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와 미가
2024년 9월 1일 예레미야 26:16-19
(26:16)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니라
(26:17) 때에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 말하여 가로되
(26:18)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는 계속 보내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더욱 증가시키기 위함입니다. 선지자는 한 두 번 보낸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돌아설 자들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간들의 죄는 세밀하고 깊이 내부에 박혀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힘으로 자기 죄에서 벗어날 자들이 아닙니다.
도무지 인간들은 자신들의 죄를 모릅니다. 본심도 모릅니다. 인간들이 아는 것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해서 그때그때 살아남기 위해 모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내가 살아있음’ 그것으로 모든 문제점이 다 해결된 것을 목표로 해서 행동합니다. 즉 살아남은 자가 내세우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버티기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외치는 내용은 “너희들은 망한다”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싶어도 믿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육신과 마음과 안 망하는 쪽으로 작동하는 바이기에 이 성향을 멈추거나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그냥 지켜보자는 식입니다.
“잘못 했습니다. 회개합니다”가 아니라 “선지자 당신 말을 귀담아 두고서 과연 추이가 성취되는 양상이 보이는지 여부를 우리 쪽에서 점검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과연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구경이고 관람이지요. 예의도 배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점을 그들은 자신이 포기하면서까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는 겁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독자성’입니다. 즉 인간은 아담이 악마로부터 부추김을 당했을 때부터 한결같이 독자성을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여타의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은 따먹지’라는 하나님의 당부에 의해서 처음에 아담과 하와는 하등의 불만을 갖고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악마가 접근하면서 ‘허락되지 않는 나무 과실’에 대한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지 말랬지만 나는 해낼 수 있다’가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독자성(獨自性)입니다. 독립해서, 혹은 자립적으로 존재하고 싶었던 겁니다. ’나의 삶‘을 ’나만의 삶‘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겁니다.
오늘날 인간들에 있어 이런 성품은 너무나도 당연한 겁니다. 타인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도 나의 독자성은 근거로 당당한 자신만의 소리를 내고 싶은 겁니다. 이는 내 주위에 궁극적으로 ’아무도 없음‘을 합당하게 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악마는 마치 인간을 생각해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주도권이 다 주어진 것처럼 해놓고서는 조종대상으로 전환시켜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악마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 자신이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고 그 성질을 그대로 인간 내부에 심어놓은 겁니다. 이점을 하나님께서도 너무 잘 아십니다. 인간이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한다는 점을 아십니다. 첫째, 인간은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한다. 둘째는 이 시도의 최종점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복의 조건도 있지만 문제는 저주의 조건도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이 상반된 결과를 인간에게 제시하므로서 인간들은 저주받지 않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인간들의 독자성은 더욱 더 강화됩니다.
“하나님, 이 정도로 제대로 하면 되겠지요? 나름대로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로서 최선인데 따라서 준비된 복은 저에게 주실 줄 있지요?”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독자성을 포기못함을 아시고 복과 저주의 기준을 더욱 더 강화하십니다. 선지자를 계속 투입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안일하게 잘지켰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요건을 갖춘 율법적 요구사항을 추가적인 선지자의 투입으로 해서 안겨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미가 선지자 이후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온 겁니다. 미가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미 1:3-5) ‘너희 이스라엘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들은 그때 당시 유다 땅은 안 망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상 숭배에 열중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노력으로 고쳐지는 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를 놓고 죽이자는 자와 살려두자는 쪽이 각각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다 나라가 안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누가복음 19:9-10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인간들 스스로 자신이 구원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충실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장하다고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 내밈’이며 ‘건져 내심’입니다. 죄인 쪽에서 주님쪽으로 손을 내미는 식이 아니라 주님쪽에서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들은 자신이 지닌 성실상 가만있지 않고 뭔가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모든 것은 역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시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나 유대민족에서 늘 언급하면서 멸망을 선언하는 이유는 한결같이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이 어떤 식이냐 하면 인간의 독자성에 바탕을 둔 신입니다. 즉 하나님쪽에서 어떤 지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 자신들이 알아서 복과 저주의 법칙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즉 “이런 식으로 나름 노력했으니 신께서는 복 주셔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독자성을 중도로 사라질 리가 만무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신약에 친히 ‘잃어버린 양’을 찾는 식으로 구원하는지 그 이유가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해서 마련되어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심이 우리가 알아서 고치지 않음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8강-예레미야 26장 16~19절(예레미야와 미가)24090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6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1079페이지입니다.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니라, 때에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 말하여 가로되,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 백성의 대응은 ‘없애버리자. 죽여버리자’라고 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 자체가 처음 아담에게 있어서 아담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라는 말씀이 자기에게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습니다. 선악과 따먹든 안 따먹든 자기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서 만족했지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끼어드냐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가 인간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했지요. 찾아왔을 때, 악마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격려하고 독려해서 ‘지금 네가 있는 형편보다 더 위대해질 수 있는데, 너는 왜 그저 하나님만으로 족하다고 하고 거기에 머무느냐. 너 스스로의 가치를 개발하고 네가 독자적으로 자립하고 독립해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느냐’라는 생각을 강하게 주입하면서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 하나님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거니까, 이제 네가 알았으면 그걸 따먹어서 너도 신처럼 살아갈 기회가 있다고 악마가 부추겼죠.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든 인간 속에는 이러한 마귀가 수시로 들락날락해요. 오지 말라고 해서 안 들어올 마귀가 아니에요. 귀신도 마찬가지고.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하면서 늘 우리를 부추깁니다. ‘독립해서 살아라. 하나님 잔소리 언제까지 들을래. 지키지도 못할 말씀 자꾸 듣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끔 듣든지 가끔 보든지 하고 나머지는 중점적으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전심전력을 다해라’라고 부추기죠.
그런 것이 매일 같이 확 밀려오잖아요. 그럴 때 딱 한 번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자립해서 내 가치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다음이 뭐지?’ 그다음이 뭔가를 생각해 봐야 하죠. 혼자 대단하게 되면 그걸 수학에서 단수(單數)라고 해요. ‘1, 3, 5, 7,...’같은 홀수죠. 그런데 홀수보다 더 센 것이 있어요. 그건 자기와 자기 외에는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는 그런 숫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절대적인 하나예요. 절대적 하나. 만약에 숫자 ‘4’ 같으면 ‘2’와 ‘2’로 나눠질 수 있잖아요. 숫자 ‘8’ 같으면 ‘6’과 ‘2’로 나눠질 수 있고. 그러나 ‘17’ 같은 것은 나뉘지 않아요. ‘23’도 나눠지지 않습니다. 이게 소수(Prime Number)입니다. 이처럼 그러한 숫자가 수학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했죠. ‘저게 뭐지? 저런 똑같은 것이 언제쯤 생기지?’ 그때부터 수학자들은 도전할 의지가 있는 거예요.
인간은 어떻게 변해야 느냐 하면, 내가 지금보다 더 독자적으로, 더 홀로 살 수 있는 쪽이 계속 우리에게 자극이 돼요. 얼추 대충 살아가는 것은 자극이 안 돼요. 내가 최고가 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이겁니다. ‘혼자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입각해서 살아라.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라’를 요구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죠. 틀린 말이 아닌데, 이미 우리가 마귀에 물들었고 귀신과 더불어 함께 있는 우리에게는 그런 말이 굉장히 부담됩니다. 우리 본성상, 우리 본질과 본성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본성상 홀로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어떤 사는 보람을 줘요. 그런데 누가 같이 살게 되면, 잔소리를 듣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짜증이 확 올라옵니다. 그냥 혼자있고 싶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전달되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그러면 너희에게 구원이 있으리라”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네가 말씀대로 살면 복을 얻으리라”라고 율법을 주면서 ‘복’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뭘 주냐 하면, 만약에 율법대로 못 살면 너는 저주받을 각오를 하라고 주어지는 거예요.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맘에 들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복 받고 안 망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겠지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바르게 살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지키지 못할 말씀을 추가로 계속해서 주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나쁜 말을 하지 못하는 자들의 찐~~한 응어리, 절대 남에게 나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위선(僞善), 주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들통을 내버리죠. 그러니까 나쁜 말을 못 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열심히 했잖아요. 나름대로 지키려고 애를 썼잖아요.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말씀 지킨 나를 독자적으로 홀로 살게 하려는 거예요.
‘말씀 지켰으니까, 주님이 시킨 대로 살았으니까, 이제 나 혼자 살아도 되죠?’라고 사람들이 정리 정돈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어떤 말씀이 준비 되어있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준비되어 있거든요. 예수님 자체가 구원이라는 뜻이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낸다” 죄에서. 자기 백성을 그냥 건져내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다가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죄 속에서 자기 백성만 골라내는 분이 예수예요. 구원자입니다. 구원할 때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죄 속에 있잖아요. 있으니까 악수하듯이 손을 내밀어서 구원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건져내요. 건져낸다고요. 이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모독입니다. 주님 쪽에서 손을 내밀어 건져준다는 말은 네 쪽에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네가 내민 손을 내가 받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 인간을 잡아채듯이 건져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만약에 옆에 있는 사람이 구원받고 나는 아무 손이 안 왔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쪽은 구원해 주고 나는 구원 못 받고. 그러면 기분 되게 나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내가 내민 손을 받지 않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하게 하느냐 하면, ‘나는 성질나서 구원 안 받을래’라는 태도를 갖게 만들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을 건져냅니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게 만들죠. 그 방법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방인에게 손을 내미는 방식을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했습니다. 백부장도 그렇게 했고, 이방인 중에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렇게 했고, 저는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소경들, 그런 자들을 그런 식으로 건져냈습니다.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이방인은 아니지만 누가복음 19장 9절에 제가 직접 가본 여리고, 뽕나무까지 구경하고 왔던 그 여리고에 살았던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삭개오가 인지하는 것은 구원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삭개오는 뭐냐. 나는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죠.
주님과 눈을 마주치면서 삭개오가 느낀 것은, ‘끝났어. 끝났어. 나 같은 인간은 구원되면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어’ 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집에 가겠다고 주님께서 이야기했고, 주님께서 너희 집에 임재함으로써“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라고 했어요. 삭개오가 예수님께 구원해달라고 사정사정한 적이 없어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천국 가는 길은 인간으로는 갈 수 없음을 주님이 구원해 줄 때 비로소 발견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줄 때 비로소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본문에 유대인들은 여전히 뭘 생각하느냐 하면 선지자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등장한 선지자가 누구냐. 미가 선지자예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할 때, 예레미야 죽이지 말자고 하면서 옛날 미가 선지자도 히스기야 때, 바른 소리를 했는데 히스기야가 회의하고 나서 살려줬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레미야가 혹시 바른 소리했을 때, 우리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반대의견을 낸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미가 선지자로 모자랐단 말인가’라는 부분이죠. 선지자가 주어졌잖아요. 그러면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구원과 메시아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 뒤에 굳이 예레미야가 있을 이유가 없고 그 뒤에 있는 다른 선지자가 있을 이유가 없죠. 누구 때문에 많은 사람을 보냅니까? 그 시대는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던 시대잖아요.
지역별로 선지자 보낸 것이 아니고, 지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대표로 선 사람이 예레미야고, 에스겔이고, 이사야고, 그런 사람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선지자는 몇 명만 필요하냐 하면, 단 한 명만 필요하잖아요. 요나 보내고, 여기 선지자들 보면 스바냐, 스가랴, 뭐 많이 보내죠. 왜 미가라는 선지자를 보내놓고, 또 예레미야 선지자를 왜 보내시는가.
그것은 바로 미가라는 선지자를 보냈을 때, 그것이 율법적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도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바른 소리 하게 되면 그걸 안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키려고 애를 써요. 왜냐 하면, 그래야 자기가 망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말 안 들으면 저주받으니까.
말을 들으면 복을 따내니까. 복 따낼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그래도 자기 본심을 몰라요. 인간은 복을 받겠다고 하는 순간, 아직도 자기 자신이 그토록 악한 죄인인 것을 절대로 인정 안 합니다. 내가 구원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 때까지,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고, 보내고, 마지막에는 세례요한까지 보냅니다. 그리고 더 마지막에는 예수님까지 보내죠.
기어이 예수님을 죽게 만듭니다. 비로소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나의 본심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해도 상관없이 나의 본심은, 나 홀로 살려고 하는 이 본심은 내가 스스로 내 속에서 끄집어낼 수 없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끄집어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신약에 성령을 받게 되면 압니다. 나는 나를 처리할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면 곱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것도 안 돼요. 우리는 본인을 사라지게 할 수 없어요. 이게 인간이 갖고 있던 악마와 결탁한 이후에 오는 딜레마입니다. 내가 어떻게 처분이 안 됩니다. 나라는 괴물이 내 손으로 처리가 안 된다니까요. 틈만 나면 혼자 살려고 해요. 잔소리 다 끊고 혼자 살려고 해요. 그럼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해 주시느냐. 이 문제거든요.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에게 전화할 때 휴대폰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겁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소리샘으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처음에 그 이야기 들을 때, 소리샘에서 그동안 전화 통화 안 되는 것을 다 모으는 줄 알았어요. 그 문구 자체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말 하고 싶은 것은 소리샘에 담아두게 되면, 소리샘에서 나중에 전달을 해준다는 그런 의미로 제가 이해를 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지금 다른 사람과 통화 중이기 때문에 통화가 안 된다는 뜻을 둘러둘러 친절하게 소개를 해주는 겁니다. 물론 소리샘을 열어서 다시 듣기를 할 수 있는데, 소리샘에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죠. 보통은 그냥 끊어버리죠. 인간의 어떤 소리도 인간이 안 듣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해서 인간을 구원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서 건지는 방법이에요. 건짐을 받을 때 인간 쪽에서 손을 내미는 경우가 되면 이건 건짐이 안 됩니다. 건짐이 되질 않아요. 인간이 손을 내밀 때는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구원된다’라는 자기 생각을 철저하게 갖추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 손을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성경 보고, 자기가 알아서 구원 체계, 조직신학 다 알고, 구원론 다 알아서 ‘하나님, 제 손 잡아주이소’라고 하는 이런 거. 갑자기 현철이 생각나네요. 내 손 한번 잡아주이소. 나훈아도 그런 이야기 했지요. ‘어디 손 한 번 잡아봅시다’ 안 잡아줘요. “네가 왜 나대느냐?”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좋습니다.
인간은 갈 수 없는 곳, 인간은 알 수 없는 곳으로 주께서 계속해서 이끄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응답하지 않는 방법으로 응답해 버리는 거예요. 주께 통화를 하는데 계속 통화를 안 받아요. 그러면 인간은 ‘아이~~그러면 그냥 나 혼자 살게. 구원받는 것도 귀찮아 죽겠다. 나 혼자 살게’라고 하면 이제 주님은 바이바이(Bye~Bye~)죠. 끝났어요.
“그래. 그렇지. 그게 너의 본심이야. 너는 원래 너 혼자 살고 싶었고 네가 구원받고 천국 가도 너는 너 혼자 살 사람이야” 천국에서 안 받아주죠. 주님께서는 미가를 보내고 예레미야를 보냅니다. 미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짧게 잠시 볼 필요가 있어요. 미가 1장 3~5절에 보면 미가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믿을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 잘할게요.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나왔다고요. “너는 멸망한다”라고 할 때 반응이 ‘그러면 손 한번 잡아주이소’라는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또 이야기해요. ‘너 멸망 당한다’ 멸망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그냥 멸망하는 줄 알고 멸망 당하면 됩니다. 이게 예레미야가 요구했던 겁니다.
“너희들 제발~~ 멸망하면 구원된다”라는 이게 예레미야의 이야기예요. 미가 선지자가 한 말을 읽어보겠습니다. 미가 1장 3~5절에,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그러니까 야곱의 허물이 뭐냐고 하면서 우상숭배 했다고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자꾸 우상을 섬길수 있는 기회를 줘요. 하나님 참 무섭죠.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께는 대충 섬기고, 형식적으로 섬기고, 본심은 우상에게 빠지도록 주께서 우상 섬기는 분위기를 주께서 허락해요. 그러면 우상이 뭐냐. 우상의 특징은 잔소리가 없어요.
잔소리가 없는 대신 뭐가 있느냐. 내가 바친 만큼 복을 받는 것이 우상입니다. 왜 언약이 없으니까. 하나님 쪽에서의 계시가 없으니까 내 쪽에서 계시를 만드는 것이 뭐다?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 섬기는 사람은 높은 산에서 했는데요, 높은 산에 있는 기도원에서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 기도 내용이 뭐냐. 그 기도 내용은 내가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내 쪽에서 손을 내미는 거예요. ‘하나님 성경이 이렇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구원해 주세요. 우리 가정에 복 주세요. 우리 가정에 이렇게 어려운 일 있는데 해결해 주세요’라고 자꾸 외치고 외치고 또 외치는 일을 바로 산 위에서 했는데, 그것을 산당(山堂)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산 위에서 하는 그게 우상이에요. 인간이 자기가 아프고요, 신세가 어려우면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에요.
왜? 혼자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없으니까, 그 에너지, 복을 달라는 거예요. 자기가 혼자 살 수 있도록, 나만 빛날 수 있도록, 내가 스스로 사는 내 즐거움을,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데가 없을 때는 빌어야죠. 하나님 말씀 같은 것은 들어오지도 않아요. 내가 기도해서 얻은 그 복으로, 내 힘으로, 내 잘난 맛에 살고 싶은 겁니다.
미가가 이렇게 할 때, 망한다는 이야기할 때 당연히 안 듣죠. 미가에 그다음 내용들은 너무나 참담한 내용들이에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미가 3장 5~8절에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그 당시에 대중들이 선지자를 원했고 선지자는 대중들의 요구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인간의 우상 섬기는 본성, 스스로 혼자 잘났다는 재미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그런 목사들, 성직자들로 쫙 깔렸었어요. 그들이 또 부흥되고 돈이 거기에 많이 모이고,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것을 미가가 저주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던 겁니다. 그래도 안 망했잖아요. 안 망했어요. 안 망하니까, ‘거봐. 미가 선지자 계시 아니네. 구라네. 안 망했잖아. 봐라’ 그다음에 주어진 것이 예레미야가 와서 망한다고 했어요. 예레미야가 망한다고 했을 때, 거짓 선지자가 와서 방어를 해줘요. ‘우리 안 망합니다. 잠시 힘들겠지만 결국 돌아옵니다. 3년 만에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말씀에 대해서 안일한 태도를 갖는지, 이걸 우리가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인생 과정속에서 울어도 안 돼,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교회 출석해도 안 돼, 성경 공부해도 안 돼, 그런 때가 오시거든, 그건 진짜 땡잡은 거예요.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 피 묻은 손이 나의 돈보다, 나의 명예보다, 나의 남은 인생보다, 이 피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때 여러분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온 거예요.
주께서 피 묻은 손으로 여러분을 잡아버리면 여러분은 이제 핏속에 독자적이 아니라 주의 피와 함께 더불어 살게 되는 영원히 구원받는 백성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설칠 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사라질 때 비로소 주님이 손 내밀고 왔었음을, 왜 그제야 발견하는지, 자꾸 내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니까 나만 보이지만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일찌감치 다 이루었다는 그 죄사함의 용서의 음성이 이제는 우리를 지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