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구조의 중심

아빠와 함께 2026. 1. 4. 17:09

구조의 중심 

2026년 1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4-15

13: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영문 밖에 나가라”는 말은 ‘영문 안’과 평면적으로 나란히 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곳은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예수님 만나지요? 이것은 인간은 예수님께서 거쳤던 경로 없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 인하여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버림받은 장소에 ‘영문 밖’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기 위한 작업도 예수님 자신이 버림을 받은 자리에 집합시키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될 자에게 해 줄 있는 것은 ‘쓰레기 장에 갖다 버리는 일’입니다.

이미 타인의 묘 쓴 것에 또 묘를 쓰는 것을 ‘겹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겹장’ 관계입니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서 죽음으로 넘겨지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꾸만 자신이 살아 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과 욥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대자연의 모든 것이 ‘자신들의 살아 있음’에 의미를 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달리 말합니다. ‘대자연의 살아 있음’은 자신이 지금 이유없는 고난을 받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최종 판결을 하나님이 내리시는데 욥의 친구들이 잘못되었고 욥이 맞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흐름에 구심점이 있고 이 구심으로 인하여 세상의 흐름은 구조화된다는 겁니다.

3차원 입체적 구조는 2차적 구조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생명나무를 따르는 자와 선악과 나무를 따르는 자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나무를 따르는 자들은 홀로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것으로 심판이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본격화됩니다.

선악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하라는 자들은 교수대에 악마와 더불어 꼼짝 못하고 매달려 있고 그 교수대 뒤편에는 이미 불이 붙었습니다. 지옥의 유황불이 붙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 살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활동하는 것은 먹으면서 통곡하고 마시면서 통곡하고 시집가서 통곡하고 장가하서 통곡하고 물건 사면서 통곡하면 물건 팔면서 통곡합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지옥 생활을 미리 실습하고 악마와 더불어 훈련하고 곳입니다. 바로 그 장소가 되는 땅 자체가 성도에게는 상관없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12제자 및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들의 3차원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그들이 보고 싶었했던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과 상관없는 분이 되신 겁니다. 땅을 떠난 분으로 ‘땅을 떠난 그 공간’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면은 이미 노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창세기 5장에서 10명의 신앙의 선조들이 나옵니다.

그들을 주로 년령900대를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이 살던 땅에서 떠나는 것은 그들의 후손인 노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미리 연결시켜 보세요. 진정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언약이었습니다. 노아에게 최초로 언약이 주어집니다.

그 전에 900대를 살았던 인물들은 노아 홍수 때에 단 한 명에 살아 있었서는 아니됩니다. 노아 홍수가 난 해에 므두셀라는 969세로 죽습니다. 그리고 노아 아버지 라멕도 죽고 난 뒤, 5년 후에 홍수가 터집니다. 즉 심판 사건이 경건 자들의 족보 안에 당당히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즉 ‘인간 없음’이 개입되므로 서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일체 살아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즉 기존의 인류 역사는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모두 제거되어야 될 대상입니다.

노아도 역시 땅 위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가족마저 심판했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언약’ 안에 그들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3차원적으로 보는 세상관이 2차원 두 개의 구조 평면으로 정돈되는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4: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두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질그릇, 그 자체로 소용없는 진흙 그릇에 보배가  담기느냐 여부에 따라서 최종 구역으로 결정됩니다.

노아는 심판 가운데 떠다니는 천국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는 방주 밖에 나가 새로 생긴 땅에서 번제로 바쳐질 제물과 함께 동승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는 마치 거울표면과 같아야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울고 불고 합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모든 의미가 자기 쪽으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살고 있기에 답변은 한결 같습니다. 오로지 “나를 위하여” 삽니다. 나를 위해 사는 자가 만드는 천국은 예수님이 없이 자기만의 즐거운 천국입니다. 그곳이 바로 영원히 통곡해야 될 지옥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만 그것조차도 ‘자기를 위한 조직하는 자기 영광을 위한 수작’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무덤, 곧 빈 무덤이어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자신의 이 지상에서 갈 길도 버려지는 것으로 결정되어졌기에 더는 자기 의미를 위하여 할 일은 없습니다. ‘이것을 하므로서 내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라는 기대는 포기해야 합니다.

참된 천국은 인간이 짓밟고 거대한 문명을 이룬 바로 그 지하실 밑에 묻힌 지하에 있습니다. 거기에 땅의 무게를 느끼지 마시고 말씀의 무게, 심판의 무게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있을 곳이 없고 모든 곳이 떠날 곳인 것을 알았던 신앙의 선조들과 역사 위에서 거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일은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말씀대로 이끄심을 늘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0강-히브리서 13장 14-15절(구조의 중심) 26010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4-15절입니다.

히브리서 13:14-15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요.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고 했잖아요. 성문 밖에 나갔다는 말이죠. 그다음에 13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했어요.

‘성문 안’과 ‘성문 밖’은 같은 표면 위, 같은 지평 위에 있습니다. 성문 밖에 나가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곳이 있다는 말이지요. 성문 안에 있다가 문 열고 밖에 나가면 그곳에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같은 땅 위에 성문 안쪽과 바깥쪽이 나란히 있으니까,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해놓고는 그곳에 나가니까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디로 가야 된다는 말입니까? 가라고 해놓고는 갈 곳이 없게 만들어버렸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경유하는 그 코스대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을 주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고 그 무덤이 있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죽었고 그 시신이 무덤에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무덤에 가보니까 거기에 예수님 시체가 없었어요. 어디 갔죠? 어디 갔습니까? 열두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 특징의 공통점이 뭐냐? ‘우리가 땅에 있으면서 그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거기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서 무덤에 가보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에 없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경유한 그 경로 가운데서 인간이 따라잡을 수 있고 따라갈 수 있는 그런 코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보니까 없어졌어요. 가보니까 없는 거예요. 이 땅과 더불어서 인간 자체가 해낼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일체 주께서는 주님의 경로를 통해 거부하는 거예요.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지 마!”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한다.” 이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 “주님, 제가 이런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바르게 사는 겁니까? 교회에서 충성하고, 주를 위해 열심히 이 땅에서 살면 됩니까? 그리고 지난날의 과오와 잘못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없도록 조심하고 절제하고, 올해 2026년은 나쁜 짓 안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바르게 살면 되겠습니까?” 하면 주님의 답변은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빠진 거예요. 내가 다 한다는데 왜 네가 나서냐는 말이죠. 네 인생도 아닌데 네가 왜 나서냐는 거죠. 주님께서 영문 밖으로 나가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신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해준 것은 뭐냐? 예수님을 영문 밖으로 갖다 버리는 거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이 땅에서 갖다 버리는 거예요. 그 버리는 것, 일종의 고려장이죠. 주께서 우리에게 한 것은, 너 스스로 너를 고려장 하라는 겁니다. 너를 갖다 버리라는 겁니다. 자꾸 안 버리니까 ‘주여, 바르게 사는 게 어떻게 하는 거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자꾸 마귀의 시험에 빠져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버리면 되는데!

주님 가는 코스가 그래요. 주님 가신 이 코스에서 항상 전제가 되는 것이 뭐냐? ‘내가 만약에 살아있다고 여기고 살아있는 내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바르게 산다’고 한다면 너는 지금 뭘 빠트리고 있는 것인가? 땅과 주님 가신 천국과의 그 갭, 단절의 면을 누락하고 있다, 그걸 빠뜨리고 있는 거예요.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그 빠뜨리고 있는 부분을 주님께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14절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같은 이 땅에서 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버림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왕 있는 거 ‘넌 나한테 잘해주고 난 너한테 잘해주자. 이게 사람 사는 도리다.’ 이렇게 나온다면 무엇을 빠트리고 누락시킨 것인가? 바로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부활이라는 사실, 죽고 부활했다는 주님의 경로를 빠뜨리고 있는 거예요.

둘 다 버림을 당해야 된다는 말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께 버림받고 다시 부활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땅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애초부터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고 죽어있는 존재인 겁니다. 죽은 존재가 뭘 할 게 있고, 죽은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의미, 가치라고 하는 것은요, 자기에게 돌아올 어떤 대가를 생각하니까 모든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것이 짐이 되고 힘든 거예요. 노아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가고, 사고팔고 했잖아요. 마태복음 24장에 나와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먹고 마시고 무슨 연습을 하느냐 하면, 나중에 죽어서 지옥 가서 영원히 통곡할 연습을 이 지상에서, 땅에 살면서 하고 있는 거예요. 먹으면서 통곡하고, 마시면서 통곡하고, 장가 가고 통곡하고, 시집가면서 통곡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가고, 사고팔고 하면서 그 뒤에 항상 통곡이 잡혀있어요. 통곡을 연습하는 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태어났다는 자체 그리고 땅에서 살고 있다는 그런 생존의 의식 자체가 너로 하여금 점점 지옥의 영원한 삶을 훈련하는 그러한 세월을 보내게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히브리서 13장 이야기잖아요. 13장은 11장을 거치고, 12장을 거쳐서 13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11장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믿음으로…” 또 그 믿음의 “선진들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끝에 보면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나오고, 12장 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고요, 11장 37절에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를 비롯해서 주의 증인들이 많은 환란을 받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단 말이죠.

히브리서 11장의 이런 이야기들을 외면해 버리고 13장 오늘 본문에 그냥 도달하면 안 돼요. 11장은, 예수님의 경로로 반복해서 주께서 그들을 강제로 이끄셨다는 겁니다. 그들은 다른 일반인들과 똑같아요. 살았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산 게 아니고, 주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전환했어요.

히브리서 11장 9-10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거주지가 아닙니다. ‘나 이 땅에 안 살고 떠날래.’ 하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 장막이에요. ‘의미’라고 하는 것은 떠날 자기한테 소환되면 그것은 의미가 아닙니다.

‘마두로’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베네수엘라 대통령인데 미국 군대에 의해서 체포됐잖아요. 체포됐을 때 그게 쇼킹한 뉴스인 건 맞지만 한국에 있는 우리가 그렇게 막 기뻐하거나 혹은 그렇게 벌벌 떨 필요는 없잖아요. 김정은이가 침실에서 체포된 게 아니잖아요. 김정은이 부부하고 딸 주애가 체포된 게 아닌 이상, 저 먼 나라 남미의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체포된 것의 의미는 작아져요. 의미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접근될수록 그 의미가 커진단 말이죠.

냄비에 누룽지를 끓이다가 넘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누룽지가 넘치는 것이 나한테 중요합니까, 마두로가 체포된 것이 중요합니까? 내가 살아있다면 항상 살아있는 그 나에게 어떤 대가나 이익이 있을 때나 의미가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의 스트레스나 인생의 짐이 되는 이유는,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나랑 같이 너를 고려장 하자. 영문 밖으로 나가자.”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네가 살아있는 한, 네가 살아 있다는 이유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주님복음의 의미가 가려지고 훼방이 된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의미가 우선되니까요.

서정주(1915-2000) 시인이 써다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 보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 주장은 바로 욥의 친구들이 한 주장이었어요. 욥의 친구들은 ‘대자연의 국화꽃, 그리고 천둥 치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보란 듯이 허물없이 살아있는 것에 의미를 두기 위해서 이렇게 있다’라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같은 친구인 욥은 ‘지금 내가 이유 없이 고난받는 것, 이유 없이 고난 받기 위해서 먹구름 속에서 천둥은 소리쳤고, 한 송이 국화꽃은 폈고, 황무지에 비가 내렸다’는 거예요. 의미가 다르잖아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쓰레기장에 버리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국화꽃이 피고, 천둥은 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쓰레기로 버리기 위해서! 왜 이런 생각을 못 합니까? 이런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의 질문을 던져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동안 여러분은 누굴 위해 살았습니까? 답변 못하죠. 답변할 수가 없어요. 멀쩡하게 내가 살아있고, 모든 의미의 중심이 나인데 나 빼놓고 누굴 위해 살았느냐고 하니,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누굴 도와주고, 자식을 잘 키운 그것은 다 그렇게 한 내가 잘났다고 하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한 거죠. ‘누굴 위해서’가 성립이 안 돼요,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왔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의 코스는 “영문 밖에서, 고려장에서 만나자.” 이걸 ‘겹장’이라고 합니다. <파묘>라는 영화에 보면, 이미 쓴 무덤인데 다른 사람의 무덤으로 또 써요.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으시고, 그다음에 모든 인간은 움직이는 시체거든요, 주님께서 다시 성령을 보내서 그 시체 가운데서 주님과 겹장할 사람을 호출해요. 호출해서 ‘너 나랑 같이 죽자’고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교회 와서 의자에 앉아있거든요. 의자에 앉아있지 말고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제단에 누이시고 거기서 말씀으로 스캔해야 돼요. 지이이이이이잉! 말씀으로 스캔하게 되면 나라는 이 세상, 우주라는 이 3차원이 2차원 구조로 바뀝니다.

2차원 구조는 뭐로 바뀌느냐? 1차원 구조로 바뀌면서 내가 몰랐던 내 본래의 인격이 노출됩니다. 1차원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요한복음 13장 26-2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게 1차원이에요. “네 할 일 해야지!” 가룟 유다는 3차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1차원적인 네 할 일을 해라, 네 기능을 하라는 그것만 이야기해요. “네 할 일만 해야지.” 1차원이에요. 3차원에서 1차원이 되는 방법은 현재 물리학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체중계에 올라가서 몸무게를 재잖아요? 그게 중력의 힘이에요. 지구상에 중력의 힘이 여러분 몸무게의 숫자로 나오는 겁니다. 중력에는 힘이 있다고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구조의 틀어짐의 차이에서 중력이 생긴다는 거예요. 공간이 휘어진 곡률에 의해 중력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이 세상은 어차피 두 개의 구조로 확정되었어요. 하나는, 천국 가는 구조고, 다른 한쪽은 지옥 가는 구조로 이미 분류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지금의 나 되기 위해 있다’라고 여기는 3차원의 구조에서는 인간의 천국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대구 교보문고에 간 적이 있어요. 교보문고에 가면 1층 소설, 2층에는 과학, 3층은 애들 참고서와 인문 서적이 있고 보통 제가 3층에 갑니다. 그날도 3층에 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2층에서 내려서 모퉁이 돌아서면 3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어요.

그런데 에스컬레이터가 없네요. 에스컬레이터 자체가 없어졌어요. 내가 3층에서 책을 사곤 했던 것이 맞는데 순간적으로 3층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학생에게 물었어요. “3층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물어보니까 “3층은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3층을 다녔는데 3층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어요. 물론 교보문고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층 하나를 없애버린 거죠. 내가 그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에게 “여기 천국 가려면 어떻게 갑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해야 해요? “천국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천국은 인간 세계에서는 애초부터 없어요. 나를 위해서 가는 천국은 나를 위해서 사는 내가, 인간들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예수 없는데 내가 즐거운 세계, 그런 세계는 없어요. 예수님 빼고 내가 죽고 난 뒤의 즐거운 세계는, 그런 세계는 없습니다, 없는 곳이에요.

예수님을 포함시키려면 나를 위한 삶을 포기하든지! ‘나는 지금껏 나를 위해 애썼다.’ 그걸 유지하면서 어디를 가요? 천국엘 가요? 그런 천국 자체가 없습니다. 천국을 집어넣기 위해서 일단 우리를 시체로 만들어요. 시체인데 시체가 아니라고 우기니까 “같이 영문 밖 고려장 가자.” 이렇게 주께서 요구하신 거예요. “우리 겹장하자, 겹장. 나 죽은 데에서 너도 죽자.”

그래서 정말 성도 같으면 예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예수님을 찾는 그 노림수가, 의도가 뭐냐? 평소에 날 위해 살다가 교회 와서 예수를 찾는다? 왜 찾아요? 그것도 역시 나 잘되기 위해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나중에 죽어서 호강하기 위해서 찾는 그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소리 하니까 전부 속아 넘어갔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예수는 있지도 않는 예수예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예수를 찾을 생각 하지 말고 빈 무덤을 찾아야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떠나보내고 찾은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3층이 있는 줄 알았는데 3층이 없네. 아,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구나. 지금까지 3층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 환상이었네.’ 실제로 대구 교보문고는 애초부터 3층이 없고 2층뿐이었는데 그동안 내가 올라가곤 했던 3층은 뭐냐? 지난날의 3층, 지난날의 나였지 오늘의 나는 3층에 올라갔던 것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고 잊어버려야 되죠.

그것을 주님께서 심판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경유해서 보면, 거기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주께서 노아와 동행해서 구원하면 되는데 그런 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는 노아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는 노아가 살아있다고 보지 않고 언약이 살아있다고 보고, 죽은 노아를 살아있는 언약 안에 실어 담는 일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노아 홍수 때 노아와 노아 가족만 살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제가 잠시 조사를 해봤어요. 아담부터 해서 노아까지 11대인데 그 사람들이 거의 900살대로 살았어요. 아담 930, 셋, 912, 에노스 905, 게난 910, 마할랄렐 895, 야렛 962, 에녹 365, 쭉 나오는데 므두셀라 969, 노아도 950, 이렇게 900대로 쭉쭉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노아 앞의 선조들이 노아 홍수가 일어날 시기에 과연 살아있었는지, 홍수는 그들이 죽고 난 뒤인지를 조사를 해보는데 노아의 아버지가 있어요. 만약 라멕이 900살까지 살아버리면 그는 노아 홍수 때 멸망 당합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 그냥 죽은 게 아니고 멸망을 당한 거예요. 그냥 죽은 게 아닙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죗값을 다 치른 게 아니에요. 죽는 것은 당연하고 죽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죗값을 치러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죽으면 죽지.’ 이러면 누가 좋으냐 하면, 마귀만 좋아해요. 선악과가 교수대라면 주께서는 그 교수대 뒤에 마귀와 함께 인간을 꽁꽁 묶어놓고 불을 붙여요. 천국에는 선악과나무가 없습니다. 천국 가면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나무 둘 중에서 하나만 남고 하나는 없어져요.

선악과나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서 ‘내가 뭘 행하면 착해서 천국 가느냐, 무슨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느냐?’ 하는 그 의식 자체가 마귀에서 나온 의식이란 말이죠. 죽은 자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합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갖다 버릴 생각 안하고 뭘 해요?

그런데 마귀는 자꾸 뒤에서 부추겨서 선악과나무를 붙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나무가 교수대란 말이죠. 인간은 그 교수대에 묶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래 나무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두 개잖아요. 이것을 주께서 3차원이 아니고 2차원으로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그 구조조정을 본격화하기 위해 여기에 심판이 가미돼요.

심판이 가미가 되면 인간은 하나의 자기 이미지라는 것이 평면에, 우체국의 우표 있잖아요, 우표처럼 평면에 딱 붙어있습니다. 인간이 체중 달면 중량이 나오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의 면에 붙어있는 무늬에요. 2차원적 면, 면에 붙어있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들이 울고불고하는 것은, 자기 이미지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거예요. 우표딱지는 두께가 없어요.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는 이것을 두고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인간은 거울 같아요. 표면뿐이에요. ‘자기’라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그냥 표면이에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나중에 3차원으로 주님을 만나 볼 것이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그 이미지에서 3차원으로 뽑아내는 것은 요새 A.I가 전문적으로 만들어내요. 사진만 주면요, A.I가 그걸 동영상으로 만들어줘요. 춤도 추고 퍼레이드도 하고 그럽니다.

인생은 죽음에 그냥 딱 붙어있다니까요. 온통 죽음이라는 이 세상에 무덤 숫자가 증가할 뿐이에요. 무덤에 들어갈 것이 잠시 살아서 돌아다닌다고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뭐냐? 3차원을 2차원 구조로, 더 나아가서 1차원 구조로 축소시킨 거예요. 구조화 시킨 겁니다.

노아의 조상들 나이를 조사 해보니까 구백몇 년씩 3차원에서 산다고 살았지만, 결국은 심판에 붙어있는 딱지, 땅 자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거기에 눌려 붙은채로 그 수평적 길이가 900년이 됐든 930년, 912년, 905년, 910년은 아무 의미 없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노아를 준비해서 앞에 있는 셋의 후손, 구원 받은 자손들을 3차원으로 붕 뜨게 만드는 겁니다.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했는데 영문 밖이 없이 만들잖아요? 노아에게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하나님의 그 복음을 위해서 노아를 생산되게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땅이라는 자체가 없어지는 그 세계에서 아담과 열 명의 신앙의 선조들은 구원받습니다.

땅 자체가 아닌 곳에서 구원받는다니까요. 아, 이게 또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므두셀라가 죽을 때 노아 홍수가 벌어져요. 므두셀라가 노아에 협조하는 게 아니고 므두셀라는 “그냥 죽어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900년을 살아야 될 사람이 갑자기 777세까지 살고 죽는데 그가 죽고 나서 5년 뒤에 노아 홍수가 터집니다. 아, 아슬아슬했어요.

왜 이 사람들이 살아있으면 안 되는가? 언약은 노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의, 최초의 언약이 노아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언약이 살아있어야 하지 그 위에 인간이 살아있으면 안 돼요. 여러분,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를!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고린도후서를 하잖아요. 고린도후서 이미 시작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구조적입니까? 하나는 보배고, 또 하나의 구조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 자체에서 좋은 게 나오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냥 흙이에요.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있으면서 선악과 알았다고 까불까불대면서 마귀와 더불어서 붙어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중에 산 채로 유황불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9장 20-21절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20장 10절도 마찬가지에요.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그리고 20장 14-15절에도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의미가 자기한테 소환되는 자는 전부 다 불 못에 던진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 돌아올 의미가 이미 없어요. 국화꽃이 어쩌고저쩌고…, 이 사람은 독실한 불교 신자거든요. 불교의 취약점, 결정적 오류가 뭐냐?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불교도 그렇고 도교도 그렇고요.

주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드는데 그 새로운 인간형은 신약에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없는 데서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나왔듯이, 노아 홍수 때는 홍수로 인해 새로운 인간형이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역사를 두 개로 만들어요. 평면화시키는데 하나는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 말고 창세기 6장에서는 다른 역사를 만들어요. 하늘의 천사와 사람의 딸이 혼인해서 네피림 거인족이 나타나는데 이 거인족에 대한 평가가 창세기 6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4-7절에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모든 계획이에요. 하나도 빠짐없이,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어떤 때에 안 악할 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악합니다, 그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다 쓸어버리는 겁니다. 공중의 새와 더불어 다 쓸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이 계획이 나중에 노아 홍수 이후 아브라함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문명을 만들고 설치게 하는 이유는 죄를 슬슬 키우기 위해서, 죄를 키워서 그 죄,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슬슬 키워서 그것을 심판하는 하나님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문명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너 심판해도 할 말 없지 그렇지? 너 3차원 구조 2차원으로 만들어버린다!” 3차원 인간들이 만든 게 뭐냐? 교보문고 3층이잖아요. “혹시 천국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아르바이트 학생이 혹시 이렇게 답변했으면 좋겠어요.

“아이고, 아저씨. 천국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건 교회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천국은 없습니다. 아저씨 본 양심에 손 얹고 물어보세요, 천국이 있는가. 천국이 있다면 그건 본인을 위한 천국이잖아요. 본인을 위한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본인을 위한 것은 지옥이 마련되어 있죠. 모든 의미가 예수님께 가지 않고 나에게 돌아오니까. 이게 지옥 연습이잖아요. 이게 지옥 훈련이잖아요. 이걸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노아에게 ‘끝’이라는 걸 삽입시켜요. 끝을 삽입시키면 모든 것이 ‘전(前)’이 돼요. 영어로 ‘pre-’ 뉴스 보니까 마두로에 대해 이렇게 했어요.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에요. ‘전’은 끝이 도달한 거예요. 끝을 집어넣어요, 끝을!

인간의 역사는 모든 계획이 항상 나쁘기 때문에 주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심판을 내려버려요. 심판을 내려버리면 그들이 그동안 어떤 소리를 했고, 뭘 하든 간에 끝이 되어버리면 모든 지나간 것은 없어지고 무효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설교에서 제가 그랬죠,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라지는 거라고.

인간은 사라지는 거예요. 내가 없어요. 내가 없습니다. 여러분, ‘차수연’씨 알아요? 모르죠? 저도 몰라요. 차수연, 사람 이름 같은데 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만나 본 적이 없어요. 여러분,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있는 것 같은데 안 만나 봤다면 예수는 나한테 의미 없어요. ‘차수현’처럼 의미 없어요. 예수도 의미 없습니다.

전에는 제가 독일로 가고 싶었어요. 아예 이사 간다는 뜻은 아니고요. 어딜 간다면 독일로 가고 싶었는데 독일이 가까이 와버렸어요. 이제는 독일로 가기 싫어요.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온 독일을 늘 만나면 되잖아요. 굳이 내가 그 사람이 빠진 독일에 갈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온 독일과 같이 닭갈비 먹으면서.

여러분,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좋은데 가는 것이 아니고 보고 싶은 분이 사시는 곳이 천국이어야 해요. 내가 보고 싶은 거 말고! 나는 없어지고요, 나는 고려장 해야 하고, 나는 없어져도 괜찮은데 내가 없어져도 괜찮을 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분이 살고 있는 곳,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거나 나는 주의 것이며, 사나 죽으나 그분이 보고 싶을 때 지금은 희미한 2차 하지만 그때는 3차원으로 직접 만나는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 아닙니까? 그걸 누가 방해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내가 방해했잖아. 나를 위해 사는 내가 방해하고 있잖아요. 얼마나 거짓말을 해댔습니까, 천국 가고 싶다고. 정말 진짜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이에요. 맨날 자기 몸무게만 달면서 말이죠.

주님은 새로운 인간형을 만듭니다. 노아로 하여금 죽게 만들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가고 사고팔고…” 이거 노아도 다 했습니다. 노아도 텃밭이 있고 노아가 농사짓던 것이 다 있어요. 가축도 있었을 거예요. 주께서는 노아를 죽여버립니다. 없어요. 노아의 역사, 진짜 선조들의 인간이 알고 있는 역사의 지하로 내려갑니다.

교보문고 직원에게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그 지하에 있습니다. 저 밖, 영문 밖, 교보문고 밖, 그러니까 땅 파고 만든 지하실에 가려진 더 지하, 모든 사람들이 올려 세운 그 건물 밑에서 인간에게 핍박받는 그 지하, 그 지하에 천국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시면 주님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땅 팠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노아의 터전, 노아의 재산과 부동산이 물속에 다 잠겼을 때 비누방울 같은 방주가 와서 노아를 태웠어요. 그래서 그 심판 위를 떠돌아다니는 천국, 심판 위에서 떠돌아다니는 천국, 그것이 방주입니다. 나중에 땅이 나타나면 ‘어떤 경로로 너만 살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방주 밖에 나와서 땅 위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번제를 드리는 거예요. 노아의 가족을 대신해서 죽었던, 방주에 동승 했던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리면서 번제를 드리는 겁니다.

번제 드리면서 또다시 확인합니다. 창세기 8장 21-22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나는 인간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 마. 내가 다 할게, 내가 다 할게” “주여, 저한테 무슨 일을 할 겁니까?” “너를 갖다 버리는 일을 할게. 네가 죽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일을 할게.” 노아는 방주 안에 있으면서 떠돌아다닙니다. ‘방주 안에 노아가 있다.’ 이 말도 맞고요. ‘노아를 위해서 방주가 있다.’ 이 말도 맞아 맞아요. 이 말도 맞습니다. 그 말은 뭐냐? 주님께서 노아를 가지고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해요. 새로운 인간형은 어떤 인간형이냐?

십자가 사건을 담은 인간, 곧 끝을, 다른 말로 하면 심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뭐냐? ‘끝’을 품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기서 성도 하나씩 튀어나옵니다.

성도는 성도 되겠다고 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끝 사건, 끝 사건이 이루어지면서 없던 곳에서 성도가 새롭게 생산돼요. 새로운 인간형이 여기서 등장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사람은 제단 위에 누워서 말씀을 담는 거죠. “이 땅에는 영구한 있을 곳이 없다.”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안고서 세상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돌아올 의미는 없어요. 끝을 제공하는 그분에게 의미가 주어지는 겁니다. 나한테는 돌아올 의미가 없어요. 나에게 돌아올 의미가 없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지킬 책임도 없습니다.

나의 가치, 나의 윤리, 도덕, 그런 것 다 지키지 마세요. 나의 훌륭함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그냥 그것을 주님 앞에 보고하면 돼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유치원 다니는 어린 꼬마가 발음도 잘 안 되는데 태권도 관장님한테 부탁을 합니다. “감장님! 한숨 자도 됩미까?”

잠은 본인이나 관장님이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거죠. 주님이 잠을 주셔서 잠을 자게 되면 그걸 보고하면 돼요. “지금 잠자는 타이밍을 주께서 주셨기에 저는 잠자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하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에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하는 것을 어린애가 그런 식으로 보여줍니다.

어린애들이 퀴즈 정답을 억지로 어떻게 맞췄거든요. 돈 100만 원을 상금으로 주니까 7살짜리 애는 옆에 있는 애보다 한 살 많다고, 그래도 좀 컸다고 상금 받아서 좋다고 하는데 그보다 한 살 어린애는 그게 아니에요. “이 돈 반반 나눌 거야?” 하니까 그 애는 돈 필요 없어요. 100만 원을 싼 그 비닐만 갖겠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빈 무덤 아닙니까, 빈 무덤! “나는 예수를 원합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떠나갔던 그 빈 자리, 그 자리가 내 자리입니다. 나는 그걸 원합니다. 그게 내 끝이고 진짜 제 모습은 거기서 발견됩니다.” 이게 바로 빈 방주예요, 우리를 태우는 빈 방주이고, 이게 동행이에요.여러분이 죽을 때 천국과 지옥 중에서 어느 쪽에서 여러분을 반길 것 같습니까? “아이고, 친구야! 반갑다.” 어느 쪽에서 반길 것 같아요?

시편 1편 4-5절에 보면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즉 바람이 우세하다 그 말이죠. 그냥 휙 하고 쭉정이처럼 날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질그릇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 버리면 이게 갑자기 확정적이고, 고정화돼 버리고, 이게 구조화돼 버리는 거예요. 딱 꽂혀버린 거예요.

음식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중앙에 이쑤시개로 꽂아놓고 빼먹는 식으로 하는 거요. 그렇게 십자가가 관통해 버리는 거예요. 십자가 나라는 존재를 관통해서 위에서 아래로 딱 꽂아버리면 그다음부터 모든 지시와 명령은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을 상황으로 주십니다.그렇게 주시면 우리는 천국에 속한, 예수 안에 속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이 멸망하는 역사의 공중에 날아다니는 식으로, 출몰하고 나타나는 식으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게 언약의 사람이에요, 언약의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영에 속한 사람’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이 뭐고 영이 뭐고, 이거는 구조화됐죠. 이미 그 사람의 끝이 확정되었습니다. 선악적으로 모든 걸 자기한테 의미를 두는 것, 전부 다 그 구조가 육에 속한 거죠. 알아들어요. 이 역사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다 알아듣습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마두로가 체포되는 것, 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 예를 들어 어린애가 라면 먹다가 라면을 흘리는 사건.

라면 먹다 흘리면 안 되죠. 라면 먹다 흘리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겠죠. 그런데 라면 먹다가 흘리는 거 보고 주께서 그렇게 흘리게 했다는 생각을 왜 못 해봅니까? 왜 그런 생각을 안 해요? 저것은 나쁜 짓이고, 흘린 라면은 다시 주워 담아야 한다는 거,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 하지요?

흘린 라면 주워 담아야 착한 아이가 된다. 왜 착해야 합니까? 착해서 계속 살아야 한다. 왜 살아야 됩니까? 살아남아야 나한테 돈이 생기니까. 결국은 이 모든 게 뭐냐 하면, 지옥 훈련, 지옥 실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내가 착실했기 때문에 착실한 나는 나한테 소중하다. 너한테 네가 그렇게 소중하면 지옥이나 가라! 네가 너한테 소중한 사람들을 거기 다 모집되어 있어요.

안 소중합니다! 자기한테 소중한 데에 미쳐 있으니까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해서 ‘쓸데없는 일을 하셨네. 의미도 없는 거’ 마두로 대통령 체포되는 것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하고 똑같아요. 나한테 하등 중요하지도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가, 얼마나 돈 버는가, 그게 전부예요.

이 건물 1층 편의점이 문 닫았잖아요. 문 닫을 때 저는 약간 속이 시원했어요. 다른 분은 안 그러겠지요. 거기서 커피 사던 분들은 좀 실망이겠지만 나는 속이 시원한 게 왜냐? 그분들이 한 번도 이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한 적이 없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에 꽂혀버리면 감사해야 되는데, 이미 우리의 운명은 십자가 사건을 담는 천국 백성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확정됐어요. 이쑤시개로 꽂아놨으니까 빼도 박도 못해요. 사나 죽으나, 살고 죽는 게 나한테 아무 의미 없어요. 주께서 살리시고 주께서 죽이시기에 이제는 내가 신경 쓸 게 나한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끝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죄에 대한 합당한 하나님의 정당성을 실시하는 것이라 여기고 주의 일만 듬뿍 담을 수 있는 올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하나의 사건을, 십자가 사건의 구조를 보여주는 못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니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하옵시고, 그것으로 고마워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이 알아듣든지 알아듣지 못하든지 그것마저 주님의 소관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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