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증거 제작소

아빠와 함께 2024. 5. 28. 22:26

대전-신명기(22강)신10:1(증거 제작소)20240527(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0장 1~3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1)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2) 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3)” 라고 돼 있죠.

처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것은 궤가 없어요, 궤는 상자죠, 상자. 궤(상자) 없는 돌판 둘, 두 돌판을 주었습니다. 궤 없는 돌판이니까 느낌이 어떻습니까? 이 돌판은 뭔가 수월하게 깨뜨려질 용도로 애초에 모세 손에 쥐어졌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쉽게 돌판을 양손에 들고 모세의 분노,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그 상황을 보고 그냥 수월하게 던지기만 해도 되는, 뭐 상자 열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들고 있는 돌판을 던져도 쉽게 깨어져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언약이 끊어졌음을 알릴 수 있는 방식으로 궤 없는 두 돌판을 준 겁니다.

그 말은 모세가 이미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내용에 대해서 글자만 본 게 아니고, 그 내용에 대해서 모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네가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마라” 할 때에 그 내용에 대해서 모세가 이미 익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십계명 1계명, 2계명부터 봅시다. 출애굽기 20장에도 나오는데 신명기를 봅시다.

신명기 5장 7절부터 십계명 나오거든요. 나올 때, 애초에 1계명부터 뭐라고 하냐 하면, “나 외에 신들을 네게 있게 말라”고 되어 있죠. 그러니까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어떤 짓을 하고 있다는 것,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 십계명 안에 담긴 거예요.

자,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걸 지키라고 준 계명이 아니라, 십계명의 출발점이 인간들이 평소에 하는 짓,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는 그 짓, 그 짓의 내용이 십계명 속에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는 요소로써 출발이 되었다는 거예요. 하는 짓거리 보니까 내가 이런 계명을 필히 보내야 되겠다. 그래서 차이남을 보여주겠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뉘앙스가 어떤가요? 너희들이 지금 섬기고 있는 것은 전부다 나 외에 다른 신에 속한다는 뜻이에요, 섬기고 있는 모든 신은. 그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하거든요, 우상. 그런데 우상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2계명에도 계속 나오지만 “형상 만들지 말라” 형상 만들지 말라는 게 2계명이잖아요.

2계명부터 1계명으로 거꾸로 추적하면 이렇게 되죠. 형상 만드는 것이 뭐냐? 바로 다른 신에 해당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형상을 왜 만드는가? 형상을 왜 만드느냐 하면 바로, 신의 증거, 신의 활동성, 신의 활동에 관한 증거를 통해서 신에게 접근해 나가는 것, 신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러면 이 증거를 왜 필요로 하느냐? 증거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도마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나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증거가 믿을 만 한 경우에는,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한 쪽에 나는 그 신을 믿겠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옳은 신이냐, 그른 신이냐 판단하는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다? 바로 인간에게 있다는 거죠.

내가 그 증거 보고 차후에 판단하겠다, 증거 보고..천국이 있냐? 증거 대봐라! 하나님 있어? 증거 대봐라. 내가 믿지 마라 해도 믿어줄게. 증거 대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목사가 강단에서 ‘여러분들이 말씀대로 살면 복 받습니다. 이런 이런 자들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할 때에 ‘아, 복 받는 것이 증거가 되는구나. 그러면, 그 다음부터 교회에 교인들이 와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남은 일이 이제 뭡니까?

내가 신자 맞고 내가 하나님께 복 받고 있는 증거를 본인 선에서 그걸 찾아내는 일이 남아있는 거죠. 어떻게 투자를 했는데 잘 되었다든지, 돈이 잘 벌린다든지, 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온 집안이 건강하다든지, 대상포진도 안 걸리고, 60대에도 잘 늙어간다든지, 늙을 때 곱게, 튼튼하게, 건강하면서 자던 잠에 ’나 간다‘ 이런 식으로 아주 깨끗하고 깔끔하고 자식들 애 안 먹이고, 그냥 좋은 얼굴로 곱게 가면 좋은데, 여기 망가지고 저기 망가지고 다 부서져가지고 가게 되면, 혹시 우리 가정에 이거는 복의 증거가 아니고 저주의 증거가 아닌가?

복을 달라했는데, 저주가 왔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신앙에 좀 더 추진력을 가하라는 얘긴가? 헌금에 대해서 좀 인색했다 그런 뜻인가? 동그라미 하나 더 보태? 이렇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의 조정을 하게 돼요. 자기 신앙을 조절해요. 그 조정하는 게 무엇의 조정이냐 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증거 제작, 증거를 제작하는 거예요. 중소기업이죠.

조그만 선반 하나 갖다놓고 드르륵~가는 거 있잖아요, 길거리에 보면. 제작소, 증거 제작소, 이게 바로 가정이 되고, 교회가 되는 식이죠. 그러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할 일이 많아요, 갑자기. 이거는 평소에 교회 다니던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어요. 내가 구원받은 자 맞다는 것을 매일같이 제작하는 것, 아침부터 큐티 하지요. 때마다 시마다 절에 가서 하듯이 절기 지키죠.

이게 증거 제작소 아닙니까? 이게 바로 증거 없이는 나는 한시도 못 믿겠다. 문제는 그 증거를 증거로 파악하는 인식, 그 인식하는 것이 내가 없이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결국 신약에 와서, 구약 끄트머리에 와서 신약 쪽에 오게 되면 이 우상이 누구냐 하면, 바로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우상이 뭐냐?

우상은 한글로 두 자에요. 뭘까요? (누군가 왈: 귀신) <탐심>입니다.(골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 탐심이 우상수배에요. 탐심은 내가 갖는 것이 탐심, 내 마음의 탐심, 멈추지 않는 마음, 요동치는 마음, 시간 따라 스톱할 의사가 전혀 없는 마음, 지금 있는 욕망을 제치고 추가적인 욕망을 계속 춤추고 있는 이 마음,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원천이 된다는 거예요.

방금 귀신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과 관련이 있어요. 이 인간세계에 귀신을 가지고 신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종교 중에서 대표적인 종교가 인도철학이에요. 인도 브라만교, 힌두교라 하죠. 그 힌두교의 자투리에서 나온 게 불교에요. 이 시간에 힌두교와 불교 둘 다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힌두교부터 이야기할게요. 힌두교는 제사 중심이에요. 힌두교는 제사 중심이고, 이 제사 중심을 철폐한다고 선언하고 나타난 것이 바로 붓다교, 불교죠. 불교는 제사 대신 깨닫는 것, 제사 대신에 깨달음이에요. 깨닫고 제사 지내는 게 아니고, 제사 대신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힌두교에서 이 제사는 왜 생겼는가?

힌두교에서 인간의 고민거리가 뭐였느냐 하면, 이 지상에서 인간이 대자연의 변화에 대해서 다 파악 할 수 없다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했어요. 그리고 이 대자연은 가만있으면 신이 없어요. 가만있으면 신이 없는데, 대자연이 춤을 추니까 마치 인간들이 감정을 노출하는 식으로 대자연이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러면 자연이 움직이든 말든 인간하고 관계없으면 괜찮은데, 농사짓고, 고기 잡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할 때에 실컷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대자연이 성질 부려가지고 폭풍이나 비가 안 온다든지 그러면 인간의 노력이 전부다 허사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은, 대자연이 움직이는 것은 내가 움직일 때 감정을 써서 움직이는 것처럼 대자연도 뭔가 감정이 있는 존재가 있어서 그래서 대자연이 성질내면서 그런 변화를 일으킨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그 성질내는 신은 따로따로 되겠지요. 그걸 두고 일신이 아니라 다신이라 해요. 여러 가지 신, 신들을 이렇게 전부 다 그때그때마다 달래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달래줄 때, 제사로 달래주는데, 그런데 이 제사로 그냥 달래준다 하는 것이 인류의 초반에 나왔던 신앙이라면, 힌두교는 그 정도로 막 가는 종교는 아니에요. 체계가 있어요.

더 근원적으로 들어갑니다. 그래, 인간은 고생을 한다. 인간은 힘들다. 사는 것이 아프다.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뭐냐? 아트만, ’나‘예요. 힌두교는 나에 관한, 자아에 관한 종교예요. 자아에 관한 종교라서 어디까지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지금의 살아있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유지될 수 있는가‘가 그들의 고민거리였습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살아있기 때문에 뭘 걱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죽고 난 뒤를 걱정할 권한이 있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는 이미 늦어버렸으니까 죽기 전에 살아있을 동안에 죽음에 대해서 미리 조치를 하는 거예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자연에 그렇게 신들이 많고 신이 무섭고 하더라도 신이 무섭다, 대자연에 맞춰 살아야 돼, 내가 고생스럽다, 내 몸이 아프다 자, 이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나‘지요.

중요한 것은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에게 잘 보여야 되겠다, 신에게 제사 드리고, 뇌물 주겠다는 것은 누굴 위함입니까? 나를 위함이에요. 나에 대해서 내가 책임 안 지면 책임 질 자가 없어요. 그러면 책임을 어디까지 져야 되는가? 죽고 난 뒤의 상황을 알아야 조치를 할 거 아닙니까?

죽고 난 뒤에는 그냥 흙이 된다 그러면 그냥 죽으면 돼요. 그런데 그걸 누가 보장해줘요? 죽고 난 뒤에는 자아도 없고 그냥 흙이 된다. 그러면 마음 편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야 되죠. 그렇지 않을 경우, 왜냐하면, 죽고 난 뒤에 흙이 된다면 뭐가 궁금하냐 하면, 과연 우리의 죽은 조상들도 흙이 되었느냐? 그냥 자아가 없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우리 조상들도.. 그러면 조상 문제는 조상 그들의 문제입니까? 나의 문제입니까? 나의 문제죠.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언젠가 죽으면 내 후손들에게 내가 조상이 되니까. 조상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면 지금 내가 내 자신한테 아무 것도 아닌 대접을 받아도 합당하죠. 그렇지요. 이게 조상 문제가 아니고 조상을 경유해서 내 문제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이 피라미드를 생각해요. 피라미드를 생각해서 인간이 이 자아라는 것, 자아라는 것은 이것이, 몸은 흙이 되는 건 알아요, 눈으로 보니까. 이건 증거가 되니까. 아까 눈으로 보고 믿는다 했잖아요. 그런데 몸은 썩는 걸 아는데, 몸 썩는다고 자아도 같이 썩을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아트만, 자아는 뭐가 되느냐 하면, 신의 일부로 편입돼요. 대자연 속에 들어가서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내가 있다면, 얼마 전 죽었던 아버지죠, 아버지, 조부(피라미드 맨 아래층) 조부 다음에 먼저 죽은 사람이 증조부(조부 위층), 그 다음에 고조부(증조부 위층)죠. 고조부 다음에 어떤 데는 5층, 4층인데, 보통 3층 다음부터는 이걸 뭐라 보냐 하면, 하늘로 봐요.(피라미드 제일 꼭대기) 하늘은 죽은 귀신들의 집합소로 보는 겁니다, 집합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기 있는 나는 비로소 뭐 할 수 있어요?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어서... 내가 사라지는 게 좋아요? 영원불멸하는 게 좋아요? 내가 없어지는 게 좋아요? 내가 영원불멸하는 게 좋아요? 영원불멸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사라지게 되면 지금 내가 나에게 투자하는 가치가 도중에 끊어지게 되면, 지금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의미가 같이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이건 너무 허무해요.

너무 허무하거든요. 아침에 밥 먹을 때, ‘밥을 먹으면 뭐 하겠노?’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배고프면요, 배고프니까 돈이 필요하고, 돈 벌고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고생이 되잖아요. 고생 되면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보상은 뭡니까? 내가 고생스럽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나의 자아는 근사해야죠, 멋있어야 돼요, 아름다워야 되고 훌륭해야 돼요.

그리고 내가 흠모할 만 해야 되고, 내가 계속 유지될 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이 내 영혼이어야 되는 겁니다. 그 영혼을 힌두철학, 힌두교에서는 뭐라 하냐 하면, 하늘에서 집합을 만드는 거예요. 집합을 만들 때 그냥 하늘로 가면 되는데, 하늘에 사는 시스템이 달라서, 이 땅의 시스템에서 하늘의 시스템으로 가려면 49일이 필요해요. 49일 동안을 아귀, 귀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을 때의 나는 뭐냐? 밥 먹고 했잖아요. 밥을 먹었다고요. 그런데 하늘나라로 가게 되면 밥을 안 먹는단 말이죠. 그러면 지금껏 밥 먹던 이 고조부가 하늘나라 가서 밥을 못 먹게 되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그러니까 49일 동안에 밥을 먹여주는 것,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밥을 먹여줘요. 그런데 힌두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갔어요.

계속 이 하늘나라의 숫자가 찰 거 아니겠습니까? 자꾸 쌓인다고요. 숫자가 차게 되면 토할 수가 있어요.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로 튕겨져 나올 수가 있어요. 순서도 안됐는데 튕겨져 나온다고요. 무슨 예약제도 아니고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언젠가는 죽은 아버지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조부가 된다는 거예요, 내 후손이 태어났으니까. 후손이 태어나서 나를 발로 미는 거예요.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아버지 때문에 못살겠다고, 빨리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이걸 가지고 ‘적체’라고 해요. 도로에 차가 계속 밀리는 걸 정체현상이라고 하죠. 정체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아이디어를 냈냐 하면, 힌두교에서는 적체돼 있던 이들이 도로 온다는 사상이 있는데 여기서 ‘윤회설’이 나와요. 거기 숫자가 너무 많으면, 도로 다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될 때에, 이 땅에 살 때 제대로 살았으면, 괜찮은 계급으로 다시 오는 그 제도를 카스트 제도 라고 해요. 이 땅에 훌륭하게 살면 브라만 계급이 돼서 최고의 성직자가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힌두교 철학을 들었잖아요.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고 죽은 조상들이 좋은 계급으로 윤회하라고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이 철학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아까 첨에 이야기 했지만, 그들은 신을 섬길 때 뭐를 전제로 섬깁니까? ‘나는 어떻게 되지?’ 그걸 전제로 합니다. 이걸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 그대로 적용시켜 봐요. 성경을 왜 봅니까? ‘나는 어떻게 되지?’ 그들이 그야말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증거 없이는 못 믿겠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그 증거를 다 없애버렸어요. 모든 증거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또 모세 율법을 위해서 증거를 주는데, 그 증거를 인간의 증거를 압수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줘요. 그게 뭐냐? 율법에다가 돌판을 주고 그 돌판은 깨어지기 위한 용도로 돌판을 주고, 올 때는 그 다음에 깨어졌다는 사실을 담아내는 궤, 상자에 담아서 오늘 본문에 두 번째로 모세가 산으로 호출을 받아요.

인간은 끝났다. 증거를 찾는 인간들 하고는 나는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 그게 뭐냐 하면, 오직 언약으로 구원 받는 거죠,언약으로. 언약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증거는 왔으되, 인간이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게 만들어요. 여기 A4 용지가 한 장 있습니다. A4용지 한 면을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공간이라고 합시다.

인간의 시공간은 다 비어있는 게 아니라고 했죠. 뭐 한다 했습니까? 내가 나 아트만, 내 자아가 죽어서까지도 계속 연속 불멸할 수 있도록 신에게 어떤 관계와 어떤 태도와 어떤 노력을 하면 되느냐를 부지런히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 평면이죠. 평면. 이 평면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증거를 주시는데, 어떤 증거를 남기는가? 우리를 찢어버리는 증거에요. (A4용지를 위 아래로 길게 찢음)

찢어버리죠. 증거를 찢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간을 찢어버리니까 두 개의 찢어진 증거 사이는 봉합이 돼요, 안돼요? 안되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일으키는 모든 사건, 일들은요 내 자아를 이렇게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어버리니까 여기서 나오는 게 뭐냐, 우울증과 마음의 상처에요.

자, 찢어진 A4 한쪽에 이렇게 쓰겠습니다.‘과거’ 다른 찢어진 쪽에는 미래라 쓰지 않겠습니다. ‘현재’ 현재에요. 인간의 모든 우울증과 스트레스, 자폐증은 어디서 생기는가? 과거와 현재가 봉합이 안돼서 생기는 거예요. 마음의 상처가...성경에 보면 성령이 임할 때 고린도후서 4장에 날마다 우리는 예수 죽으심을 짊어진다 했죠. (고후4: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어제 낮 설교에 의하면 죽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심낭삼출이라 해서 완전히 죽어야 돼요. 지금 여기 힌두교의 철학에서 완전한 죽음은 없어요. 인간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자아가 자유롭게 되는 현상을 죽음으로 보는 거예요, 힌두교에서는. 몸에, 육체에 갇혀 있던 자아가 이제 활개를 치는 거예요. 몸은 죽지만 무엇은 살아있다? 자아는 살아있다.

이걸 기독교에서는 뭐라 합니까? 몸은 죽어도 뭐는 살아있다? 영혼은 살아있다. 이게 삼분설이잖아요. 워치만 니의 삼분설. 모든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삼분설. 죽기 전에 살아 있는 걸 챙겨야 죽은 다음에 나도 근사한 자아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걸 기독교라 하지만 사실은 어디서 나왔어요? 방금 한 힌두교에서 나온 거죠.

주님께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내 하나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어제도 하나, 오늘도 하나인 인간을, 이것을 사건으로 찢어버리니까 인간은 여기서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발작을 일으켜요. 어제까지 알았던 내 신학은 어찌하란 말인가? 이러는 거예요. 어제까지 알았던 내 복음의 지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걸 찢어버리니까.

그러면 증거가 여기서 찢어버리는 걸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존재를 찢으면 사건이 된다> 이 말은 사건은 인간의 존재를 공격한다는 말이에요. 돌판은 이미 인간의 존재가 어떤 신을 삼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돌판이 왔죠. 그럼 돌판이 깨어지면 돌판만 깨어지겠어요, 뭐도 깨어지겠습니까?

이스라엘아, 너의 존재성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가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깨는 사건이 뭐냐? 깨는 사건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증거에요. 하나님의 증거는 나의 자아를 찢는 데 목표를 두고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가 안 찢어지면 그 증거가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안보여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예수, 당신이 하는 말은 귀신 들렸다, 당신 미쳤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이건 뭐냐? 자아가 안 찢어진 거예요, 그게. 멀쩡한 거예요. 주님의 증거는 없는 자기 양을 생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주신 언약의 사건이 예수님의 존재를 죽음이라는 것, 시간의 것과 끊어지게 만드는 것, 그럼 증거는 어디 있는가? 어디에 들어있는가?

찢어진 A4 용지의 절단면을 보는 거예요. 끊어져야 나타나는 단절면이 있어요. 이게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이 언약을 체결할 때에 제물을 바치잖아요. 그 제물이, 아브라함 언약의 제물이 구체화 된 것이 유월절이에요. 양은 고기가 필요해요. 고기 먹기 위해서 양을 키우는 거예요.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양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습니까? 쥐어짰죠.

짜게 되면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죠. 양이 찢어진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찢어짐이 유일한 증거에요. 그거는 그 찢어짐에 관한 사건이 우리에게 도달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찢어지지 않고, 쥐어짜지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그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피의 의미를 몰라요.

이 존재에다가 피를 이야기 하면, 존재에다가 그냥 안 끊어진데다가 피를 이야기 하면 예수의 피를 가지고 이건 뭐 얼굴에 분칠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찍어 발라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지식으로 찍어 바르는 거예요. 온 몸에다 피를 발라가지고. ‘저, 피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아는 멀쩡한데 자기 자아는 과거, 현재 찢어지지 않았어요.

그러면 현재에 대해서 그 단면, 피 흘린 단면이죠. 그 사이에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이 제물의 중간을 쪼개고 밤중에 그것도 인간이 활동하는 낮이 아니고, 인간의 활동이 멈췄다, 인간의 활동이 멈췄다는 것은 인간은 잠을 잔다는 거예요. 잠 자게 되면 의식하지 못하죠. 의식하지 못하는 그 순간, 인간은 어떻게 돼요? 인간은 죽은 존재가 돼요. 설치지 못하니까.

마동석이 나오는 영화 보면, 마동석이 깡패를 한 방에 때리죠. 때리는 이유가 까불지 말고 좀 잠잠하라 이런 뜻이에요. ‘니 이름이 뭐야?’ ‘까불인대요.’ ‘어디서 까불고 있어!’ 그 까불이 이름을 잠잠케 하는 거예요. 그 까불이 이름을..그만 좀 설치라고. 그만 설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마동석이한테 의미 있는 깡패는요, 한 방에 쳐서 나가떨어지게 하는 게 아니에요. 잡고, 때리고 또 때리는 거예요. 맞고 또 맞고 계속 맞는 거예요. 한 손으로 잡았다는 말은 주님 손 안에 있는 자기 양이라는 거예요. 어떤 누구도 영생을 빼앗을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쥐어 패는 거예요. ‘좀 가만 있으라고, 가만. 왜 그리 자아가 나대?’ 하고 쥐어 패는 거예요. 자꾸 패는 거예요. 매일같이 말씀이 와서 패는 거예요.

이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날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짐은 우리 속에서 나 이렇게 자아가 찢어졌다. 또 찢어졌다. (A4 용지를 다시 찢으면서) 찢어진 ‘나 주님한테 얻어맞아서 구원됐다.’ 라고 또 자아가 또 나오죠. 이거 자아 아닙니까? (A4 용지 또 찢으면서) 그러면 그 자아 또 찢어지죠. 그러면 찢어진 절단면에서 주님의 피가 보인다고요, 주님의 피가.

열 한 제자, 가롯 유다 포함하면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잡고 때렸다고요. 그런데 가롯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가만 있어.’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한 방 치고 지옥으로 보내버리고,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내가 너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하면서 쥐어 패는 거예요. 자아가 있는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나중에 주님 십자가 달렸을 때 다 흩어지고 누구는 그냥 고기 잡으러 가고, 어떤 제자는 제 할 일 했죠. 그런데 다시 찾아오시죠. 다시 찾아와요. 뭐가 문제입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자아의 죽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내가, 자아라는 것이 의식되어서부터 발생된 종교라는 그 사실,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아로 이해하는, 그 메시아라는 개념조차도 내가 먼저 전제하고 나온 뒤에 우상적인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알아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죽는다' 할 때에 그 때 베드로는 자기 죽음에 대한 자아성의 여러 가지 정제된, 말끔한(깨끗한 A4 종이를 펼쳐 보이며) 자아가 깔끔하게 되기를 고대했던 거예요. 지금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내 자아는 더 윤택해지고, 빛이 나고, 더 완전해지고, 온전해진다는 사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했으니까 그 말이 나한테 적용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온전하게 되려는, 이것이 온전함인데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 온전함에 흠집이 생기잖아요.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마귀가 바로 우상숭배하게 만든 마귀가 인간의 자아를 이런 식으로 잡고, ‘자아가 판단할 만한 증거가 있으면 그걸 나는 올바른 신으로 간주하겠다.’ 그러면 그런 신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누굽니까? 마귀죠. 마귀하고 인간하고 이미 한통속, 짜고 치고 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인간이 자아가 내가 잘 되는 신은 이게 예수가 되든 삼위일체가 되든 뭘 해도 그건 마귀입니다. 합스부르크가 대략1200년부터 1900년 초까지, 2차 대전 전까지 중앙유럽을 지배했던 가문이에요. 그 유적지가 빈, 그 다음에 체코, 그 다음에 모라비아, 보헤미아, 그 다음에 헝가리 이런 곳에 가득 남아 있어요.

그 마지막 황제가 프란츠 요셉 황제인데, 그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 이겁니다. 그 유언이 참 의미 있는 유언이에요. <왜 지금이어야 합니까?>자기가 죽으면서 남긴 말이 ‘왜 지금이어야 됩니까?’ 왜 굳이 지금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나는 좀 더 살아서 이 자아가 뭐를 했다는 것을 더 남길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여지가 있는데, 왜 지금 내가 죽어야 합니까? 이게 유언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을 때 이런 말이 단면적으로,, 단면 끊어져 나왔다는 말은 평소에 늘 이런 마음으로 지금 나는 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에 몰두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죽는 단면을 통해서 이게 그만 들통이 난 겁니다. 우리는 안 그래요? 베드로가 자신만만하게 ‘예수님 죽을 때 제가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할 때에 그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길 한 번 봅시다. 인간은 과거, 과거에서 현재, 현재지요. 미래는 없어요. 그럼 뭐냐? 현재 다음에 현재, 현재 다음에 현재, 현재 다음에 현재가 되겠죠. 지난 현재는 과거로 누적되겠죠. 그러니까, 과거랑 현재밖에 없는 거예요. 과거는 기억 속에, 자아가 있는 것은 현재지만, 현재를 느끼는 자아 안에 줄줄이 과거가 누적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뭡니까? ‘왜 하필이면?’ 이렇게 되는 거죠.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까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 이야기 했는데, 베드로는 어때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한다고 베드로가 고쳐지고, 개과천선 합니까? 아니에요. 그냥 베드로는 계속 베드로 자아에 머물러 있어요. 이름만 바뀌지, 본인은 왜 이름이 바뀐 지도 몰라요. 계속 시몬이죠. 뭐 그냥 쭉 갑니다.

그때 주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위에서 말한 그런 시간 말고 닭소리를 집어넣어요, 닭소리를. 그러면 여기는 닭소리를 통해서 단절이 일어나요. 기존의 시간대를 누가 따라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시간대, 곧 말씀의 시간대, 이게 실체인데, 이 실체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뭐냐? 그림자요, 인간은 자체가 모형인데, 이걸 인간은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하죠.

자기가 실체요,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지식으로 확보하면 된다고, 그러면 내 아트만, 자아는 유지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닭소리가 났을 때 통곡하죠. 통곡한다고 해서 베드로가 바뀌었습니까? 뭐, 막 울었지요. 닭소리 들을 때 네가 나를 부인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할 때 잠시 현재 있는 자기가, 베드로가 자기의 과거 기억 속을 잠시 더듬어서 호응한 거예요.

‘맞다, 그렇지, 주님께서 당부를 했지. 왜 나는 이것 밖에 안 돼?’이것 밖에 안 되지, 새 사람 된 게 아니에요. 이것 밖에 안 돼.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면 이제 자기 시간대로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 이(위에 있는 다른) 시간대는 뭐냐? 오순절 날 성령이 와요. 그러면 오순절 성령이 오게 되면 이(기존) 시간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시간대 속에 이미 은밀하게 따라왔으니까 이게 축 늘어져서 포함이 되어버리죠.

마지막 남은 A4 용지 꺼냅니다. A4 용지를 위아래로 쭉 찢어버렸잖아요. 찢어버렸으니까 베드로의 인생은 착각이고, 환상이에요. 그런데 그 찢어진 틈 사이에, 거의 없지요. 이 틈 사이에서 삐져나온 성령이,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틈이라고 보느냐 하면, 면적으로 보는 인간은 찾아낼 수가 없어요, 십자가 사건을. 왜냐하면, 이 면적을 포기를 못하니까.

예수님 사건에 참여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요. 천국 가는 길은 십자가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요 면적으로 보이는 것을 인간에게 안 보이는, 찢어야 보이는 이 틈 있잖아요, 단절면, 단절면을 뭐로 보냐 하면, 어떤 세계로 봐요. 그래서 ‘예수 안’이 나와요.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이 나온다고요.

이 틈 사이에서 예수님이 계시는 새로운 세계가 풍선껌처럼 부풀어져서 성령을 통해서 와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틈 속으로, 자아의 찢어진 틈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요, 틈 속으로. 어떻게? 찢어진 채.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 부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 그런데 힌두교는 이 사실을 몰라요. 왜? 자아가 있으니까.

그럼 불교는 뭐냐? 불교는 ‘제사를 때려치워라’ 불교는 제사, 계급, 나중에 윤회해서 더 높은데 가는 이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뭐라 하냐 하면, 깨달으면 된다는 거예요.. 깨달음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뭐냐 하면, 자기 장례를 미리 자기가 치르면 된다는 거예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특징은 뭐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미 죽었잖아요.

옛날 힌두교 때 죽은 자는 머리를 홀라당 깎았어요. 그래서 불교에서 사문제라 하는데 세속을 떠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머리를 깎아요. ‘나 시체다’ 이런 뜻이에요. 시체니까 불교는 뭡니까? 국가라든지, 사회라든지, 가족이라든지 몽땅 다 떠난 식의 증거를 자기 몸에 남기는 거예요. 그거 증거에요, 증거 아니에요? 증거죠. 그거 증거잖아요.

방금 제 질문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인간은 뭔가 내가 누구인가를 위해서 필요한 증거를 찾는 증거 제작소죠. 오늘 제목이 ‘증거 제작소’잖아요. 증거가 뭐냐? 나 머리 홀라당 깎았다, 나 이미 힌두교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윤회 자체로부터도 벗어났다, 윤회 자체에서 벗어난 걸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 해탈이 목적이에요, 불교는.

그럼 죽은 자로 살기 때문에 노동 하면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얻어먹어야 되죠. 얻어먹어야 돼요. 그리고 그들만의 공동체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만의 공동체의 법을 또 만들어요. 그게 법문이에요. 그래서 그들만의 새로운 집단이 불교의 시작이 된 겁니다. 그걸 나중에 대승불교에서는, 중국의 대승불교에서는 그걸 체계를 만들었어요. 체계를 만들어서 이론을 세운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부처 이야기 하고는 완전히 다른 말이 된 거예요. 흉내만 내는 거예요. 머리 깎고, 얻어먹고, 탁발로 살면 이것이 바로 무엇의 증거가 된다? 윤회마저도 벗어난 해탈이 된, 그러니까 신이 되는 거예요. 신, 진짜 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자아로 만들어진 신이 되는 거예요. 그걸 깨달음, 해탈이라고 본 거예요.

이 깨달음을 ‘돈오(頓悟)’라고 해요. 순간적인 깨달음, 그 다음에 자꾸 세속적인 때가 묻잖아요. 그때는 수양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점수(漸修)’ 날이 갈수록 점점 수양하면 된다. ‘돈오점수’. 한번 깨달으면 끝났다. ‘돈오돈수’, 수양도 한번으로 끝났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양대 이론이 불교 이래 성립되는 겁니다. 어쨌든 출발점은 순간적으로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들은 걸 바탕으로 여러분들이 성경 해석에다가 이걸 집어넣어 보세요. 우리가 이러한 자아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벌써 종교라는 선배들이 이미 짜 놓은 판 구조 안에서 우리는 성경의 구절, 기독교라는 것 가지고 그냥 거기다가 흉내 낸 거예요. 이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 모습이에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구원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구원 받으려면 증거가 있어야 되는데, 증거를 주시면 이 교회 잘 다니겠습니다.’ 내 구원 포기 못하고 내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하나님이 계시니까, 신이 계시니까 신이 놀랍게 작동하는 그 증거를 내가 갖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증거를 준 적이 없다는 것을 성경 한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 나오죠. 다 아는 이야기니까 시간 끌지 않겠습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으러 왔어요, 병 고치러 왔어요? 병 고치러 왔지요. 병 고치게 되면 누가 좋아요? 자아가 좋지요, 아트만, 내가 좋지요. 아팠던 내가 안 아프니까 내가 이익 봤다가 되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께 왔습니까? 예수님이 혹시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서 온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든 메시아든 간에 뭐가 관련돼 있어요? 내 이익과 관련돼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뭐라 하시냐 하면, 5절을 한번 읽어보세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절 끝에도 보세요. ”소자야 안심하라“ 그 다음에 뭡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 받은 증거 대보세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때 그냥 병 고쳐주면 아무 공격 안 받았어요. 그 때 그 주변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뭐를 시비 걸었습니까? 그냥 병 고침 원하는 사람에게 병만 낫게 하면 돼요. 그 당시 유대인들도 많이 했기 때문에. 안수해서, 기도해서 병이 많이 나았거든요. 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불쑥 무슨 말을 해요?

병 고치러 온 사람이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병 고치러 왔다고요. 그런데 죄 사함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것은 죄 사함 받은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증거가. 죄 사함 받은 증거는 없어요. 왜 없느냐? 좀 기다려야 돼요. 왜?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니까.

있던 예수님이 사라지는 것이 죄 사함의 증거에요. 인간은 사라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하기 때문에 눈에서 사라져야 그게 증거가 돼요. 그래야 선택이 의미가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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