 못 떨어져요. 못 떨어지니까 악마가 뭐라고 우리에게 자꾸 부추기느냐 하면, ‘그냥 혼자 살아도 돼’ 이걸 늘 이야기해요.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어. 왜 그걸 못해?’ 자꾸 부추겨요.
그래서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숱하고요, 복음 듣다가 복음 포기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요. 늘 마음속에 뭐가 있느냐? ‘뭐 이런 거 없어도, 이런 거 몰라도 혼자 살면 되지.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 이런 거 있잖아요. 뭐가 빠졌습니까?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중보자? 중보자 내가 알지.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우리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 중보자, 그리스도, 기름 부은 자, 그거 내가 바삭하게 잘 알지.’ 본인이 죽은 자라는 사실은 인정을 못 하면서 그게 무슨 중보자를 아는 겁니까?
이야기 다시 할게요. 지금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 없어요. 아들이 없었습니다. 수넴 여인은 ‘자식 같은 거 나는 원하지는 않았어. 이대로 살면 되지 뭐 꼭 자식 있어야 해? 자식 없어도 나는 행복해’라고 했던 자신의 의식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본인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내가 이대로 살면 이것으로 인간답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수넴 여인 말고, 수넴 여인마저 배제한 그 공간, 수넴 여인이 없는 다락방의 그 한 사람…, 인간 보기에는 두 사람 아니에요, 그냥 한 사람이에요. 왜? 한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에요. 한 사람이 들어갔는데 두 사람이 살아 나왔잖아요.
한 사람이 들어갔는데 두 사람이 살아 나온 이것은 뭐냐?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은, 중보자가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결합 된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정의 definition 내리는 거예요. 인간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 그 새로운 정의를 하나님께서 그 방 안에서 생산해 내는 거예요.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애의 몸 위에 덮쳤을 때, 애가 죽어있고 그 위에 덮이잖아요. 그러니까 선지자는 지금 죽은 아이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죽은 아이는 어떤 아이냐? 원래 없던 아이예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고.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고 그게 은혜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뭐냐? 바로 하나님의 촉매 작용, 중보자 작용, 그 작용에 선지자도 관여하고, 없던 아이도, 없던 아이니까 메시아 같은 존재죠, 그러니까 없던 아이도 거기에 관여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오심으로써 없던 분이 왔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살아났고.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 의해서 인간의 정의 definition,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의는 뭐냐? 인간이라는 규정은 뭐냐? ‘나, 죽은 분과 함께 있어. 나 죽었다.’ 그게 천국에서 받아주는 유일한 인간이죠.
로마서 6장 2-4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럴 수 없는데,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오. 하나님께서 죄를 보내 우리에게 죄를 짓게 했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짓게 했어요. 왜냐하면 죽으라고, 죄에 대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죄로 인하여.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는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어느 공간에서? 죄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과 합하여 이미 우리는 죽었죠.
그러니까 엘리사는 메시아 기능도 갖고 있고, 죄인인 인간의 기능도 갖고 있고, 두 기능을 겸비해서 촉매 역할 하는 것을 부여받은 촉매적인 기능, 효소 기능을 갖고 있는 선지자 기능이고, 이 기능은 이미 선배되는 엘리야가 엘리야의 하나님에 의해서 먼저 했던 그 기적, 사르밧 과부에게 행한 그 기적을 세밀화시켜서, 둘로 쪼개어 나누어서 열왕기상 4장에서 보여준 거예요.
방금 읽었던, 로마서 6장 3-4절을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연합되었다, 한 몸이 되었다.” 이 말이죠.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 처음부터 우리의 남은 생애를 장악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촉매 역할, 중보자 역할을 하는 주님이 이 땅에 태어나게 했고, 죽을 때까지 ‘주님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그 작용을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증표로서, 징후로써, 증상으로써 우리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고자 아직도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으나 내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라서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이것을 두 자로 하면 이게 믿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현재 우리의 뿌리가요, 자기의식 안에 갇혀 있는 뿌리에요. 자기 밖으로 못 나가는 뿌리를 갖고 있어요. 마치 배출구가 없어서 빠져나갈 수 없는 호수 같아요. 그 안에서 물이 뱅뱅 돌아요.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24시간 동안의 의식이 나로부터, 내 세계 속에서 벗어난 적이 있던가요? 밤의 꿈부터 해서…,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내가 만든, 내가 있는, 내가 걸치고 사는 호수, 그 호수의 물결에 관한, 뺑뺑이 도는 그 물결 외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적이 있던가요?
수넴 여인이 그랬던 대로 ‘아, 자식 없어도 되는데, 우리 남편하고 잘 살아요. 그저 선지자가 좋아서 제가 자진해서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만하면, 내가 선지자 섬기면 복종한 것이지…’ 이것은 아직도 뭐냐? 선지자도 몰랐지만, 엘리야의 하나님만은 알고 있죠. ‘너는 너 자신의 그 뿌리 자체, 그렇게 생각하는 그 뿌리 자체에서, 네가 옮겨져야 한다’라는 거예요.
어디로? 하나님의 십자가 안으로, 언약 안으로 옮겨져야 해요. 그것은 인간이 기껏 아는 자기의식이니까요. 오늘 설교는 ‘엘리야는 살아 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살아있다.’ 그 기능이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났고, 나중에 그 마지막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 기능이, 그 언약이 ‘없는 데서 오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일관되게 이 현실을 주도하는 원칙으로서, 현재 2026년의 이 순간에도 이 원칙은 계속해서 핵심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촉매다. 주님은 우리의 중보자다.’ 여러분, 이 차이를 한번 보세요. ‘콘크리트’와 ‘철근 콘크리트’의 차이점은 뭡니까? 이건 바보라도 알겠다, 초등학교 1학년도요. 지금 수넴 여인은 철근이 빠져 있는 ‘그냥 콘크리트’로서, ‘선지자만 잘 섬기면 하나님 섬기는 거니까, 하나님께 복 받겠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뭐가 빠졌어요? 철근이 없었어요, 철근이. 사르밧 과부,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가루 통이 다 해결해 주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하나님 영광 돌립니다.” 이렇게 했지, 자기 자신에 철근이 빠져 있다는 것은 몰랐어요. 그냥 ‘복 주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하고 잘 대해주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천국 보내주겠지, 하나님 백성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썩은 철근은 누가 감당하느냐? 여자 속에서, 없던 아이가 나왔고 그 아이가 죽었을 때, 그 여인은 분노했고, 화냈고, 성질냈어요. 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였어요. “괜히 와서 살아 있는 내 아들 왜 죽입니까?” 화냈고 분노했어요(왕상 17:18). 인간이 분노하고 화낸다는 것은 그 뿌리가, 중보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중보자가 나와야 되는데, 자꾸 내가 나와요, 내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교회에 사모님이 계신데, 사모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교인 수가 한 20명, 22명쯤 있었는데 다 나가고 달랑 3명 남았어요. 3명 남고 헌금은 제로, 한 푼도 안 들어와요. 세 명 다 돈 낼 형편이 안 돼요. 무지무지 가난하고 없이 사는데 그 사람들 3명은 꾸준히 교회 나와요. 목사는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 사모는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비어 있는, 한 푼도 없는 헌금함에 누가 몰래 돈을 넣어주고, 그때부터 조금씩 교인들이 오기 시작해서 30명, 40명…, 점점 넘쳐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 동영상이 있어요, 간증으로.
그 이야기에 중보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중보자 없죠. 그 사모님의 자기의식이, 곧 자기 연못이에요. 철근이 없어요. 철근은 뭐냐? ‘썩었네’라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박힌 콘크리트,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박힌 콘크리트의 중보 역할로 구원되는 것이지, 내가 선지자에게 잘해주고, 주님한테 잘해준다고 구원받는, 그런 주님은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속의 죄를 중심으로, 주께서 피와 더불어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어서 그 철근 콘크리트가 될 때, 그때 하나로 뭉쳐진 그 존재는 천국에서 받아주는 하나님의 구원된 자입니다. 왜? 언약의 원칙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속에 하나님의 촉매 역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우리를 끌어당겨서 십자가에 같이 못 박아 죽게 하는 그 기능, 우리의 뿌리를 ‘나의 뿌리에서 주님의 뿌리’로 바꿔주신 주와 함께 천국에 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지식으로, 성경 지식으로 파악해서 ‘믿습니다, 받아들입니다, 긍정합니다, 인정합니다.’ 백날 외쳐봐야 여전히 자기 세계에서 못 벗어난 그러한 모습인 저희들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진정으로 보낸 자라면 이제는 내가 얼마나 잘나고 섬기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못났고 죄인이었으면 주께서 십자가 피흘리까지의 죄인이었나’를 도리어 기뻐하고 찬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