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강-YouTube강의(오류 발생 요나 3:8)20241008-이 근호 목사
제482강, ‘오류 발생’. 인간은 오류에 대해서 ‘오류가 발생했다’, ‘이것은 진실이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 것도 아니고 인간을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 본인들이 만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오류’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 인생은 뭐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그냥 생겨먹은 대로 사는 겁니다. 참 편하죠? 생긴 대로 사는 거예요. ‘저를 남자로 만든 건 실수입니다.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이런 생각은 하면 안돼요. ‘저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야지, 제가 쪼들리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저한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류라는 것, 잘못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규정해주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돼요. 인간은 오류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분명히 방금 이야기했죠. 오류에 대해서 지적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인간 입장에서 보면 이 본문이 좀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뭐든지 완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또는 하나님을 상대로 욕되게 하는 그런 피조물이 생겨나도록 하나님이 왜 방치했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그러한 자들이 등장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생각을 인간들 수준으로서는 이해하기가 곤란하죠. ‘하나님은 조금도 하자가 없는데 어떻게 만들다보니 이상한 악인을 만들었구나. 이건 하나님에게 오류 있다.’ 이렇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악인들을 만듦으로써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빛이 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 풍성해지고 악인을 통해서 그 본질을 도리어 드러내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악마, 악인, 죄인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숨어있는 본질이 그들이 있음으로써 활짝 다 공개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오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거짓 맹세가 거짓 맹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 이름을 욕되게 했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욕먹는 경우를 하나님 스스로 자처한 셈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했다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뽑아내버리든지 못 따먹도록 강제조치를 해야 되는데, 뭐 얼른 따먹을 수 있도록 항상 공개된, 노출된 상태에서 그냥 말씀만 “따먹지 말라.” 이렇게 해놓으니까 인간들에게 따먹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셈이 되죠, 결과적으로.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이 오류가 발생되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놓고 거기서 인간에게는 ‘제가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 오류입니다.’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 입장에서는 둘 사이가 잘 연결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바르기를 정말 원한다면, 오류 요소를 다 사전에 빼줘야 되고 그런 가능성을 다 없애야 되는데, 가능성은 널널하게 해놓고 “너 왜 범죄했느냐?”하고 닦달내시면 하나님 쪽에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로 막 나죠. 이 처벌은 나 혼자 감당하기 억울하다, 이런 식으로.
그 비밀,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요나서에 보면 나옵니다. 요나 4장 1절에 보면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노를 발하고 하나님을 싫어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왜 기도했냐 하면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자기가 고국에 있을 때에 자기는 분명히 ‘큰 성 니느웨 사람들한테 가서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으니까 너는 그 악독을 전하고 심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라’라는 언질을 받아서 전했는데, 그럴 때 그 언질을 받은 요나는 악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처벌하고 징벌하고 심판하겠다, 저주하겠다는 뜻으로 자기는 이해했단 말이죠.
그래서 요나가 큰 성 니느웨에 가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전했어요. 전할 때 전한 내용이 뭐냐? ‘니느웨 성은 무너진다.’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 그렇게 전했다 이 말이죠. 그렇게 전할 때에 요나 입장에서는 자기는 충실하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뜻과 자기가 전한 뜻이 일치된다고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6절부터 보면 망한다는 소문이 들어왔을 때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 뿐 아니고 3장 7절에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돌이켜서 재앙을 안 내렸어요, 10절에. 요나가 거기에 대해서 화를 벌컥 냈단 말이죠. 요나가 오류를 범한 거예요. 요나가.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뭐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면 오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바르게 하면 오류가 없는 겁니까?
아니에요. 뭐가 오류가 없는 것이냐 하면 바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진노가 혹시 돌이킬 줄을 어떻게 알겠느냐?”하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 우리는 죄를 너무나 넉넉하게 지었기 때문에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밖에 없다, 하고 납작 엎드리는 것, 그게 바로 오류가 없는 거예요.
지식으로 성경을 뭐 어떻게 다 외우고 신학적으로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고 앞뒤 논리가 맞고 이게 오류가 없는 게 아니고, 진노의 대상인 것을 알고 엎드리는 게 오류가 없는 거예요. ‘난 뭐 많이 아니까 죄인은 아니잖아.’ 이게 바로 오류라고요, 이게. 이게 하나님 뜻이 틀어지는 거예요.
요나가 오류를 발생시켰습니다. 하나님, 고국에 있을 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전하나 안 전하나 니느웨는 망하게 되어 있기에 굳이 내가 니느웨 가서 전할 필요 뭐 있느냐 해서 다시스로 도망갔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고 요나는 하나님과 자기와 잘 통하기 때문에 자기는 오류 없이 그동안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안일함. 이 안일함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 속에서 매일 올라옵니다. “하나님, 이 정도 복음 아니까 내 생각에는 오류가 없겠죠?” 그러나 하나님은 매 사건을 통해서 “엎드려. 납작 엎드려! 뭐 이거는 네가 하고 저거는 하나님이 하시고? 네가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이 진노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만이 오류가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