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40214b-히7장2절(십일조)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십일조와 십자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제가 첫째시간 마지막에 뭐라 했는가 하면, 만물을 이야기했지요. 만물, 맏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 없고 만물에 관심 있다고 했어요. 요게 사건이 응어리지게 되면 그게 하나의 형체가 나오는데 그게 맏아들 같은 형체가 나온다. 그렇게 하여튼 머리에 넣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정답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왜냐 하면, 출애굽기4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그러면 ‘아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과 동일하지 않겠느냐’ ‘동일하잖아, 똑같잖아.’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맞고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구원하니까 어린양을 구원하니까 맞고 그러면 되는데 왜, 만물이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그 이스라엘 중에서 둘째, 셋째는 아무 영향도 없고, 애굽도 둘째 셋째는 관심 없어요. 하나님의 어린양 지시를 따르지 않으니까 둘째 누나가 죽었어요? 막내가 죽었습니까? 애굽에서. 맏이가 죽었고 동시에 이스라엘도 누가 살았다는 말입니까? 죽어야 될 맏이가 저쪽하고 비교해 볼 때 연관해서 보면, 여기도 맏이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애굽하면서 누가 죽었어요? 어린양이 죽지요. 어린양이 죽었는데 살기는 누가 살았습니까? 맏이가 살아났지요. 그럼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어린양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대신 죽음이 되어서 맏이가 살아났다면, 어린양은 결국은 하나님의 맏이가 되는 공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 유월절을 되풀이 한다면 계속 초점이 어디가 있어요? 먼저 태어난 것. 그러니까 먼저 태어난 걸 자꾸 강조하는 거죠.
음식 할 때 보면, 밑에 가라앉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어떤 때는 물에 뜨는 것을 국자로 건져서 그것만 따로 건져야 가치 있는 그런 것도 있지요. 약이라든지. 탕 끓일 때. 뜨는 그게 중요한 게 있지요. 뭔가 자꾸 일을 일으키면 뜨는 게 있는데, 그 뜨는 게 맏이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13장11,12절을 볼게요. 유월절은 절기인데 절기라 하는 것은 되풀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꾸 뭔가 물에 뜨는 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발생된, 구별된 어떤 것. 그것만 국자로 뜨란 말이죠. 하여튼 둘째도 필요 없고 셋째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맏이만 계속 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그 맏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이상, 출애굽이 반복되는 이상, 맏이가 계속 중요해서 마지막 신약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하시고 그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맏아들 되시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8장에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오늘날도 성도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맏이 덕분에 사는 사람. 맏이가 살았기에 덩달아 둘째 셋째도 다 같이 사는 것.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게 있어요. 시형제 결혼법이 뭐냐 하면, 맏이가 자식 없이 죽을 때는 그 형수가 그 형의 동생들하고 결혼해라, 결혼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그 맏이의 자식이 생산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난이라는 사람은 지 자식 안된다고 삐져가지고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해서 벌 받아 죽었잖아요. 하여튼 하나님은 벌 내리는 이유도 가지가지라, 내 정자주고 내 자식 되겠다고 하는데 그게 안 된다고 해서 삐져버리니까 그걸 또 쳐버리니까 어쩌란 말이에요? 십일조만 하라는 게 아니고 이제는 완전히 정자은행에서 정자 주라하는 것도 있다니까요.
첫째 없으면 둘째, 둘째 없으면 셋째 이렇게 가서 기어이 형수는 죽은 자의 자식을 비록 아버지는 죽었더라도 자식은 죽은 자의 자식이 멀쩡히 살아있도록 해라, 이리 되거든요. 사람은 아버지는 죽었더라도 아버지 대행자로 말미암아 생긴 자식은 대행자의 자식이 아니고 그 죽은 자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모든 율법의 엉켜 있는 원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어요.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어떻게, 무엇을 지키면 착합니까? 이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무슨 의를 쌓으면 그 의를 근거로 구원받습니까? 아무 그런 내용도 없어요. 오직 예수님이야기에요. 예수님에 의한 일으킨 사건의 파급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원리의 반복입니다.
십자가의 반복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는 곧 무엇의 반복이다? 모든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고, 그러니 십자가가 뜰 때마다 모든 율법도 같이 완성체로 반복해서 뜬다 말이죠. 그 뜸의 효과가 우리를 받아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맏아들 형상 때문에 맏아들 본받기 위해서 태어난 이 땅에서 성도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가면 모든 면류관을 누구한테 바쳐야 돼요? 주님한테 바쳐야 돼요. 제가 쓰는 건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다 주의 것이고 주는 하나님의 것이다. 고린도전서3장에 보면 나오듯이 그 이야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반복은 맏이, 맏아들에 대한 강조의 반복, 그 강조점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제 민수기 18장12절 봅시다. 설명할 게 있어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첫 소산 나오지요. 땅이 있어야 농산물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땅이 무슨 땅이라 했습니까? 아무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이지요.
그러면 아까 출애굽기13장에서 보았듯이 네가 유월절을 어디서 지키라고 합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못 들어가면, 못 지키는 거죠. 그럼 들어가면, 들어가면 지켜야 돼요.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땅은 그냥 내가 이스라엘이 살기위한 땅입니까? 아니면 거기서 무슨 일을 해야 될 땅입니까? 어떤 일을 해도 기념해야 될 땅이지요. 그러면 땅이라 하는 것은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기념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아까 아브라함이야기 다시 할게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꼭 출애굽 같아요. 떠났습니다. 스가랴에도 그런 내용이 나와요. 마치 애굽에서 나온 그 때라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비 본토의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고 난 뒤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그럼 아브라함이 살 땅은 어디냐, 이 땅에 없어요. 살 땅이 없어요. 살 땅이 없으면 괜히 나왔네요? 아니에요. 살 땅이 없는데 살 땅이 없다는 걸 말하면서 그래도 갈 곳이 있잖아. 라고 헤매는 가운데서 소개되고 알려지는 그 땅, 그것은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본향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본향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출애굽을 통해서 출애굽12장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돼요.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야 돼요. 무슨 일이 되풀이되고 반복되는 땅이다. 출애굽기12장,13장 입장에서는 유월절을 되풀이하는 땅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안산홍 집단도 그러할 거예요. 유월절 지킨다고 하니까. 뭐든지 제사나 절기를 되풀이하게 되면, 지금도 안동권씨 제사지내고 사당 같은 게 있잖아요. 제사지내면 제일 먼저 중요한 게 뭔 줄 알아요? 돈 문제에요. 그 손님들 비빔밥 해주려면 제사음식 다 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천주교가 미사를 계속하려면 뭐가 있어야 합니까? 신부들 먹여 살릴 돈이 들어가고 인건비 들어가요. 봉사해주는 수녀들 인건비 들어가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돈 내라 이 말이거든요. 예배시간에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돈 가지고 오라, 니가 하나님의 앞에 나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복음이 다른 게 복음이겠습니까? 교회에서. 국회의원 출판기념회할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봉투에 돈 넣어 오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제사가 되려면 땅이 있어야 되고 땅이 없는 데는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는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뭘 해야 된다는데 주안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뭘 해야 되는가, 제사지내야 되지요. 그럼 제사지내려면 제단 있어야 되지요. 제단 있고 제사장 있어야 되고, 제사지낼 제물 있어야 되고 요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그림자’라 해요. 그림자.
그림자라 하는 것을 이렇게 예를 들면 쉬워요. 하늘나라와 이 땅 사이에 얇은 천으로 돼있고 얇은 천에 조명시설이 빵빵하게 쫙 쬐인다 합시다. 안에서 뭔가 꿈지럭 꿈지럭 움직이게 되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그 그림자가 비치겠지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이건 뭐냐, 그림자에요. 울산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그림자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데 그림자 노릇하는 자신이 실체라고 여긴 겁니다. 그거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실체 노릇하는 사람이 무려 오십만 명이라, 그런데 실체는 몇 명입니까? 단 한 명이에요. 어떻게 한 명의 그림자가 하나가 아니고 오십만이 되지요? 그러니까 인물 대 인물이 아니고 기능 대 기능이죠. 오십만이 모여서 해야 될 그 기능이 한사람이 해야 될 기능이 되는 겁니다. 기능 대 기능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많더라도 오직 아브라함 자손은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들이 오십만이 모여서 해야 될 기능은 오직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땅에서는 출애굽을 되풀이하고 출애굽은 만물을, 하나님께 속했다고 고걸 드러내는 그림자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 안양에 사는 것도 그림자입니다. 우리도 갈 바가 없어요. 미국 이민 가봐야 내 몸이 거기에 따라가는 한 이 같은 이 몸이 거기가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 몸이 설치는데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고 모든 게 망가지고 어깨도 아프고 전부 다 주저앉게 돼있어요.
이번에도 대전강의에서 했지만, 사람이 시간의 무게를 우리가 벗어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신 게 아니고 시간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밤이 되고 낮이 되니 그 날이 무슨 날이라, 첫 째 날이라. 날을 창조한 거예요. 그리고 날은 양발이나 속옷 넣어두는 서랍장처럼 규격화되어 있어요. 그 규격화된 이유가 그 마지막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감하는 날이에요. 시간이 시간대로 규격화될 때 비로소 그 시간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하는 완성이에요.
우리는 그 시간을 지켜줘야 될 사람입니다. 안식일 날 제대로 지켜줘야 될 사람입니다. 그것 때문에 피조물은 만들어졌어요. 우리의 노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동, 우리는 노동덕분에 산다는 거예요. 이런 것이 뭐라 했습니까? 그림자지요. 안식일 지키는 것이 그림자, 그건 실체가 아닙니다. 주일성수 안했다고 벌 받는다, 이건 마치 주일성수 안식일이 그게 실체라고 착각한 거예요.
만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모든 제사는 출애굽을 반복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죽었던 기능과 그 덕분에 살아났던 맏아들의 기능이 합체가 돼요. 하나가 되면 그 하나 된 분이 모든 율법을 유월절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분이 어린양이 되어서 죽으시고 살아난 그 분이 그만큼 기다렸던 구약전체를 그림자로 만들게 했던 그 실체되신 분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십일조는 뭘까요? 십일조는 그림자지요. 예수님의 위상을 보여주는데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겁니다. 그럼 제일 좋은 것 되게 하는 하나님의 개입된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덕분에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나라의 속성을 이 떠나야 될 세상에서, 이 땅위에서, 맛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야 될, 그 곳을 가고 있는 움직이는 나라 곧 이스라엘입니다.
요한복음1장에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누구하나 등장하게 되면 괜히 시기심이 나요. 학급에서 담임선생님이 누구하나 특히 사랑하게 되면 그 애 빼놓고는 너머지 다는 질투의 시선을 보냅니다. 치~ 지가 뭔데. 그 다음부터 흠집 잡기에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누구 하나 특히 칭찬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삐지게 마련입니다. 나다나엘이 12제자 가운데 하나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참 신기한 일이지요. 우리 같으면 우수한 인재, 우수한 인재 뽑아서 12제자 하게 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얼마나 빛나겠습니까?
요번에 제가 서울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 분 아는 사람이 어떤 회사에 사람을 뽑는데 8명 뽑는데 5천명이 왔답니다. 자기 부서에 8명중 1명을 배당받는데 딱 2사람이 걸리는데 서울대학 나와서 부산의 로스쿨 출신자냐, 아니면 고대 대학원 나왔는데 로스쿨 출신자냐, 제일 말단 사원 뽑아요. 그런데 스펙이 그 정도입니다. 신입사원이 변호사급이에요. 그게 공기업이거든요. 대단하지요.
그러니 어느 정도로 스펙을 쌓아야 되겠습니까? 박 윤진씨 회사에 신입사원을 뽑는데 자기 교수가 추천하는 아가씨가 37인데 박사랍니다. 그런데 37살 박사를 뽑는데 뽑기가 주저된다는 거예요. 왜, 경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 아가씨는 스펙 쌓으려고 미국 갔거든요. 박사래요. 박사도 안돼요. 박사라도 안돼요.
들어갈 곳이 없다는 거예요. 8명 뽑는데 5천명 왔다니까 놀라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이야기를 박 윤진씨가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기계로 먼저 훑는다는 거예요. 기계로 어떻게 훑느냐면, 예, 아니오, 뭐 가지고 있습니까? 있으면 예, 없으면 통과, 기계로 추려내고 시작하는 거예요. 인맥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기계로 훑어내는 거예요. 미국도 그렇게 한답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거느렸던 땅입니다. 세상에 기업도 들어가기 힘들거늘 하물며 단절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건 60억대 1이에요. 이건 산을 옮기는 그 기적은 이유도 안 됩니다. 엄청난 스펙 쌓아도 소용없고요, 창세전에 기계가 가동되어야 돼요.
사랑할 자에게는 사랑해 주고 미워할 자는 미워하는 그 기계가 작동이 되면 그 작동이 되게 되면, 그걸 느끼는 사람 같으면 세상이 일체 부럽지가 안지요. 나다나엘은 어떤 스펙을 쌓았습니까? 없지요. 자, 나다나엘은 12제자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지요. 우리 생각 같으면 12제자는 우수한 인재가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절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요.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이스라엘 될 때, 나다나엘이 간사한 게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나다나엘의 품성을 추적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에서 홀로 기도할 때에 주님이 이미 보시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나다나엘이 간사한 게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철저하게 이용하시는 겁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돼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하나님이여, 무화과나무에 있는데 찾아오세요.” 이런 짓 안했다 말이죠. 나다나엘이 몰랐어요. 그러나 주님이 이미 보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이미 주께서 알고 계신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오천 대 일, 오백 대 일 관계없어요. 오만 대 일 하면 신나요. 20억대 일하면 더욱 더 신나요. 왜, 이미 지정돼 있으니까. 창세전에 이미 정해져있으니까. 내가 정해진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려내는 그 솜씨를 우리는 이 안양에 사시면서 평생을 누~~ 려, 그 짜릿함을 한 번 맛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에서 외면케 하지 않는 그 주님의 솜씨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성령의 기적이 아니면 아무도 십자가는 보지 않게 돼있어요. 십자가 마음껏 욕하라 하세요. 욕할수록 우리는 짜릿, 짜릿함을 느끼는 거예요. 너희들이 게 맛을 아냐, 갑자기 게 맛이 당기네.
십일조를 정결한 것을 드릴 때에 이건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인데, 그 그림자의 의미가 민수기18장23절에는 좀 더 확대됩니다. 요번 강의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그러면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을 약속의 땅을 기업이니까, 상속받지요. 이스라엘이 땅을 상속받지요. 레위인은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 맞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상속 받지요. 약속의 땅을.
그러면 레위인은 땅을 상속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같은 이스라엘인데. 안 받지요. 레위인들이 거의 십분의 일이에요. 그러면 십분의 일은 약속의 땅을 상속 안 받지요. 땅이 없어요. 뭐 먹고 살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땅을 가진 쪽에서 농사짓게 되면 그것도 제일 좋은 거, 사과도 제일 굵은 거, 밤도 제일 좋은 거, 귤도 제일 좋은 거, 고것만 모아서 누구한테 바친다? 하나님께 바치는 요량으로 레위인들에게 바치는 거예요.
레위인들이 그걸 받을 때 자기 자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걸 받는 거고 주는 사람도 니한테 주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주라하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입장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이 받은 땅은 어느 땅이냐, 약속의 땅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땅을 차원 높게 보여주는 게 돼요. 땅은 없데 그림자에서 나온 땅 가지고 하늘나라의 땅을 표현해 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제사고 그 제사는 어떤 제사냐, 그냥 제사가 아니고 대속의 제사, 대신 용서해 주는 제사, 레위인은 얼추 십분의 일이에요. 그들에게 십일조를 받아주게 되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제사를 드리면 그 제사를 가지고 죄를 용서하는 기능이 돼요. 자, 여기서 또 어렵습니다. 왜 제사를 지내면 죄 용서가 될까요? 뻔하게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안다는 게 함정일 수가 있거든요. 안다고 넘어갈 게 아니라 따져보자는 말이죠.
제사 지내는데 왜 죄 용서받지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내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받고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했을 때에 제사 드리는 행동은 죄에 해당될까요? 해당 안 될까요? 그러면 죄 지은 제사가 온전한 제사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지요. 그러면 온전한 제사가 아니니까 제사 드린 게 됩니까? 안 드린 게 됩니까? 제사 안 드린 게 되지요.
그러면 제사 드리면서 제사 안 드린 게 되는데 그러면 용서는 어디서 받았어요? 제사 받고 용서해 준다는데 제사 드린 적도 없는데 용서는 어디서 온 겁니까? 그게 바로 그림자 기능이죠. 제사 드림으로서 니 제사 받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의 제사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를 드리는 자가 이스라엘에서 십분의 일을 차지하지요. 맏이 차지하지요. 그럼 그 레위인들이 맏이에요? 맏이 아니에요? 맏이 티를 내는 그림자 기능을 하고 있지요. 그럼 맏이는 따로 있지요. 그럼 이스라엘 전체에 50만명이 모여서 하는 기능은 결국 누구를 이야기 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 엔진이 가동되는 겁니다.
영화관에 보면, 큰 스크린에 그림이 나오잖아요. 사진이 나온다고요. 그 사진이 어디서 나오느냐, 옛날 고려시대, 조선시대 사람들이 저 사진 어디서 나왔어요? 하면 에이, 작은 화가들이 한 이십육만오천 명 매달려가지고 1초 때마다 그 때 그 때 그림을 그려야 된다는 생각이죠. 그 당시에는 그 그림이 나오는 그 그림의 공간성에서 그 그림이 나오려면 손수 그리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은 일체 없지 않습니까? 뭔가 투여한다는 개념이 없잖아요.
그림이라 하는 것은 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그려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림이 너무 자주 바뀌니까 요건 수십 번의 요정이고 얼마나 빠른지 0.001초 만에 그림 한 장씩 만들어 내는 그런 요정이 한 오십만 명이 매달려서 그려내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렇게 생각했다니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다른 나라를 이기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제사 드려서 했다고 이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우리 말고 다른 분이 용서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열심히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십일조 내는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더러워서 십일조는 못하겠어. 나는 안식일 안 지킬 거야. 나무할 거야.”이러면 어떻게 돼요? 안식일에 나무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 버리지요.
죽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죽는 것도 기능이에요. 그러니까 안식일 하는 사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진적에 그들은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에 의해서 용서 받았기에 안 죽고 사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은 뭐를 금하겠다? “나는 그 따위 용서는 필요 없어.” 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은 겁니다.
마치 노아식구가 분명히 홍수에서 구원받았잖아요. 구원받아놓고 저주받았어요. 이게 어떻게 됩니까? 구원받는 게 좋습니까? 저주받는 게 좋습니까? 구원받아 놓고 저주받을 거 같으면 아예 구원 안 받는 게 더 나을 뻔한데 함과 가나안은 구원 받아 놓고 저주 받았어요. 뭐 때문에? 아버지가 받은 은혜를 그 은혜를 까먹고 얼레리 꼴레리 했고 수치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 축복받은 사람은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다고 그 수치스러움을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내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늘 살아나야 돼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야 돼요. 이 몸이 부끄러움이 있어야 돼요. 늘 은혜로 덮어줘야 돼요.
그런데 살다보면, 덮는 은혜는 차버리고 죄 짓는 것 가지고 어떻게 착한 일해가지고 내가 지은 죄 이상으로 착한일 많이 해서 이 죄에 대한 저주가 상쇄돼서 안 오는 방향으로 우리의 선악과 기재, 메카니즘이 마구 작동을 해요.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잖아요. 우리도 그런 생각 들지요. 그런데 그 때마다 십자가를 알게 하니까 ‘아, 또 다시 부질없는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거 정리하게 되면, 땅이 있어도 그 땅은 어떤 장차 오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나라를 보여줄 그냥 땅이에요. 그 땅도 그림자를 위한 세트장이고 거기서 제사지내는 것도, 십일조 하는 것도, 레위인들이 복장 갖춰서 예배 제사 기능하는 것도 전부 다 오실 분의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멜기세덱도 마찬가지로 다 그림자에요. 그렇게 할 때, 이미 예수님은 이미 관여했다는 게 제 이야기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속에 관여한 거예요.
그 크레용 팝이라는 가수가 춤췄던 것을 가지고 5기통 엔진 춤이라 하지요. 자동차 엔진부분에. 레이디 점핑! 헬멧 쓰고 올라가는 거 있잖아요. 이스라엘 내부로 보시면 됩니다. 굉장히 분주해요. 그래서 성도는 노는 사람이 아니고 이 땅에서 오기통 춤을 추는 크레용 팝이에요. 늘 죄짓고 십자가로 용서받는 거 깨닫고 죄 짓고 용서받는 거 깨닫고 늘 오기통 춤을 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단히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땅은 어차피 우리가 영원히 살 땅은 아니니까. 훌쩍 떠나고 싶지만 죽을 때까지는 오기통 춤을 춰야 되네. 어쩔 수 이. 레이디 점핑! 해야 된다니까요. 헬멧 쓰고.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습니다. 십일조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십일조 없는 게 아니고 율법 전체 행함의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율법에 만약에 해당되면 이것은 다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거예요. 율법 아래로 들어간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의 모독인가 하면, “나, 구원받기 싫어!”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구원 안 받을래.” 아까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경유하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나보고 죽었다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살아서 법 지킬게.” 이러면 그 노선이 어떤 노선이냐 하면, 십자가의 실타래에서 나오지 않은 그런 조끼에요. 하나님께서 뜨개질하는데 빨강색 실이 천국이라면, 파랑색에서 나오는 마귀가 또 뜨개질하고 있다고요. 마귀에서 나온 뜨개질이 뭐냐 하면,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에 법 아래에 있는 거예요. 찢어버렸는데 사람들은 또 풀 가지고 붙여요.
아까 했지요. 자꾸 제사 드리라 하는데. 제사는 항상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단체라고 주장하는 순간 교회는 돈을 요구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가 생겨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나쁘다고 보지 말고 다 우리 이야기고 ‘저게 바로 구약의 한계였구나!’ 라는 것을 아는 계기로 삼으시면 돼요. 여전히 구약 속에 살아서 십자가를 모독하기를 작심했던 자들의 그런 태도와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면 돼요. 가운 걸치고 거창하게 하는 거. 자기들이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내가 제사장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다 교인들 천국으로 모으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이다. 이리 이야기하거든요. 천국은 이미 확정됐는데, 지가 왜 하나 더 꾀이려고 하는데. 지가 왜? 지가 뭔데?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이스라엘에 누가 있다? 맏이가 있다. 예수님이 계시다. 맏이가 있지요. 그럼 맏이가 솔솔 실타래를 풉니다. 풀게 되면, 맏이가 나왔잖아요. 맏이가 무슨 일을 하는가, 자손을 만들지요. 맏이가 자손을 만들면, 그 맏이의 자손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또 맏이가 나와요. 맏아들에서 자손이 나오면 맏아들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낳는 게 돼요.
성부가 누굴 낳았어요? 성자를 낳았잖아요. 그 과정을 보여준다니까요. 아까 말한 떠오른 것만 국자로 뜨듯이 달여 놓고, 끓여놓고 뜨는 그것만 골라가듯이 계속 맏이만 골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십일조 함으로서 니가 맏이 덕분에 사는 줄 알아라, 이것들아, 니가 맏이 됨을 보여주는 기능을 해줘야 너희 속에서 맏이라는 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어린양이 곧 장차 맏이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분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게 하기 위함에서 제사를 드려야 된다 이 말이죠. 맏이에서 자손을 낳으면 또 맏이가 돼요.
이제 히브리서7장5절 봅시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이게 뭐냐 하면, 백성들의 십일조를 누가 받지요? 레위인이 받지요. 레위인 자기가 착복합니까? 안한다 했지요. 그거 누구한테 바칩니까? 그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 바치지요. 그러니까 레위인자체내에서 또 뭘 바쳐야 한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야 되고 또 레위인중에서 제사장된 쪽은 십일조를 받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럼 바치는 자와 받는 자가 같은 레위 지파 안에 같이 들어있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에서 어떤 원리적인 것이 받아지는데, 그 원리적인 것이 실타래 풀리듯이 풀리면 그게 폭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그 안에서 그 맏이 되시는 분, 맏아들 되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을 보여주는 연극배우들이 보다 많아지면서 생겨난다는 거예요. 하나는 레위와 제사장의 차이를 통해서 고 주고받는 기능이 장차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이 있던 그 기능에 반복과 연장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아브라함 허리에서 나온 자신들은 그냥 허리에서 태어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기능의 반복의 임무와 사명을 띠고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반복이 나중에 이스라엘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맏아들을 낳고 되어 진 맏아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낳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뭘 낳고요? 방금 맏아들을 낳는다 했지요. 이스라엘이 맏아들 낳고 그 맏아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얼마 전에 지난 주일날 설교했는데 엄청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 말의 뉘앙스를 들어보면, “유다 너는 이스라엘이라고 우기지.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그럼 아니라면 왜 남의 나라에서 일하지 유다에서 일하느냐, 이스라엘에서 뭘 낳고? 맏아들을 낳아야 돼요. 낳을 때 그냥 낳는 게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을 유발시켜야 돼요. 자기 백성한테 죽음을 당하는 자로 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미리 만들기 위해서 제자의 숫자를 정해졌어요. 제자가 몇 명입니까? 12명으로 정해졌습니다. 12명의 의미가 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병이어 기적가운데 등장합니다. 오병이어 기적가운데서 12제자를 통해서 12제자가 손수 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었더니만 남는 광주리가 12광주리가 남았어요. 그걸 나눠줬던 제자들은 곧 12지파와 관련된 사람이고 12지파가 되려면 어린양이 등장해야 돼요. 만물이 등장해야 돼요. 어린양이.
그 어린양이 지극히 높으신 정보를 갖고 있을 때 이 땅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한 나그네 같은 사람들도 지극히 높은 정보의 과정에 함몰이 되고 거기 안에 엮여지게 되면, 그들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 하늘의 예루살렘의 고향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12사도들이 아브라함이에요. 이 땅의 갈 바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밧모 섬에 갇혀있던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본향은 따로 있어요. 밧모 섬이 땅값 오른다고 거기에 살 사람 아닙니다. 귀양살이하고 있으니까.
나그네 삶이죠. 집사님도 마찬가지고. 그냥 오기통으로 하면서 날마다 죄짓고 용서받고 죄 짓고 용서받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맏아들의 그림자에요.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이런 말이 나오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점이 하나가 있어요. 뭐냐 하면, 자식을 낳을 때 허리에서 자식을 낳는다 했잖아요. 자식을 낳을 때 ‘아, 자식을 낳았으니까 하나님의 맏아들에 속했구나!’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물 위로 떠야 돼요. 자식이라고 다 자식이 아니다 말이죠. 노아의 자식이 다 복 받은 게 아니지요. 떠오르면 하나님이 새로운 지극히 높으신 계기가 사건이 그 사람에게 임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건이 임해야 돼요.
그래서 레위인들은 다 구원받는다. 왜? 레위인들은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아니에요. 레위인이 뭡니까? 유다도 마찬가지고. 어떤 지파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냥 기능을 했을 뿐이지 떠오른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해진 사람만 자기 아들로 떠오르게 돼있고 떠오른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맏아들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이 말이죠.
자,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장11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이 아론이라는 것은 제사장이죠. 아브라함에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에서 야곱이 나오고 야곱에서 12아들 나오지요. 아들 중에 하나가 뭐냐, 레위지요. 그럼 레위에서 누가 있습니까? 제사장 있지요. 그럼 레위 제사장은 아브라함 허리에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이 있는데 아브라함에 속했다. 끝이냐 할 때 히브리서7장은 끝이 아니다. 이들이 제사장이었다면 다른 제사장이 필요 없을 건데 여기에 새로운 아브라함 노선 말고 멜기세덱의 노선을 쫓는 새로운 제사장이 또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끼리 경쟁되겠지요.
레위에 속한 제사장과 또 하나는 뭡니까? 또 다른 제사장. 그 제사장은 뭐냐, 그 제사장은 유다지파를 말하는 게 아니고 유다지파가 제사장이 아니고 유다지파를 통해서 제사장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제사장은 한 번으로 땡이에요. 다 끝났어요. 영원한 제사장이에요. 영원한 제사장은 반복되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다른 지파, 멜기세덱의 지파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을 닮았어요. 레위지파은 아브라함을 닮았어요. 왜? 그 허리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영원한 제사장은 멜기세덱에서 나왔어요. 멜기세덱을 닮았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그래요. 그런데 제사장 아브라함이 레위지파가 무슨 역할을 한다? 십일조를 받는 역할을 하고 내부에서는 또 주는 역할, 십일조와 관련된 기능을 이 안에서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고 있었는데, 하고 있던 이 노선이 아니라는 말이죠. 아니지만, 십일조와 관련된 일은 어디로 이동되느냐 하면, 영원한 제사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십일조는 누가 받고 누가 한다? 주님이 하고 주님이 받고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서7장의 스토리입니다. 이야기의 전개입니다. 이제 풀렸지요.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땅에 깔아놓은 이 그림자 쪽으로 접근해서 “그건 아니거든” 이라고 설명하면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히브리서 자체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없어진 거예요. 우리 땅의 쪽에서 없어진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기독교사가 몇 년 됐습니까? 무려 2000년 됐잖아요. 왜들 그래요? 아직도. 아니 성령 받은 사람 없었습니까? 왜 아직도 십일조 달라하는 사람이 대다수이지요. 마귀의 기능도 해야 돼요. 지옥에 지옥을 마구 보여줘야 될 그 기능을 해야 돼요. 천국과 지옥은 간단한 거예요. 법에 매에 있으면 지옥이고, 여러분들도 법에 매여 있을 때는 순간 지옥 같아요.
주여,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얼마나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했기에 내 아이가 뒤로 엎어져서 기부스를 했나, 나 때문에 자식 저주 받았어. 저주를 풀어야 돼! 안 다쳤을 때도 저주였어요. 멀쩡할 때도 저주였고, 시험에 합격할 때도 저주였고, 축복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축복이고 나머지는 다 저주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대번에 튕겨 나오는데 그게 저주의 힘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 성경이 너무 명확해서 문제라, 성경은 융통성도 없고 봐주는 것도 없고 스펙 쌓는 것도 없고 신앙생활 50년 했습니다. 그것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예수 있으면 영생이고, 예수 없으면 저주다. 아주 단호하게 합니다.
징계요? 징계는 꼭 얻어맞아야 징계가 아니고 멀쩡해도 징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게 제대로 된 징계에요. ‘내가 이리 살면 안 돼!’ ‘이건 아니야.’ 그게 이미 아무 일 없었고 돈 한번 안 빼앗기고 다친 데도 없어도 마음이 그리 오게 되면 그 안에 이미 징계가 담겨 있는 겁니다.
매일 멀쩡하게 징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배탈 나지 마시고 그냥 멀쩡하게 살아있어서 멀쩡하게 자전거 탈 때도 그냥 오늘 자전거가 왜 이리 잘 달리지. 이런 것 전체가 자기 아들이기 때문에 진짜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늘 이렇게 평생 동안 징계 속에 있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를 잊지 말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일조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원 될 수도 없는 자, 그냥 법 지킨 거 자랑 질하는 저희를 상관치 않고 십자가를 지셨사오니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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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안양20140214b-히7장2절(십일조) - 이 근호 목사.hwp (32.0K), Down: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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