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강-YouTube강의(불쌍히 여김 로마서 11:32)20231205-이 근호 목사
제454강, ‘불쌍히 여김’. 구원은 ‘불쌍히 봐서 구원해준다’고 명쾌하게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31절,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긍휼로 구원되려면 모든 사람이 어디에 가두어져야 되는 겁니다. 어디에 가두어지는가? 여기 보면 긍휼의 반대되는 상황 속에 가두어집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반대말이 뭘까? 불쌍히 여김의 반대말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규정했어요. 순종치 아니함.
우리가 말하는 긍휼, 불쌍히 여기는 것과의 반대말은 잘난 체 하는 거죠. 자립성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나 불쌍히 안 여겨도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잘해요. 내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천국을 가든지 뭘 하든지 복을 따내든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네가 불순종 가운데 갇혀있다.” 라고 이렇게 단정 짓습니다.
그러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불쌍히 여김에 네가 거기에 가두어져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불쌍히 여김의 반대말이 순종치 아니한다는 이 말은, 불쌍히 여김 이 자체에 늘 순종하고 있는 상태, 그 상태를 하나님이 원한다는 겁니다. 그 상태를 하나님이 원하는 이유가, 나는 너를 원하는 게 아니야. 네게 준 나의 긍휼, 불쌍히 여김을 원하는 거예요.
어떤 그릇에 긍휼을 채워놓았다고 칩시다. 긍휼로 채워놓고 주님께서는 스스로 어떻게 내세울 게 없는 자를 그 긍휼 안에 퐁당 집어놓고 주님께서 그걸 즐겁게 감상하는 거예요. 기뻐하시는 거예요. 쟤는 긍휼 안에 갇혀있구나. 긍휼 안에 있는 모습은 뭐냐? 늘 긍휼에 순종하는 거예요. 긍휼에 순종.
이 이야기를 로마서 11장에서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씀을 끄집어냈느냐 하면, 감람나무였던 이스라엘이 잘리는 이야기를 할 때 이 대목이 등장하는 겁니다. 11장 28절에 보면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저희’는 누구고 ‘너희’는 누구냐?
복음에 의하면 복음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저희와 너희가 복음으로 인하여 뚜렷이 구분되는데, 여기서 ‘저희’라 하는 것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했던 십자가를 안 믿던 유대인들을 이야기하고 여기 ‘너희’라 하는 것은 이방인이에요. 율법도 모르고 하나님도 몰랐던 이방인인데 어느 날 십자가를 알게 되었어요. 십자가에 죽는 의미를 알게 된 거예요. 십자가 죽는 의미를 아는 자가 ‘너희’에 해당되고, 율법가지고 율법 지켜서 천국을 이루겠다는 것은 ‘저희’에 해당돼요.
그런데 둘 사이가 원수 된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원수였으니까 그 유대인들은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하는가? 원수 된 자는 한 명도 구원받지 못하는가? 원수 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뒤에 무슨 단서가 붙느냐 하면,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좀 어려운데요. 아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지만 택하심은 유효하다는 뜻이에요. 인간적으로 복음을 거부했지만, 택하심은 작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 택하심이 무슨 뜻이냐 하면 조상들로 인하여 긍휼, 사랑을 입은 내용이 택하심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택하심의 주체는, 조상들에게 너희 후손들 중 누구누구를 선택하겠다고 택하심의 언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니까 2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단서를 붙이면서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여기 너희가 누구냐 하면 이방인을 말합니다.
복음을 알기 전의 이방인. 그들에게는 긍휼이 돌아갈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방인은 택하지 않았으니까. 택하심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아브라함 자손에게만 해당되지,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해서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택하심의 범주가 따로 있어요. 인간들이 모르는 범주.
인간들이 아는 범주는 뭐냐? 나는 아브라함 후손만 택했고 다른 이방인들을 나는 구원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인간들이 기껏 아는 택하심의 한계이고 정도에요. 그런데 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 더 넘어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적용시켜진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총 수, 천국의 총 숫자를 이스라엘 중에 택하신 자로 한정했던 그것을 하나님의 택하심의 더 깊은 의미를 위해서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거부한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택하지도 아니했다고 알려진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 없는, 당연한 거죠, 후회 없다는 말은 내가 할 당연한 조치를 당연하게 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인은 다 지옥 간다, 가 아니라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할 도리를. 택하지도 않았던 그들에게 은혜를 선물로 줘서 긍휼을 준 거예요.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방인들은 율법도 안 지키고, 아브라함과도 핏줄로 관계없고, 옛날 조상들은 택하심의 대상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긍휼을 입었어요.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왜? 내가 불쌍히 여긴다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구원의 조건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불쌍히 여김에다가 딱 설정을 해버리면 ‘쟤는 왜 구원합니까?’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쟤들은 택하지 않았잖아요. 저들은 이방인이라서 사랑을 입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할 수 없어요. 입 다물어, 이렇게 되죠. 내가 불쌍히 여기겠다는데.
그들이 뭐 불쌍히 여김 받을 짓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잖아요. 그들이 불쌍히 여김 받는 혜택의 대상에 들어갔다면… 굳이 이방인들이 혜택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유대인이 아브라함 자손이 배신해서 그래요. 아브라함 자손이 배신한 덕분에 티오(정원 또는 빈 자리)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원칙을 세웠어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너희든 저희든 원칙은 단 하나, 내가 긍휼히 여기는 것으로 구원하겠다고 최종 낙점을 본 겁니다. 그럼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들, 유대인들도 순종치 않고 이방인들도 순종치 않고 이 세상에는 everybody 순종치 아니한 사람밖에 없어요. 긍휼 줘야 알죠. 긍휼을 안 받았으니까 긍휼에 순종할 줄도 몰라요.
그래서 원칙이 뭐냐?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오직 긍휼만이 사랑만이 천국 백성 되게 한다, 그 뜻입니다.q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