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장부
2026년 1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7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인도자는 회계장부를 갖고 있습니다. 버려야 될 자와 취해야 될 자를 구분합니다. 인도자의 원형은 예수님이시고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8-12) 이러한 지도자의 원형을 겨냥하면서 이미 구약때부터 그 시대의 신앙 지도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능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호출된 자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최종 기능인 것을 아실 겁니다.
복과 저주가 결코 혼잡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강탈 당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과실을 기반에 둔 새로운 선과 악을 짜신 겁니다.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최종 종착지를 마련하신 겁니다.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확실하게 구분지어시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우선 이미 선악 인식을 갖추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율법을 깔아버립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즉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율법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층에 눌리게 되는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선함이 늘 인간에게 합당한 의로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율법이 마련한 상벌구조 안에서 작용받은 존재가 된 겁니다. 이 율법이라는 저주가 깔린 코스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정을 익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자의 조건이란 하늘의 사정과 땅의 사정 모두를 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8-29)
아브라함의 경우에 예외가 아닙니다. 그 가정에 있을 곳이 없어 아비멜렉 족장이 다스리는 동네에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난데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경오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6-7)
즉 아브라함이 나타난 그 현장에서는 평소에 아비멜렉의 개인적인 인격이나 자질이 소용없습니다. 오로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위해 사죄의 기도를 해주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운명이 결정납니다. 아비멜렉의 자아는 결코 자기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 지식을 알고 있는 이상,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께서 배제해 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부름받을 때에 그 이후 연속적인 관계는 제사 제물의 일관성 연결됩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10) 제물의 자아성이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쪼개짐을 마주봐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폐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쪼개짐은 곧 이어 아브라함 가정도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자의 기능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번제를 드리로 갑니다. 이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제3의 제물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삭을 잡기 위해 칼을 들이대는 순간, 근처 수풀에 매어 있는 수양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 수양은 죽게된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로 바치므로서 인도자 속에 들어 있는 쪼개짐의 기능은 이제 이삭에게도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에서 ‘이삭의 씨’로 구심점이 전달되게 됩니다.
이러한 전달은 예수님에게 와서 멈춥니다. 누가복음 9::29-33에 보면, “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3-2=1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역함을 친히 짊어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마 8:17) 인간들의 자아는 율법의 의해서 쪼개져야 마땅합니다. 솔로몬 재판에서 자기 아이를 잃은 여인과 자기 아이를 잃을 뻔한 여인은 둘 다 ½로 망가진 아이를 받을 때 그들의 자아는 더는 사용 불가가 되어 버립니다.
하늘나라에서 소용없는 자는 지옥을 가고, 지옥에 소용없는 자는 천국을 갑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아가 쪼개지지 아니하면 선악 지식으로 완벽과 완벽, 철저와 철저를 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회계장부 중 하나인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참으로 천국에 가는 자들은 자신의 자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버린 자들입니다.(마 16:25)
어차피 인간은 죽은 목숨입니다. 살아도 허무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곧장 슬픔으로 돌아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음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인생생활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은 복된 것이 아닙니다.(요 20:29) 들음에서 믿는 방식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는 애초에 슬퍼할 자격조차 없음을 알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2강-히브리서 13장 17절(회계 장부) 260118-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7절입니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인도자’가 등장하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인도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고, 또 천사가 도와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걸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인도자라는 또 다른 인간이 필요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할 겁니다. 인도자가 나타나면 “네가 뭔데? 네가 나보다 더 나아? 훌륭해? 나보다 더 신앙 좋아?”라고 비교하면서 틱틱 거릴 수가 있죠.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12절에 보면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번 주 설교 요약, 주보 보면 뒤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도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그리스도만이 지도자가 된다는 거지요. 그리스도만이 지도자가 되니까 누가 교회의 지도자, 인도자라고 하면 “네가 그리스도야? 그리스도도 아닌 게 내 앞에서 얼쩡거려. 저리 비켜. 나는 그리스도와 직접 상관하겠어.”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근거처럼 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삼았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열두 제자는 이런 겁니다. 예수님이 지도자의 원형입니다. 그 원형 되시는 지도자로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서 떠나고 난 뒤에 새로운 지도자를 친히 예수님께서 양성하셨다, 또는 생성하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도자를 생성하고 만들어 내시는 데 여기에 조건 또는 어떤 자질, 방법은 예수님이 계셨던 것과 똑같이 카피하는 거예요, 반복되는 겁니다.
지도자라는 게 뭐냐? 예수님이 지도자의 원형이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도자의 특징은 뭐냐? ㉮하늘에서 내려와야 돼요.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냥 구름 정도에서 멈추고 말면 안 돼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사람 사는 곳, 자기 백성들, 천국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지상까지 깊숙이 내려와야 합니다.
그 코스가 이어져야 돼요.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왔다, 그게 다가 아니죠, ㉯그다음에 하늘을 향하여 들려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와서 지상까지 와서, 지상의 모든 것을 겪으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는 그 코스가 지도자의 원형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열두 제자들이 해야 될 일이 뭐냐? 예수님 자신의 코스가 오순절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면서 하나님도 아시고, 주님이 하늘에서 굳이 내려오셔야 할 그 이유,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지상에서 성경 보면서 구원받는 그런 방식은 애초부터 실패’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거든요.
“성경책 있겠다. 성경책 공부해서 내가 천국 가면 되잖아.”라는 식은 안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시면 구원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책들이 많이 있더라도 그 책들을 설명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구원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죠.
그런데 인간들에게 성경이 있고 율법이 있는데도 왜 설명이 되지 않느냐?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악마가, 마귀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어떤 설명을 해줘도 전부 엉터리고 가짜입니다. 그것을 누가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해왔었어요.
“모세 율법이 있다, 우리가 공부 많이 했으니까 우리 말을 들으면 나중에 천국 갑니다.” 할 때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처럼 ‘인간은 인간의 영적 아비가 될 수 없고 인간은 인간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지도자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주께서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어떤 자신감이 있는데요. 그 말은 ‘지도자라는 것이 없는 상태를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주님이 하늘로 가시고 “지도자 없네?” 이런 상태로 너희들을 그냥 고아처럼 남겨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자신감이지요.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 자질이 뭐냐? 하나님도 알고 지상에 있는 마귀도 알고 둘 다를 다 알아야 되겠죠. 마태복음 8장 2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덤가에 있는데 거기 귀신 들린 자가 있단 말이죠.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했어요.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귀신의 음성이죠. 귀신도 알고 주님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귀신이 이야기해요. “우리는 이미 잘린 자다. 우리는 이미 지옥 가기로 확정이 됐”는데 지옥 가기로 확정된 이 뱀, 마귀가 ‘나만 갈 수 없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과 같이 가겠다’라고 에덴동산에 찾아왔잖아요.
찾아와서 보물을 훔쳐가는데 하나님만 아셔야 할, 인간은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만 알아야 하는데 마귀가 깽판 놓은 거죠. 선과 악을 아는 그 지식을 인간이 알게 만들어버렸어요. 그 선악과 보물이 인간에게 가서 인간이 알도록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강제조치로 추방시켰습니다.
추방시키고 나서 어떤 계획을 했느냐? 선악과의 선과 악을 다시 정립할 수 있는, 새로 짜낼 수 있는 선과 악을 생명나무로부터 새로 시작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특이한 단어가 나옵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에요.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회계’라고 하는 것은 회계 장부가 있다는 거예요. 경리 장부에요. 한쪽과 반대쪽이 따로 구분되어 있고, 한쪽이 선이고 다른 한쪽이 악이 되겠죠? 선과 악이 생명나무를, 영생을 기반으로 해서 영생 얻을 자와 영생 얻지 못할 자를 구분하는 장부, 그 장부를 인도자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인도자는 뭘 하느냐 하면, “나에게 인도받는 자는 다 천국 갑니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은 잘릴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인도자가 이해하는 것은 이겁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잘릴 사람의 특징이 뭐냐? 악마에 의해 선악 지식으로 자기를 무장하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백 프로 천국에서 잘립니다, 잘리고 지옥 갑니다.
반면에 내가 알고 있는 선악, 쉽게 말해서 윤리와 도덕이죠, 윤리 도덕적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주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는 생명수로 간다는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이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 코스를 마련했는데 그 코스에 율법을 쫙 깔아놨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윤리 도덕적으로 잘난 체를 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를 옴팍 뒤집어쓰고 세상을 살아가는 자니라.’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땅을 거쳐 하늘로 올라갈 때 장부를 가지고 있어서 잘릴 자와 하나님이 천국에서 취할 자를 구분하는데 구분할 때 이미 모든 인간은 선악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악 지식을 알고 있는 자를 어떤 식으로 배제시키느냐 하면, 율법을 추가함으로써 배제시키는 거예요.
율법대로 99.99퍼센트를 지켰더라도 땡이에요. 이건 탈락입니다. 수능 한 개 틀렸다? 탈락이에요. 온전하게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킨 분은 누구냐?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미 지도자의 원형은 하늘 사정도 알고 땅의 사정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땅의 사정은 뭐냐? 마귀가 인간들로 하여금 ‘네가 윤리적으로 착하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잖아. 그대로 살아. 그대로 살게 되면 네 마음속에 회계 장부가 있어서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이 많으면 넌 나중에 천국 가.’
하나님께서 “너 착한 일 했어, 나쁜 일 했어?” “완전하지는 않지만 착한 일이 더 많을 걸요?” “그러면 합격.” 어떤 사람은 “저 착한 일 한 게 되게 많거든요?” 그러면 천국 가도 높은 자리, “저는 간당간당합니다.” 그러면 저 낮은 자리, 누구 말대로 구원 합격은 했는데 팬티 바람으로 천국 간다는 것, “넌 상급은 없어. 구원이나 받아.” 이런 식의 인식이 선악 인식인 거예요.
그 선악 인식을 일거에 제거하는 방법은 율법밖에 없어요. 율법으로 소위 나는 이만큼 지켰다, 이만큼 훌륭하다, 이만큼 대단하다고 여기는 모든 인식의 틀 자체를 저주의 틀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율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선악 지식을 갖고 있을 때 선악 지식도 문제이지만 선악 지식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려는, 이 자아를 포기 못 하는 것도 역시 악마의 힘에 장악되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 코스의 방식, 지도자의 방식은 뭐냐?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임했다 이 말이죠. 아담도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오실 메시아의 표상으로서, 모형으로서 주어진 거예요. 아브라함이 해야 할 기능은 창세기 1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그걸 미리 앞당겨 모형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이야기하면서 그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심판이 일어나요. 소돔과 고모라가 대표적인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20장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족장이 살고 있는 남쪽 지역으로 갔어요.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보고 아내로 삼고자 했어요. 왜냐하면 오빠와 누이동생 사이인 것처럼 왔으니까 그 누이동생에게 남편이 없었잖아요. 유부녀가 아니고 처녀인 줄 알고 그냥 취하려고 했습니다.
계획 다 잡았는데 갑자기 아비멜렉 족장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그 여인을 취하면 넌 죽어.”라고 통보했어요. 창세기 20장 7절에 보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이 말씀이에요.
참 어처구니가 없는데요, 누가 아브라함의 아내를 탐냈습니까? 그냥 아브라함 가족이 그곳에 기어들어온 거예요. 가만있는데 기어들어 왔다고요. 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집안, 그 가문을 아주 사달을 내게 됐어요. 이게 뭐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올 때, 인도자로 올 때 구원이 먼저가 아니고 심판이 먼저예요.
율법을 깔아놓은 이유가, 네가 심판 대상인 것을 확실히 하고 분명히 하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건지십니다. 그렇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어줍잖게 구원 해주겠다는 건 전부다 사기꾼들이에요. 본인이 심판의 대상인 것을 분명히 알려줘야 하고요 두 번째,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재간이나 재주는 우리 자신에게 아예 없어요.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따먹은 게 있기 때문에, 뱀에게 농락당해 따먹은 게 있어요. 뱀의 지식이 자기 지식이 된 거예요. ‘난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 바르게 살면 천국 간다.’ 그게 화근이라니까요! 그게 화근이에요. ‘교회 다니면서 바르게 살았는데 설마 하나님께서 날 내칠까?’ 그게 마귀 생각이라니까요, 그게!
우리가 삶을 살며 한시도 이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아요. ‘최선을 다해 착하게 살았으니까 좀 봐주겠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아요. 설교 이걸로 끝낼까요, 그러면? 끝내도 괜찮아요. 누구든지 모든 말씀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이미 그 사람은 저주받기로 확정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있을 때 일단 마귀가 세웠다고 보시면 되고요. 교회 참석해서 그 교회가 심판을 이야기하거든 ‘괜찮은 교회네?’ 이렇게 보시면 되고, 구원을 이야기하거든 ‘아, 이거 마귀가 세웠구나.’ 이렇게 간주하시면 돼요.
사람들이 살면서 사는 게 슬퍼요. 슬픈 이유도 없이 그냥 슬퍼요. 이것은 본인이 낌새도 없는데 그냥 저주의 삶이에요. 슬픔 없을 재간이 있느냐? 없을 방도가 없어요. 그냥 슬퍼요. 그래서 사람들은 갈수록 말을 잘 안 해요. 왜? 자기 마음 사정이 너무 슬퍼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나에게 말을 해봐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속 시원히 말을 해줘
(이승희, 슬퍼하지 마, 2003)
말을 안 하잖아요. 왜냐? 매사가 슬퍼요. 하루하루가 우울증의 삶입니다. 슬픈 이유를 몰라요. 슬픈 이유는, 즐겁지 않아서 슬프거든요. 제 말이 맞죠? 기쁘지 않아서 슬픈 거예요. 즐겁지 않아요. 뭐 즐거울 거리가 있어야죠. 술 먹고 신나게 춤춰봐야 그때뿐이에요. 다시 슬퍼요. 슬픔이 원형 같아요. 자꾸만 슬픔 쪽으로 되돌아와요. 슬픔의 특징은 말문을 닫아버린다는 거죠.
이것은, 인간이 이미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자아가 고장 난 거예요. 오염된 겁니다. 망가진 겁니다. 쓸모없게 되어버렸어요. 살아도 아무 의미 없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그것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단은 “네 고향을 떠나자.” 떠나면서 그냥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아 기능을 줘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라고 하시면서 축복과 저주 기능에 있어서 아브라함 본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는 좀 살려고 하면 주변에서 아브라함을 무서워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벌어져요. 아브라함이 가는 곳에 심판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어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미처 알지 못한 게 있었는데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가 제사라는 걸 가지고 이어져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라는 그 지도자의 원형, 지도자의 위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관계가 성립이 되는데 그 관계에 제사가 들어가요. 그 제사의 특징이 창세기 15장 10-11절에 나옵니다. 그건 중간을 쪼개는 거예요. 중간을 쪼개요.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이 선악 나무의 선과 악을 합치면 안 돼요.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나뉘어 있는 거예요. 그 나뉘어 있음을 마귀가 시켜서 인간이 덥석 물은 거예요. 아담은 그냥 선악 지식을 알 필요 없이 하나님과 하나 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진 것을 그냥 덥석 물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기초해서 새로운 선악을 나눴습니다. 그 나눈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아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벌써 갈라졌잖아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 이미 갈라졌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런 사람이 가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소용없는 사람은 지옥 가고요, 지옥에 소용없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옥에 소용 있는 사람입니까, 천국에 소용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소용이 있을지 지옥에 소용이 있을지를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이 지옥 같은 현장, 현실 세계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살게 했습니다.
인간들은 천국이고 뭐고 관심 없고 이 지옥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고 대인관계 나서고, 아침에 눈 떠서 하루 끝날 때까지 부지런히 열심히 힘들게 살아보려고 하는데 마음은 왜 그리 자꾸 슬프죠? 왜 자꾸 그렇게 슬퍼요? 자식이 잘되어도 슬프고, 돈이 잘 들어와도 슬프고요, 기쁜 것은 잠시고 다시 슬픈 것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뭐냐?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자체가 근원적으로 지옥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옥에 적합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래요. 너 지옥 간다고 누가 이야기 해줘야 하는데 교회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손님 다 떠나가는데? 헌금도 안 나오는데요? 목사 밥 못 먹고 사는데요?
“목사님, 슬픈데 어떡합니까?” “그럴 땐 이렇게 주의 말씀으로 기쁨을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참 은혜받았습니다.” 이래야 장사가 되잖아요. 지금 근원적인 문제가, 본인이 쪼개지질 않았어요. 쪼개지는 선악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아가 쪼개지지 않았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쪼개게 했어요. 쪼개면서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쪼갠 채 마주 보게 했어요. 쪼개졌으니까 좋은 걸 취하고 안 좋은 건 버려라, 이게 아니라 그 쪼개진 자체가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제물 안에 계신 분으로서 일을 개시하는 거’예요.
쪼개진 제물이 인격화되면 그분이 유일한 인도자입니다. 쪼개졌다는 말은 하늘과 땅이 쪼개진다는 뜻이에요. 하늘은 천국으로, 땅은 지옥으로 쪼개진다는 겁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정신 팔려서 살아가느냐?’ 쪼개져서 버려지는 그 세계에 살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착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과 그 말씀을 피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요. 그 말씀을 안 듣겠다는데 기피하는데 온 사력을 다하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도망치고 있어요. 그 말씀을 안 듣겠다는 거예요. ‘좀 건드리지 마. 맨날 이런 소리야. 건들지 마.’
그래서 하나님이 쪼개는데 그 쪼개지는 장면을 구약에서 제일 잘 보여주는 데가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두 여자가 거의 동시에 애를 낳았는데 한 여자가 뒹굴어서 자기애가 그 몸무게에 깔려 죽었어요. 그러면 엄마는 둘인데 애는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요?
아침에 눈을 뜨니 범인 되는 여자가 내 아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보니까 자기애가 옆에 있는 아줌마한테 가 있단 말이죠? 자기 자식을 모르겠습니까? 내 거다, 네 거다, CCTV도 없고 서로 싸웠단 말이죠. 그러다가 이 난처한 재판을 솔로몬에게 부탁한 거예요.
솔로몬이 어떻게 재판했느냐? “애 이리 가져와!” 해서 진짜 현명한 재판, 하나님의 재판이 뭐냐? 애를 두 조각내요. 한 아이를 두 조각 내서 각각 가져가는 식으로 했어요. 이것이 뭐냐? 두 번 다시 두 여자는 자기의 자아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반토막 낸 아이 가지고 이걸 내 자아에서 나온 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토막 낸 아이는요, 아이를 갖고 있는 엄마 자신이 2분의 1로 쪼개져서 내가 이 자아를 내 것이라고 쓸모 있게 할 수가 더 이상 없다는 것, 이게 하나님의 시선이고 관점입니다. 내 인생을 관리하는데 내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쪼개졌으니까요. 이미 쪼개졌다고요.
아브라함에게 그 제사가 쪼개진 것처럼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집안이 쪼개집니다.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못 낳죠.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으니까 집안이 쪼개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한쪽을 두고 “치워버려라.” 그래서 하갈 그 여자는 이스마엘 데리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젠 아브라함을 쪼갭니다. 어떻게 쪼개는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번제를 드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의 대상이 이삭이었죠. 이삭을 쪼개야 할 판이에요. 이삭을 두 조각 낼 판이에요.
창세기 22장에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제물을 쪼갤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었고 아들 이삭이 있었어요. 숫자로 치면 2, 두 명이 있었어요. 이게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선과 악 두 개를 알고 있는 인간에게 제3의 희생물이 있다는 것은 그 아들이 쪼개지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근처 수풀에 제3의 존재, 1도 아니고 2도 아닌 제3의 존재인 어린 숫양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몰래 감춰둔 거예요. 몰래 감춰둔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인도자예요. 아브라함이 제사드린다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제3의 요소가 개입되어야 해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쪼개진 제물이 들어가야 돼요.
그다음에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브라함이 미처 생각 못 한, 선악 체계를 갖고 있는 인간이 절대로 생각 못 한 제3의 요소가 아브라함을 살립니다. 그게 누구냐? 그게 바로 어린 양, ‘여호와이레’ 어린 양인데 그 어린 양으로 인하여 다음 지도자가 바뀝니다. 이삭으로 바뀌어요.
이게 좀 어려운데,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 네 자식이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고 해놓고는 지금 이삭이 태어났는데 창세기 22장에서는 이렇게 바뀝니다. 16-17절에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의 지도성이 그대로 어디로 인수인계되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에게 그대로 인수인계됩니다.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계속 내려와서 마지막에 예수님한테 이어져요. 예수님이 지도자라고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 원칙, 쪼개짐의 원칙을 싣고 장차 제대로 된 지도자, 온전한 지도자, 일체의 선악 지식의 모든 저주와 율법을 다 지킨 분에게 이어지기 위해서 쪼개짐, 쪼개짐, 쪼개짐…, 의 원리가 계속 예수님께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에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 산에 올라가서 변화하는데요, 예수님과 변화할 때 그때 모세와 엘리야도 영광중에 나타났습니다. 세 명입니다. 세 명인데 여기 33절에 보면 “두 사람이 떠날 때” 이렇게 시작해요.
33-36절에 보면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세 사람이 있다가 갑자기 두 사람이 떠나버려요. 3-2=1이죠. 3 빼기 2는 1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 사람 중에서 다 지도자로 알고 있는 모세 엘리야가 현장을 떠나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만 남아있어요. 35절에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세 분이 변화산에서 이야기하는 대화 내용이 뭐냐? “예수님 언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십니까?” ‘언제 죽으실 겁니까? 언제 희생 제물이 되실 겁니까?’ 그 이야기를 하고 모세와 엘리야는 떠나버려요.
저와 여러분들이 그 현장에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여야 합니까? 단 하나만 있죠. “주님, 저 아닙니다. 저 가짜거든요. 주님, 언제 돌아가실 겁니까?” 교회 가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그래서 교회가 많이 컸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령 받고 난 뒤에 “저 아닙니다. 저 가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 가짜에요. 저 엉터리입니다. 저는 빠져야 합니다.” 내 구원에 있어서 내가 빠져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나의 자아는 내 구원에 활용할 수도 없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가지 날라가야 됩니다. 두 조각나야 됩니다, 솔로몬의 아이처럼. 솔로몬의 지혜는 제물, 그 제물이 되지 않는 자는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기한 차력의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뜬금없겠지만, 일단 지하철역에 내려가요. 그러면 지하철이 역사로 들어올 겁니다. 사람들이 내린다고 지하철 문이 열리잖아요. 딱 열릴 때 그 앞에 서서 폼 잡고 두 팔을 벌렸다가 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손을 천천히 모으세요.
딱 모으면 지하철 출입문이 딱 닫힙니다. 그리고 천천히 지하철이 가는 방향으로 밀어내세요. 그러면 지하철이 신기하게도 천천히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는 빨리 움직이세요. 빨리하면 지하철이 손이 움직이는 그 방향으로 갑니다. 대단한 능력 아닙니까? 이게 차력쇼지요.
우리가 하는 일은요, 우리 구원에 아무 보탬도 없는 차력쇼에요. 주께서 해내시는데 마침 내가 이렇게 몸짓을 해야 비로소 전동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남한테 그렇게 비치게 만들죠.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요. 이게 분리에요. 주님과 우리가 분리되는 첫 번째 분리고, 두 번째 분리는 같은 방향성으로 데려가요.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 때 일단 주님과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선악 지식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자갈을 밟지도 않고, 저주를 밟지도 않고 “나 건전해요. 내가 얼마나 착하다고요. 나는 나쁜 짓 안 하기 위해 용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꾸 이런 것으로 자기 구원이나 주님의 일에 끼어들려고 하는 뱀한테 받았던 그 못된 선악 지식, 지식을 활용해서 자꾸 나를 괜찮은 존재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그런 버릇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걸 쉽게 말해서 시험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마귀 시험 든 거예요. 마귀는 좋~다고 하죠. 마귀에 시험 든 사람과, 나는 헛방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은 대화가 통하질 않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지킬 수 있는 자아가 있는 자와 지킬 수도 없는, 그래서 자아가 없는 자와는 대화가 안 통합니다. 통할 수가 없어요.
아까 제가 그랬죠. 매사에 왜 슬프냐고요? 우리는 슬플 자격도 없어요. 우리가 뭔데 슬퍼요? 차력쇼나 벌이고, 평생동안 남한테 신앙 있는 척, 믿음 있는 척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헛방인 우리가 무슨 슬픔을 언급하고 자기 자랑질을 할 수 있습니까? 매순간 죽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죄 안 지을 수 없고요, 그러면 자기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 없앨 수가 없으니까 나타난 건 죄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이렇게 되어 있고요, 25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그뒤의 단어가 중요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 ‘나’가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는 이미 물 건너갔어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뭐 하겠다’는 이것은 전부 사기꾼들이에요. 이런 것은 없어요.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거기 때문에 죽는 건 당연한 거고, 그다음부터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식으로 주님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죽는 것은 손해가 아니에요. 어차피 죽게 돼 있으니까요. “이왕 죽을 거, 주를 위해서 죽을 네 목숨 내놔라.” 그 말이죠. “그러면 살리라.” 제자들 이 말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그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습니다. 왜 도망갔습니까? 죽기 싫어서. 제자들은 살고 싶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단 한 명도 없는데 도망간 제자들이 있는 그 자리에 주님께서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또 찾아왔어요. 제자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떨고 있을 때, 문도 안쪽에서 잠갔는데 문 열고 그냥 들어왔어요. 부활하셨으니까 못 할 게 없잖아요. 그렇게 들어와서 이제 이 땅의 지도자를 양성합니다.
그렇게 할 때 방법이 있어요. “일단 눈에 보이는 식으로는 언급하지 마라.” 이게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복이 복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보여주는 식으로 해서 사람들이 덥석 무는 식으로 사람들을 유인하지 말라. 보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차라리 봤던 것도 잊게 만들어버려라.’ 그거예요.
두 번째는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믿음은 어떻게 믿을 것이냐? ‘성령으로 준 말씀을 믿는 자는 그 입술로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했어요.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리고 16-17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니까 보는 것 대신 뭐라고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현장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요. 사도행전 8장의 빌립 집사입니다. 빌립 집사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사막으로 데려갔어요. 때마침 타이밍 맞춰서 에티오피아 내시가 먼지 일으키면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죠, 그렇게 둘이 만났죠. 만났을 때 그 에티오피아 내시가 “안녕하십니까? 빌립 집사죠?”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 에티오피아 내시는 어디를 쳐다보느냐? 사람을 본 게 아니에요. 예수님 직접 봐도 못 믿는데 무슨 사람을 봐요? 사람을 본 게 아니고 이사야서, 성경책을 봤다고요.
그 내시가 성경책 이사야를 보고 있을 때 빌립 집사가 이렇게 물어요. 사도행전 8장 30절에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 때 내시가 하는 말이 31절에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사도행전 8장의 그 구절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 8장 17절을 설명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것은 이사야 53장 4절이에요.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분이 바로 지도자예요. 그 지도자는 메시아예요. 메시아는 뭐냐? 메시아라 한다고 해서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라고 한다고 해서 속아넘어가면 안 돼요. 메시아가 뭐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율법을 깔아 놓으니까 모든 인간들은 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할 사람들이에요.
구원이나 천국은 말도 꺼내지 마세요. 다 저주받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천국에 필요한 사람을 뽑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가만둬도 꼭 지옥에서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연금 타면서, 정치 운동하면서 전부 다 지옥에 적합한 사람들이에요.
천국에 적합한 사람은 기존의 선악 지식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기초로 해서 생명나무가 하신 일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저주예요. 그게 회계 장부, 지도자의 회계 장부, 차변 대변에 그게 나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나누어져 있는 거예요. “이것은 버릴 자고 이것은 취할 자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가 지상에서 뭘 하느냐? 친히 담당하셨답니다, 친히 담당. 우리가 뭐 인생이 슬프다고요? 자기 인생을 왜 자기가 감당해요? 친히 담당하신 분이 있잖아요. 그리고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연약해야 돼요. 우리가 매사에, 매사에 연약해야 된다고요.
사도행전 8장 34-35절에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 집사가 딴 것을 한 게 아닙니다. 내시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안 봤어요. 그냥 사람을 봤을
뿐인데 말씀 속에 살아 있는 주님이 같이 느껴진 거예요. 그렇게 느껴지니까 그 에티오피아 내시가 하는 말이 “당장 여기서 내가 세례받아야 해”라고 해서 거기서 물세례 받았고, 그 후에 둘이 헤어졌어요.
사도행전 8장 36-39절에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그다음에 서로 카톡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헤어졌습니다. 사람이 슬픈 것은 자기한테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 그래요. “엄마, 숙제 안 했어.” 또는 “엄마, 설거지하다 그릇을 깼어.” 또 “엄마, 또 실수했어. 슬퍼. 자꾸 실수하는 내가 슬퍼.”
그게 잘못이에요. 본인이 괜찮을 경우와 망가질 경우의 자기 회계 장부를 왜 따로 갖고 있습니까? 주님의 회계 장부를 무시하고 왜 자기 장부를 따로 갖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아직도 자기한테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은 좋은 고기 아닙니다. 그건 양 아닙니다. ‘친히 담당하시고’의 내용이 거기에는 없어요.
교회까지 나와서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지금 그걸 확인하고 있는 셈이에요. 딱 지옥에 적합한 사람, 그걸 교회에서 양성하고 있다니까요, 성도라는 이름으로. 잘린 자와 거두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여기서 어떤 자가 잘린 자인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잘린 자는 지도자가 없겠죠. 매사를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완벽에 완벽을, 철저에 철저를 기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잘린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다 안 다니나 상관없이요.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고요. 자기가 쪼개지지 않고, 자기 자아를 건전한 자아로 바꾸려고 계속 쥐고 있는 사람, 그게 잘린 자의 모습이죠.
어떤 팝송 가사가 이런 게 있어요.
Mama, just killed a man
(엄마, 나는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인생 새로 시작했는데 사람 죽여서 나 절단 났어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가사의 주인공인 이 사람이 살인하고 난 뒤에 어디로 가느냐? 심판대 앞에 가요. 누가 심판하느냐? 재미있는 주님이 심판하지 않고 악마가 심판해요. 정확한 겁니다. 악마가 심판해요.
‘전에 율법에 의해서 너 죄지었잖아.’ 이렇게 나온 거예요. <퀸>이라는 그룹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라는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거든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노래입니다. 이 사람은 불신자예요. 불신자의 세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선악 지식이 들어 있어요. 선악 지식이 그걸 그대로 노래 가사로 펼쳐낸 겁니다.
Put a gun against his head
(그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Pulled my trigger, now he's dead
(방아쇠를 당겼고 그는 죽었어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이 뭐냐? 엄마가 걱정되는 거예요. 아들 하나 보고 살던 그 엄마. 그래서
Carry on, carry on
as if nothing really matters
(어머니는 계속, 계속해서 살아가세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요)
엄마는 날 잊어버리고 엄마 인생이나 계속 살라고 하지요.
Too late my time has come
Sends shivers down my spine
(너무 늦었어요 내 차례가 왔어요
등골이 시려요)
순서가 되었어요. 끌려가는데 발을 빼려고 해도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body's aching all the time
Goodbye everybody
(항상 온몸이 아파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I've got to go
Gotta leave you
(나는 당신들을 떠나야 해요)
나는 이제 심판받으러 가는데 사람들이 “저 사람은 청춘을 막 시작하는 소년범인데 풀어줘라” 하니까 악마가 “안 돼!” “풀어줘” “안 돼.”
Let me go
(제발 떠나게 해주세요)
Will not let you go
(우린 널 못 보내)
이게 가상이지만 살인자의 고백이거든요. 이 살인자가 말하기를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내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욥기 이야기가 막 튀어나와요. “이렇게 인생 살 것 같으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
(가끔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과학을 신봉했거든요. 과학을 신봉하니까 그 노래 가사에
Gallileo, Gallileo,
(갈릴레오, 갈릴레오)
Gallileo Figaro
(갈릴레요 피가로)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과학자입니다. ‘과학도 심판정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구나.’ “Let me go”(보내달라)를 반복하지만 “Will not let you go”(안 돼, 안 돼). 마지막은 절망으로 끝나요.
Nothing really matters - nothing really matters to me
(아무것도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 내겐 아무것도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Anyway the wind blows.
(어떤 식으로 바람이 불든)
‘아무것도 다 소용없다. 내 인생 아무것도 소용없다.’ 마지막 가사가 “그냥 바람은 부네” 이것으로 끝나요. ‘어쨌든 간에 바람은 불고 있네. 이 대자연과 살았는데 대자연이 나의 운명을, 나의 선악에서 오는 죄성을 해결해 줄 수 없구나.’
이게 바로 전형적인 뭡니까? 전형적인 잘린 자예요. 잘린 자의 특징은 뭐냐? 끝까지 자아를 포기 못 하고 ‘그때 성질 죽이고 살인하지 말고 약간 겁만 줬으면 될 걸 괜히 방아쇠 당겨서 실수하는 바람에 한꺼번에 나를 완전히 버려놨다’고 하는 거예요.
이 버릇이 “엄마, 설거지하다 그릇 깼어.” 그리고 “엄마, 숙제 못해서 미안해.” 이런 식으로 우리 자아에서 기어 나오는 거예요. 왜, 왜 그걸 걱정해요? 원래 그런데, 원래! 인간은 원래 그래요. 원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기에 비해서 부름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부름받은 자의 특징은 디모데후서 1장 14-15절에 나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
13절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실수를 다시는 안 해야지’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인하게 되고, 사람을 진짜 죽였어요, 죽이게 된 것은…’,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은혜대로 은혜의 순서대로 한 것이다.’ 이게 바로 천국에 쓸모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은 어느 쪽 할래요? 어느 쪽 하렵니까? 자기 실수를 가슴 아파할래요, 아니면 매 순간 주께서 모든 연약함을 담당하신 그분을 생각하면서, 매사에 나의 실수와 죄를 통해서 도리어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쪽에 서시겠습니까?
인도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도자에게 성령을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회계 장부를 작성해서 생명나무를 빛낼 사람, 그리고 자기의 선악 지식을 빛낼 사람을 구분하는 작업을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아직도 우리 자신에게 따로 지킬 것이, 귀한 게 있는지 아니면 안 지켜도 되는 모든 것이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파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