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하나님과 통해서 ‘말씀의 세계’에 속합니다. 즉 인간들이 수긍하는 권력의 구조 밖에 말씀의 세계가 둘러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그 어떤 활동이나 움직임도 말씀의 세계에 주어진 예언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합왕이 상당히 공순해져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평소에 아합왕을 잘 아는 친지들은 이런 아합왕의 변화에 낯설어 할 겁니다.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보일 사람이 아닌데…”라고 느낄 겁니다. 가식적인 자기 연출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정성 있는 것으로 평가하셔서 같은 말씀 세계에 속한 엘리야에게 통보하십니다.
따라서 아합왕 가문에 내리시는 재앙을 보다 더 세밀하게 조정하신 바를 알려주십니다. 바알신을 섬긴 것에 대한 재앙은 아합왕 통치기간에는 내리지 않고 아들대에는 내리겠다는 겁니다. 즉 재앙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효능은 효능대로 작용토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는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가 분명히 확립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신약 시대에 알려진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는 히브리서 9:27-28에 나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without sin unto salvation.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f.
not to bear sin, but to bring salvation to those who are waiting for him.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게 된 것이 확정된 사실이요 또한 심판받고 저주받는 것도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기존 권력의 구조망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은 이방민족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을 시료로 사용하여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하늘에게 오신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되면 그제사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합니다. 이것이 신약에 확립되었다면 구약에서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획인시켜줍니다. ‘인간 권력의 세계’와 그것도 대립되는 ‘말씀의 권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에스겔 2:5에 보면,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은 알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있는 모든 자들은 권력 망 밖으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관계에 속한 선지자는 그 세상 권력의 한계를 압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 할지라도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 권력에 속하지 않는 선지자가 버젓이 그들 세계 안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아합왕이 잠시 마음을 낮추어 자신의 왕복을 찢고 죽음에 가까움을 나타나는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말씀의 영향력을 입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앙 내리심에 관한 조절’을 주님이 행사하셨다는 말은 구원이 재앙받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세상 권력 말고 다른 요소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겁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지 말아야했음을 분명히 말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한결 같이 구원해 내시고 계십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장도들은 왕을 세워야 안심하겠다고 선지자에게 부탁합니다.
이러한 왕 세우는 절차에서 사울왕은 사무엘상 10:10-11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을 합니다. “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사울왕이 권력욕이 미처 다윗을 죽이고자 따라가면서도 갑자기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삼상 19:22-24)
아합왕이나 사울왕이나 옷을 찢고 벌거벗었다는 말은 더는 자기를 권력이나 다른 것으로 자기를 소유화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즉 권력에 속한 왕이 잠시나마 말씀 권력의 종이 된 겁니다. 더는 자신이 자기를 꾸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이처럼 회개하는 것은 기존 세계에서의 자기 소유의 종으로 사는 자신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벗어나면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일의 방해물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기가 자신에 대한 책임감에서 떨쳐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통 ‘실수 했다’ 혹은 ‘앞으로 안 그래야지’라고 반성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을 자기가 책임있게 지켜보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며 심판이 합당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저주 안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가 어디서 주어졌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의 중심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중심부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은 원래 그 어떤 말씀에 대해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바로 이점을 발견했기에 성도는 더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물 노릇을 하지 않고 말씀의 종으로 사는 가벼움을 갖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효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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