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강-YouTube강의(만남 창세기 42:23)20231024-이 근호 목사
제449강, ‘만남’. 448강 ‘기억’이라는 동영상에서 하나님이 기억하는 바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말씀드렸고 이번에 449강의 제목은 ‘만남’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의미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만나기 전에도 인간이었고 만난 후에도 인간이고. 만나기 전에도 흙이고 만난 후에도 흙이고. 전혀 하늘의 요소가 나올 리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게 인간의 만남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만남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더 큰 중요한 진지한 만남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만남은 카페에서 만나죠. 진지한 만남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아내들이여”, “남편들아” 할 때 반드시 주 안에서 만나야 돼요. 주 안에서.
언약 안에서 만남이 될 경우에 재미나는 것은요, 창세기 42장 2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이게 왜 재미나는 것이냐 하면, 형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심지어 내 동생을 어느 지역에 팔아넘긴 지도 그들은 관심 없었어요. 그냥 자기 가정에서 요셉을 부재의 상태로 만들면 자신의 존재가 숨을 쉬기 때문에 그걸로 자기들은 오케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제발 안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살았어요. 다시 보지 말자. 나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어느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가인이 사람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 동생의 제사를 받았을 때 여러분들은 가인이 얼마나 마음적으로 힘들었는가를 생각해보세요. 그걸 이해해 주세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것도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 드리면 공평하게 받아야 되는데… 안 받으려면 둘 다 안 받으면 돼요. 그럼 깔끔해요. 속상할 일 없습니다. 하나님이 편애를 한 거예요. 편애가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알던 야곱 아닙니다. 야곱은 그 많은 애들 중에서 요셉을 편애했어요.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요.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이삭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 성향이 아닌… 좋아하는 에서는 자기 손으로 저주해버리죠. 그때 그 아버지의 심정을 또 헤아려야 돼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이 있다는 것은 비교대상이 된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만 있으면 사랑인지 미움인지 몰라요, 둘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쪽을 편애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애 둘이 있으면 하나를 더 좋아하기 마련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하여금 에서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어요. 이유가 첫째로 먼저 태어났고요. 맏이는 아무래도 정성이 더 들어가요. 그런데 뭐 몇 분 사이 아니니까. 두 번째는 아버지의 타입이에요. 사냥 좋아하고. 야곱은 조용해서 샌님 같아서 늘 싫어요.
다시 말해서 이삭은 에서를 자기 분신처럼 느끼고 분신처럼 느끼면 포기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나중에 자기가 눈이 어두워서 축복 줄 때도, 짜고 치고 하는 고스톱 이었죠. 이거 불공정 거래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고기 사냥하면 복 줄게. 차라리 그냥 줘. 그냥 노골적으로 줘도 되는데 구실로, 내가 좋아하는 고기 사냥해오면 복 줄게. 그 틈새를 야곱이 노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사실은 하나님이 노렸죠.
아버지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였잖아요. 그 심정을 따라가는 거예요. 언약 속에 있는 언약 계열의 사람이에요. 이삭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야곱이 아니고 에서였습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가 생겼죠. 한 아내는 덤으로 1+1로 얻은 거예요. 인물도 안 좋아요. 꼴 보기 싫어요. 그러나 야곱은 자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14년 동안 악덕업주한테 걸려가지고 임금체불까지 당하면서도 오로지 only 사랑하는 자를 얻기 위해서 자기 노동으로 세월까지 청춘까지 다 불사르면서 여자를 얻었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뜻을 어깃장 나게 만들어버려요. 야곱은 레아 자식 관심 없어요.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나온 자식을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생겨야죠. 오죽했으면 레아가 이런 잔소리했을까요. 하나님이 안 주시는데 네가 왜 자꾸 앙탈부리느냐. 닦달하느냐. 억지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종이 아니고 진짜 라헬에게서 아이가 나오게 하는데 결국은 애하고 사랑하는 아내하고 바꿔치기합니다. 아내는 죽고 아들은 태어나죠. 그때 라헬도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이런 이야기합니다. 우리 팔자 왜 이래. 자식이 엄마도 없이 태어난 거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슬픔의 자식이라 이름 지었어요. ‘베노니’라고. (창 35:18)
그런데 야곱이 알아요. 이게 하나님 방법이란 걸. 아버지가 자식을, 그것도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란 걸 알아요.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아가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대체해서 집어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이름을 지었어요. 베냐민.
그 전에 요셉이 생겼었죠.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을 때 라헬이 죽었죠. 결국 사랑하는 자의 맏이는 요셉밖에 없죠. 그러니까 열한 아들 다 필요 없어요. 그딴 거 필요 없어요. 오직 한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 아들이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 것과 똑같은 거죠. 요셉이 죽고 난 뒤에 나중에 베냐민 남았잖아요. 베냐민도 요셉 짝이 나도록 만들어요.
오늘 본문은 재밌는 게 뭐냐 하면 이미 요셉은 부재(不在)한 존재, 존재하지 않는 자에요. 형들도 몰라요. 요셉이 국무총리 된 줄 몰라요. 그건 상상이 안되는 이야기에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요셉이 국무총리 되는 것은 죽었다가 부활한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우리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하고 언약 안에서 만나는 주님하고 달라도 너무 달라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나를 예쁘게 보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네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을 우리가 맞이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대화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되죠. 통역이 필요하죠. 그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잊어버린 바 된 요셉과 그 요셉을 버린 형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다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쪽 요셉은 다 알아듣죠. 그런데 다른 쪽 요셉 형들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이 만남, 이 만남이 두꺼운 성경책 전부에요. 이게 통역입니다. 성령이 통역해주지 않으면 한 대목도 못 알아봐요.
달달 외워도 그건 국어시간입니다. 국어시간은 의미 없어요. 작문 시간, 문법 시간 소용없습니다. 기호학, 언어학 다 소용없어요. 성령이 아니면, 다시 말해서 나를 지적하는, 근원적으로 나는 만남의 대상이 아닌 것을 통보해주는 지적이 없으면 이 성경은 헛 성경이에요. 킹 제임스 그거 사기에요.
성령께서 말씀을 통역하시는데 어떻게 통역하시는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가서 경유해서 나온 해석으로 통역을 해주십니다. 아까 448강처럼. 너는 죄 맞다. 이것도 죄, 저것도 죄 맞다. 하지만 내가 그 죄에 대해 십자가 피를 보고 기억치 아니하리라. 이게 바로 통역의 핵심입니다. 이 만남은, 성령 안에서, 언약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 안에서,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과 거처를 함께 하기 위해서 만나는 겁니다. 그 만남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