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제사의 신기함

아빠와 함께 2026. 1. 13. 18:00

제사의 신기함 

2026년 1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6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제사’를 빼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항상 ‘제사’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는 곧 이 현실 자체가 제사 시스템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모세와 시내 산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갭이 있었습니다. 이는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에 차이가 있고 대립적이다는 말입니다.

이 대립을 더욱 분명히 한 시스템이 바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하시겠다는 겁니다. 제사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는 결코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단호함의 표현입니다. 이미 인간들 전부는 악마에 의해서 길들여진 상태에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 말해. 내가 갖게 해 줄게. 소원을 말해. 내가 응답해줄테니까 ” 인간은 과거를 모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뒤돌아보면 모두 이미 사라진 과거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없어질 것들을 애써 축적합니다. 특히 인간들이 생각하는 미래란 과거의 연속체 뿐입니다.

즉 아무리 해도 본인 스스로가 그동안의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늘 듣는 이야기는 개인의 운명은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화가 났습니다.

주님과의 결별이 무서워서 자기쪽에서 주님을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의 세계에 합류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 입장에서 자기 운명에 손쓴 방법이 없다는 바가 잠재적 분노를 유발하게 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살인자의 후예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제사만이 현실로 확장됨을 분명히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악마에 주님으로 변장한다는 사실을 알지를 못합니다. 즉 “주님 내 것을 건드리지 마세요. 복음을 들어줄게요”라는 식으로 거래에 나섭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속성을 뿌리로 갖고 있기에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인의 죽음말고 다른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녹’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에녹은 ‘죽음 없는 죽음’에 동행했습니다. 동행하므로서 이미 그는 죽은 채로 동행하게 된 겁니다. 이 ‘죽음 없는 죽음’의 발전된 예가 엘리야에 등장합니다.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의 후기입니다.“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 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 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 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왕하 2:16-18) 완전 코메디입니다.

엘리사 말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엘리야의 죽음을 일반적인 죽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엘리야의 시체가 행방불명된 줄로 압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제사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 없는 죽음’은 엘리사의 죽음을 통해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의미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왕하 13:20-21)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지만 실은 그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두 여동생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성도가 된 자는 자기 자신에게 신기해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미쳐 있는 상태로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자신이 제사 안의 제물로 들어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분명 자신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되면 ‘자기에게 미쳐 있는 자아’와 ‘말씀에 미쳐 있는 자아’로 두 동강 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엿가래가 둘로 나뉘어서 그 속을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미쳐 있는 상태란 ‘자기를 향한 자기 정성에 매료된 상태의 자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선악과 죽음에서 빼내어 생명나무의 영생을 먹게 해주신 그 ‘피’가 들어있는 자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그래서 이 신기함에 절로 찬양과 감사와 기쁨이 샘솟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서는 그 두 동강 난 자아의 중심 자리에 십자가가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제 자신이 ‘거짓이기에 더는 울 필요도 없습니다.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외롭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에 합류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주님의 뜻은 한결 같습니다. 오로지 다음과 같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일상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미쳐 있는 거짓된 존재인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1강-히브리서 13장 16절(제사의 신기함) 26011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6절입니다.

히브리서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But to do good and to communicate forget not: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well pleased.(KJV)

And do not forget to do good and to share with others,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pleased.(NIV)

‘제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친히 차려 주신 겁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왔던 이유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의 규칙과 원리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제사가 새로운 현실로 교체가 된다는 걸 알리기 위함입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미 죽었다고 여겼던 모세가 나타났을 때 깜짝 놀랐죠. 아무 준비 없이 산으로 올라갔는데 40일 만에 내려왔을 때 그야말로 귀신인지 유령인지, 놀랐을 겁니다. 상당히 반가운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그건 인간들의 일방적 입장이고요,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은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낸 이유는, 다르다는 거예요. ‘다르다, 너희가 생각하는 여호와와 나의 여호와가 다른 하나님, 다른 여호와다.’ 명칭은 ‘여호와’인데 전혀 다른 여호와다, 그 차이 나는 것을 율법을 가지고 증거로 제시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라는 것을 중간에다가 집어넣고 ‘누구든지 제사를 통과하지 않으면, 즉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다.’ 그것을 천명해요,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뭐로 보느냐? ‘제사장의 나라’로 규정한 거예요.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 것은 제사 시스템 바깥에는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제사 시스템 안에서만 내 백성이 되고, 그 제사 시스템 바깥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제사가 제사로 그냥 머물지 않고 효과를 보여주는데 바로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의 이 제사에서 근거가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선한 행함’과 ‘서로 나누어 준다’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어디서 비롯되어야 하는가? 이 선한 행함과 서로 나누어준다는 이것은 제사 안에서만 성사된 그것을 나누어 주는 거예요. 제사에 대한 효과를 분배하고 나눠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나눠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장세워서 뭘 하게 했던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무엇을 나눠줬던가? 돈 나눠 줬습니까? 부자 되게 했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시위나 투쟁하라고 했습니까? 정권 교체를 외쳤습니까?

아니죠. 전혀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그 모습을 보고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자기 어떤 욕망을 달성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사도행전 2장 44절 47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줬다’는 이 대목에 대해서 구미가 당기는 거예요. ‘아, 없이 사는 사람들도 교회 나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것, 그리고 도움 주는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전형적인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남이 바로 이거잖아. 역시 하나님은 우리 기대에 부응하는 하나님이구나.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은 모여들었어요.

사도행전 4장 3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뭐 당근마켓이예요, 뭐예요? 바자회를 매일같이 반복했다는 이야기로 들려올 때 ‘빈민 구제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구나. 역시 교회는 이런 점에서 세상과 달라. 역시 교인들은 천국 사람 맞아.’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유혹거리가 된 거죠.

그러나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가 뭘 이야기했습니까? 그들은 세상 심판을 이야기했어요. ‘먼지를 떨어 버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든 먼지를 떨어 버리라. 그것은 이미 잘린 자들이다. 그들은 지옥 갈 자들이다. 지옥이냐, 천국이냐, 그걸 결정하는 기준점을 앞장서서 외쳐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재정적인 도움을 받고 그런 거 없어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예요. 마태복음 3장에서 ‘회개하라. 심판 날이 가까워 왔다. 쭉정이는 지옥 가고 알곡은 천국 간다.’ 그 이야기 했잖아요.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뭘 얻어먹을 생각을 하고 교회가 남을 도와주는 국가 산하의 어떤 구제 단체, 크리스마스 때 시끄럽게 딸랑이는 구세군 그런 거 해서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수가 있는 일이에요.

그러나 성경의 이 제사 자체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대체가 될 때 그 대체의 경계선에는 뭐밖에 없는가? 심판이죠.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마지막 때에 믿음이 있겠느냐’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혹시,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자가 혹시, 없는 것이 맞는데 혹시 있거든 신기해해라, 신기하게 느껴라.’ 혹시 여러분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거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신기하게 느끼세요. 스스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본인이 본인보고 낯설게 느껴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잘 알아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쳐있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쳐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씀에 미쳐있다? 여러분, 이거 신기하지 않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이미 인간은 마귀한테 세뇌당하고 있었어요. 마귀는 항상 인간에게 이렇게 합니다. “갖고 싶은 거 갖게 해줄게. 내게 소원을 말해.” 그런 식으로 꾸준하게 마귀의 부속품이 되어서 그동안 살아왔었어요. 그게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조가 돼요.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 차이 나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데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렇게 딱 했어요. 여기 ‘영생’이 나와요. 생명이 나옵니다.

그다음에 8-9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신기함이 없습니다. 세상은 모조리 서로 의사가 통하는, 의견교환이 가능한 기본적인 자질이 탑재되어 있어요. 신기함이 아니에요. 그걸 저는 ‘권력의 생태학’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라는 것은 권력에 참여해서 그 권력의 일부로 내가 새로운 주체를 획득하는 거예요.

집에서 ‘오냐, 오냐’ 하는 것 말고 사회에서 ‘너는 이렇다, 너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내 주체를 확립해 주는 장소는 사회입니다. 사회의 권력이 있어 줘야 거기서 내가 사람대우, 주체 대우를 받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 사회의 사람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게 아니고 그런 사회, 세상에 속한 사람 말고, 내게 주신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것을 잘 아시죠. 마귀로부터 “갖고 싶은 거 뭐 있어? 내가 갖다 줄 게. 나한테 소원을 말해봐. 말하면 내가 그 소원 이뤄줄게.”

그렇게 할 때 그들은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은 못 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마귀가 예수님으로 변신했다는 생각을 안 해봤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번 수련회 고린도후서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마귀가 어린 양으로 변신해요.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이건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부르는 예수가, 실은 마귀가 예수로 변장해서 “내게 기도해 봐. 철야기도 해 봐. 새벽 기도도 해봐. 내게 나와. 소원 들어줄게.” 마귀가 그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인간을 다루겠어요? 마귀가 인간에게 계속 심어주는 것은 뭐냐? 평생 살면서 ‘내 인생은, 내 삶은 내 것’이라는 것을 갈수록 점점 굳어지게 만들어요.

그런데 만약에 복음이, 주님이 와서는 평소에 내 것이라고 여긴 것을 두고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등장할 때 여기서 우리는 극도의 모멸감을 느낍니다. 모든 삶 하나하나에서 사력을 다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밀어내려고 시도하게 돼요. 예수님의 말씀이 잘 안 들리는 곳, 말씀의 모임이 없는 곳, 어떡하면 빠질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있느냐?

가룟 유다가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기도 죽는 이유는, 예수님의 결별 선언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 쪽에서 주님을 정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왜냐하면, 주께서는 내 백성을 이미 확정한 거예요.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의 세계에 합류할 능력이 네 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고 확정 지었던 거예요.

‘내가 노력해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주님께 까이게 된다면 내 쪽에서 먼저 주님 까면 되잖아.’라는 식의 모습,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전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살해하는 살인자들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에요. 살인 본능을 하나의 씨앗처럼 갖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이고 아무리 예수지만 어떻게 내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윽박지르고 나오느냐? 내가 내 인생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수고와 양보와 정성을 다했는데 이제 와서 네 건 없다. 다 내 것이다. 네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네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나오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죽여 버리는 것 외에는 더 할 게 없습니다.

주님은 현재 있는 이 마귀 들린 우리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책임은 마귀가 져 주지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제사를 통해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이게 주님의 목적이에요. 지난주 낮 설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우리를 버릴 만한 곳에 쓰레기로 버림으로써 주님이 차려놓은 제사 밥상에 우리를 거기 죽음으로서 합류시키는 것, 그게 바로 최고의 복입니다.

나한테 미쳐있는 것을 말씀에 미쳐있는 걸로 바꾸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이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은 것은 생명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하고 상관이 없는 인간이, 선악과 따먹어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어떤 경우에도 선과 악의 양심은 지키겠다고 버티고 있는 인간이 무슨 수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안 되니까 주님께서 중간에 제사를 집어넣은 거예요. 제사를 집어넣어서 그 제사에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죽음, 일반인들이 경험할 수 없는 특이한 죽음에 자기 백성들을 합류시키는 방법, 바로 제사의 방법 외에는 달리 그런 수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있을 수가 없죠.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주의 처방은 뭐냐? 우리한테 사약을 내리는 거예요. ‘넌 사약 받을 만 해서 내린다’는 거예요. “따먹지 말라는 걸 왜 따먹었어?” 현재 문제 있는 너를 네가 ‘어떻게 어떻게 바꾸어서 어떤 식으로 구원받을까?’ 하는 종교적인 방식 그것은 마귀가 집어넣은 거거든요. “그런 것 하지 말고 내가 사약을 줄 테니까 맛있게 먹고 그냥 죽어 버려라.”

그런데 그 사약이 어디서 나오는가? 제사에서 나와요, 제사에서! 수련회 한다고 어떤 집사님이 저한테 한약을 주셨어요. 다른 사람 보기에는 ‘먹고 힘내서 강의 잘하라’고 준다고 보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했습니다. 이게 사약입니다. 당신이 죽어야 말씀이 나온다는 거예요. 당신이 살아있으면 말씀이 안 나오니까.

참, 이 복음이 없는 교회…, 복음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수십 년 알아 온 그 교회의 이야기를 안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는데 이건 그 교회만이 아니고 우리 교회 포함해서 모든 교인들이 다 마찬가지예요.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그 교회가 현재 서울 송파구에 있는 교회인데 부동산 가격이 1,200억 된다는 거예요.

천이백억짜리 부동산이 되기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설교자로서, 지금 나이가 80이 넘었는데요, 그 목사님 설교 좋다고 따라 나와서 세운 것이 그 교회에요. 아, 진짜 그 교회 이름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목사가 교회 하면서 자기 아들을 부목사로 집어넣었다고요.

집어넣었는데 그 설교 잘한다는 목사는 80이 넘었으니 이제 원로 목사 아닙니까? 교회에 100억을 달라고 했어요. ‘내 아들이 이제 교회 분립을 해야 하는데 나도 같이 아들 따라서 가겠다, 그런데 세보니까 우리 교인들 중에서 300명이 따라 나오겠다는데 집회하려면 100억 정도는 있어야 서울에서 그래도 교회 같은 모양새로 하겠으니 100억을 달라’고 했어요.

당회에서는 “당신은 원로 목사이니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하고 단호하게 투표도 없이 내쳤어요. 그러니까 100억에서 40억으로 내려왔습니다. “40억은 좀 줘!” 이건 뭐 거지도 아니고요. 당회가 또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권리가 없습니다.” “너희 나 때문에 1,200억 된 거잖아. 그러니까 내 지분이 100억이야.” 이렇게 된 거예요.

제가 화가 나는 것은, 한 번도 그 교회의 교인들이 그 목사의 설교가 복음인지를 검토해 본 적이 없어요. 복음인지를 검토해 본 적이 없다고요, 복음인지를! 왜냐하면 교인들은 그 복음 비스무리한 설교에 서서 요령을 부린 거예요. 요령을 부릴 빌미를 그 목사가 복음도 아닌 복음 비슷한 것으로, ‘하나님 열심’ 이런 식으로 하면서 준 거지요.

그러니까 ‘내 것을 안 건드리고 죽어서는 천국 가서 호강할 수 있는 빌미’를 교인들에게 제공한 거예요. 하도 말씀이 좋으니까 외부에서 헌금을 하니 교인들 자기들은 헌금 안 해도 1,200억의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누가 아느냐? 목사가 아니까 ‘내 설교로 돈 모은 거 내가 가져갈 것’이라고 하니 “당신은 원로 목사이니 돈 못 준다. 우리 거다.” 이렇게 된 거예요. 가룟 유다의 후예들이에요. 그 목사나 교인들이나 똑같아요.

그러면 당신이 그 교회의 당회장 같으면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해결점은 굉장히 쉽습니다. 뭐냐 하면 당신이나 나나 교회나 모조리 거짓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돼요. 전부다 가짜고 거짓이라는 걸 인정하면 돼요. 진짜는 예수님밖에 없고, 진짜는 주님만이 진짜예요. 거짓이 아닌 건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KJV)

분들이 이해되죠. 아, 내 것 안 다치고, 내 소유와 내 재산 안 다치고, 복음만 듣고 구원받겠다는 이 수작, 이 요령꾼들, 그것을 두고 그 목사는 진짜 성도인 줄 알고 교인인 줄 알고 세상 교회와는 다른 진짜 복음적인 교회라고 계속 설교를 해왔는데 나중에 돈 안 내는 거 보고 ‘야, 이것들이 과연 이 강해 설교의 대가인 나를 이용했구나. 그렇다면 내 나이가 이제 80이 넘었지만 내 아들을 위해 본 때를 한번 보여줘야지.’ “내 돈 백억 내놔.” 이렇게 된 거예요.

둘 다 사약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목사나 교인이나 사약 먹을 생각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사약을 먹으면 기쁨과 고마움이 되는데 비로소 눈이 떠져 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에요.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NASB)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 육체  정욕 욕망 함께 십자가 못박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육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데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나와요.

믿는 자는 없어요. 믿는 자는 없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없는 게 마땅한데…, 자기한테 미쳐있는 인간이 무슨 구원을, 무슨 천국에 가요? 그래서 없는 게 마땅한데 신기하게 나타나요, 정말 신기하게! 본인도 놀라요, 내가 이렇게 신기한 인간인지. 신기한 인간의 특징이 뭐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댕강! 그 모가지가 날아가는 거예요.

이걸 알기 쉽게 하면 ‘엿치기’라고 하는 건데요. 옛날에 간식거리가 별로 없을 때 엿 같은 거 많이 사 먹었잖아요. 친구끼리 내기 하면서 엿을 두 동강으로 부러뜨려요. 그리고 훅 불어요. 오늘 설교 제목 “훅”입니다. 훅 불어서 누구 엿의 구멍이 큰지를 봐서 진 쪽이 엿값을 내는데 주님의 제사가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 제사를 집어넣잖아요?

제사가 뭐냐? 자기가 구원되겠다는 인간을 아주 두 동강 내요. 훅 불어서 그 안에 피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자기의 정성이 들어있는지를 보는 거예요. 내 인생 이만큼 살 때까지 얼마나 나한테 정성을 기울였는지…, 정성을 기울였으면 이것은 육의 열매에요, 지옥 가는 육의 열매. 그런데 그 안에 댕강, 내 모가지가 날아가고 주님의 피가 있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두 동강이 났으니까 믿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믿는 자는 자아가 두 동강 났으니 두 개의 자아로 나뉘어졌죠. 구원받는 자아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니고요, 잘 들으세요, ‘나는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할 자와 구원된 나 사이에 제사 시스템이 가동되어 있다는 거예요. 관심이 제사 시스템이에요. 나를 날마다 엿치기 하는 거예요.

그게 현장성입니다, 현장성! 한쪽은, 나는 선악 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 얼마나 선하냐, 얼마나 착하냐, 손실은 적게 보고 이익은 많이 보느냐, 여기에 지금 미쳐있는 나! 그다음에 신기하기 짝이 없는…, ‘내가 왜 저쪽에, 주님 쪽에 가 있지?’ 신기하게 여기면서 그 차이를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사의 제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전하는 목표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을’ 율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을 제단에 제물로 바치는 그 작업의 장소에 마음을 두고 있다, 이 말이에요. 저 사람이 어떻게 구원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 과정에 뭐가 있느냐는 거예요. 아까 기도한 집사님이 기도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무 작게 해서 잘 안 들렸어요?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추자’ 그 말이죠. 그게 바로 엿치기에요.

새로운 자아가 없으면 엿치기가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착한지 예수까지 믿는다.’ 의미가 자기한테 소환돼요. 그건 가룟 유다죠. 두 동강으로 조각나지를 않는다니까요. 조각나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 게 없어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성령이 와서 주님한테 구원받는 백성이 된다면 양쪽으로 몸이 완전히 두 조각이 난다고요.

마술사들이 마술할 때 미녀를 톱으로 썰어서 두 조각내잖아요. 관객들이 놀라죠. ‘내가 왜 저쪽에 가 있지? 나는 이쪽이 적당한데.’ 주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산 제물이 되게 하는가, 산 제사가 되게 하는가? 산 제사 이야기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라는 말은 탐지기라는 뜻이에요. 이게 바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해야 될 일이에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안목으로 규정하는 일을 했어요. ‘너는 다 끝났어, 다 끝났어.’ 주님께서 감식반의 요원으로 양성하고 고용한 겁니다.

어디 안에서? 제사 안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육이라는 게 그동안 마귀에 의해 자체적인 육의 탐지기 역할을 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인간이 자기 육을 떠나려고 치면 우리의 육이 악마에 의해 자동으로 경고음이 울리면서 경고등이 들어옵니다.

‘넌 너하고 의논해. 아무 말도 듣지 마라. 네가 중요해. 그 선 넘어가지 마.’ 이렇게 경유해서 ‘네 인생이야. 항상 그 점을 유지해.’ 이런 경고등이 들어온다고요. ‘적당히 믿어, 적당히. 적당히 하라고. 성경도 적당히 지키고…’ 이런 식으로 경고음이 들어온다고요.

그 경고음에 대해서 성령의 점검반이 가동됩니다. 어디서 하는가? ‘선악과는 이렇고 생명나무는 이렇다’라는 것을 점검하는 점검반이 가동되는데 그 점검반이 누구냐? 오늘날 성도에요. 제사 안에서 새로운 인간형으로 다시 탈바꿈 되어서 관심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여기에 예수님의 제사가 어떤 식으로 가미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선배들이 한 일이거든요. 그중 한 예가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에녹이 나옵니다. 에녹은 죽음 없는 죽음, 역시 특이한 죽음이에요. 일반인들의 죽음이 아니고 죽음 없는 죽음을 에녹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우리가 상상하고 예상하기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단 말이죠.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일이고 죽는데 에녹은 같은 인간이면서 왜 안 죽었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에녹은 왜 안 죽었느냐? 그것은, 에녹이 주님과 함께 동행함으로서, 이미 장차 올 예수님의 죽음 안에 동행하는 방식으로 자기 죽음이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채로 동행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미래의 자기 죽음이 아니에요. 에녹의 특징은 뭐냐? 모든 인간들은 아무리 애써도 과거로 돌아가기 때문에 과거의 존재에 불과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없어요. 과거 기억만 있어요. 그런데 에녹은 미래가 에녹 안에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결정하신 분이 에녹과 함께 있기 때문에요.

그러니 성도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미래에 하실 일이 벌써 내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죽일 것은 죽이고 죽인 뒤에 살릴 것은 살린다.’ 이것이 제사로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은 에녹뿐만이 아니고 엘리야도 마찬가지예요.

열왕기하 2장에 보면 하나의 코미디가 나옵니다. 이 코미디 장면을 제가 읽어드릴게요. 열왕기하 2장 16절,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엘리야가 죽었는데 시체를 찾겠다는 거예요. 인간한테는 중요한 문제죠. 왜? 위대한 사람의 시체를 찾아서 무덤으로 만들어야 미래에 계속해서 귀감이 되니까요. 남한테 신앙적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시체를 찾아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엘리사는 알아요. 죽음 없는 죽음이, 따로 존재하는 죽음이 있다는 걸.

제사라는 것 때문에 안 죽어도 이미 죽음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엘리사는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 다른 사람들이 시체 찾겠다고 코미디를 벌이고 있는 거예요.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게 뭐냐? “여러분들은 이미 죽었습니다.”라는 말, 교회를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을 다녀도…, 60년까지 당길까요?

60년을 교회 다녀도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 주께서 우리를 쓰레기로 제사에 집어넣는다는 것, 우리의 정성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의 착함을 보는 게 아니고…, 이것은 선악과에서 나오기 때문에 안 받아요. 우리를 일체 안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강구하는 나의 인생 책임, 안 받습니다.

너는 죽어야 되기 때문에 말씀으로 죽여서 제사시스템에 집어넣는 거예요. 사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죽었는데 오히려 이렇게 살아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내가 왜 살아있지? 살아있으면 안 되는데…’ 죽은 부모 지키지 말고 본인부터 생각해 보세요, 본인부터. ‘나는 살아있느냐?’

에녹, 죽음을 보지 않았죠. 엘리야, 불 수레 타고 갔습니다. 지상의 상황과 하늘의 상황이 달라요. 다른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대치되어 있다고요. 반대가 되어 있다고요, 지상은 마귀가 쥐고 있으니까. 그리고 엘리사, 열왕기하 13장에 21절에 보면 ‘엘리사가 죽었다, 시체 있다’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돼요.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에녹과 엘리야는 그냥 자기 한 몸 부활했잖아요? 그런데 엘리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와 근접되어 있으니까, 가까우니까 예수님의 의미가 엘리사의 시체에 더 포함이 되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시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시체가 있는데 남을 살리는 시체, 죽었는데 죽음에서 비로소 죽어야 나올 수 있는 생명나무의 영생, 그걸 엘리사에게서 보여준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는 이 말.

오빠 나사로는 이미 죽은 자였어요.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살아나는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죽은 자였어요. 그런데 여동생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걸 몰랐어요. 살아있다는 게 신기함으로 다가온 적이 없어요. ‘살아있으니까 내가 애써서 살아있겠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우리를 두 동강 내는 결정적인 근거는 로마서 7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본인이 하난데 엿치기를 당했어요.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는 지금 죄에 굴복되어 있고. 그러니까 “‘둘 중에 어느 쪽이 너야?’라고 그런 질문을 하지 마라. 질문을 하려면 멀쩡하다 여기는 너를 죽게 하고, 멀쩡하지 않은 너를 이미 영생에 집어넣은 그 중간 과정에 어떠한 시스템 어떠한 십자가가 작용하고 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역할, 점검반 역할을 사도 바울이 하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나는 두 동강 났는데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엿치기해서 항상 날 두 동강 만들어서 나의 뜻과 내 소원을 작살내시고, 그런데 그 작살내는 것보다도 더 나를 거짓으로 규정을 해주시고, 그 거짓된 것은 지옥에 가야 하는데 신기하게 천국 가 있고, 이 기쁨, 이 기쁨을 여러분 어떻게 감당하실 겁니까?

아까 이야기한 그 교회처럼 돈 천이백억 쥐고 안 내놓으려고 버티겠어요? 둘 다 거짓인데. “1,200억이 우리에게 있다, 원로 목사에게 주지 마라.” 그래야 되겠어요? 아니면 ‘이 교인들을 내가 오해했구나.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100억 내놔!” 이런 목사 되어야겠어요?

여러분, 자신이 거짓이라고 드러나는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구제요? 구제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초대 교회 때 구제하는 일 맡으라고 일곱 집사를 세워놨잖아요? 그 일곱 집사가 자기 할 건 안 하고 엉뚱하게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그렇고,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 집사가 나오는데 빌립 집사보고 구제하라고 성령께서 움직인 게 아니에요.

사도행전 8장 26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어디 구제하러 가야 됩니까?” 아닙니다. 가니까 광야, 사막에 에티오피아 내시가 마차 타고 내려가고 있더란 말이죠. 그런데 희한한 타이밍이, 내려가면서 자기가 책을 읽는데 희한하게 이사야를 읽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언급하는 것들, 구제하고 사랑 베풀고 이래서 구원되고 사람들을 변화시킨 게 아니에요. 8-10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제가 아닙니다. 돈 몇 푼이 아니에요. 형편이 어렵다, 이런 경제 형편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의 건강 문제가 아니고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 14-15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말씀에 미친 거죠.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아내보고 이야기하고, 아내는 듣기 싫어하고요. 돈 주고 누가 시켰습니까? 일당 줬어요? 말씀에 미치는 것이 일당 얼마 받았어요?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일당 받고 하는 겁니까? 월급받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겁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나오는 게 한 번에 오만 원씩 받고 나온 거예요, 이 자리에?

“제발 저희에게 사약을 내리소서. 전하!” 선악과에 미쳐서 잘난 척하고, 나 이렇게 훌륭하다는 이런 괴물을 무슨 수로 죽일 겁니까? 그것도 내가 자살하는 것은 가룟 유다 방식이고 그 방식 말고, 사약을 내려야 돼요, 사약을! 주님이 죽었던 그 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를 주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경제적 대통령인 줄 알고, 이란의 대통령 하메네이하고 다르죠, 하여간 경제 대통령인 줄로 알고 “우리 대통령 삼읍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투표를 자기 임의대로 했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떡을 준 게 아니에요. 주께서 주신 것은 ‘표적’이라고 요한복음 6장에 분명히 나옵니다. 6장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니까 현재의 자기 육, 먹고 살기 위함, 난 살아 있으니까 당연히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벌써 발상이 잘못된 거예요. 죽어있는데 자꾸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살아야 된다고 하는 탐욕은 신기함을 없애 버립니다. 구원받는 신기함이 언제 사라지는가? 여러분이 욕심을 부릴 때 갑자기 은혜받은 거 다 날아가 버려요. ‘아, 더 살아야지. 남한테 밑지지 말고 살아야지.’ 이런 식이에요. 표적을 날려버린 거예요.

요한복음 6장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네가 살고자 하는 자체가 썩었고, 살고자 하면서 먹는 떡도 썩었고, 네가 썩었으니 네 떡도 썩었다, 이 말이죠. 주님이 주신 그 오병이어도 너에게는 다 썩은 걸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생의 일을 하옵니까?” 물으니 “나를 믿어라. 너는 죽은 인간이니 네가 하는 건 없고 내가 한다.” 그래서 주께서 무엇을 줬죠? 주님이 주신 것은 그 떡과 고기가 실상은 예수님의 살이었고 피였습니다. 주께서 그걸 나눠주신 거예요.

이것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거짓된 것은 죽이는 게 약이지 거짓된 것을 살리는 게 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꾸 마귀가 독촉해서 ‘교회 나왔으니 네가 나중에 구원받을 것’이라고 자꾸 예수님처럼 변장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해 온 거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부담을 안 느끼고 ‘내 것 건들지 마세요. 복음은 믿어줄게요.’ 이런 식으로 거래했잖아요.

여러분, 두 동강 난 우리의 기쁨, 감격, 즐거움, 그건 다 신기함에서 나오는 겁니다. 신기함은 거짓된 것을 우리가 분명히 언급할 수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복음인데요, 복음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가사를 보면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왜? 나는 거짓이니까요. 거짓이 운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잖아요. 거짓이 뭘 울어요. “이제 다시 울지 않겠어” 가락이 막 튀어나옵니다. 거짓이 왜 울어요? “다시 슬퍼하지 않아.” 자꾸 가락이 나오면 안 되는데요. 거짓이 왜 슬퍼해야 돼요?

“다시 외로움에 슬픔에 나는 흔들리지 않겠어.” 거짓이니까요. 안 흔들려 봐야 거짓인데 뭐요. “더는 약해지지 않을게. 많이 아파도 웃을 거야.” 내가 거짓이니까, 거짓임을 알게 됐으니 웃을 일만 남았죠. 어화, 거짓아! “그런 내가 더 슬퍼 보여도 날 위로 하지 마.” 위로하지 마!

거짓을 위로하면 안 되죠.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갑자기 동행이 나왔어요. 이게 가스펠 송이라. 에녹 같아요. 이미 거짓인 나를 주께서 거짓으로 만들고 제사 시스템 안에서 주와 함께, 주의 피와 함께 우리의 정성은 빼버리고 피로 채워서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제자로 삼아 점검반으로, 감식반으로 사용하는 것, 이게 즐겁지 않을 수가 없죠. 가볍죠.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까” 뭐 햇살이 비출 것까지는 없고요. “눈물 나게 아픈 날에 크게 소리를 한 번만 질러봐.” “나는 거짓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지요. <혼자가 아닌 나> 서영은 씨가 불렀던 겁니다. 형편상 수련회 못 가더라도 여러분께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이 서영은 씨의 ‘혼자가 아닌 나’ 이 노래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집에서 한번 조용히 들어보시고, 장례식장에서도 한번 들어보세요.

이 간단한 걸, 이 얼마나 간단하고 얼마나 쉽습니까? 문제는 예수님께 있던 게 아니에요. 내가 마귀 들려서 그래요. 마귀 들린 걸 뺄 수는 없지만 마귀 들린 채로 거짓, 이 더러운 거짓, 진실은 예수님만 진실, 난 어떤 짓을 해도 거짓, 교회를 믿고 예수를 믿고 구제를 해도 거짓, 이렇게 규정하면 행복 시작이에요.

이걸로 우리의 정체성은 이미 확정됐어요. 과학자들이 다른 걸 금으로 바꿔보겠다고 애쓰는데 금의 원소가 79번이에요, 납은 82번이고. 원소가 있다는 것은 정체성이에요. 원소의 그 정체성은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핵 속의 양성자 수가 79개인 게 금이라는 거예요.

이건 바뀔 수가 없어요. 핵융합이 터져도 바뀌지 않는 게 원소의 정체성이에요. 물리학은 핵에 관한 것이고, 화학과 생물학과 의학은 바깥 핵 속에 있는 전자에 관한 운동에 관한 겁니다, 우리 신체 속 전자의 운동. 그러나 핵은 물리학 소관입니다.

그리고 그 양성자 수는 같은데 중성자 수가 다른 걸 동위원소라고 해요. 정체성은 같은데 활용도가 달라요.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는 하나인데, 정체성은 같은데 예수님은 벌써 떠났고 우리는 아직 안 떠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있습니다. 그걸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드릴 테니까요, 이게 화가 나는지 아니면 너무 감사한지 여러분들이 스스로 한번 점검해 보세요. 이건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부터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그다음에 14-15절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이게 예수님의 일방적인 결정이에요. 예수님의 제사 중심에서 예수님이 하셔야 했던 일을 증거하기 위해 모집된 사람이 바로 여기 ‘너희’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입니다, 옛날부터. 주께서 써먹기 위해 뽑아놓은 거예요.

결정을 우리 자신에게 묻지 마시고 주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그 지시는 뭐냐? 십자가가 크게 보이고 제사의 다 이루심이 크게 보이는 것, 그 말씀을 나누시는 여러분들이 제대로 된 구제, 생명을 구제하는 여러분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데, 슬퍼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분노할 어떤 자격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삶에 지치게 만드는지. 그것이 우리의 옛사람인 것을, 이제는 그걸 발견하고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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