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당신 역할이 바로 그 역할이잖아. 내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우리 모자가 알아서 죽도록 그냥 놔둬. 그런데 이제 와서 살려놓고 다시 죽이는 것은 무슨 잔인한 짓이냐?” 이 말이죠. 이걸 줄여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선지자여! 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내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죽든지 말든지 뭐가 되든 끝까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삽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 이야기죠. “안녕히 가세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 가뭄이 와도 고치지 못하는 인간의 죄 성, 그 어떠한 저주스러운 지옥 불에 들어가도 고쳐지지 않는 끈질긴 인간의 이 죄악성, 못 고칩니다. 고칠 수가 없어요. 사르밧 과부는 그걸 고치는 게 아니고 폭로 당했죠. 누구 앞에서? 엘리야 앞에서.
자,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의 대책은 어떤 대책이냐? 당황스러움? 난처함? 그리고 절망감이었어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가 아들 죽은 것에 대해 인간 자아성의 근원까지 다 끄집어 토해내 가면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에 대해서 엘리야는 군소리 없어요, 아무 할 말이 없어요. 왜? 거기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기술? 재주? 능력?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어요, 없습니다.
이 선지자의 무능함, 무력감, 좌절감, 절망감, 어떤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재주가 전혀 없다는 데서 오는 바로 이 선지자의 좌절감은 과부가 느꼈던 죽음과 질이 다른, 차원이 다른 차원의 자기 죽음, 선지자의 죽음이에요. 더 깊이 있는 죽음이에요. 이 죽음은 나중에 하나님 자신의 죽음까지 이어집니다.
그 모든 사태의 마무리는 가뭄이 내림으로서 뭔가 개시하고 의도를 갖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마감돼야 해요. 마무리돼야 해요. 하나님에 의해서 마무리가 되기까지 사르밧 과부도 손을 댈 수 없고, 그리고 그걸 바라보고 같이 절망감을 느끼는 선지자도 자기의 재주나 선지자라는 자기의 사명감으로도, 어떤 것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는…, 사명감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뭐가 도움이 돼요? 사명감조차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막다른 그 길에 엘리야가 서있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즉 ‘인간들아, 손 떼라.’ 이 말이에요. “뭐 사명감? 뭐 선지자? 목사? 손 다 떼.”
너희들이 손을 떼고 싶어도 너희는 손을 안 떼요. 안 떼는데 떼게 만드는 방법은 뭐냐?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목사로서, 선지자로서, 또는 성도로서 어떤 난처한 일을 해결하고 남을 도와주려는 그 모든 일에서 자신의 죽음을 체험토록 주께서 조치를 합니다.
아내는 믿는데 남편은 안 믿는다. 그럴 때 아내가 어떻게 합니까? 빡세게 중보기도 하죠? 하나님 뜻은 뭐냐? “하지 마.”에요. 해도 소용없어요. 네가 살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준다? 이건 없어요. 그들의 죄 성,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저항감, 반항감, 악에 받친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네가 거둬야 해요. 거둬서 악에 받친 그 악마성을 선지자도 그대로 같이 품어줘야 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내게로 가져와야 해요. 그대로 다 품어야 해요.
품고 그다음에 하는 것은 뭐냐? 그 사람을 대신해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7). 다시 열왕기상 17장에 봅니다. 17장 18절에서 사르밧 과부의 악에 받쳐서 나오는 그 본심 가운데 단어가 하나 나와요.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이 나옵니다. “나는 당신을 부르지 않았고 당신이 찾아왔는데,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당신을 보내서 나를 찾도록, 만나도록 조치한 것을 내가 믿습니다.” 기분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 성질나서 하는 거예요.
“기어이 네 죄를 알게 하니 네 죄값으로 네 아들 죽는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그것으로 날 압박하려고 찾아온 거 맞죠?”라고 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요, 인간이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알아서 산다. 하나님 믿으라고 하면 잘 믿고, 예수님도 잘 믿고, 이웃과 좋게 지내는 등등 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망상인지를 사르밧 과부를 통해 다 들통 내는 거예요.
제대로 안 건드리니까 종교적인 모습으로 허세를 떨고 믿는다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진짜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버리면 악에 받친 모든 하나님의 원수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는 아무 대책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그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듣고 엘리야가 19절에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그다음에 20절에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엘리야가 이런 생각을 가진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알지. 어떻게 하면 사는지.’ 지금 이런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선지자에게 해답이 없어요. 그냥 짐을 떠안아 버렸어요. 그 여인의 절망이 본인의 절망으로 전환된 겁니다. 아무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으니까 선지자는 누구한테 하소연합니까?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지금 답지가 없잖아요. 수학 정석 뒤에 뭐가 나와요? 답지 나오잖아요. 선지자 뒤에는 답지가 없어요.
여인의 죽음이 이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바뀐 상황을 선지자는 고스란히 수용하고, 이제는 죽고자 하는 여인의 자식이 아니라 이 아들을 누구의 아들로, 여인의 아들이 아니고 선지자 자신의 아들로,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삽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이 정녕 주의 뜻 맞습니까?”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들은 그냥 각본대로 시나리오대로 죽어야 되는 게 맞는 이야기입니까?”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들을 굳이 죽이는 이유에 대해서 선지자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전혀 몰라요. 선지자가 무지해요. 21절에 보면,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했어요.
본인이 하나님과 통하는 엘리야로서 자기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아들과 자기 몸을 일치시킵니다. 과부의 사정을 자기가 받아들였고, 그 가운데서 밀가루와 기름을 넉넉하게 해서 과부의 집을 살려냈잖아요? 그런데 중간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예상도 못 한 아들 죽이는 각본이, 그런 사태가 연출됐잖아요.
그 아들 죽이는 사태도 이제 선지자가 자기 인생으로 인수인계합니다. 인수인계하고, 그다음에 아들 몸에다가 밀착시켰어요. 완전히 5초 본드, 순간접착제에요. 딱 갖다 붙었어요. 안 떨어집니다. 세 번씩이나 아이에게 누웠다는 말은, ‘한 번 해보자. 되나 안 되나? 나는 치료자요, 넌 치료 받아야 될 환자다.’ 이러한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니고, 합류된 관계예요.
“이 아이가 죽는 이유를 알 때까지 딱 붙어서 한 몸 되도록 나는 그런 조치를 하겠습니다. 나와 이 아이를 한 몸으로 결속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딱 붙었어요. 그리고 아들은 죽었으니 아무 소리 못 하죠. 아들과 함께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입은 아직까지 안 죽고 있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죽은 아들 대신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권한을 엘리야가 왜 행사하느냐? 그것은 17절 초반에, 하나님께서 가뭄 속에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은 다 죽여도 하나님의 언약을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누구를 보호한다는 의중을 나타냅니다. “엘리야는 어떤 경우라도 이 저주 가운데라도 지켜줄게. 넌 죽으면 안 돼.”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는 언질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언질이 얼마나 특이한지요.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부정한 짐승 까마귀가 와서 아침저녁으로 먹였다는 말은, ‘하나님과 나 엘리야 사이에는 가뭄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지속적인 언약 관계가 여전하다.’라는 것을 엘리야가 알고 있어요. 심지어 엘리야가 마지막 죽을 때, 안 죽습니다. 엘리야가 나중에 엘리사 만나잖아요? 하늘에서 마차가 두 대 온 게 아니에요. 콜택시 두 대가 온 게 아니고 한 대 왔어요, 한 대.
엘리야만 죽음을 보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끝까지 가뭄 속에도 살리고, 또 죽은 자리에서 살림으로써 사르밧 과부가 아는 그러한 죽음의 질 말고,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결속된 그 상태에서의 죽음 말고, 장차 오실 주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죽음의 질에 엘리야로 하여금 거기에 합류된, 그 공간, 그 영역과 하나가 된 그러한 선지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말라기 4장에 보면 장차 엘리야가 온다고 했고,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사람들은 “엘리야가 와서 구원하나 보자.” 이 말은, 엘리야라는 존재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기에 절대로 죽지 않는 인물.
그런데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죽을 일이 없다.’가 아니라, 죽을 일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 죽을 일에서도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엘리야가 기도했던 대상, 엘리야가 의도적으로 자기 한 몸 되게 했던 그 대상인 과부의 아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차원, 그 죽음의 질에 합류되기 위해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개입해서 얼마나 자기 안이 악마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폭로 당하는, 사르밧 과부처럼 폭로 당하는, 나는 기껏 이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폭로 당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한 그 생명에 합류되어야 될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걸 위해서 성도들은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안일한 죽음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라는 특이한 죽음에 성령이 와서 합류시킬 때 그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모든 계획과 시나리오가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추진되어 왔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 살기 위해서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 고집이 끝에 가서는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소리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분노하고 화내고 있는 이 마음을 종교로 감출 길이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나 정작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죽었다가 영생 얻는 천국 백성인 것을 또다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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