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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아빠와 함께 2024. 9. 4. 08:07

479-2강-YouTube강의(불평등-2 마가복음 2:5)20240903-이 근호 목사


제479-2강, ‘불평등’. 불평등이라 하면 많이 기분 나쁘죠. 왜 사람을 차별하느냐. 이게 바로 불평등이잖아요. 그래서 현대 사회는 왕정제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왕을 단두대에 모가지 날리고 생긴 국가가 이 근대국가에요. 민주주의라고 하죠.

민주주의의 특징은 절대적인 특정인에게 모든 정권, 권력을 주지 않는 사회, 그걸 민주주의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평등이죠. 프랑스 배경이기도 한 평등, 박애, 자유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그 평등사상을 이제는 인간 손으로 사람 손으로 정치적으로 제도 만들어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기치 아래 등장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입니다.

그런데 평등합니까, 평등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까? 평등하려고 애를 쓰죠. 어떤 사람에게? 중간 이하의 평등치 못한 자들이 평등을 외칩니다. 그런데 중간 이상이 되면 평등을 용납하지 않아요. 네가 감히 나하고 맞먹으려고? 용서가 안 되죠.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평등이 되어버리면 삶의 재미가 없어요. 평등이 되면. 서열화 되어 있어야 되고 불평등 되어야 사람은 목표가 의미 있게 되는 겁니다.

자식보고 “너 이번에 성적 얼마야?” “참 평등했어요, 엄마.” “말해. 스무 명 중에 몇 등이야?” “10등 했어요.” 오~ 너 참 평등하게 했구나. 장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학교에서 시험 칠 때 평등하려면, 쉬워요. 평균 100점. 모든 인간이 평균 100점을 하든지 모든 인간이 0점을 하든지 그러면 기분이 덜 나빠요. 올림픽 나와서 메달 하나도 못 딴 나라가 100개국 넘잖아요. 그러니까 그들끼리는 얼마나 평등합니까. “당신 나라 몇 개 땄는데?” “하나도 못 땄어.” “우리나라도 하나도 못 땄어.” 기분좋게 올림픽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과연 평등이냐, 불평등이냐? 세상에서는 평등을 외치지만, 현실적으로서는 불평등을 목표로 하면서 평등이라는 걸 미끼로 던지고, 될 사람들은 불평등의 여유를 누릴 사람들이 평등을 그런 식으로 외치면서 억눌러버리죠. 권력으로. 우리가 주는 이러한 혜택으로 입 다물고 가만있어. 봐라, 너희들 다 못 살지만 평등하게 내가 50만원씩 주잖아. 청년들 25만원씩 내가 주잖아. 그렇게 되죠.

그러면 성경에서는 평등일까요, 불평등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완벽하게 불평등이에요. 왜냐하면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가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가는 겁니다. 그 이유가 요한일서에 보면 나옵니다, 3장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악마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악마의 일은 뭐냐? 모든 게 평등하게 되는 거예요. 왜? 악마가 제안했으니까. 네가 신처럼 되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게 아니에요. 독재도 이런 독재 없습니다. 독재도 오직 예수님만 주가 되고 나머지는 주가 안돼요. 주의 자리에 예수님만 있어요. 주의 자리에.

아까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해서 세상을 좋게 보질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주님을 밀어냈잖아요.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없는 세계에요. 지양한다는 그러한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되 특정하게 누가 주(主)가 되는 것은 허용하지 말자고 마음을 하나로 뭉친 것이 바로 세상이고 그것이 확장되면 지옥이고 그런 겁니다. 지옥 자체는 굉장히 평등해요. 다 같이 저주받으니까 그렇게 평등합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게 되면 세상에 그런 불평등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그와 같은 취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완벽한 불평등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모든 하시는 일이. 그러면 이 불평등에 대해서 예수님 하시는 일이 그런 예가 있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3절에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절에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이거 번호표 뽑은 평등입니까, 도발적인 불평등입니까? 이건 반칙이죠. 아니, 예수님께 병 고침 받으러 온 사람이 줄을 섰는데 자기가 왜 새치기를 합니까? 멀쩡한 지붕 다 뜯어가지고 손해배상 많이 나올 거예요. 지붕 뜯어서 예수님께 바로 내릴 때에, 그럼 기다리는 사람은 뭐가 돼요? 저런 불평등! 저런 불평등이! 저런 싸가지가 있나. 저런 불평등이…. 왜 새치기를 하냐 이 말이죠. 왜?

이건 뭘 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정상적인 분이라면 이런 반칙성 행위에 대해서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지 않아야 예수님의 정의로움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죠. 지붕 뚫고 올 때, “이리 와. 이리 와. 저 뒤에 가서 서. 아니, 너희들 오늘 예매 끝났어. 내일 와.” 다른 사람 보란 듯이. “자, 봤죠? 이 예수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봤죠? 여러분들도 똑바로 보세요. 내가 이런 불평등을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죠? 저리 가. 집에 가! 중풍병?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다 아파. 저리 가. 병원 지붕을 뚫어놨으니… 다 물어 내.”

그런데 이 불평등을 주님께서 오히려 조장해요. 주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의 불평등이 여기서 스톱되는 게 아니에요. 더 큰 불평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들은 병 고치러 온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 오기 전에 병 많이 고쳐놨어요. “아이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아휴, 역시 예수님은 병 고치는 능력이 있군요. 동네방네 내가 소문내야지. 우리 예수님 짱! 병 고치는 데에 짱이다.” 전부다 병 고치는 데 대단한 분 오셨다고 내 친구, 친척 다 불러와야지, 하고 기쁨으로 감사를 늘어지게 하고 다 동네,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 지붕 뚫고 온 사람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현장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바로 서기관들이 있었어요. 서기관들이 있다는 말은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예수님 아니라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 고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공무원들이거든요, 과연 미신이 아니고 제대로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지 늘 감시하러 파견 받아 온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에요. 왜냐하면 바리새인, 사두개인 체제기 때문에 서기관들은 그들의 하수인으로서 민중들, 백성들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서 경찰서 정보계에서 오는 걸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걸렸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 병 고치는 사람은 병까지 고쳐야 되는데 병 고치는 사람 중 어떤 사람도 죄 사함을 언급하지 않았거든요. 이것은 당장 사형입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 고유권한이에요. 그건 건드리면 안돼요. 만약에 죄 사함을 해줘버리면 그 사람이 메시아가 돼요. 하나님이 된다고요. 성경에 보면 죄 사함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일반은 뭐냐? 그냥 열심히 기도해서 기도의 능력으로 병 고치는 그 정도 선에서 머물러야 돼요. 죄 사함은 기대하지도 않고요. 죄 사함 받으려고 온 사람도 없고요. 죄 사함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시기 때문에 그냥 병만 고쳐도 고맙습니다, 하고 갈 사람들이 여기 모인 겁니다.

그런데 그걸 예수님이 아시고 이걸 뛰어넘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서 “네가 죄 사함 받았느니라.” 이렇게 해버렸어요. 중풍병자도 예수님이 누군지 못 알아봤어요. 죄 사함 받아야지, 이렇게 해서 온 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죄 사함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이란 뭐냐? 일방적으로 주고 시작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죄 사함 받은 사람은 동네에 가서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겠어요? “좋겠다, 너는 죄 사함 받아서!”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말이죠. 오늘날 죄 사함 받은, 성령 받은 성도도 똑같은 대우 받습니다. “바르게나 살아. 교회 가서 말씀대로 살아. 죄 사함까지 거론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네 죄를 사해? 논리적으로 네가 하나 하나 따져서 순서 맞춰서 설명해봐!”

설명이 됩니까? 안되죠. “거봐. 설명 안 되잖아. 그러니까 주님 은혜로 잘 먹고 잘 살고 병 고치고 가정 화평하고 그 정도, 그 정도로 머물자. 착하게 살면 용서해주시겠지.” 이게 교회에서도 이 정도밖에 못할 지경이 되었어요.

진짜 여러분 죄 사함 받는다면 하늘을 날아서 하늘 구멍을 뚫을 정도로 ‘야호!’를 외칠 겁니다. 얼마나 이게 불평등입니까. 세상에 이런 기분 좋은 불평등,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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