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환승통로

아빠와 함께 2025. 9. 13. 08:19

서울강의20250911a 요한일서 4장 16절(환승통로)-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여기 딱 읽어보니까 이걸 알 수가 있어요. ‘사랑의 철벽수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계속 ‘사랑’이란 단어로 연결시키죠. 그러면 사랑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돼요? 그 사랑의 공간에 진입 실패하겠죠. 실패한단 말이죠.

그럼 ‘사랑의 철벽수비’로 되어 있는 이 안에 누가 계시느냐? 하나님은 이 안에 계셔요. 사랑으로 둘러싼 그 공간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랑을 돌파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19절에 나와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되어있죠.

주님의 사랑이 안 오면 어떻게 돼요? 주님의 사랑이 안 오면 이 사랑의 철벽수비를 뚫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안 받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신 사랑만 사랑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사랑은 안 받는 이유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이미 규정이 났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사랑 안에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럼 그게 천국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 쪽에서 사랑이 안 오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하고 사랑을 내밀어도 우리는 하나님 계신 곳에 합류하지 못한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갈 수 없다.’ 이런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보면 관건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안 왔을 경우에 대책이 없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안 오면 대책이 없다. 그것은 이런 뜻이에요. ‘네가 네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느냐?’를 우리한테 묻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안 받느냐? 하나님이 주신 사랑만 인정하고 우리 사랑을 왜 안 받는가? 그것부터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안 받는 이유에 대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사망을 당했다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왔지만 그 사랑을 이 세상이 거부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그럼 인간은 인간세계 따로 놀죠. 인간세계와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어요.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자기세계 밖으로 못 나간다.’ 인간은 자기세계 밖으로 못 나가요. 그 이유가 유일하게 인간세계 밖으로 나가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기로부터 못 빠져나가니까 천국에도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이쪽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세계로 가야 되는데 일단 빠져나와야 갈 수 있죠. 그런데 자기세계로부터 빠져나올 재주가 없어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방안에 갇힌 어린아이가 다급하게 바깥으로 막 외칩니다. “문 열어주세요!”하고 탕, 탕, 탕 발로 차면서 문 열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그래서 집안 어른이 애보고 하는 말이 “네 쪽에서 열어. 네 쪽에서 열라고. 이쪽에서 열 문은 없어. 네 쪽에서 한번 열어 봐.” 그런데 아이가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내 쪽에서 나갈 문이 내 쪽엔 없습니다.” 그러면 갇힌 거죠. 그러면 갇힌 거예요.

지금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는데, 마태복음 19장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 있잖아요.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다 아시는 말씀이니까 제가 읽어볼게요. 24절,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되어 있죠.

부자 쪽에서 천국 가는 문은 있다, 없다? 없다. 부자 쪽에서 천국 가는 문은 없어요. 부자를 인간으로 대체해봅시다. 인간 쪽에서 천국 가는 길은 그 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이 없어요. 문이 없는데 뭘 열어 달래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잖아요. 문이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 쪽에서 여는 문을 만들지 않았어요. 인간세계에는요, 천국 가는 문이 없어요. 자체적으로 운영이 돼요. 인간세계는 인간세계 자체적으로 운영이 된다고요. 그 세계에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이런 용어 압니까? ‘조리 돌림’. 조리 돌림이 뭐냐 하면, 아이 왕따시켜서 친구끼리 돌아가면서 걔 하나를 조지고 막 밟고 하는 거잖아요. 돌아가면서 패고 하는 게 조리 돌림 아닙니까. 약한 하나를 여럿이 돌아가면서 패고 놀리고 조롱하는 것. 그 조리 돌림에서 걔가 빠져나올 능력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왜? 약하니까요.

인간은 어느 정도로 약하냐 하면 자기를 키워주고 자기를 성장시킨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요. 그 정도로 약합니다. 그래서 문장 하나 날리면, 아까 했지만 ‘인간세계에는 문이 없다.’ 바깥으로 나갈 문이 없어요. 인간세계 자체가 하나의 세트장 같아요.

아, 정말 이거는… 인간에게 있어서 새삼스레 ‘불행’이란 말을 인간세계엔 쓸 필요가 없어요. 인간 자체가 불행이에요, 인간 자체가.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불행이기 때문에 뭐 새삼스럽게 불행하다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안에서 뺑뺑이 도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뺑뺑이’로 해야 되나. 뺑뺑이 도는 것처럼 교회 다니고 성당 다니고, 그냥 다니면서 외치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천국 쪽으로 문 열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문은 없어! 없는 문을 뭐 어떻게 열어? 문이 없는데.”

문이 없는 거예요. 다른 말로 요한일서에 의하면, 이 땅에는 하나님이 필요한 사랑이 없다. 자체적으로는 사랑이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없어요. 그 근거가 뭐냐? 주님이 사랑이신데 사랑을 추방시켰잖아요. 내쫓았단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랑,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를 추방시켜놨기 때문에 이 땅에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랑이 없어요. 따라서 인간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랑의 아들로 옮길 수 있는 어떤 문도 전부 다 막혀있습니다. 막혀있어요.

이런 사실에 대해 사실은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벌써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씀을 했어요. 아까 조리 돌림을 계속 이야기해보면, 조리 돌림을 통해서 ‘타인들로부터 구박을 당한다’ 또는 ‘구박을 받는다’라고 이렇게 호소를 할 때, 강자가 약자를 못살게 굴 때, 약자가 할 수 있는 처신, 그 태도는? 어디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까? 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강자에게 호소하는 거죠. 강자한테 호소하는 겁니다.

이러면 이 약자는 인간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빠져나오죠. 강자가 없으면 힘들고, 그 강자한테 의지함으로써 구박받는 것을 잠시 멈추거나 지연시킬 수 있겠죠. 그럼 아까 마태복음 19장 24절에서 강자는 누가 되느냐? 강자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약자가 되겠죠.

그런데 강자도 바늘구멍을 통과 못하죠. 부자가 천국 갈 길이 없다는 말은 그 부자를 의지하는 약자도 덩달아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을 빠져나갈 그러한 가능성은 없습니다. 인간세계는 철벽의 세계. 완전히 막혀있는,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는 세계,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특히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에게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이 어떤 특징이 있는데요. 그 특징은 이겁니다. 아까 언급했지만 ‘살려주세요’에요. 살려주세요. 누구를? 누구를 살려달라는 겁니까? ‘나’를 살려달라는 거죠. 나. 강자에게 압박을 받으면서 약자에게서 튀어나오는 신음소리와 하소연은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럼 살림을 받은 나는 어떤 상태를 목표로 합니까? ‘아, 살았다.’ 할 수 있는 그 수준, 모델이 뭐에요? 내가 뭐가 될 때 ‘아이고, 난 살았네.’ 해요? 그 모델이 뭡니까? 그 모델이 부자 되는 거죠. 그런데, 부자가 이 세상을 못 빠져나가면 약자가 기껏 소원하는 것이 결국은 부자 되는 것으로 마감되므로 그 약자도 애초부터 못 빠져나가기는 마찬가지 상태인 거예요. 못 빠져나가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강자도 못 빠져나오고 약자도 못 빠져나오고. 그럼 천국 백성은 또 따로 생기기 마련이고. 주님 입장에서는 천국 백성을 어떻게 모집할 거냐 하는 그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 있는 자를 빠져나옴에 성공해서 천국에 집결시키는 그 과정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셔요? 그걸 알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러면 ‘그건 뭐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해결하면 될 거 아닙니까? 교회 다니고 성당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자기를 약자로 보는 사람들은 뭘 찾아요? 강자를 찾죠. 강자의 이미지가 바로 부자였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이 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뭡니까? ‘나보다 더 센 분이 오셔서 약한 나를 건져내 달라’ 그 요청이잖아요. 강자라니까요, 강자. 자기가 약자라고 여기면 누굴 찾아요? 자연적으로 본능적으로 강자를 찾죠.

주님이 이 땅에서 빠져나갈 때 강자로 빠져나갔습니까, 천하에 약한 자로 빠져나갔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약한 자로 빠져나갔죠. 그러니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될 마음이 없어요. 나를 건져달라고는 요청하지만 ‘예수님 가신 길에 나도 가겠습니다.’하는 사람은 열두 제자 가운데 아무도 없었어요.

‘너나 가세요. 십자가에 홀로 잡히세요. 우리는 도망치겠습니다.’ 했죠. “누구야, 이 가운데? 어두워서 모르겠다. 누가 예수야?”하니까 “뜨자, 뜨자. 빨리 뜨자.” 현장에서 다 떠버리고 덜렁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만 덜렁 남아 체포되었죠. 가룟 유다는 이미 저쪽에 포섭돼서 넘어가버리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자를 치니” 어떻게 돼요? 양들이 다 흩어지죠(막 14:27). 그럼 그 흩어진 양들은 평소에 어떤 목자상을 원했습니까? ‘대단해요! 나보다 더 강해요! 내가 못한 걸 다 들어줘요. 이 세상 권력보다 더 센 권력을 갖고 있어요.’ 이런 거. 제자들이 지 마음대로 해석한 거예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자기가 원한 이미지를 예수님한테 카피해서 마스크 씌운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예수님이 누구냐를 정확히 모르는 이유는 내가 어떤 입장인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받을 잽이 안 되고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이상 그걸 모르게 되면 항상 내 앞의 가짜 예수님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가짜 예수님.

주님께서 우리한테 이렇게 물어본다면 여러분 어떻게 답변할 거예요? “내가 너를 구원해야 될 이유를 대라. 다섯 가지도 필요 없다. 세 가지도 필요 없어. 딱 하나만 대봐. 내가 굳이 너를 천국 보내야 될 이유를 네가 한번 이야기해봐라.” 이유를 못 대요. “저는 천국가면 쓸모짝 있어요.” 그렇게 한다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생각은 내가 이 땅에서 가진 생각과 정반대인데? 난 그것을 죄라고 규정한다. 또, 또 다른 이유는? 방금 그 죄 된 이유 말고 또 다른 이유 대봐.”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에 인부를 구할 때 그들은 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놀고 있다는 말은 오늘 취직은 끝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무도 나를 들어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시킨 거예요. 포도원 주인이 나를 쓰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슬퍼하거나 분노할 그러한 처지에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안 보내준다고 내 쪽에서 화낼 어떤 근거는 나한테 존재하지 않는다. 탕, 탕, 탕 아무리 문을 열어 달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쪽에서 볼 때 문이 없는데 이쪽에서 어떻게 문을 여냐? 아이고, 답답아. 원래 네 세계는 문이 없어.” 문이 없는데 열어달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열어달라니. 너 그냥 그 동네에서 살아. 그 동네에서 살라고.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성경에서 천국은 사랑으로 완전히 포위되었죠. 사랑으로. 사랑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랑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사랑받는 자만 그 천국에 오죠. 그런데 그 외곽에는 뭐로 둘러쳐져 있습니까? 사랑이죠. 사랑의 철벽, 성벽이 되어 있죠. 그런데 그 사랑은 인간 쪽에서 갖고 있는 사랑에 의해서 튕겨져 나옵니다. 거부당합니다.

그러면 이건 하나의 퀴즈가 되는 거예요. ‘사랑이 없는 인간이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질문이 성립되는 거예요. “사랑이 없는 인간이 사랑의 나라에 가는 방법은?” “그러면 그 성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오면 되잖아.” 이걸 정답으로 이야기하죠.

그런데 그 정답을 딱 내는 순간 그 사랑의 나라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안 주면 어쩔 건데?” 여기서 답변을 잘 해야 돼요. “안 주면 어쩔 건데?” 답변하기를 이렇게 답변해야죠. “사랑 안 줘도 괜찮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천국 안 가도 좋아요.”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러면 저쪽 천국 쪽에서 “천국을 안 가는 게 문제가 아니야. 네가 있는 곳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건 저주의 세계야. 지옥이야. 그래도 좋아?” 그럼 어떻게 돼요? 답변 잘 해야 되죠. “죄만 지은 인간에게 저주가 합당하니이다.” 뭐 이렇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니이다’ 이렇게 갖다붙여야 되죠.

그럼 저쪽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죄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죄인입니다’할 때 그 죄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죄의 개념과 합치되느냐?”고 묻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아는 죄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 주고받는 대화를 함축하게 되면 이렇게 돼요. ‘인간은 이유도 없이 지옥에서 살게 된다.’ 이유도 없이. ‘지옥에 가는 이유도 없이 그냥 지옥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됩니다. 상당히 냉혹하죠. 그런데 이 냉혹한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이제부터 구약성경을 우리가 잠시 보겠습니다.

신명기 20장 1-8절까지 제가 설명을 할 텐데요. 1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네가 나가 대적과 싸우려할 때에 말과 병거와 민중이 너보다 많음을 볼찌라도 그들을” 그다음 뭡니까? “두려워 말라”죠. 넘어가서 3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그다음 한번 적어볼게요.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지금 양팀으로 나눠 전쟁합니다. 전쟁하는데 ‘겁내지 말라, 두려워 말라, 떨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는 것은 누구한테 당부하는 거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부하는 거죠. 그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했다면 이스라엘과 맞짱 뜨는 싸우는 저쪽 세계는 어떤가? 여호와 하나님이 일으키는 전쟁은 어떤 전쟁이 되느냐? 겁낼 수밖에 없고 두려할 수밖에 없고 떨지 않을 수 없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전쟁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그건 아무 대책도 없고 문도 없고 소망도 없고 그냥 태어난 그대로 살아가는 이방민족들에게 이스라엘 존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예상 밖으로 겁내고 두렵고 떨고 놀랄 수밖에 없는 낯선 민족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낯선 민족으로, 이방민족들에게는. 그 정확한 예가 뭐냐? 여리고성에 있는 기생 라합이었잖아요.

기생 라합이 정탐꾼, 적군의 스파이를 살려준 이유가 뭡니까? 이건 뭐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면서부터 광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미 소문 다 들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들이닥치기 전부터 그들은 이미 겁내고 있고 두려워하고 있고 떨고 있고 지금 놀라고 있는 겁니다. 놀라고 있는 거죠. 그러면 기생 라합의 경우에 ‘겁낸다, 두렵다, 떤다, 놀랍다’ 이것이 자체적으로 기존의 자기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기능이 되느냐 하면, 탈출구, 탈출문의 기능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딱 이야기하니까 ‘아이고, 놀래라.’ 그다음에 ‘아이고, 막 떨린다.’ 그다음에 ‘아이고, 두렵다.’ 그다음에 ‘아이고, 이거 겁난다.’ 이런 인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순간 십자가에 꽂혔다는 이야기고 십자가에 꽂히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세계에서 발이 빠진 상태인 거죠.

이렇게 놀라움과 두려움이 없으면 자꾸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내 쪽에서 시도해서 “문 열어주세요! 죽어서 지옥 가기 싫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잖아요. 교회 나오고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두드리다가 이렇게 십자가의 능력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턴 내가 시도하고 노력한 모든 것이 일소에 그게 아무 가치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는 거예요.

오히려 나한테 마주 오는 주님의 조치가 겁나고 두렵고 떨리고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태로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일종의 ‘산사태’ 일어난 거죠. 완전히 나를 덮치는 거예요. 완전히 덮쳐버리면 옛날에 나한테 귀하고 소중히 간직했던, 이거는 내 행복거리다,하고 갖고 놀던 모든 것이 어떻게 돼요? 일거에 전부다 묻히게 되죠. 묻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래쪽에 내가 깔렸다는 뜻이고 내가 살아오면서 갖고 있던 모든 기억은 주님 십자가의 사건에 의해서 그게 완전히 무의미하게 전부다 납작 깔려버렸다는 거예요. 시루떡처럼 완전히 깔아뭉개져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이 낯섦이 주는 겁남, 떨림, 두려움, 놀라움 속에서 이게 이질적으로 어떻게 나오느냐? 반대로 나가죠. 더는 겁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떨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 쪽으로 드디어 탈출 성공이 되는 겁니다.

방금 이 이야기를 문장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마라’. 놀란다는 말은 아직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세계에서 발을 못 빼고 있다는 증거죠. 어떤 일에 놀란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미련 갖고 있고 애착 갖고 집착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성경공부하고 신학공부해서 내가 복음공부해서 그것으로 나를 강제로 천국에 밀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애초에 그런 문은 없습니다. 그 시도는 다 허사에요. 거기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을 주님께선 거절합니다. 안 받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너무 두렵고 놀랍고 겁낼 만해서 이 십자가 소식으로 인하여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운 일에 해당되지 않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해당되지 않아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저도 젊을 때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 쭉 서울에 살았는데 그때 기억하는 것은 서울의 옛 골목이에요. 그 당시 서울의 옛날 70년대 골목을 떠올리고 지금 가보게 되면 상당히 정취가 있어요. 그때는 좁은 줄도 몰랐죠. 당연히 다 그런 길로 되어있기 때문에. 오류동 골목을 보면 옆에 비슷한 골목들이 있잖아요.

그 가옥구조를 보게 되면 안방에 안 들어가도 안방에는 어떤 게 있을 것 같으냐 하면, 접이식 알루미늄 밥상인데 공작새 프린트되어 있는 거 있죠. 아주 가벼운 상에다가 김치하고 밥하고 고추하고 찍어먹는 된장 놓고, 그땐 김도 귀했으니까요, 그렇게 사이좋게 꿇어앉아서 둘러앉아 먹다가 머리 막 받치고…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이 가죠.

그런데 그 추억이 하나님의 추억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들이닥치면,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이 그다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놀랄 것도 아니고 떨릴 것도 아니고 겁낼 일도 아닌 거예요. 겁낼 일도 아니에요. ‘그때 저랬지.’하고 마음 푸근하게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십자가가 없는 상태에서 그 생활을 탈피해서 고급 아파트, 넓은 아파트에서 잘 먹고 현대식 식탁 놓고 산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습니까? 두려워하고 불길하죠. 불안에 떨고. 안절부절 못해요, 사는 게. 안절부절 못합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자기로부터 자기가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자기가 탈출하지 못했어요. 놀랄 일이 행여나 생길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놀랄 일이 생길까봐. 완벽하게 단속해서 놀랄 일이 안 생기도록 매사에 주의하고 조심하고.

자기 뿐 아니고 자기 식구들한테 그걸 닦달내고. “꼭 우산 챙겨라.” “비 안 오는데?” “지금은 비 안 와도 나중에 비 올 수가 있어. 우산 챙겨.” 그러는 것은 자기 불안 심리를 묘사해주는 거예요. 우산 안 가져가서 비 흠뻑 맞으면 어때요? 십자가로 구원받았는데. 이 세상에서 탈출되었는데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저는 이런 문장으로 한번 바꿔볼게요. 질문 형식의 문장입니다. ‘그 사람의 경제사정과 집안형편과 정치적 정세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 변화되는가?’ 이 질문이에요. 그 사람의 경제사정, 집안형편, 정세, 여기에 보탠다면 자신의 건강까지. 이 건강이 인간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변화가 주어집니까? 객관식으로 1.마음이 달라진다, 2.안 달라진다. 몇 번입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인간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요. 자꾸 이 상황에서 변신을 시도하죠. 그 본바탕은 안 달라져요. 늘 두렵고 무섭고 떨며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한결같은데 상황 따라서 안 그런 척하면서 살아가는 무거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꾸 환경을 바꿈으로써 자기 마음에 평화를 얻으려고 행복을 얻으려고 부질없는 시도를 해요. ‘백화점에서 옷을 하나 사볼까? 그러면 내가 지금보다 훠얼씬…’ ‘머리 좀 긴데 미장원에서 숏커트 한번 쳐봐?’ 이런 식으로. ‘혼자 사니 외로운데 누구하고 결혼해봐? 솔로 끝내버리고 다시 결혼 한번 해봐?’ 이런 거. ‘우리 애가 백점 맞고 나중에 학교에서 1등하면 내 마음이 굉장히 편해지겠지?’ 이런 시도. 이런 시도는 찻잔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백날 흔들어봐야 그 찻잔 안에 갇혀있는 꼴이에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제 왔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자기 성도의 모든 일상에 분산되어서 침투됩니다. 분산되어서. 사랑은 교회에 있다? 안돼요. 일상생활 가운데서 그 경제사정, 정치사정, 가정환경, 건강사정 바뀌면 바뀌는 대로 주님의 사랑은 분해되어서 그 속에 전부다 섞여서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분산되어서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놀라운 점은 분산시켜서 자기가 뿌려놓은 이 사랑을 주께서는 회수합니다. 분산시키고 다시 회수해서 나오는 것은 뭐냐?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에 이것이 모아져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또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십자가, 십자가’ 하면 그건 아무 의미 없어요. 십자가가 우리의 삶속에 이렇게 분해되어서 침투하는 겁니다. 분산현상 또는 침투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 말, 이 문장을 같은 뜻인데 다른 표현으로 해볼게요. ‘사랑에 의해 환경이 주어진다.’

환경 속에 사랑이 침투할 수 있지만, 내게 주어진 환경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라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왜 고마우냐? 이 환경 자체가 사랑인 것이 왜 고마우냐 하면 내 쪽에서 애써 실시할 것이 없죠. 내 쪽에서 힘들여 내 환경을 하나님의 사랑이 오도록 혹은 오면 반길 수 있도록 준비하는 내 쪽의 준비 작업을 하나님이 일체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나님께 귀여움 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어떤 노력과 시도를 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분산 현상에 장애가 될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성경공부하고 하는 그 짓을 왜 하느냐? 주께서 분산시킨 것이 회수되면 어디로 회수된다고 했어요? 십자가로 회수되죠. 인간의 평소 행동은 자기가 뿌린 모든 것에 대해서 자아로 회수하는 이 버릇 때문에 그래요. 자아로 회수하는 버릇 때문에.

내가 뿌린 것이 내 잘남으로 돌아오는 그게 습관화되어서 ‘하나님한테 예쁨 받고 귀여움 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가만있으면 안 되고 뭔가 마중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하고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백날 시도해봐야 결국 끌어 모아 다시 회수하게 되면 누구 잘난 게 돼요? 나 잘났다,가 되는 겁니다.

회수하는 작업도 수월치 않아요. 힘들잖아요. 힘들 때 그게 껄끄럽게 다시 내 영광으로 회수 안 될 때는 그다음부터 누구 탓합니까? 남 탓하는 거예요. 가족 탓하고.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누가 남 탓한다는 말은, 내 자체가 내 안에 폐쇄된 어떤 회전목마, 또는 폐쇄된 그런 구조인데 그 구조에 네가 방해됐다는 뜻이에요. ‘내 잘남과 내 절대성에 네가 끼어들었잖아.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이 말이거든요. 너 때문에. 전부다 남 탓이에요. 그런데 그 남 탓에 튕겨나가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 나라를 로마와… 로마는 강자였습니다. 네 번째 짐승이죠, 다니엘에서. 그 짐승한테 협조해서 ‘나라를 잘해보겠다’ 이거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아람 나라한테 뭐 용병구하고 주변 강대국들에게 잘 보여서 이스라엘 어떻게 보존해보겠다 하는 그런 이스라엘 왕들 하는 정책하고 똑같은 거예요. 유대인들이 로마한테 잘 보여서 신앙생활이나 잘하게 해달라고 하나의 구걸하듯이 궁색하게 얻은 그 평화.

하여튼 관세 40% 주고 다 할 테니까 우리나라 노동자 300명 빨리 한국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 구걸하듯이 싹싹 빌듯이 강국 각 나라에 약소국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에요? 모든 것은 내 쪽으로 모든 의미를 회수하기 위한 평소 세상 적응방법이잖아요. 이것은 하나님 사랑은 핑계에 불과하고 결국 누구 사랑이냐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사랑의 산사태가 지금 덮쳐져야 돼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옛날에는 사랑을 믿었지만 이제는 믿지 않아요. ‘나 옛날엔 사랑을 믿었지만 이제는 알아요~ 믿지 않아요~’ 진미령이 불렀던 <하얀 민들레>라는 노래에요. 겪어보니 내 이익으로 회수가 안 되는 사랑이에요. 내 행복으로 회수가 안 되는 사랑, 나 이제 안 해.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기로부터 자기가 벗어날 수 있는 문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평생 없습니다. 영원토록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 그래서 바깥의 상황을 보고 두렵고 떨고 무섭고 겁나고. 이게 일상생활이에요, 일상생활. 겁내고 두렵고 떨고 놀라고. 이게 신약에 오면, 불안하고. 불안한 거예요. 왜 불안한지도 몰라. 그냥 불안이 올라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처는 전부다 누구 탓? 남 탓하고.

우리의 일상, 그 요소 빼놓고 다른 요소 있는가 한번 돌아보세요. 없지요? 내가 스스로 나한테 갇히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형벌입니다. 형벌. 하나님께서는 죄짓고 형벌주시는 것이 아니고, 형벌을 먼저 주시고 거기서 죄가 나오도록 조치합니다. 형벌부터 먼저 주시고.

두렵고 무섭고 떨며 놀라는 것부터 먼저 주시고 그리고 거기서 죄가 나오게 함으로써 인간이 본인도 모르는 죄가 이 인생 자체를 형벌로 간주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죄를 아는 기쁨을 주셔요. 자기가 죄를 아는 기쁨. 인간은 의인은 없어요. 의인은 안 나와요. 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 그러면 사랑의 사태가 터지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제가 아까 얘기했죠? 그거 말실수 아닙니다. 맞습니다. 사랑이 덮치면 어떻게 되는가? 이 형벌 속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상황 따라서 사랑이 자체적으로 분해되어서 섞여서 들어와요.

섞여서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랑은 탄탄한 내 사랑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모습으로 구박을 받겠죠.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해놓고 나한테 주는 건? 내 인생 이렇게 망하게 해놓고… 이것도 사랑이냐?’ 불평, 불만과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주님은 사랑을 주었지만 우리 쪽에서는 무섭고 놀라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신명기 20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의 전쟁이고 신약에서는 개인적인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이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지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랑을 회수하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자기 사랑에 탄탄히 무장되어서 ‘내 건데 나 이것마저 빼앗기면 나 정말 못 산다.’하고 발악을 하는 그 전쟁. 주님은 사랑으로 왔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이해 못하고 있는, 발악을 하는 모습. 신약에 와서 말씀이 주어질 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걸 제가 환승 통로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구로역에 선로가 쭉 있는데 선로가 공사 중이라서 구로역에 들어온 사람들이 전에 인천 가는 방향으로 못 가고 선과 선 사이에 연결하는 환승통로를 통해서 방향을 거꾸로 가서 타는 거예요. 그럼 인천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야 돼요. 환승통로로 가려면 원래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야 인천 가는 차에 탑승이 가능해요.

주님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주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천국 가는 쪽으로 회수가 되죠.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어요? 우리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에 대한 결과물을 회수하려고 하죠. 방향이 어때요? 주님 가는 쪽과 내 쪽이 반대가 되니까 우리는 환장하는 거예요. ‘이건 아니지. 내가 이러려고 교회 다녔나? 이러려고 예수 믿었나?’ 뭐 반항을 해요.

그러나 주님께서 성령께서 강제로 환승통로를 이렇게 겪게 하면 ‘아, 천국은 이렇게 가는구나. 자기를 미워하면서 가는구나. 결국 내가 장애물이네. 내가 주님의 방해물이네.’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이 통로가 뭐냐, 두 자로? ‘사랑’.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50911b 요한일서 4장 16절(환승통로)-이 근호 목사


아까 환승통로까지 이야기했어요. 환승통로의 특징은 방향이 반대가 된다는 거예요. 방향이 반대에요. 우리가 ‘나 이렇게 안 살래.’ 기피해서 멀리멀리 도피하고자 했던 그 상황에 우리가 다시 돌아오는데 어떻게 돌아오느냐? 신분이 바뀌어요. 형벌 받는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 형벌은 예수님의 형벌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아버지로부터 형벌 받았잖아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주를 받았다고요. 그 저주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 저주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형제로 들어가게 돼요. 주님의 형제. 십자가 지신 주님의 형벌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님이 졌던 형벌을 같이 받게 되는 겁니다.

말은 이렇게 쉬운데 실제로는 인간의 힘으로 거의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하냐 하면 그 예가 가룟 유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문제를 하나 낼게요. 가룟 유다와 나머지 열한 제자의 차이는? 가룟 유다와 나머지 열한 제자의 차이는, 가룟 유다는 영적인 존재였어요. 사탄이니까. 그러나 열한 제자는 그냥 인간에 머물죠. 인간적인 모든 품성, 인격, 인성으로 인간에 머물렀으나 가룟 유다는 영적인 것에 접근되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했어요. 굉장히 진지했습니다. 악마가 보는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을 봤으니까요. 악마가 보는 안목이 있을 때, 가룟 유다가 알았던 것은 내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거죠. 내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럼 내가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를 제거해야 됩니까? 바로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죠.

이거는 가인도 마찬가지에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실제로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의 문제에요. 누가 더 착하고 성실하고 누가 더 이웃을 사랑하는지 그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에요.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끊어져 있는가?’ 그런 영적인 문제에 두 형제가 관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자기와 관계가 끊어졌잖아요. 제사를 안 받았잖아요. 안 받으니까 가인의 행동은 영적이에요. 영적인 행동을 한 거예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죽인 겁니다. 아벨이라는 그러한 존재가 있으면, 인간이 자기의 소망하는 모든 세계는 영적으로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을 겁낸 겁니다. 그걸 두려워했던 거예요.

두렵고 무섭고 놀라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살아도 이게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의미 없고 사나 죽으나 무의미한 그것이, 내가 싫다는 거죠. 난 그게 싫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면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게 존재하고 싶은 거예요, 의미 있게. 무가치하게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가룟 유다 말고 열한 제자는 ‘간보기’에요. 그냥 예수님 간만 본 거예요. 나름대로는 모든 청춘을 바치고 재산을 바치고 따라 다녔지만 결국은 자체 한계를 스스로 뚫고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재주가 없었던 겁니다. 가룟 유다처럼 악마가 되어야 예수님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제자들은 진지하게 생각 못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좀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그럼 난 좋겠는데….’ 자기의 권역을 스스로 탈피 못해요. 그러나 가룟 유다는 탈피를 했잖아요. 자기를 벗어나서 사탄의 세계로 넘어갔잖아요. 성공했잖아요. 나름대로. 성공한 꼴은 뭐… 사탄이 사탄되는 건 우리가 논하지 않는 성공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제로 삼을 때는 육적인 간보기로 그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이야기가 쭉 나오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게 영적으로 진지해져버리는 거예요. 너는 이미 내 형제다. 예수님의 형제가 되면 예수님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죠. 그럼 주님 가신 것처럼 우리는 외롭기 그지없죠. 외롭기 그지없으면서….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럼 여기 등장하는 형제 자리에 여러분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이 세상 살면서 자기를 사랑할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인데 주님의 형제인 나를 사랑할 사람이 없죠.

그래서 뭐 서럽습니까? 외로워요? 남는 것은 뭐만 남아요? “누구든지 주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 사실만 우리를 통해서 주변에 계속 퍼지게 되겠죠. 그게 서러움이잖아요. ‘주님, 괜히 형제 되게 해가지고 사랑도 못 받고….’ 말씀으로 맞기는 맞는데 말씀대로 혜택을 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왜 그러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 가신 길, 형벌의 길이고 우리도 그 형벌을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게 맞는데 어떤 사람이 주님의 형제라고 하면서 나한테 잘해줘요. 잘해주는 이유가 19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주의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고, 본인의 사랑은 주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위상이 이 땅에서 형벌 받는 위상,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자리였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사랑하는 인간들이 예수님과 그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동안 여러분들은 이걸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 성경말씀을?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못 간다 하니까 형제 있으면 내가 사랑해야지.’ 뭐 이렇게 나오겠죠. 그러나 그것은 엉터리죠. 왜 엉터리입니까? 그것은 잘난 내가 더욱 더 잘난 나로 변신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난 이제 형제까지 사랑한다. 주님 사랑에다가 보태서 형제도 사랑한다. 왜냐? 요한일서 4장 20절에 근거하니까. 그 말씀을 내가 지켜야지.’ 이게 뭐에요? 뭐 그런 경우가 다 있어요? 없습니다. 그거는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주님 받았던 형벌에 동참케 하는 그것만이 사랑이에요. 왜? 환승통로는 우리가 시도하는 것과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피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왜 그걸 기피하느냐 하면, 그 길 가게 되면 자칫하면 우리가 놀랄 수 있고 겁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고 떨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라고 겁나고 떠는 그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면서, ‘너는 내 형제다.’하고 참여시키는 형제권한을 우리에게 주고 환승통로를 통해 우리가 가기 싫은 그길, 반대 길에 우리를 동승시켰어요. 합승시켰습니다. 합승시키면 우리에게 돌아올 이익이랄까, 우리는 어떤 자가 되느냐? 우리는 바로 사랑 안에 있죠.

‘사랑은, 나에게서 빠져나온 상태’입니다. 사랑은 나에게서 빠져나온 상태. 아까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못 빠져나온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못 빠져나와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 많은 ‘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 뒤에 ‘돈 많다’가 들어붙어서 이게 떨어지지 않아요. 나는 돈 많음을 통해서 다시 나한테 회수하는 겁니다. 나는 나의 가치를 내 소유를 통해 다시 회수하기 때문에 회수하는 그 통로를 우리는 끊을 수가 없어요.

애 네 명 키웠다. 내가 고생해서 애 네 명 키웠다. 어떻게 엄마가 그걸 끊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지킬 것이 있으면 악착같이 산다고요. 오기로라도 살리는 거예요, 지킬 가치가 있으면. 최종적으로 지킬 가치가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 한 나는 구원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 못한다, 이게 인간의 오기란 말이죠.

그건 자기 사랑이죠. 그 사랑은, 나는 어떤 형벌도 받기 싫다는 거예요. ‘내가 왜 형벌 받아?’라고 했는데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나는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이구나.’하는 것은 예수님과 동참하면서 비로소 발생되는 겁니다.

나한테 어떤 일도 놀라거나 두려워 할 일이 없는 이유가 내가 형벌 중에 있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 형벌 받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깜짝 놀랄 일이 또 뭐가 남아있습니까? 사람이 놀라고 두렵고 겁난다는 말은 자기의 가능성이 내심 있었는데 그게 좌절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절망감으로 두려워하고 떨잖아요. ‘그건 안 돼. 그건 안 돼. 나 그만 살래.’ 그럴 때 무섭고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것도 미리 상상하면서.

옛날에 ‘밥 묵자’하는 그런 코미디가 있었어요. 아들이 있었는데 99점 맞아서 귀때기 맞는 거예요. “나는 네가 백점 맞기를 기대했는데 어디 내 앞에서 99점을 맞아? 너 오늘 한 대 맞아라.”하고 패버려요. 때리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에요. 어떻게 하나를 틀리냐? 코미디니까.

제가 강의 시간에 했잖아요. 어떻게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를 안 찍고 내리냐? 무슨 그런 재앙이 다 있냔 말이죠. 재앙이. 5년은 너무했고 한 1년 갈 걸요? 자기가 실수한 거. 세상에 돈이 1500원, 그게 말이 돼요? 그런 재앙이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 나이 80 넘어서 운전하다가 애 세 명 다치게 해봐야 정신 차리지.

내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거예요. 왜? 나니까. 네가 뭔데? 나는 잘났으니까. 여기서 어떻게 그 잘난 내 문을 열고 못난 사람만 가는 천국을 갈 생각을 다 하겠어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소원은 뭐냐?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뭐냐? 잘났다, 더 잘났다, 더 잘났다, 더 잘났다,…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 그래서 골인, 천국! 우리의 스케줄은 이 스케줄이에요. 우리의 스케줄은 그 스케줄이라고요. 형제라도 나보다 훨씬 잘난 형제를 형제라고 부르고 싶어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침투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걸 ‘언약의 조상’이라 합니다. 누구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이 언약과 결합되었을 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놀랍고 두렵고 떨리고 겁날 수밖에 없는 상황들로 계속 이끌림을 받습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들은,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의지했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기가 예상했던, 직접 나타난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자신의 현실성을 박차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현실성. 현실성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내가 느끼는 세상의 전부, 이게 현실성이에요. 내가 느끼는 현실의 전부가 자기 현실성이에요. 이게 왜 현실이 아니고 현실성이냐? 사람마다 현실이 다 다르니까요. 사람마다.

나, 이 자아가 측정해낸, 내가 판단하고 내가 끌어 모으는 그 정보의 집합, 그게 타인의 현실이 아니고 나의 현실이에요. 나의 현실이 있는 이유는 나의 현실이 있을 때에 내가 구성한 현실이죠. 내가 구성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이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네가 요새 뭐 바쁘더니만 뭘 모았지?” “네, 현실을 모았습니다. 이게 내가 사는 현실입니다.” “그래? 그 현실, 내가 박살내줄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요셉이 꿈을 꿨습니다. 요셉이 꿈을 꿨죠. 형제들은 꿈을 안 꿨죠. 그러니까 요셉이 생각하는 현실과 요셉의 형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죠. 요셉의 현실은 (요셉에게) 현실이지만, 형들에겐 개꿈이죠. “아이고, 귀엽다 귀엽다 하니 이건 아주 도가 넘치네. 뭐? 아버지, 엄마가 너한테 절을 하고? 별들이 절을 하고 볏단들이 절을 해? 아이고, 잘되겠네, 이 동생아. 야, 우리 현실이 더 세다는 걸 보여주자.” “그래, 보여줍시다.” “야, 현실적으로 쟤 없애버려.” 이게 형들의 현실이에요. 형들의 현실이라고요.

그럼 이렇게 내가 구성한 내 나름대로의 현실에 갇혀 사는 것, 오늘날 우리들은 예외라 할 수 있습니까? 이건 예외가 아니죠. 우리도 자기만의 현실을 신봉하면서 거기에 하나의 충실한 신자가 되면서 내가 만든 현실에 복종하면서 우리는 고개 숙이고 살잖아요.

미국에 체류하는 한국 노동자들 300명이 지금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 구금되어 있다 할 때, 그 가족들은 걱정이 되겠죠, 가족들은. 그런데 가족 아닌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뭐 때문에 미국까지 가서는…” 일가친척이든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시답잖은 돈 유혹, 한 달에 천만원 번다는 유혹에 빠져서 거기 가가지고 사달날 줄 알았어.” 이렇게 고소해하는 그런 사람도 있죠.

인간은 자기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측정하는 내가 현실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내가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측정하잖아요. 내 기억 속에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나는 상황을 이렇게 판단한다. 자기 판단, 측정하는 내가 현실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든 현실 바깥으로 바보같이 내가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만든 현실이 그게 나의 감옥이고 내 자아의 감옥이에요.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소원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커다란 풍선 안에 갇혀서 풍선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면 풍선 밖에 있는 사람한테 뭐가 보이겠습니까? 풍선이 우측, 좌측 툭툭 불거져 나오는 그런 굴곡만 보이겠죠? “아주 몸부림치는구만. 몸부림을 쳐.” 그런다고 빠져나와요?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건 평생 자기 기분에 자기가 울고불고 하다가 그냥 그 현실과 더불어서 파괴되어 죽는 게 인생입니다.

그럼 구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 일어난 특이 현상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 속에 침투가 돼요. 침투가 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본인이 구성한 현실성 있잖아요, 그 현실성이 무용지물이 돼요. 다 파괴되어버립니다. 이게 자아의 파괴에요. 내가 파괴되는 거예요.

야곱이 벧엘이라 부른 곳에서 자기는 룰루랄라 하고 뭐 하나님 계시 받았다고 꿈속에 하나님이 사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자기화 시켰죠. ‘나는 복 받을 거야. 왜? 하나님이 복 준다 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자기 마음대로 일방적 해석을 했는데 거기에 타자가 등장하죠. 남. 타자. ‘타자의 등장’입니다. 이게 누구냐? 이게 바로 하나님의 천사였어요.

얍복 강가에서 천사가 등장해서 야곱 인생에 개입하니까 야곱이 결국은 한 대 얻어맞고 그다음부터는 다리를 절게 되었죠. 약간의 불구자가 된 거예요. 야곱이 불구자가 되었다는 말은 자기 안에 누가 내왕했다는 말이에요? 내가 요청한 타자가 아니라 저쪽에서 나를 타자로 일방적으로 간주해서 내 인생을 천사의 인생으로 동화시키고 합류시킨 그분이 내 안과 함께 동행한다는 흔적이 다리를 저는 거예요. 김대중처럼. 김대중은 운동하다가 잡혀서 다쳤죠. 흔적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흔적을 사랑이라 이야기하고, 깨끗한 분이 더러운 죄인, 형벌 받아 마땅한 죄인 속에 들어갔다는 말은 하나님 쪽에서도 이건 고통이에요. 고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천사가 당했던 그 고통을 함께 감내하고 같이 체득하는 그런 일생을 보냅니다, 야곱이.

그중에서 가장 아픈 고통이 뭐냐? 요셉을 죽이는 거예요. 자기가 사랑했던 요셉이 자기 사랑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아픔.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지킬 것이 있으면 살 의욕이 있지만, 지킬 것을 상실해버리면 더 이상 살 의욕이 없는 겁니다. 야곱은 자식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몸부림치면서 “나 그만 살래. 나 그만 살래. 나 요셉이 죽었던 곳에 갈래.”

그러니까 유다하고 형제들이 애써 말렸어요.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든든하게 버텨야 가정이 됩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자기들이 죽여놓고는…. 요셉이 죽고 난 뒤에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문제 하나 나갑니다. 오늘 안양강의와도 관련되어 있는데, 무능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무능은 제3의 요소입니다. 오늘 안양강의 제목이 <제3의 요소>입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선도 악도 아닌데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선과 악에서 빠져나오면 인간은 야곱처럼 무능자가 돼요.

아무것도 안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는데, ‘무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 빼놓고 여분의 것으로 계속 무능이 생산돼요.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닙니다. 취직도 안하고 그냥 놀고 있지 말고.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니라 열심히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그곳이 나의 현실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없는 여분의 무능에서 나의 진짜 모습이 항상 거기 있다는 겁니다. 무능에서.

그럼 성도는 뭐가 돼요? 성도는 무능자가 되죠. 이 무능자를 누가 비난한다면 이 무능자가 거기서 화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놀랄 일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어요. 무능자니까. 내가 무능자니까요.

어떤 애가 100점 맞아왔어요. “엄마, 100점 맞았어!” 엄마가 하는 말이, “100점 맞는다고 구원받느냐?” 이게 무슨 말이에요? 100점 맞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는데, 네가 구원받는 것은 100점 맞아도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유능한 자에서 뭐로 바뀌어야 돼요? 무능자가 되어야 돼요. 무능자.

무능자는 뭐냐 하면, 너는 못하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다 해줄 때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는 무능자의 고백이라는 거예요. 무능자의 특징은 뭐냐? 남 탓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말을 안 해요. 조졌다, 안 조졌다 하는 선악 자체가 해당되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예수님께서 평소에 습관처럼 하신 이야기가 있어요. “이것은 내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굉장히 자주 등장해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다.” 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다. 나는 무능자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는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린다.”

그럼 구원된 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형제로서 동행시킨 자만 예수님이 건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 사죄의 효과는 아버지가 보낸 자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그 외에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해당사항이 없다고요.

그럼 우리 인간은 아버지 모르잖아요. 아버지 모르죠. 아버지는 예수님만 알아요.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쑥딱쑥딱 의논해서 일방적으로 이미 결정을 내리고 결정내린 사항에 대해서 낯선 천사가 야곱에게 오는 것처럼 우리를 죄인으로, 형벌 받는 자로, 무능한 자로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꿈처럼 우리에게 침투한 사항이 있을 때 그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성도가 돼요.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럼 성경보지 말까요?” 이렇게 또 틱틱거리는 사람 있잖아요. 성경을 본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성도됨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어떻게 확인하는가? 성경대로 말씀 지켜서 확인되는 게 아니고, 지금 성경과 관계없이 내가 생각하는 현실성, 현실상, 또는 현실 속에 이 말씀이 어떤 식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활동하고 있는가에 대해 우리가 파악할 수 있어요. 하루 일과 속에서.

말씀이 어떻게 꼬물락꼬물락 거리면서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의 현실을 만들어서 거기에 동참시키는지 그걸 보게 하는 겁니다. 동참했던 예수님의 예가 있는데 누가복음 10장 한번 보겠습니다. 10장 27절,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잖아요.

성경에 있죠? 그런데 그 율법사의 질문이 잘못됐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이웃을 사랑합니까?”(29절) 거기 ‘내’가 왜 들어가는데? 말씀은요, 인간이 낄 자리가 아닙니다. 말씀에 의해서 인간이 무능한 자가 되어야지, 말씀을 지키는 유능자로 낄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율법사가 그걸 보고 하는 말이 “그럼 이 성경말씀을 내가 이루기 위해서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이웃이 누군지 그게 좀 모호합니다. 선생님이여, 이웃이 누구입니까? 무엇을 이웃이라 합니까?”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거에요. “이웃은 내가 생산하는 게 이웃이다.” 이웃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이웃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해서 거기에 필요한 이웃, 이웃은 주님의 형제에요, 형제를 아버지와 아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내면 그게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게 예수님의 예잖아요.

어떤 사람이 강도만나 누워 있다. 무대를 한번 봅시다. 어떤 사람이 강도만나 누워 있습니다. 연출을 하게 되면 거기에 역할 맡은 사람이 하나는 제사장, 또 레위인, 또 한사람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마리아인, 그들이 비탈길로 내려오는 씬이 있다. 큐! 갑자기 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은 자기 맡은 각본대로 “흥! 시간이 다 되었네. 빨리 가야 돼. 나중에 갔다 올 때까지 살아있으면 그때 도와줘야지. 아이고, 오늘도 재수 없다.”하고 가고, 레위인도 “오늘도 제사장을 보좌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게 중요하지. 이건 안 중요하다.” 그냥 갔다 이 말이에요.

세 번째 사마리아인이 등장했을 때, 사마리아인은 ‘이쯤해서 강도만난 사람이 쓰러져있어야 되는데?’하고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죠. 자기가 강도만난 사람 전문적으로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에게 없어요. 없는데 생산되었죠.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데 아직까지 이웃은 없어요. 그냥 지나가면 돼요. 그런데 안 지나가고 자기 몸 아픈 것처럼,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죠, 자기 몸 아픈 것처럼 “어? 내가 여기 왜 누워있지?”해서 자기 현실성 속에 강도만난 사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자기 현실성 속에.

이 소리 듣고 또 상상하지 마세요. 오늘 강의 끝나고 가다가 술 먹고 누워 있는 사람보고 ‘어떻게 하지? 받아줄까, 말까?’ 고민하지 마세요. 그건 두렵고 무서워 떨며 놀라는 일입니다. 그럴 게 아니고 이건 예수님께만 해당돼요, 예수님께만. 우리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강도가 무슨 강도를 도와줘요? 둘 다 강돈데. 멀쩡한 사람이 없는데 무슨 강도를 도와줘요? 우리도 지금 강도 만났는데. 우리 자체가 강도만난 사람인데 무슨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줍니까?

주님이 자기 이웃을 건사하는 거예요.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늘부터 이 강도만난 사람은 나의 이웃이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인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이에요.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간 사랑을 회수하면서 누가복음 10장의 말씀도 성취성을 가지고 같이 회수가 되는 겁니다.

그걸 두 자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성도만 알아요. ‘현실’. 또는 ‘현실, 그 자체’. 이걸 두 자로 하면 이게 뭡니까? ‘사랑’. 사랑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죠. 사랑은 아주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고 주님의 도움을 받은 자만 사랑에 이미 들어와 버렸어요. 사랑에 들어와 버렸다고요.

자, 그렇다면 진도 좀 나가겠습니다. 아까 가룟 유다 이야기 계속 합시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멀쩡한 채로 진지하게 영적 세계를 탐색했죠. 저 사람 말이 과연 맞는지, 영적으로? 현실화되는지? 탐색했습니다. 탐색했는데 탐색해보니까 사탄의 올무를 가룟 유다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죠.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사탄의 권역에서 탈출이 시도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열두 제자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대변해줘요. 어떤 인간도 사탄의 족쇄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날 위인이 없다는 것을 가룟 유다가 보여주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죽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있었다는 거죠.

가룟 유다 말고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떠나는 걸로 자기 한계를 보여주는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열한 제자는 나름대로 자기의 현실상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에서 영적으로 신비로운 접근을 할 필요 없어요. 열한 제자 가운데서 일곱 제자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디 갔습니까? 고기 잡으러 갔죠. 고기 잡는다는 게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평소에 늘 하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나 여러분들도 평소에 늘 하던 대로 살면 돼요. 평소에 하던 대로. 중요한 것은 평소에 하는 그 현실 자체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거기에 녹아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말씀작용으로 체험하는 그런 신기함을 느끼면 되는 거죠.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게 아니에요.

오늘 제목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제 나옵니다.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은데 이거 하나면 우리 인생 고민은 다 끝납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쓰임을 받은 자’. 모든 고민은 끝났어요. 모든 근심, 걱정은 다 끝난 거예요.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써달라고 요청한 적 없는데 쓰임을 받는 거예요. 그 감각이에요.

‘써주세요’ 하지 않았는데, 평소에 나는 내 일상에, 내 일에 몰두했는데 그 자체가 주님께 쓰임 받는 현실의 한 조각이 되는 거예요. 보통 현실은 내가 측정해서 나한테 회수되도록 내가 가치 있고 내게 의미 있도록 내가 강제로 끌어 모으는 현실이 인간이 하는 건데, 주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현실을 살던 간에 주께서 그 현실 자체를 쓰셔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씀의 성취성이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 현실성을 장악해버린다 이 말이죠. 쓰임을 받는 겁니다. 자, 쓰임을 받으면서 여기서 떨어져나가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나의 윤리와 나의 도덕성이 여기서 무용지물로 다 떨어져나가요.

윤리와 도덕이 떨어져나가면서 뭐도 떨어지느냐 하면 ‘나는 착한 일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또는 ‘나쁜 짓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라는 이러한 악마가 일방적으로 심어준 그 마약에서 너끈하게 탈출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쓰이든 그 가치와 의미는 주께서 결정할 문제지, 내 윤리도덕으로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마귀는 손 놔버리죠. 손을 놔버리죠. 주께서 “내 사람 누가 건드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어디 착한 사람 있거든 그냥 지나가지 말고 돌아보라. 그것이 주님을 돕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윽박질렀어요. 윽박지릅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는 아직도 우리의 무능이 아니고 유능함을 강조해요. 우리의 유능함으로 계속 분발하도록 요청합니다. 뭐 탤런트 비유, 달란트 비유 이야기하면서 “달란트 받아놓고 썩히고 있으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 가면 하여튼 우리의 착함, 선함의 잠재력을 발동시켜서 우리가 스스로 자기 보기에 굉장히 기뻐할 만한 현실상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격려 막 해주는 거죠.

그런 것은 쓰임을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쓰는 거죠. 그러다가 내 뜻대로 현실이 안 받쳐주면 누구 탓합니까? 남 탓하는 거예요. 신앙생활 좀 할라 하는데 니 때문에 못 하겠다. 그런 사람 많아요. 교회 오려고 하는데 최 집사 꼴 보기 싫어서 못 오겠다. 물론 당신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목사님 설교 안 들어봤어? 그것도 쓰임 받는 모습이다.”

그것도 쓰임 받는 모습이죠. 말은 맞는데 왜 인상은 더럽게 찡그리냔 말이죠. 쓰임 받으면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자꾸 변명조로 늘어놓는 거예요. 성질 북북 내면서. “그러니까 내가 그 교회 안 가는 걸 정당화 해달라 이 말이야!” “성질은 왜 내는데?” “불쾌하잖아!”

감사, 감사, 감사로 점철되어야 돼요. 고마움, 고마움, 고마움이 되어야 되는데 성질, 성질, 성질로 계속 가버리면 이건 쓰임 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날 쓰도록 내가 나한테 반듯한 인간되라고 혼신의 노력을 다 하는 거예요. 이건 미친 거죠. 간절히 구했다가 귀신들린 거예요. 아니, 간절히 구했다가 귀신들린 사람이 한두 명입니까.

자, 쓰임을 받을 때 내가 쓰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사랑이 뚫고 들어오죠. 사랑이 뚫고 들어옵니다. ‘사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의 반대말이 뭐냐? ‘자아가 뚫고 들어오는 것’이에요. “나 너 사랑한다.” 하는데 보니까 막 자아가 뚫고 들어와요. 자아의 특징은 단단한 갑옷 같아서 내가 맞이하면 이렇게 딱딱해요. 뚫을 수가 없어요.

좀 건드리면 변명과 핑계가 막 튀어나와요. 자동적으로 막 나와요.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전부다 두꺼운 자아의 굳은살로 꽉 잠겨 있어요. “내가 너 사랑한다잖아. 너도 나 사랑해줘야지.” 이런 식이에요. 자아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들어오는데 사랑인지 날 굴복시키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에요.

그러면 진짜 사랑이 뚫고 들어올 때는 어떻게 뚫고 들어오는가? ‘실 가는데 □’ 뭡니까? ‘바늘’이죠. 실 가는데 바늘 가죠. 그럼 바늘의 기능이 뭡니까? 바늘의 기능은 나의 모든 걸 파괴하는 거예요. 뾰족해서 나를 파괴시키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주께서 십자가 졌던 그 취지가 성령께 오롯이 담깁니다.

그럼 성령이 온다는 것은 뾰족한 바늘처럼 와서 너 때문에 우리 주님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니까 예수님을 소개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바늘가지고 들어오게 되면 뒤에 실은 어디에 해당되겠어요? 사랑에 해당되겠죠.

성령(바늘)이 앞장세워서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 뭐도 따라 들어온다? 모든 걸 용서했다는 사랑(실)이 같이 따라 들어오겠죠. 이것이 바로 현실인데 ‘말씀의 현실’입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주어지느냐?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현실 속에 성경이 개입되지 않는 곳이 없어요.

제가 안양강의에서 두 가지 구분했잖아요. 조종(操縱, control)하는 것과 조정(調整, coordination)하는 것을 구분했죠. 악마는 우리를 조종하지만, 성령은 우리를 조정한다고요. 조정해서 깎을 것 깎고 하면서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이 세상사는 것 자체가 주님 형벌의 환승통로, 주님께서 고생고생하며 통과했던 환승통로에 우리가 형제가 돼서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제가 돼서 동행하게 되면, 이 세상 누구도 형제를 사랑 안 해요. 자기사랑이 급선무지, 남까지 왜 챙깁니까? 사랑하지 않는 그 모든 수모를 성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같이 수모를 당하는 겁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는 어떤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을 환영해주세요. 그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고마워해야 돼요.

교회 왔는데 외로워서 못 살겠다. 그런 느낌이 막 들죠. 교회 왔는데 전부다 입 다물고. 외로워서 못 살겠다. 그럼 교회에 살려고 왔어요?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럼 못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면 안 될까요? ‘아, 주님도 이런 수모를 당했나?’ 이런 식으로.

사랑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욕심의 기준을 높여서 어지간한 사랑은 사랑 축에도 안 들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 욕망, 욕심이 너무 커서 사랑 줬는데 ‘사랑을 언제 줬는데?’ 이럴 정도로 인간의 탐욕이 높아서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 바늘이 가만있어요, 안 있어요? 가만 안 있죠. 콕콕 찔러서 마음을 낮추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요한일서 다시 한번 봅시다. 4장. 이렇게 해놓고 이제 봐야 돼요. 21절 보고 20절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그런데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한 게 아니죠.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게, 우리가 사랑할 것 같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데 우리는 사랑을 못하잖아요. 하나님 사랑 못하는데 사랑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자끼리에 대해서 그걸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주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에 있어서는 형제를 미워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안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되어 있어요.

자, 끝으로 제일 끝이 남아있죠. “그럼 목사님, 이 20절을 어떻게 실행에 옮깁니까?”라고 물어보신다면, 바로 이 바늘을 놓치면 안돼요. 성령을 놓치면 안돼요. 상대를 볼 때에 내가 성령 받은 것처럼 상대도 성령 받은 걸로 간주를 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걸로. 성령 받은 걸로 간주해서 말씀으로 사랑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나도 찔렸습니다. 따라서 나는 뭐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나는 매사에 무능합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인상 보니 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보니 당신 인간도 아니었어.” 그렇게 나오면 그건 뭡니까? 그쪽에서는 뭘 안 받았어요? 실은 주장했는데 바늘이 없으니까 형제 조건 자체가 안 돼요. 조건이 안 되죠.

“나는 뭐 무능해서 아무것도 못 합니다.” 이러면 “저도 못지않아요.” MBC 코미디에 그런 거 있었잖아요.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양반 인사할 때 대소서에서 똑같이 베꼈어요, 상견례하면서. 그래서 보고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어험’하고 시작한다 하니까 이걸 다 읽어버렸어요.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쪽에도 똑같은 걸 베껴서 “‘어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로 못났습니다.” “서로 못났습니다.” “서로 절을 합니다.” “서로 절을 합니다.” 둘이 똑같아.

둘 다 못남의 배틀을 시전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형제사랑의 상호작용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무능해서 못하고 유능한 주님만 형제사랑을 유지시켜준다. 그게 주의 말씀을 주의 말씀대로 말씀 자체가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현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을 구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이미 주의 사랑 아닌 것이 없음에 대해서 감사와 감사와 고마움과 고마움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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