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강-YouTube강의(패배 사사기 20:28)20240305-이 근호 목사
제463강, ‘패배’. 패배에 대해서 기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은 패배해도 자기는 상대적으로 성공하고 싶죠. 도리어 남 패배하게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자기는 그만큼 패배 안 했으니까 상대적으로 성공한 느낌이 확 오거든요. 사는 재미, 쏠쏠한 재미가 거기서 오는 겁니다.
이 패배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민족이 있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 심적인 중압감, 압박감으로 작용하게 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 언약궤 있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에게 주변 나라와 싸움을 붙여볼게. 붙이게 되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다는 그 증거를, 적들은 패배하고 너희들은 승리함으로써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하나님께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언뜻 상식적으로 봐서 ‘이제 우리는 걱정 없다. 하나님이 뭘 해도 승리케 해준다는데 우리는 패배할 리가 없다.’라고 안심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과연 그런지 조바심을 내겠습니까? 그런 약속을 받으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죄인이잖아요. 아담의 자손이에요. 그래서 약속은 약속대로 받았는데 그 약속이 자기의 마음과 화합하질 않아요. 인간의 마음이 그래요. 약속은 하나님이 했지만 그 약속이 약속대로 인간 마음대로 호락호락 약속과 합치되질 않습니다. 합치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주의 약속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고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으면 기도할 때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겠어요? ‘저는 사람의 약속 안 믿고 하나님의 약속만 믿습니다.’ 이 말은 약속이 자기 마음속에 지금 이렇게 딱 결합이 안 되었다는 티를 다 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하나님 못 믿겠습니다.’란 말을 이렇게 안 들키고 하나님께 아부하듯이 조작해서 위장해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믿습니다, 도저히 못 믿겠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한 거예요.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으면 자기 속편한대로 살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천국 보내주고 이렇게 하면 복주고 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믿기지는 않고 이걸 안 믿으면 또 벌 받을 거 같고 또 믿으려고 하니까 내키지를 않는 거예요. 마음속에.
이럴 때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들, 불신자들을 천국 가는 성도, 백성으로 어떻게 전환하는가? 그 전환하는 방식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방법은 뭐냐? 하나님 믿고 성공하기를 기대했는데 결과가 실패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의 성공, 이스라엘 성공이 뭐냐를 알려줘요.
그래서 제목이 ‘패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자체적으로 자기 나라가 그럴싸하게 하나님 다 잘 믿는 열두 지파로 운영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그렇게 예단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0장에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실패로 끝납니다.
사사기 20장에 베냐민 지파가 어느 레위 가정의 첩을 욕보여서 죽였어요. 죽이니까 그 범죄에 대해 너무나 충격을 받은 레위인이 자기 죽은 첩의 시체를 열두 덩어리로 칼로 취하여 찍어서, 찍어야 됐어요, 사사기 19장 29절에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냈다 했어요.
자, 이 열두 덩이 가운데서 베냐민 지파도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베냐민 지파도 있었겠죠. 열두 덩이니까. 열두 지파니까. 레위인은 땅이 없고 땅이 있는 열두 지파에 열두 덩어리를 다 보냈죠.
그럴 때 우리 인간적인 상식 같으면 베냐민 지파가 어떻게 나와야 돼요? “아, 우리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 나쁜 건 아니고 어느 지파에나 다 그런 못된 자식들이 있듯이 부랑배가 참 그런 몹쓸 짓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신 이 정의로운 땅에서 이거는 이방인보다 더 못한 악한 짓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지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처벌하고 바른 이스라엘 되는 데에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상식적이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베냐민 지파는 똘똘 자기들끼리 뭉쳤어요. 그러니까 나머지 열한 지파가 총궐기를 해서, 베냐민 지파가 자체적으로 처벌안하니까 잘못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반성 안하고 있으니까, 이스라엘 전체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손 좀 봐야 되겠다 해서 군대를 모았습니다.
군대를 모았는데 너무나 독한 악행을 보고 사람들이 분개가 일어서 열한 지파의 엄청난 숫자와 베냐민 지파의 소수가 전쟁을 붙었는데 이 숫자 차이가 엄청나요. 사사기 20장 17절에 보면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의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그런데 20장 15절에 “그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이만 육천하고 사십만 명. 도대체 몇 대 몇이에요? 엄청나죠. 20 대 1까지는 안 돼도 15 대 1 정도는 넘죠.
그래서 이제 소위 자칭 정의롭다는 연합군이 마땅히 자기는 나쁜 짓 안하고 베냐민 지파는 나쁜 짓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보니까 나쁜 사람은 우리한테 망하고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붙어보니까 누가 이겼어요? 소위 정의로운 연합파가 소수의 베냐민한테 첫 번째 전쟁에서 졌어요. 21절에 “이만 이천”명 죽었어요. 두 번째는 25절에 연합군들이 “일만 팔천”명 죽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자체 내에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때에 인간이 정의감으로 뭉치면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쪽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해주고 다시 괜찮은 이스라엘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패배를 해야 돼요. 패배.
다시 말해서 베냐민 지파에게 일어난 그 악에 대해서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는 책임이 베냐민 지파에게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사사시대에 베냐민 지파에게 일어난 악행은 사실은 사사시대 전체에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묻게 한 악행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거예요. 허락하신 거예요.
나는 선한데 너는 악하다,라는 사고방식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정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 측에 일어나는 것은 열두 지파를 따로 나눠서 어느 특정 지파만 나쁜 게 아니고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엉망진창이라는 증상을 알리기 위해서 베냐민 지파에게 그러한 특출한 악행을 유발한 겁니다.
결국 세 번째 전쟁에서는 유인책으로 베냐민 지파가 패배하는데 그때 (27,) 2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 물으니라(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가 말리이까”
그전까지는 자기가 처벌자고 베냐민 지파는 처벌받아야 될 자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이제는 우리가 과연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자격이 있는가를 하나님께 물은 겁니다. 이 말은, 우리 손으로 우리가 처벌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으로 처벌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정의롭지, 우리는 남을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패배를 의미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이 세상을 볼 때 저놈은 죽여야 되고 저놈은 지옥 가야 되고 하지만 그 문제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 우리 뜻이 뭉개지고 주님 앞에 패배자가 되는 그 절차가 있어줄 때 주님이 승리해야 되지, 건방지게 내가 승리하는 일은 다시는 없도록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