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강-YouTube강의(절망 욥기 2:9)20240319-이 근호 목사
제465강, ‘절망’. 선지자, 욥도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를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뽑아서 그에게 선지자 기능을 부여하신 것은 그 특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어느 정도로 전혀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선지자를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욥기 1장부터 쭉 보게 되면, 욥의 1장은 굉장히 짧아요. 욥은 당대 최고의 재벌이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문제가 없다, 다 하나님 섬기고 욥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모범적인 가정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욥 1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욥처럼 모범적인 신앙인 가정을 만들어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인데 왜 그러느냐 하면 욥이 가진 것, 욥이 건강한 것, 욥의 가정이 화목한 것, 그걸 모델로 삼아버린다는 거예요.
그걸 모델로 삼아서 ‘욥은 양이 몇 마리인데 나는 양이 몇 마리이다. 욥은 식구가 10명이 넘더라도 화목한데 우리 가정은 왜 싸우냐. 욥처럼 순종하면 복을 내렸을 것이다.’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욥이 부자 되고 신앙적으로 이웃을 많이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칭찬과 칭송이 떠날 일 없이 받는 이유는 절망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절망.
이게 선지자의 역할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에 나오는 그 구절을 말씀하시면서… 최고의 절망이죠. 물론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을 예언하기 위해서 그런 거 다 압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뭐 다 알지만 낙심이라는 것이 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육신의 몸, 예수님도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느냐 하면 말씀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반항하고 반발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욥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욥에게 허락할 때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처음에는 뭐 날아갔냐 하면 재산 날아가죠. 자식들 다 날아가죠. 그런데 두 번째 시험은 뭐냐? 재산 날아가고 자식 죽어도 욥은 범죄치 아니했다 했어요. 욥기 1장 22절,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21절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렇게 되어 있죠. 벌거벗고 나왔기 때문에 벌거벗고 돌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욥의 잘못이에요.
벌거벗고 나왔는데 욥에다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입혀서 돌려보내요. 그게 뭐냐 하면 절망이고 반발이고 반항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항의하고 항변하는 것을 실어서 욥을 하나님께로 보내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을 왜 이렇게 사용하시는가? 그것은 이 욥이 이방인이잖아요. 이방인에게는 아직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에게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자기들끼리 비교한다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목사님 왜 그리 미남입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목사님 왜 그렇게 운동을 잘해요?” 이런 거. “집사님 왜 키가 커요?” 이런 거. 그렇게 할 때 거기에 대해 여러분 답변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키 큰 것이 절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취지를 ctrl+V, 복사해서 붙여넣는 복제판으로 이 땅에 남겨둔 거예요. 누구든지 십자가 영,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신약 때 성도를 선지자라 해요. 왕 같은 제사장, 선지자라 해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선지자는 본인 인생이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만나고 이야기할 때 다들 하나님 믿고 복음 알고하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하고도 편하게 이야기 못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주님의 역할과 기능이 그 사람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함께 있는지 함께 안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성령을 받은 성도의 특징은 자기에게 성령 온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 이유는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절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다. 그걸 마태복음 7장에서는 좁은 길이라 해요. 좁은 길.
물론 이 좁은 길이 구약의 욥은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홀라당 다 날아가고 자기 몸 아프지만 신약에서의 절망이라 하는 것은 굳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는 삶을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해서 이상하게 재미가 없고 흥미가 없고 관심이 없는 걸 말하는 겁니다.
지금 욥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자기에게 있단 말이죠. 있는 게 없어졌잖아요. 있는 게 없어졌으니까 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내 게 아니니까 가져가겠다 하면 얼른 돌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첫 번째 시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욥의 인생을 통해서 절망이 무엇인가 거기다 사진을 인화하는 것처럼 그 이미지를 실어버려요. 자, 여기서 욥기에서 제일 난해한 게 나와요. 어떻게 절망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
인간의 아이디어로는 도저히 상상 안 되죠. 신앙인이면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 돌리고 뭐 이래야 누가 봐도 어? 천국 가겠네, 그게 되는데 욥기 1장부터 해서 2장 같은 경우에는 아예 아내까지 동원합니다. 2장 9절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했거든요.
이 철딱서니 없는 아내가 이야기했다 하잖아요. 그 뒤에 보면 이 이야기를 이 마음을 욥 본인이 인수인계해요. 3장에, “차라리 죽여 주옵소서, 마마. 차라리 목을 치옵소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겠죠. “내가 왜 네 목을 쳐야 되는데?” “너무 아픕니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있던 나에 대해서 너무 절망적인 이미지, 내가 이런 인간인 줄 몰랐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괜찮은 이미지가 홀라당 다 긁혀나가고 진짜 내가 평소에 욕했던 사람들의 이미지가 나에게 덮쳤습니다.” 3장부터 해서 욥의 이런 고백이 40장까지 가는데요.
40장 4절에 보면 “나는 미천하오니” 이제 이야기해요. 그 가운데서 친구 4명이 보조를 맞춰줍니다. 친구 4명이. 욥으로 하여금 ‘절망적인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 이 말을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복 받았냐? 그러면 네가 생각하지 않는 네 자신에 대해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돼?’라고 절망해봤어?” 라고 묻는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에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돼’ 라는 생각을 경유해서 그걸 거쳐서 비로소 하늘나라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야, 이게 은혜구나. 이게 내 쪽에서 거들, 내 구원에 대해 내가 거들 문제가 하나도 없구나.’ 여기에 욥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갖 역경과 수모를 다 겪고 있습니다. 욥도 인간인지라 가만있지 않고 계속해서 반박하고 변론하고,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내가 뭐 문제 있는데? 나 죄 없다.’
그러나 결론은 뭐냐? 죄 없다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너는 지금 하나님의 복에 대해 왜곡되게 이해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죄 없는데 왜 재앙이 오느냐?’ 그게 하나님의 복을 잘못되게 생각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거꾸로 생각해야 되죠. 그 거꾸로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강도도 구원받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