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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비와 늦은 비

아빠와 함께 2024. 1. 23. 14:43

이른 비와 늦은 비

2021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요엘 2:18-23

(2: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2:19)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2:20)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2:21)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2:22) 들짐승들아 두려워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 파괴행위가 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제할 자 빼놓고서는 다 죽여버리는 작업도 병행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일이을 감당하실 분이 따로 있음을 뜻합니다.

즉 모든 율법이 쏠리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닙니다.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야되시는 분만이 모든 율법을 자신에게로 다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다른 분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구원될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 겁니다. 이와 같은 취지가 이스라엘 역사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거주한 약속의 땅의 기후는 일반적인 농토처럼 농부의 고되 노고를 들이면 저절로 결실이 맺히는 그런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있어 결실은 인간이 아무리 수고를 하여도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되면 아무런 결실을 맺지도 못하게 되고 설사 결실을 얻었다 할지라도 메뚜기 떼의 습격에 의해 황폐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 필연적인 요소가 바로 ‘끊어짐’ 곧 ‘단절’에 있기 때문입니다. 땅 농사가 주력 산업인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농사의 성사를 결정짓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1년 중 5월 10월 까지의 긴 기간 동안 일절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이 비 내리지 않는 기간을 가운데 두고 ‘이른비’와 ‘늦은비’가 배당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사력은 11월-12월 사이에 내리는 비로 인하여 시작이 됩니다. 이 때가 파종기입니다. 그러다가 4월-5월 사이에 수확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두 계절 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비 오는 계절과 비 안 오는 계절 뿐입니다. 이 비오기 직전의 계절이 ‘전이계절’입니다. 이 전이계절에 모든 절기가 모여있습니다.

4월-5월 봄 전이계절에는 유월절, 맥추절이 있고, 10월-11월의 가을 전이계절에 초막절, 수장절, 장막절이 있습니다. 한참 비 오지 않는 7월에는 속죄절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나라는 1년 내내 ‘절기 순환’이 진행됩니다. 이는 곧 ‘말씀이 순환’됩니다. 절기란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절을 가운데 두고 이른비와 늦은비가 반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이방나라에서는 이른비, 늦은비의 구분이 크지 않습니다. 그냥 비오고, 비오고, 비올 뿐입니다. 그 비나 저 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생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순환으로 인해 필히 단절의 기간이 있다는 말은 곧 사람의 중심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뚜기 떼처럼 이스라엘을 파멸을 몰아세운 북쪽 나라 군대인 앗구르 군대를 하나님께서는 도로 북쪽으로 철수를 시키시겠답니다.

즉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두고서도 이른비와 늦은비, 그리고 그 사이의 단절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키겠다는 겁니다. 일단 죽이고 그 다음에는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만 살리시겠다는 겁니다. 구약에 있어 부활의 상황은 ‘동행’이라는 개념으로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므두셀라나 에녹이나 모두 하나님과 동행한 한 자들입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동행의 취지가 바로 자세히 나와 있는 곳이 시편입니다. 시편에 나온 모든 신앙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과의 교류와 교제와 동행을 표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특히 시편 139:13-14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즉 우리의 신체 가운데서 나의 것이라는 일체 없는 겁니다. 다 ‘주님의 것’인 동시에 그 ‘주님의 것’의 완성은 필히 ‘단절’이 작용으로 진행됩니다.

곧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것’들입니다. 인간을 죽게 하시는 이유는,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하나님의 일의 진행에 있어 인간들이 기대할 게 없게 하시는 겁니다. 부활은 ‘동행’이라는 원칙을 완성하시는 분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다른 이들이 이 부활되신 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모든 죽은 자들은 그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활하신 분의 음성을 들어야 될 대상들로 죽어 있습니다. 성도는 미리 죽어서 미리 주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3:4에는 예루살렘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을 우리 주님께서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죽은 18명이나 안 죽은 나머지들이나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망대에 깔려죽지 않았다고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죽은 자를 통해서 생명을 증거케 하십니다.

따라서 이 단절의 원리가 그대로 인간 세계에 적용하게 되면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자신의 구원을 생각해서 늘 구원을 확보했다고 여기면서 돌아서서는 그 확보된 구원이 소실되지 않기 위해 걱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이 구원될 수 없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정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치 방사선에 오염되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천국에 오염(?)-좋은 의미로- 되어서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단절을 자기 내부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 구원은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자신의 죽음마저 사소한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약점이나 결함마저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홀로 살지 말고 늘 주님과 교신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요엘 2장 18-23절(이른비 늦은비)2111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18-23절입니다.

요엘 2:18-2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 들짐승들아 두려워 말찌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무대로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그 구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이스라엘 지평을 통해서, 평지를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북편군대, 앗수르 군대를 보내셔서 그들을 싹쓸이하게 만드는데 마치 어느 정도냐 하면, 메뚜기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자기 야욕을 다 채워서 사람의 먹을 양식을 일체 남기지 않는 것처럼 두껍게, 두꺼운 두께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하는 그 일을 이스라엘 역사에 북쪽 앗수르 군대를 통해서 실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북풍 군대를 다시 북쪽으로 내보냅니다. 전군(前軍)도, 먼저 왔던 군대도 보내고 後軍(후군), 나중에 온 군대도 보내고 그들이 상한 심령을 유발했지만 22, 23절에 보면, ‘옛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살펴주시던 그러한 약속의 땅에 합당한 자연질서를 그대로 반복시켜준다.’ 그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주님께서는 오늘 23절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기후 자체가요, 이른 비와 늦은 비 사이, 5월에서 10월 사이에는 일체 비가 오지를 않습니다. 건기에 들어가는데 그다음에 12월까지는 비가 많이 오고 그 뒤 2월까지도 비가 좀 오는데 이걸 우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은 계절이 두 개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고 그냥 비 많이 오는 계절 그리고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계절.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계절을 중간에 놓고 비 오는 계절을 그 앞에 놓고 또 그 뒤에 비 오는 계절을 둡니다. 비 오는 계절을 우기, ‘이른 비’라 하고 나중에 비 오는 계절이 끝날 때 비가 좀 오는데 이게 건기의 시작인데 이것을 ‘늦은 비’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땅에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잖아요. 이스라엘은 반대가 되어서 우리로 하면 가을, 이스라엘로 하면 우기에 씨를 뿌립니다. 그게 11월에서 12월에 씨를 뿌려요. 요즘에 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추수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 한국하고 반대가 되어서 우리 한국이 씨를 뿌릴 때 그들은 추수를 합니다. 추수할 때의 계절이 유월절과 맥추절, 그리고 5월부터 10월까지 비가 일체 오지 않는데 비가 오지 않다가 드디어 비가 올 때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초막절, 수장절, 장막절, 그런 절기들이 거기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른 비가 오는 것 늦은 비가 오는 것, 계속해서 순환이 되는 그런 기후가 작렬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만드시고 이스라엘을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른 비와 늦은 비 사이에 비가 전혀 오지 않는 그 단절의 기간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아는 이방 민족은 어떻게 되느냐? 이른 비도 없고 늦은 비도 없어요. 그냥 땅에 비 오면 비 오는 겁니다. 이것은 이른 비다, 늦은 비다, 하는 것이 없고 수시로 오고 싶으면 비가 오니까요. ‘수시로 비’라고 이렇게 할까요? 그럴 필요 없잖아요. 그냥 비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른 비가 있고 늦은 비가 있습니다. 그 중간에 단절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를 이스라엘을 모형으로 삼아서, 이스라엘 지역 약속의 땅을 모형으로 삼아서 장차 어떤 분이 오시는데, 그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일을 할 때 이렇게 단절의 기간을 두면서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나오는 이른 비, 늦은 비, 이른 비는 11월 12월달이고요, 파종, 씨 뿌릴 때고 늦은 비는 그다음 해 4월 5월의 추수기인데 이 늦은 비의 의미가 뭐냐? 신약에서 야고보서 5장 7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 늦은 비가 비가 아니에요. 비를 인물화시켜 버립니다. 일찍 오신 하나님, 나중에 오신 하나님.

그런데 일찍 오신 그분이 한 템포 쉬고 나중에 오신다는 거예요. 야고보서 5장 7, 8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강림이 가까웁다. 이걸 늦은 비라고 하는 겁니다. 비가 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분이 오시는 거예요. 먼저 오신 분은 이른 비고 나중에 오신 분이 늦은 비고 그 가운데 텀, 간격, 단절의 간격, 갭이 거기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모형의 그 기후와 비 오는 것을 통해서 신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어떤 식으로 구원하는지를 보여주신 거가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는 다른 이방 민족하고 달라서 이렇게 이른 비 늦은 비, 1년마다 단절의 기간이 있는데 그 1년은 뭘로 채워지느냐 하면, 절기로 채워져 있어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초막절(장막절), 그 중간에 7월 10일에 속죄 절기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이스라엘 달력 흐름은 하나님의 절기의 순환구조라 보시면 됩니다.

이 절기의 순환구조 뜻이 뭐냐 하면, 과연 이 땅에서 생명의 곡식이 나겠는가를 너희들이 한번 주시해 보라는 겁니다. 이방 민족은 ‘땅에 비가 오고 거기에 자기 노동력을 가미하면 얼마든지 곡식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농사를 짓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자동적이지 않아요. 씨를 뿌려도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되면 곡식을 거두지를 못합니다. 만약에 율법에 어긋났다. 그러면 메뚜기 등장해서 싹 다 먹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땅은 자연에 맡겨지는 땅이 아니고 말씀에 맡겨지는 땅이에요.

하나님께서 절기의 순환구조, 1년 365일에 그때그때 그 절기들, 축제들이 있거든요. 그 축제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면서 그때 하나님께서 이끌어 냈다는, 그 구출했다는 것, 강제로 끄집어냈다는 그 순서를 거기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 1년에다가.

그러면 그 1년이 되풀이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구원하시는 과정을 계속 돌려버리는 거예요. 순환시켜 버리는 겁니다. 반복의 시간 구조를 갖는 거예요. 보통 1주일 동안도 안식일을 두는데 1, 2, 3, 4, 5, 6, 7, 그다음 다시 1, 2, 3, 4, 5, 6, 7입니다.

8, 9, 10, 11, 12……, 이렇게 하지 않고 1, 2, 3, 4, 5, 5, 7, 다시 1, 2, 3, 4, 5, 6, 7, 되풀이 되는 것처럼 1년도 마찬가지로 순환됩니다. 순환될 때 과연 땅에서 소산물이 나겠는가? 다른 이방 민족은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농사지었으면 소산물 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이스라엘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그냥 주지 않습니다. 말씀의 새로움을 드러내는 그러한 징조로서 활용되게 해요. 이 농사짓는 것을! 그러니까 이방 민족에서는 농사지어서 농사 잘되면 나 밥 먹고 살기 위한 징조, 나를 위한 징조지만 이스라엘은 주님이 함께 있는 징조에요.

구약 이스라엘을 보면 부활이라는 그 의미가 신약의 의미하고 좀 달라요. 이스라엘의 부활의 의미는 다니엘서에 나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나와요. 그러면 그 전에 는 뭐냐? 그 전에는, 십자가 단절이 오기 전까지기 때문에 부활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그것은 바로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시편을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시편 보게 되면, 집중해서 시편 1편부터 150편까지 며칠 동안, 한 일주일 동안 집중해서 쫙 보게 되면 거기 특징 하나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동행입니다. 시편에 나온 다윗, 아삽, 모세, 모든 시편의 특징들은 뭐냐 하면, 홀로 살지 않아요. 그게 동행입니다. 이게 부활의 상태거든요.

창세기 5장 22절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냥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니고 동행해서, 하나님과 동행해서 자녀를 낳은 거예요.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부활의 상태가 어떤 상태냐?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독립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는 겁니다. “여기는 참새. 참새. 독수리 나와라. 오버.” 이런 식으로요.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 했어요. “목사님, 복음 안 뒤에 세상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영화도 재미없고, 연속극도 재미없고, 스포츠도 재미없고, 뭐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는데 부활의 세계에서는 뭐가 재미있느냐 하면, 주님과 교신하는 재미가 있어요. 동행하는 재미.

동행하는 재미가 어떤 재미냐?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행하는 것, 이 세상 윤리 도덕에서 그것은 악한 짓이 돼요. 그러나 세상 윤리 도덕에서는 의도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선하다 하거든요. 그러나 동행이 될 경우에 동행 차원에서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악행하는 것이나 의도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나 다 악해요.

왜? 자기 의도가 들어갔기 때문에. 지시가 안 온 거예요. 교신이 안 된 상태에요. “여기는 참새. 독수리 나와라. 지금 뭐할까요?” 이러한 교신하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 내리면 이것은 모든 것이 악행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이방 민족적이에요. 시편에 의하면.

여러분, 시편의 어떤 구절도 똑같아요. 공통요소가 뭐냐 하면, 절대로 혼자 살지를 않습니다. 그중 시편 하나 예를 들면 시편 139편 7-10절에 보게 되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파주에 가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그런 거지요. 대구에 와도 함께 계시고. 더 놀라운 사실은 13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주께서 내 쓸개 간 심장을 지으시며 “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주님과 동행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이 심장과 콩팥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 사람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이제 이스라엘의 끝부분이 되게 되면, 신약에 넘어오게 되면 구약에서 부활의 의미가 드디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의미가 뭐냐 하면, 우리는 부활 된다, 희망을 갖자, 그게 아니에요. 구약의 모든 동행과 부활의 첫 번째 적용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를 증거하는 게 아닙니다. ‘야, 이거 성경 보고 이런 것 얻을 수 있단다. 우리가 얻자.’ 우리보고 뭘 얻으라고 준 성경이 아니에요. “너는 떨어져 나가.” 우리보고 “너는 손대지 마.” 성경에 나오는 복에 대해서 우리가 손대면 안 돼요. 손댈 자격도 없고요.

모든 성경 말씀, 시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 말씀은 일단 예수님이 먼저 접수합니다. 부활에도 순서가 있어요. 부활의 첫 열매는 우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야 그다음에 예수님에게 선택된 자에 한해서만 그다음 부활의 열매가 되고 그런 겁니다. 이것은 부활에 있는 그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짐작하는 그것은 엉터리예요. 이것은 가짜입니다.

진짜 부활의 상태가 어떤지는 먼저 예수님한테 모든 것이 몰빵되어 있어요. 그분이 살아가는 모습이 부활의 모습이에요. 덜렁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갖고 욕심낼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욕심내면 안 되는가? 성경은 기본이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에 위배 된 자는 성경에 나오는 복의 혜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약을 보면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아주 굉장히 간단하게 정리된 거예요. 너한테는, 우리 인간한테는 구원이 없다. 정리 깔끔하지요. 우리한테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이 안 돼요. 말씀의 자체순환, 율법의 자체순환은 전부 다 예수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한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교 듣고 노트에 쓸 것이 없지요. 뭐 얻을 수 있는 입장이 못되니까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 세상의 징조는 나를 위한 징조가 아니고 나를 위한 배려도 아니에요. 전부 다 주님을 위한 배려, 주님을 위한 징조입니다. 그것은 율법대로 죽어주는 자가 있어 줘야 비로소 생명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이 아닌 채로 죽은 인간은 생명 얻을 자격도 없습니다. 율법대로 죽은 자에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예수님에 관해서 더 이상 죽음이 예수님을 관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뭐냐?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분을 모시고 다니는 겁니다. 그 안에 율법의 완성이 들어 있으니까.

거기에 비해서 우리 인간들을 봅시다. 제가 질문 하나 드릴 테니까 속으로 한번 맞춰보세요. 강의시간 아니니까 어쩌고, 답변하시지 말고요. 열다섯 살 때가 여러분의 본질입니까, 서른 살 때가 본질입니까, 4십 다섯 살 때가 본질입니까, 육십이 본질입니까, 아니면 9십 다섯 살이 되어야 여러분의 본질이 나타납니까? 본질이 어느 것입니까?

인간은 본질을 자기가 종잡을 수 없어요. 계속해서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어느 것이 나라고 딱 지목할 것이 없어요. 인간은 혼란스러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15세, 30세, 45세, 이것을 하나로 죽 이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연속성이라고 해요. 연속성은 끊어짐이 없습니다. 이방 민족이 바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 이 아닌 사람들 유월절 어린양을 모시지 않는 민족은 다 이런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15세 그때가 20세의 지금의 나다. 일곱 살 먹었던 그때도 나다. 이런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단절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단절이라는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차이가 없어요. 그냥 인간은 비예요. rain, 인간은 그냥 비에요 비. ‘이른 비 늦은 비, 그걸 왜 구분해? 구분할 이유가 없어.’ 구분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앗수르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없어졌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른 비로 해서 작살 내고 늦은 비로 해서 죽은 이스라엘을 건져낸다는 거예요. 그 사이에 뭔가 단절이 있다는 겁니다. 이른 비는 오신 예수님이고 그리고 늦은 비는 다시 오실 예수님이고. 그 사이에 뭐냐? 십자가가 있어요, 십자가. 끊어짐이 있다고요.

단절의 의미는 이겁니다. ‘구원할 수 없으니, 구제될 대상이 아니니 내가 너희들 죽이는 것이 맞잖아.’ 그런 뜻이에요. “구원해주세요.” “그 입 다물라.” 너는 구제대상이 아니니 없애는 것이 마땅하거든요. 그 취지가 담겨 있는 것이 십자가에요. 세상의 철학이나 과학은 이런 단절이 없습니다. 세상의 종교도 마찬가지고 요새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역사 속에서 두 가지 면에서 끊어놨습니다. 하나는 뭐냐? 왕을 끊어놨어요. 다윗의 왕의 대가 끊어져 버렸어요. 말라기 이후에. 포로 잡힌 이후에 왕이 없어요. 느헤미야, 에스라, 제사장은 있지만 왕이 없다니까요. 왕이 없어요. 다윗 같은 왕이 없다 그 말이지요. 바벨론에 포로 잡히고 난 뒤에는.

그다음에 뭐가 없느냐? 성전이 없어요. 성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는 나라가 되고 말았어요. 성전이 없으니까요. 다른 민족에는 이런 게 없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구박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계속 하나님한테 뇌물 갖다 바쳐놨으니까요.

만약에 어느 교회가 정기적으로 십일조 바치고 주일성수하고 예배드렸는데 만약에 천사가 찾아올 리도 없겠지만 찾아와서 “너희들 예수님 어디 가셨는데?” 하고 물으면 “우리 예수님 안 키우는데요.” 교회가 부흥되려면 사람들의 연속성을 달래줘야 돼요. “여러분이 과거에 고생했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고생을 이제 다 만회해주시고, 옛날 고생 다 잊게 회복해 주십니다.” 이렇게 과거와 지금을 연속해 줘야 사람은 희망이라는 것을 갖고 교회 나오게 되어 있어요.

희망 없는데 교회 왜 나옵니까? 나올 리가 없지요. 교회 나오는 것도 일종의 노동인데요. 농사짓는 것인데. 자기를 위한 농사. 교회는 사람을 어쨌든 간에 구원시키려 하는 것이고 복음은 “구원요? 누구세요? 죄인이 왜 구원을 언급해요? 돌았어요?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한테 쏠려 있지 너한테 쏠려있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얼마나 좌절하겠습니까

복음은, 십자가는, 단절은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네가 가짜인 것을 증명하라. 이걸 요구해요. 내가 가짜인 것을 증명하라. 그게 십자가 단절입니다. 동행이 안 되니까 그런 거예요, 동행이. 동행이 안 됐어요.

에녹도 그렇고 창세기 6장에 보면 한사람 더 나와요. 누구냐 하면, 6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도 동행한 거예요, 노아도. 모세도 물론 동행했고요.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는 물론이고요. 미가야 선지자도 물론이고.

성경의 특징은 동행입니다. 본인이 구원받겠다고 설쳐대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하나님 한번 이용해볼까,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런 것은 자기 연속성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나님 힘을 좀 빌려볼까, 해서 성전에서 기도 좀 해볼까, 그런 거예요. 여기 동행하는 사람은요 하나님 이용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용하는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끊어지고 성전이 끊어졌어요. 그러면 뭐 다 끊어진 거지요. 의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걸 단절시킨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자기 연속성을 유지한 채 생명을 얻고자 하는 배후의 악마적인 그런 시도가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인간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연속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요한복음 5장 26-29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인간의 살아 있음의 연속성은 소용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없어요. 일단은 인간은 죽어야 돼요. 일단 인간은 죽어야 됩니다. 인간은 죽게 되어 있으니까 본인의 입장에서 인간의 연속성은 깨진 거예요.

하나님이 이미 나를 죽였다는 것은 더 이상 나한테 힘쓸 구석이 없다는 거예요. 힘쓸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즐겁지 않습니까? 평생을 나 살려 볼라고 아등바등 애쓰는 것, 그 수고, 죽게 되면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거 안 해도 돼요. 죽었으니까. 죽은 사람은 할 일이 뭐냐? 그냥 죽어 있으면 돼요. 참 편해요. 하나님은 살아 있는 인간하고는 일 안 합니다. 일단 죽여놓고 더 이상 그 죽은 자가 어떻게 할 여지가 전혀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연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 하는 거예요. 어제하고 오늘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내가 동일하기 때문에. 어제하고 오늘 내가 정상적으로 계속 똑같은 인간으로 유지한다는 이것은 정상적이라고 본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요한복음 9장 41절에 보면, 그거 예수님에 의해서 절단 났습니다. 끊어졌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심판하러 온 거예요. 하도 연속성을 주장하고 자기가 정상이라 주장하니까 주님께서 가만있지 않고 그 자체를 심판해버려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세요. 내가 의도적으로 악행을 한 그것이 악행이 아니고 내가 의도적으로 선행을 하는 그것도 악행이 되는 이유가, 내가 나한테 지시 내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그걸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살아 있어야 의식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함이라. 그러니까 자기가 보고 있으니까 자기는 소경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이걸 상상도 못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코로나 백신 개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소경되는 사람은 없어요. 눈 팍 뜨고 루테인 먹어가면서, 눈 밝게 해서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신약개발 빨리 해서 돈 벌자’ 하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오셔서 “어이 소경!” 지금 나는 선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신약 개발해서 많은 사람들을 코로나로부터 구원해내는 선행을 하기 위해서 나는 긴장감을 높여서 이 일을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이 소경! 너 소경인지 모르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너는 죽어야 돼” 이게 예수님 역할이에요. 이게 예수님 역할이라고요.

자기는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자 그 일 하고 있는데. “어이 악인! 저리 가, 저리 가!” 이러고 있으니까. 자기는 선행을 하는 이유가, 이 일이 악행이 아니라는 확실한 믿음 가지고 선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조차 악행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뭐합니까? 죽어! 그냥 죽어가면 돼. 아니, 아니, 말 잘못 했다. 죽어가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당신은 곧 죽습니다”라고 그렇게 복음 전하면 안 돼요.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복음 전해야 돼요.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하고 죽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알려줘야 돼요. “죽어갑니다. 정신 차리세요.” 할 필요 없어요. “벌써 10년 전부터 죽었어요. 아니 태어날 때부터 죽었어요.” 이렇게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 돼요.

죽은 자만이 자기가 가짜인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주님이 그 일을 하시고 있음을 우리가 아는 겁니다. 내가 가짜일 때 나는 무엇을 지니고 있습니까? 단절성을 지니고 있는 거예요. 무엇을 주님 앞에 다 빼앗겼습니까? 나의 연속성을 다 빼앗긴 거예요. 단절성을 가져야 바로 순환구조, 이른 비 늦은 비의 순환이 계속되는 거예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그 단절은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주님의 자기 고유한 작동이고 활동입니다. 이른 비 해놓고 단절, 늦은 비 해놓고 그 단절은 주님 스스로가 내린 단절이에요.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단절되게 하신 그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에요.

주님이 소경보고 ‘네가 본다’고 하고 보고 있는 사람은 ‘네가 소경’이라고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그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십자가의 그 바탕, 단절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말씀을 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13장 4절에 좋은 예가 나와 있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거든요. 그걸 보고 대부분 사람은 ‘휴~ 다행이다’ 하는 거예요. 왜 다행이냐 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살아 있는 나가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다행이다 그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연속성이 끊어졌으니까, 죽었으니까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이렇게 합니다. 그 사람이 너희들보다 죄 많이 지어서 죽은 줄 아느냐. 18명이 죽었다는 것을 네가 듣거든 나는 다행이다, 나는 휴~ 안심한다, 가 아니라 ‘아, 나는 벌써 죽은 자구나.’ 그것을 18명 죽은 시범모델이 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하라는 말이에요. 나 자신이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라는 말이지요.

내가 죽은 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나요. 죽은 나의 핵을 통해서만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해 주신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생명이 아니에요. 왜? 단절이 없기 때문에. 이방 민족하고 똑같이 단절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에 있어서의 부활이란 것은 충격적입니다. 아까 요한복음 5장 2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되어 있잖아요. 자 여기 죽은 자가 두 종류의 죽은 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인들이 죽은 것하고 여기서 예수님이 또 죽게 되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는데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버리면 예수님은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그다음에 어떻게 된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분이에요. 왜? 죽은 자에게 모두 다 주님의 자기 음성을 듣게 만들어버리니까요. 우리 인간들은 같이 죽는 줄 알았지요. 이순신 장군 죽고, 세종대왕 죽고, 전두환 죽고, 그다음에 노태우 죽고. 노태우 전두환은 군사정권을 끝낸다는 어떤 징조인가? 한 달 간격으로 다 죽었으니까. 아닙니다. 모든 징조는 주를 위한 징조에요.

징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모든 믿지 않는 자들까지 주의 음성을 그 때, 그제야 주의 음성을, 그들이 개무시했던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주님이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는 것은요, 주님이 기이히 여기게 해놨다는 뜻이에요.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거 고등학교 교과 어느 과목에 나옵니까? 죽은 자들이 부처도 아니고, 마호메트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이야기가 고3 어느 과목에 나옵니까? 이게 수능에 나옵니까? 이 세상 인간들 얼마나 심정적으로, 육 적으로, 마음적으로 소경이에요? 뭐 박사 해서 시간강사 해서 취직한다고? 박사…….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안 믿게 되어 있어요. 믿는 것이 이상해요. 기이해요, 기이해. 성도가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옥 가기 전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될 자를 살아 생전에 주께서 일찍 십자가에 죽이시고 일찍 부활의 주의 음성을 동행하면서 듣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이에요. 미리 죽은 자가 미리 생명을 얻는 거예요. 주의 영에 의해서. 그러니까 나는 죽었다, 살았다, 가 중요하지 않고 늘 주의 생명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게 기이하게 나온다는 거예요. 이 말씀이요. 요한복음 5장의 그 말씀이 계속해서 삶 속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 4절 망대 무너진 그 이야기요. 야고보서 5장 7절에 나오는 이른 비 늦은 비 이야기가요.

그 말씀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아, 나로 인하여 내가 끊어졌음을, 단절이 있다는 것을 안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부활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 부활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에요. 부활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주의 끊어짐이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는 합당한 필연적 절차인 것을 우리는 감사하게 되지요. 내가 나로부터 끊어진 것.

이렇게 끊어지지 않으면 어떤 단계에 들어가느냐 하면, 성경을 지식으로 좍 들어요.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성경공부 하면서 듣고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나는 이제 구원을 챙겨 놨다. 이제 맘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하는데 인간의 인식은요, ‘나는……’ 이라는 자기가 들어가게 되면 그다음에 무슨 걱정이 오느냐 하면, ‘아, 그런데 이 구원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될텐데……’     그러니까 

1단계, 가 뭐냐? 나는 구원받았다. 말씀으로 구원받았다. 가짜들의 특징이 그래요. 구원받았다.

2단계, 딱 돌아서면요, 안 돌아서도 마찬가지인데, ‘이거 유지해야 돼. 이거 유지 안 되면 나만 또 손해지. 나는 지옥 가면 안 되지. 어떻게 이걸 유지를 해야 될텐데 뭘 하면, 어떤 착한 일을 해야 유지 되지?’ 그래놓고 또 말씀 들으면 ‘아, 맞아. 나는 구원받았지.’ 돌아서서 3초도 안 걸려서 ‘그런데 구원받은 기쁨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나가 계속 생각되는 이상은요, 그게 끊임없이 계속 자기 구원 욕구의 순환에 말려드는 겁니다.
3단계, 복음으로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요, 어떤 단계냐? 방사선에 쬐이면 방사선에 오염되잖아요. 그러면 이미 죽은 자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천국에 오염되었어요. 방사선에 오염되듯이 천국에 오염되었으면 천국에 의해서 내 생각은 이미 죽어버렸어요. 그 단계가 세 번째 단계에요. 이게 뭐냐? 단절이 있어야 돼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단절이 있어요.

과거에 내가 구원받기 전에 얼마나 호들갑을 떨고 내 구원 챙기려고 성경공부 하고 오만 것 다 하지요. 성령 받았고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걸 지켜내려면 나쁜 짓을 하면 안 되고,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으면 안 되니 어쩌고저쩌고 다 알지요.

그런데 그 자체가 감사도 아니고 고마움도 아니고 그냥 걱정거리에요 걱정거리. ‘구원은 챙겼는데, 탈락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직 안 죽은 상태에요. 아직 방사선에 오염되지도 않았어요. 그냥 지식 나발만 뒤집어쓴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교회 교인들이 만약에, 만약이 아니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성령 받아서 세 번째 단계, 이제부터는 죽은 나를 통해서 주의 생명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런 사람에게 제가 “심방 한 번 갈까요?” 이렇게 하면 “심방 와서 뭐하려고요? ‘내가 목사 당신 양이야? 나는 주의 양이야.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고 나는 주의 얼굴 보고 싶어. 괜히 심방 와서 갑질하려고? 내가 당신 똘마니야? 너나 잘하세요. 왜 남 신경 써요?’ 정 오시려 하거든 그냥 오시지 말고 칼 들고 와서 날 죽여버리세요”

그게 바로 3단계에 해당 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분 심방 할 때 내가 칼 들고는 안 가요. 칼 대신에 텍사스 전기톱 들고 갑니다. 일가족 몰살 사건. 이게 살벌한 이야기가 아니고 얼마나 재미나고 감사한 일입니까? 드디어 그 가정 그립고 그립던 주님 만나러 갔다. 온 가족 한꺼번에 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자기 구원에 걱정이 안 되는 거예요, 걱정이! 이게 3단계인데 놀라운 사실은 3단계는 무슨 단계를 순환해서 돌아야 되느냐 하면, 1단계 2단계를 거쳐서 3단계가 되풀이돼요. 1단계, 2단계, 그다음에 3단계. 그런데 세상은 ‘1단계 – 2단계’ ‘1단계 – 2단계’ 거기서 왔다 갔다 하면서 3단계로 넘어간 적이 없어요.

3단계는요, 자기 구원에 관심이 없고 주께서 이 죽은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종의 걸어 다니는 해골. 표본실에 보면 인체 골조모형이 있잖아요. 제가 아는 사람, 저 멀리 그런 분이 있어요. 걸어 다니는 해골 골조, 한 두명이 아니지요.

그런 자기를 해골 골조로 간주하는데 여기서 비로소 생명이 증거되니 제3단계의 성도로서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은 나를 통해서 생명을 증거케 한다니요. 세상에 이런 영광스러운 신분이 또 있겠습니까? 이게 주의 일입니다.

이것도 외워서 지식으로 하지 말고, 주께서는 성도의 이 3단계를 위해서 이렇게 합니다. 네온사인 수놓는 불꽃이 있지요, 노란색으로 갔다가 파란색으로 갔다가 윙, 윙, 늘 돌아오는 것처럼 1단계 - 2단계 – 3단계, 1단계 - 2단계 – 3단계, 늘 돌아가면서 세상과 부딪히면서 지식으로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가 또 세상 걱정하다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1단계 - 2단계에서 다시 3단계로 넘어와서 ‘아, 죽는 일도 이렇게 사소한 일인 줄 나는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죽는 일도!’

그러니까 세상은 ‘1단계 – 2단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누가 중요하냐?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남과 나를 구분해요. 그러나 3단계에 있는 사람은 남하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나와 늘 비교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늘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겨나는 거예요.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되리 지워지지 않는 의미기 되리~” 박 강정 노래도 있습니다만 주님이 자신의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꼭 단절을 집어넣어서 너 죽는 것조차, 심지어 네 약점조차 선물이에요. 너 죽는 것조차, 네 결점조차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미 천국에 오염되어서 죽어버렸으니까 생명만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천국의 모형으로 사용하시듯이 이 시간 저희들을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십자가 지신 분의 단절을 증거하는 방식으로 저희에게 생명만 나오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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