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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신기함

아빠와 함께 2023. 12. 6. 14:30

455강-YouTube강의(잠의 신기함 고린도전서 15:20)20231205-이 근호 목사


제455강, ‘잠의 신기함’. 잠은 매일같이 반복해서 찾아오고 ‘왜 자꾸 잠이 오지?’하는 그런 경험들이 여러분들 평소에 반복해서 계속 주어집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매일 자는 그 잠이 영원한 죽음이 미리 삽입된 현상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보면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여기 6절 끝에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다에서 ‘살아있다’의 반대말이 성도한테는 ‘잠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잠자고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잠에 대해서 나쁘게 보지 않아요. 쉰다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쉰다는 개념은 뭐냐? 낮에 고생깨나 했다는 뜻이죠. 많이 피곤하다는 거예요. 인생은 원래 피곤한 거예요. 피곤해서 하루 자면 한 7시간, 8시간 자잖아요. 그런데 내일 아침 되면 또 깨어나면 피곤한 삶을 살아야 돼요. 계속 잘 수가 없어요. 등이 아파서 더 못 자요. 깨어나서 또 살아야 돼요. 이참에 아예 잤으면, 아예 푹 자면 좋지 않겠는가.

문제는 일상의 잠이 난처한 점은, 쉬었잖아요, 쉬었지만 아침에 해 떠서 잠 깨보면 나에게 어제 피곤을 제공한 그 세계에서 또 다시 본인이 설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성도의 잠은 자고 일어나면 다른 세계에 도착해있어요. 우리는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잠만 잤는데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 부활을 언급하면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예수님의 부활이 보였다 이 말이죠. 보이셨고 그다음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하게 죽는 자만 새 세계에서 다시 깨어나는 하나님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죽음에 합류해야 돼요. 그 죽음에 합류 안하면 백날 자고 깨든지 죽든지 그건 주님의 영광된 부활의 세계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건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똑같은 그러한 죽음, 그 죽음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느냐 또는 거기에 같이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죠.

고린도전서에 역시 부활에 관해서 5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그러니 제가 방금 말을 잘못했어요. 이렇게 크게 말하면 안돼요.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비밀을 말한다.” 그러면 비밀이니까 일반 교과서에 안 나오는 거예요. 신문이나 방송에 MBC, KBS 뉴스에 전혀 나오지 않는 거예요. (속삭이면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다 잠자고 있을 게 아니고 잠만 자는 잠꾸러기가 아니라 나중에 영광스럽게 변화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잠자는 게 좋습니까, 말레이시아 가는 게 좋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복이 있어 이런 혜택을 받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게 비밀이라는 거예요. 비밀은 알아듣는 자만 알아듣는 거예요.

물론 이 세상에 이 비밀 말고 다른 비밀이 많이 있어요. 캄보디아에 투자하시면 10배, 100배 떼돈 벌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비밀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인도네시아 야자나무에 투자하시면… 이런 거 있어요. 하여튼 사기꾼들이 먼 나라에 가요, 먼 나라. 동영상 막 찍고.

그런데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비밀은 뭐냐 하면 마지막 나팔에 우리가 홀연히 다 변화한다는 거예요. 자고 난 뒤에 다시 또 이 땅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거 말고 아예 홀연히 변화하는 것. 나팔소리와 함께.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봐야 그들은 못 알아듣는다, 이 말은 ‘이해를 못한다.’가 아니라 ‘됐고, 난 다른 데 바빠.’ 난 지금 다른 데에 바쁜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잠자는 것을 소원으로 하지 않아요. 자기 성공하는 것을 자기 소원으로 하죠.

자, 이쯤 했으면 관건은 뭐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죽는 죽음이 될 수 있는가?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좀 설명이 필요한데요. 아까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는 마지막 날에 나팔소리죠. 지금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이 성경말씀 하나하나가 나팔소리처럼 들려야 된다 이 말이거든요. 왜냐하면 비밀이 비밀답게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눈뜨고 있어도 잠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이 말씀의 능력이에요.

여기서 좀 난해하지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잠자는 것이 뭐냐? 그 점을 설명할 시점이 되었어요. 잠자는 게 뭐냐? 잠을 잘 때는 눈을 감죠. 눈을 감는다는 말은 눈이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잠 잘 때는 눈이 없어요. 눈이 없다는 말은 내 마음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 내 마음은 내 손에서 떠났다는 뜻이에요, 잠 잘 때.

아무리 나쁜 사람, 흉악한 사람도 잠 잘 때는 잠자는 개처럼 순해져요. 잠자고 있으니까. 인간이 난 체하고 까불거리는 모든 형식으로부터 손을 놓는 순간이 잠자는 순간이에요. 물론 잠잘 때 고급 잠옷입고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잠잘 때는 뭘 입었는지 생각도 안나요. 그냥 가사(假死)상태에 빠지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잠에 참여한다는 말은… 마태복음 6장 22절 말씀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통제하는 내 마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통제하는 내 마음은 잠자는 상태가 되고 에베소서 5장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네게 비췬다고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그다음에 살아있는 말씀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버리면 살아있는 말씀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되어가지고 예수님 자체의 빛이 우리 내부에 빛나게 돼요. 그러면 우리 마음은 내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변화되는 거예요.

말씀과의 만남에서 살아있을 때 이게 되어야 되지, ‘나중에 죽어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깨우겠지.’ 알아서 안 깨워요. 주님은 자신이 준 약속을 깨워요. 약속을 깨우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깨우기 때문에, 또는 다른 말로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는 것은 주께서 성령을 자극해서 성령이 들어있는 자를 깨우는 식이에요.

주님께서는 자기 말씀을 회수하십니다. 내가 너한테 집어넣은 그 말씀을 회수하면서 덩달아 우리가 잠에서 깨게 되죠. 그러면 살아있으면서

성령을 통해 말씀을 들었다는 말은,

내 마음은 내가 통제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아감을 새롭게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밤에 잠을 자든지 뭐하든지 간에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상태가 되고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비록 나이 들어 죽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그 말씀을 회수하고 자기 백성을 회수하면서 주님이 이야기했던 그 비밀의 나팔소리와 더불어서 눈떠보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도달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잠의 신기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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