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때를 결정하시는 분(박윤진)

아빠와 함께 2013. 1. 27. 20:46

마가복음 11장 13-14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모든 과실은 열매를 맺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철, 수확기, 가을 이러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때가 아니라면 열매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라는 것은 특정 날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벌어시는 상태를 의미하며, 사람들은 그저 경험적으로 이것을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때는 강요할 수도 없고 제조할 수도 없는 것으로 때 앞에서 인간은 그저 객체(당하는 입장)로만 남게 됩니다.

문제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 때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마치 그 때에 벌어져야 하는 사건까지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가을이니까 곡식은 반드시 익어서 나의 배를 채워야 한다'는 요구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반대로 가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익은 곡식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고 몰아부치게 됩니다. 때와 때가 아님을 알고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인간의 지혜라고 여기는 교만은 때로 인하여 끌려다녀야 하는 객체를 우주의 질서를 읽어내는 주체자로 변태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무화과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열매를 얻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얻지 못하게 되자, 마치 큰 잘못이 있는 것 처럼 저주하십니다. 그 결과 무화과 나무는 완전히 말라버립니다.(막 11:20)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알고있다는 '때'의 개념을 공격하십니다. 과연 인간이 파악하고 있는 때와 예수님께서 몰고오시는 때가 얼마나 다르며, 그 다름으로 인해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종인 것으로 들통나게 됨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때라는 것은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는 능력자가 어떤 뜻(목적)을 염두해 두고서 벌이시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면 때를 조정할 수 없고, 목적성이 없다는 때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말 중요한 것은 때 자체가 아니라 때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뜻(의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는 능력자는 하나님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당신께서 직접 보내신 '인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인물이 벌이시는 사건으로 인하여 언약이 성취됩니다. 이로써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은 영광을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물에게 보내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며,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 6:39-40) 이렇게 오신 분에 한해서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보내심을 입은 그 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만이 "그리스도" 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행 4:12)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때를 주관하는 자요, 때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가 이때 쯤이면 익을 것이다라는 예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제한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때를 결정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바로 그 때가 무화과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을 발현해야 할 때이며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의미인 것입니다.

정하여 진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하여 진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이 벌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때를 결정합니다. 그 분은 의도적으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때를 공격하십니다. 공격할 목적으로 육신으로 잠입해 들어오셨습니다.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주받아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때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저주받아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런 처지에 성전을 짓고 재물을 사고 팔면서 거룩을 탐해보지만, 그것들은 모두 때를 결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둘러 엎어져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막 11:15)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한 인물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은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막 11:18) 뿐입니다. 왜냐하면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요구하는 어리석은 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 전부가 날아갈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때에 관하여 자신에게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은 너무도 어리석은 어떤 한 인물에 의해 판단받고 저주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폭발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여호와가 누구인지, 율법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따끔하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만약 이 게임에서 진다면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 낙인찍힌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예수라는 그 청년을 죄인으로 몰아부쳐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보기에 너무나도 미련한 어떤 인물이 마치 쓰나미처럼 때를 몰고오셨기 때문에 '예, 맞습니다. 저는 이렇게 익사되는 것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고, 단지 살기위해 허우적 거리고 발버둥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허우적 거림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고, 이제 그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때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무화과 나무처럼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의 확증을 또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확증으로 삼으셨습니다.(롬 5:8) 과연 누가 그 분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 분의 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데 목적이 있지, 하나님의 때를 가늠하고 예상하여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행동을 결의하는 자가 아니라, 그 사랑이 자신의 육체를 찟는, 살과 피가 쏟아져 내리는 사랑이기 때문에 왜 그 사랑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나를 자신의 육신으로 확인해 가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적용받는 자입니다.(살전 5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