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강-YouTube강의(분류 요한계시록 3:1)20231219-이 근호 목사
제457강, ‘분류’. 분류라는 것은 섞이지 않도록 따로따로 가려내는 것을 분류라고 합니다. 섞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지구가 일찍이 있고 사람들은 이 지구가 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하는 겁니다. 양과 염소로 분류하는 겁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분류하는 것이고 나쁜 고기, 좋은 고기를 분류하는 거고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합니다.
이 분류작업을 ‘심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분류작업에서 이미 끝난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이야기해요. 인간의 자리는 자기가 선택할 자리가 없어요. 하나님이 정하신 딱 두 자리 중 하나입니다. 사망이냐, 생명이냐. 이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요한복음 3장에 입각해 보면 어두움에 속했느냐, 빛에 속했느냐. 이 두 종류밖에 없어요. 어두움도 아니고 빛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주 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짜릿할 정도로 이야기해요.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과 생명책에 명단이 빠져있는 사람, 딱 두 종류입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이 있고 생명책 명단에 없는 사람은 어느 책에 있느냐? 행위책에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책이 달랑 두 권으로 남습니다. 섬뜩하죠? 섬뜩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분류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흔쾌히 이걸 용납했겠어요, 아니면 방해하겠습니까? 아주 강력하게 방해를 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을 본인의 의지로 결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선악과 나무를 따먹고 그 지식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선악으로 심판하는 것은 주님 소관이기 때문에 심판받는 대상인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가져버리면 본인이 가진 지식가지고 본인을 재판하는 경우가 벌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각해서 심판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너를 심판하는 그러한 지경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따먹지 마라 했거든요. 그리고 선악과 나무는 악마를 노리고 악마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준 거예요. 상대가 악마 상대였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악마 심판에 중간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을 자기의 볼모로 삼는 거예요.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 아시죠? 전쟁하면서 하마스가 뭐를 볼모로 잡았습니까? 이스라엘 민간인을 볼모로 잡았잖아요. 하나님이 007이고 악마가 범인이라면, 007이 총을 쏘려고 하는데 범인이 본드 걸을 갑자기 납치해가지고 자기 앞에 딱 세우면서, 나를 죽이려거든 네가 사랑하는 네 여자까지 죽이고 난 뒤에 날 죽이라 하고 여자를 딱 볼모로 잡잖아요. 악마가 인간을 볼모로 삼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을 포기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을 놓쳐버리면 자기 가슴팍이 정면으로 다 보이기 때문에 자기 가림막이 사라져요. 인질이 없는 거예요, 인질이. 참 이거 보통 문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인간들은 자꾸만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심판합니다. 내가 나쁜 짓 안하고 바르게 살면 그거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교회 안 나가다가 나가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거 하나님 안 보이십니까? 이정도 착하면 됐죠, 뭐 어떻게 더 착합니까? 저도 착함과 악함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구별 못한다는 거예요. 너는 구별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는 이상 너는 선악을 구별 못해요. 선해도 악이고 악해도 악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 중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면 좋겠습니까?
아까 생명책 이야기했는데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나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꼭 껴안고 있어요. 자기 자신을. 마귀가 인간을 안 놔주듯이 인간도 자기를 꼭 껴안는데 인간은 자기 이름을 앞장세우면서 그 이름 뒤에 진짜 자기가 숨어있는 방식이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나옵니다. 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데라 하는 것은 원래 그 지역의 이름이니까 별 의미 없는데, 그 사데 교회가 무슨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으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교회에요. 사데 교회 스스로 지은 별명이 ‘우리는 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 이름 뒤에 온 교회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겁니다. “그치 그치? 우리 다 살았지, 그치?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다 살았잖아.”라고 그 이름으로 전부 한통속이 돼서 모여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그 이름이 누가 분류한 이름이냐?” 네가 산 사람 되고 싶어서 네가 스스로 너를 분류시킨 이름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죽은 자 쪽은 싫고 산 자 이름이 내 이름에 맞다고 난 그걸 선호한다는 겁니다. ‘나 죽은 자 되기 싫어. 나 살아있는 자 되고 싶어.’라고 한 거예요.
사데 교회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거 취소.” 그거 취소하라는 거예요. “살았다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너의 그 이름, 살았다 하는 이름 그것은 너희들끼리 서로 의견이 모아져서 한 이름인데 나한테는 안 통한다. 그 이름 무효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 있는데 내가 이름 지어줄게. 너희는 죽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장 1절.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 2절에 보면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네 평가 중지하고 내 성령이 교회에게 하는 평가를 받아들여라. 실상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다. 그걸 굳게 하라는 말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이 말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산 자의 이름이 아니고 죽은 자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악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갖고 있고 선악은 자기를 좋은 쪽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인간은 쉬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자기를 좋게 봐요. 항상. 자기를 좋게 보는 인식을 주께서는 그러니까 너는 죽은 자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뜻은 뭐냐? 생명책이에요. 생명책인데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이 말은 생명책 자체가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내 행위는 죽은 것이고 죄악된 것이니까 내 행위를 포기하는 거예요. 내 행위를 포기하고 주님의 행하심만 붙드는 걸 가지고 이겼다고 하는 거예요. 사데 교회 그때.
이 말은 사데 교회 근처 모든 사람들이 다들 선악과 지식을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걸고 도박, 게임, 투자, 투기, 비트코인, 뭐 온갖 거 다 하죠. 자기 이름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확인해주기 위해서 행하는 사람밖에 없을 때, 그들에게 이겨라. 무엇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나는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았다. 이게 바로 이긴 자요,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 뒤에 주의 이름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책에 이름이 살아있는 참된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