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강-YouTube강의(온전함 히브리서 11:40)20231107-이 근호 목사
제450강, ‘온전함’. 온전함은 사람들의 여망이죠. 자기가 자기 볼 때 완벽함, 빈틈이 없음, 흠 잡을 데가 없음. 우리의 소망인데 이 소망은 선악체계에서 나온 소망이에요.
선도 알고 악도 아는데 나는 선하고 싶은데 내게 무엇이 악한 것일까? 아, 그게 악한 거구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한 것은 선하니까 그것은 그냥 두고 악한 것만 치료하시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생기죠.
병원에 가면서 ‘온 전신 다 뜯어고쳐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 싫은 것, 내가 아픈 그 부위만 고치기 원하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아무리 병원에 가도 의사가 책임자가 아니고 ‘내 인생 책임자는 역시 나다’라는 것을 인간들은 아주 고집스럽게 지킵니다. 그렇게 해서 치료가 끝나면 일단은 온전함. 그런데 한 2년 뒤에 문제 생기면 또 ‘아, 이거 온전치 못하네.’라고 생각하죠.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원래부터 나는 온전하게 태어났는데 약간의 문제점이 살다 보니까 생겼다는 거예요. 그 부위만 수술하거나 떼어 내거나 치료하게 되면 원래대로의 온전함을 유지하게 되고 그럼 난 I am 온전함. I am 신뢰. 나는 온전함. 남한테 대외적으로 자기 온전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온전해지고 싶어 할까요? 그건 쉽게 얘기해서 남한테 기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죠, 뭐. 다른 거 뭐 있겠어요. 나 너한테 지기 싫다, 뭐 그런 종류의 생각으로 하는데요. 이게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잘못되었느냐 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온전하지를 않아요. 그 이유가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해서 포로 잡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해 포로 잡혔다는 말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생각을 할 때 항상 자기가 자기를 점검하면서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잘 했냐, 못 했냐를 따질 군번도 안 되고 따질 입장,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공중에 참새가 있잖아요. 참새가 자기 행동을 자기가 측정합니까? 자기가 따집니까? 아니죠.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겁니다. 만약에 참새가 자기 행동을 논한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도전이고 모독이냐 하면 친히 기르심에 대한 모독이에요. 주께서 전적으로 다 길러줬는데 마치 본인이 본인 인생을 책임지는 것처럼 관리해야 되는 것처럼 하는 이것은 딴 살림 챙기는 거예요.
어린 초등학생, 그리고 아직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부모와 집에 있을 때 애가 넘어지는 건 당연하고요. 먹다가 물 쏟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그럴 때 부모가 “얘야, 조심해. 조심해서 먹어야지, 물 쏟으면 되겠어, 식탁에?” 이렇게 하면서 닦아주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실수해서 딴 짓하다가 식탁에 물을 쏟았다. 그때 애가 벌떡 일어나서 “어머님 아버님, 죄송합니다. 제가 온전치를 못해서 이렇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엄마, 아빠 기분이 어떻겠어요?
기특하구나, 이렇게 나오는 겁니까, 남의 애 키우는 거예요? 이건 뭐야, 이게? 하숙생이야, 벌써부터? 유치원부터 하숙생 컨셉이야, 지금? 뭐야, 이게?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애 참 교육 잘 시켰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의 돌봄에 대한 도전이 되겠죠. 굉장히 기분 나쁜 거예요. 벌써부터 자기 독립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바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온전함과 주님이 생각하는 온전함이 엄청나게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의 온전함을 100% 집어넣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온전치 못함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그런 일을 벌이십니다.
주님이 주신 것만으로 값없이 주신 것만으로 온전한데 네가 행함으로 네가 달성한 것을 한번 비교해보란 말이죠. 주께서 주신 것과 네가 달성한 것을 한번 비교해보라는 거예요. 과연 네가 거기서 온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늘 대조시키는 방법으로 주님의 온전함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증거가 있어야겠죠. 히브리서 11장 40절, 무척이나 어려운 대목인데 많은 설명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39절, 40절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40절 말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더 좋은 것? 여기까지 이해되는 것 같아요. 역시 좋은 하나님이 좋은 것 준비했구나, 되는데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이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씀이냐.
아니, 열심히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줘야 되는 것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려주는 것이 너무나 상식과 이치에 합당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너 말고 다른 사람 준비했다는 거예요.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준비했는데 그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좋은 것이 없으면 넌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치 못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전치 못한 너희들아 기다려라. 뭘요? 주께서 친히 준비한 그 그룹, 그 무리들이 이 알게 되었던 그 좋은 것과 네가 평소에 열심히 살아서 좋다고 여긴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기다려라. 내가 알려주마.
그래서 예비라는 말,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우리, 오늘날 신약의 성도가 등장하지 아니하면 “저희” 곧 구약의 신앙인들, 성도들은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와아, 이거 참. 사람 대 사람으로 뭘 차이를 두나. ‘누구는 뭐 온전치 못하고 같은 인간인데 왜 저들은 온전하지?’라는 의문점을 품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뭐야, 저들은 뭐야? 우리는 뭐고?’ 이렇게 되는 거죠.
구약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온전한지가 38절에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 특히 37절 같은 경우는 더 심하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온전하다고 뭐 쳐줘야 되는 것 아니에요? 이 정도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이 정도 수난 받고 고난 받으면 짱이에요, 대단해요, 이렇게 칭찬해줘야 되잖아요. 이게 온전치 않다는 거예요. 이게 온전치 않다는 겁니다. 아니, 이 정도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치 않다면 도대체 온전한 레벨, 온전한 수준은 뭘 어떻게 더 해야 되는가.
신약 성경에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약은 자기가 겪었던 것이 자기 신앙의 증거가 된 거예요.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뻔뻔스럽게도 증거를 본인에게서 찾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증거를 찾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피에요.
구약 성도들 고생했던 것 맞습니다. 주님께서 고생시켰고 자기는 감당했고 이겨냈다는 것이 다 맞는 말인데 미흡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형이기 때문에. 모형이 아무리 정교해도 실체하고는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들은 실체가 오길 기다렸고 신약은 이미 실체를 만났어요. 히브리서에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것.
고생했다고 죄 사함 받는 거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교회 나온다고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아시겠죠? 목사님이 잘 가르치니까. 인간은 오직 내 행동을 주시합니다. 주시하는 것, 주시하세요. 늘 주시해야 됩니다. 하지만 이게 온전치 않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자기 행동을 주시하세요.
그리고 주님의 피와 내 행동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우리는 예수님 피의 증거를 가졌지, 내 잘남의 증거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뻐하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