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비 내림
2024년 1월 17일 본문 말씀: 스가랴 10:1-5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10: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10: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10:4)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10: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 그들이 싸워 말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인간이 땅이 필요없는 존재이었습니다. 낙원에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서 쫓겨나고부터 인간에게 땅은 유일한 생존의 터전이었습니다. 땅 없이는 못사는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살기에 죽어야 될 존재’로 몰아붙이십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에 어디에 가도 필히 죽어야만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을 통해서 ‘왜 그들이 꼭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뽑은 민족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땅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생긴 땅입니다. 어떤 목적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내부 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절개해서 그 안에 계신 독생자를 끄집어내어 이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내부 개방입니다. 이 사실이 특별히 ‘약속의 땅’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민족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일체입니다. 숫자로 표기하면 ‘1’입니다. 그러나 약속이 보다 분명히 전개하게 되면 ‘1→2’가 됩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둘로 갈라집니다. 그러다가 2는 1이 되면서 그 1로 통합이 됩니다. 그것이 유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유다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고, 요셉은 결국 그 유다에 복속된다는 겁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슥 10:6) 반면에 인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그냥 처음의 1이 계속 1이었다가 1로 마감되기를 원합니다. 중간에 1이 2로 갈라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들은 1이 쪼개져 2가 되는 것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자기 동일성이 깨어져버리니까요. 하나님께서 바로 이점을 감안해서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짓는 심판을 해버립니다. 마태복음 25:32-33에 보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염소가 어떤 자를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내에 드라빔이라든지 복술자들의 설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빔은 작은 우상체를 말하는데 이는 자기 만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용도로 쓰여지는 우상입니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창 31:35)
즉 우상이 성행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마련한 것은, 약속의 성취가 그 어떤 인간의 노고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고 약속 스스로 성취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이 땅에서 얼마나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버티느냐를 보여줍니다.
종(노예)라는 것은 자신이 자기의 목적이 되지 않는 존재를 뜻합니다. 보통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자들에게 사람들이 이런 식의 조언을 하지요.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종이 된 자는 생각하며 살면 안됩니다. 시킨대로 살아야 합니다.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와서 양과 염소로 나뉜다고 하니, 누구나 자신을 양이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노예(종)는 자기 생각을 개진하면 안됩니다. 모든 것을 주인 홀로 결정하고 종은 그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어느 인간이 자기 미래와 운명에 대해서 손놓고 있을 자는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니 악착같이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으로 결정짓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에 드라빔이나 복술자나 혹은 자기를 위로할 신을 찾아다니는 현상이 범람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이스라엘 내에 양은 없고 모두 염소였던 겁니다. 염소 의식은 오늘날 세상에서 ‘정의로움’으로 통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보다 넓은 땅을 가진 지주가 있는데 가뭄 때, 농부들의 여러움을 이용해서 땅을 담보로 해서 곡식을 빌러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여 세월이 가지고 자식에 자식 대를 이어가면서 저금씩 조금씩 결국 그들 농민의 땅이 전부 지주 한 사람의 소유가 되고 나머지는 그 지주의 소작농이 되었다면 이 인간 세상에서 누가 들어도 격분할 일이 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에 의하면 천국은 바로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겁니다. 즉 소작농에서 벗어나 자유농민을 꿈꾸며 반란을 일으키는 농부에 대해서 주인을 잔인하게 진멸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양이 된다는 것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양은 어떤 식으로 생겨나는 겁니까? 요한복음 10:14-15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복사되어 그대로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됩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목자의 특수한 죽음을 가운데 두고 대화가 됩니다. 인간들은 단비를 받아서 자신이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단비 ‘안에서’ 들어와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늦은 비, 곧 봄 비는 이스라엘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백성이 아님을 까발리시고 심판하기 위한 두 번째 비내림입니다.
따라서 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위해 범죄한 이스라엘 사용하게 되면, 구원이란 결말로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동질성을 사수하기 위해 과거를 시작점으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일관된 약속 성취를 위해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결말을 시작점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성(실존)으로 살게 됩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말씀을 이용하는지 양면을 다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비록 종으로 살아가지만 결말적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이중성을 통해서 늦은 비가 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7강-스가랴 10장 1-5절(두 번의 비내림) 2401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0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 그들이 싸와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땅 싸움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살면서 땅이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죠. 창세기 3장에 인류가 범죄하고 난 뒤에 어디로 이동해서 살았느냐? 낙원에서 추방되어서 땅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낙원에서 살던 그러한 수위, 그러한 환경을 자기 힘으로 조성하고픈 본능들이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살았던 적이 있으니까, 좋았던 적이 있으니까 그때 그 시절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땅에서 그만한 수준의 삶의 환경을 직접 조성하려고 시도하게 되는겁니다. 그런데 그 땅이 뭔가 하나님이 심어놓은 장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에서 살도록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못살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니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둘 수 있는 그것을 계속해서 매순간 느낄 만한 장치, 그것은 땅에서 올라오는 그 저주를 인간의 능력으로 수완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끝까지 갋을 거야. 끝까지. 내가 정녕 죽으리라 한 것은 이게 빈말이 아니고 너의 숙명이 되고 너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게 내가 확실하게 느끼도록 해주겠다는겁니다. 어디에서? 땅에서 그렇게 해주겠다는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갈등이 생깁니다. 땅에서 살아야될 자기 본능과 기어이 죽이겠다는, 땅에서 죽는 존재로 내가 한번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하나님의 압박, 이 둘 사이에서 괴롭게 인간은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좀 특별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신다고 했거든요. 그 땅이 그땅이라면 이스라엘에게 주신땅은 별 의미없어요. 이땅에 애굽에서 살다 죽으나 약속의 땅에서 살다 죽으나 그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대동소이하죠. 별다른 것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다가 뭐를 주시느냐 하면 잃어버렸던 낙원, 천국이죠.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그 좋은 환경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고 같이 살 수 있게 해주는 땅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이 스스로 약속 되도록 성취가 가능한 땅. 약속이 약속 스스롭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을 지키는 조건 하에 구원을 받는게 아니고 천국을 가는게 아니고 인간이란 것이 뭘 해서 다시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존재 자체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그러한 환경이 약속의 땅입니다. 니가 잘해보자 해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니 운명은 전혀 달라질게 없음을 확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 절감하게 하는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게 뭐냐? 내가 손대지 않더라도 약속이 약속답게 된다면 굳이 내가 내인생을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 다 부질없는 일이 된거에요. 그것을 가르쳐주는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참 에덴동산 좋았다. 그때 너무 좋았지. 어떻게든 내가 노력해서 그 에덴 동산의 생활을 다시 한번 또다시 할 수 있도록 내가 내한테 조치를 해봐?” 그럴 필요가 없다는거에요.
그건 니 소관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걸 배우는거에요. 약속의 땅에서. 그러면 이 약속의 땅은 어떻게 약속이 스스로 성취가 되느냐? 어떤 그런일이 특수한 땅, 약속의 땅에서 이루어 지는가? 그때는 이스라엘은 죄인과 결부해서 그걸 이루는 겁니다. 자, 여기서 오늘, 죄인과 결부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비가 내릴 때 비가 이른비와 늦은비, 비를 비의 특별한 의미가 가미된 비를 두 파트로 나누어서 줍니다. 이른비는 10월달, 늦은비는 그다음해 2월달 3월달에 줘요.
그 사이는 비가 오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어떤 타이밍을, 두 개의 특별한 의미의 타이밍을 놔요. 두 개를 놓게 되면 처음에 보통 만약 비가 한번 온다면 사람들은 그 비를 통해서 경작을 해서 여기서 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살 수 있는 곡식을 생산합니다. 이거는 1로부터해서 1로가서 1로가는거에요. 이건 변함이 없어요. “비가 한번왔다. 나는 온 비를 가지고 잘 가두어서 농사를 잘 지었다. 누가했다? 내가했다. 그래서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나는 풍족히 배불리 먹었다.” 1에서 1에서 1로가는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비를 둘로 나누었어요. 1에서 2. 이른비 늦은비 이걸 쪼개서 줘버려요. 쪼개서 줘가지고 1에서 시작한 것이 두 번째 비가왔을 때 무엇을 들통내느냐 하면, 인간이 땅에서 경작하면서, 그땐 농경시대니까. 이 비의 목적을 자신의 생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냅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고 나를 위한 땅으로서 자기의 본능을 인간은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 안에서 이스라엘들이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거에요. 뭐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딱 듣는 순간 인간은 “그 복 내가 잘되기 위해서 그 복을 내게 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는거죠. 1에서 1에서 1로가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피로 죄씻어서 천국을 나한테 준다. 인간은 딱 듣는순간 내가 현재 세상에서 고생하는 내가 예수님이 준비하신 죄사함을 받아가지고 내가 천국간다. 1에서 1에서 1로가요. 그게 바로 가짭니다. 그걸 들통내는거에요.
늦은 비가 아무 짝도 쓸모없어요. 늦은비가 주어져야될 이유가 그 1에서 1에서 1로가는데에는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1에서 2, 2에서 1로 가야 돼요. 자 그럼 2는 무엇인가? 10월달에 비내리고 그다음에 늦은비 2월달이나 3월달, 2월달에 만약 비가 온다면 그 사이에 무엇이 무르익느냐 하면 천국의 하늘나라 백성이 될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는 그러한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를 첫 번째 비를 줌으로써 그것이 노출되게 하는 작전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거에요. 어디에서? 약속의 땅에서.
그렇다면 늦은 비는 어떤 효과가 있느냐? 앞에 텀을 줌으로써,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 텀을 주면서 생성된 “이런 인간은 내 절대로 천국에 안 받아준다.”는 그것을 작살내는 비가 두 번째 비에요. 봄비, 봄비가 늦은비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이렇게 했을 때 그 소낙비를 번개처럼 주는데 그 소낙비 주면서 비가 올때까지, 소낙비가 올 때, 늦은 비가 올때까지 어떤 현상을 이렇게 성숙시키느냐? 키워내는가? 그게 2절에 나옵니다.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이래 되어있어요. 이거 거짓되죠. 하지만 이거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 사는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만 거짓된 거에요. 사람은, 인간들은 약속의 땅을 원한게 아닙니다. 땅을 원한거에요. 인간은 땅이 필요한 거에요.
약속이라는 그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게 필요한 거에요. 약속을 왜 줬는가? 약속은 하나님의 내부가 절개되어서 어떤 순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진행 시키는가 그걸 개방하는 용도로 약속을 준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절개에요. 자기 배를 자기가 째는겁니다. 그 배를 째게되면 하나님 안에 하나님 들어있어요.
독생자죠.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안에 있는 독생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바로 약속의 민족에 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야 될 갖가지 사태고 사건들이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아, 그렇구나”하면 안되고,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하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입장이에요. 위로가 필요한 입장이에요.
하나님은 자기절개, 자기를 째서 개방하고 자기를 분해하지만, 우리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뭐냐? 내가 째지는 것, 내가 개방되는 것 내가 절개되고 쪼개지는 것 인간은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원하는데, 하나님을 원하는데 구원의 하나님을 원하는데 어떤 하나님이냐?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안전빵으로 다치지 않고 내가 흠나지 않고 온전하고 또 온전해지는 온전함의 극치로서 성장하는 그런 신을 원하는거에요. 그게뭐냐? 드라빔이에요.
그것 때문에 복술자들을 찾게되고 점치는 자, 신접한 자를 찾게되는겁니다. 나를 지켜줄 하나님은 어디계신가요? 소비자가 있으니까 공급자가 있는겁니다. “하나님 저 아프기 싫어요. 가난하기 싫어요. 나 내 일에 실패하기 싫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소문난 신이 아파서 치료하지말고 아예 애초부터 안아프게하고 망하고난 뒤에 회복, 골치아픕니다. 아예 처음부터 단단히 단속해서 안망하는 인생이 되게하고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로서 같이 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농사안되는데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왜 비를 내려야 되는데?” “비가 있어야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산다니까요?” “그래서? 왜 니가 살아야 되는데?”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는 것은 비와 함께 살아라는게 아니고 비 안에 살아라는거에요. 비와 함께 살아라는게 아니고. 주와 함께 살아라는 말이아니고 주님 안에 들어가서 살라는 말이죠.
주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다가 절개해서 아들을 끄집어내 그걸 땅에다가, 이 저주스러운 땅에 내보낸것처럼 주님께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안에 죄인을 품고 늦은 비에 이걸 개방해서 “봐” 끄집어내느거에요. 니가 하나님 여호와를 찾고 니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너가 쪼개지기 싫어서 너가 둘이되기 싫은거에요. 나는 하나로 동일성을 유지하고싶은거에요. “어제의 괜찮은나, 오늘도 괜찮고 오늘 괜찮으면 내일도 괜찮다.”
우리는 중간에 끊어지는 것을 최고 두려움으로, 최고로 무섭게 여기는겁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남의 인생은 모르겠지만 내인생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자기 다짐같은것들이 작용하고있어요.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입니다. 방금이야기한 것은 우리 이방인들이고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게 이 스가랴를 계시하면서 그게 바로 니가 상상도 못한 그걸 뭐라고 하냐? 그걸 염소라고하는거에요.
여러분들 마태복음 25장 32절에 보면 “모든민족을 그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함같이”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목자와 양을 심판주가 오른쪽에는 양 왼쪽에는 염소를 해서 양은 천국에가고 염소는 지옥에 보낸다는겁니다. 그렇게 하신다는거에요. 세상에 이 이야기듣고 염소 될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염소인거에요. 자기가 목자가 아닌데도 자기가 목자라고 치고 나 염소 양 중에서 “나 양할래요” 하고 자기 의사를 제시하는거에요.
이건 자기가 안쪼개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레위기 25장 55절을 먼저 염두에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레위기 25장 55절에서 모세를 통해서 계시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인도할 때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노예로 이끌어낸거에요. 종입니다.
종은 무엇이냐하면, 자신이 자기의 목적이 안되는사람이 종이라는거에요. 자기가 자기의 목적이 아니에요. 보통 이세상에서는 어떤 사람보고 이렇게 행동을 잘못하면 뭐라고합니까? “야, 니 생각좀 하고 살아라.” 이렇게 핀잔을 주잖아요. 종은요, 생각하면 안돼요. 생각은 주인이 하는것이지 종이 하는게 아닙니다. 주인이 생각하고 주인이 했던 그대로 선물로 받는 것 뿐이에요. 종이 왜 생각을 합니까? 종이 생각하면 그건 주인이에요. 그걸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그냥 쉽게 들을 이야기가 아니고 신약에서 마태복음 21장 33절에서 42절까지 나오는 그 말씀을 보면 모든 인간이 이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 심판주께서 양과 염소로 나누어서 두부류로 나누어서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보냅니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든 인간들이 “저 양될래요”라고 우리의 의사를 표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니가 그러니까 약속의 의미를 모르는거야.” 약속은 약속이 알아서 하는거에요.
니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저 지옥가기 싫어요. 천국 갈래요.” 할 수 있는 자기 의사 조차도 종한테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주는 대로 먹어.” 니가 주인하는 일에 니가 왜 끼어드냐 이말이죠. 사람으로서는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가 자기가 종될려고 추방된게 아니고 나도 하나님처럼 내가 주인공으로 살려고 했다가 추방된거잖아요. 따라서 추방된 현장에서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래, 당신들의 의사에 따르겠습니다.” 이런 취지로 준 말씀이 없어요.
오히려 확인시켜주는거에요. “그러니까 니 주제 넘게 이 하나님의 일에, 주인이 하는 일에 니가 바로 그런식으로 니 본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거야. 그러니까 니가 믿는 것은 가짜 하나님이야.” 이런 이야기는 다른 이방인에게 해줘도 소용없습니다. 근데 그게 뭐냐?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이스라엘 약속의 백성에게만 이 이야기를 해주는거에요.
약속의 백성이라고 해서 인간 본성, 자기가 주인 되고 싶은 생각, 그게 떠나질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똑같으니까 염소 역할을 이스라엘이 해줘야되는거에요. 그러면 양 역할은 누가 하느냐? 양은 없습니다. 이땅에 양은 없어요. 염소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염소면 나머지 다 염소에요. 그러면 구원 받겠다, 천국 가겠다는 양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그거는 목자가 와야 생겨요. 목자가 와야. 목자가 와야 양이 생기는 겁니다.
그전에 그래서 우리는 뭐부터 알아야되는가? 염소가 뭐냐부터 알아야 돼요. 그 염소가 뭐냐하는 것은 마태복음 21장에 농부이야기에 잘 나옵니다. 어떤 포도원의 한 주인이 있는데 포도원의 농부가 포도원을 만들고 모든 거기에 생산수단까지 주인이 일방적으로 다 됐죠. 농부보고 농사지으라고 했는데 농부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소작을 얻기위해서 종을 보내니까 종을 때리고 돌로 치고 또 오니까 또 많이 보니까 후에 있는 종도 그렇게 때리고 마지막에 농부가 아들 보내니까, 상속자를 보내니까 농부들이 알아요.
“이는 상속자구나. 이 상속자 죽여버리면 이 포도원 우리것 된다.” 이렇게 해서 죽여버렸다는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알고 주인이 어떻게 하느냐? 다 진멸하고 다른 농부에게 새로 맡겼다. 다른 종을 새로 맡겼다고 되어있어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해답을 안다 치지 말고 성경 덮고 일상 사회 환경속에 이걸 한번 적용시켜봅시다.
어떤 지주가 있는데 지주가 땅을 한 반정도 가졌어요. 반은 농부들이 땅을 갖고 있습니다. 땅이 많으니까 생산물이 많죠. 근데 심한 가뭄이 들어가지고 지주의 농토도 가뭄들었고 저쪽도 가뭄들었지만 지주의 농토가 워낙 땅이 넓기 때문에 수확물이 약간은 있다 이말이죠. 수확물이 얻을 건 있어요. 전에 보단 소출이 못하지만...
농부들은 땅덩어리가 얼마 안되니까 소출이 하나도 없어요. 다음해에 곡식 심을 것도 없고 자기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주한테 합니다. “지주님 어떻게 곡식좀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주가 하는말이 “담보는?” “담보는 땅 10분의 1 담보로 드려가지고 농사잘되면 이자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래라.” 그래서 그땅에 있는 농부들이 전부다 지주한테 와서 땅 10의 1을 담보로 해서 곡식 빌려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한 2년 3년 지나서 또 가뭄이 들었어요. 이젠 10분의 9중에서 또 땅을 바칠 참이에요. 땅을 또 바치는거에요. 그러다가 자식까지 낳았어요. 자식 놓고 난 뒤에 자식도 그땅을 지주는 땅이 점점 더 넓어져가지고 지주의 자식도, 상속자도 점점 소출이 많아지고 상대적으로 이 농부의, 농부는 점점 더 살림이 쪼그라듭니다.
그러다가 진짜 더 큰 가뭄이 들어가지고 이제 농토를 다 갖다 바쳐야 돼요. 나중에 지주는 그야말로 소작인으로, 노예로 전환되고 모든 땅은 지주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경제적으로 사회정의상 인간은 용납됩니까? 안되잖아요. 인간은 안돼요. 이거 국가가 나서야 될 문제에요. 우리 사회가 나설 문제죠. 그런 지주가 악덕 지주가 어디있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적 본능상 이거는 용납이 안되는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트랙터 몰고 국가 데모를 하든지 해서 이 지주의 횡포, 지주 세금으로 다시 우리가 땅을 원상 회복 해달라 데모하는 것. 이걸가지고 정의라고 합니다. 저스티스(justice). 경제 정의라 하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동의합니다. 악덕 지주 되었다고. 농부를 노예로 만들었으니까 악덕 지주고 농부들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마태복음 21장 이야기잖아요.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이 얼마나 하늘나라에 못가는 상식이냐. 이 상식을 인간은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 자기는 정의로우니까. 자기는 정의를 아니까. 인간의 가치, 나의 가치를 중요하다는 사실을 어떤 경우도 인간은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성경말씀을 받아 들일수가 없는거에요. 우리가 노예라는 사실도 받아 들일수가 없는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선택권이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방금 제가 예를 든 지주가 나쁘고 농부가 옳았다고 보는거에요. 농부가 진멸을 왜 당해요? 진멸당하는 것은 지주가 진멸 당해야 돼요. 선한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이 있다면 농부편이지 절대로 지주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인간들은. 은연중에 우리는 우리자신의 내부의 심사를 본심을 그대로 사회생활하면서 다 털리고 다 드러내는겁니다.
“이럴 순 없습니다 하나님. 이거는 공평치 못합니다.” 하나님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게바로 인간은 염소밖에 없다”는거에요. 왜? 염소는 뭐냐? 염소는 모든 일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게 염소에요.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오늘본문에 드라빔이라고 나오는데 이 드라빔이 창세기 31장에 거기에 라반의 드라빔이 나옵니다.
그 딸이 라헬이 아비의 드라빔을 도둑질 했는데, 드라빔이라 하는 것은 요즘 말로 등기입니다. 딸이 아버지의 재산권을 등기등본을 훔친거에요. 드라빔은 작은 신인데요. 하나님이 이 땅을 줬다는거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이 땅을 줬다. 굉장히 건전해 보이는 종교심 아닙니까? 굉장히 순수해 보이죠. 그런데 창세기 보면 하나님이 땅을 줄때는 죽으라고 땅을 준거에요.
이 땅을 통해서 니 죄를 드러내라고 준 땅인데 우리는 이걸 소유권개념으로 보는거에요. 이 땅의 경제는 모두 소유권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내거는 내거”라는거에요. “내거는 내거다.” 이게 틀린말이냐는거죠. 그러나 레위기 25장 55절에 보면 “너거는 하나님거”에요. 다시, 너희 것은 없는거에요. 너희 것은 없는데 이방민족은 내것은 내것이 있어요. 하나님것은 “내것은 내거다”의 나라에 포위되는 방식으로 약속의 땅을 집어넣습니다. 약속의 땅은 내것은 일체 없다. 주변의 모든 나라는 “내것은 내거다.” “왜?” “내 노동이 들어갔으니까”요.
내 노동이, 내 힘듦과 애씀과 고민과 아픔과 내 뜻이 거기에 들어갔으니까요. “차라리 그 땅을 남줄려면 내 목을 쳐라”이래요. 목치는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이 전부에요. 근데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차라리 내 목을 치는게 좋아요. 아브라함은 자기목을 쳤습니다. 아들을 바쳤습니다. 오기가 대단한건지...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걸 말씀에 순종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도대체 여기서 약속이 뭐냐?
약속의 정체가 뭐냐? 양과 염소를 정할 때 계약에 준해서 양과 염소를 정하겠다는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양이 될 때는 목자가 자기의 목숨을 다 걸어요. 따라서 양은 목자가 목숨거는것처럼 양도 목자한테 목숨을 건 사람만 양이 되는 계약을 주께서는 수립한겁니다. 예수님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이용할 생각하지말고 주님께서 모든걸 다 걸었어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서 16절에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양과 목자사이에는 먼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복제, 컨트롤 v. 복사를 해서 딱 갖다 붙이는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딱 복사를 하게 되면 그게 양이되는거에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관계에서 양이 거침없이 서슴없이 참여가 되는 이유가 똑같은 관계를 확장을 시켜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은 목자는 목자와 양 사이는 죽음을 가운데 두고 대화가 되는 상대를 양이라고하는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이땅에 죽으라고 보냈습니다. 그 죽음을 가운데 두고 이 죽음에 대해서만 대화가 오고가는 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에요.
“목자 되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 때문에 이제는 제 목숨은 주께 드리겠습니다. 내 목숨, 내 소유, 개인적인 소유권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소유권은 드라빔이에요. 우상이에요. 소유권은. 그런데 다드리면 이게 종이되는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담요하나 가져왔습니다. 그냥 평범한 담요에요. 담요인데, 이 담요에 이런 무늬를 한번 보세요. 이게 카메라에 보여야 되는데...(유튜브 41분50초)
이 담요의 다른 면이 예수님이라면 이 무늬에 있는 양무늬. 이게 연속성을 갖고있어요. 큰 그림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부분이 양이되는겁니다. 양과 예수님이 떨어질 수가 없어요. 왜? 자기 몸을 절개해서 낳았으니까요. 양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양이 될 수가 없어요. 어느인간이 자기 목숨을 내놔요? 자기는 자기소유죠. 그저 좋다 하면 뭐 예수고 하나님이고 성령이고 삼위일체고 총 동원해서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인데요?
자기 좋아라고 교회다니고 지 천당갈라고 교회오는 사람들인데 그게 무슨 양입니까? 염소죠. 염소는 자기위주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를 왜 두 개 나누어 주는지 염소는 몰라요. 줄려면 확실하게 한방에 치지. 뭘 둘로 왜 나눕니까? 왜 1에서 2가 되고 2에서 하나되는거에요? 이거 이유를 모릅니다.
오늘 스가랴에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돼요. 이스라엘 하나가 유다가 되는데 유다가 되면서 이게 둘로,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돼요. 북쪽은 6절에보면 이렇게되어있어요.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주께서 이스라엘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쪼갠 이유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게 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숨어있는 염소의 본색을 드러내는 그 자체가 구원의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옥갈 사람들의 고백인 것을 그 과정을 겪게하는거에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렇다면 나는 뭐냐? 내 믿음은 뭐냐? 내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을 중간에 교체하는 작업이 있었던거에요.
우리는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니까 좋다고 덜렁 예수 믿습니다. “걸려들었어, 너 걸려들었어. 너 걸려든거야.” 드디어 너는 염소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한거에요. 들킨거에요. “나 이젠 됐어, 나 양 됐어. 나 이제 구원받았어. 난 이제 뭘 하든 괜찮아.” 자기한테 싱글벙글 하고있어요. 그것을 이스라엘이 이미 시범으로 보인겁니다. 그래서 와장창 깨진거에요. 내가 둘로 쪼개져야됩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하나로서 여호와 섬긴다고 좋다고 예수믿는사람을 핍박한 것 아시죠. 근데 사울이 그다음부터는 둘로 쪼개졌습니다. 내가 그전에 믿었던 그 여호와. 여호와가 바로 나의 진짜 육신으로서의 나였다는 사실. 사도바울은 자기를 뭐라고 하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용어를 사용해요. 새로운 피조물인데 새로운 피조물은 살아있는 나를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게 아니고, 내가 죽었음을 재료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 내 안에 곧 죽어야 될 육신적인 나와 그리고 그것을 같이 마주보고 있는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생긴 목자가 양이라고 불러주는 새로운 나를 둘로, 두 개 다를 사도바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예수 안믿는 그것조차도 이게 주님의 필수적인 절차였다는 것, 이게 빠지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된거에요. 나를 위해서 예수 믿어,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이 절차가 모든 성도, 양이라면 반드시 염소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내 구원을 완성한 것이 아니고 약속이 스스로 약속을 구현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님께서 그것을 드러내는데 충분히 쓰여지고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바로 종으로서의 충실성입니다. 이걸 지금부터 조금 더 어렵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상당히 어렵지만 여러분 정도같으면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소녀를 찾아왔어요. 그 할머니가 뭐라고하냐면 “얘야, 나 할머닌데 나 미래의 할머니야.” 미래의 할머니가 나에게 찾아와서 “내가 반지를 하나 줄게.”하고 미래 할머니가 소녀를 찾아와서 반지를 주었어요. 반지를 주고 미래의 할머니는 떠났어요. 그 소녀가 나중에 할머니가 되고 보니까 그 찾아온 할머니가 미래의 자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인간세계에서.
타임머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이 반지는 내것인가 내것이 아닌가? 어려운 문제죠.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결말을 시작자리에 두면 돼요. 결말을. 끝 이야기를 시작 자리에 두면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기 때문에 늘 시작이 미래보다 먼저 있어요. 시작이 있고 나중에 미래가 있거든요. 그런데 약속은 뭐냐? 결말이에요. 여기서 나는 하나가 아니고 드디어 두 개가 되는겁니다.
이미 구원이 다 이루어진 나와, 구원 받으려고 악을 쓰고 애를쓰는 내 모습을 두 개를 다 가질 때 이것이 바로 말씀의 완성입니다. 이땅에서의 말씀은 이렇게 둘로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맞습니다.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맞아요. 독생자 맞습니다. 하지만 이땅에서는 죄인의 몸으로 오셨어요. 이게 우리 성도가 겪어야 될 것을 주님께서 미리 겪는거에요.
미리 겪고 다른사람은 몰라요. 왜? 예수님은 결말을 알고있으니까 “내가 죽고난 뒤에 고난 받고 부활 하리라” 베드로에게 이야기해도 베드로는 무슨말인지 못알아듣습니다. 예수님만 결과를 알고 있어요. 결말을 알고 완성을 알면서도 미완성의 길을 가시도록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부추김을 받는거에요. 이 입장이 오늘날 성도의 입장입니다. 아주 신기해요. 정말 신기합니다. 말씀이, 약속이 그렇게했고 말씀이 그렇게 만든거에요.
종인데 아들이에요. 마지막은 아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종으로 살고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오늘 본문에 하게 되면 3절에 보면,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이렇게 할 때 이걸 시작점으로 봐버리면 아무도 이거는 구원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결말에 있는 늦은 비는 모든 염소들을 치기 위한 시간벌기로 나중에 치거든요.
“내 그럴줄 알았어, 내가 이게 가짜인줄 알았어.”하고 쳐버리는겁니다. 사사기 17장 4절에 보면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게 사사기 17장에 ‘미가라는 사람에게 드라빔 우상을 섬겼다.’ “이게 약속의 땅에서 이런 일이 나서는 안되잖아.” 하잖아요. 그게 잘못된 해석이에요. 이런 일이 일어나야 그게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가 개과천선 할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서 예수 잘믿으면 구원받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리 정신차리고 예수믿어도 우리는 염소일 뿐이고 이런 정신차려서 믿는 믿음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과거지사로 돌려서 그 과거를 내안에 받을줄 알아야 돼요.
나는 지나간 과거를 미래에 살고있는겁니다.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고선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과거를 계속 살고 있는거에요. 왜? 이미 결말이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요. 그 둘 사이에 틈이 있어서 내가 애써서 구원받느냐? 아니면 내가 행한것도 없이 이미 구원받았느냐의 그 간격을 유지하시면 그사람이 바로 스가랴에요. 그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사람이 바로 이 땅의 목자들입니다.
자기의 죽음, 내가 죽을 이유와 이미 살아있는 내가 죽을 이유와 늘 비교하면서 고마움과 감사를 표하는 것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땅은 땅입니다. 그냥 땅이에요. 나밖에 모르는, 내가 죽든 그건 모르겠고 살아있을 동안에 잘먹고 잘살자. 그 땅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약속이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졸지에 이땅이 약속의 땅이되는 사건이 일어나버렸어요.
약속의 땅이되니까 현재 내가 추구하는 그것과 예수님과 나와 비교를 해보는거에요. 그럼 어떠냐, 주님은 말합니다. “니는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니는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이다. 니 목자 예수님이 이땅에서 어떤 곤욕과 어떠한 간격을가지고 살았는지를 이제는 니차례다. 니가 내안에 그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라” 이말이죠.
그러면 성도와 성도의 대화나 사귐은 뭐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게 하는 식이 돼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에게... 세례요한 엄마하고 예수님 엄마 마리아 하고 이야기 할 때 성령받은 자와 성령받은자의 교류였습니다. 성령은 약속이거든요. 약속만 드러낼 때 방법은 바로 “내가 언제죽어도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나는 철저한 종이다” 라는거에요. 종으로 살아서 아들이되고 우리 주님처럼 여호와의 종이면서도 아들 된것처럼 이제는 충분히 넉넉하게 마음껏 흔쾌히 주님의 종됨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되지도 않는 정의감과 되지도 않는 신앙, 그것이 의당 우리속에서 나와야만 했던 그게 절차인 것을, 그것까지 이제는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내 위주로 살고 나밖에 모르는 그것마저 주님께서 끄집어낸 주님의 사랑인 것을 받아드릴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