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기억

아빠와 함께 2023. 10. 25. 08:06

448강-YouTube강의(기억 히브리서 8:12)20231024-이 근호 목사


제448강, ‘기억’. 기억의 장치가 인간 두뇌 안에 있죠. 해마라고 해서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만 기억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도 기억장치가 있어요.

하나님의 기억장치가 뭐냐? 제사라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0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But those sacrifices are an annual reminder of sins,(NIV)

But in those sacrifices there is a remembrance again made of sins every year.(KJV)

But in those [sacrifices] there is a reminder of sins year by year.(NASB)

그러나 제사에는, 해마다 죄를 회상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표준새번역)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우리말성경)

그런데 해마다 제물을 바치면서 죄를 되새겨야 하는 것은(공동번역)

제사를 할 때 사람들의 정성을 받는 게 아니에요. 죽어야 될 걸 받아요. 인간은 정성을 바침으로서 내 죽는 것을 유보해달라는 식으로 뇌물을 바치죠.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는 겁니다. ‘바칠 것 바쳤으니까 저 더 다치게 하면 안돼요. 저 아프게 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달라는 거 드렸으니까 제 인생 힘들게 하면 안돼요.’라는 식으로 딜(deal)을 한다 하죠, 거래하는 식으로 바치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바알한테 우상 숭배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그렇게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기가 안 다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약속의 땅에 이미 들어왔거든요. 다시 이 땅에서 나가기가 싫은 겁니다. 지키고 싶은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땅 없이 집 없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 땅이 원래 하나님 땅인데 사람들은 그걸 자기 땅으로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자기 땅으로 생각해서 이걸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압박을 가합니다. 압박을 가하는 그 동기가 있어요. 약속의 땅에 와보니까 주변 나라가 더 잘 살아요. 그래서 조사를 해본 겁니다. 하나님 믿는 우리보다 저쪽이 왜 더 잘 사냐?

보니까 신이 달라요. 신이 어떻게 다르냐 하면, 약속의 땅에 원래 있던 신들을 섬긴 겁니다. 그때 사람들은 ‘아, 땅마다 주인이 있는데 주인이 그 땅의 신인데 우리는 애굽에서 알던 외래 신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외래 신과 원래 토착민의 신하고 안 맞을 수가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주변 나라에 대해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제공한 것은 부자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균등하게 되는 걸 말합니다.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나 그리고 가진 자라 할지라도 얼추 비슷하게 사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모든 땅 주인이 여호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땅이 없어요.

그런데 주변은 자기 소유가 있어요. 자기 재산이 있다고요. 재산이 있으니까 재산은 남의 재산과 자기 재산을 늘 견주어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재산 관리해준다고 해서 고아나 과부의 재산을 자기가 넘봐서 자기 재산으로 전환시키지 아니하면 자기 재산이 늘어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노동력은 한계가 있고, 일해서 돈 버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닌 이상 기본 농경시대에서는 고만고만해요. 농사기술이 뛰어나고 그런 거 뭐 없습니다. 농기구가 발달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먹을 만하고 살만하거든 됐다는 게 여호와의 입장이고, 토착민들이 믿는 바알 신은 그게 아니었어요. 상대방 것을 빼앗지 아니하면 내가 부자 안 된다. 부자가 안 되니까 자기한테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야망의 결핍, 욕심의 부족함을 늘 느끼는 겁니다.

참을 수 없죠.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벌여서 노예를 가지고 노예가 대신 노동하고 자기는 또 전쟁기계를 구입해서 또 더 넓은 영토를 추구했던 것이 주변 나라들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영토 확장 전쟁에 나섰던 거예요.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딱 보니까 여호와 믿는 것보다 다른 바알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잘 산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걸 어디서 확인하느냐 하면 무기가 월등해요.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율법 지키라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나라에서는 군대도 많고요, 군사 무기도 철기 문화에요. 청동기하고 철기하고 시합하면 청동기는 다 구부러지죠, 무기가. 재질이 다르니까.

그러니까 항상 위협을 느끼는 겁니다. 쳐들어오면 늘 당할 것 같아. 무기 체제라든지 모든 것이 너무나 하찮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제사장은 그냥 제사하는 것 믿고 선지자 믿고 그냥 여호와 믿으라. 믿으면 뭐 대책 나옵니까? 실제적인 힘이 있어야지, 힘은 없는데 그냥 믿으래.

그래서 차라리 그들은 힘을 채택하는데 방법은 뭐냐? 바알 신을 섬기는 거예요. 바알 신은 인간이 조정하기에 따라서 응답이 재깍재깍 이루어지는 신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신. 바치면 복 받는 거죠. 누가? 바친 내가 복 받아요.

바알이 좋아한다? 바알은 안 좋아해요.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은 여호와 좋기 위해서 백성이 된 거예요. 내가 좋기 위해서 결성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바알이나 다른 신들은 신을 선택하고 결정한 내가 잘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을 믿는 겁니다. 본성상 어느 신이 친근할까요? 우리의 본성상. 바알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양다리 걸친 겁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속에는 바알 요소를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에게 굉장히 실망을 했는데, 레위 사람들도 문제가 있어요. 그들이 드리는 제사 있잖아요. 이 제사가 이스라엘이 그렇게 망할 줄 알고 드리는 제사였던 겁니다. 제사는 살라고 주는 게 아니고 죽여서 주거든요. 왜 죽여서 주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죄성으로 나기 전부터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미리 제사 속에 담기게 한 겁니다.

그걸 바로 율법이라 하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본성을 직접 겨냥해요. 따라서 율법과 가까이 하게 되면 한 꺼풀 두 꺼풀씩 우리의 본성이 드디어 들춰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생각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의 기억법이에요.

그러니까 이 제사가 반복된다는 말은 제사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죽어나가고 죽어나가고…, 양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양, 소, 염소, 계속 죽어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입니다. 각혈하는 사람이 멈춥니까? 기침하는 사람이 안 멈추죠. 죄 씻었다고 죄가 안 나옵니까? 끊임없이 쉬지도 않고 죄가 나와요.

그러면 이 제사가 스톱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제사가 스톱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너에게 죄가 안 나오는 조치를 했다는 뜻이거든요. 스톱이 되니까. 그게 우리에게서 죄가 안 나오는 게 아니에요. 히브리서 8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드려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제사 자체를 통해 하나님의 것이 이스라엘과 접촉이 되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러내는 데에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이용한 거예요. 아무리 해도 죄밖에 안 나오는 것들을 통해서, 내가 왜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제사법이라는 것을 제공했는지 제사법의 그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짓는, 한없이 죄짓는, 아주 더 깊이 죄짓는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죄를 진열하고 토해내는 역할만 했을 뿐이지, 그거 했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그럼 구원은 어디 있나? 율법, 제사법 자체 내에서 구원이 이루어져야 돼요. 제사법의 구원.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고 제사법 자체의 구원, 그 안에 마지막 제사를 끝낼 분이 오십니다. 제사를 끝냈다 하는 것은, 네 죄에 대해서 내가 죄값을 묻지 않겠다는 그 시점이 와요. 그 결정적 시점이. 예수님이 제사장 되시고 제물 되셔서 다시는 너희 죄를 위해서 바칠 제사를 없애버렸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다시 속죄할만한 제사는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이 속죄한 완성한 제사법을 위해서 구약에는 이스라엘, 신약에는 성도를 이용하신 거예요.

신약에 와서 더 깊은, 구약보다 더 깊은 죄를 끄집어내시면서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걸 들추어내는 일에 참여케 하신 자들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죄는 지었는데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완성이 작동하는 대상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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