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괄적으로 죽은 입장에서, 이미 죽어버린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개체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모든 의미와 가치는 죽음 안에 다 묻어버리자는 거예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실 일에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이미 우리는 눈 밑에 있는 낙엽같이 이미 죽어 있습니다. 죽음 밑에 있으니까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옛날에 있었던 기쁨이나 또는 개인적인 기쁨에 눈 돌리게 되면 그것은 복음이 주는 기쁨이 아니기에 허무로 끝나버려요. 주님께서 그것을 허무하게 끝내주는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려져 있던 진짜 기쁨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방식이 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요, 회개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피 믿고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뒤늦게 확인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진즉에 용서가 된 거예요. 진즉에 용서가 되었고 그것이 진리입니다.
사는 것이 어디 있어요? 누가 사는데? 아무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이미 전부 다 죽어져 있는 거예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가 아니에요. 너는 네 종교 믿고 나는 내 종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혹입니다. 죽음의 융털돌기? 작은창자에 미세한 혹처럼 튀어나온 것들이 있어서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뽑아낸답니다. 죽음의 표면이 요동치면서 매일같이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결국 가인은 동생을 죽여야 되는 거예요. 이게 덮쳐짐의 성질인데 이 성질을 제가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속성의 일부를 할당받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아담의 속성, 아담의 속성은 다른 것이 아니고 악마의 속성이지요. 인간은 마귀의 속성의 일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귀의 속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어떤 남자를 죽였어요. 여자 하나를 얻는다는 것, 곧 자기의 쾌락을 얻기 위해서 그 여자와 동침을 한 것은 본인이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인 거예요. 가인이 마치 아벨을 죽인 것처럼. 지금 이 다윗의 모습을 다윗이라고 보지 말고 오늘날 우리 모습으로 보세요. 왜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죽이느냐 하면, 우리는 날마다 살아서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에 방해가 되기에 그런 겁니다. 날마다 죽이는 이유가 주님께서 그걸 제거하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여자와 살기 위해서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자기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죽인 거지요. 그런데 애가 태어나서 하나님이 용서한 줄로 알았다가 애까지 죽였을 때에 다윗은 거기서 느낀 점이 뭐냐?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는 이것이 주께서 유발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이 다윗의 죄에 가담을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기 때문에. 다윗의 자식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이 죄안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다윗이 알게 된 것은 딱 하나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에 자율적인 분은 예수님밖에 없고 모든 인간은 타율적이라는 사실, 그 한 가지 알게 된 거예요.
이 육신의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구원의 세계로 도약하는데 그 도약하는 방법, 하나님께서 죄의 맨홀을 만들어요. 하수구로 빠지는 어떤 맨홀을 만들어서 거기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거기에 빠져보니까 비로소 내가 생각한 내가 잘못되게 구성된 생태계의 잘못된 나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남들이 사니까 나도 따라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죽음으로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어요.
표면적인 죽음만 연속으로 눈에 보이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죄 속에 안 들어가면 모르는 거예요. 죽음의 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에게 살인이나 간음이 일어난 이유를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나단이 왔을 때 알게 되지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생명이란 어디에 있는가? 생명은 다른 세계에 있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맺었던 그 세계가 생명의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나무 못 따먹도록 차단했기 때문에 영생이란 우리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것이 이 땅에 들어올 때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져요.
■노아언약이 그런 겁니다. 다 홍수로 일반화시켜놓고 방주를 만들어서 그 방주에 탄 사람만 살게 하는 이것이 언약이에요. 방주 만든다 하면 굉장히 거창해 보입니다. 뚝딱뚝딱, 목수질을 해서 배를 만드니까.
■그러나 다윗의 언약은 뭘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원치 않는 죄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죄 속에 들어가는 이것이 언약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언약인데 이것은 들어갈 필요도 없어요. 이미 용서받은 상태로 다가오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뭘 해야 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가 그 결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짊어졌던 그 죄 속에 우리가 이런 저런 식으로 놓여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나타내고 표현하는 그 일만 우리에게 추후적으로 주어질 뿐이에요. 그걸 새언약관계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우리보고 뭘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성도의 입장에서 이걸 느끼게 되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새언약, 주께서 짊어진 그 죄에 이미 매몰된 입장입니다. 이미 살 처분된 입장이에요. 이 세상은 돔 같아요. 거대한 무덤, 네 무덤 내 무덤 할 것도 없이 다 같은 동일한 무덤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무덤 속에서 무덤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요한계시록이 그걸 말해줍니다.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천사들의 냉혹한 공무집행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천사들은 공무원들이에요. 냉정해요. 아주 비정합니다. 시킨 대로만 합니다. 그 태도를 우리가 받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절대로 남을 동정하지 마세요. 로마서에 보면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것이 있지요. 그 말은 동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우리는 청개구리니까. 예를 들어서 “주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해봐라 되나.” 그런 뜻이에요.
이미 용서가 확정된 입장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반성을 하잖아요? 반성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가인의 본성이 튀어나온 겁니다. 반성하면 할수록. “주여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수련회에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남편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아침에 성경 펴놓고 큐티하면서 ‘주여, 오늘도 이 말씀 앞에 반성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눈치도 없는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리모컨 어디 뒀어?” “시끄럽다! 내가 지금 도닦는 것 안보이나?”
이게 바로 큐티를 해봐야만 느끼는 살인충동입니다. 큐티를 안 해보면 안 나타나는 살인충동입니다. 큐티를 해야만 나타나는 살인충동이에요. 우리는 매일같이 하수구, 죽음이라는 한 돔 안에서 너나 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네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참새를 주께서 키우십니다. 그리고 들풀도 키우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인간을 그냥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참새는 날라 다니면 참새 몫은 다 한 거예요.
들풀은 그냥 피어나면 그 몫은 다한 거예요.
인간의 몫은 살아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 나라와 그 의를 뽑아내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는데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그 나라 의를 뽑아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죄를 알면서 그 죄 값으로 죽어가도록 주께서 작용하게 되면
하나님이 참새에게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일입니다.
편지를 전하는 사도와 편지 보는 우리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있던 그 관계, 그 언약관계에 의해서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관계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언약관계가 그대로 물에 비치는 것처럼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로 연장이 되고, 그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처럼 똑같은 관계가 고린도교회 너희에게도 똑같이 있지?”라고 묻는 것이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우리 둘 다 사망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맞지?” 이런 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도 괜찮아. 왜? 진리의 장소 안에 서 있기에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 우리가 죽을 때 너희에게는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용어사용 자체가 생태계가 “나는 어떻게 사느냐?” 그 생태계가 아니에요.
이미 진리의 안정성 속에서 ‘아,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용서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활동을 계속 하는 겁니다. 서커스 하는 원숭이가 재주가 많지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참, 원숭이가 재주가 많다.’ 하는데 그것은 원숭이의 재주가 아닙니다. 원숭이를 훈련시킨 조련사의 재주지요.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남보다 더 뛰어난 성품, 착한 마음, 이게 아니에요. 우리를 이런 식으로 훈련시킨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윗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다윗이 죄짓는 것이 언약이에요. 그런데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본인은 그것을 감추려고 한 겁니다.
‘내가 착해야지. 왕인데 모범을 보여야지.’ 이렇게 착했는데 착해봤자 입니다. 기어이 다윗으로 하여금 밧세바와 간음하게 만들었어요. 아마 밧세바가 아니라면 다른 부인과 했을 거예요. 제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리고 다윗은 반드시 살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느냐 하면,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가 책임질 죄 같으면 자기가 책임지고 나갈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 본인이 알아서 책임질 죄를 절대로 주지 않고 책임 못질 죄로 계속 밀어 넣고 몰아넣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네가 언제까지 네 죄에 대해서 책임질래?” 막 밀어붙여요. 나중에 “내 죄에 대해서 책임 못 지겠습니다.” “진즉 그러지. 진즉에 그렇게 나왔으면 네 인생 편하고 안 좋았겠나?” ‘주여, 나쁜 짓 한 것을 회개하고 반성합니다.’라는 마귀적인 공덕을 쌓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타율적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에요.
'만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도가 있는 이유 (0) | 2026.01.03 |
|---|---|
| 1/3-신6:5 (0) | 2026.01.03 |
| 예수 죽인 것 (0) | 2026.01.01 |
| 1/1-시편 115편 1-3절-전쟁의 목표 (0) | 2026.01.01 |
| 12/31- 요한1서 3장 8절-전쟁의 목적 (0) | 202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