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싫음과 좋음

아빠와 함께 2024. 9. 25. 08:36

481강-YouTube강의(싫음과 좋음 사무엘상 22:17)20240924-이 근호 목사


제481강, ‘싫음과 좋음’. 보통 싫다, 좋다는 우리 개인이 결정하죠. 개인이 결정하고 싫다, 좋다가 남긴 결과는 뭐냐? 자기 주변으로 그게 제한되어 있어요. 만약에 프로 야구를 구경하러 갔다. 나는 한화가 좋아. 롯데는 싫어. 그렇게 했는데 한화가 이겼다. 롯데가 졌다. 그럼 한화 팬들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거 좋아한다고 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멈춥니까? 아니죠.

인간이 생각하는 범위가 있어요. 거리가 있다고요. 그 한계 거리는 뭐냐? 내가 좋은 것과 내가 싫은 것에서 조건으로 금 그어놓은 그 영역이 보통 인간들이 평생 달고 가는 범주입니다. 일종에 자신이 남긴 그림자라고 할 수 있어요. 백색 그림자. 하얀 그림자. 자기 삶의 환경.

거기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고요. 남북통일 안 되었다고 울고불고 그런 건 잘 없죠. 그런 사람 있습니다만. 남북통일 안 된다고 찔찔 울고 이런 거 없죠. 그처럼 인간의 생각은 한계적이고 제한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철딱서니 없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전체를 볼 줄 모르고 자기 부분만 알면서 거기에 자기 목을 달죠.

그런데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옳고 싫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가 성경을 통해 나옵니다. 사무엘상 22장 17절,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자, 이 관계는 뭐냐? 사회성 관계까지 발전합니다. 나는 내가 소박하게 나 좋아하는 것, 텃밭에 고추 심고 이렇게 살고 싶은데 갑자기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왕이 내 영역에 와서 지시를 해요. 지시를 한다고요. 지시하게 되면 그건 왕이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요. 북한의 김정은이 신하들에게 지시할 때 신하들이 좋아합니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내가 소박하게 나의 영역에서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야.’라고 했는데 이 사회라는 것이 그냥 방치하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박탈할 수 있는 자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명령해버리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남자한테 뭐냐? 군에 가라는 거예요. “너 군에 와.” “싫어요.” 아니, 군을 누가 좋아합니까? 싫죠. 모든 자유가 박탈되는데 싫죠. 나다움이 날아가는데요. ‘싫어요’ 하면 문제 해결됩니까? 안되죠.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2장 18절,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이방 사람입니다)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자, 어떻습니까? 도엑 입장에서는 무엇이 좋은 거예요? 왕의 눈에 들면, 왕의 마음에 들면 자기 큰 출세의 신작로가 확 열리는 거예요. 그 찬스를 왜 놓쳐요? 그 찬스를 왜 놓칩니까? 놓칠 필요가 없죠. 은근히 노렸고 은근히 원했던 바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야 될 것은 뭐냐? 옳은 것은 진리고 나쁜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이것이 얼마나 일방적 생각이냐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더라도 나보다 더 힘이 센 쪽이 와서 강요해버리면 진리라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도 억지로 하는 것이 나한테 지시하는 사람의 진리 달성이 돼버려요. 참 직장 생활하는 게 이렇게 힘든 겁니다. 고객이 왕이라고? 왕이 왜 그리 많은지. 도대체 누구 비위를 맞춰야 돼요?

이렇게 한 게 사울 왕이거든요. 사울 왕이 이렇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한 거예요. 왜?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 게 자기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일반 제사장들은 다윗을 죽이는 건 싫어하는 일이고 사울이 죽는 게 좋아하는 일이에요. 이해관계가 같지 않습니다.

여기에 이제 중보자 등장하죠. 선지자.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역시 사울 왕과 관계해서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당신이 제사한다고 해서 당신보다 더 높은 하나님께서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지금 제사 드린 거예요?”라고 지금 질책하면서 지적하면서 지금 묻는 거예요. 답변해보라 이 말입니다. “당신 좋아하는 거 말고. 당신이 제사 드려서 그 덕으로 승리해서 백성들이 ‘왕이여, 왕 최고다’ 그걸 당신이 좋아합니까, 아니면 당신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당신이 좋아합니까?” 묻는 거예요.

맨날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 앞에 지적받아야 될 그 질문을 지금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는 겁니다. “당신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예요? 당신 좋아하는 게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과 합치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게 따로 있습니까?” 우리한테 묻는 거예요.

답변은 나오죠.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그 말씀이 나오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인간은 ‘내가’ 내가,가 나와요. 자꾸, 내가. 나 건드리지 말라고. 나는 소중하니까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맨날 24시간 나를 지키는 것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그게 자기 좋아하는 거죠.

그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22절 나머지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울 당신은 자기 좋아하는 것을 보류하고 하나님이 뭘 좋아할까 들을 기회를, 그 빈 공간을 당신은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당신 짤렸어요. 당신은 있어봐야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만 앞으로 계속 할 거니까 당신 짤렸어요.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에요. 머리 검은 짐승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그럼 염색하면 괜찮겠어요? 인간은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바뀌지 않는 거예요. 죽어 마땅하지, ‘앞으로 잘 할게요’ 그런 건 본인에게도 거짓말이고 하나님도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이렇게 인간의 좋아함과 하나님의 좋아함이 극대 극으로 완전히 대립되는 걸 보여줬다면 신약에서도 한 번 찾아보죠. 대립된 것. 누가복음 20장 46절. 이걸 보는 이유가 우리 마음이 역시 여기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내 마음 다시 살펴보는 차원에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뭘 좋아하는가, 뭘 싫어하는가 돌아보는 기회가 되죠.

누가복음 20장 4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서기관들을 삼가라’ 하면서 나오는 말씀, 45절,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되어 있어요.

노림수가 있다는 거예요. 행동 하나하나, 설교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태도 하나하나에 노림수가 있다는 거예요. 노림수가. 노림수가 있는데 무식하고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쏙쏙 빼먹기 위해 속임수 쓰는 노동을 하는 자들이 소위 높은 자리, 상대적으로 계급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들이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휴, 목사님 저는 안 그렇습니다.’ 이러는데 본인이 높은 자리에 안 들어가서 그래요. 높은 자리가 그걸 요구해요. 자꾸 ‘나만 착하면 되지’ 하는데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내쳐버려요. ‘너 우리하고 생각 안 같으면 넌 나가. 우리 모임, 우리 공동체에서 당신 제거할 거야. 놀아도 같이 한 패가 되어야지, 당신 혼자 해버리면 우리는 완전히 우리 본색 들통 나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 못 받아줘. 당신, 낮은 자리로 돌아가.’

그게 사회 구조입니다. 그게 사회 구조에요. 나 혼자 바르게, 그게 안 된다니까요. 아휴 참. 나 혼자 무슨 바르게가 돼요? 이 사회 자체가 지옥인데, 나 혼자 바르게 한다고 뭐 지옥이 천국 되는 줄 알아요? 안돼요.

따라서 서기관에게 하는 이 지적, 그리고 아까 도엑이 결국 제사장들 다 죽였잖아요. 이 사회, 우리가 좋다고 하는 이 사회 원리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 사회입니다. 그 사회에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주께서 그때그때 이 말씀 속에서 상황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죄라고 발견한 자체가 이미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과 우리 자아와 연계시켜주는 거예요. 죄 사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연계시켜 준 지옥같은 상황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안 그러면 자기 혼자 깨끗한 척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상황 하나하나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허접한 우리를 죽을 때까지 활용해주신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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