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강-YouTube강의(이스라엘 소멸 예레미야애가 5:7)20250916-이 근호 목사
제505강, ‘이스라엘 소멸(소실)’. 이스라엘이 소실되었다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신약에도 이스라엘, 예수님도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하시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고, 구약은 말할 것도 없이 “주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윗이 오면 회복할 것이다.” 에스겔 35장에 쭉 나오고 구약의 맨 마지막 말라기에도 “엘리야를 보내사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 4:6).
그 모든 예언이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으로 그렇게 들리죠.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흩어진 건 맞는데 성경말씀 딱 꼬집어서 ‘이스라엘은 이젠 없어.’하고 ‘없다’는 말이 과연 성경에 나올까?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이스라엘이 만약에 없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알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부활을 알 때,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그걸 받아들일 때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다 보잖아요. 봐서 ‘십자가 그래, 죽자. 왜? 부활이라는 보너스가 있기 때문에 까짓 거 뭐 죽지.’ 이런 마음이 되어버리면 이건 자아가 소실된 거예요, 안 그러면 잠시 죽는 척을 하고 있는 겁니까? 잠시 죽는 척을 하는 거죠. 이것은 소실된 게 아니에요. 내 생각, 나라는 자체가 없어져야 되는데 노림수가 있다 하니까요.
‘그래, 이 땅에서 예수 이름으로 고난 많이 받지, 뭐. 하지만 부활이 있잖아. 부활이 있으니까 좀 참다가 잠시 죽는 척하면 깨워주겠지.’ 이런 식의 종교적인 노림수, 꼼수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럼 그 꼼수가 내 안에 여기 포함된다면 난 아주 죽을 수가 없죠. 이 꼼수 때문에. 내가 죽으면 이 꼼수도 날아가버리고 그럼 나는 희망이 없잖아요. 죽었다 치고 한 눈은 약간 뜨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아주 죽는 것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유월절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라 했죠. 바를 때 이스라엘 사람들 중 ‘우린 이제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역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하는데 양 잡고 피 바르는 약간의 수고는 네가 해줘야 되지 않느냐? 이스라엘도, 그 정도 수고는 우리가 하죠. 우리가 안 죽고 산다는데 그 정도 수고 못하겠습니까? 뭐 피 바르니까 죽음의 천사가 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맏이는 빼고 나머지는 다 죽여 버렸다. 아이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이스라엘이 소실되었습니까? 소실 안 되었죠. 그때는 이스라엘을 처음 창조할 때니까 이스라엘 거민들의 자아는 멀쩡하죠. 그 멀쩡한 것, 나중에 광야에서 다 죽어버렸어요. 꼼수 같은 것, 노림수 이런 것, 그런 것들이 남아있으면서 ‘나는 죽고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삽니다.’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남발할 수는 없지요.
예레미야애가 5장 7절에 보면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그다음 단어가 뭐냐? “없어졌”다. 없어졌다. 이 대목을 알려면 5장 1절에서 6절까지 한번 읽어봐야 돼요.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이렇게 쭉 나오면서 3절에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쫒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그다음 6절에 보면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이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튀듯이 다른 친구나 다른 이웃과 다른 옆집에 사는 사람, 한 동네 사람과 관계없이 튀듯이 부각되고 돋보이도록 그렇게 살기는 싫은 거예요. 그냥 평범하고 싶어요. 남들 사는 것처럼 같이 어울려서 같은 생각으로 살고 싶었던 겁니다.
‘놀아줘. 놀아줘. 같이 놀아줘. 나 밀쳐내지 말고. 우리 웃을 때 같이 웃고 울 때 같이 울어. 나 하나 인정해줘. 받아줘.’ 하나님의 신앙보다 인간의 육신이 우선이었습니다. 튀기 싫은 거예요. 왕따 당하니까. 특이하기도 싫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외로우면 못 산다는 것을 자기 육신의 솔직한 면이 이걸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늘 나오는 거예요. 외로워서 못 살겠다.
애굽 사람이냐 앗수르 사람이냐 묻지 않고 그냥 악수했다. 악수를 하고 양식을 얻어서 그다음에 뭐를 했다? 노림수, 배불리고자 합니다. 좀 살려줘요. 같이 살아요, 같이. 종교 치우고 같이 삽시다. 이러고 싶었던 거예요.
사실은 바로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이 점이 매순간 순간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복음을 언급해버리니까 왕따 시켰어요. 그럼 이제 스스로 돌아서 후회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복음을 굳이 말해야 됐었어?’ 본인이 본인을 자책하면서 ‘행동을 좀 조심해야 되지 않았는가. 괜히 복음 이야기하고 믿기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내가 용 써봤자 내게 돌아오는 보상, 대가가 뭔가? 봐, 아무것도 없잖아. 이게 현실이잖아.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이런 후회 같은 게 막 오는 거예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뻔히 알면서도 복음 왜 전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 외롭기 싫어요. 복음을 빙자해서 ‘좀 친구해줘. 같이 말벗해줘.’ 이런 거. 복음보다 외롭다는 것이 더 아파오는 겁니다. 인간이 잠시 외로움을 견딜 수는 있어요. 그러나 어디까지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들은 아무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우르르 “고기 잡으러 가자.” 우리 예전에 예수님과 같은 동기동생 아닌가? 26기, 15기. 15기 저희들끼리 싸우다가 막상 세월 지나고 나니까 15기끼리 또 단결해서 13기하고 서로 싸움하고. 인간은 모였다 하면 욕하면서도 한 통속 되고 다투면서도 친구 돼요. 이 인간의 본성, 그 본성에서 도대체 어느 인간이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뜻은 ‘이스라엘은 없다’에요.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나옵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양떼는 목자로부터는 흩어졌지만 양과 양 사이는 흩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흩어지지 않아요. 제자들은 그 뒤에 만나고 했어요. 같이 무서워 벌벌 떨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이고 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타인을 닮아가려는 본성으로 외로움을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저쪽을 닮아감으로써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이 내가 얻고 싶은 것과 딱 들어 맞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동질감을 느끼는 겁니다. 친화성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예요. 싸우더라도 옆에 있으면 더 정드는 것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목욕탕 가서 생면부지 사람과 떼만 밀어줘도 벌써 친구 돼요. 몇 번 만났다고 “다음에 또 만납시다.” 이러면서 아주 기분 좋게 헤어지죠. 기분 좋다, 웃는다는 말은 오늘 친구하나 사귀었다. 외롭지 않다. 인정받는다.
인간의 본능은 뭐냐? 다른 인간을 닮은꼴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인간은 싸우고 헤어져도 인간은 인간만 찾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목자는 안 찾습니다. 그러면 양을 찾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는가? 정답은 목자밖에 없습니다. 목자밖에 없을 때 목자가 나타났을 때 인간은 아주 큰 이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가 찾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주님이 이질성 있는 성도를 찾아냄으로 말미암아 그다음부터는 성도의 자리에 말씀을 집어넣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17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그러니까 성도라 할지라도 이 복음이 굉장히 낯설어요. 낯선데 주님께서 그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말씀으로 복음으로 계속 쑤시고 들어올 때 비로소 내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체가 말씀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 성도 본인에게 이질성을 느끼는 거예요.
마음 같으면 세상 친구도 같이 사귀고 싶지만 주님께서 그 나 말고 옛 나 말고 새로운 자아는 말씀과 친하게 지내게 하도록 주께서 기적적으로 베푸시는 경험 같은 것이 있을 때 누가 놀라고 누가 감사하냐? 성도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깜짝깜짝 놀라죠.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늘 깊이 있게 매일같이 느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