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십자가-원수의 등장

아빠와 함께 2024. 4. 30. 08:5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7강) 창24:60(원수의 등장) 20240429b(강의: 이근호 목사)


p.84 중간(세 번째 단락)에 나옵니다.【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를 고를 때도 신부의 오빠가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아브라함의 며느리 리브가는 특별한 운세를 가졌다. 축복을 가로막는 원수를 정복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여인이다.】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이게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은 아브라함이거든요. 이삭이고 야곱이에요. 그렇다면 그 부인들의 역할은 뭐냐 하는 거예요. 부인들의 역할.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 때 여자 없었습니다. 여자가 없었는데 아담을 만들 때 그럼 사람 만드는 게 미완성이었느냐? 아니에요. 완성이었어요. 아담 나올 때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분명히 했거든요. 그럼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남자의 내부에 있었죠. 내부에. 남자 하나인데 하나 안에 또 하나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한테 문제가 있으면 남자는 비록 문제가 있더라도 안에 들어있는 여자 쪽이 망해버린 아담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인간이 되는 재료 또는 새로운 토대로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창조 망했다는 뜻이에요. 여자의 후손.

‘사람은 남자이어야 돼’ 라는 그 상황, 체계가 망한 체계라는 겁니다. 그러면 안에 여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 망한 남성의 세계 속에서 여성의 요소가 나옴으로써 이 남성의 세계가 왜 굳이 망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여자 쪽에서 계속 쏘아줄 수가 있는 거예요.

아까 봤던 창세기 24장 60절,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라 하고 그 이유가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여자의 후손이죠,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는다 할 때에. 남자는 그냥 원수한테 당하기만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원수가 누구냐 하는 것은 여자 쪽에서 나오는 그 언약, 여자 위주의 언약이 나옴으로써 원수가 서서히 밝혀지는 겁니다.

아까 출애굽기 15장 마저 해보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 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해서 아주 유난스럽죠. 대단해요, 뭔가. 이스라엘 구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뒤엎을 만한 위력, 에너지가 작동하는 그러한 세계에 그들은 놓여있는 겁니다.

13절,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 처소,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6절부터 보면,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을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성소라는 것, 하나님의 집이죠.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 이게 성소가 됩니다. 그 성소에 인간들은 들어올 수 없는데 그 성소에 인간을 넣어주겠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왜 성소에 갈 수 없느냐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원수 쪽에서 현재 잘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성소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천사들은 살고 그래요.

거기에 인간들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야 돼요. 그래야 인간들이 거기서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그 전(前),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께 없던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언약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요소가 새롭게 첨가됩니다. 첨가되면서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로 섬길 수밖에 없어요. 언약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러면 언약 백성은 뭐냐? 하늘나라 가서 이제 그냥 시다바리(보조)역할 하냐? 아니에요. 천사들로부터 존대를 받아요. 왜냐하면 다 이루심을 주님과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되려면 어디를 통과해야 된단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의 튜브, 관 안에 집어넣어요. 이 관(튜브)은 바로 율법이라는 관입니다. 율법이라는 관을 가지고 광야를 율법 안에서 통과하게 해요. 이 율법을 모세 언약이라고 합니다. 모세 언약 안에서 그들은 통과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통과하는 장소가 뭐냐? 광야에요. 광야는 핵폭탄이 터져버린 그 이후의 세계, 열 가지 재앙을 만난 그 애굽의 세계, 재앙이 떨어지는 세계, 그게 광야입니다. 더 이상 인간들이 기대하거나 뭔가 희망을 걸거나 할 것이 전무한 세계, 하나님의 심판이 작렬하는 그 세계, 이게 광야에요.

광야에서는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살 수 없어요. 그러면 광야에서는 사람이 못 산다. 다 죽어요. 그런데 통과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살 수 없는데 안 죽고 통과했다. 그럼 뭡니까? 그들이 어느 튜브 안에 관 안에 들었다고 보면 되겠죠. 율법 안에 들어있죠. 그럼 율법이 뭐를 막아준 거예요? 하나님의 무서운 원수를 향한 미사일, 하나님의 자기 원수에 대해 하나님의 오른손이죠,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 안에서 보호받는 식으로 그들은 율법으로 보호받으면서 통과를 한 겁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율법을 지켰습니까, 어땠습니까? 율법을 못 지켰죠. 율법을 못 지켰는데 율법을 못 지킨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줘요. 지켜주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는 겁니다.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러면 말씀의 율법 기능은 못 지키면 저주, 지키면 복이죠. 복과 저주, 이것을 반복함으로써 지금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신명기에도 나오지만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만나가 주어지잖아요. 만나 끊으면 끝날 문제를 왜 자꾸 만나를 주냐는 말이죠. 비난하고 지적하고 그러면 나쁘다, 율법 어긴다고 하면서도 한결같이 만나는 왜 오느냔 말이죠. 왜 이중 플레이를 해요? 죽이면 죽지, 왜 자꾸 살려줘요?

오늘날 우리 같아요. 진즉에 죽으면 되는데 오늘도 맛있는 꿀수박을 또 먹게 하잖아요. 왜 그래요?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디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죠. 우리가 어디 안에 들어있다는 것. 무서운 심판마저도 극복이 되고 심판받아도 침범 받지 않는 그곳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오른손이 뭐냐?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간단해요. 주의 오른손=어린 양의 오른손. 어린 양의 중심지가 언약궤고요. 만남의 장소를 아주 축약하게 되면 천사가 엎드려 있는 언약궤 위에서 만나요. 크게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서 만난다. 네비게이션 해서 좀더 좁혀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서 만난다. 좀더 좀더 좀더 좁혀보면,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서 만난다. 아니 좀더 좀더 좀더 더 좁혀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에서 만난다. 좀더 좁혀보면 언약궤 뚜껑. 그걸 속죄소라 했어요, 속죄소.

속죄소가 되려면 율법 안에 죄 많은, 죄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죄인이죠, 죄인을 대신하는 요소가 율법에서 나와 줘야 돼요. 이 죄인을 그냥 방치하지 않고 ‘내가 대신 이 죄인을 감당하겠나이다’하는 자가 율법에서 규정되어야 그 율법 안에 속죄소, 죄를 씻어주는 장소의 취지가 살아나는 거예요. 취지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속죄소 같은 지금 이것이 원수의 성문을 여는 리브가의 존재와 관련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속죄소라는 것이 되려면 죄를 구속(救贖)하는 장소라는 뜻이잖아요. 나의 처소라는 것도 장소라는 뜻이잖아요. ‘처소’, ‘속죄소’ 다 이것이 언어입니다. 언어. 이게 언어에요.

제가 아까 두 번째 강의 어렵다고 미리 예고를 했는데 이제부터 어렵게 한번 해봅시다. 자아, 나죠, 나인데 어렵게 하려고 하면 자아가 돼요. 자아가 뭘 생각하느냐? 어디서 어떤 소리를 들었냐 하면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어느 날 들은 적이 있어요. ‘천국’, 언어죠. 언어. ‘하늘나라’, 언어. ‘하나님’, 언어죠.

자아가 천국이라는 언어를 들으면 이 자아는 천국이라는 언어의 내용이 있을 거 아닙니까, 내용. 어떻게 잘 살고 멋있고 천사들이 날개짓 하고. 그 내용을 이 자아가 언어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언어로서 당겨오는 거예요. 바깥쪽에 있는 대상을 언어를 날리는 내 쪽으로 끌어와서 이 천국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나의 소유.

그럼 나의 소유가 성립되려면 나는 필히 없어져야 돼요, 계속 영원해야 돼요? 영원해야 돼요. 그런데 천국이고 좋은 것이고 뭐 돈이고 간에 뭐든지 끌어당기는 이유가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죽기를 무서워해서 한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그러니까 이런 말이 어려운 거예요. 죽기가 무서워. 그럼 죽기 좋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죽기를 무서워하죠. ‘돈 내놓을래, 목숨 내놓을래?’ 할 때 목숨 내놓으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죽기를 무서워한단 말이죠.

죽기를 무서워하는 건 다 아는데, 성경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는 거예요. 인간들의 상식을 끌어 모아봤자 이런 언어가 안 나와요. 오빠가 리브가를 축복하기를 너는 원수의 성문을 연다 할 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현재 어디에 매여 있다? 하나님의 원수에 매여 있다는 그 단어, 언어란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원했던 내용이 아니에요. 인간이 이걸 끌어 모으려 한 게 아니고 그냥 성경에 있는 내용이에요. 형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편을. 그런데 히브리서 2장 15절에, ‘죽는 게 당연하지만 죽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 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여기까지만 알았는데 성경에는 ‘일생에 매여 종노릇’을 여기 뒤에다가 갔다 붙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 물음이 나와야 돼요. ‘누가? 누구한테? 누구한테 매여 있기에 죽음이 왔고 그 죽음에 대해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은 도대체 누구한테 매인 거야?’ 라는 말이 나와요. 그게 14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사망의 세력 잡은 자. 사망의 힘을 가진 존재, 이게 누구라고요? 마귀. 드디어 이제 ‘마귀’라는 단어가 나와요. 마귀라는 단어는 우리가 소유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죽음도, 자아는 죽기 싫어요. 나는 살고 싶어요. 살고 싶고 괜찮은 천국, 하늘나라는 소유하고 싶어요. 지옥은 싫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마귀가 등장하면서 소유대상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마귀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리고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금 살고자 하는 모든 그 모습이 죽음에 매여 있다는 대표적 현상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뭘 소유하겠다는 것, 구원받겠다는 것, 천국 가겠다는 것, 나 지옥 안 가고 천사 있는 데 갈래, 이게 뭐냐? 무서워 벌벌 떨고 있다는 거예요.

2장 16절, 점점 어려워요.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거 또 다가 아니네요. 아브라함의 자손에 한정돼서 그들만 악마로부터 풀어준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그럼 자손이 성립되려면 아브라함이 있어야 되고 아브라함에게 뭐가 있어야 돼요? 아브라함만 있어서는 안 되죠. 아브라함의 뭐가 있어야 돼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어야 되죠.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으려면 아브라함의 부인이 있어야 돼요. 남자는 임신을 못하니까. 여자가 임신하니까. 이건 아브라함 언약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남자 안에 여자라는 새로운 요소가 언약의 매체, 연결점으로 여성이 태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성이. 껍데기는 남자인데 속에는 여성이 중심부로 언약과 연결점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 몇 명 된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이삭 하나밖에 없지, 뭐 있어요. 기껏 이삭 하나 구원하려고 리브가와 결혼하게 된 거예요? 숫자를 늘여버려요,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은 만인의 아버지에요. 하늘의 별을 보라. 별 같이 많으리라. 여러분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여러분 애들 방이나 여러분 방에 형광별을 달면 돼요. 불 꺼도 반짝 반짝 반짝 반짝. 창세기 15장. 하늘의 별과 같이. 별을 보라. 볼 것도 없어요. 잘 때마다 보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없어요. 없는데 있어요. 자손은 없는데 여자는 있어요. 언약이 연결되는, 언약이 작용하는 데는 있어요. 언약은 이 땅에 없는 겁니다. 언약은 이 땅에 없는 거거든요. 사라에게 없는데 있었고 언약으로 인하여 죽어요. 언약은 죽습니다. 죽어야 될 언약으로 인하여, 여기서 언약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죽은 사라의 태가 살아나요.

와! 그러니까 언약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사래는 구원 못 받아요. 사라가 구원받아요. 사라가 아닌 자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럼 여자는 사라 되면 되는데 남자는 뭐 되면 되느냐? 남자는 여자의 후손이 남자 안에 들어오면 돼요. 거기서 언약이 나오기 때문에.

언약은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자를 있게 하기 때문에 항상 무엇과 대적이 되느냐 하면, 언약의 원수는 항상 있음은 있음이 있음을 낳고 살아있는 것은 꼭 살아야 된다는 그 성향과 원수관계, 대결관계로 늘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죽으면 안돼.’라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구죠? 나잖아요. 나. 나에요. 나. 나를 다른 나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혈육에 속했다(14). 히브리서 2장에 보면 혈통이라 되어 있는데 혈육에 속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는 거죠. 그러면 나 안에 아버지의 혈육적인 요소로서 나는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이 자아가. 그래서 그 사람의 성격이라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분석할 때 ‘너희 아버지 뭐 하시노?’ 이걸 묻는 이유가 있어요. “너희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조폭인데요.”

혈육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일종의 혈육이 확장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혈육이 확장되었다.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영국 진화생물학자) 책에 보면 DNA는 안 죽어요. 있음, DNA 있음은 영원히 있음이에요. 모든 것은 DNA에서 DNA의 자기 증식에 불과하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DNA가 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가도 없어지는 껍질 노릇하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요소입니다. 상당히 신학적이에요. 그렇죠? 도킨스가.

다시 말씀드릴까요? 인간 속에는 DNA만 살아있고 DNA가 알아서 자기가 번식하기 위해서 가져온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위주가 아니고 DNA위주에요. 그래서 얼마나 DNA가 자기밖에 모르는지 제목도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그 이기적 유전자는 다윈 진화론에 입각해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DNA가 스스로 될 DNA와 안될 DNA를 구분해서 잘라내고 자기 DNA 때문에 전체 DNA에 손상 간다면 과감하게 자결하는 DNA가 있다는 거예요. 두뇌에 그런 세포가 있어요. 적극적으로 알아서 자살함으로써 나는 죽지만 전체적인 대의가 살아나는, DNA여 영원하라. 할렐루야. DNA는 살아있어라. 그게 현대 생물학의 결정체죠.

그런데 언약은 뭡니까? 없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다. 인간 자체가 없음이라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없는데 왜 네가 죽는 게 무섭냐 이 말이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음이 있어야 뭐 무섭든지 하는데 죽음이 없어.

그런데 죽음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악마가 이미 인간을 장악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무섭지? 무섭지? 인간의 육신은 쥐지는 못해요. 인간의 뭘 쥐냐? 인간의 자아를 쥔다고요.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한테 모든 걸 다해도 생명은 못 빼앗아간다 했죠.

인간의 자아가 문제에요. 인간의 육신이 문제가 아니고. 육신은 하나님 것인데 육신을 통해서 자아가 형성되고 이 육신을 내가 기어이 살려내야 되겠다. 죽어서 천국까지 보내야 되겠다는 그 자아성을 마귀가 공략하죠. 그러면 너 지옥 가. 그러면 너 죽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인간의 자아 입장에서는 두 가지가 있어요. 자연스러움과 불가능한 것을 인간은 구분할 줄 알아요. 자연스러운 것은 뭡니까? 악마적이죠. 제일 자연스러운 것이 뭐냐? ‘내가 행하면 결과를 낳는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뭔가 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 결과를 주신다.’ 이게 인간에게 교리입니까? 교리 아니에요. 신학입니까? 신학 아니에요. 그냥 내 몸의 자연적인 발현이에요.

신학은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애가 몸이 아팠는데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응답 받았다. 나 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죠. 불가능한 접근은 싫은 거예요. 불가능한 접근.

자, 정리해봅시다. 자아는 어디서 나온다? 몸의 있음으로 자아는 나온 거예요. 몸은 성경에 보면 뭘 위함이냐 하면 언약을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몸으로 왔기 때문에 언약을 위함인데 악마는 여기다가 몸에서 끝나지 않고 거기다가 자아를 집어넣었어요. 자아가 그다음부터는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모든 대상에 언어를 붙이는 거예요.

와이파이 도시락. 와이파이 도시락 먹어본 적 있어요? 도시락이라는 말이 왜 붙어있어요? 해외 나갔을 때 해외 지역에 있는 와이파이를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대여 받는 걸 와이파이 도시락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코미디에 보면 ‘나 도시락 안 싸왔는데?’ 이런다고요. 언어에요. 새로 만든 언어라니까요.

왜 언어를 사용하느냐? 광주강의 때 했어요. 언어를 왜 사용하는가? 모든 자연 변화를 언어로 커버할 수 있어야 돼요. 모든 것을 언어로 커버할 수 있어야 돼요. 질서, 분류, 분배를 해줘야 내가 사는데 공포심을 줄일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알면 공포가 적어지고 모르면 무섭다는 겁니다.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만들었잖아요. 그 전에는 번개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하나님의 징벌로 봤거든요. 페니실린 나오기 전에 모든 병균 발견하기 전에는 이건 하나님의 징벌로 여겼다고요. 나중에 보니 조그만한 바이러스에요.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자기 살겠다고 까부는 그게 바로 우리에게 병이 된 거예요. 우리는 그 바이러스를 항생제를 사용해서 화학적으로 처리했죠. 어디서 까불고 있어? 항생제. 그런데 항생제 너무 놔서 까부는 내가 당해버렸어요.

어떤 사람은 코로나 다섯 번 걸린 사람이 있어요. 이것도 뭐 유행인지… 하여튼 코로나 새로 나타나면 다 걸려. 주사는 다 맞았는데 다 걸렸어요. 왜요? 왜 그럽니까? 코로나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어요? 중국 사람이 실험실에서 이상한 실험하기 전에는 코로나 없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단어, 언어를 왜 붙이는 거예요, 도대체? 장악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모든 변화를 장악해서 대처함으로써 어디에 도움 되라고? 이 죽음의 공포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공부하면서 단어를 외우고 성경을 보고요. 왜 자꾸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 달달 외우고 백독을 하고 쓰고 왜 그럽니까? 왜? 무서워서 하는 거예요. 무서워서!

왜 무섭습니까? 몸이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에요. 몸이 죽으면 이건 늙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없는데 누가 죽어요? 자아가 별 볼일 없이 돼요, 자아가. 평생토록 내가 몸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관리했어요, 인간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아들아, 나 너 때문에 산다.” “엄마, 큰 거 석장 줄까?” “둬라. 나 한 장만 주면 돼. 자식아, 나 너 때문에 산다.” 참…. 끝에 뭐가 붙어 있어요? ‘산다’. 남들은 자식이 애 먹이지만 나는 그런 걱정 안한다. 무슨 걱정? 내가 죽을 걱정 안한다. 왜? 자식인 네가 석 장 줘서 날 살릴 거니까. 앗싸!

내 몸이 죽는 건 알아요. 내 몸이 죽는 것이 아쉬운 게 아니고 내가 죽는 게, 이 자아가 죽는 게 아쉽다니까요. 이게 자존심 상한다니까요. 내가 뭐가 못나서? 평생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싶은데 허무하게 내가 죽어? 무가치하게? 안돼~ 그건 내가 용서가 안돼요. 살아야 돼요. 정 살다 살다 안 되면 자살하는 두뇌세포처럼 그럼 내가 죽을게. 내 명예를 안고. 이런 식으로 이제 나가는 거죠, 이 자아가.

언어를 동원해서 자아를 지키겠다는 것, 악마가 시켜서 인간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줄 알고 인간의 언어 속에 뭘 집어넣는가? 율법을 집어넣어버려요. 율법을. 율법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율법은 어디서 나왔는가? 통 있잖아요. 통이 나왔죠. 모세가 통 안에 율법 들었다 했죠.

그전에 이 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언약에서부터 시작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나오죠. 언약에서 나오면서 그 언약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기 때문에 여기 인간의 언어가 그걸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인간의 언어는 내 자아 사는 게 목적이에요. 그런데 언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로 온전하게 채울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채우죠. 못 채우면 심판이에요.

언약을 이해 못하면 심판받습니다. 야곱이 그것 때문에 얍복 강에서 죽었어요. 야곱은 죽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유가 야곱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은 복, 하나님의 언약 다 아는데 막상 출제위원인 하나님의 천사와 하나님과 바짝 닿아 보니까 이게 씨름할 관계였던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뭐 나 살자는 식이에요. 전혀 이거는… 대립관계였어요. 내가 이해하는 언약, 내가 아는 말씀이 대립관계였단 말이죠. 맞지를 않았던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두 가지 포도원에 대해서, 세상적인 포도원과 성경의 밭에 대해서 차이점을 보여줄 거예요. 일단 이솝우화,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포도원. 언젠가 이야기한 적 있는데 아버지가 포도원을 갖고 있는데 자기가 자식들을 보니까 자식들이 다 게을러요. 자기 죽고 난 뒤에 포도원은 폭삭 망한다는 건 뻔한 사실.

그래서 유언을 남겼는데 뭐냐 하면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포도원에 금괴를 숨겨 놨다. 그러니까 자식들 눈이 번쩍 뜨였죠. 그래서 홍해인부터 해서 정신이 번쩍 든 거예요. 용두리 주민들까지 전부다 정신이 번쩍 다 들어가지고 얼마나 줄까 빼먹을까 생각하니까 금괴 찾기 위해서 열심히 포도원을 파고 또 열심히 하다보니 포도농사가 너무 잘되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아버지의 뜻을 알았어요. 일하게 되면 일한 대가가 포도원에 담긴 보물이었다. 이게 이솝이야기에요. 그런데 이것가지고 또 목사는 뭐 ‘여러분들이 성경에 보물 있는 줄 알고 파 보세요. 성경이 보물이 아니고 여러분 자신이 변화된 게 보물입니다.’ 백발백중 이렇게 나와요. 아니, 목사 설교할 게 그럼 뭐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변화를 당신이 해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가잖아요. 목사는 그거 줘놓고 헌금 받아내고.

아닙니까? 예? ‘희망을 가지세요. 여기서 당신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주의 뜻은 있습니다. 있는데 여러분들이 주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데 이 목사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말씀대로 해보세요. 해보면, 아, 주께서는 이미 마련해줬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랬구나.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있음에서 있음이에요. 무서움 떠는 데서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데서 오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제공하는데 둘다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원수, 마귀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거죠.

마태복음 13장 보겠습니다. 13장 44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되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에 관한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아가신 아버지라 하고 아들은 아직 살아있다면, 밭주인이 아버지라면 자식들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리는 밭이 되겠죠. 인간이 갖고 있는 것. 뭐를 빼앗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그걸 빼앗아버려요. 죽음을 빼앗는 게 아니고 죽기를 무서워하는 무서움 있잖아요. 무서움, 자아에서 나온 무서움, 그 무서움을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고 주님이 선물로 준 그 죽음을 회수해 나가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은 죽을 자격도 없다. 죽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 무서워할 자격도 없고 죽을 권리도 없고 자살할 권리도 없는 거예요.

덩달아 인간은 살 권리도 없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소유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애시당초 나에게 있다, 없다? 아무것도 없었던 거예요. 뭔가 있으면 무서워요. 있으면 무섭다고요.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이미 주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리브가라는 그 여인은요. 그냥 구멍이에요. 빈터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없음이 있어요. 없음이. 그리고 그 여자는 애를 못 낳아요. 애를 못 낳으니까 태가 죽었어요, 살았어요? 죽은 거예요. 죽음이고 없음뿐이에요, 그게.

이제는 그 없음, 죽음 자리가 언약이 생생하게 인간의 어떤 행함도 포함되지 않고 섞이지 않는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환원되는 언약만이 하는 장소를 리브가가 제시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원수가 다 들추어지죠. 들추어진다고요.

리브가가 하는 일은 생겨날 수 없는 야곱의 언약의 자식을 하늘의 별만큼 그냥 생산하는 겁니다. 생산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언약에 의해서 파생되는 결과들을 리브가가 생산해요. 그럼 리브가는 뭘 이긴다 했습니까? 원수의 성문을 이긴다 했죠. 뿌리가 되죠. 그러면 리브가에게서 뭐가 새롭게 나와야 돼요? 원수가 나와야 되죠. 그 원수가 바로 리브가가 낳은 형 에서 아닙니까. 형 에서.

형 에서가 나오는데 에서는 특징이 뭐냐 하면 이미 나는 형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거예요. 있음이에요. 야곱의 특징은 뭐냐? 나한테는 형이라는 장자의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팥죽 줄 때 팥죽 맛있게 먹었어요. 왜? 이거는 변경될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나왔기 때문에. 형이기 때문에 형 자리가 팥죽 한 그릇에 바뀐다는 그 아이디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바뀌어요. 동생이 장자가 되고 형이 동생한테 빌어먹는 자가 돼요. 그 뒤바뀜. 그 뒤바뀜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오신 거예요.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되시나 인간이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 지는 것을 자기의 장래희망으로 삼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초등학생들한테 설문조사 해보세요. ‘네 장래희망은?’ ‘개처럼 죽는 겁니다.’ 아무리 MBTI고 뭐고 적성검사 아무리 해봐도 그거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너 뭐야? 변태야?

인간이 죽으면서 어떤 명분도 거기에 추가시켜 엮이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인간은 죽으나 사나 그건 의미 없는 거고 주님이 어떻게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가 그것이 초점이에요. 언약이. 율법이 그걸 지향합니다. 이걸 생각하게 되면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가 문제가 아니라 다에요, 다. 다 잘못되었어요.

얼마 전에 우리나라 한국 기술과학 쪽에서 발명한 게 있어요. 단돈 2000원짜리 다이아몬드를 보통 압력에서, 고압 말고, 일상적 공기압에서 2000원짜리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어요. 단돈 2000원이에요. 다이아몬드 쓰이는 데가 한두 군데 아닙니다. 공업용으로. 그런데 이것은 화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진짜하고 똑같아요. 아무리 봐도 구분이 안돼요.

어떻게 만들었는가? 다이아몬드는 탄소(C)가 있어야 돼요. 탄소를 5만 압력으로 해서 다이아몬드를 만들면 비용이 2000원가지고 안돼요. 엄청나게 많이 들거든요, 인공 다이아몬드가. 그런데 시스템을 만들어서 규소(Si)를 집어넣으니까 그 시스템, 환경 때문에 Si가 저절로 C로 바뀌어가지고 탄소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 아이디어를 사용한 거예요. 거기에 촉매가 뭐가 들어가는지는 일급비밀이죠. 절대 중국에 뺏기면 안 되니까.

이처럼 이 환경이요, 우리 인간을 위한 환경이 아니에요.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환경이에요.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자를 있게 하는 환경이에요.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잡은 악마가 이 세상을 이미 자기 세계로 꽉 쥐고 있단 말이죠. 꽉 쥐고 있거든요. 거기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율법이 들어온 거예요. 율법이.

율법을 한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6장 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되어있죠.

그냥 쉽게 ‘그 만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었다’ 이러면 될 건데 굳이 뭘 집어넣었습니까?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을 집어넣죠.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 눈에는 어떻게 보인다? 모세가 기도해서 준 걸로 보이지? 모세를 빼자, 우리. 모세 빼자. 모세를 빼는 거예요.

모세를 왜 뺍니까? 모세가 율법을 갖고 있었거든요. 모세를 뺀다는 것은 율법이 이제는 완성태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는 율법이 완성된 걸 모르고 아직도 율법 쥐고 있는 거예요. 율법이 그들은 언어로 보이니까. 죽은 나를 살리고 없는 나를 만드는 데에 율법으로 그들은 기대를 건 겁니다.

요한복음 5장 45절 한번 봅시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하나님)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하고 한 패라고 생각한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도 나오지만 고린도후서 3장에도 나와요. 고린도후서 3장은 안 찾겠습니다. 그냥 말씀드립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문자와 영으로 나눠요, 모세의 성경 말씀을. 너는 율법이 문자로 보이냐, 영으로 보이냐를 물어요. “문자로 되어있지.” “그러니까 너는 죽은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모세 문자가 스물스물 자기가 살아나네요.” 그러면 네가 영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문자에서 영으로 살아나려면 가만있으면 살아납니까? 누군가 육으로 오신 분이 율법을 홀로 다 이루어야 되죠. 홀로입니다. 홀로. 다른 사람 끼어들면 안돼요. 홀로 다 이루어서 성령이 오셔야 비로소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될 문자가 아니고 오히려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내 안에 스며들죠. 말씀의 사람 되게 만드는 작용이 성령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7장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야,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 자, 여기까지 보고. 없다 할 때 바리새인들이 반박하겠죠. “우리는 24시간 율법만 쳐다보고 산다. 너 지금 과한 행동이야. 네가 무슨 의도로 그런 이야기했는가? 진짜 진심인지…. 과하게 오버한 것인지, 진짜 우리가 못 지켰는지 당신의 기준을 제시하라.” 이렇게 되겠죠.

그 기준이 나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다시 말해서, 동일한 모세 율법을 두고 한쪽은 지키면 영생 얻는다, 복 받는다는 쪽이고, 한쪽은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쪽이다. 후자는 누구 생각입니까? 예수님의 관점이죠. 관점.

율법은 인간에겐 접근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예수님 죽음 용도이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을, 십계명을 못 지킵니다. 그런데 지키겠다는 자들이 누구를 죽입니까? 율법을 언어로 간주해서 율법을 지키겠다는 말은 나는 기어이 안 죽겠다는 말이고 기어이 나는 지옥 안 가겠다는 말이죠. 그 의도가 누구를 죽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을 준 모세의 취지를 반대하는 취지가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너한테 흘러갈 게 아니고 주님한테 흘러갈 걸, 네가 왜 중간에 끼어들어서 너 살고자 말씀을 지키냐 이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말씀 안 지켜도 그럼 삽니까?’ 이러거든요. 말씀 안 지키면 죽죠. ‘그럼 어떻게 삽니까?’ 그게 죽어야 될 이유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죽여서 구원하는 거예요. 죽여서. 율법으로 죽이다가 이제 십자가로 죽이는 거예요. 십자가 뾰족한 거 있죠. 콕콕콕 쪼아 죽이는 거예요, 그냥.

왜 죽어야 되는데 수박을 먹었냐 이 말이죠. 그게 우리가 접근 불가한 거예요. 우리 보통 인간들 생각에서 접근 불가한 거예요. 말씀이 살고 언약, 십자가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 야무지게 더 먹어야 되고 더 살아야 돼요. 악착같이. 삼백 얻고 다 해야 돼요. 죽으면 안돼요, 지금. 다음에 오백 얻어야 돼요.

율법을 바리새인이 못 지킨다는 말은 우리가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못 지키기 때문에 일찍이 우리 자신을 지킬 요량, 자격 이런 것을 스스로 포기하라 이 말입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내가 지켜서 이만큼 살아온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 28절,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야…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했죠. 바리새인들이 뭡니까?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될 의사가 없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만 되면 됐지, 당신의 제자가 될 의사가 없습니다.’ 누가 제자 되라 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이 심판용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율법이 핵폭탄입니다. 완전히 광야로 만들어버려요. 살고 싶어도 못 사는 동네가 율법적 관점이에요. 그런데 오히려 살아있는 게 이상해요. 왜 살아있지? 너 살려주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이 네 안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살려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만 증거된다면 굳이 내 목숨을 부지한다든지 내가 더 살아야 되겠다든지 그런 생각은 쓸데없이 무서움과 두려움을 사서 고생하는 바가 돼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아브라함 자손인데, 아브라함 자손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과 더불어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게 돼요. 언약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보호를 받게 됨으로써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끝까지 잘 들어야 돼요,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육신으로서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철저하게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같이 채득하고 경험해야죠. ‘아, 이게 나를 완전히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아무나한테 고개 숙이고 아부 떨고 했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그 환경 속에서 계속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히브리서 2장 15절, 14절, 16절 지킬까요? 지키지 마세요. 히브리서 14절, 15절을 우리 안에서 완성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때로는 비굴하고요. 비굴함으로써 더욱더 우리는 은혜가 되죠. ‘내가,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구나.’할 때, 뭐가 나오느냐? 감사와 고마움이 십자가를 경유해서 나오는 것,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슨 환경을 대처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자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이런 우리를 주의 언약망과 연결되어서 말씀을 살려내는 백성 되게 해주셨사오니 모든 고마움을 주께만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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