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강-YouTube강의(심판의 양편 시편 119:67)20240206-이 근호 목사
제459강, ‘심판의 양편’. 분류작업이라고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딱 마음에 와닿는 게 있어요.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쭉정이하고 알곡.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리고 진노의 그릇과 사랑의 그릇. 그렇게 분류하게 되면 뭐가 문제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좋은 쪽에 두려는 경향이 본인에게서 삭제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고기하고 나쁜 고기가 있는데 어느 누가 나쁜 고기 되고 싶습니까? 그러니까 성경 해석 초장부터 잘못된 거예요. 이것을 탈피해야 되는데 탈피할 수가 없어요. 나쁜 건 남이 가져가고 좋은 건 내가 갖고 싶은 인간의 탐욕적인 마음을 본인이 어떻게 극복할 수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마음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문제성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양과 염소, 천국과 지옥 이런 이야기하면 눈이 번쩍 한다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언의 아니면 말로도 어떤 압박감을 막 주죠. ‘천국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자기 혼자 김칫국 마시면서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압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일종의 시위, 데모를 하는 식으로 강력한 철야기도부터 해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출발점부터가 성경해석을 들어갈 자격도 안되고 볼 자격도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해석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분류를 하는데요. 인간과 말씀 사이를 분류해버려요. 천국과 지옥이 아니고 인간과 말씀 사이를 분류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과 이쪽 편에 말씀, 이렇게 분류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도 그걸 몰랐어요. 본인이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라면 이미 분류에 의해서 이쪽 천국에서는 제외된 존재에요. 그 자체가 인간입니다. 처소에 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4장에서.
그게 이미 구약에 나옵니다. 시편 119편 67절, 그리고 71절, 두 절을 보게 되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고난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말씀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고난이 주어진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좋은 편에 두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좋은 편에 못 서게 분류를 시키는 거예요.
네가 성경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 자체가 ‘모든 구원의 능력은 말씀에서 나왔다’ 하는 그 자리에서 너를 시작케 하기 위해서 너는 너의 모든 뜻과 상치되는 상황이 너에게 들이닥쳐야 된다. 그걸 두 자로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천국 가려고 하고 좋은 고기 되려고 하지, 인간은 고난 쪽에 서려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고난 쪽에 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편하게 천국 가고 싶지, 고생하면서 천국 가는 거 싫어해요. 하여튼 고난 자체가 우리 생리에 안 맞아요. 힘들게 사는 것 자체를 우리가 자꾸 거부하고 싶어요. 힘들게 사는 거. 열심히 돈 벌고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생하려고 합니까? 편하게 살려고 돈 벌고 공부하고 하잖아요.
고난을 누가 원합니까. 원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말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쓸데없이 말씀을 쥐려는 자의 손을 때리는 거예요. ‘건방지게 네가 말씀을 가져? 저리 안 가?’하고 떼놓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의 상태에 돌입되는 겁니다. 고난의 자리에 딱 들어가니까 야, 자동적으로 말씀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뭘 아느냐 하면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쉽게 말해서, 나만 생각했더니. 나 잘되는 것, 나 편한 것과 나 구원받는 것만 생각했더니만 주님은 내 편이 아니고 말씀 편이었어요.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예수님은.
누가 구원받습니까? 말씀대로 되지 뭐. 간단한 문제에요. 나 구원받습니까? 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지옥 가는 겁니까? 말씀대로 고난받을 때 구원받는 거예요. 말씀이 먼저 와서 내 중심을 해체시켜 버려요. 부숴 버려야 돼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안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그전까지는 나는 내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게 그릇 행했죠. 뭔가 착각하고 오해하는 겁니다. 세상이 내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러면 세상은 자기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고생을 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가 어떤 수모도 감당하리. 이것은 자기의 각오고 자기의 오기죠. 그것이 바로 그릇 행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자기는 고난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고난이 아니고 고생이에요. 고난은 말씀을 위해서고 고생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생과 고난이 다른 겁니다. 실컷 고생하고 지옥이나 가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옥 가는 거예요.
시편 119편 71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니까 고난당하기 전까지는 주의 율례를 모른 채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주의 율례는 관심 없이 자기가 자체적으로 어떤 법칙을 만들고 이만큼 고생했으면 이만큼 기도 악바리로 했으면 주께서 양심 있으면 응답은 해주시겠지.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건 자기를 위한 법칙이에요. 남을 위해서 합니까? 이웃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런 법칙을 만들고 그 법칙에 따라서 자기가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는 것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 내에 자기가 만든 법칙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고난이 아니고 스스로 자처해서 고생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자학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한창 고난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고난주간이었던 모양이죠. 고난주간에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제자들과 술 잡쉈어요. 술 잡쉈다는 이야기 나와요. 술 잡숫고 음식 먹고 ‘실컷 먹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란 듯이. 그러니까 딱 걸렸어. 너희들 딱 걸렸어. ‘지금 세례 요한 제자들도 고난받는데 당신과 제자들은 지금 완전히 잔치 분위기다. 남들은 지금 고난받기 위해서 자기 금식하는 거 안 보이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유대인들의 특징은 그겁니다. 하나님 앞에 내 할 도리를 해야 그 결과가 주어진다고 본 겁니다. 주님께서 주신 고난이 오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고 본인이 그걸 만들어요. 장만을 해요. 알아서 스스로 자기를 때린다고요. 스스로 자책하면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모든 티를 다 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고난? 고난은 딱 하나야. 나를, 신랑을 잃어버릴 때 고난이야.” 아무리 잘 먹고 부자가 되도 고난이에요. 수입이 늘어나고 몸 건강하고 무탈해도 고난이에요. 예수님 없으면 모든 게 고난이다. 반대로 아무리 몸이 아프고 돈이 없더라도 나(예수님)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잔치다. 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신부가 아니고 신랑이기 때문에.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한테 말씀의 완성이 들어있습니다. 주의 율례가 예수님한테 꽉꽉 다 담겨있어요. 내 쪽에는 없어요. 주님 쪽에 있어요. 주의 율례를 다 이루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복입니다. 그 주님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철저하게 무시당해도 상관없어요.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저한테 제 뜻대로 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분류를 할 때, 내가 어디 갈꼬? 천국? 지금 이것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쪽과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에게 버림받았으니까, 인간에게 버림받은 쪽과 인간 쪽을 분류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으로 분류해서 주님이 주님 되는 그 고난이 우리에게 도달한다면 뭘 해도 우리는 천국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