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부활)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그래서 짐승의 밥 되기를 먼저 다투었다는 그것은 신앙에 하등 도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신앙을 막아요. 왜냐하면 평소에 그런 일이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유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20억? 쳇,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내가 이 지옥에서 20억 가지고 더 살란 말인가, 크루즈 여행하면서? 그런데 가고는 싶네? 아빠, 나 변호사 됐어. 변호사? 그게 뭐가 중요하냐? 예수 믿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데 촌 동네에 누구 둘째 아들 변호사 됐다 하면, 기분은 좋네? 내가 키운 보람 있다.
이건 일상이에요. 일상. 우리가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 안하나 주께서 그렇게 언약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이룸의 한 요소로서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일어난 어떤 사건 같은 것은 내 안에 있는 순수사건, 인간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예상할 수 없는 순수사건을 위해서 일상의 많은 사건들이 순수사건과 연관해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쯤 내 목숨 갑니까? 뭐 순교할까요? 그것도 욕심이에요. 탐욕이에요. 시험 드는 이야기에요. 괜히 죽을 때 외제차 받쳐 죽으려고. 그냥 트럭에 받쳐 죽으면 되지. 자기가 폼 나려고. 이거 자기 의입니다.
첫째 부활, 이것은 한 몸이 부활됨으로써 상관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있는 일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고 어떤 특검법이 통과되고 그런 것들은 성도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런 것들과는 격리가 되고요. 이 몸은 이미 유령성으로 예수 안에 합세되었기 때문에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에 관계없는데요.
그다음 둘째 부활과 둘째 사망. 서로의 다른 현실성이 노골적으로 다 정리정돈, 마감되는 거예요. 둘째 부활, 천국의 영광 속에 둘째 부활. 주님이 마련한 둘째 부활이죠. 여기 둘째 사망은 지옥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라 할 때,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으로 이겁니다. 첫째 부활-첫째 사망이 한 몸으로 같이 있다면, 그것이 확정됨으로써 동시에 무엇도 확정되느냐? 천국과 지옥도 확정됩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보고 “천국 있으면 보여줘. 있으면 내가 믿을게.” 할 때,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나를 봐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거든.” 끝. 끝이에요. “나는 죄밖에 지을 게 없거든.” 끝.
나에게 일어난 그 언약적 고정성이 결국은 모든 인간이 죽어도 천국과 부활로 다시 살아나서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으로 갈라짐을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유령적인 시간성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이미 마음껏 시간의 끝, 역사의 끝까지 여러분의 작은 몸으로 다 표현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세기 때문에 모세는 구경만 하고 다시 도로 주님 품으로 갑니다. 그래서 모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시체 찾는 것은 인간의 단일 현실에서 찾지, 모세의 본질은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고 신명기 18장에 보면 같은 말이 나오는데 그것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같이 적용되어 있는데 신명기 18장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선지자 되었고 오실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 이후에 우리가 오늘날 이 시대,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로서 모세 같은 유령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마음껏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끄시는 대로 허락하신 대로 두 개의 현실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